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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3)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설 교 >
상처를 주께 맡겨라
시 23:1-6 / 정근두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자리를 찾으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더운 폭염 속에 평안하셨습니까? 아흐레 동안 키르기즈 지도자 세미나를 마치고, 단기선교 팀과 함께 지난 수요일에 돌아왔습니다.
올 여름 들면서 우리는 시편 23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현대인이 겪는 7대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해 주시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세상을 살고 있기에 상처를 받기 마련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질병으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면서 겪는 가장 깊은 상처는 사람들로부터 받습니다.
인간관계야말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천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관계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요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잘못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방을 살피기 전에 사람들이 상처를 줄 때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잘못된 반응 다섯 가지를 먼저 살피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1. 상처를 받을 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1.1 상처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무시한다는 것은 조용히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샌들 바닥에 끼어든 이물질처럼 견디며 걷는 것입니다. 다시 빠져나갈 것을 바라며 계속 걷는 것입니다.
때로는 전면 부인하려고 듭니다. ‘나는 문제가 없어요. 난 상처를 입지 않았어요.’ 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바를 부인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상처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니면 그것을 축소시킵니다. 별 것 아니라고 말하고 괜찮다고 하면서 그렇게 심하게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상처받은 것에 대해서는 다루기를 기피하는 것입니다. 이불 밑에 감추어 두고 아무 것도 처리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부담스러운 것, 성가신 것은 항상 밀쳐두려고 듭니다.
하지만 상처를 무시하는 것은 치료에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지금 무시하고 미루어두는 상처는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흔히들 세월이 치료해준다고들 말합니다만 미루기만 하면 때로는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일찍 발견하지 못한 암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면 대결하기를 지연시키면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점점 악화시킵니다. 상처를 즉각 다루지 아니하면 상처가 더욱 악화되고 더 넓게 퍼져갈 뿐입니다.
1.2 상처로부터 도피하지 마십시오. 대개 상처를 받으면 사람들은 도망갑니다. 도피합니다. 숨어버리고 문제에서부터 멀어지려고 합니다. 아무 것도 직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이런 시도를 했습니다. “나는 말하기를 ‘나에게 비둘기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다면, 그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서 나의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으련만, 내가 멀리멀리 날아가서, 광야에서 머무를 수도 있으련만. (셀라) 광풍과 폭풍을 피할 은신처로 서둘러서 날아갈 수도 있으련만’ 하였다.”(시 55:6-8)
이런 때 도피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어려움에 직면하면 우리는 어려움에서 도피하려고 듭니다. 공공건물의 문들은 그래서 모두 도망하기 좋도록 밖으로 열린다고 합니다. 위기에 몰리면 도망을 칩니다.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도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영화, 텔레비전, 게임, 오락장, 알코올, 마약, 도박, 이혼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돌아와 보면 동일한 문제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도 변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1.3 상처를 숨기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도망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지만 숨기려 합니다. 그것을 자기만 알려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면을 씁니다. 자기의 고통을 캄포라지 하는데 능숙한 사람들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만면에 미소를 띠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불변합니다. “뭐가 잘못되었나요?”라고 물으면 “아뇨,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은 없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아주 싫어합니다. 화난 것을 인정하지만, 상처 입은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우린 그렇게 숨깁니다.
어떤 이들은 받은 상처를 물질로 위장하려 듭니다. 좋은 차를 사고 집을 사고, 자기 주위에 여러 가지 것들로 위장합니다. 상처를 받으면 쇼핑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소유는 결코 고통을 보상하지 못합니다. 상처를 받으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상처를 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시 32:3, 표준새번역) 상처를 숨기는 것은 그것을 더 악화시키는 것뿐입니다. 상처를 숨기면 더 심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개방되고 진실하고 진정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합니다. 건강한 구역은 사람들이 자기의 있는 문제를 털어놓기에 안전한 분위기여야 합니다. 남의 상처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을 하지 않고 받아들여주며 사랑받는 분위기여야 합니다.
성경공부 소그룹이나 구역소그룹은 문제를 나누기에 안전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나눔이 시작되고 진정한 나눔이 시작되어야 치유가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의 상처가 훨씬 더 쉽게 아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자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나음을 받게 하십시오..”(약 5:16) 상처를 들어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의 상처를 서로 나눌 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붙잡고 있는 한, 마음속에만 넣어두고 있는 한, 치유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수년전에 입은 상처를 아직 붙잡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감추는 한 치유 받을 수가 없습니다.
상처를 서로 나누기에 최선의 장소는 소그룹입니다. 그래서 구역모임이나 소그룹성경공부 모임을 우리는 소중히 여깁니다. 누구나 사람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 상처의 유형은 다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상처를 가진 사람은 여러분이 유일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나밖에 없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꼭 같은 상처를 받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상처를 나눌 용기를 갖고 입을 연다면 위안을 받게 되고 치유의 첫 문을 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무시하거나 도망하거나 숨겨서는 치유할 수 없습니다.
1.4 상처로 인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들다보니 염려가 됩니다. 염려는 자신이 하나님 행세를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노릇을 하려들면 여러분은 더 비참해집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만사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홀로 온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염려는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염려는 결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합니다. 염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고통의 크기를 확대하는 것뿐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나쁜 비디오를 거듭 보는 것과 같습니다. 더 커질 뿐입니다. 어떤 문제를 두고 염려하면 그 문제가 점점 더 크게 느껴집니다. 마음속에 다시 떠올릴 때마다 문제는 점점 확대됩니다. 더 많이 염려할수록 점점 더 염려는 커집니다.
1.5 상처 때문에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원한을 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면 원한을 품습니다. 우리는 미워하고 화를 내고 조소적이 됩니다. 우리는 자기를 원한 속에 가두고, 자기 연민에 깊이 빠집니다.
“화가 치밀어서 제 몸을 갈기갈기 찢는 사람아, 네가 그런다고 이 땅이 황무지가 되며, 바위가 제자리에서 밀려나느냐?”(욥 18:4) 미움은 여러분이 받은 어떤 상처보다 더 여러분 자신을 상하게 만듭니다. 악의, 거부, 성적학대, 강간 등 그 어떤 것보다 더 여러분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미움은 안에서부터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며 결국 자신을 죽이는 독과 같습니다. 원한은 상처를 계속 받게 만듭니다. 그 사건을 붙잡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므로 다만 고통을 영속화시킬 뿐입니다.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원한을 품게 되고 원한은 고통을 지속시킵니다.
원한이란 과거로 하여금 현재를 통제하게 하는 것입니다. 원한은 과거에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상처를 준 그 사람을 미워하지만 원한은 당신 자신 말고는 아무도 해칠 수가 없습니다. 결코 상처를 준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못합니다.
생각할수록 너무 화가 나서 그 상처를 곱씹지만 상처를 준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즐겁게 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원한을 품는 것은 스스로 패배자의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화를 내는 자신만 상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이런 태도 아무 것도 상처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편 23편 5절은 들판에서 축제의 장면으로 전환됩니다. 잔치의 그림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세 단계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2.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이제 그러면 상처로부터 치유를 얻는 상징들을 차례로 살펴봅시다.
2.1 주님께서 원수를 갚도록 하십시오. 복수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갚아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상처 준 사람에게 보복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원수를 갚으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리십시오. 하나님으로 하여금 모든 계산을 하도록 하십시오.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시 23:5)
양들은 본래 많은 적들이 있습니다. 여우, 늑대, 곰, 뱀, 진드기 등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양들만큼 자기 보호기능이 없는 짐승도 드뭅니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만한 강한 이빨도, 날카로운 발톱도, 힘센 다리도, 강한 뿔도 없습니다.
게다가 양들은 빨리 달릴 수도 없습니다. 보호기능이라곤 제대로 갖추지 못한 동물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방안이 없습니다. 누군가 보호하기 전에는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역할은, 주위가 절벽을 이루는 봉우리가 평평한 초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푸른 풀밭이 펼쳐지고 곳을 찾아서 양떼를 노리는 사나운 짐승들이 넘볼 수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양떼를 인도해서 안전한 곳에서 풀을 뜯게 하는 일이 선한 목자의 역할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처 준 자들을 한날 다루실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7-19)
하나님은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보복하실 것입니다. 한날 원수를 갚으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으며 심판 날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심판할 자원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수심을 품고 있는 한 우리는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수를 할 것인지 치료를 받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둘 다 동시에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수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복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복수에는 항상 보복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받은 상처를 보복하려고 들면 고통이 가증됩니다. 다만 상처를 되살아나게 합니다. 유일한 치유의 길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는 “내게 상처 준 것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네가 한 것은 별로 나쁜 일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상처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악을 부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나의 상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원수를 갚아주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내가 나서서 보복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도록 하는 것입니다. 복수하려 들지 마십시오.
왜 우린 용서해야 합니까? 우린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원한을 품는 것은 자신을 오히려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용서를 베풀수록 더 많은 용서를 장차 보장받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베푸는 것을 받을 것입니다. 더 오랫동안 보복하려들면 더 오랫동안 상처를 입습니다.
2.2 주님께서 상처를 치유하도록 하십시오. 목자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주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시 23:5)
양들의 가장 더러운 적은 파리 떼입니다. 양들은 파리를 아주 싫어합니다. 소처럼 긴 꼬리로 쫒아버릴 수도 없습니다. 양떼들에겐 여름철은 파리로 시달리는 계절입니다.
파리들은 심지어 그들의 코 속에다 알을 낳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애벌레가 양들을 미치게 괴롭힙니다. 여름철 어떤 때는 양들이 자기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파리 떼 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하지만 양들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습니까? 그 때 목자가 하는 일은 올리브 오일을 가지고 유황과 섞어서 양의 머리에 발라줍니다. 그러면 마치 곤충 퇴치제처럼 작용합니다. 마치 목자가 ‘내가 너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맡아주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을 사용하는 또 다른 경우는 치료제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양이 상처를 입으면 목자는 기름을 연고처럼 사용합니다. 기름은 상처를 치유하고 보호합니다. “주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상처에 대해서도 이렇게 치유하시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 도다.”(시 147:3)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갚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입은 상처도 싸매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한다고 해서 곧 바로 여러분의 고통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한 후에도 한 동안 여러분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용서는 순간적이지만 회복은 시간이 걸립니다. 용서는 즉각적이나 회복은 몇 주가, 몇 달이,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 도다.”(시 147:3) 물론 조그만 상처는 쉬 아뭅니다. 찰과상은 곧 사라집니다만 깊은 상처는 치유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예컨대 배우자로부터 이혼이나 부모로부터 거부당하거나 친구에게서 사업을 빼앗기는 경우 등은 쉽게 순식간에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상처인 경우는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치유를 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상처 준 사람을 용서만하면 바로 좋아질 것을 기대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의 첫 걸음을 뗀 것이지 치유는 뒤따라 올 것입니다. 치유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십니까? 어떤 붕대를 사용하셔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입힌 정서적인 상처를 치유하실까요? 1) 하나님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치유하십니다. 다른 성도들과 어울릴 때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상처를 나눌 수 있을 때 여러분은 정서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신앙의 친구들과 그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을 고립시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교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원그룹이 필요합니다.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2) 하나님은 기도를 사용하셔서 치유하십니다. 상처를 입으면 그것을 말로 내뱉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발설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몸에 내뱉게 됩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느낌을 솔직하게 말씀드리십시오.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사람 다윗을 아주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털어놓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3)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치유하십니다. 찬양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앉자마자 찬송반주를 들으면서 바로 눈물이 흐를 때도 있습니다. 정서적인 치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세우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십니다.
