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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2)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설 교 >
믿음의 노래
시 23:1-6 / 곽창대목사
성도들이 시편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시에 표현된 시인들의 기쁨과 슬픔과 감사와 고뇌의 삶을 우리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감하는 것은 인생들의 삶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즉 시인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시편을 정말 좋아하는 것은 시인들이 자신이 당면한 갖가지 문제들을 하나님께 내어놓음으로써 결국 간구와 찬송과 경배로 승화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즉 시편은 좋은 간증문 구실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을 보면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셔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는 간증을 들을 때 우리가 크게 위로와 용기를 얻는 것처럼 성경으로 기록된 시편이야말로 하나님께서도 기뻐 받으신 탁월한 간증이며 그래서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편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을 때 이렇게 읽으시면 더 큰 은혜를 얻을 것입니다.
1) 우선 시인들이 당면한 그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그래서 그 상황들이 시인들을 어떻게 압박했는가?
2) 그런데 그 상황들을 극복하기 위해 시인들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 과거를 회상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더 나아가서 자기 조상들에게 무엇을 하셨는가를 생각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회고했다.
-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따라 밝은 미래를 전망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였다. 즉 현재를 넘어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미래의 축복을 붙잡게 되었다.
3) 그래서 시인들은 지금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때를 바라보며 찬송과 경배를 올렸고 그 때가 속히 오기를 간구했다! 혹 자신의 조급함과 불신앙을 깨달았을 때에는 진지하게 회개했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했다.
한밭교회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 속에 있습니까? 그 상황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평안합니까?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십시오!
혹 어려운 형편에 처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 형편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시편의 시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베푸셨던 은혜의 역사들을 회고해보세요. 그런 다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밝은 미래를 전망하십시오. 하나님 약속의 핵심은 오늘보다 내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소망이 분명해지면 그렇게 크게만 보이던 현실의 문제가 점점 작게 보일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통제하고 계시며 결국 당신의 자녀들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름에 시편 읽기를 권합니다.
오늘 시편 23편을 봉독했습니다. 이 시편은 누구나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여름 동안 주일마다 좀 상세하게 강해하려고 합니다. 특히 힘든 상황 속에 계신 성도님들에게 시편 23편의 강해가 위로와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시편 23편의 서론으로서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다른 시편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2) 시편 23편의 내용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으며 그 중심주제는 무엇인가?
3)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이 이 시에서 자기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1. 다른 시편들과의 관계
시편은 구약시대 수 세기 동안 여러 사람들에 의해 창작되었고 기록되어서 후대로 전수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시대나 후대사람들에 의해 노래로 불려졌습니다. 특히 성전예배 시에 찬송으로 불려졌는데 주전 3세기경에 성전봉사자들에 의해 최종 편집이 되어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으로 확정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시편들을 편집할 때 아무렇게나 편집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편집하고 배열한 의도가 분명히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시편들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1) 시 1편
시편의 서론으로서 모든 시편의 방향을 제시하는 표지판 구실을 합니다. 이 시의 중심주제는 ‘누가 행복한 자인가?’입니다. 행복한 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사는 자,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2절이 중심절입니다.
2) 시 2편
그런데 뭇 인생들이 헛된 길, 악한 길,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아들(메시야)을 준비하셨습니다(7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시는 행복을 누리려면 그의 아들을 환영해야 한다(입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2절).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누군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할 때 비로소 행복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 시 22편
약속된 메시야(하나님의 아들)가 오셔서 구원의 길을 어떻게 닦으실 것인지를 예언한 시편입니다. 특히 이 시편을 보면 메시야께서 당하실 고난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1,000년 전에 다윗이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1, 6-8, 14-16, 18절). 그러므로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이 자신이 당한 곤경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성령께서 다윗의 경험과 입을 빌어서 장차 오실 메시야가 당하실 고난을 미리 예언하게 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이 메시야의 고난만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백성들에게 위대한 구원이 도래할 것도 예언합니다(27절 이하).
4) 시 24편
시 22편의 장소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갈보리 언덕이라면 시 24편의 배경은 메시야께서 최후 승리의 왕으로 등극하실 영광의 시온산(3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안치된 언약궤나 시온산 위에 세워진 성전의 건축으로 일부 성취되었지만 시온산의 한 부분인 감람산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모든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것입니다. 9-10절이 중심절입니다.
5) 시 146-150편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부르는 이 마지막 시편들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는 찬송으로서 최후의 승리자들이 부르게 될 감사와 승리의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시편들을 종합하면,
- 시 1편: 복 있는 사람은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 시 2편: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께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환영해야(입을 맞추어야, 영접해야) 한다!
- 시 22편: 그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의 승리에 참여하게 된다.
- 시 24편과 146-150편: 더 나아가서 그 예수님의 재림으로 누리게 될 성도의 완전한 승리를 믿고 지금 여기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향해 할렐루야를 외쳐야 한다!
150편의 시편들 가운데 시 23편은 위의 시편들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시 22편과 24편 사이에 있는 23편은 인생의 새로운 시작과 마지막 승리 사이에서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 그려주고 있습니다.
2. 시 23편의 내용 전개(흐름)와 중심주제
1절: 이 시의 서론이자 중심 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자인지를 고백합니다.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자가 되셔서 자기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를 다음 절들에서 묘사합니다.
2절: 장소는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 가입니다. 때는 초봄에서 초여름까지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겨울에 비가 옵니다. 높은 산에는 눈도 내려 쌓입니다. 초봄에 날씨가 풀리면서 눈이 녹아 내리면 강과 시내의 수원이 풍부해지고 평지 쪽에는 싱싱한 초지가 형성됩니다. 그러면 목자는 자기의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양들에게 싱싱한 풀을 뜯어 먹게 하고 시원한 물을 마음껏 마시게 합니다. 이때 초봄에서 초여름까지 평지에서 양들은 크게 성장합니다.
3-4절: 때는 여름철입니다. 이때는 건기철로서 비가 거의 내리지 않습니다. 평지의 풀은 말라버립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풀이 있는 산 계곡으로 이동합니다. 계곡으로 가야만 시내가 흐르기 때문에 그 길이 아무리 험해도 그 길만이 양들이 사는 길입니다. 목자는 그 길을 알기에 양들을 계곡으로 인도합니다. 특히 계곡에서 사나운 짐승들을 만나 위기에 처할 때도 있지만 목자가 양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5절: 이제 계곡을 벗어나 고원(산정상)에 다다르게 됩니다. 거기서 양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넓은 초장을 만나게 됩니다. 상이란 영어로 table인데 식탁을 뜻합니다. 때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이때 양들은 휴식하면서 최대의 성장을 합니다(내 잔이 넘치나이다!).
6절: 본부 목장으로 빨리 하산해야 합니다. 이유는 팔레스틴의 가을은 아주 짧고 이내 겨울이 찾아오기 때문에 서둘러서 평지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 평지의 본부목장에는 목자가 모든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거기서 양들은 겨울을 편안하게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 본부목장을 ‘여호와의 집’으로 시인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 23편은 목자가 양떼를 이끄는 한 해의 과정과 성도의 인생여정을 대비시켜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시입니다. 물론 5-6절에는 다른 시상이 중첩되어 있기도 합니다. 나중에 강해하면서 이 부분을 상세하게 다루겠습니다.
이 시의 핵심주제는 목자 되신 주께서 성도의 여정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그 여정 가운데 성도들을 친히 보호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으로 넉넉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주님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3. 저자 다윗은 누구인가? 이 시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이 시의 표제를 보면 이 시의 저자가 다윗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 다윗이 이 시를 지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시에서 인생 전반을 품위 있게 관조하는 다윗의 완숙함을 읽을 수 있으므로 아마도 다윗의 인생 말년에 지나온 생을 회고하면서 이 시를 지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내세우지 않고 단지 하나님 앞에서 한 마리 양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양이며 하나님은 성실하신 목자요 완전하신 목자라고 노래합니다.
양은 어떤 존재입니까? 성경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양의 특성을 적어도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자기 방어력이 전혀 없는 연약한 동물입니다: 사자나 늑대나 들개들을 만나면 대항하기는커녕 겁이 나서 도망가지고 못하고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2) 무리를 이탈하여 자기 마음대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고집쟁이 동물이고도 합니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그래서 풀을 따라 낭떠러지로 내려가다가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면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울기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목자가 찾아서 안고 올라와야만 합니다.
3) 먹을 풀이나 물도 스스로 찾을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 가로 인도해야 합니다.
4) 성격이 급해서 자기들끼리 잘 싸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중재해야 싸움을 그치고 조용해집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양은 목자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철저히 목자에게 의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을 그 같은 양으로 고백했다는 것은 대단한 신앙고백입니다. 소년시절 양을 쳤던 경험이 있었던 다윗은 양의 행복이 목자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양 같은 자신에게 하나님은 친히 완벽한 목자가 되셔서 자기를 가장 행복한 길로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시에서 하나님을 선하시고 완전하신 목자로 자랑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에서 다윗의 지난 생애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4절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5절의 ‘내 원수의 목전에서’ 등의 구절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생애를 보면 정말 숱한 곤경을 만났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거쳤습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비난과 박해를 받았고 반역과 배신을 경험했었습니다. 큰 죄도 범했습니다. 밧세바와 간통을 했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 홀로 남겨 전사하도록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인생의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도우셔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고 감사의 시를 쓴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열어주실 놀라운 미래를 전망하면서 확신에 찬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시를 의역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 목자이며 저는 주님의 양입니다. 그러니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거기서 제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의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셔서 저를 보호하시고 치료하시고 풍성한 은혜로 채우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을 기대합니다.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그 날을 소망합니다. 주님 때문에 저는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합니다.”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절로 지킵니다. 맥추감사절은 상반기 6개월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날임과 동시에 하반기 6개월도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다지는 날입니다. 이 감사절기에 시 23편을 묵상하면서 우선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처럼 지나온 날을 회고하면서 감사와 찬송을 주님께 올려야 할 것입니다. 다윗처럼 미래를 주님께 맡기는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저 평범한 목자가 아니라 최고의 목자, 완전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살리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부활하셨고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셔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집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저는 행복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더욱 행복할 것을 확신하는 것은 제가 주님의 양이며 주님은 저의 완전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주님 때문에 행복을 노래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참된 만족과 안식
시 23:1-6 / 곽창대목사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두메산골 출신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든지 가난한 집안의 자녀가 도시에 나가 큰 부자로 성공했을 때 쓰는 속담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이 같은 신분 상승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류층 중산층 빈곤층 사이의 계층 구분이 뚜렷해졌을 뿐 아니라 빈곤층이 중산층으로 상승하기는 아주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더구나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떨어지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과 빈곤층 자녀들의 학력수준은 상당한 차이가 나서 아무리 정부에서 평등교육을 강화한다고 해도 그 격차를 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가난하여 자녀 공부를 제대로 뒷바라지 못하면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출세의 길도 막히고 그러면 가난과 불행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행복이 경제력에 좌우 된다는 것이 맞습니까?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할 가장 큰 이유도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그래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부자들과 높은 지위에 앉은 자들은 평안하고 행복할까요?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할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참된 만족과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물론 제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여러분들은 충분히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이 시간 다시 들으셔야 합니다.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기고 또 새겨야 할 아주 중요한 주제이며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2절을 강해하겠습니다. 1절에서 자자인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완전하고 영원한 목자가 되셨기 때문에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하다고 노래했습니다. 2절에서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떤 축복을 베풀고 계시는지를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다윗)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때는 이른 봄입니다. 이때 양들의 오전 일과는 대충 이렇습니다. 양들은 아침 일찍 목자를 따라 풀밭으로 나갑니다. 거기서 새벽이슬을 머금고 있는 싱싱한 풀을 서너 시간은 족히 뜯어 먹습니다. 오전 9-10시 경에 배가 잔뜩 부른 양들은 초장에 엎드려서 천천히 소화를 시킵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양들은 목자를 따라 물가로 이동하여 물을 실컷 마십니다. 이렇게 해서 초여름까지 양들은 평지 초장에서 건강하게 발육합니다.
금방 말씀 드렸듯이 이때 양들의 건강한 성장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싱싱한 풀과 시원한 생수입니다. 본문의 ‘푸른 풀밭’이라는 단어는 새로 돋아난 풀들로 형성된 싱싱한 목초지를 뜻합니다. ‘쉴만한 물가’는 웅덩이에 고여 있는 죽은 물이나 흙탕물을 일으키며 쏟아 내리는 급류가 아니라 깨끗하고 시원한 생수가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가를 가리킵니다. 이 같은 최적의 환경 속에서 양들은 최대의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양들이 스스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찾아나선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그곳으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싱싱한 풀과 시원한 생수는 목자가 제공해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명과 건강에 꼭 필요한 신령한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공급하시는 신령한 양식이 무엇일까요? 세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성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최고의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팔레스틴 지역은 건조지역으로서 모래밭이 대부분입니다. 평지라 하더라도 초원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목자는 집 가까이에 초창이 될만한 땅을 겨우내 일구어 놓습니다. 큰 양떼를 소유한 목자는 멀리까지 초지를 확보해둡니다.
양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목자를 따라와서 넓게 펼쳐져 있는 풀밭에서 풀을 마음껏 뜯어먹고는 배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만족한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양들의 건강한 성장과 만족한 휴식을 위해 목자가 겨우내 초지를 가꾸느라 땀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께서도 성자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시기 위해서 긴 세월 동안 열심히 준비하시고 수고하셨습니다. 급하게 아들을 보내시면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에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메시야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그 후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양육하시고 훈련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점진적으로 밝히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홀로 준비하셔서 정한 때에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한 번은 빈들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 장정만 5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빈들을 풍요의 들녘으로 바꾸셨습니다!
다음 날에도 군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시 경험하려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육의 양식을 더 이상 공급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니 자신을 받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요 6:47-51)『[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기 때문에 자신을 먹어야 영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먹는다는 것은 믿는 것을 뜻합니다(47절). 모세시대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었지만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주로보내신예수님을생명의떡으로믿고그예수님을마음에받아들이면영생한다는것입니다.
여기서 떡으로 비유한 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하는 것이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누워서 떡 먹기’라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을 구원주로믿고영접하는것은너무간단하고쉽다는것입니다.
또 보통의 떡은 한 번 먹고 나면 얼마간 배가 부르다가 소화가 되면 다시 배가 고프지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한 번 마음에 영접하여 모시면 영원히 배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8)『[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의 제자가 되면 예수님께서 참된 만족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시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누이신다’는 의미입니다.
‘눕는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배를 땅에 대고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나귀 같은 짐승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지칠 때 주인이 멍에와 짐을 풀어줌으로써 땅에 엎드려 쉴 때 쓰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양의 습성을 조사해보면 양들은 아주 안전하고 아주 만족스러울 때만 배를 풀밭에 깔고 눕는다고 합니다.
• 양은 겁이 많은 동물이라 늘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곁에 있어야 안심하고 눕습니다.
• 주위가 소란할 때든지 동료 양들이 서로 싸울 때는 눕지 못합니다. 즉 변화하는 환경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동요합니다. 이때도 목자가 개입하여 주변 환경을 정돈할 때 비로소 안심하고 눕습니다.
• 쾌적한 풀밭이 아니면 잘 눕지 않습니다. 풀밭에 양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기생충이 서식하든지 독초나 가시덤불이나 딱딱한 나뭇가지들이 널려있으면 양들은 눕지 않습니다. 목자가 질이 좋은 풀밭으로 인도해야 눕습니다.
• 배가 고플 때도 눕지 못합니다. 싱싱한 풀을 마음껏 뜯어먹어 배가 불러야 눕습니다.
이처럼 양들이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좋은 목자 때문입니다.
양들이 배불리 먹고 휴식한 다음에는 2차 소화를 하기 위해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 한다고 합니다. ‘데이비스’라는 분이 ‘완전한 목자’라는 책을 썼는데 중동에 가서 실제로 유목민들을 따라 다니면서 경험한 것을 쓴 책입니다. 거기에 실린 내용입니다.
