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단무지
이윤학
옹벽 위에서 쏟아져 내린 개나리 줄기들
옹벽에 페인트칠을 한다.
보도블록 바닥으로
페인트 자국 흘러내린다.
옹벽 밑에는
일렬횡대로
종이박스가 깔렸다.
할머니들은
머릿수건을 쓰고 앉아
나물과 밑반찬을 판다.
개나리 줄기들이 내려와
허옇게 센 머리카락 쓰다듬는다.
염색 물을 들이기 위해
길고 가는 붓질을 한다.
노랗게 물든 단무지들
플라스틱 대야에 담겼다.
쳐다보는 사람 머릿속에
아득히 색소 물을 들인다.
개나리꽃
이정록
개나리 활대로 아쟁을 켠다
아쟁은 아버지 같다.
맨 앞에 앉아 노를 젓지만
물결소리는 가라앉고 거품만 부푼다
황달에서 흑달로 넘어간 아버지
백약이 무효인 개나리 울 아버지
해묵은 참외꼭지를 빻아서 콧구멍에 쏟아 붓고는
숨넘어가도록 재채기를 한다.
절대 안 되여 사약이여 사약,
한약방에서 절레절레 고갤 흔든
극약처방이 노란 콧물을 뿜어 올린다
오십 년 묵은 아버지 콧구멍,
개나리꽃사태다
이렇게 살어 뭐혀, 두두두 무너지는 북소리
몸 뒤집은 아쟁이 마룻장을 두드린다
이제는, 배도 노도 갈앉은 지 십수 년
속 빈 개나리 활대로 아쟁을 켠다
개나리나무는 내공 깊은 속울음이 있다
마디도 없는 게 악공이 되는 까닭이다
개나리 꽃그늘에 앉으면 자꾸만 터지는 재채기
아쟁소리 위로 노란 기러기발 끝없이 날아오른다
다시 황달로 돌아온 아버지처럼, 봄은
극약처방 없이는 꼼짝도 않는다
새치골 개나리
김해화
남자들 공장 가고 공사장 간 사이
닭 쫓는 개떼처럼 우르르 몰려 와
가슴에 불 하나씩 켜 놓고 사는 사람들
촉수 낮은 불빛들 깨뜨려 놓고
닭집 부수고 개집 부수고
쫓기는 달구새끼들 처럼
우르르 몰려가 버린 시청 철거반들
가슴이 캄캄해서
어젯밤 늦도록 깨진 불빛들 긁어모아
불 지펴 놓고
소주잔 기울이던 사람들
오늘은
아침까지 가로등 하나 불 켜 놓고
불빛 조금씩 나누어 갖는지
공사장 출근길 조용하고
민병국씨 집 울타리
조그만 개나리꽃
사람들 가슴에 되살아나는 불빛처럼
노오랗게 피어납니다
들길을 가며[野行]
이산해(李山海)
물가 역참에 창망히 해가 질 즈음
어촌 마을 주막집이 멀리서 보이는구나
개나리꽃 활짝 핀 긴 제방길을
비에 흠뻑 젖은 채 나귀 타고 오는구나
水驛蒼茫落日時
漁村酒店遠依依
辛夷花發長堤路
驢背歸來雨滿衣
산들바람 비를 몰아 푸른 도롱이 적시고
보드라운 방초는 가는 길에 비끼었네
백발로 꽃을 보다 때로 혼자 웃는 것은
천애 해변에 떠돌이 신세 잊기 때문이지
小風吹雨濕靑簑
芳草如茵細路斜
白髮看花時自笑
不知流落海天涯
『아계유고(鵝溪遺稾)』 권1, 기성록(箕城錄)
이산해의 작품에서 친근한 개나리꽃은 오히려 화자의 처량한 신세와 대비되는 소재로 등장한다. 비를 맞으며 나귀를 타고 오는 모습과 달리 활짝 핀 개나리꽃은 생기를 머금고 있다. 결국 백발의 화자는 꽃을 보고 웃으며 자신의 떠돌이 신세마저도 잊게 된다.