4) 하나님은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도우는 사역에 동참할 때 놀랍게 자신의 남은 상처가 치유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상처만 어루만지지 말고 이제는 동일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러 나서면 자신의 옛 상처가 모두 아물게 됩니다. 교회는 교제를, 기도를, 예배를, 사역을 제공합니다.
상처를 받으면 항상 흉터가 남기 마련입니다. 상처를 두고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볼 때마다 상처를 준 사람을 기억하거나 아니면 상처를 치유해 주신 분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볼 때마다 치유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치유해주신 분께 감사하십시오. 실패했고 거부당하고 이혼당한 일을 기억하는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시고 찾아와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편을 택하시길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의 상처조차 하나님의 은혜의 트로피가 됩니다. 상처를 준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대신 상처를 싸매어주신 치유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2.3 주님께서 잔을 채워주시도록 맡기십시오. 성경에는 넘치는 잔을 가지고 완전한 만족을 상징합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했다는 의미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 시를 쓴 시인이 살던 중동은 대부분 사막지대입니다. 사막에서는 물이든 포도주든 허비할 수 없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극복하길 원하시면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것이 중요할까요? 우리가 주로 상처를 받는 주요한 이유는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기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여러분의 모든 요구를 채우도록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채워주길 바라면 실망하고 분노하고 다시금 상처를 입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넘치도록 채우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바닥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낙담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분을 앙망하면 여러분의 잔은 항상 넘칠 것입니다.
목자 하나님을 앙망하면 여러분의 잔은 희망으로 넘칠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목자 하나님을 앙망하면 여러분의 잔은 사랑으로 넘칠 것입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목자 하나님을 앙망하면 여러분의 잔은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해서 그 집에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지 걱정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기대하지 않던 분이 여러분의 집을 찾아와서 머무는 데 얼마나 오래 머물 것인지 궁금해 하신 적이 있습니까?
중동지역에는 이것을 표시하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낮선 손님을 맞이했을 때 우선 잔을 내밀어 마시게 합니다. 그런데 마시고 나면 계속 잔을 채워줍니다. 잔이 비면 또 채워줍니다. 손님의 잔이 비었는데 그대로 두면 이제 가도 좋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끝없이 채워줄 뿐만 아니라 넘치도록 부어주면 원하는 대로 머물러도 좋다는 상징입니다. 넘치는 잔은 ‘당신은 우리의 특별한 손님입니다.’하는 표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잔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것은 여러분은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상처를 입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귀빈으로 초대하시고 특별대우를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5절의 의미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실 것이고 우리 모든 필요를 넘치도록 채우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하도록 초대받은 손님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만 귀빈으로 초대받고 끝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소중한 분들에게 결코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제의를 들려주십시오. 도움과 구원, 만족의 하늘 잔치가 그들을 위해서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잔치의 상징으로서 올가을에도 공동체 전도 축제가 마련될 것입니다. 아멘
잔이 넘치는 삶
시 23:1-6 / 김광일목사
폴 칼슨(Paul Carlson)은 아프리카 콩고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면서 하루에도 100여명씩이나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칼슨 선교사님, 피곤하지 않습니까? 너무 과로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칼슨이 대답합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생활하기 때문에 피곤을 알지 못합니다. 매 순간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 후에도 칼슨은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전하며 의료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반란군에게 피살을 당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머니에서 포켓 성경을 발견하였는데 첫 장에 ‘평화(Peace)’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더위와 빈곤과 질병에 맞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우던 칼슨은 비록 순교자가 되긴 했어도 하나님이 목자 되심을 믿고 항상 잔이 넘치는 평안의 삶을 살았던 증거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의 잔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에 비유하여 묘사한 전형적인 전원시로서 시편의 백미라고 부릅니다. 저자 다윗은 5절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긴 세월 동안 고통을 당하였기에 이러한 고백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런데 험한 인생을 살았던 다윗이 어떻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노래할 수 있었습니까?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능하였습니다. 상처뿐인 인생, 끊임없는 배신과 복수, 가슴을 찢는 슬픔이 따라다녔지만 상황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목자 하나님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은혜가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빈 잔을 두셨습니다. 그 잔이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찰 때 비로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살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생들은 빈 잔을 물질의 소유, 쾌락, 명예 같은 것으로 채우려 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 잔이 채워지며 넘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잔이 넘치는 삶’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다윗은 어떻게 고백하였습니까?
첫째로 나를 소생시키시니
코칭(coaching) 전문가 서우경 박사는 ‘예정’이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불교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불교 대학원까지 공부한 열성 불자였습니다. 31살 되던 해, 대학원 졸업논문을 마무리하던 새벽 3시경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갑자기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고 교회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교회에 못 가도록 그녀를 집안에 가두었습니다. 그때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온갖 약을 써도 안 되고 체중이 30㎏이나 줄어 생명이 위험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신앙을 가진 후배의 도움으로 기도원에서 금식하는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소생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가족이 예수를 영접하였고, 남편 역시 복음 증거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신학을 공부한 그녀는 연세대학교에서 코칭을 가르치며 복음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소생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7년 전까지 주님과 상관없는 불신자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서른세 살에 예수를 만났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셨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오늘도 살아 계셔서 나와 같은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을 때, 이미 창세전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3년 동안 불치병으로 누워 지내던 나를 찾아오셔서 모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주의 성령을 보내시고 동행해주시는 기가 막힌 일이 기적처럼 내 삶에 일어났습니다. 불가능한 일, 도저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의 ‘소생’은 ‘하야’인데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영혼을 살아있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것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기에 하나님과 관계가 중요합니다. 시인 다윗은 영혼이 침체 상태에 있다가 회복되는 경험을 하였기에 그 하나님이 살려주셨다고 찬양합니다.
양은 뒤집히면 목숨이 위태하게 됩니다. 몸집에 비해 다리가 짧아 균형을 잡기 힘들어 뒤집히면 일어나지 못합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향은 버둥거리다가 혈액순환이 안 되어 결국 숨이 멎어 죽고 맙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뒤집혀진 양이 있는가 항상 살피며 뒤집혀 버둥거리고 있는 양을 보면 즉시 세워 줍니다. 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까? 뒤집혀 버둥거리는 양처럼 어찌해야 할바를 모를 때가 있습니까? 목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뒤집힌 양을 바로 세워 주는 목자처럼 하나님께서 영혼을 소생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목자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갔다 할지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소생시켜 주시는 하나님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와 함께 하시니
장영일 교수의 ‘유다광야에서 읽어 보는 시 23편’에 나오는 글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대학 교수가 가끔 학생들 앞에서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읊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셨습니다. 이상히 여긴 학생들이 묻습니다. “교수님! 시편 23편이 그렇게 감동적이십니까?” 학생들의 궁금증에 교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학생 시절, 유대인 청년과 함께 공부를 하였는데 그 유대인 청년은 혼자 있을 때 항상 히브리 원어로 다윗의 시를 암송하는 것이었다.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그때 나도 그 유대인 청년을 따라 시를 외우게 되었는데 바로 시편 23편이었다. 히틀러 정권 시절에 그 유대인 청년은 아우슈비츄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입술에서는 시편 23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또한 러시아 전선에 투입되었고 불행히도 포로로 잡혀 처형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총살의 위태로운 상황에서 나는 유대인 청년이 암송했던 시편 23편을 깊은 감동 가운데 읊고 있었는데 총살을 진행하던 유대계 장교가 '시편 23편 다윗의 시를 암송하는 자는 그가 비록 적군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코 악한 사람이 아니다'라며 나를 풀어주고 안전한 장소까지 데리고 가주었다.” 시편 23편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려운 순간에 함께 하셨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함께 하시사 잔이 넘치는 삶을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의 흘리신 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평탄하게 지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늘가는 길도 동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못할 곳은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혹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십니까! 목자 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골짜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지나가시기 바랍니다.
필립 켈러(Phillip Keller)는 목자 일을 하며 양떼를 키웠던 경험을 ‘양과 목자’라는 저서를 통해 이렇게 전합니다. “여름이 끝나고 골짜기를 지나 겨울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양들에게 가장 위험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목자들이 긴장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양들이 어떻게 될까봐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주목합니다. 가까이 밀착하여 함께 하는 목자들로 양들은 생명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양들은 골짜기에서 기쁨의 소리를 지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사망과 시련의 골짜기에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생명의 골짜기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를 안위하시니
작가 론 멜(Ron Mehl)은 ‘The Cure for a Troubled Heart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 라는 책에서 아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절망에 빠진 아들은 방향을 잃은 배처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하였지만 ‘왜 그러냐?’ 고 물을 수 없었습니다. 더 괴로울까봐,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였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절망에 처한 아들을 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위로할까?’ 고민하던 아버지는 밤이면 아들이 자는 방으로 가서 옆에 누웠습니다. 눈을 뜨고 천장을 쳐다보며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생각하였으나 도무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누웠다가 나왔습니다. 다음날도 아들이 자는 방에 들어가 옆에 누웠습니다.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왔습니다. 여러 날 아들 방에 들어가 옆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가 조용히 들어와 옆에 눕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이 없어도 아버지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도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생각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시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가?’ 큰 위로를 얻은 아들은 마침내 절망을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안위’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음을 위로하고 몸을 편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위로(comfort)’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목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을 치는데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목자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지팡이와 막대기가 바로 안위 즉 위로의 상징인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동에서 목자들이 사용하는 지팡이는 끝이 구부러져 있고 부드러운 갈고리가 붙어 있습니다. 목자들은 길에서 넘어진 양을 보면 지팡이로 양의 목을 걸어서 일으켜 세웁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양은 지팡이로 건져 올리기도 합니다. 구조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목자의 지팡이가 보이지 않을 때 양들은 마음에 심한 불안을 느낀다고 합니다. 지팡이를 보아야 안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위로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목동에 불과한 자신을 왕으로 높이 세우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강력한 지팡이로 끊임없이 위로해 주셨습니다. 때로 세상이 더 커 보이고, 원수의 공격이 더 강해 보이고,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지팡이와 막대기로 언제나 위로하시는 목자 하나님이심을 믿었기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작은 도시에 음식점이 있었는데, 30년 동안 그곳에서 성우 같은 목소리로 손님들을 매료시킨 연극배우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시편 23편을 분위기를 살려가면서 감동적으로 낭송했습니다. 낭송이 끝나자 손님들이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오늘로 100살이 되는 탐 롤린스(Tom Rollins) 목사입니다. 저도 시편 23편을 좋아하는데, 한번 암송해 보겠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시편 23편을 천천히 크지 않은 목소리로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도다.” 백발이 성성한 목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습니다. 좌중이 숙연해졌습니다.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조금 전에 같은 시편을 낭송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은 배우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이러한 반응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오늘 저도 똑같은 시편 23편을 낭송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당신은 시편 23편을 잘 낭송했습니다. 물론 시편 23편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시편 23편에 나오는 그 목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와 당신의 다른 점입니다.” 아는 것 자체로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잔이 넘치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가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의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안위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
시편 23편
오늘 읽은 시편 23편은 아마도 모든 크리스천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양을 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양을 치던 다윗이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된 것은 골리앗이라는 블레셋의 거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한창 전쟁 중일 때, 아버지 이새는 다윗에게 전쟁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치던 양들을 다른 목동들에게 맡기고 (사무엘상 17:20), 아버지가 싸 주신 먹을 것을 가지고 형들을 찾아 갔습니다. 형들이 야단을 칩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너 같은 어린아이가 전쟁터에 오느냐? 전쟁은 장난이 아니야! 빨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니?” 하면서 야단을 칩니다.