목자가 양떼를 데리고 물가로 인도했지만 양들이 물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맞은편 바위 위에 길 잃은 개 한 마리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개가 두려워서 양들이 물가로 내려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돌멩이를 줄에 묶어 몇 번 돌린 후 개에게 던져 개를 쫓아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양들은 물에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개가 서있던 자리에 목자가 서있는 것을 보고서야 물가로 내려가서 물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들도 양과 같아서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불안하여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고통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영원하고 완전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영원한 안식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유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죄와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파하시고 온전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들개가 서있던 자리에 목자가 서있음으로써 양들을 안심시키고 시원한 생수를 마음껏 마시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임을 알고 확신할 때 거기서 우리는 참된 만족과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쉬기 전까지는 자기에게 참된 안식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살벌한 세상,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인생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생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 복음의 제일 가는 특성은 안식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안식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 비로소 참된 만족과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물이기 때문입니다. 떡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이 아주 쉽듯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결코 힘들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돈이나 권력을 의지해서는 참된 만족과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대신에 온전한 승리자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하면 영혼의 참된 만족과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안식을 주시려고 보내주신 최고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모시시오! 그래야 참된 만족과 안식을 누립니다.
2.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최고의 양식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55:1-2)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 예언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셔서 물 길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4:1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리고 얼마 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외쳤습니다.
(요 7:37-39)『[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바로 전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곧 강림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요 14:16-17)『[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26-27)『[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령 강림을 약속하신 다음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후에 승천하시면서 또다시 성령님의 강림을 약속하셨습니다.
(행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즉시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성령님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도했습니다. 한 열흘쯤 되었을 때 그 때가 오순절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성령님을 받은 제자들은 이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만족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제자들이 되었으며 어디서든지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했던 베드로가 군중들에게 했던 첫 설교의 주제도 성령님을 받아야 비로소 참된 만족과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행 2: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8-39)『[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여러분, 성령님을 받는 것, 아주 쉽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즉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믿는 자의 마음 속에 거주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 영생하는 사람이 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성도의 삶은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양들이 싱싱한 풀과 시원한 생수를 충분히 먹어야 건강하게 성장하듯이 성도는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건강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합니다. 그럴 때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 때문입니다.
(갈 5:22-23)『[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어떻게 하면 성령님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아주 쉽습니다. 양들이 물가로 내려가서 물을 마시기만 하면 되듯이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충만을 사모하며 기도하면 됩니다.
(눅 11: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님으로 충만하기 위해 고행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는 언제 어디서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충만을 사모하면서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최고의 양식인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우리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게 하십니다. 생수의 강이 넘쳐흐른다는 것은 내 자신이 능력 있게 살 뿐 아니라 남까지도 살리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기도하셔서 성령님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참된 만족과 인식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됩니다.
3.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최고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지혜의 말씀을 주십니다.
(시 19:7-11)『[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성자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요 5: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성령님의 말씀도 진리의 말씀임을 예수님께서 보증하셨습니다.
(요 16: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베드로 사도는 그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성도들이 거듭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벧전 1:23)『[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했습니다.
(롬 10:8)『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딤후 3:15-17)『[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양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슬을 머금은 싱싱한 풀을 배불리 먹습니다. 낮에는 시원한 생수를 마음껏 마십니다. 그래서 양들은 이른 봄에서 이른 여름까지 최대의 성장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혼의 양식으로 주신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섭취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 성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큰 평안입니다.
(시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써 주님 주시는 참된 만족과 안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죄 두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렘 2:1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여러분, 세상이 약속하는 만족과 안식은 가짜입니다. 마치 물을 채우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참된 만족과 안식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님으로 충만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을 충분히 섭취할 때 우리의 영혼은 참된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
시 23:1-6 / 조용기목사
<서 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회사에서 사람을 고용할 때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경력이 화려해도 사람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용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속마음을 보십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5절로 13절에 보면 “내가 야훼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야훼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야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야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야훼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그는 별볼일 없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데려와도 별볼일 없으니까 양이나 치고 있으라고 했다니까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하기를 “이미 지나간 아들들은 택하지 않고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야훼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야훼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여덟 아들을 다 끌고 나와서 하나님의 종 사무엘에게 보여도 낙제를 했는데 사람보기에는 아주 형제들 중에 외소하고 잘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별볼일 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에 사무엘에게 인사도 시키지 않은 그 아들을 하나님이 선택을 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 속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므로 우리 자신이 어떤 속사람이 되어야 될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본론>
1. 나는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만 한다
자기가 나는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계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어야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여러분은 영을 가진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여러분인 것입니다. 한정된 차원에서 하나님처럼 말하고 창조하고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을 가져오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으니까 하나님은 영이지 육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영이므로 영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차원의 세계속에 속하며 삼차원적인 물질세계를 다스리고 창조합니다. 어느 정도의 면에서는 여러분은 하나님과 같으시므로 여러분도 환경을 다스리고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로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져서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복을 주시고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어요. 완전히 과학적으로 발전시켜서 땅을 정복해서 우리가 원하는데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땅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만 다스릴 뿐 아니라 살아있는 동식물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다 다스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손에 의해서 만물이 정복되고 발명되고 발견되고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IT제품을 만들고 핸드폰을 만들고 하나님이 그것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과 들에 있는 짐승들을 다 다스리고 다 훈련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닮은 영적인 사람으로 다스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들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어놓고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해서 지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면은 하나님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엄청나게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없이는 하나님이 우주에서 계신 것이 재미가 없어요. 여러분이 있어야 재미가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보면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천하 만국에 내세워서 하나님 자랑을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자랑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을 자랑해야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10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예비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를 직접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준비를 하세요. 너무나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무나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위해서 깜짝 놀라게 예비해 놓으시고 그것을 성령으로 보여주므로 여러분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 부르짖으면 여러분 위해서 응답을 하시되 깜짝놀라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지를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것봐라. 내가 너를 위해서 예비해 놓았지 않느냐. 놀라게 할 정도로 여러분에게 예비를 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데 내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물론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모두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택해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분들이에요. 그러나 마음에 크게 드는 분도 있고 좀 덜 드는 분도 있고 하니까 크게 마음에 들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좋은 것 여러분에게 해주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관용과 겸손의 사람으로 평생에 하나님이 다윗을 좋아하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사 13:22)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사 13:36)든 사람인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결혼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하고 친구를 사귀어서 보지만 자기 마음에 딱드는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내내 후회하고 내가 좀 더 기다릴 걸 좀 더 좋은 사람을 택할 걸...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음에 드는 사람, 그런 사람을 짝을 지어서 살면은 즐겁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하나님이 택해서 세운 것은 하나님 마음에 꼭 맞았기 때문에 택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내가 늘 말씀 드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서 세우신 것입니다. 구원해 달라고 신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고 고행을 하고 힘을 다해서 섬겨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우리들 내던져버린 사람들 같은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따라와서 우리 등허리를 두들겨주고 쓰다듬어 주고 이름을 불러주면서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마음에 탁 맞는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성령으로 마음에 감동을 주시므로 여러분이 마음에 감화 감동을 받아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오늘날처럼 교회에 와 앉아 계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것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배려를 받은 사람들이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발을 동동 구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이 하나님께 감사를 하면은 정말로 더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보면은 다윗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고 자기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시기 때문에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을 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의 기르는 양이기 때문에 내게 부족함이 있을 수가 없다. 물질이 필요할 때는 푸른 초장에 뉘이기 하시고 마음에 즐거움이 필요할 때는 쉴만한 물가에 속시원하게 물마시게 하시고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서 행복하게 만드시고 즐겁게 만들어 주시고 의롭게 살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같이 계셔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해를 받지 않게 해주시고 원수보는 앞에서 나에게 밥상차려 주시고 선하고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시는 좋은 하나님인 것을 노래하고 감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보고 너무나 좋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항상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시다. 좋은 하나님을 감사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에 믿음을 기뻐하였고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은 내 마음에 꼭 합당한 자라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목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감사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 마음에 합당한 자”라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합당한 자라도 안하고 사람이 여러분 보고 내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해도 기쁘고 즐거울 것인데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품에 품으시고 내 마음에 합당한 자다. 참 너같은 아들, 딸을 두어서 기쁘다고 그 말을 하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이작 왓츠(Isaac Watts)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천국에 계시고 감사는 여러분 마음에 계신다. 그러므로 감사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없는 것을 가지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감사는 벽에 공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면 벽에 공을 던지는 것처럼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또 감사와 축복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던지면 돌아오고 던지면 돌아오고 하나님과의 감사와 기쁨으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감사할 일이 생기고 또 감사할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2. 상상과 꿈이 있는 사람
여러분이 하나님의 즐거운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나라를 늘 상상하고 하나님에 대한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상상을 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꿈을 꾸지 안잖아요. 그러나 여러분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꿈이란 마음에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꿈입니다. 무슨 꿈을 꿉니다. 내가 늘 마음에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꿈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마음에 꿈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지요. 꿈이 없는 백성은 미래가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마음속에 크고 적은 꿈을 품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어진 모습으로 마음에 꿈꾸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나님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환상을 늙은이들에게는 꿈을 마음속에 자꾸 심어주는 것입니다. 꿈을 꾸어라. 꿈을 꾸면 꿈이 이루어진다. 여러분이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꿈이 여러분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옛날에 석탄차가 석탄불을 때서 칙칙푹푹 하면서 연기를 품으면서 나가면 화차들이 모두 끌려가지 않습니까? 쫙 끌려가지요. 여러분, 꿈을 가지면 화통이고 여러분 이루어지는 것은 여러분 끌려가는 것입니다. 꿈이 칙칙푹푹 칙칙푹푹 하면서 여러분을 끌고 나가요. 그러면 여러분은 붙어서 쭉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꿈을 꾸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 성령인 것입니다. 꿈을 많이 꾼 나라치고 못사는 나라가 없어요. 구라파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갈 때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에게 축복을 받을 꿈을 가지고 미국에 가서 세계 최대의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인도네시아에 가 보고 제가 놀란 것은 인도네시아 인구가 2억이 좀 넘는데 지금 예수를 믿는 성도가 몇 명이냐, 3천만명이 좀 넘습니다. 우리 한국에 5천만 인구에 예수믿는 사람이 좀 보태가지고서 천만이라고 말합니다. 정부 통계는 8백만이라고 나와 있지요. 그러면 우리보다 성도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을 닮아가자는 꿈을 다 민족들이 가지고 있어요. 우리도 한국처럼 잘 살아보자. 꿈이 그들을 끌고 갈 것입니다. 자기들이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디다. 오늘날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를 보냈지만 얼마있지 아니하면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선교사로써 한국에 찾아올 것입니다. 꿈을 가슴에 품으면 꿈이 여러분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꿈은 소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소원을 두어서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꿈을 품으면 꿈이 그 사람을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성령께서 여러분을 붙잡고서 여러분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칙칙푹푹, 칙칙푹푹 여러분을 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꿈을 쳐다보고만 있으면 언젠가 그 꿈이 여러분속에 이루어지게 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꿈을 늘 바라보는 것이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이 행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갈데아우르에서 나이가 75살에 은퇴하고도 남은 인생인데 꿈을 심어서 새로 출발시켰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지시할 땅은 갈데아우르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 하고 번창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눈을 들어서 너 있는 곳에서 북쪽, 남쪽, 동쪽,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눈으로 보고 꿈을 꾸는 그 땅을 네게 주고 네 자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5절에 보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늘의 별들을 헤아려보고 기도를 해라. 그 수대로 내가 자식들을 주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75살에 꿈을 꾸고 그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잔뜩 받은 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가 어리면 환상을 보게 하고 나이가 많으면 꿈을 꾸게 하는데 절대로 기도하고 하나님 주시는 꿈과 환상을 버리지 마십시오. 꿈같은 소리하시네. 내나이에 뭘 그런 것을 한다고.. 꿈같은 소리하면 그 꿈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인도네시아에 갔다오면서 내 꿈이 맞기는 맞았구나. 내가 후반기 인생에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려고 했는데 인도네시아에 서울에서 비행기를 7시간 타면 자카르타에 가서 비행장에 내려서 3시간을 기다려서 또 국내선 비행기를 2시간이나 타고 그 나라에 가서 그 이튿날부터 이튿날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고 또 국내선 2시간을 타고 자카르타를 나와가지고서 그곳에서 공항 비행장에서 쪼그리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보통 사람도 벌벌 길곳에 나는 안기거든. 굉장히 헤비한 스케줄인데 제가 걸으면서 생각하기를 아직 젊구나. 내 꿈을 바라보고 오니까 하나님이 꿈으로 나를 끌고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꿈이 나를 이끌고 간다. 그 꿈이 온 천하 만국에 다시 들어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난 다음에 백살이 넘어서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개인의 문제나 가정이나 국가에 대한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개인은 망하지 않습니다. 꿈이 있는 가정은 망하지 않습니다. 꿈이 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민족이 꿈을 갖지 못하면 그것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도 한가지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20년이나 머슴살이를 해도 외삼촌하고 임금으로 말다툼이 많았습니다. 외삼촌은 돈을 별로 주지 않고 부리고 싶고 야곱은 월급을 많이 받고 싶고 그래서 타협을 했습니다. 야곱이 하는 말이 외삼촌 짐승을 내가 목축을 하는데 얼룩덜룩이는 외삼촌이 다 옮겨 가십시오. 나는 얼룩덜룩이가 없는 점박이가 없는 양이나 소나 염소를 먹일테니까 그것들이 새끼를 낳을 때 얼룩덜룩이를 낳으면 그것을 내 월급으로 정해 주십시오. 외삼촌이 생각해 보니까 야 이자식 지 꾀에 지가 넘어갔다. 얼룩덜룩이가 아닌 짐승들이 얼룩덜룩이 새끼를 많이 낳을 턱이 없으니 일년에 몇 마리 낳겠나? 