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살아갈 날만 보며 생을 이어갈 때,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대부분 순간에 죽을 날만 생각하며 생을 이어갔습니다. 고흐만큼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는 화가는 없습니다. '한'(恨)을 주요 정서로 삼는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한스러운 화가를 찾기 힘들어서입니다.
타고난 재능을 뒤따라온 치명적인 정신병. 이 상반된 성향에 고흐는 비운의 괴물이 됐습니다. 실제 고흐는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렸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책감을 뒤집어썼습니다. 앞서 그의 형은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습니다. 빈센트란 이름부터 당초 그의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평생 괴로워했습니다. 타고난 강박증은 악령처럼 그를 감쌌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부랑자가 됐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흐는 정신 질환을 뮤즈(Muse)로 만들었습니다. 슬픔과 불안은 고흐가 죽을 때까지 가장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들, 1881
밀레 영향을 크게 받은 그림입니다. 고흐의 그림은 '격렬함'으로 요약됩니다. 남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자기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겠다는 마음이 충만해야 나올 수 있는 그림입니다. 비싼 값에 팔겠다, 예쁘게 그리겠다는 마음이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자기가 그리고 싶어 본능에 끌려 그린 그림입니다. 다만 평소 알려진 그의 작품처럼 강렬한 선과 색채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고흐는 당시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낫을 들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소년,1881
단순한 선 하나에도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기술적으로 볼 때 세련된 수채화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격렬함은 기교를 넘어선 감정을 보는 이에 전달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초기, 기복이 심했던 그는 이 기간을 유독 그림이 잘 그려진 때로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슬퍼하는 노인, 1882(초기작은 스케치)
고흐의 초기작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안에서 우리는 고흐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감정이입에 병적으로 집착했고, 그만큼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고흐는 인물로의 노인을 그린 게 아닌, 실제로 그가 노인이 된 심경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지가 쳐진 버드나무, 1882
단순 풍경만 묘사한 수채화가 이렇게 큰 에너지를 전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 없이 흐릿합니다. 기복에 시달리며 10점 중 7~8점은 이런 그림을 그리던 그는 불과 5년 만에 세상에서 가장 비싼 화가가 됩니다.
헤이그의 작업실에서 내려다본 풍경, 1882
지붕 타일을 표현한 손놀림을 보면 얼마나 그리고 싶어 안달 난 상태에서 그린 그림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쁘게 그리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흐는 1853년 3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평범했습니다. 그때부터 난폭하고 제멋대로였을 것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오히려 소심하고 여렸다고 합니다.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신앙을 공부했으나 점차 흥미를 잃었습니다. 여동생 중 한 명인 엘리자베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고흐는 신앙이나 미술보다 자연, 특히 곤충에 병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고흐의 타고난 성향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대개 외로움이 짙은 사람들은 곤충에 흥미를 느낍니다. 곤충만큼 외롭지 않은 개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곤충은 집단생활을 기본 방침으로 살아갑니다. 상당수 종(種)은 죽을 때까지 무리를 짓습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개미와 벌 등은 특히 눈에 띌 만큼 높은 우애를 다집니다.
고흐의 미술 재능은 어머니에게 물려 받았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자연을 좋아한 고흐를 데리고 종종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야생화를 관찰하고 직접 만든 꽃다발로 수채화를 그렸습니다. 고흐는 9살때 어머니를 따라 처음 개와 곤충들을 스케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규교육을 받던 고흐는 15살이 된 1868년 3월 갑자기 자퇴합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다만 이때부터 정신 질환이나 발작이 시작됐을 것이란 추측이 있습니다. 소심한 고흐가 제멋대로인 발작 증세를 안고 학교생활을 영위했을 것이라곤 생각하기 힘듭니다.
시간이 흘러 1871년 고흐는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다시 학교로 보내자니 가족들도 부담을 느낀 모양입니다. 성실히 일한 끝에 나름 명성도 얻습니다. 고흐의 인생은 사실 여기에서 멈췄을지도 모릅니다. 화랑 일을 천직 삼아 헤이그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판화 인쇄일을 하던 중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본 후 가만히 앉아 일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많은 화가들은 지금도 고흐에게 영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 고흐가 평생 동경한 화가는 밀레였습니다. 고흐에겐 처음으로 취향이 생깁니다. 남들과 타협할 수 없는 분명한 색깔입니다. 확고한 취향은 다툼과 갈등을 만듭니다. 고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랑 일을 하다 손님과 싸우는 순간이 잦아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선도 바뀝니다. 당시 런던으로 파견갈 일이 있던 고흐는 처음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의 일상을 마주합니다.
헤이그의 화랑 일대와는 전혀 다른 풍경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밀레처럼 소시민의 일상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커집니다. 점차 염증을 느낍니다. 결국 잘나가던 화랑 일을 그만두고 브뤼셀로 떠납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고통이 그를 괴상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그는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해졌습니다.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그는 주위의 값싸고 보잘것없는 것. 그리고 떠들썩한 속세의 성공을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 고흐는 자신의 첫 뮤즈를 마주합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앞으로 이어질 큰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