그런데 그 때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에게 도발을 합니다. “우리 이럴 것이 아니라 일대일로 붙어서 이 전쟁을 끝을 내자! 나하고 싸울 용사가 있으면 나오라!” 이렇게 도발을 합니다. 하지만, 골리앗의 기세에 눌린 이스라엘 군인들 중에는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블레셋 군대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아무도 나가지 않는 굴욕적인 장면을 목격한 어린 다윗의 마음의 속에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도 나와 있었습니다.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사울은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자기 딸도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그 사람의 가족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사무엘상 17:25). 마침내 어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섰을 때, 사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사울도 잘 알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입혀 준 갑옷도 몸에 맞지 않는다고 벗어버리고, 손에 막대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냇가에서 조약돌 다섯 개를 주워서 양을 칠 때에 쓰는 주머니에 넣고 손에는 물매를 들었습니다(사무엘상 17:40).
제가 여러분이 다 아는 다윗 이야기를 조금 장황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다윗이 손에 든 것은 막대기입니다. 오늘 시편 23:4에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est valley,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Your rod and your staff protect and comfort me (내가 비록 어두운 골짜기를 걸을 때에도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옆에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지켜 주시고 안전하게 해 줍니다).” rod는 일반적으로 막대기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staff는 끝이 꼬부라진 지팡이를 말합니다. 이 rod나 staff는 주로 목자들이 가지고 다녔습니다. 양들이 짐승의 공격을 받을 때 짐승을 쫓거나 짐승과 싸우는 무기입니다. 그리고, 조약돌 다섯 개를 주워서 양을 칠 때 쓰는 주머니 속에 넣었습니다. 그 때 다윗의 차림새는 목동들의 옷차림 그대로였습니다. 손에는 물매를 들었다고 했는데요. 물매도 역시 목자들이 돌을 던질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목자들이 돌을 던지면 양들이 돌이 떨어지는 위치를 보고 그 이상 넘어가지 않습니다. 물매의 정확한 번역은 “무릿매 (sling)”라고 합니다. 길이는 130cm정도 되고요. 이 줄은 한 쪽 끝에는 구멍이 나도록 매듭을 지어서 손가락을 끼도록 되고 있고, 다른 쪽은 그냥 줄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줄을 반으로 접은 곳에 마치 새총처럼 약간 넓게 만들어서 그곳에 계란만한 돌을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빙빙 돌리다가 한 쪽 끝을 놓으면 돌이 날아갑니다. 400m 정도까지도 날아간다고 합니다. 이 무릿매로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려면 수천 수만 번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다윗 상을 조각했습니다. 1501년부터 1504년까지 3년에 걸쳐서 다윗 상을 완성했습니다. 높이가 받침대까지 하면 17feet (5.17m)입니다. 눈은 멀리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바라보고 있고, 왼쪽 어깨에 무릿매가 걸쳐 있고, 오른쪽 손에는 조약돌을 들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조각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다윗상을 통해서 가장 완벽한 균형을 이룬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찬사를 받았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을 언제 썼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 시편 속에 목동생활 했던 때의 경험과 골리앗과 싸웠던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단번에 백성들에게 영웅으로 부상했을 때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인도하신 분은 목자 되신 주님이셨다. 그가 나를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나를 지켜 주셨다”
이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1절)” 이렇게 시작해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나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6절)”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 마지막 절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urely your goodness and unfailing love will pursue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live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확실히 주님의 선하심과 끊임없는 사랑이 내 생명 다할 때까지 나를 따를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집에 영원히 살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다른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두 가지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하심 (Lord’s goodness)입니다. 저는 최근에 성경 말씀들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생각하니까 또 성경 어디를 읽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보입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은 다른 것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선하심만 우리가 확실하게 믿으면 다른 모든 문제들이 술술 풀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막힙니다. 기도도 막히고, 하나님께 대한 생각도 막힙니다. 성경 말씀도 막힙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도 올바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답답하고, 기도도 재미 없고,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불평이 생깁니다. 작은 일에도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보세요. 우리가 사랑하는 말씀 가운데 로마서 8:28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정말 굉장한 말씀입니다. 아주 powerful한 말씀이예요.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그렇게 powerful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좀 낙심되는 일이 있어도 이겨 나가고 있습니까?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좋은 말씀인 줄도 알아요. 그런데, 막상 이 말씀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나에게 적용이 잘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달리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반드시요.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나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6). 바울이 쓴 로마서 말씀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 8:16-17).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리는 그의 자녀로 비유한 것은 아주 탁월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11)
다윗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이해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까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굉장한 일입니다. 그 뜻을 알고 하나님을 그렇게 부른다면 말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목자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복음 10:11)”라고 말씀하셨고, “나도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 (요한복음 10: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 (누가복음 15:4-10)를 통하여 목자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자는 자기가 치는 양 한 마리를 자기 목숨처럼 여깁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고, 양이 좋은 풀을 먹도록 좋은 풀을 찾아서 양들을 그리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물을 찾아서 물을 먹여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귀나 소나 양이나 그 밖의 어떤 짐승을 맡겼는데, 그 짐승이 죽거나 다치거나 도둑을 맞았을 때, 만약 그 짐승이 맹수에게 찢겨 죽었다면, 죽은 짐승을 증거로 보여야 한다. 그러면, 물어 주지 않아도 된다. 도둑을 맞았거나, 그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으면, 그것을 다 물어 주어야 한다.” (출애굽기 22:10-15) 목자에게 양은 자기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합니다. 양에게 좋은 풀을 먹이고, 물 가로 데리고 갑니다.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도둑 맞거나, 다치지 않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못 줄 것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모두 자식에게 줍니다. 그것도 제일 좋은 것을 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항상 최선의 것을 주십니다. 비록 지금 나에게 힘든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사람은 그 힘든 상황까지도 나에게 최선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내 삶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고난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니야. 지금 이 시간도 나에게는 최선이야. 하나님은 나의 가는 길을 모두 알고 계시지. 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내 인생은 정금같이 더욱 빛나게 될 거야!” (욥기 23:10)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1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 다윗이 아무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어떤 일이 나에게 닥쳐도 나는 당황하지 않아. 그 하나님은 언제나 나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시니까, 하나님 한 분만 나에게 있으면 나는 만족해!” 이런 고백입니다.
둘째로, 다윗이 중요하게 봤던 것은 “Lord’s unfailing love”입니다. 쉬운성경에는 사랑하심이라고 번역했고, 예전 개역성경에는 인자하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NKJV에는 이 말을 그냥 자비(mercy)라고 번역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unfailing love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unfailing이니까 not failing이란 뜻이잖아요? 끝이 없다, 다 써서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끊임이 없다, 언제까지 계속된다는 뜻이잖아요? 언제까지나 쓰고 또 써도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부를 찬송 중에 F. M. Lehman이라는 사람이 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는 3절 가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잉크로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하나님의 unfailing love도 그냥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unfailing love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만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unfailing love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인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썼습니다.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5:5)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하면 쏟아 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이 하나님의 사랑과 닮았다고 할까요? 왜 어머니는 자식에게 자기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시는 가요? 다른 이유 없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쏟아 부어주시는 unfailing love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아들입니다.
내일이 더 행복한 성도
시 23: / 곽창대 목사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들께서도 시편 23편을 아주 좋아하실 것입니다. 암송하시는 분들도 꽤 있을 것입니다. 설교도 여러 번 들었을 것입니다. 두 주 전에 중국에서 선교하고 계시는 박충렬 목사님께서 1절의 전반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시편 23편을 7번으로 나누어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이 시편을 가지고 설교하려고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고 실패를 경험하고 중한 질병과 죽음을 맞이할 때도 과연 행복하다고 노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 불과 얼마 전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자식과 부모를 먼저 떠나보낸 분들이 계십니다. 그랬어도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노래할 수 있다면 그 노래의 근거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우선적으로 제시하고 싶은 성경적인 명제 하나가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올바른 미래관의 확립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명제를 좀 더 직설적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성도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한데 그 이유는 장래에 베푸실 주님의 은혜가 더 크고 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제목을 ‘내일이 더 행복한 성도’라고 정했습니다.
시편 23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이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의 인생 말년에 지나온 날들을 회고하면서 이 시를 지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이 시를 음미하면 할수록 시어 하나하나와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시인의 완숙한 믿음과 인격이 농익어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이렇게 의역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 주님은 목자이시고 저는 양입니다. 그래서 저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거기서 제 영혼을 새롭게 하셔서 의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항상 함께 하셔서 저를 보호하시고 치료하시고 모든 좋은 것으로 넉넉히 채우십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행복합니다. 내일은 더 행복하리라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당신의 집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친히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때문에 정말 행복합니다.”
오늘 이 시에서 다윗이 노래하고 있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선한 목자요 완전한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양들인 우리들을 생명의 길,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목자가 양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싱싱한 풀과 맑은 생수를 먹이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을 넉넉히 공급하십니다. 목자가 양들의 건강을 해치는 벌레나 생명을 노리는 사나운 짐승이나 도둑들로부터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목자가 질병에 걸리거나 다친 양들을 치료하여 회복시키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십니다. 목자가 연약한 양들이 뒤처지지 않도록 세밀하게 돌보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가 연약할수록 더 큰 관심을 갖고 돌보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감격하여 그의 시적 상상력이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되었습니다. 즉 주님과 다윗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로만 머물지 않고 주인과 손님의 관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넘치는 복을 표현함에 있어서 목자의 섬세한 보살핌을 받는 양으로 비유하기에는 뭔가 부족하여서 그것과 함께 가난하고 지친 나그네가 아주 부유한 집주인의 넉넉한 환대를 받고 감격해 하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로 오버랩 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5절입니다.
여러분,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식탁에 초청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식탁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교제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시니 우리는 어떤 곤경을 당해도 어떤 대적을 만나도 안전합니다. 오히려 기대하지 못했던 넘치는 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6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와 넉넉한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넘어서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절 안에 세 가지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안식하는 것이 성도가 누리게 될 최종적인 복이라고 여러 곳에서 선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안식할 자는 누구일까요? 두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모든 좋은 것을 누리게 됩니다.
(롬 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28-30)『[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셨던 은혜: 그 가운데서 결정적인 은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던 날
지금도 내리는 은혜: 그 은혜로 우리가 살고 있다.
마지막에 주실 완전한 은혜: 완성될 천국에서 누리는 최고의 은혜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자기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에 틀림없습니까?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입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임에 틀림없습니다.
(롬 8:15-1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급선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됩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이 길 외에는 없습니다. 즉 예수님을 우리의 유일한 구주와 주님으로 믿을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인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기 때문에 이것을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생기는데 그렇게 확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이미 롬 8장에서 본대로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즉시로 하나님의 영이시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셔서 이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양자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셔서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상속받는 자녀가 되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행복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가면 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가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행복은 더 크게 상승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생이 끝나거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지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미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받을 복은 이전에 받은 복보다 더 크고 중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내일이 더 행복합니다. 이것이 시편 23편을 비롯한 성경의 한결같은 약속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받은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다윗처럼 주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즉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주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다윗이 믿은 주님의 약속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보다 내일을 더 행복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다윗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는 원수들로 인해 쫓겨 다니느라 상하고 지친 다윗을 환대하여 치료하실 뿐 아니라 풍성한 식탁까지 베풀어주신 넉넉한 주인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그 하나님을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으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장래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즉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현재에도 장래에도 최고의 목자요 인도자요 공급자요 보호자요 의사요 아버지이심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다윗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붙잡았던 주님의 성품 세 가지는 대표적으로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입니다(6절).