네 월급 몇푼 안된다. 좋다! 그렇게 하자 조카야~ 얼룩덜룩이는 내가 다 치우마. 삼일길로 얼룩덜룩이 짐승을 다 치워놓고 그 다음에 얼룩덜룩이가 없는 짐승을 야곱에게 치게 한 것입니다. 외삼촌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꾀를 부리는 놈이 지금 지 꾀에 넘어갔다. 얼룩덜룩이가 없는 순수한 색깔은 아무리 낳아서 다 내것이니까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 야곱은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한 것입니다. 외삼촌이 눈에 사라지자마자 산에 올라가서 살구나무, 버드나무, 신풍나무를 베다가 얼룩덜룩이를 만들어서 껍질을 벗겨서 물을 마시는 처소 앞에 쫙 세워 놓았습니다. 짐승들이 거기에서 물을 마시고 새끼를 베는데 물을 마실 때 그는 팔짱을 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얼룩덜룩이를 보고 얼룩덜룩이 새끼를 낳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마음속으로 얼룩덜룩이를 보는 것입니다. 그냥 얼룩덜룩이를 보려니까 자꾸 잡생각이 나니까 얼룩덜룩이 나무에 가지 껍질을 벗겨서 그것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새끼를 가지면 이것은 얼룩덜룩이다. 얼룩덜룩이다. 그리고 보고 기도하고 나니까 새끼만 낳으면 얼룩덜룩, 새끼만 낳으면 얼룩덜룩. 나중에 아저씨가 발을 동동 굴러도 안되고 얼룩덜룩이만 낳아서 큰 부자가 되었어요. 바라봄의 법칙인 것입니다. 자기가 그냥 바라보면 잡생각이 생겨서 잘 바라봐지지 않아요. 나는 중병에 걸려서 안수기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꼭 그런 말을 합니다. 암이 걸려서 온다든지 중병에 걸려서 오면 기도를 해주고 난 다음에도 나았다는 모습을 생각하라고 하면은 대답하는 것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니까 자꾸 안된다는 생각이 나지 나았다는 생각이 안든다고... 그러면 젊을 때 사진이 있냐고 사진있다고... 사진 이쁘게 찍은 사진이 있냐고.. 있다고... 그 사진을 복사를 많이 해가지고서 네 눈이 가는 곳마다 다 붙여 놓아라. 침대 앞에 화장실 앞에 밥상 앞에 네 가방에 네가 보면 이것만 보지 아픈 모습은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하고 믿었으므로 이렇게 아름답게 나았다. 야곱의 얼룩덜룩이와 같이 나는 아름다운 이 모습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바라봄의 법칙에 따라서 성령이 그 꿈을 통해서 기적을 통해서 낫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불치의 병에 걸렸으나 사진을 보고 자기 아름다운 모습으로 건강하게 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인도네시아에 가서 놀란 것은 인도네시아의 큰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많아요. 그 대표자가 내게 와서 하는 말이 우리가 이렇게 큰 교회를 세운 것은 조목사가 인도네시아에 와서 집회를 할 때 받은 은혜와 사차원의 복음을 적은 책을 읽고 마음에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꿈을 보고 나온 결과에 이렇게 큰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고... 꿈이라는 것이 이렇게 큰 힘이 있는 것을 몰랐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것 몰라도 꿈은 꿀 수 있습니다. 남의 꿈을 내가 빌려서 가져오면 내 꿈이 될 수 있습니다. 중국의 말에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남의 산의 돌을 갖다가 우리 산에 갖다 놓으면 우리 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의 꿈을 듣고 그 꿈을 내가 빌려와서 내 가슴속에 품으면 내 꿈이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꿈이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도 얼룩덜룩이 나무를 통해서 얼룩덜룩이 짐승 새끼 꿈을 꾸었다가 그렇게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뭡니까? 요셉은 열두 형제중에서 열한쨰 형제인데 다른 형제들은 꿈을 안꾸었어요. 꿈에 관심이 없었어요. 요셉은 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곡식단이 열한단이 자신을 둘러싸서 절하는 것도 보았고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도 보았고 보았으면 그대로 있을 것을 자꾸 나팔을 불고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 이런 꿈이 있다고 하니까 형제들이 미워해서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축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 심부름을 하고 오는 것을 보고 저기 꿈꾸는 놈이 오는도다 우리 저 놈 죽여버리자. 아주 꿈꾸는 것 몸서리가 난다. 꿈꾸는 놈을 죽여버리면 사라져 버리는데 꿈이 요셉의 가슴속에 있기 때문에 끌고가는 것입니다. 꿈을 죽일수가 없어요. 그들이 요셉을 죽이는 대신에 대상들에게 종으로 팔아 먹었는데 그가 대상들을 통해서 보디발의 노예로 들어갔는데 그가 10년 동안 종살이에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는 것마다 잘 되었어요. 누명을 쓰고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는데 또 감옥에서 총무가 되었어요. 성령이 그를 이끌어간 것입니다. 애굽 바로왕이 꿈 해석을 못했을 때 요셉이 가서 해석을 해주고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꿈이 어느곳에 가든지 형통하게 해준 것입니다. 여러분 꿈을 가지고 있으면 잘되게 돼요. 형통하게 만들어 줘요. 인간의 힘으로 안되는 것이 형통하게 잘되게 되는 것입니다. 빵가게 하는 사람이 가게 할 만한 돈도 없고 그냥 길거리에서 빵을 꾸어가지고서 파는데 여러분 길거리에서 구워서 파는 빵을 누가 좋게 사먹겠습니까? 그러나 길거리에서 빵을 구워 팔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길거리에서 파는 빵이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빵을 팔았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제가 다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니까 1년에 1억원을 판대요. 1억을 팔면 길거리에 아무 세금도 내지 않고 집세도 내지 않고 빵구워가지고서 파는데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사람이 와서 사 먹는 것을 늘 바라봐서 1년에 1억을 파는데 지점을 3백곳을 냈어요. 그래서 자기는 훨훨 난대요. 사람들은 안 믿어도 꿈을 꾸면 꿈이 자기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믿었다고 간증을 하는 것을 제가 읽었습니다. 정 꿈이 안꾸어지거든 노점 빵가게부터 꿈을 꾸라구요. 꿈 때문에 공격을 당하고 꿈 때문에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만 한 여론조사 기관이 직장인을 대상으로 “당신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이 질문에 무려 76.4%가 “나는 꿈을 접고 산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20%, “지금 꿈을 실현하고 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3%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아무런 꿈도 없이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고생만 많이 하고 별 성과가 없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목표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는데, 놀라운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실험대상자 중 27%는 목표가 없었고, 60%는 목표가 희미했으며, 10%는 단기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겨우 3%만이 명확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5년 후 다시 조사했더니, 목표가 없었던 27%는 최하위 수준의 삶을 살고 있었고, 목표가 희미했던 60%는 중하위층의 삶을 살고 있었으며, 단기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10%는 중상위층의 삶을 살고 있었고 명확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3%는 사회 각계의 최고 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화차가 기관차를 이끌어 가는 것처럼, 꿈을 가슴에 품으면 꿈이 우리의 인생을 끌고 갑니다. 꿈을 접어놓고 살지 마세요. 여러분 얼굴을 제가 보니까 접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활짝 펴놨는데 아에 펴거든 3%에 소속하도록 절대 열렬히 꿈을 꾸십시오. 꿈을 열렬히 꾸면 그 꿈이 여러분을 성공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면 하나님은 꿈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꿈을 꾸는 사람들 보고 내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끊임없는 우주를 꿈꾸시고 우주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꿈을 꾸면 너 내 자식이다. 나를 닮았다고 기뻐하고 좋아할 것 아닙니까?
3. 믿음과 창조적 선언
그리고 우리는 믿음과 창조적인 말을 늘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내 자식이다. 뒤로 넘어지고 물러가면 내가 그를 기뻐하지 않는다. 여러분, 사람들이 다 걱정하는 것은 내가 과연 믿음이 있느냐. 그것을 걱정하는데 하나님은 성경에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처럼 태어날 때 이미 믿음을 받아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겨자씨 만한 믿음은 다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있음과 동시에 믿음을 하나님을 모시면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뜨겁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지요? 자기 아들을 여러분 위해서 대신 내주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물을테니 대답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목숨처럼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믿습니까? 믿음이 있네요. 그것을 굳세게 믿음을 굳센 믿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한없이 많아서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런 능력이면 여러분의 문제는 문제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렇게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 하나님께 기도하면 듣겠습니까? 안듣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여러분 그 기도를 듣지 않겠습니까?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드디리라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자식이 떡을 달라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자가 있겠는가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 줄줄 아는데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주지 않겠느냐? 아이구 답답해라 왜 안믿느냐. 하나님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있으니 그 하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져 오라고 하는데 가져가면 해결해 줄 것을 믿을수가 있고 또 여러분은 태어날 때부터 믿음을 분량대로 받았으니 믿음의 사람으로써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믿음이 없이 하면은 헛소리하는 것이 되지만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러한 참 큰 축복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은 것을 여러분 늘 하나님 앞에 말하고 마귀에게 말하고 여러분 자신에게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말로써 교제를 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짐승들하고는 말 안합니다. 말 대상을 안삼습니다. 말 대상을 삼는 것은 여러분, 사람들에게 말 대상을 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말하는 말은 믿음의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을 통해서 말하고 꿈을 통해서 말하고 믿음을 통해서 말하고 말을 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러분이 말을 컨트롤하지만 입밖에 나가면 말은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파도가 되어가지 있습니까? 그런것과 같이 말은 에너지 파도가 되어 나갑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기적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이 말 자체가 굴레 씌우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좋은 말을 말하면 선한 말로 굴레를 씌우고 나쁜 말을 하면 나쁜 것이 와서 굴레 씌우고 말이 우리 운명을 죄우하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태산을 옮기는 에너지가 말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심하게 말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산보고 옮겨 가라고 말해 놓고 난 다음에 그 말한 것을 믿고 있으면 그 말이 밖으로 나가서 산을 뽑아 옮기는 역사를 베풀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그냥 우연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 20절에 보면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의 말도 마찬가지로 힘이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온 말은 사라지지 않고 에너지가 되어 우리 삶에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욕을 하면 그 욕이 말한 내용대로 상대방에게 가서 파괴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하면은 밖에 나가서 축복의 에너지가 되어서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평균적으로 여자는 하루에 2만 단어를 말합니다. 남자는 7천 단어의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자녀들을 기르거나 일을 할 때 누구의 뜻이 많이 이루어지느냐. 부인의 뜻이 많이 이루어집니다.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나가서... 남자들은 말을 안하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에너지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식들이 훗날에 애정을 많이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를 기억하지 아버지를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말의 영향력이 큰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3배나 말을 많이 하는데, 2013년 메릴랜드 의과대학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런 차이는 뇌 단백질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거나 남자든 여자든 우리는 매일 이처럼 엄청난 양의 말을 하고 또 들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입에서 한번 나간 말은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과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도 여러분의 가족의 말도 입 밖에 나가면 이웃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말은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아서, 오늘 한 말이 땅에 심겨져 자라나고 언젠가 반드시 그 말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거두고, 나쁜 씨앗을 뿌리면 나쁜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어나듯이, 말도 입 밖으로 나가면 말의 파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말을 조심해서 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람은 영이 육신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 닮은 영이 여러분 육신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영은 4차원에 속하고 육신은 3차원에 속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고 하나님처럼 창조하며 살고 하나님처럼 믿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육신의 삼차원에 속해 있으므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변화시키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므로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처럼 말하므로 환경과 운명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처럼 믿음으로 태산을 옮기고 하나님처럼 새로운 꿈을 꾸므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므로 하나님이 재미를 느끼고 즐거워하고 내 뜻에 합당한 자라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목자고 여러분은 양이고 하나님이 양을 기르고 양은 목자를 의지하고 살고 하나님께서는 꿈을 꾸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처럼 우리도 꿈을 꾸고 살고 하나님처럼 믿음을 갖고 살고 하나님처럼 말로 창조하고 살고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다윗을 복 내려 주듯이 여러분에게 복 내려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교회 와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기쁘게 여기시고 축복해 주시고 계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
시 23:1-6 / 이성희목사
요즘에 암이라면 모두가 떱니다. 그런데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부족병’이란 병입니다. 부족은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그래서 경험부족, 수면부족, 산소부족, 메모리부족, 운동부족, 용량부족, 물 부족, 이해력부족 등 부족이란 말이 많이 쓰입니다. 부족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필요한 양이나 기분에 미치지 못함’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에 채웁니다. 채우려는 인간의 욕심은 때로는 더 큰 부족을 만들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부족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생활에는 항상 만족하게 생각하고, 자신에는 항상 부족하게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지혜에서 옵니다. 만족할 때 행복이 있고, 행복을 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욕심 없는 마음 자세는 행복을 낳게 됩니다. 욕심은 그 자체가 부족을 낳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자기 도취가 필요한 것은 정치가와 프로 레슬러와 여배우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도취나 과시는 자신에게 부족함을 느낄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당당함은 오히려 아름다워 보입니다.
성경은 두 벌의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라고 합니다. 바울도 남의 옷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족이란 두 벌의 옷을 가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일용할 양식만 가지고도 만족하게 사는 법입니다.
“知足不辱(지족불욕)하고, 知止不殆(지지불태)하니, 可以長久(가이장구)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족함을 알면 욕보지 아니하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오래 편안하게 살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만족하면 욕을 보지 않습니다. 약간의 욕심이 큰 화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2%의 부족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주 근소한 부족을 의미합니다. 2%라도 부족하면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가 아주 큰 차이를 가지고 오기도 합니다. 이 2%를 어떻게 채울까요? 사람에게는 완전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2%는 누구나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이 2%를 채우십니다. 사람에게 100%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은사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만능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삼손 신드롬’이란 책에 보면 강한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약점이나 허점이 있다고 합니다. 강자가 가진 약점이 있습니다.
만족이란 ‘마음에 모자람이 없이 충분하고 넉넉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족이란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부족입니다. 아무리 없어도 마음에 차면 넘칩니다.
고린도후서 3:5에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부족을 채우고 만족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 때문에 부족을 채우며 늘 넉넉하게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족함을 모르는 삶의 비결은 이렇습니다.
첫째, 여호와가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3:1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합니다. 시편 23편은 가장 아름다운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는 주기도문 다음으로 많이 노래된 시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설정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며 공감이 됩니다. 이 시는 모든 경우에 가장 적절한 시입니다. 시편 23편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다 해당되는 시입니다. 모든 경우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시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나의 목자는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내가 나를 잘 아는 것 같아도 내가 모르는 내가 있습니다. “목자”란 말에서 나를 먹이시는 자, 치는 자이심을 고백합니다. 나의 목자는 초장을 아십니다. 좋은 물이 있는 시내를 아십니다. 나에게 위험한 곳을 아십니다. 파리 떼가 있는 곳을 아십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목이 마르면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늑대가 나타나면 지팡이로 막으십니다. 파리 떼가 머리에 붙으면 기름으로 바르십니다. 너무나 나를 잘 아시기에 부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먹을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지역은 52%뿐입니다. 인류에게 닥쳐오는 물 전쟁은 가장 심각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10년 뒤에는 물 부족이 20억 톤이 될 전망입니다. 물 부족 인구가 2025년에는 30억 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목자이십니다. 그 분이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면 되는데 왜 부족할까요? 인간의 욕심이 부족하게 만듭니다. 몇몇 사람의 독점이 부족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환경파괴가 부족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풍성케 하시는 목자신데 이런 인간의 실수와 잘못이 모자라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게 하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이 나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으셨기에 내가 구하기 전에 아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압니다. 이름을 각각 불러냅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목자는 자기의 양과 남의 양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양을 아는 것이 목자의 본능입니다.
저는 늘 규칙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합니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종합건강진단 외에 제가 약한 곳을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가서 검사를 합니다. 저를 봐주시는 의사는 순환기내과에 한 분, 이비인후과에 한 분, 치과에 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선생님들은 나보다 나의 몸을 더 잘 아십니다. 입을 벌리고 들여다보면 잘 관리하는지 마구 사용하는지 다 아십니다. 내가 내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나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사람마다 몸의 구조가 다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 엄밀하게 따지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다른 사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약점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제일 잘 아는 것 같아요 조금만 무리하면 감기에 걸리는데 꼭 목에 신호가 옵니다. 목이 약하다는 증거이겠지요? 이렇게 사람마다 약한 곳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다른 사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어느 우울한 설교자가 숲 속으로 산책을 합니다. 설교자는 새 군사시설로 들어갔습니다. 경계 순찰하던 경비병이 설교자에게 소리쳤습니다. “정지, 누구요? 왜 여기 온 거요?” 설교자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졌습니다. “뭐라고 하셨죠?” “당신은 누구요? 왜 여기 온 거요?” 설교자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제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는 돌아 나왔습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가 약한지,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양인 나를 목자인 그 분은 알뜰히 알고 챙기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합니다. 잠언 27:20에는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삽니다. 이 곳은 만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하늘나라는 반면에 만족함이 있는 곳입니다. 사람의 눈도 그렇습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눈을 통하여 우리 뇌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말합니다. “우리 사회는 필요를 위해선 충분하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인간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부족을 채워 만족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기근이 들게 하사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신 하나님이십니다(시 105:16). 그 하나님은 광야생활에서 메추라기를 주시고 하늘양식을 내리셔서 그들로 만족하게 하셨습니다(시 105:40).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둘째, 여호와로 말미암아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35에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왜 부족한 것이 없었지요?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부족한 것이 없지요? 사람의 만족이란 물질의 양에서 오는 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만족이란 가진 것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을 보세요. 부자 나라들이 아닙니다. 작년에 보면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호주 옆의 작은 섬나라인 비누아투라고 합니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이런 나라들이 행복한 나라들입니다. 소유가 만족하게 하고, 행복을 준다는 말은 서구 문명의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참 만족은 여호와로 말미암습니다.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것이 참 만족입니다. 이 세상을 다 얻어도 주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이 없어도 주님을 얻으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 가운데 보화의 비유나, 진주장사의 비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팔아 하나만 얻어도 만족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줘도 안 바꿀 만큼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베드로나 마태와 같은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 좋은 직장과 직업을 다 버리고 주님 한분만 보고 따라갔습니다. 신앙의 위인들과 수도사들이 그랬습니다. 세상의 좋은 직장과 직위를 버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을 따르고, 증거하고, 핍박받고, 순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위대한 삶을 살고 값비싼 만족을 얻은 삶입니다.
