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수문水紋
이야기는 손을 씻는다
비치는 순간 흩어지려다 맺히려다
그러는 순간 서늘하게 번지는
손은 사실의 끝
끝에서 시작한다 자 이제
깨끗해지려 할 때의 손은
휘어지고 구부러지며 부유한다
물속 생명의 모양으로
잠기는 것은 헐벗은 것이며
그렇게 말해도 되나
만진 것과 만지려 했던 것
사이 휘감으려 드는
사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사이 비릿해지는 마음이 있어
이야기는 숨을 참는 것이다
손목 없이 떠내려가는 기분이거나
손목 아래 고장되는 기억이거나
사실은 미끄러질 뿐이다 이야기는
손을 씻는다
그렇게 시작한다 이야기는
사실의 끝이고
끝에서 시작하니까
그러기로 하자
처음 보는 둥근 무늬가 생겼다 지워져갔다
*수문 (무늬 문)
수면에 일어나는 물결의 무늬
물결처럼 어른어른한 잘고 고운 무늬
이야기-사월 사일
때가 되면
화분 속 식물들이 비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안이고 밖이고 할 것 없이 일제히,
나는 왼쪽 귀를 만져봅니다.
이야기-지독하게 추웠던 어느 밤
나는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누가 어깨를 툭 치고 무슨 일이냐 물어보면 그러면 나는 저기 사람이 있어요. 대답하려고. 거기 아무도 없고 식어버린 난로뿐이며 잘못 본 것 같군요 순순히 시인하게 되더라도. 나는 들여다보기를 그만두지 못한다.
입김이 날리고 근처 까치 떼가 성급히 울고 있을 때 나는 여전히 안을 들여다보면서 저기 사람이 춤을 추고 있어요 까치 떼 짖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지고 그러나 가늘게 눈 뜨면 아직도 쓸쓸한 내부 아무도 없이 싸늘히 식은 난로. 나는 난로에 불이 붙기를 따뜻해진 안에서 사람이 춤을 추게 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도 나의 어깨를 툭 치지 않았으므로 내게 무슨 일이냐 묻지 않았으므로. 까치 떼 딱딱한 울음소리마저 어두워지고 입김조차 보이지 않을 때. 누가 문을 여는 것 같군. 식어버린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어. 그리고 겨울밤 간절함은 사람의 춤과 같은 신비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시집 『겨울밤 토끼 걱정』 현대문학 pin 48, 202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