주님은 선하십니다. 선하다는 뜻은 좋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싱싱한 풀과 시원한 생수를 넉넉하게 공급하십니다. 허기지고 지친 나그네 같은 우리를 집으로 맞아들여 최고의 손님으로 대접하셔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넘치게 축복하시는 넉넉한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십니다. 여기 인자하다는 뜻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긍휼이 풍부하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범죄할지라도 오래 참으시고 죄를 회개할 때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뿐 아니라 아예 잊어버리십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여호와의 집에 도착하게 하셔서 안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십니다. 따른다는 동사는 추격한다, 바싹 좇는다는 군대용어입니다. 즉 당신의 백성을 추격하여 본부로 귀대시킨다는 뜻입니다. 양으로 비유하면 양 우리로 양들을 몰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거기가 절대적으로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완전히 안전한 곳은 여호와의 집입니다. 그 집이야말로 평강의 집입니다. 그런데 성도를 끝까지 추격해서 그 집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 선하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성도는 여호와의 집에 도착하게 되고 그 집에서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성품을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즉 어떤 역경에서도 주님의 약속과 성품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게 신뢰할 때 성도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오늘 큰 역경을 만났다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말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의 약속과 성품을 신뢰해야 합니다.
2. 다윗처럼 약속을 성취하실 주님께 사랑과 감사의 찬송을 올려야 합니다.
시 23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올린 최고의 감사요 찬송이요 연가(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게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찬송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한 이유는 과거에 베푸신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보다도 오늘과 내일 더 행복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윗이 그 감사와 찬송을 시로 쓰고 곡조를 붙여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대와 후대의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공감하게 하고 함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남긴 위대한 업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저 평범한 목자가 아니라 최고의 목자요 완전한 목자입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만천하에 입증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목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대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살려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고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집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 노래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더욱 행복할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주변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증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간증할 때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3.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을 약속하신 주님께 그 약속이 성취되기를 갈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시 23편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는 다윗의 신앙고백이요 감사와 찬송시입니다. 동시에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올린 기도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이 시에서 자신이 더더욱 믿음의 사람, 감사와 찬송의 사람으로 살고자 다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갈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약속을 받기에 부끄럼 없는 자로 살겠다고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 거룩한 삶, 진실한 삶, 믿음의 삶
하나님 안에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사랑의 삶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천국의 소망, 소망의 삶
하나님의 은혜를 이웃들에게 간증하며 살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특히 가족들과 성도들이 나처럼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도록 열심히 사랑하고 섬기겠습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결단하고 기도하면 어제보다 오늘 우리는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누리는 이 행복을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풍성하게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성도가 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우리가 기도한 것보다 더 좋은 것 주시고 가장 적절할 때 주십니다. 성경의 약속입니다. 행복한 성도는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한 성도들입니다. 감사의 달 11월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목조목 헤아려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에 주실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믿고 바라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11월을 보낸다면 11월은 정말 행복한 달이 될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고 고백하고 찬송하는 우리를 통해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 행복이 힘차게 확산되는 11월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
시편 23:1-6 / 崔仁根牧師
톨스토이가 즐겨하던 이야기 중에 어떤 농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왕에게 엄청난 제안을 받았습니다. “네가 하루 동안 밟고 걸어 다니는 땅은 모두 다 네 것으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농부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동안에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좀 더 많은 땅을 밟아야 하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하여 밤늦게까지 전력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많은 땅을 차지하고 나서 자신이 시작했던 출발점에 도달했을 때, 모든 힘을 다 쏟아 버린 나머지 쓰려져 죽고 말았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심이 너무나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어리석거나 우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고의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딤전 6:9 /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만큼 그 돈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인생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이후라는 사실을 이 종이 수십 년 동안 숱하게도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돈이 많은 것과 행복한 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돈이 많아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돈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꼭 하나만 선택하라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당연히 돈이 없어도 행복한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삶의 근본목표는 행복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군 다윗의 고백으로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만족한 삶”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8월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주일인 오늘은 이 귀한 말씀을 중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에 대한 진리를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신 32:3-4 /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사 5:16 /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시지만 가장 사람과 다르게 두드러진 것은 바로 공평하시고 진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이렇게 공평하거나 진실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돈이 있으면 사랑이 없고 돈과 사랑이 있으면 자녀들이 문제아고 참으로 이제는 행복한 삶만 남았구나 하면 몸이 병들고......,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듯 공평하신 성품 그대로 우리 인생들을 인도하시고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시려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겨두셨습니다.
갈 6:7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욥 4:8-9 /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그러므로 결국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들이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렇게 된 요인이 있을 것이고 만약 만족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렇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종이 전도사가 되고 오늘까지 부산, 서울, 미국에서 목회에 전념한 지가 내년 말이면 만 50년이 됩니다.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겪어온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개인적으로 이 종에게 잘해주었던 사람들도 있고 너무나도 악하게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50년을 종합해 보니 추수 때와 같이 그 열매가 보이더라고요. 그 두 가지의 열매는 과연 극명하였습니다. 이 종에게 잘 해 주었던 성도들은 한결같이 본인과 자손들이 다 잘 되었으나 악하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비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종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를 쓴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불행하게도 자신이 낳은 아들 압살롬의 배신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 다녀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는 바로 그러던 중 유다광야에 머물고 있을 때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비참하게 되었을 때 두 부류의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시므이라고 하는 신하였고 다른 하나는 바실래라고 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시므이는 왕위를 잃고 쫓겨 다니는 다윗을 보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 났다고 판단하고 그 다윗을 독한 말로 저주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실래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힘겨운 피난생활의 다윗을 사심 없이 섬겼습니다. 다윗이 인생을 다 살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자신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를 솔로몬을 불러 유언을 하였는데 예외 없이 이 두 사람에 대해 유언을 하였습니다.
왕상 2:7-9 /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바로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공평이고 한 평생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에 있는 유익만을 위해 작은 자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언제든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바로 살고 바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하루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대를 이어가는 자손들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삶이 될 수 있는지는 공평하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데 달려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이 될 수 있고 오늘의 부족함이 내일의 풍족함으로 보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시 23:4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수 1:9 /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마 28:19-20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갱년기를 맞았을 때 외로움과 우울증에 많이 시달린다고 합니다.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아이들은 다 자란 새들과 같이 미련도 없이 둥지를 떠나가 버리고 돈 번다고 정신없이 아귀다툼하며 함께 살아왔던 남편은 멀찌감치 멀어져 그저 함께 사는 동거인으로 변해버리고 망망한 대해에 혼자 떠 있는 一葉片舟(일엽편주)와 같이 황망한 세상에 혼자 버려져 있는 것과 같은 쓸쓸함을 온 가슴과 몸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외로움에 그만 마음의 병이 생기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여자들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은퇴한 남자도 더 더욱 외롭습니다. 뼈마디가 다 닳도록 일만하면서 낙도 없이 세월을 다 보내버리고 은퇴하고 나면 친구도 없지, 갈 곳도 없지, 당연히 밥 때에 먹어야 할 밥조차도 마누라에게 눈치 보이지......., 결국 인생이란 이렇게도 외로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 인생들의 외로움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도 아닌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왕권을 빼앗긴 채 도망 다녀야 하는 다윗의 신세를 한 번 생각해 보신다면 인생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절절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금 무엇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까?
시 23:4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과연 대단한 신앙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렇게도 사랑하시고 자신의 모든 뜻을 그를 통하여서 이루셨던 것입니다.
행 13:21-23 /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믿음과 확신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우리들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큰 기쁨과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한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육신을 넘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인생 여정에 육신적인 것은 육이고 영적인 것만이 신령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 8:5-8 /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육신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도 중요하시만 우리들의 삶이 육신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변화를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다윗과 같이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될 때 결코 일어나지 못한 채 넘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윗이 그 살벌한 반역자들의 칼날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제거하시고 다윗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여정에도 다윗과 같은 위기를 만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때 다윗과 같이 당당하게 선포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위급한 상황에서 축복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놀라운 비밀을 잊지 말고 우리 또한 그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소망하며 하루하루를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행복한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시 23:1-3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삼하 5:19 /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대상 14:10 /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장 대표직인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대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원하신다면 무엇이든지 다 하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과 이스라엘 모든 용사들이 두려워 떠는 골리앗 앞에도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오늘날 이와 같은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잘 되면 교만하여서 망하게 되고 못되면 절망하여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같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에 굳게 서게 되면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못 되도 하나님의 뜻이 계실 줄을 믿고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을 한 번 보십시오. 어떻게 죽음이 촌각으로 다가오고 반역의 세력들이 창과 칼을 들도 쫓아오는데 유다광야에서 이처럼 천연덕스럽게 시나 지어 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시 23:1-3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배짱이 아닙니다. 그 누가 그와 같이 참담하고 두려운 순간에 이렇게 노래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고 철석같이 믿는 믿음이 있는 다윗만이 할 수 있는 여유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 절대 주권적인 믿음은 가장 비참하게 신하로부터 저주의 소리를 들을 때도 여지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삼하 16:5-11 /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은 이렇듯 감히 신하가 왕인 자신을 저주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자신에게 하시는 것으로 인정하고 묵묵히 감내하며 참아냈던 것입니다. 과연 그는 신앙인이요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와 같은 다윗의 위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싸개 속에 품어주시고 지켜주신다고 먼 발취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던 아비가일도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삼상 25:29-33 /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다윗은 아비가일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믿음과 지혜를 높이 평가하고 그 손에 피를 뭍이지 않고 돌아갔다가 결국 나발이 죽자 아비가일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다윗과 같이 아비가일과 같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불러 자녀로 삼아주셨는데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과 눈물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한나와 같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드림으로 만사형통하는 축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자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겨버리고 그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해 주시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이 없는 삶은 모든 것이 넉넉하고 다 갖추어져야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기대하는 성도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삶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편 23:1 / 이규현목사
세상은 결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부족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시인의 고백은 꿈같은 이야기로 들립니다. 이런 고백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시편 23편은 시인이 만들어낸 언어의 유희인가, 다윗의 허풍인가, 아니면 다윗의 바람인가.