지난 번 말레이시아에 가서 들은 얘기입니다. 얼마 전 말레이시아 방송가에 심한 충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나라에서는 무슬림이 아니면 지위를 얻는 것이나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인기 앵커우먼이 무슬림을 가장하고 앵커우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기독교인인 것을 감추고 앵커로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녀가 커밍아웃한 것입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엄청난 불이익이 올 것이 뻔한 일입니다. 결국 그녀는 방송국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에 호주로 종교적 망명을 갈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슬림의 개종은 곧 죽음입니다. 이런 위험하고 생명을 위협을 받는 일이지만 주님 한 분이 더 귀중하여 자신을 죽이는 용기가 만족입니다.
2세기에 ‘디오그네터스 서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이렇게 적힌 구절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했지만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모든 것에 풍성했다. 그들은 학대당했지만 학대하는 사람들을 축복했다. 선행을 베풀었지만 행악자로 처벌받았다. 처벌받는 가운데 새 생명을 얻고 기뻐했다”. 자신의 불이익에도 여호와를 선택한 것은 이 선택이 곧 영혼의 만족이며 삶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5:10에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세상의 것에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세상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다행증’(euphoria)이란 병명이 있습니다. 근거가 없는 병적인 행복감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볼 때 행복의 근거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병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근거도 있고, 병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족하고 행복한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여호와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빌립보서 4:11~13 에는 바울의 위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 때문에 부족이 없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 만족입니다. 시편의 기자도 103: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결 론
만족케 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은 성경에 많습니다. 앞날이 두렵고 혼란합니까? ‘여호와라’ 즉 우리를 돌보시는 목자에게로 달려가십시오. 하루하루 먹고 입는 일을 염려하십니까? ‘여호와이레’, 예비하시는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너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여 있습니까? ‘여호와살롬’,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몸이 아프고 불편합니까? ‘여호와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진찰하십니다. 적진에 고립된 병사와 같은 느낌을 가집니까? ‘여호와닛시’,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모든 면에 만족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90:14에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아시지요? 신앙입니까? 열정입니까? 사랑입니까? 그 부족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부족을 다 채우고 만족하게 하여서 일생을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자와 양
시 23:1-6 / 이필재목사
웬만한 교인들은 시편 23편은 다 암송합니다. 다른 분들도 다 암송하도록 하십시오. 그만큼 비중이 큰 성경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비중이 큰 시편 23편을 제가 오늘 갈보리교회에서 처음 설교합니다. 얼마 전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갔었습니다. 학생, 교수 한 2천여 명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에 총장님께서 책 1권을 저에게 선물해 주셔서 그날로 다 읽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줄거리 한토막이 오늘 제 설교준비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 한국 어느 대학에서 교수로 계신 분이 옛날 20대 시절에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거기서 공부하는 관계로 아예 독일 시민권 자격을 가지고 독일인 자격으로 대학을 다녔다고 합니다. 함께 공부하는 유대인 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이 유대인 청년은 사실 살아남기 위해서 유대인 신분을 감추고 대학을 다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항상 뭔가 중얼중얼 거리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하늘을 쳐다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겁니다. 그래서 물었다고 합니다. “너는 항상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내가 유대인이다.” “알고 있다.” “네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내가 말해주겠다. 시편 23편을 암송하는 것이다.” “그것을 왜 그렇게 날마다 암송하느냐?” “지금 우리 유대인은 언제 잡혀서 죽을지 모른다. 히틀러 비밀경찰에 의해서 잡혀가고 있는데 언제 내 차례가 될지 모른다. 이 불안감을 시편 23편을 암송하고 나면 다 해결이 된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그래서 나를 위해서 암송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청년도 “나도 시편 23편을 암송하겠다.” 이렇게 해서 둘이서 함께 히브리어로 시편 23편을 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친구는 유대인 청년이라는 것이 발각이 되어서 그와 그 가족이 잡혀서 트럭에 실려서 죽음의 가스실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친분을 가지고 살던 이 한국 청년은 그 친구가 죄도 없이 죽을 것을 생각하니까 도저히 견딜 수 없이 슬퍼서 그를 실고 가는 트럭을 자전거를 타고 죽을힘을 다해서 ‘이 친구가 죽으면 나도 죽어야지. 죄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죽으면 되나?’ 그리고 따라가는데 트럭에 따라가는 유대인 친구가 포장을 걷고 바깥으로 얼굴을 쑥 내밀고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는 자기를 보면서 활짝 웃으면서 시편 23편을 큰 목소리로 외우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도 따라가면서 똑같이 시편 23편을 막 암송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따라가다가 그만 자전거가 돌에 부딪히면서 곤두박질을 해서 자기는 길바닥에 쓰러졌고 그 친구는 먼지가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서 그날 가스실에서 죽었답니다. 그런데 2차 대전 때였으므로 이 한국 청년도 독일 시민권자라서 결국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니까 군대에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 군에게 포로로 잡혔답니다. 이제는 반대로 러시아 연합군에 의해서 하나씩 끌려 나가서 독일군들이 또 총살을 당하게 되었는데 자기 차례가 되었답니다. 총을 겨눈 상태에서 “마지막 할 말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있습니다.” “해라.” 그래서 거기에 있는 독일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히브리어로, 유대인 방언으로 시편 23편을 암송했답니다. “미즈모르 레다위드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막 암송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데 집행관이 깜짝 놀란 겁니다. “야! 네가 어떻게 아도나이 로이를 아느냐?” “나 하나님 믿는 사람이다.” “그렇구나.” 그러더니 “나는 유대인이다. 연합군에 가담했다. 그래서 러시아편에서 지금 장교로 이 전쟁을 하는 것이다. 나도 23편을 항상 외우고 있다. 왜냐하면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너 그거 끝까지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다.” “합창하자.” 그래서 사형수와 집행관이 함께 “미즈모르 레다위드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하면서 유대나라 말로 시편 23편을 막 암송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저게 무슨 말이야? 왜 둘이 합창을 하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끝까지 마쳤습니다. 그랬더니 집행관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군인은 비록 악마의 제복인 독일군의 제복을 하고 있지만 독일군이 아니다. 내가 점검했더니 이 사람은 연합군이다. 한국인이 히틀러에게 강제로 끌려왔을 뿐이다. 풀어주어라.” 그래서 살았답니다. 지금 은퇴를 하시고 아주 연세가 많으신 데도 대학에서 히브리어를 열심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자신이 모든 신자들을 양으로 말씀하시고 자신은 목자로 조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10대 시절에 누구 집에나 시골에는 동물을 많이 기르지 않습니까? 소도 기르고 돼지, 개, 닭… 여러 가지 동물을 기릅니다. 저는 10가지 동물을 길러봤습니다. 그런데 다른 집이 절대 기르지 않은 양을 길러본 것이 제 목회에 큰 도움이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은 여러 가지 나쁜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방향 감각이 둔해서 스스로 갈 길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목자가 모시고 다녀야 하는 동물이 양입니다. 진돗개는 수백리 밖에 갖다가 몰래 집어 던져도 제 집을 찾아옵니다. 하다못해 저 산 속의 숲의 새들도 그 넓고 넓은 산에 손바닥만 한 둥지를 지어두었어도 거기를 틀림없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양은 찾지 못합니다. 양의 시력은 정확히 보이는 게 10미터이고 희미하게 보이는 게 20미터입니다.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위험에서 피할 줄 모릅니다. 여러분! 동물의 왕국을 보시면 모든 동물이 얼마나 재빨리 자기 위험을 감지하고 재빠르게 피하는지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은 피하지 못합니다. 땅을 보면 땅벌이라고 있는데 그것을 밟고 서있습니다. 벌이 나와서 쏘면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그런데 양은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다 맞고 죽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미련하게 영혼이 금방 죽을 자리인데도 빨리 뛰어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이게 우리 사람의 목숨입니다.
그 다음에 양은 방어 무기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개미도 자기를 해치려는 적에게 아주 공격적 일침을 가하는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은 없습니다. 제 친구 목사님은 낚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월요일 아침이면 새벽기도를 마치고 벌써 낚시터에 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주 맛있는 고기를 낚아서 좋아했답니다. 그게 넙치인지 가오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둥그렇고 끝에 꼬랑지가 나와 있는 큰 고기를 잡았는데 너무 좋아서 ‘이야! 내가 오늘 이걸 다 잡다니!’ 아주 맛있게 생각을 하고 그 아가미에 걸려있는 낚시 바늘을 신나게 뽑고 있는데 드러누워 있던 가오리가 꼬랑지를 슬쩍 들더니 낚싯바늘을 빼고 있던 손을 공격을 했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실어갔습니다. 의사 말이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고 했습니다.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도 손을 보면 “이게 그거다.” 그러는데 오목하게 파여져 있습니다. 친구들이 보면 항상 놀립니다. 가오리한테 죽을 뻔 했다고 “가오리다. 가오리다. 한방에 가오리다.” 양은 물고기만도 못합니다.
그 다음에 자존심과 고집은 모든 동물 중에 가장 강합니다. 이사야 53장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자기 고집대로 각자 갑니다. 얼마나 고집과 자존심이 강한지 양은 목줄을 메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목줄을 메어놓으면 스트레스 받아서 오래 가면 죽습니다. 항상 방목해야 합니다. 제가 경험한 것 말씀드리면 제가 목적하는 바가 있으니까 목줄을 만들어주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양 목줄은 그런 줄 알도록 아예 태어날 때부터 해주어야 한답니다. 중간에는 절대 못합니다. 그래서 목줄에다 고리를 걸어서 내가 목적하는 데다 데려다 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목줄을 잡아당기면 죽어도 안갑니다. 하도 안가서 “오늘은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번 시합을 해보자.” 저도 그때 10대 후반이니까 힘이 세던 시절이었습니다. 세게 잡아당기니까 안 옵니다. 어떻게 하느냐? 마당에다 양쪽 발톱을 박습니다. 끌면 불도저가 땅을 미는 것처럼 밀고 옵니다. 목이 떨어져 나가도 절대로 안갑니다. 해보십시오. 오죽하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고 십자가에 죽으셨겠습니까? 양은 높은 곳으로 가길 좋아합니다. 양은 잃어버리기 쉬운 동물인데 아래로 내려오면 동네이기 때문에 찾습니다. 그런데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항상 찾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잃어버린 양이 있지 않습니까? 길을 갈 때 절대 빨리 못가는 동물이 양입니다. 천천히 제 고집대로 갑니다. 빨리 몰면 더 천천히 갑니다.
오늘 말씀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는데 막대기는 다른 동물의 접근을 방어하는 무기이고 지팡이는 양을 인도하는데 쓰는 도구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는데 유대 나라 산들은 우리나라 산 모양과 절대 다릅니다. 떨어지는 날이면 수십 길 떨어져 죽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유목민을 찾아갔을 때 그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느낀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직업도 이것보다는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루한 천막 하나를 모래밭 위에다 쳐놓고 돌멩이 세 개를 갖다 놓고 그 위에다 시커먼 솥단지 하나 걸어놓고 밀가루 반죽해서 그것만 매일 먹고 삽니다. 물이 없어서 세수를 못해서 온 집안 식구들이 집단 거지 떼 같이 보입니다. 낮이면 아열대 기후를 견디면서 양떼를 보호해야 하고 밤이면 양을 잡아먹으러 달려드는 짐승들이 수없이 모이니까 그것을 쫓아야 합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 성경 기록을 보십시오. “베들레헴 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밤에도 제대로 못잡니다. 그래서 유목민 사회에서 좋은 목자는 누구인가? 네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위험하지 않은 곳을 찾을 줄 아는 목자입니다.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 이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맹수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목자입니다. 세 번째는 양을 잃어버리지 않는 목자입니다. 네 번째는 양을 살찌게 하는 목자입니다. 결국 목자는 양을 위하여 희생적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양이 된 우리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목자의 사랑을 받는 것인가? 양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청각이 발달했습니다. 탁월한 청력이 양의 장점입니다. 특별히 자기 주인의 음성 분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주인과 같은 음성을 흉내 내서 양을 부릴지라도 쉽지 않습니다. 목자들은 누구나 허리에 피리를 차고 다닙니다. 대나무로 된 것이 있고 소뿔을 깎아서 만든 피리 이렇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목자가 피리를 불면 양들은 목자의 위치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듣고 신변에 안전을 느끼고 아주 편안해 합니다. 또, 이 피리 소리는 다른 공격 짐승들의 접근을 막는 효과가 있습니다. “목자가 있으니까 너희들 접근하지 말라.” 다윗도 사실 이 목동 생활을 하다가 출세의 기초가 되었지 않습니까? 실로 짠 돌팔매질하는 끼가 있습니다. 가죽으로 된 것과 실로 짠 것 이렇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양된 자들은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가면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5절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주의 인도의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따라오는 겁니다. 양된 교인들의 장점이 있습니다. 청각이 발달했습니다. 이것은 너무 지나치게 발달을 해서 목사가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금방 판단을 합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 준비하고 나왔다, 안하고 나왔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금방 판단합니다. 신학생들보다도 이 면에서는 더 잘 압니다. 요리를 만들지는 못해도 맛을 아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발달한 청력으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여기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는 문장이 있는데 올리브기름을 양의 머리에 발라주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사막성 기후의 독성 있는 파리나 모기가 끊임없이 달려드는데 올리브기름 향취가 파리와 모기를 쫓아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양의 그 목자 복장을 보면 십자로 되어 있습니다. 한쪽에는 피리가 달려있고 한쪽에는 올리브 기름병이 있고 손에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목자의 전통적 복장 모습입니다. “그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내게 임하였으니” 그런 말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 인도함을 잘 따르는 양무리는 아무 부족이 없다는 뜻의 신앙 고백이 됩니다.
그러면 이 양은 어떻게 변하는가? 단점 투성이의 문제아였지만 장점만 있는, 가장 쓸모 있는 주님의 제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쓸모가 있는가? 제일 먼저 양은 모든 제사의 희생물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흘리시는 주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양의 피가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양 한 마리 희생하면 번제를 드려서 모든 죄를 속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재료로서 양은 쓰임을 받게 되니까 거룩한 양이 되어 버립니다. 두 번째는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모든 역할을 다 담당하는 게 양입니다. 양은 인간에게 가장 맛있는 요리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맛이 없는 쓸모없는 양이었다가 주의 음성을 듣고 따르면 주님이 가장 즐겨하시는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은 우유를 생산하는데 인간에게 가장 고단백질, 건강 보탬을 해줍니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양젖은 젖소 우유보다 언제나 배나 비싸게 판매가 됩니다. 신앙 좋은 주님의 양들은 온 세상 구원 사역에 가장 영양가 높은 생산력 있는 사역자로 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양털은 인간의 몸을 보호해주는 가장 따뜻한 옷감을 제공해 줍니다. 해마다 몽골에 선교팀이 수없이 가지 않습니까? 겨울에 가보십시오. 영하 40도입니다. 그러나 아무 문제없습니다. 양고기를 많이 먹기 때문에 지방질이 많아서 추위를 안 느끼고 양털로 짠 스웨터를 하나 입으면 영하 40도도 넉넉히 견디어서 다들 스웨터 하나씩 사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입을 필요가 있습니까? 너무 더워서 여기 한국의 기후에는 절대 못 입습니다. 저도 아주 최고로 좋은 것으로 하나 사왔다가 입을 기회가 없어서 그 다음에 몽골 가서 몽골 사람 주고 왔습니다. 양 가죽은 각종 생활필수품에 재료로 쓰임을 받는데, 여러분! 성경도 제일 처음에는 양피지 성경이었습니다. 양을 잡아서 가죽을 햇볕에 말려서 딱딱해진 겉장에다 성경을 쓴 것이 보존되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활자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양들이 희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이 주의 음성을 듣고 이 목자를 잘 따르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귀중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적 사역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는 언제나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르던가 아니면 목자의 음성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가든가 그렇습니다. 유목민을 가리켜 ‘베두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도 생활이 똑같습니다. 밤에 잠을 잘 때 양무리 곁에서 함께 잠을 자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신속하게 반응해서 양떼를 지킵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의 상황을 살피시고 가만히 계신 것 같아도 언제나 내 주변에 신속한 대응을 하는 보호자로 항상 계시다는 것을 다윗이 목자 생활을 통해서 확실했기 때문에 이렇게 훌륭한 신앙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 다 다윗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시편 23편을 히브리 방언이 아니지만 한국어로 다 같이 한번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시편 23:1-6 / 성홍모목사(영주교회)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고, 하나님만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계에 드러내야겠습니다. 곳곳에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을 드러내어야겠습니다.