이른 봄에 북으로 가다가 영(嶺) 아래서 회포를 서술하다[早春北行嶺下述懷]
허목(許穆)
골짜기 높고 높아 산 기운 짙으니
해가 높았어도 구름 안개 걷히지 않네
깊은 구름 바윗돌 사다리 길 가파르니
깎아지른 골짜기가 구덩이 같네
층층의 고모성 몇 해나 지났는가
바위굴 솔밭 속에 띠풀집 보이네
개나리꽃 피고 버들눈 노랗게 트니
냇물은 맑아서 파랗게 물들겠네
嶺峽岧嶤山氣深
日高雲霞猶未斂
雲深石古棧道危
絶壑嶄如俯坑塹
姑母層城不知年
石洞深松見茅店
辛夷花開柳眼黃
川波生目綠可染
『기언 별집』 제1권 시(詩)
개나리꽃은 우리나라 어니에서나 피어 친근한 꽃이다.
허목은 구름과 안개에 대비되는 선명한 색채로 개나리꽃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것은 힘들게 넘어온 가파른 길 앞에 순탄하게 펼쳐진 푸른 솔밭과 대비해서 화자에게 심리적인 안도감을 주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목필화(木筆花)」
이규보
하늘이 어떤 물건 그려 내려고
먼저 목필화부터 보냈네
서대초와 짝을 이뤄
시인의 뜨락에 심게 했네
天工狀何物
先遣筆花開
好與書帶草
詩家庭畔栽
『동국이상국집』, 고율시(古律詩)
개나리꽃은 이른 봄에 피어나 봄소식을 전하는 대표적인 우리 꽃이다.
중국에서는 신이화(辛夷花)라고 불렀다.
중국의 『초사(楚辭)』 구가(九歌)에는 “신이화가 막 피어날 적에는 모양이 붓과 비슷하므로 북인(北人)들이 목필화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규보의 작품도 초사의 영향을 받아 피어나기 전의 꽃 모양이 먹을 머금은 붓과 같으니 하늘이 시인인 자신에게 보낸 것이라고 그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했다.
서대초[書帶草] (맥문동) : 다년생으로 꽃은 담자색(淡紫色)이고 열매는 벽록색(碧綠色)에 모양이 둥글다. 삼제기략(三齊記略)에 “정강성(鄭康成)이 불기성(不其城) 남산(南山) 속에서 학도를 가르칠 때, 잎은 부초와 같고 길이는 한 자 남짓한 풀이 산 밑에 났으므로, 사람들이 강성의 서대초라 불렀다.”라고 하였다.
맥문동 (麥門冬)의 다른 이름은 겨우살이풀, 구엽맥동韮葉麥冬, 문동虋冬, 맥동麥冬, 양시羊蓍, 양제羊薺, 양구羊韮, 마구馬韮, 애구愛韮, 우구禹韮,우가 禹葭, 인능忍陵, 불사약不死藥, 부루仆壘, 수지隨脂, 연계초沿階草, 계전초階 前草, 서대초書帶草, 수돈초秀墩草, 마분초馬糞草, 가변초家邊草 등으로 지역 마다 부르는 이름을 보면 그 특징을 알 수 있다.
서대초[書帶草] 한(漢) 나라 정현(鄭玄)의 제자들이 책을 맬 때 썼다는 길고도 질긴 풀 이름이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庭下已生書帶草 使君疑是鄭康成”이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4 書軒>
개나리
나태주
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들가들 턱 떨려라,
따슨 봄인가 빠끔히 창문 열고 나왔다가
되서리에 얼어 짓무른 손톱끝 발톱끝.
여덟 식구 밥시중 옷시중 설거지까지 마치고
손에 묻은 물기조차 씻을 새 없이
종종걸음 쳐 가던 등교길의 언 손 아이 내 누이야.
그렇지만 매양 지각하여
얼음 백힌 손을 쳐들고 벌을 서야만 했던 내 누이야.
너를 생각하면 지금도 두세두세 가슴 저려라,
밥짓기 설거지 빨래하기 싫다고
서울 와서 뒷골목 두터운 그늘에 깔려
어리배기 천치의 눈을 치뜨고 섰는 무우다리.
내 고향의 숫배기 누이들의 무우다리.
너희들의 상업은 또 오늘밤
한 묶음에 얼마씩 팔려가야만 한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