시편 23편을 암송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 경험을 해보았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대할 때 절망을 맛볼 수 있습니다. 현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성경을 추상적으로 읽고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결국 “내가 부족함이 없어 보이려고 노력해요” 정도로 고백합니다. 시편 23편이 다윗 또는 특정한 부류만의 고백일까요? 분명한 것은 23편은 다윗의 경험에서 나온 자전적인 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열려진 삶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1절 전반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대목만 읽어보십시오. 모호하고 막연합니다. 23편 전체의 초점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입니다.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우리의 문화 안에서, 개인의 경험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한국은 샤머니즘의 문화가 많이 있었습니다. 연말이 되면 많은 사람이 토정비결과 점을 치는 무속적인 문화가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만 해주면 그 신이 어떤 신이든 상관없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모호할수록 정성을 많이 기울입니다. 신을 감동하게 함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 안에 이런 열심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전의 습관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각자 자신이 경험한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란 존재는 우리의 경험 안에 갇혀 버립니다. 우리의 경험은 주관적이고 제한적입니다. 내가 경험한 세계는 지극히 작습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한다고 할지라도 부분적입니다. 신앙생활도 어느 교회, 어느 교파에서 했는가에 따라 다릅니다. 또 어떤 목회자를 만나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책을 읽을 때도 나만의 세계관으로 읽습니다. 어떤 책을 많이 읽고 어떤 사람을 많이 만났는가, 살아오면서 어떤 경험을 해왔는가에 따라,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믿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는 쉬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무속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 신앙이 된다면 결코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준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한 삶의 문제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만큼 삶은 더 풍성해집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인식, 사고체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세상에 깔린 문화의 배경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 안에서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몸에 익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나의 만족과 행복, 나 자신에게 더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자주 불만족에 빠지는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왜 상처를 잘 받습니까? 원인은 자기 중심성 문제입니다. 자신만 생각하고 귀중히 여기는 문화가 오늘날 더 심해졌습니다. 아이도 하나 또는 둘만 낳아 애지중지 키웁니다. 또 요즘 유행 중 하나는 자존감에 관련된 책과 강의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자신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끔찍이 여기는 사람들만 모여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아와 자아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서로 불행하게 합니다. 자기 권리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곳은 상생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에게만 집착하는 병적 자기애가 문제입니다. 내가 나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문제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나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로 많이 기울어진 관심을 하나님에게로 돌려야 됩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알아야 하지만 그 가운데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안에 모든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가기 위해서 필요한 교리 정도가 아닙니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망가지고 깨어진 이 세상을 어떻게 회복하시려고 하시는가에 대한 계획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복음을 바로 알게 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볼 수 있는 관점이 생깁니다. 복음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죄로 인하여 심각하게 망가진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 전체에 회복을 일으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풍성함과 거리가 멉니다. 풍성한 삶은 구원 이후에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결핍투성이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질 때 우리가 잃어버렸던 풍성함을 되찾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 전체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는 경험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와닿지 않는다면 신앙이 아직 모호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신앙의 눈이 뜨여집니다.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종교 생활로 빠지는 것입니다. 관습적이고,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23편 전체를 통해 다윗과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으로 만나주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입니다. 우리의 영이 죽어있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던 존재들입니다. 영적인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게 만드는 길을 열어줍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 장면을 보십시오. 금식하시는 동안에 육신적으로는 결핍 상태에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더 강력해지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이 예수를 더 강력하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배는 고팠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만물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가장 의미 있는 사건 중 하나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군중들의 필요를 겨우 채워 주신 것이 아니라 풍성히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무한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이 구절을 단순히 떡보다 말씀이 귀중하다는 전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바람을 꾸짖으시니 풍랑이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걸으라 하시니 일어나 걷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위력적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먹고 생활하는, 일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목회 가운데서 말씀 사역을 귀중히 여깁니다. 이유는 말씀의 위력 때문입니다. 말씀이 어느 성도에게 떨어질 때 일어나는 역사는 놀랍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꿉니다. 죽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왔다가 살아납니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인생이 회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며 생명입니다. 그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고, 지혜가 넘쳐흐릅니다. 소망으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풍성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소멸이나 쇠퇴가 없고 부족함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다 알 수도 없고 다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왜 우리의 믿음이 필요할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경험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믿음의 눈이 열리면 삶이 광대해집니다. 좁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믿음은 연결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일상에서 경험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에게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가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풍성한 세계로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세계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더 신뢰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바라볼수록 두려움은 커집니다. 자신을 계속 바라볼수록 불만은 더 쌓여가게 됩니다. 우리는 신뢰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지금 무엇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다윗의 고백이 사도바울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바울은 자신이 궁핍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이나 바울 모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다양한 경로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경험은 구체적이고 잊을 수 없습니다.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의 풍성함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마음의 풍성함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가운데 새로운 경험은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이 마음은 생각과 감정까지 다 포함합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끌고 갑니다. 우리 마음을 우리가 다루기 힘듭니다. 마음이 한번 무너지면 감당이 안 됩니다. 마음의 병으로 약을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음이 괴롭거나 두려움이 오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영으로 드립니다. 예배가 온전히 드려질 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알고,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영이 깊이 만나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워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마음의 두려움이 빠져나갑니다. 결핍 증세가 사라지고 절대 평안이 밀려옵니다. 최고의 만족감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를 꼭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때 오는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곧 결핍을 느끼고 불만족으로 빠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토록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가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미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부유함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적어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에 비해서 내 것이 작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 불만족에 빠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문화가 유독 강합니다. 만족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시면 그 순간부터 달라집니다. 채워져 있는 사람이 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십니다. 빈 곳이 없도록 꽉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면 더 이상 욕구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라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미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 완벽한 환경은 없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은 계십니다. 더 나은 조건을 추구하며 살기보다 더 좋은 하나님을 따라가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그것보다 더 완전한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살면 일상이 최상이 될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산이 아닙니다.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산입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을 특정인만 누릴 수 있는 경지로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누구든지 살아갈 수 있는 삶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불만족을 해결하기 위해, 부족한 상황으로 인한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 일평생 살아가는 사람들의 패턴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결핍은 고통을 안겨주지만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핍의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 자체가 결핍입니다. 세상에서 결핍을 느낄수록 하나님을 더 갈망하십시오. 누가 충만하게 채워진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갈망하는 사람, 목마른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목마른 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돈에 목마름을 느낀다면 돈을 찾아 헤맬 것이고, 권력에 목이 마른 사람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하시고도 떡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떡에 대한 욕구가 강한가, 하나님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한가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굶주리셨습니다.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굶주린 자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떡보다 더 귀중하신 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군중들의 배를 채워 주신 이유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떡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떡보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더 강력해집니다. 갈망하는 만큼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의 돌봄을 받고, 인도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회복을 계속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세상 가운데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다윗의 삶을 파고 들어가면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중심에 놓여 있지 않았다면 다윗의 삶은 설명이 안 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다윗은 개인적으로 허물과 과오가 있었습니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 빛이 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다윗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자신의 신앙적 고백보다 하나님에 대한 찬송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갈 힘은 오직 하나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이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십시오. 성경을 묵상할 때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구절보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시간을 쏟아보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목자입니다. 양은 스스로 책임지지 않아도 됩니다. 양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있습니다. 양은 돌봄을 잘 받기만 하면 됩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을 떠나 스스로 살아가고자 했지만 궁핍이 몰려왔습니다. 스스로 그 인생을 책임질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목자는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양은 목자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목자가 구심점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은 우리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되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라가는 삶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결과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 안으로 들어갈수록 빼앗긴 삶을 삽니다. 세상 안에서 끊임없이 스트레스와 탈진이 일어나는 이유는 세상이 우리에게 참된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불만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신자들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한다면 이것은 복음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삶이 복음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될 때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서 영광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다윗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라
시편 23:1-6(계 7:9-17) / 임춘수목사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고향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고, 부모님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동물들도 회귀 본능이 있어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연어는 자라면서 먼 곳으로 떠나갔다가 자기들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두 분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하시는 육신의 아버지가 계시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2022년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 중에 본향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본향이란 단어는 본래 살던 고장, ‘아버지의 나라’, 곧 조상이 난 땅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성도의 이 세상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 하며, 성도의 소망은 영원한 하늘의 본향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도 나이가 들면 본향을 그리워하게 되고 영적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영적 본향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두 곳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의 노래인 시편 23편과 요한 계시록 7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시편 23편에서는 여호와의 집 즉 하늘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다윗이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7장은 모든 성도들이 그리워하는 본향인 하늘나라에서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본문은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두 본문이 말하는 것은 여호와의 집 즉 하늘 아버지의 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라”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목자이신 여호와(이 땅에서)
다윗은 어린 시절 목동으로 지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목동으로 지내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양인 우리들을 돌보실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위대한 왕입니다. 강대한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볼 때 아픔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잘못을 해서 고통의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런 아픔의 세월을 보낸 다윗은 시편 곳곳에서 여호와의 집에 머물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고백의 기도와 찬양을 했습니다. 다윗은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고 싶다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이 노래한 여호와의 집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양으로 목자이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실 때 내가 살아가는 삶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1-2절을 보면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나의 삶에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좋은 목자가 양을 인도하면 양은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할 것입니다.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신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양은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푸른 풀밭은 먹을 것이 풍성하다는 의미입니다.
양들은 산과 들로 다니면서 풀을 뜯어 먹고 사는데 목자를 잘못 만나면 풀이 없는 곳으로만 다닐 수 있습니다. 하루종일 목자를 따라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풀이 없다면 양은 허기진 채로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목자는 사전에 풀이 많은 곳을 답사하고 양들을 그리로 이끌어 갑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이끄는대로만 가면 그곳은 푸른 풀밭이 있습니다. 마음껏 풀을 뜯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푸른 풀밭은 뜨거운 태양을 피해서 쉴 수 있는 그늘을 의미합니다.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신다는 말은 양들이 풀을 실컷 뜯어 먹고 나서 그늘이 있는 풀밭에 누워서 태양 빛을 피하고 태양열에 뜨거워진 사막의 모래땅이 아닌 땅의 열기를 식혀주는 풀밭에 누워서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풍성한 먹거리와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여기서 ‘쉴 만한’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누호트’는 세찬 물결과는 대조적인 개념으로 ‘잔잔한’이란 의미입니다.
만일 목자가 급류로 인도하였다면 그 양 떼들은 물을 마시기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목자는 양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함으로써 안전히 쉴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급하게 흐르는 물이 아닌 아주 잔잔하게 흐르는 물로 인도해서 편히 물을 마시고 또한 물로 무더위를 식힐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양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과 안식을 주십니다. 또한 생명의 샘물을 마시게 함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부족함이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3-4절을 보면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항상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3절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은 영적으로 우리의 영을 다시 회복시켜주신다는 의미가 있고 육적으로는 지친 몸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목자는 지친 양들을 푸른 초장에 눕게 하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서 힘을 얻게 하고 나서 이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지친 우리들을 다시 생기가 넘치게 하시고 또한 바른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른길 또는 곧은 길이란 의미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야 할 올바른 길이기도 하지만 삐뚤어지지 않은 곧은 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의의 길은 형통한 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데리고 돌고 돌아 목적지로 가지 않고 곧은 길로 양들을 인도해서 조금이라도 덜 지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라면 돌고 돌아가는 길이 아닌 곧은 길 즉 형통한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곧은 길 즉 형통한 길로 인도할 것을 알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데리고 갈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처럼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그 길이 목적지까지 빨리 갈 수 있는 길임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가 함께 있기만 하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건져준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라보며 따라가듯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자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면서 따라가기만 하면 그곳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일지라도 반드시 형통하고 복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그 결과는 행복합니다. 5-6절을 보면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 구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23:5 “원수들 두 눈 뜨고 쳐다보는데 보란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귀한 손님 대접하듯 기름 발라주시며 잔이 흘러 넘치라 하고 부어 주시네”
23:6 “아, 그 누가 이렇듯 행복하리오. 이처럼 포근하리오. 주님의 손길 살아 생전 끊이지 않으리니 이 목숨 살아 숨쉴 동안에 주님의 전에 오래도록 살으리이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23: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23: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인데 그 집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맛있는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부어 주시기에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즉 행복하게 살게 된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우리를 하나님의 집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목자이신 어린 양(천국에서)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셔서 내가 사는 동안 여호와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겠다고 노래했다면 계시록 7장에서는 저 천국에서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저 천국에서는 다시는 ∼아니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7:16-17절을 보면
7: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17절에서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고 16절에서는 그들이 즉 목자의 양들은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에서 하늘 보좌 가운데 앉으신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에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는 주리지도 않고, 목마름도 없고, 그 어떤 것에도 상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저 천국에서 우리의 좋은 목자요 선한 목자요 참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게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어떤 것에도 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목자이신 어린양은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17절을 다시 보면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시록 22:1-2절까지를 보면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우리가 천국에 가면 어린양이시고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셔서 영원히 죽지 않고 질병과 고통이 없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죽음도 있고 질병도 있고 고통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갈 본향인 천국 즉 여호와의 집에는 질병도 고통도 아픔도 죽음도 없습니다. 생명수 샘과 생명 나무의 열매가 있어 영생을 얻게 됩니다.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17절을 다시 보면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고 다시는 눈물 흘릴 일이나 애통하거나 곡하거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않고 그곳에는 영원한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눈물을 씻어 주시고 눈물과 슬픔 대신에 찬송의 옷을 입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여호와가 목자가 되시기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행복한 삶을 의미하고 저 천국에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목자가 되시니 그 품 안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면 여호와의 집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3. 여호와의 집에서 할 일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성도들은 흰옷을 입게 됩니다. 13-14절을 보면
7: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우리가 장차 저 천국에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될 때 흰옷을 입게 됩니다. 흰옷을 입는 것에 대해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흰옷을 입는 것인데 흰옷을 입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리고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살던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된 것이고 이렇게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칭의가 이루어짐으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될 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우리들은 저 천국에서 어린 양이며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 즉 영생을 얻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흰옷을 입어야 하고 여호와의 집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할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계시록 7:7-12절을 보면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다윗이 시편에서 여호와의 집에 또는 성전에 머문다는 표현을 한 것은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이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고 한 것은 예배와 경배를 영원토록 드리겠다는 의미입니다.