오늘 교독문은 시편23편을 새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이 시편23편은 기독교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을 맛소라 사본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유대의 티베리아스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맛소라 학파의 랍비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입니다. 맛소라 성경에는 이 시를 시작하면서 ‘다윗의 시’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미즈모르 레다비드”라고 하여 다윗의 시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1절 속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1절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다윗은 목동 생활로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목자인 왕이 된 사람입니다. 다윗이 이 시편23편을 저작하였습니다.
시23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시편이기 때문에 이 시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시는 매일같이 암송하는 시요, 사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암송하면서 기도하는 시입니다.
“미즈모르 레다비드” 다윗의 시라는 말입니다. “예호바 로이” 그러나 읽을 때나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 예호바라고 하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해야 합니다. ‘나의 주’라는 뜻입니다. “아도나이 로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 “로 에흐싸르” 내게 부족함이 없다, “빈옷데 데쉐” 연한 풀의 초장에, “아르비체니 알 메 메누호” 잔잔한 물가로, 쉴만한 물가로, “예비나할레니” 그가 나를 인도하신다. 시23편을 히브리어 원문을 들어보겠습니다.
장신대 장영일교수님이 쓴 ‘유다광야에서 읽어 보는 시23편’이란 책에서 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한 대학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연세가 많으신 한 교수님은 라틴어만이 아니라, 히브리어도 잘 하시는데, 히브리어를 잘 하게 된 동기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제2차대전 당시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함께 공부하는 유대인 친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유대인 친구는 두 시간 정도 수업을 한 후에 쉬는 시간이면 항상 알아들을 수 없는 시 한편을 소리 내어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 친구가 외우는 시는 성경의 시편23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시편을 왜 암송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의 말은 이 시편을 외우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상쾌해져서 공부가 잘 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에게 불행히 찾아왔습니다. 나치의 핍박을 피해 은신처에 숨어 있던 유대인 친구가 나치의 비밀경찰에 붙잡혀 끌려간다는 소식을 독일인 친구가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을 때, 유대인 친구와 그의 가족들은 이미 트럭에 실려서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습니다.
독일 친구가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 친구의 얼굴이라고 보려고 눈물범벅이 된 채로 트럭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트럭 밖으로 친구가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친구는 뜻밖에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때 그 친구는 갑자기 소리를 높이 무엇인가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다름 아닌 시편23편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가스실로 끌려가면서 미소를 지으며 시23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뒤따라 가다가 돌부리에 부딪쳐 자전거에서 떨어졌는데, 그 트럭을 이미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유대인 친구가 잡혀간 후에 독일을 최후 발악을 하면서 더 많은 학생들까지 징집하였습니다. 그 독일인 친구도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전선에 투입되면서 러시아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독일인 포로들을 총살하는데 끌려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에 가스실로 끌려가면서 시23편을 암송하던 친구를 생각하며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함께 포로된 독일 병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총알에 쓰러지는데 드디어 친구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친구가 떠나면서 암송하였던 시23편을 히브리어로 천천히 소리 내어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자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져가고 자신도 알 수 없는 힘과 용기와 평안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연합군 장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목청을 돋우어서 같은 히브리어로 시23편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연합군 장교는 러시아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장교는 독일 친구를 풀어주라고 하였습니다. 어안이 벙벙하여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독일군 악마의 제복을 입고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시편23편은 암송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어려운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겠습니다.
이 시편을 하루에 다섯 번씩 암송하여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번민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어느 목사님이 시23편을 하루 5번 암송하라고 처방하였는데, 그가 이 말씀에 붙잡히고 이 말씀의 주인이신 목자 하나님에게 붙잡혀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예호바 로이”라고 하는데,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하는데,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목자가 되시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라”라고 합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목자가 항상 인도해주고, 따라다녀야 합니다. 양이란 짐승은 정말 약한 짐승입니다. 모든 것, 먹고 마시는 것, 안전하게 사는 것까지 목자가 보살펴주어야 하는 짐승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하는데, 과연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막연히 예배하는 하나님은 아닙니까? 날마다 높이고, 항상 모시고, 감사하면서 찬송하는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도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도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시편18:1-2에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나의 힘, 나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 분, 하나님, 바위, 방채, 구원의 뿔, 산성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 나의 하나님, 나의 생명이시요, 영원히 사랑하고 예배하는 나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기에 하나님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다윗은 천성적으로 양을 사랑하였고,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자나 곰 같은 짐승과 싸웠습니다. 돌팔매질을 잘하는 것은 그가 양을 지키면서 배운 것으로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 참전한 형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전선에 갔다가 골리앗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로 사울의 사위가 되었고, 사울의 미움을 받아 수년간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적국 블레셋에 망명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가 수많은 전쟁을 겪고, 죽음의 골짜기를 다니던 중에 건짐을 받았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그의 신앙고백의 절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시23편을 내었습니다.
이 시의 배경을 보면 고대 근동지방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목자는 곧 양의 생명이었습니다. 양은 겁이 많고, 어둔하고 어리석은 가축입니다. 시력도 좋지 않아 10m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여러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으며, 발톱도 무디고, 발목마저 약하여 빨리 달리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무저항적이며, 의존적으로 모방을 잘하고 항상 무리지어 다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잡아서 죽이면 반항도 못하여 그래서 항상 신에게 드리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몸은 항상 지저분하고 더러워져 목자가 목욕을 시켜주지 않으면 몸에 묻은 오물로 인해 악취가 나고 질병에 걸리기 쉬운 동물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필요한 가장 빠뜨릴 수 없는 이유는 무서울 정도의 식성이 문제입니다. 무한대의 식욕과 예민한 청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절제시키지 않으면 배가 터지도록 먹습니다. 나뭇가지는 물론 풀뿌리까지 남기지 않습니다. 한 장소에 두 주 이상 머물면 그 지역의 모든 식물은 큰 나무를 제외하고, 뿌리째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우기에 황무지도 바뀌게 됩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어치우는데,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플라스틱 병도 먹어버립니다. 그러다가 양들은 창자가 찢어져 죽게 됩니다.
양이란 짐승이 아주 무력하지만, 청력이 예민하기 때문에 멀리서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잘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목자이십니다. 요10:11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셨고, 요10:14-15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요10:16에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었으나 주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양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목자는 천성적으로 긍휼한 마음이 있고, 어린 짐승이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에 목자가 됩니다. 목자의 착하고 인자한 성품이 양들을 먹이고 보호하면서 목양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명예를 걸고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생명처럼 아끼며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그 이름 때문에, 사랑과 애정으로 돌아보아 주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짐승을 대적하시고, 한 마리의 양이 죽음의 골짜기로 다닌다고 하여도 내버리지 않고 찾아오시고 건져주십니다.
유대의 골짜기는 험하기로 유명합니다. 해발 -450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가 유대에 있습니다.
마침내 목자는 양들을 하나도 낙오되지 않게 인도하여 양의 우리에 들여 평안히 안식하게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원수 대적들에게서 건져내시고 하루 풍성한 꼴로 배부르게 하시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들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려움과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잊어버리면 두려움에 빠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잘 아는 복음성가로 만들어진 시23편이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 없네
푸르른 초장 위에 나의 몸 누이시네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 하시네”
우리의 입에는 찬송이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찬송가 399장은 21세기 찬송가에 새로 들어온 성가곡입니다. 학생 때에 이 곡을 즐겨 불렀는데, 화음도 잘 맞고 가사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린 양들아 두려워 말아라 주님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그 양떼들을 항상 지키신다.
오직 믿음 믿음으로 두려움 없으리 오직 믿음
오직 믿음 믿음으로 두려움 없으리 오직 믿음”
우리는 찬송을 불러도 이렇게 힘이 되는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어떤 한 목사님이 이웃 교회에 시무하는 후배 전도사님으로부터 그의 교회 주일 밤 예배에 설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기로 약속을 하고 날짜가 거의 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이웃 교회의 전도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주보에 실기 위해 설교제목과 성경본문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본문은 시편 23편 1절부터 6절까지요." 그러자 전도사님은 "그러면 제목은요?"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전도사님이 받아 적으면서 "그 다음에는 요?" 하고 물었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든지 그 뒤에 뭐가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약속한 주일 저녁 예배에 그 이웃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받아 강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아 주보를 펼쳐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밤 예배 설교제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기가 콱 막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을 주고 핀잔처럼 전도사에게 한 말인데, 연이어 제목으로 붙여놓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찬송을 하면서도,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서도 제목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목사님은 "그래, 제목대로 설교를 하자!"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준비한 설교의 원고를 덮고 전혀 새로운 각도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목을 바꾸니 성경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푸른 풀밭의 싱싱한 풀을 원하십니까? 맑은 시냇가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시편 23편에 나오는 양은 그 풍성한 풀밭에서 풀을 뜯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너무 배가 불러서이겠습니까, 아니면 욕심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양은 배가 불러도 몇 시간씩 계속 풀을 뜯고 또 뜯어 먹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도 분명합니다. 목자에게서 오는 참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 분의 양이 되니 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렇게 외치자 온 교회 성도들이 "아멘, 아멘~"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양들이 가장 안전할 때에는 목자를 따라갈 때입니다. 그러나 양들이 가장 불안을 느낄 때는 목자를 떠나 자기 혼자 다닐 때입니다. 여러분,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는 목자가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외치면서 부족함이 없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 23:1-6 / 피종진목사(남서울중앙교회)
시편 23편은 사무엘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사울 왕에 의해 발탁되기 전까지 양을 치던 목자였던 다윗이 훗날 자신의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 인생의 주인이시자 인도자 되시는 하나님과 그분을 따르는 자신 간의 절대적 신뢰와 보호 관계에서 자신이 얻는 축복을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유하여 노래한 시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고백한 여호와는 어떠한 목자일까요?
첫째,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목동 생활을 하였던 다윗은 양들이 목자의 인도와 돌봄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함이 많은 인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의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 2장 3절에 보면 가나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부족한 포도주를 채워주셨습니다. 사도행전 4장 33,34절에도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고,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 34:9,10).
둘째,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목자이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양(죄인)들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린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생명을 풍성히 얻고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모든 대적 앞에서 승리를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승리의 축제가 자신을 적대시하며 괴롭혔던 원수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베풀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식탁을 차려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이 축복은 다윗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그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축복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는 사방에 대적들이 둘러싸고 생명의 위협을 가하며, 각종 괴로움을 안겨주는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목자,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목자, 모든 대적 앞에서 승리를 주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항상 살아감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 나의 목자
시 23:1-3 / 조용기목사
<서 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 나의 목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양은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른 동물과 달라서 방어 무기인 날카로운 뿔도 없고 발톱도 없습니다. 그리고 공격무기도 없습니다. 목자가 항상 곁에 있어서 막대기와 지팡이를 가지고 지켜줘야지 안 지켜주면 언제나 사자나 곰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양은 시력이 대단히 근시여서 10m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목자가 반드시 인도해줘야지 안 그러면 언덕에 떨어지든지 벼랑에 떨어지고 뒹굴고 다치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가 반드시 양은 지키시고 이끌어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에 비유되고 예수님이 목자로 비유되는데 우리가 예수님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님을 절대 믿고 순종해야 되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스스로 보호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너무나 사납고 무섭기 때문에 세상과 같이 싸울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고 있을 따름입니다. 내일 일을 잘 아는 예수님께 우리 일생을 맡기고 또한 우리를 지켜주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안전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렸잖아요. 양들을 사랑하는 것은 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찢어주시고 피를 흘려 주시기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셨으면 우리 마음속에 항상 외워야 될 것은 내게 부족함이 없이 해주시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외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족한 대로 내버려 놓지 않기 때문에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있게 해주신 것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생각이 긍정적이 되어야 되고 꿈이 긍정적이 되어야 되고 믿음이 있어야 되고 입술로 긍정적으로 고백해야 되기 때문에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주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가 있으므로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충분히 있는 것을 공급해 주는 꿈을 꾸고 믿고 입술로 나는 가지고 있다. 축복 받았다. 나는 모든 것이 풍족하다. 부족함이 없다고 긍정적으로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목자 되신 예수님이 그런 양들을 돌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하든지 태어날 때부터 없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없습니다. 힘도 없다. 능력도 없다. 건강도 없다. 청춘도 없다. 돈도 없다. 집도 없다. 남편도 없다. 아내도 없다. 자식도 없다. 전부 없는 것만 바라보고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을 꿈꾸고 없는 것을 믿고 없는 것을 입으로 말하고 사는데 그러면 언제나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 목자가 있기 때문에 있다고 늘 생각하고 목자가 계시기 때문에 있는 것을 꿈꾸고 목자가 있기 때문에 있게 만들어 줄 줄 믿고 목자가 계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부족함이 없게 된다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러한 사람에게 목자는 부족함이 없도록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족함을 가지고 사는 것은 참 괴롭습니다. 그러나 목자인 예수님이 계시면 부족함이 없도록 주님이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본 론>
1. 푸른 풀밭에 누이심
그는 우리의 풀밭은 십자가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풀은 풀밭에 누이신다고 말했는데 우리 풀밭이 어디 있느냐고 찾을 필요 없는 것은 십자가 밑이 우리 풀밭인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푸른 풀밭을 만들어 놓았는데 무슨 풀밭이냐.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용서와 의의 풀밭을 만들어 놓아서 십자가 밑에서 용서를 먹고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풀밭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되고 성령충만하게 된 은혜를 먹을 수가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풀밭입니다. 저주에서 해방되고 형통의 풀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치료와 건강의 풀밭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고 우리는 치료를 받고 건강을 얻어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부활 영생 천국의 풀밭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서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부활하고 영생천국을 얻는 약속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세상 사람이 모르는 푸른 풀밭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알 수가 없어요. 십자가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기 때문에 어디에 무슨 풀밭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항상 주님께서 예비한 풀밭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의롭게 된 풀밭이 있어요.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풀밭이 있어요.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풀밭이 있어요. 치료받고 건강을 얻는 풀밭이 있어요. 부활 영생 천국의 풀밭이 있어요. 그것을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항상 바라보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풀밭이 있다고 주장하고 기도로써 구하면 그대로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풀밭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 풀밭에 우리를 누이시는 것입니다. 그냥 풀밭에서 네 마음대로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의지하면 누이신다는 것은 만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양들이 여러분 풀밭에 누울 때는 짐승의 공격이 없을 때 눕게 되고 충분히 먹었을 때 눕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풀밭에 눕게 하실 때는 모든 짐을 맡아 주겠다고 할 때 풀밭에 우리가 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는데 어디 누워서 빈둥빈둥 놀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다 맡아 주실 때 우리는 풀밭에 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께 항상 무거운 짐을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농구 시합을 할 때 농구선구들이 볼을 끊임없이 던지지 않습니까? 볼이 오면 또 받아서 케이지를 향해서 던지고 던지는 것처럼 여러분 예수님 앞에 무거운 짐을 자꾸 던지십시오. 오면 또 던져 놓고 또 오면 던져 놓고 그래서 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맡기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편안하게 쉬도록 눕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11절에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은혜의 손길로 돌보아 주시고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예수 믿는 생활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제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생활을 하고 나니까 나만 괴로울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데 도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에는 너희가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족함이 없게 축복을 해주시므로 우리가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올바르게 먹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살펴보시고 우리를 통해서 축복을 준비하고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목자를 알아야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뿌리가 없으면 흔들리고 언제 넘어질지 모르잖습니까? 우리는 뿌리가 있어야 되는데 세상 사람들은 뿌리가 없어서 늘 흔들리지만 우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뿌리에 의지해서 믿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토비 도슨이라는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에서 동메달을 딴 한국계 미국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981년 2살 때 부산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미아가 되어 울고 다니는 것을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스키 강사 부부가 입양을 해서 거기에서 자라났습니다. 한국계 미국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스키를 열심히 연습해 가지고서 올림픽에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는 마음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뿌리를 알 수 없습니다. 양부모는 좋지만 자기 친부모가 누군지 모르니까 늘 불행했습니다. 그런데 2007년, 그는 한국에 와서 매스컴의 도움을 받아 오랫동안 못 봤던 아버지를 26년만 만났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평생에 그렇게 마음에 흡족하고 만족하기는 처음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인데 아버지가 키우지도 못했는데 아버지를 만나자 그렇게 마음이 흡족하고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를 찾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의 뿌리인 아버지를 찾은 것입니다.