계시록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해야 할 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어린양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여호와의 집에 머무는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예배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몸과 마음이 진정한 평안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참빛 가족이 되고, 모두가 저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참빛 교회 모든 가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 김광일목사
이어령(李御寧) 박사는 ’짧은 이야기, 긴 생각‘이라는 책에서 “양치기의 리더십”을 소개합니다. 그는 양치기 즉 목자가 양 떼를 모는 방법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목자가 앞장서서 가는 방법입니다. 푸른 초원을 향해 방향을 잡고 선두에서 목자가 길을 인도하면 양 떼들은 그 뒤를 따릅니다. 양 떼 앞에서 가는 목자는 ‘인도자’입니다. 목자가 손에 든 지팡이는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이며, 어둠을 밝혀주는 횃불 같은 역할을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뒤에서 가는 것입니다. 양 떼의 본능인 식욕에 양을 맡겨두면 스스로 풀이 있는 곳을 향해 갑니다. 굳이 앞에서 인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 뒤에서 따라가다가 뒤처지거나 길 잃은 양을 지켜주기만 하면 됩니다. 양 떼를 앞세우고 뒤를 따르는 목자는 양 떼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목자입니다. 그러다가 위험한 상황이나 힘든 일을 만나면 양 떼를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이때 목자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보호의 상징입니다. 세 번째 방법은 양 떼의 한가운데 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도자도 관리자도 아닌 동행자의 모습입니다. 양과 한데 어우러져 초원을 다니고 함께 머무르기도 합니다. 이때 목자의 지팡이는 소통을 위한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목자의 모습은 양과 일심동체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목축 문화를 보면 양 떼 속에 섞여 함께 이동하고, 광야에서 밤을 새울 때 임시 우리를 만들고 그 속에서 양과 함께 밤을 지낸 목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목자는 양 떼의 가운데 있으면서 양들의 눈빛을 읽고, 양들의 냄새를 맡고, 양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함께 움직입니다. 그렇게 하면 백 마리의 양이 있어도, 천 마리의 양이 있어도, 양들은 모두 자기 곁에 목자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목자이신 하나님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다함께 ‘여호와 나의 목자’를 부릅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없네 푸르른 초장 위에 나의 몸 누이시네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 하시네. 내 영혼 소생하며 자기 이름 위해 의의 길 인도하니 골짜기 두렴없네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 하시네. 주님의 지팡이가 안위하네 나를 주께서 원수 앞에 상으로 베푸시니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 하시네. 기름을 머리위에 바르시는 주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함 따르리니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 하시네.”
본 시는 다윗이 고난과 투쟁의 시절을 다 보내고 평화를 구가하던 말년에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양들을 인도하던 목동 시절을 회상하며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복을 확신하는 찬양시입니다.
특히 1절에서 고백하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원어로 ‘예흐와 로이’인데 ‘목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양인 성도가 누리는 복’을 노래합니다. 목자라는 단어에는 여호와께서 목자가 양을 돌보고 먹이듯이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양육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목자이십니다. 본문의 저자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어떻게 된다고 말합니까?
첫째로 소생하나이다
스펄젼 목사(Charles H. Spurgeon)는 주기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연중 한두 달은 어둡고 침침한 런던을 떠나 프랑스 남쪽 리비에 해안 도시에서 요양을 하였습니다. 스펄전은 성도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완전히 부서진 질그릇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밤을 잠자지 못하며, 낮에도 눈물을 흘리며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이런 고통 가운데서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연약함을 알았기에 동일하게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설교 가운데에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의 기쁨이 생생이 묻어났습니다. 양의 위기는 양 자신의 무능력도 양의 부주의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목자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실수해도 목자가 곁에 있으면 양은 안전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는 이유는 목자이신 하나님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성공해도 놓치기 쉽고 실패하여도 놓치기가 쉽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는 “모든 영적 침체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영적 침체를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의 ‘소생시키시고’는 원어로 ‘예쇼베브’인데 ‘회복시키다, 새롭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돌이키심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연약해진 시인은 하나님의 안식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육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영혼이 소생되려면 목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면 생명을 풍성히 얻고 만족을 누릴 뿐 아니라 영혼의 안식도 얻게 됩니다. 오직 목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음성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의 소생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안위하나이다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태어난 지 1년 6개월 만에 심한 열병을 앓고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설리반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는 50년 동안 헬렌 켈러를 지도했습니다.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헬렌은 점자를 배우고 말을 배워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아픔과 좌절과 눈물의 세월이었겠습니까? 하지만 헬렌 켈러는 힘든 골짜기를 걸어갔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많은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녀가 눈을 잃은 장병들을 위문하러 갔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 아닙니다. 그 아픔과 슬픔을 이겨나가지 못하는 마음이 불행한 것입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마음만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병사들은 헬렌 켈러의 음성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당신이 헬렌 켈러입니까?”라며 감격했습니다. 그녀는 불행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통과한 골짜기를 소개하며 위로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89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여러분, 저를 보세요. 나도 여러분과 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 길을 통과했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골짜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하나님은 골짜기를 통하여 영혼의 생수를 마시게 하시고 은총을 맛보게 하십니다. 위로하시며 안위하십니다.
본문 4절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의 ‘안위하시나이다’는 원어로 ‘예나하무니’인데 ‘위로하다, 안심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목자가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양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을 뜻하며 여호와께서 양무리인 백성들을 안심시키시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특히 미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보호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앞에 늘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 소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도 지나가야 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힘에 부치는 고난을 당할 때도 많습니다. 앞이 캄캄하여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목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여야 합니다. 그때 목자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여 주십니다.
셋째로 넘치나이다
18세기에 미국 뉴욕으로 가려는 배에 오른 영국 소년이 있었습니다. 유년 시절 그의 집은 중환자실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기침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나는 꼭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님의 병을 고쳐드려야 한다.” 소년은 어려운 처지에도 부자가 되어 효도해야 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8세 성인식을 마치고 동네 어르신을 찾아갔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성인이 되었어요. 가난한 제가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 노인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소망을 잃어서는 안된다.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거야!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일은 자신이 있습니다.” 노인은 소년의 손을 잡고 격려하였습니다.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거라. 너는 꼭 성공할 수 있을거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네 사업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훗날 사업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네 수입의 10분지 1을 하나님께 드리어라. 그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몫이다.” 그는 미국에 건너가 비누 제조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하여 지배인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비누회사의 사장이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세계적 치약의 상표가 된 콜게이트사를 만든 윌리엄 콜게이트(Willimam Colgate)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계산’이라는 장부를 만들어 수익금의 10분지 1일 장부에 빠짐없이 기록하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수익은 날로 늘어갔습니다. 회사는 확장되어 치약과 화장품까지 생산하게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상표로 붙인 콜게이트 치약은 세계적 상표가 되었습니다. 콜게이트는 자신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였으며 교회의 청소를 도맡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하였던 것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가난한 소년이었지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랐던 그를 축복하셔서 잔이 넘치도록 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의 ‘넘치나이다’는 원어로 ‘레와야’인데 ‘단순히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포화 상태가 되어 넘쳐흐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잔은 다윗이 누리는 복을 가리키는데 원수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목숨을 보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복 가운데 있음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성도는 날마다 은혜가 흘러넘칩니다. 대적들의 위협이 있지만 위기 가운데도 목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맛본 다윗은 그 은혜가 평생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차고 흘러 넘치는 풍성한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동원 목사의 저서 ‘새벽 사슴의 노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미국에서 한 소년이 암으로 사경을 헤맬 때 어머니가 시편 23편을 읽어주며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말씀을 꼭 기억하거라. 아플 때마다 이 말씀을 생각하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The Lord is my shepherd)” 영어로 읽으면 다섯 개의 단어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꼽으며 말씀을 심어주었습니다. 특히 네 번째 손가락을 꼽을 때 반지를 끼워주며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면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천국으로 인도하실 거야.” 얼마 후 어린 아들은 눈을 감았습니다. 아들의 모습을 보던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들은 죽어가면서 오른손으로 반지가 끼워진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 되심을 믿고 천국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성도들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성도에게는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가 보장되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부디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심을 믿고 영혼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하여 안전하게 보호받고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심을 확신하여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편 23:1-6 / 정용섭목사
히브리어 성경 시 23편은 ‘다윗의 시편’이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우리말 성경도 <다윗의 시>라는 표제를 달았습니다. 시 23편을 노랫말로 하는 찬양곡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래는 나운영 작곡의 ‘시편 23편’입니다. 이 시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 노랫말이 담백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은혜롭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로 끝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생을 산다면 대만족이겠지만 실제로 이렇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많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한평생
어떤 분은 시편 23편을 쓴 사람이 모두에게 추앙받는 왕 다윗이니까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다윗과 관련된 서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웬만한 거는 알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당신이 걸어온 인생을 다시 살아볼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는 십중팔구 ‘노땡규’라고 말할 겁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노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의외의 대답이겠지요. 저는 다윗의 인생살이에서 이 대답의 근거가 되는 몇 대목만 짚겠습니다.
그는 시골 목동이었다가 왕의 사위가 된 다음 명실상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입지전적 인물이었으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탄하지 못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처음 아내인 공주 ‘미갈’과의 관계도 오랫동안 원만하지 못했고, 자식들 문제도 죽을 때까지 속을 썩였습니다. 큰 왕자 암논이 배다른 공주인 다말을 성폭행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서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습니다. 압살롬은 왕위 찬탈까지 시도합니다. 다윗은 야반도주하듯이 압살롬에게 쫓겨 요단강 건너편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요압 장군이 반란군을 진압합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압살롬의 난’입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다윗이 늙자 왕위 승계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암논과 압살롬과 아도니야와 솔로몬입니다. 암논과 압살롬이 죽었으니까 아도니야가 왕위를 물려받을 차례입니다. 아도니야는 요압 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 등등과 함께 세력을 모았습니다. 나단 선지자와 밧세바는 다윗을 찾아가 아도니야 왕자로 인해서 밧세바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죽게 되었다고 하소연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어명을 선포했습니다. 그가 정확하게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밧세바와의 특별한 관계로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를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도니야가 왕위를 차지하려고 나섰을 때 그에 관한 성경 기자의 설명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왕상 1:6절입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훗날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다윗의 한평생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부족함이 없다.’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알만한 그 대답을 말씀드리기 전에 인간 실존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 실존을 일단 정확하게 뚫어보아야만 그 대답이 설득력 있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행복했다거나 훌륭하다고 추켜세우면서 부러워하고, 거꾸로 그런 좋은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니까 어쩔 수 없긴 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존경받고 인정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조건들은 삶의 비본질적인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은 숨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문제들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실존의 본질은 영혼의 불안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유명 유튜버나 유명 가수와 배우,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 프로 운동선수와 벤처기업가들도 시 23:4절이 가리키듯이 ‘죽음의 골짜기’를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영혼의 불안은 세상의 그 어떤 조건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인기 ‘짱’인 사람도 고독하고, 돈이 많아도 불안하고, 자식이 많아도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근원적으로 자기 소멸이라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게 좋겠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있다고 합시다. 남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 중의 스타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 사람은 남이 모르는 불면증이나 변비가 심할 수가 있어요. 혹은 결벽증으로 힘들어 할 수 있고, 남을 의심하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매일 악몽에 시달릴지도 모르고요. 공주와 왕자 신분이라도 똑같이 하루 세끼 먹어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사람과 부대껴야 하고,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해야 합니다. 영혼의 불안이라는 인간 실존의 깊이에서 보면 미국 라스베이거스나 뉴욕 맨해튼에서 초호화판으로 사는 사람이나 부탄 산골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나 다를 게 전혀 없는 겁니다. 초호화판으로 사는 사람들은 죽음의 골짜기를 감추고 좋은 모양만 밖으로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도 영혼의 만족이 안 되니까 좋은 조건에 더욱더 매달립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어쨌든지 이런 인간 실존을 넘어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다윗이 영웅호걸로 살았으나 실제 삶에서는 불안과 고통의 연속이었던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시편 23편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과 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신앙이 그를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뜻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너무 뻔하거나 너무 종교적이라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하나님 신앙은 정말 비현실적일까요? 주관적인 종교적 망상에 떨어진 것일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윗이 말하는 부족함이 없는 삶의 근거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라는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이 문장은 다윗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왕이 되기 전 다윗은 본래 직업이 목동, 즉 목자였습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가 어떤지를 그는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일대일 결투하는 자리에 나온 다윗은 사울 왕에게 자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양 새끼를 물어가면 자기가 끝까지 따라가서 사자나 곰과 싸워 새끼를 구해냈다고 말입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려고 위험을 감수합니다. 특별한 때는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목자와 양은 공동운명체입니다. 이런 목자를 알기에 양들은 목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릅니다. 똑같은 심정으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목자가 실제로 양의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해줄까요? 늘 푸른 풀밭과 물가로 자신들을 이끌어줄까요? 물론 그렇지 못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작년에 갔던 장소에 다시 갔는데 이번에는 풀이 하나도 없을 수 있고, 작년에 양들이 물을 마셨던 시냇물이 비가 오지 않아서 마를 수도 있습니다. 목자가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양들에게 어려움은 일어납니다. 천재지변도 일어나고 전염병도 돕니다. 새끼 양을 낳다가 죽는 엄마 양도 있겠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모두 인생을 평안하게 사는 건 아닙니다. 예상하지 못한 온갖 소용돌이가 각자의 인생살이에서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찬양합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가능한가요?
양이 목자를 믿고 따르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 시간표나 나기 나름의 인생 손익계산서에 민감하지 않다는 게 우선 중요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걸 더 궁극적인 삶의 목표로 삼기에 자기 인생길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낙심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불행한 일이 벌어지면 피곤하고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일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삶의 그런 깊이를 알고 느끼고 믿는 사람이 있고, 그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겠지요. 다윗은 그런 삶의 깊이를 경험했기에 시편 23편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겁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노래했습니다. KJV은 ‘I will fear no evil.’라고 번역했습니다. 루터는 해(evil)를 Ungluck(불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나는 그 어떤 해로운 일이나 불행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약간의 어려움이나 불행을 몸서리치듯이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심리 현상입니다만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삶이 황폐해지고, 종종 난폭해지는 겁니다. 아주 성실해 보이는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보이는 인간 이하의 행동도 사실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약자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묻지 마’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은 대게 심리적인 두려움에 갇혀 있는 겁니다. 누구나 인생살이에서 죽음의 골짜기를 살아내야 하기에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 두려움에 점점 더 깊이 매몰되는 사람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주께서 함께하심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4절에서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그는 그 어떤 어려움이나 불행이 닥쳐도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주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지팡이는 목자들이 양을 인도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고 막대기는 짐승과 싸울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양들은 비가 오나 눈이 와도, 비탈길을 만나도 불평하지 않고 목자를 따라서 갑니다. 결국에는 목자가 자기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목자와 양이 오랜 관계를 통해서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형성됩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정리하면 절대적인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질 때 은총으로, 즉 선물로 주어집니다.
혹시 이런 믿음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합리적인 게 잘못은 아니나 진리가 늘 합리적으로만 경험되는 게 아닙니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사람이 세상과 삶을 늘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세상과 삶의 깊은 차원은 이성과 합리성 안에 갇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이 늘 합리적이던가요? 물리학에서 양자의 세계가 합리적이던가요? 죽을 고생을 치르면서 에베레스트산을 올라가는 산악인들의 행위가 합리적인가요? 합리성으로만 말하면 연봉이 높아야만 행복한 거겠지요. 사람은 합리적이지 않아도 사랑하고, 자기 안위를 넘어서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은 생명의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합니다. 그래서 어려움과 불행이 겹쳐서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기를 지키신다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세요?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자기 인생 시간표를 따라가면서 치열하게 사느라, 그리고 늙어서는 죽음 문제에 쫓겨서 이런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 셋째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전합니다. 요 10:11절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
예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목자가 아니라 한걸음 저 나아가서 ‘선한 목자’로 고백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늘 양과 함께합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함께합니다. 그 사실을 역사적 예수의 운명에서 경험했기에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와 로마의 거대한 세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후손인 우리에게는 그들의 경험이 왜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걸까요? 제자들이 뭔가를 착각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선한 목자로 경험하고 있나요?
오늘 현대인들에게 문제는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양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 알아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 목자 같은 존재는 없어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 표상은 오히려 거추장스럽습니다. 과도한 자신감과 맹목적인 자아숭배라는 특징으로 사는 겁니다. 그럴듯해 보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잘 적응하고 나름 노력하면 남부러워할 거 없이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돈만 많으면 풀밭은 지천으로 널려있고, 마실 물도 수도관과 정수기를 통해서 자동으로 공급받습니다. 현대 지성적인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종교적 잔소리꾼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허풍쟁이나 아첨꾼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네요. 자신들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할 양이 아니니까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고 싶겠지요. 맞는 말인가요? 선한 목자 없이 사람이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설교 앞 대목에서 인간 실존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거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즐기면서 살아도 인간은 본래 고독하고 불안하다고 말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실존을 외면하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신처럼 따릅니다. 그게 그나마 자신들에게 위로가 되니까요. 이런 위로는 임시처방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술을 마시거나 설탕물을 마시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사람들의 인생에는 근원적인 생명의 깊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 김양인목사(목양교회)
150편의 시편 가운데 다윗이 지은 시편 23편처럼 많은 성도들의 사랑을 받는 시편도 드물 것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 시편을 통해서 위안과 힘을 얻고 믿음을 새롭게 세워나갑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 시편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첫 번째로, 이 시편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일깨워 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목자시고 자기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면 다윗이 생각한 하나님은 어떤 목자실까요? 다윗은 소시 적에 목자 노릇을 했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를 이해했습니다. 그가 사울 왕 앞에서 한 말을 보면 그가 얼마나 양들을 사랑하였고 헌신적인 목자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34)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삼상 17:)
다윗이 이처럼 양들을 사랑하고 헌신적인 목자였다면, 그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좋은 목자가 되실까요?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란, 목자가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지며, 양은 온전히 목자를 의존해서 사는 관계를 말합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가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이끌고 가서 마음껏 풀을 뜯어 먹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시냇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마시게 합니다. 저녁이 되면 양을 모아서 돌아와 우리 안에서 안전하게 잠들게 합니다. 밤중에 목자는 양 우리의 출입구에 가로질러 누워서 잠을 청합니다. 이렇게 하면 누구든지 양 우리를 출입하려면 목자를 밟거나 건드릴 수밖에 없으므로 양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하신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의미합니다.
양들을 목자가 있는 한 먹고 마시는 것이나 안전에 대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양들은 단지 목자의 인도를 순순히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목자의 보살핌을 받는 양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그와 같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하셨습니다. 양들이 앞서 가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만 하면 언제나 결핍이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생존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생활전선(生活戰線)이란 말이 생겨났을까요? 삶이 전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쟁은 쉬엄쉬엄 할 수 없고 죽기 살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삶이 곤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성도들은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양은 자기 생존에 관한 모든 것을 목자에게 맡기고 살아갑니다. 성도들 역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 삶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야말로 성도들의 위대한 특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권면하기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맡길 때 기꺼이 우리 삶을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일이니까 내가 해야지, 하나님께 맡길 수 없어‘ 라고 생각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맡김으로 참 평안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마음껏 연하고 신선한 풀을 뜯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 뿐 아니라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 몸이 양식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 영혼도 양식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영혼의 양식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입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그것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영화를 아무리 많이 보아도 그것으로 영적 생명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잔잔한 시냇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시는 성령을 말합니다. 초막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에 서서 외치시기를 “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고 하셨습니다. 이 생수의 강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 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시던 중에 “13)…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고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사람은 짐승과 달리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짐승들은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의 욕구를 충족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밥과 고기로 채울 수 없는 영혼의 욕구가 있습니다. 시편 42편을 지은 성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그 영혼이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곤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의 목적은 진리를 찾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껏 진리를 찾았다고 말한 철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철학자들은 죽을 때까지 구도자(求道者)로서 살아갈 뿐입니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의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나의 철학과 선배 교수가 하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사모하고 찾던 진리였구나, 하는 경지에 도달한다면 진리의 여신의 옷자락을 붙들고 한없이 울고 싶다” 던…」 평생 진리를 추구했으나 찾지 못했다면 얼마나 허탈할까요?
종교 역시 구도의 길입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고 합니다. 부처가 되려면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 잠언 14장 12절에 이르기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5)…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 3:)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수양을 하고 도를 닦아도 육에 불과하므로 영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대항하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지만 영생의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갈 때 생수의 샘물이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 그 영혼이 진정한 해갈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도 잊지 않으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혼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일상적인 삶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9)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1:)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생활을 하였던 40년 동안 밭에서 나는 곡식을 구할 수 없었으나 양식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사례지만, 한 가지 불변하는 진리를 말해 주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일상생활에도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우리에게 유리한 기회를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우리에게 얼마든지 재물 얻을 능을 주실 수 있습니다.
말라기 3장을 보면 이런 약속이 나옵니다.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농부가 부지런히 일한다고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은 기후와 적당하게 비와 바람을 주셔야 하고 병충해를 막아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육신의 삶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영혼을 소생시킨다 함은 범죄한 영혼을 회개시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면서 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도들도 실수하고 범죄하여 영적으로 비참한 지경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죄악 가운데 방치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열어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도들이 죄에 빠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죄에서 돌이켜서 다시금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그 영혼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위기 속에서도 성도들과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두컴컴한 골짜기는 험하고 어디서 뱀이나 맹수를 만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여건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을까요? 그러나 인생은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와 같이 평안하고 형통한 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이 힘들고 불안하고 시련이 중첩되는 날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 극도로 힘든 시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한창 나이인 마흔에 피부암에 걸렸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내려간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침상에 누워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하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사야에게 명하시기를 “5)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6)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나 여호와가 말한 것을 네게 이룰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8)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외 없이 시련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능력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두려움을 극복한 방도가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은 그 비결을 말하기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나 두려워하고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까닭은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상황에 홀로 버려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깊은 산속에서 곰이나 호랑이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불치의 병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두려울까요?