초대 교부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당신 품에 안기기까지 내 영혼은 언제나 불안에 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뿌리가 없으면 불안해요. 공포가 늘 마음에 있어요. 그러나 뿌리가 있으면 내가 뛰어가서 의지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의 뿌리는 하나님 아버지인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야훼께로다. 야훼가 여러분 뿌리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뿌리에게로 뛰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붙잡고 있으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 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은혜의 손길로 돌보아 주시고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마음속에 부족함이 없다는 그러한 인식을 가지기 바랍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삽니다. 그가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날 때도 나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다가 점심때도, 저녁때도 나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산다고 그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야 되고 그리고 마음속에 항상 꿈꾸고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꿈꾸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야 돼요.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믿어야 돼요. 그리고 입술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의로움에 부족함이 없다. 거룩함에 부족함이 없다. 건강에 부족함이 없다. 축복에 부족함이 없다. 천국에 부족함이 없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것을 다 채워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밑에 목장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와서 누워서 안심하고 주님의 은혜의 손길을 붙잡고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은 대로 살면 정말로 너무나 귀하고 놀라운 삶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같이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2.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심
그 다음에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 나가면 말씀의 생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도 생명수 아닙니까? 십자가 밑에 하나님 성령이 내려오시는데 요한복음 7장 37절로 39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령이 오시면 마음속에 생수가 또 넘쳐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여러분, 목마르다는 것은 참 고통스럽습니다. 저녁에 홀로 앉아 있을 때 마음에 버림받은 심령, 마음의 고독,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공포가 마음을 휘돌아 갈 때 마음 깊이 의지할 곳 없는 슬픔이 강물처럼 흐를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왜 자살하느냐. 자기 마음으로 자기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외롭고 너무나 캄캄하고 그러므로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 주님께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여,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성령으로 위로해 주시옵소서. 부르짖을 때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말씀으로 위로해 주셔서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평안이 생기고 감사가 생겨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체험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새로워지고 살 용기가 생기고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어디냐. 행복이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고 감사가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그 행복은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들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 실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나가서 짐을 풀어 놓고 내가 죄를 회개하고 내 마음속에 행복을 허락해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소망과 감사를 부어 주시면 앉아 있으면서 마음이 달라지고 일어나서 춤을 추고 싶은 생각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이 우리 마음속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수가 성 우물가의 여자 보십시오. 그는 남편을 5명이나 가졌다가 6번째 남편하고 살 때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니까 아침에 물 길러 오지 않고 대낮에 길러 왔습니다. 사람 없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하고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물 좀 달라고 하니까 어떻게 당신이 유대인으로써 사마리아 여자 나 같은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의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진 여자로서 남편을 5명이나 갈아재끼고 6번째 살 정도 같으면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하기를 네 남편 데리고 오너라 하니까 남편이 없습니다. 네 말 맞았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다 차버리고 여섯 번째는 남편 아닌 오다가다 만난 남자 데리고 있다. 그래가지고서 네 마음속에 외로움과 고독함과 슬픔과 좌절과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는 생수를 마시면 남편 다섯을 갈아치우지 않아도 마음에 만족이 온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드러내시고 그 여자에게 생수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당장 달라졌어요. 물동이를 두고서 너무 좋아서 사마리아 시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피하던 사람들에게 와보라.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내가 남편 5명이나 갈아재낀 것도 다 알고 계시더라. 나는 축복을 받았다. 그래가지고서 사마리아에 모든 사람들이 그 여자를 따라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에 더 있어달라고 간청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수를 주시면 만족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저는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 회의가 들어올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 믿는 목사이면서 어떤 때는 혼자 앉아 있는데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짓누르고 슬픔이 꽉 들어차고 다 버림받은 고독한 인생을 혼자 사는구나. 살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 언제나 십자가 밑에 나가서 예수님 바라보고 내 마음속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내 마음이 외롭고 고독합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 슬픔과 이 고독과 이 외로움과 이 좌절감을 주님이 채워주시고 주님이 돌보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 희한하게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희한하게 마음이 싹 달라지고... 안정이 되고 사는 즐거움이 마음속에 회복되는 것입니다. 목사인 나도 그런데 일반 평신도인 여러분이 그런 것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요,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라. 반드시 그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시므로 예수님을 잊지 말고 예수님께 찾아가면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는 언제나 쉴만한 물가로 가서 물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심
셋째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살려내는 것입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된 영혼을 다시 살려 일으키는 것입니다. 낙심되고 좌절된 사람이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난 다음에 생수를 받아 일어날 때가 많지 않습니까?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독수리는 한 70년 삽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40년이 되면 환갑이 와요. 독수리는 환갑이 오면 환갑 때 산위에 가서 바위에 앉아서 부리로 바위를 쳐서 부리를 뽑아 버립니다. 그리고 바위에서 발톱을 때려가지고서 발톱이 다 빠져 버립니다. 그리고 뒹굴어가지고서 날개가 다 빠집니다. 알몸이 되어서 태양을 바라보고 먹지도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둥이가 새로 나와요. 발톱이 새로 나와요. 털이 새로 나와요. 청춘이 새로워져서 그 다음에는 힘차게 하늘을 향해서 날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30년을 독수리가 새롭게 되어 사는 것처럼 여러분 독수리가 새로워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앙망하고 기다리면 그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사이는 70년 평균 살고 80년, 90년, 100살까지도 산다고 하는데 살아도 기진맥진해서 살면 안되잖아요.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살기 위해서는 주님께 예배드리고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을 앙망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독수리가 태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주둥이가 새로 생겨나고 발톱이 생겨나고 털이 새로 생겨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새로운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생겨나며 용기와 힘과 사랑과 행복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수리같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요한삼서 1장 2절처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범사에 잘되는 것이 일어나고 강건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11절에 있는 말씀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야훼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나님을 앙망하고 예배드리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은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사야 32장 1절로 2절에 있는 말씀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하나님을 앙망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해주시는데 예수님께서는 광풍을 피하는 곳이다.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광풍이 불어옵니까? 예수님 안에서 광풍을 피해서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고 폭우를 가리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주님 가리워 주셔서 우리가 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만들어 주시며 마른 땅에 냇물 같아서 마른 땅에 냇물이 없으면 모든 생물이 다 죽는데 마른 땅의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바위와 같다. 쉴 곳이 없는 곳에 뜨거운 곳에 바위 그늘에 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것,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아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면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알고서 이를 기도하면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슬하에서 내 영혼이 새로워져서 하늘로 날아올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게 만들어 주는 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혈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의의 선물을 주셔서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선물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로 10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우리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직접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의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갈 동안에 죄를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역사해 주셔서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죄를 멀리할 수 있는 용기와 힘도 주시고 죄와 끈도 끊을 수 있는 힘도 에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안됩니다. 목자가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가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리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나 돈이 있어도 외롭습니다. 가장 큰 이 세상의 고통 중의 하나가 외로움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외롭고 권세 있는 자는 권세 있는 자대로 외롭고 사람들은 다 우리를 손가락질하고 정죄할지라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거듭거듭 용서하시고 제2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를 늘 푸른 초장에 눕게 하셔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주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아예 주님께 한번 의지해 보십시오. 죽을까 싶어 오지를 못하는데 죽으면 죽겠다고 하고 맡겨버리면 주님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께 맡겼다가 안 돌봐주면 나만 손해보지 않느냐 그렇게 하는데 아예 손해 볼 요량하고 맡기십시오. 아예 죽을 요량하고 맡기십시오. 옛날에 내가 어릴 때 우리가 아버지가 마루 끝에 서있는 나를 보고 용기야 뛰어라! 뛰어라! 내가 안아주마. 내 생각에는 아버지가 안 안아주면 나는 떨어져서 박살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못해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안 믿느냐?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는 것 알지? 그러므로 뛰어라. 그래서 내가 우리 아버지 보고 아버지 나 뛴다! 하나, 둘, 하나, 둘 아 못 뛰어! 내가 안아줄테니까 뛰어라! 하나, 둘, 하나, 둘 아이구 나는 겁이 나서 못해. 아버지가 나중에 화를 내십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느냐? 뛰어라! 그래서 나중에는 눈 딱 감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각오를 하고 뛰니까 아버지가 덥썩 받아주시더라구요. 한번 받아주니까 그 다음에는 아버지만 있으면 아버지 나 뛴다~ 뛴다! 아버지가 뛰어와서 안아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어떻게 믿느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 믿는다고 불꽃 가운데 던져 넣겠다 했는데 나중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불꽃 가운데서 건져내 주실 것이요. 안 건져 내주더라도 우리는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 믿음을 믿을 때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십일조 드리고 교회 성수주일하고 그 다음에는 주님께 내어 맡기게 되기를 내 삶을 다 내어 맡기고 주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이끌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행복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독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워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동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은 여러분을 이해, 동정, 사랑할 수 없지만은 주님은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걸머지실 때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처지를 다 아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도움을 베풀지 않고 구해야 주시는 것입니다. 구하지 아니하면 안 주시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구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항상 주님이 목자되신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목자가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 것을 꿈꾸고 믿고 입술로 시인을 해서 시편 23편을 늘 외우십시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시편 23편을 외우는 것입니다.
저가 나의 목자가 되어서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내 마음속에 위로를 받고 나를 의롭게 소생시켜 주셔서 전인구원을 주시고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는 이 주님이 계시므로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빽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 때도 훌륭한 빽이 있으면 여러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자식들도 부모가 있을 때 마음이 든든하고 좋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이 세상 사회에서도 연줄이 있어 사람들은 대학교나 고향이나 씨족사회 줄을 잡으려고 애를 쓰는데 우리에게 제일 좋은 줄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사랑하는 주님이시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아들로써 우리를 동생들로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로 삼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시고 여러분과 나를 예수님의 동생으로 다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같이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살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귀한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 오셨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러분께서 예수 그리스도 목자와 함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의 목자가 되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감사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주를 따를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시는 주님, 우리 모두다 이끌어 푸른 초장에 누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옵시고 쉴만한 물가에 나가서 마음에 안식과 휴식과 행복을 얻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힘으로 의롭게 살 수 없사오니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의롭게 살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같이 사랑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모든 우리에게 기적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염려를 주께 맡겨라
시 23:1-6 / 정근두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오신 이웃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시편 23편을 다시 한 번 살피려고 합니다. 시편 23편은 성경 가운데서 그리고 시편 가운데서도 가장 사랑받는 말씀입니다.
이번 여름 동안 시편 23편을 계속해서 살필 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고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첫 번째 자리에 오는 스트레스는 염려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염려를 애완동물처럼 옆에 두고 삽니다. 돈 문제로 염려하고, 부부관계로, 자녀문제로 염려하거나, 갑자기 암 진단이라고 받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건강문제로 염려를 하곤 합니다. 직장 때문에 염려하는 샐러리맨뿐만 아니라 자영업자나 CEO라도 염려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시면 염려는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염려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염려는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셋째로 염려는 건강에 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염려, 왜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염려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무 것도 솥에 넣지 않고 뭉근한 불로 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기어를 중립에 두고 가속페달을 밟는 것 같이 공회전만 할 뿐입니다. 연기만 나고 소음만 날뿐이지 차는 조금도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이 염려는 결코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염려해도 지나간 일을 바꿀 수 없습니다. 염려는 과거를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미래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란 삶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염려, 왜 비합리적입니까? 문제를 확대시키기 때문입니다. 문제만 집착하면 모래 무더기도 나중에는 산더미처럼 보이게 합니다. 염려, 그것은 집착하면 할수록 점점 더 커집니다. 염려되는 것을 곱씹을수록 그것은 점점 더 엄청 나 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결단하셔야 합니다.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계속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염려, 왜 건강에 좋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몸은 염려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염려하기 시작하면 골치도 아프고 등줄기도 쑤시고 밤이면 잠도 오지 않고 밥맛도 떨어지고 먹어도 소화도 잘 되질 않습니다. 우리의 신체는 염려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부자연스런 일입니다.
보십시오. 동식물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비 내리는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시려고 현관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 뼘도 안 되던 커피나무가 잘 자라서 올해는 예쁜 꽃을 피우더니 열매도 맺힌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화분에 심겨있는 커피나무인데 그 한정된 흙속에 뿌리를 내리고 장맛비를 즐깁니다. 화분이란 그 좁은 환경에서도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 염려합니다. 염려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우리는 염려합니다. 염려로 인해 불행해지고 건강까지 해칩니다. 염려라는 옛 영어는 “목을 조르다”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염려는 숨을 쉬지 못하게 목을 조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질식시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염려하는 것은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무의식적인 학습을 통해서 염려를 잘 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학습해서 획득한 것이라면 학습자체를 포기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학교에 보냈는데, 가서 배우는 것이 좋지 않으면 학교를 안 보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학교, 왜 갑니까? 유익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냅니다. 학습, 왜 합니까? 배워두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려학습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염려의 해독제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1. 하나님이 나를 돌보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첫 문장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우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그가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자, 어떤 일을 합니까? 무엇보다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먹을 것을 공급하고 쉴 곳을 마련해 줍니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합니다. 해치려는 짐승들로부터 지켜줍니다.
또한 목자는 양들을 인도합니다. 그들이 가야할 곳을 몰라 할 때 양들의 갈 길을 인도하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바로 잡아줍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도 해결해 줍니다. 목자는 양들이 필요한 모든 기본적인 것을 채워줍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을 여러분의 목자로 삼기만 하면,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여러분을 보호해 주십니다. 여러분을 인도해 주십니다. 바른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기만 하면 이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런 좋은 목자이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은 온순히 인도 하시리 로다.”(사 40:11)
신약 사도는 더 분명하게 약속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욕심을 채워 주리라고 약속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필요와 소욕은 다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욕을 다 채워주셨다면 우린 세상에 더 없는 망나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쓰레기 인간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원하고 욕심내는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하진 않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정말 비참하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 가운데서 그분의 풍성하심을 따라 넘치도록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채우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자, 그러면 그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성품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면 약속대로 하실 것입니다. 신실하지 못하시면, 약속을 어겨서 우리를 실망시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모든”이란 무엇을 포함한 단어입니까? 아이들 학원비, 가족의 생활비, 집세, 아파트 관리비, 공공요금, 병원비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그리고 영적인 필요도 다 포함됩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영적인 필요, 경제적인 필요, 건강상의 필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모든 필요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면 염려할 아무 것도 남겨 두질 아니하실 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대로 된 보험회사이라면 약관에 보장된 모든 것을 보험가입자에게 이행할 것입니다. 보험약관에 무엇이 보장되고 무엇이 아닌지만 확인하고 계약하면 보장된 일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7,000가지 넘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들을 알기만 하면 염려할 것이 여러분에게 남겨질 수가 없습니다.
염려란 도움이 안 되고 합리적이지도 않고 건강에 도움도 되지 않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목자가 되시면 염려란 여러분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염려할 때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말하자면 무신론자로서 처신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행동으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분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주시지도 않는 분으로,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것처럼 처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히 염려를 취미처럼, 전공과목처럼 붙잡고 계신 성도 여러분, 염려하는 여러분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염려하는 순간마다 여러분은 무신론자로 처신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염려란 실천적 무신론자의 태도입니다. 약속을 지키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면 약속을 지키실 의사도 능력도 없는 분처럼 대우하는 행위입니다. 이제 염려를 중단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묵상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십시오.
그러면 2 어떻게 좋으신 하나님을 목자로 삼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목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목자 삼는 이에게만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2.1 예수님을 목자로 모셔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주인인 것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 노릇하기를 중단하시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대우하고 모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주님이란 뜻은 무엇입니까? 주님이란 말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관장하는 분을 부르는 말입니다. 오늘날 말로 바꾸면 보스란 말입니다. 총지배인, CEO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최고의 위치에서 우리 삶에 대한 최후의 말을 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삶에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최후의 선언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시고 좌지우지 하는 분이십니다. 오늘 축복하는 자영업자나 사장님 여러분, 여러분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례를 줄 때 무어라고 선언했는지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를 우리 모든 문제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자로 믿기로 하고, 여러분의 삶에 주인으로 섬기기로, 총지배인으로, CEO로 모시기로 한 아무개에게 성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여러분이 안고 있는 모든 염려는,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이든, 염려가 여러분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여러분을 다스리게 하셔야 합니다. 모든 염려의 밑바닥에는 여러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마음대로 하려는 시도가 염려입니다. 여러분이 책임질 일이 아닌데 책임을 지려고 시도하는 것이 염려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자녀들 문제, 아니면 정치문제, 한국경제문제, 지구환경문제 그 무엇이든 여러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이 다스리려 들면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염려란 경고의 불과 같습니다. 염려하기 시작하면 불이 켜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향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하려고 든다는 신호입니다. 모든 염려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뭐든지 다 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통제하려고 드는 것이 바로 염려의 시작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시고 누가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는 분입니까? 하나님은 강제로 여러분의 목자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선택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 자신이 통제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통제하도록 맡겨드리든지 결단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공동으로 운전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고를 내고 하나님이 비난받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강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택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노릇을 하든지 하나님께 삶을 내어맡기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자신보다 훨씬 더 무엇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행복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선택을 하실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려고 하면 여러분은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노릇을 하려들면 염려하게 마련입니다. 만사를 통제하려하면 여러분이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불가능한 시도입니다.
하나님의 지시 없이 여러분 자신의 길을 가려고 들면 당연히 염려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안이 여러분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매사를 다 염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면 그분이 여러분의 주가 되시고 목자가 되십니다. 여러분이 땀을 흘리는 대신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저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 나의 주님으로 모시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60년이 넘는 세월에 한 번도 실망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결단하실 차례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으시면 둘째로 2.2 만사를 두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염려하는 대부분의 일들을 두고 기도드리십시오.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과 관계를 맺고 친구가 되길 원하십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까? 그러면 모든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모든 것을 두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염려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염려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염려는 물도 고기도 넣지 않은 가마솥에 뭉근 불을 떼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염려가 될 때 택일하십시오. 기겁하시렵니까? 기도하시렵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제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더 나은 선택을 하십시오. 염려에 싸여 지내지 말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기도하는 편을 택하십시오.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사는 훨씬 더 나은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신앙에 관한 사안만이 아닙니다. 교회에 관한 일만 아닙니다. 전도에 대해서만 아닙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합니다.
골라서 기도드리지 마시고 무슨 일을 두고도 기도하십시오. 큰일은 기도제목으로 삼고, 작은 일은 염려꺼리로 남겨두십니까? 아니면 작은 일을 기도제목으로 삼다가 큰일을 만나면 염려하기 시작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염려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기도할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하나님의 능력은 여러분의 염려보다 크십니다. 문제를 붙들고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시인은 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늘 우리 생각으로 가득 차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맡긴다.”는 말은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짐을 풀어놓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엄청난 스트레스 해소방안입니다. 여러분을 성가시게 하고 괴롭히고 스트레스를 주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던지십시오. 하지만 예배당에 와서는 낚시 줄처럼 던졌다가 나갈 때에 다시 당기지 마십시오.
염려란 낮게 깔린 구름과 같습니다. 우리는 밝은 태양을 볼 수 없어서 걱정하지만 구름 위에는 태양이 계속 빛나고 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구름 위를 날아보면 태양이 빛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시면 셋째로 2.3 한 번에 하루씩만 생각하십시오. 한 번에 하루에만 집중하고 생각하십시오.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그렇습니다. 내일 일은 오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십시오.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면 우산을 준비하시도 비가 떨어지기까지 우산을 미리 펼칠 필요가 없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때 우산을 펼치면 됩니다. 어제 비가 왔다고 오늘 우산을 펼칠 필요도, 내일 비가 온다고 해서 오늘부터 우산을 쓰고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제를 위해서 오늘 염려할 필요도 없고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지금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간 오늘조차 망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엄청나 보이는 미래를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작은 조각으로 나누십니다. 24시간으로 토막 낸 하루하루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린 다만 한 번에 하루만 살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표준새번역)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하루하루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루하루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선배들을 고백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이 세상 어디에도 염려를 멈추게 할 약은 없습니다. 염려를 멈추게 할 세미나도 테이프도 책도 없습니다. 영적 경험 한 방으로 다시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은 없습니다. 염려에 대한 처방은 하루하루 사는 것입니다.
제가 먹는 당뇨약처럼, 여러분이 먹는 고혈압 약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복용하십시오. 순간순간 사는 것을 터득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노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실 것인지를 순간순간 물어야 합니다.
내가 주인노릇을 하면 염려할 것이 수월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노릇을 하면 하나님이 그 문제들을 처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왜 여러분이 염려합니까?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여러분이 나설 일은 아닙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염려하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성가시게 하고 걱정하게 만드는 요인입니까? 위장장애를 일으키도록 하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처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히 가는 길을, 겪는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도 아시고 무슨 문제에 봉착해 있는지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에 첫 자리에 두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길 원하면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십니다.
그것이 산상보훈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바입니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마 6:33,현대어성경)
이번 여름에는 시편 23편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십시오. 여러분의 스트레스는 날아갈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여러분의 스트레스를 처리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모든 염려를 잠재우십니다.
수천 년 동안 부족함 없이 성도들을 인도하신 목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새로 나타난 교주를 바라보면 여러분은 속고 미궁을 헤매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목사들은 모두 다 틀리고 그 한 목사만 옳은 것처럼 보이면 여러분은 이미 이단에 감염된 사람입니다. 빨리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한 적이 없는 분이라면 오늘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의 목자가 되셔서 여러분의 삶을 보호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 맺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금 염려하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다른 모든 이는 가짜요 모조품입니다. 하나님만이 지금 우리의 유일한 목자시오 앞으로도 목자가 되실 것입니다. 분명한 의탁을 하십시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벧전 5:7상, 표준새번역) “늘 여러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벧전 5:7하, 현대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확실한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염려와 걱정에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자영업자 여러분, 그리고 CEO 여러분, 더 이상 사업의 짐을 경영의 짐을 지고 살지 않아도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상한 감정을 주께 맡겨라
시 23:1~3 / 정근두목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자리를 찾으신 이웃 여러분, 우린 여름을 맞이해서 시편 23편을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을 통해서 현대인의 삶을 위협하는 7대 스트레스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소시켜 주시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는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시편 23편 3절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기적으로 우리 영혼을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입는 상처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 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때론 낙담되기도 하고 때론 침체에 빠지기도 하고 절망의 자리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곤비하고 실패하고 좌절과 두려움을 겪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숨겨진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찰과상도 입지만 때로는 칼자국 같은 깊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하십니까? 먼저 하나님께 죄책감을 내어 맡기십시오. 다음으로 슬픔을 가져가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론 원한을 대체하게 하십시오. 죄책감, 슬픔, 원한은 우리의 감정을 손상시키는 세 가지 주범입니다.
1. 우리의 죄책감을 제거하도록 내어 맡기십시오.
죄책감보다 더 우리의 영혼을 재빠르게 상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 잘못이 바로 내 머리에까지 미치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내 몸의 상처가 곪아터져 악취를 내니 이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더 떨어질 데 없이 무너져 내린 이 몸, 온종일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시 38:4-6, 표준새번역)
우리 모두는 죄책감을 느끼는 수많은 이유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실수하기 때문입니다. 본성상 우리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죄책감을 멀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로운 삶을 펼쳐도 죄책감은 우리의 의식과 함께 따라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그렇습니다.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넣어두신 등불과 같아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다 비치어 보기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린 숨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한 죄책감을 떨쳐 버릴 방안은 무엇입니까?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부인하고 없는 것처럼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거를 파묻어 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파묻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죄책감은 되살아나서 여러분을 괴롭힙니다. 죄책감을 부인하는 것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아닙니다.
아니면 죄책감을 축소시키면 될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괜찮은 거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왜 여전히 죄책감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아주 잊어버리고 살면 안 될까요? 죄책감을 축소시키는 것은 성사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기준을 낮춤으로 죄책감과 타협할 수 있을까요? 죄책감을 느낄 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죄라고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어. 거듭해서 죄를 범하면 더 이상 죄처럼 보이지 않아.”
열 번째 살인은 처음처럼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거듭거듭 한다면 여러분의 양심은 결국 화인 맞아서 더 이상 죄책감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여러분은 죄책감을 합리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일은 하거든.”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사실 누구나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누구나 한다고 해도 그것이 여러분이 범한 행위를 가볍게 하진 못합니다.
그리고 죄책감이 들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재빨리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해서 죄책감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을 하면 자책을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처벌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 누군가가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자신이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설정해 두었습니다.
죄책감이 여러분을 괴롭힙니까? 죄책감이 여러분을 침체시킵니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습니까? 때로는 성공한 사람도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에 동굴 속으로 숨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성공했지만 떳떳하지 못한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 도피하는 이 모든 시도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죄책감에 대해선 오직 하나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깨끗이 치워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상과는 먼 거리에 있을지라도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없다고 선고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으로 값없이 우리 죄를 없애 주셨기 때문입니다.”(롬 3:23, 24, 현대어성경)
기독교의 진수는 여러분의 죄 값을 이미 예수께서 청산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한 모든 죄를 이미 청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여러분이 행한 잘못이나 앞으로 짓게 될 잘못이나 실수, 후회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죄책감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죄 값을 어떤 심리학자도 처리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용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덜 악하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행한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미 여러분을 위해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오직 온 우주의 창조주만 여러분을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행한 죄가 무엇인지 저는 모르지만 상관이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공짜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우리는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은 공짜 선물입니다. 모든 죄를 깨끗하게 말소시킵니다. 다시금 새로 시작하게 만듭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새 출발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 차례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는데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몇 차례가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방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즉각적이고 공짜요 완벽한 것이며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맨 첫 번 용서를 구할 때 모두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구한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죄의식을 느끼신다면 그 죄의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괴롭히려는 사단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단은 여러분이 좋지 않은 느낌을 갖기를 원하고 계속해서 불안해하기를 바랍니다. 사단은 여러분이 죄를 짓기 전에는 그것은 별거 아니라고 부추기고 죄를 지은 다음에는 “그건 너무 큰 죄라서 하나님도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괴롭힙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죄를 용서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사실을 기록한 명세서를 지워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목을 적은 명세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 무효로 만드셨습니다.”(골 2:13, 14, 현대어성경)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은 계명을 어긴 증거를 씻어버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모든 문서의 기록을 못 박으셔서 완전히 무효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그 용서는 완벽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다시는 건져 올리려는 시도를 하지 마십시오. “낚시금지” 팻말에다가 기억금지령까지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잊으셨기에 여러분도 잊어버리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용서받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삶에 무언가 잘못될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갚아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처벌하시기를 즐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가 처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처벌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는 십자가 위에서 다 청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대신 처벌을 받았는데 여러분을 또 처벌하실 리 없습니다.
우리가 처벌받지 않도록 주님께서 자원하셔서 대신 처벌받으셨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모든 죄책을 감당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삶의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를 상하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에게 슬픔을 안게 줍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삶에는 외로움도 있습니다.
여기는 결코 천국이 아니라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불완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고독을 느끼고,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절망하기도 하고 처절한 외로움을 겪기도 합니다. 슬픔과 상실, 고통, 비탄을 경험합니다.
30년 넘도록 함께 살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처절한 고통을 맛보기도 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때로는 버림을 받고 이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 누군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거부당한 고통이란 아무도 겪지 말아야 할 슬픔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겪는 아픔과 외로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을 마치고 텅 빈 집에 들어가서 펑펑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이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들 자기들의 일로 바빠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나가는데 자기만 고통 속에 질질 끌려가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아픔에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상처를 싸매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예수님만이 온전한 치유를 하실 수 있지만 우리도 주님의 치유사역에 함께 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슬픔으로 찢길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그 때 “그랬더라면”하고 아쉬워하고만 있으렵니까? 아니면 두꺼운 껍질 속으로 깊숙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시렵니까? “다신 아무도 날 상처주지 못하게 숨어있을 거야.”라고 되뇌겠습니까?
그것이 유일한 선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선택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맡길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다윗은 슬픔을 아는 사람이고, 슬픔이 얼마나 우리를 망가뜨리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한에 사무쳐서,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혼과 몸도 기력을 잃고 말았습니다.”(시 31:9, 표준새번역)
때로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슬픔과 비탄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하고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를 두고 우리는 탄식하고 슬퍼합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12장에서 어떻게 슬픔을 다룰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더불어 간음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까지 죽였습니다. 그 죄책감을 시편 51편에서 토설합니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때 시편 51편을 읽어보십시오. 거기서 회복의 길을 찾아보십시오.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그 불의한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매우 심하게 아팠습니다. 다윗은 슬퍼하며 금식하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나입니다.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것은 나입니다. 부디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이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 다윗은 슬픔 가운데 무엇을 했습니까? 세 가지 행동을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우리가 배울 점입니다. 첫째로 그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신하들의 질문에 대한 다윗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삼하 12:22, 23)
살다보면 부모에 의해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동료들이나 친구들에 의해서도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아무리 슬퍼해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감정적 회복과 치유, 영혼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 상처를 수용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살아온 배경을 바꿀 수 있질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상처도 바꿀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마음과 의지, 감정을 치유하는 첫 걸음은 수용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변화가 불가능한 것은 수용하십시오.
둘째로 과대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십시오. 하나님께 그것을 기도로 올려 드리십시오. 살다보면 상처를 입는 것도 기정사실이고 고통을 겪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비참해 지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사항입니다.
시편 37편을 보십시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난관에 부딪칠 때 재앙으로 여기고 절망하는 대신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극복하길 간구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러자 다윗은 땅바닥에서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성전으로 들어가서 주께 경배하였다.”(삼하 12:20a) 다윗은 슬픔을 딛고 일어나 성전을 향했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힘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셋째로 잃어버린 것보다 남겨진 것에 주목하십시오.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 뒤에 다윗이 자기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동침하니, 그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하였다”(삼하 12:24)
비록 불의한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지만 자식의 죽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부모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고 말하는가 봅니다.
그 아이의 죽음으로 자신도 슬펐으나 다윗은 깊은 슬픔에 빠진 자기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했습니다. 남겨진 아내와 그로 인해서 새로 얻게 된 아들 솔로몬을 주목한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지금 슬픔의 강을 건너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끝장 내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끝나진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감정을 치유하시도록 한다면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죄책감을 제하고 슬픔을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끝장을 낸 것이 아닙니다. 지금 믿기지 아니해도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여러분의 삶에 최상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씌어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차게 하셨다 . . .”(사 61:3)
이제 여러분 각자가 선택해야 합니다. 고통의 감옥에 갇혀 남은 삶을 보내든지,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괴로운 마음 대신 찬송을 선택하든지 택일하셔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한을 맡으시도록 하십시오.
원한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한 것으로부터 생깁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한 일로부터는 죄책감을 갖지만 다른 사람이 내게 한 일로부터는 원한을 품습니다.
인생길을 걷다보면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비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 품게 되는 원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쓴 뿌리를 품고 살 것인지 더 나은 삶을 사는 계기로 삼아 단 열매를 맺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상황이 우릴 짓밟게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우리로 하여금 쓴 뿌리를 갖게 할 수도 있고, 단 열매를 맺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품는 원한은 다른 사람을 조금도 해치 못합니다. 다만 여러분 자신을 해할 뿐입니다. 어쩌면 원한을 품게 한 그 사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 길을 갈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질투 때문에 죽는 법이다.”(욥 5:2) 잘못하면 과거에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도 상처를 주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제발 여러분의 과거는 지나가게 하십시오. 마음에 되새기지 않는 한 그들은 여러분에게 다시 상처를 입힐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떠나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여전히 무덤에서부터도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원한을 품는 것은 그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분통 터뜨려 봤자 자네 몸만 상할 뿐이지. 자네가 그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땅이 뭐 버림받기라도 할 것 같은가? 바위가 끄떡이라도 할 성싶은가?”(욥 18:4)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분노를 처리해야 합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이 세상은 죄 때문에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악한 사람들이 잘 되기도 합니다. 공의가 항상 세상에는 시행되지 않습니다. 여기는 죄악 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날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공평으로 판단하실 심판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미해결된 것을 해결하실 것입니다. 범죄와 불의, 편견과 인종차별, 강간, 살인, 모든 죄악을 정리하실 것입니다.
한날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분이 스스로 보복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분노가 여러분을 삼키고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골 3:13, 현대어성경) 심판 날이 오기까지 분노와 원한을 품지 말고 오히려 용서하는 마음을 품고 원수 갚음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성도의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무지 그 인간은 용서할 수 없다고요? 그래서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그러면 손해는 여러분 자신이 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상처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때만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아직도 죄책감을 갖고 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끔씩 튀어나오는 죄의식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무리 축소시키고 합리화시키고 타협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해도, 아니면 자기의 가슴을 쳐도 처리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책감을 처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하시는 일에 전문가이십니다. 새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흰 눈처럼 양털처럼 깨끗케 하십니다. 계속 죄책감을 갖고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받아들이기만 하십시오. 더 이상 과거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자기 암시도, 자기 치유법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의 목자이시고 구원자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죄책감을 처리하십니다.
슬픔과 비탄 가운데 투덜대고 불평하며 사시렵니까? 잃은 것 대신에 남은 것을 바라보십시오. 슬픔이 여러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스스로 만든 비탄의 감옥 속에 자신을 처넣습니까? 아무도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가둘 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슬픔에서 건저내시는 분이십니다.
원한과 복수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과거에 만난 사람이 현재의 여러분을 계속 상하게 허용하십니까? 이제는 미움에서 벗어나십시오. 더 이상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여러분에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여러분의 죄책감과 슬픔, 원한을 맡기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길 원하십니다. 주님께 자신을 맡겨 드리면 주님은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다윗처럼 기도하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 42:5) 예수님은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길 원하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목자로 삼고 자신을 맡기면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아멘.
음침한 골짜기를 주께 맡겨라
시 23:1-6 / 정근두목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자리를 찾으신 이웃 여러분, 지난 한 주간 폭염 가운데서도 평안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울산교회를 통해서 위대한 여름 이야기를 기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특히 올 여름에는 글로벌 프로젝트에 따라 우리 울산교회 청소년들이 미국에서, 유럽에서, 남기는 발자국이 복되게 하여 주시길 소원합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우리 주님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시편 23편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는 염려, 분주함, 상한 감정, 망설임을 치료하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 때에 도우시는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항상 해만 비취고 비가 오지 않으면 사막이 된다.”는 아랍속담이 있습니다. 의기소침하거나 낙담이라곤 경험해보지 못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한 번도 드리우지 않는 인생길을 걷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무미건조해질 것입니다. 삶의 깊이도 없고 성숙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좋은 시절도 나쁜 시절도 경험해야 합니다. 삶이란 슬픔과 기쁨의 복합체입니다. 삶이란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 정상과 계곡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삶의 음침한 계곡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도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1 인생의 골짜기를 만날 때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살면서 이런 힘든 시기, 골짜기로 만날 때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다섯 가지 있습니다.
1.1 골짜기들을 만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인생길에는 골짜기들을 아니 만날 도리가 없습니다. 꼭 만나게 되므로 미리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그런 골짜기를 막 들어서는 분도, 지금 이런 골짜기에 처한 분도, 막 이런 골짜기에서 벗어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살다보면 골짜기를 만나는 것은 언제라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산마다 정상이 있는 것처럼 산마다 골짜기가 있습니다. 주님은 아주 현실적이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란 막연한 가정이 아니라 “환난을 당하는데”하는 현실입니다. 환난이란 반드시 우리가 만나는 현실입니다. 삶에는 어려움, 실망, 낙담이 있습니다. 고통, 슬픔, 질병이 있습니다. 좌절, 실패, 소진의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삶의 일상적인 부분입니다. 골짜기를 만날 때 뜻밖의 일로 놀라지 마십시오.
1.2 골짜기들을 만나는 것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약속하고 일정을 잡듯이 그것을 미리 계획할 수 없습니다. 골짜기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순간에 만납니다. 게다가 대개는 아주 힘든 시기에 찾아옵니다. 거기서 헤맬 시간여유도 없고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시기에 닥칩니다.
타이어가 터지는 것도 적절한 시간에만 터지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 때나 일어납니다. 그리고 대개는 그런 일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는 때에 일어납니다. 아주 불편한 시간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삶에서 낙담되는 시기를 예측할 수 있다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
골짜기는 갑자기 찾아옵니다. 예측을 불허합니다. 휴가의 고요함을 즐기는 순간, 그리고 그 행복을 고백한 순간 갑자기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우리를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넣습니다. 평안한 삶을 사는 와중에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여러분을 어두운 골짜기로 내몰기도 합니다. 정기검진을 하다가 발견한 결과가 우리를 불안의 골짜기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골짜기는 이렇게 모두 갑자기 다가옵니다. 신앙의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1.3 골짜기들이 찾아오는 것은 편파적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골짜기를 만나는 일로부터 면제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차단된 사람은 없습니다. 특정한 사람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문제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문제를 만납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문제를 만납니다. 문제와 시련, 어려움과 고통, 혼란과 낙담, 절망과 침체를 당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단지 여러분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골짜기는 나쁜 사람의 길에만 대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의 길에도 골짜기는 있습니다. 선악을 떠나서 단지 여러분이 사람이기에 여러분에게 골짜기는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오히려 악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착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닥치기도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골짜기는 불편부당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 5:45) 생의 골짜기,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게 될 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묻는 대신에 생의 골짜기는 누구라도 만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기 이 땅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4 골짜기들을 만나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골짜기는 지나가는 여정이지 순례의 길 모두가 골짜기로 구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골짜기는 계속되지 않습니다. 골짜기는 영구한 여정이 아닙니다.
다윗의 고백을 잘 들어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4절) 골짜기는 여러분이 한 평생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한 시점에 지나는 지역입니다. 지나가는 장소입니다. 어려운 시기, 힘든 상황, 고통스런 환경은 일시적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비록 우리가 골짜기에 접어들면 막다른 골목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터널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터널에 들어서면 결국 그 터널에서 벗어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터널이 생각보다 좀 길수는 있지만 영원한 터널은 없습니다. 터널의 입구에 들어서면 어두움이 지배하지만 빛이 다시 비취는 출구가 있습니다. 터널은 여러분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통과하는 지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 그는 때로 근심스러운 시험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기쁨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거기는 골짜기도 어두움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때로 당혹해 하고 낙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안고 신뢰한다면 여러분 모두는 거기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망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여기 8, 90년 사는 여정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영원 세월 속에 아무 문제없이 살게 될 천국과 비교하면 무시해도 좋습니다. 영원의 빛에 비추어보면 여기 잠간 겪는 환난은 신경 꺼도 됩니다.
베드로만 아니라 바울도 고백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래 가지도 않습니다.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고후 4:17, 현대어성경)
골짜기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 인생 여정에 비하면 짧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고통은 그러므로 생산적입니다. 고통에 대해 바로 반응하기만 하면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기간의 골짜기가 지나면 영원한 영광의 날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1.5 골짜기마다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목적이 있어서 여러분을 골짜기로 인도하십니다. 의심의 골짜기든, 침체의 골짜기든, 실망이나 낙망의 골짜기든, 패배와 상실의 골짜기든 그 배후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기뻐하십시오. 이 세상에서는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으로 괴로움을 당하겠지만 앞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벧전 1:6, 현대어성경)
예, 잠시 동안입니다. 일시적으로 여기서는 시달리기도 합니다. 온갖 종류의 시련이 여기에는 있습니다. 돈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마음이 편치 못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연한 일들은 없습니다. 그 모두가 우리의 신앙을 다듬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이러한 시련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순수한 것인가를 보고자 하는 시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곡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아름답게 만들어갑니다. 우리는 산정의 경치를 좋아하지만 거기서는 신앙의 깊이를 다질 수가 없습니다. 계곡을 통과하면서 신앙은 아름답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하다면 하나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캄캄한 골짜기에 부딪치면 비로소 무릎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골짜기에서 성숙되어 집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쁨으로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그 때가 여러분의 믿음이 단련되는 때입니다. 좋은 순간이 아니라 어려운 순간이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는 기회가 됩니다.
여러분의 평안함이나 편리함보다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성품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평안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성품을 빚어가는 데 하나님의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도 고난으로부터 면제 당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틀림없이 골짜기를 통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여러분을 다듬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고나 비극적인 일을 통해서 선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악한 일을 가지고도 우리 안에 좋은 성품을 빚어가는 일로 바꾸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제 오늘 설교에서 두 번째로 던지는 큰 질문은 2 어두움의 골짜기를 지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다윗은 고백합니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2.1 낙심하기를 거부하십시오.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하십시오. 신앙인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헤매지는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겁나서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당당히 걷는 자입니다. 차분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자입니다.
비록 죽음 그늘 드리운 깊은 골짜기 지난다 해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걸어가는 자입니다. 낙담하기를 거부하십시오. 여러분은 골짜기를 헤매고 돌아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골짜기를 지나갈 뿐입니다.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는 말 속에는 두려워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지적인 결단을 포함합니다. 지금 낙심해 있다면 여러분이 낙심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낙심은 언제나 선택사항입니다. 낙심하는 쪽으로 생각을 선택한 것입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선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적극적인 것을 바라보기로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행동을 의도적으로 시도하십시오. 그것은 선택사항입니다.
어떻게 낙심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을까요? 당면한 문제보다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하실 일입니다. 동일한 혼란과 비극과 위기 상황에서도 한 사람은 그것 때문에 무너져 내리고 다른 사람은 그것 때문에 굳건하게 됩니다. 차이는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렸습니다. 상황을 바라보는 대신에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문제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골 1:11, 표준새번역) 인간의 힘은 바닥납니다. 시련의 기간이 길어지면 힘이 더 이상 남아나지 않습니다. 에너지와 스테미나가 바닥이 납니다. 인간적인 인내는 끝이 있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생의 골짜기에서는 여러분 자신의 것보다 더 큰 능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리란 생각은 아예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힘으로 살만한 만만한 세상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닥치는 모든 상황은 결코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훨씬 강력한 전능자의 힘의 원천에 접속해야 합니다.
2.2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기억하십시오.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4절) 하나님은 우리가 골짜기를 통과할 때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약속할 뿐 아니라 그의 임재를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홀로 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물에 빠져 죽지도 불에 타서 죽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걷게 될 골짜기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은 골짜기로 행할 때에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골짜기를 모두 통과하기까지 우리를 오히려 인도하십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4절에 있는 극적인 인칭변화가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다윗은 지금껏 3인칭으로 하나님을 말하다가 여기서는 2인칭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가”에서 “당신의”로 바뀝니다.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치고 이제는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라는 단어는 영어에서는 2인칭 단수로 분명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이 짙은 골짜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합니다. 거기서 갑자기 지존자(至尊者)가 지근자(至近者)로 느껴집니다.
사망의 그늘이 짙은 골짜기를 통과할 때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께 말하기를 소원합니다. 종교의 대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주인으로 관계하길 원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음침한 골짜기로 갈 때는 주님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낙심과 절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을 가까이 다가와 주시고 우리에게 말씀해 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인 분으로 만나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대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며, 역설적으로 깊은 골짜기에서 비로소 산정상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때는 깊은 사망의 골짜기에서입니다.
2.3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스스로 기억하게 합니다.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막대기와 지팡이는 목자가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두 가지 기본 도구입니다. 막대기는 사람 키만큼 긴 것으로 그 끝에는 무거운 매듭이 있다고 합니다.
목자는 아주 숙련된 솜씨로 막대기를 사용하여 양떼를 공격하는 짐승들을 보호합니다. 여러분이 골짜기를 통과할 때, 삶의 어두운 골짜기를 갈 때에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무관심과 무감동으로 바라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여러분을 위해서 싸우십니다.
여러분이 침체에 빠져서 홀로 있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위해 싸우고 계십니다.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을 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하시고 여러분을 보호하십니다. 주의 막대기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는 손잡이 쪽 끝이 구부러진 긴 막대기입니다. 목자는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를 지도하고 안내합니다. 양떼를 자기 곁으로 가까이 오게 할 때에도 사용합니다. 아래편에 있는 양들을 끌어올릴 때도 지팡이를 사용합니다.
지팡이는 양떼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기도 하고 떨어져 있는 양떼를 가까이 오게 하고 아래편에 있는 양들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합니다. 인생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 결코 홀로 두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며 그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여러분을 보호하고 안내합니다.
골짜기를 통과할 때 무서운 것은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계곡의 벽에 걸린 그림자를 보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림자는 언제나 실체보다 커 보입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실제 문제보다 커 보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여러분을 해할 수 없습니다. 개의 그림자는 우리를 물지 못하며 칼의 그림자는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무섭게 하지만 우리를 해칠 수는 없습니다.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또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캄캄한 골짜기를 걸을 때에 태양이 비취기를 멈추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것 같고 나는 혼자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완전한 어두움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시면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어두움이 있다는 것은 어딘가 반드시 빛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에 그림자만 드리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십시오. 빛을 향해 돌아서십시오. 그 순간 그림자는 여러분의 앞에 드리운 그림자는 여러분의 뒤편으로 물러갈 것입니다.
두려움이 여러분을 엄습하면 그림자를 보지 마십시오. 지금 가는 방향과 정반대방향으로 돌아서십시오. 주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더 이상 주위에 둘러싼 어두움으로 인해서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실망하고 자신을 바라보면 낙담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어느 것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디 예수께로 시선을 고정시키십시오.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응시하면 세상 모든 것은 희미해 질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과 은혜의 빛은 세상의 어두움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림자를 응시하지 마십시오. 골짜기를 지날 때에 빛되신 주님을 주시하십시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시 34:19) 주님도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주께서는 의인들이 겪는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십니다.
말씀 맺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세상 사람처럼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신자들도 실망하고 병들기도 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기도 합니다. 경제적인 손실도 입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가정의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신앙인도 골짜기를 지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불신간에 동일한 골짜기를 통과하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에게는 골짜기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골짜기를 통과하지만 신앙인에게는 목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