그러나 성도들은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도주할 때였습니다. 해가 저물어 벧엘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했습니다. 야곱의 심정이 얼마나 처량했을까요?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없으니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런데 그 날 밤 야곱은 한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였습니다. 그가 보니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보니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서원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야곱은 어딜 가든지 혼자가 아니라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지, 최악의 경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성도들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원수들 앞에서 그를 위해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풍속에 의하면, 잔칫집에서 귀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그가 망하기를 바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대와 달리 원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윗을 높여 주시되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신 대로, 하나님을 자기 목자로 모신 성도들에게는 합력성선의 은혜가 함께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성도들을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목자로 둔 성도들이 무엇을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들, 다윗은 결론 부분에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순경에서나 역경에서나, 건강할 때나 병약할 때나, 형통할 때나 시련의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젊어서나 늙어서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사랑 받을 때나 배척 받을 때나, 희망에 차 있을 때나 절망할 때나, 변함없는 한 가지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양들인 성도들과 함께 하시면서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성도들은 아무 것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보살핌은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내세에서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며 잠시 여행객처럼 머물다 가는 곳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속의 유혹에 빠져 실족하지 않고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고 주의 일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의 이 시편이 성도님들의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전천후 감사
시편 23:1-6 / 이상호목사
시편 23편은 양과 목자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의 특징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본문에서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양에 대해서 정리하여 말씀드립니다.
1. 눈이 나쁘다.
양은 시력이 나쁩니다. 그래서 눈앞에서 뭔가 보이고 그게 눈앞에서 움직이면 그걸 졸졸 따라다닌답니다. 양을 치는 개들이 옆에서 뛰어 다니면 그게 또
목자인 줄 알고 쫓아간다고 합니다.
2. 잘 속는다.
양 떼의 형편없는 분별력을 야생 개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야생 개들은 야생의 양 떼를 교묘히 유도하여 좁은 골짜기로 몰아넣은 뒤 잡
아 먹곤 했다고 합니다.
3. 잘 넘어진다.
양의 다리는 단단하고 강하지 않아 재빠르질 못합니다. 그래서 넘어질 때가 많고 뛰는 속도까지 느려 맹수가 가까이 쫓아오면 잡아먹히는 경우가 다반사
입니다.
4. 넘어지면 못 일어난다.
양은 일단 넘어지면 말 그대로 '벌러덩' 뒤집어 집니다. 완전히 뒤집혀 져서 눕습니다. 그렇게 뒤집힌 양은 아무리 용을 써도 스스로 못 일어납니다. 그래
서 목자가 와서 일으켜 세워 줄 때까지 그 상태로 누워 있는다고 합니다.
5. 중심을 금방 못 잡는다.
뒤집혀 있던 양은 제대로 일으켜 세워줘도 금방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일으켜 세워준 후, 목자는 양이 똑바로 걷도록 몇 초 동안 가만히 붙잡아 줘야
합니다.
6. 이기적이고 멋대로이다.
새끼 양들이 배가 고파 어미로 보이는 양들에게 다가가서 우유를 얻으려 다가가면 양들은 매정히 뿌리치고 가버립니다. 양이 그저 온순한 것 같지만 실은
상당히 이기적이고 멋대로인 면도 있다고 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각자 자기 먹이 찾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멋대로 가버린다고 합니다.
7. 방향 감각이 없다.
양들은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시력이 너무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에 야생 숲이 있는지 낭떠러지가 있는지 조차도 구분 못하고 무조건 걸어 들어
갑니다. 그래서 양은 반드시 목자 또는 양치기가 옆에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8. 방어력이 제로다.
양은 자신을 방어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는 동물입니다. 잘 속고, 눈도 잘 안 보이고, 뛰는 속도까지 느리기 때문에 반드시 지키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
다.
9. 죽을 때가 되면 온순해진다.
염소나 돼지 등의 동물들은 죽음 직전 발버둥을 치는 반면, 양은 죽음 앞에서만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온순해 진다고 합니다. (한숨 쉬고 나서)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지구촌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조건이 72가지가 있었고 절대 필요한 것은 18가지가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필요한 것은 5백가지이며 절대 필요한 것은 50가지라고 사회학자들은 분석합니다. 필요한 것과 절대 필요한 것을 더 많이 누리며 사는 현대인들이 과연 60년 전보다 더 행복할까요? 오히려 감사할 줄 모르며 불행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1690년 증기기관을 발명한 프랑스 물리학자 '파핀'은 말했습니다.
"나는 세 가지로 인해 늘 감사한다.
첫째는 날마다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요,
둘째는 몸의 건강이요,
셋째는 영원한 삶을 향한 소망이다."
그럼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가?
그 해답을 다윗(시편23편)에게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시편 23편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립니다. 시편에서 가장 알려진 장이고, 또한 전체 성경에서도 유명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시에서, 시의 작자 다윗은 하나님을 보호자와 공급자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유대교에서나, 기독교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애송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편은 주로 찬양 작곡자들에 의해 수백 개의 노래로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개신교의 찬송가 작가인 장수철은 시편 23편을 근거로 찬송가(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를 지었고, 이 곡은 우리 찬송가 570장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568장, 390장, 413장 등이 모두 시편 23편을 본문으로 한 찬송가입니다.
또한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이미 일반인에게도 알려져 있는 곡이기도 합니다. 개신교 CCM계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시편 23편에 대해 곡을 많이 썼고, 이를 토대로, 'psalm 23'이라는 음반이 발매되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에도 이러한 추세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공회에서도 23편을 포함한 시편을 사용하여 미사 때 하느님을 예배합니다.
그럼 이 시간에 박종호의 시편 23편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비천한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왕위에까지 오른 다윗, 그의 인생에는 유난히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과 항상 동행했으며, 하나님께 늘 감사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 사람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비천한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왕위에까지 오른 다윗, 그의 인생에는 유난히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환란과 박해 중에도 하나님과 항상 동행했으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1. 과거를 회상하며 감사했습니다.(시 23: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3).
* 여호와 로이 - 목자 되시는 하나님(시 23:1), 히브리어 ‘로이’는 ‘나를 치신다.’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어려운 순간에 받았던 도움을 그 순간이 지나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어려운 순간에 함께 하시며 그를 도우셨던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며 그분께 감사했습니다.
2. 현재도 동행해 주심을 감사했습니다.(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 여호와 삼마 - 함께 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어 ‘삼마’ 는 '거하다' '존재한다'는 뜻인데, 상황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항상 함께 필요한 곳에 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겔 48:35).
다윗은 과거에 함께 하시며 그를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현재도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현재 모든 일도 그분께서 이끄시며 지켜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감사했습니다.
3. 미래의 소망을 보며 감사했습니다.(시 23:5-6)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5-6).
*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하나님 -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4).
다윗은 또한 과거와 현재에도 늘 자신을 도우시고 지키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시어 결국엔 천국으로 인도할 것임을 믿고 그곳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소망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결 론
우리는 그간 날마다 목자 되신 하나님(여호와 로이)의 인도함을 받고 있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또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여호와 삼마)께 감사를 드려야 하며, 영생과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시고, 또한 준비하시는 하나님(여호와 이레)께 세세무궁토록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시작한 2015년, 아니 일생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감사절
시 23:1-6 / 김남수목사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 최고의 표현인 것입니다.
신앙촌에는 두 가지 마을이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 촌이고, 하나는 불평 촌입니다.
감사 촌에 사는 사람은 늘 감사하는 습관을 통해서 감사하는 성격이 생기고, 감사하는 성품을 좇아서 감사의 인격이 만들어 져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 가는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불평하므로, 그것이 몸에 배서 성격이 되어 불평을 하는 인격이 돼서, 인격이 삶을 만들므로 불평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사 촌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제들 중에 아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미움도 사고, 배신도 당하고, 버림도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환경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사랑하지만,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 늘 구박을 받으며 어렵게 살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늘 하면서 살아 갔던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이 죽을 뻔하다 살았습니다.
물이 없는 빈 웅덩이에 빠트려 놓고, 형제들이 다 떠나가 버리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불러도,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광야에서 혼자 몇 일을 지내면, 그곳에서 굶어 죽던지, 두려워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건져서 결국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됩니다.
애굽에 가서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억울하게 주인 집의 여자가 달려 들어서 유혹을 했지만, 하나님이 두려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 가게 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감옥에 들어 가서 하나님께 내 모양이 이게 뭡니까? 내가 무엇을 잘 못 했습니까? 하고 불평을 했을 겁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 오면 모르겠지만, 아무 것도 잘 못 한 것이 없고, 잘 하려고 해서 감옥에 들어 온 것입니다.
요셉은 불평할 수 있는 요소가 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과 좋으신 하나님이 내 생각과 뜻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인도 해 주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감사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죄를 지어서 감옥에 들어 온 것은 부끄러움이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오히려 죄 없이 감옥에 들어 오니 이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고, 이 억울하고 원통한 형편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다, 반드시 갚아 주시고,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믿고 감사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 온 것보다 죄를 안 짓고 들어 온 것이 감사하고, 죄를 짓고도 감옥에 안 들어 오는 사람이 있는데, 죄를 안 짓고도 감옥에 들어 올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 것 입니다.
그래서 성실하고 기쁨으로 일을 하니 그 감옥을 관리하던 높은 사람이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감옥을 주관하게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최근에 자살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습니다.
만 팔 천명이 일 년에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대학 교수에게 와서 자신은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 교수는 처음에 죽는 다고 찾아 오는 사람들을 밤 낮으로 돌보아 주고, 걱정을 했는데, 죽는 다고 찾아 온 사람치고 죽은 사람은 없었답니다.
시간이 지나, 죽는 다는 사람은 살려 달라는 메시지고,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정말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이 자살 할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교수는 낙심하지 말고, 자살을 하려면 자살을 백 번 외치면 무슨 방법이 생길 거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살을 한 참 외치다 보니, 자살이 살자로 바뀌게 되어 생각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같은 상황, 같은 말이라도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 하실 수 있는 축복의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감사 촌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런 환경 속에서도 감사했으므로, 하나님께서 요셉을 계속해서 높여 주셔서, 그가 하나님을 높이는 자리까지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까?
사무엘이 기름 부으러 왔습니다.
아들들을 세워 놓고 기름을 부으려 하니, 성령의 감동, 하나님의 신의 감동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아들이 전부냐고 물어 보자, 작은 아이 하나가 있는데 계수 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윗을 데려 오라고 해 데려 왔습니다.
사실, 그때 다윗의 형들은 좋은 일이 있어 갔습니다.
다윗은 혼자 들에서 양들을 돌보면서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니 다윗은 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목동으로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나를 지켜 주시니 주님은 나의 좋은 목자 이시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잘난 형제, 똑똑한 사람, 귀골이 장대하고 멋있게 생긴 거 상관없이, 저 목동 다윗을 불러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오늘 성경 본문에도 늘 하나님께 감사하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시 136: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6)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8)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분! 조금 신앙을 잘 못하면 자기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감사 촌의 사람은 눈을 열고 큰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보면,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기만 보면, 원망과 낙심일 올 수 있지만, 하늘을 보면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 달과 별을 지으신 하나님, 그리고 큰 빛을 지으시고,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그 안에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보면 우리가 조그만 일에 그렇게 낙심하거나, 상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밥 먹는 것, 잠 자는 것도 감사합니다.
사실, 다윗은 감사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감사로 성공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저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하나님께 감사의 시를 쓰고, 감사로 제사를 드린 이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높여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높여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별 거 아닌 것도 감사하면 하나님은 감사하는 마음이 고마워서 자꾸 축복을 해 주시게 됩니다.
감사를 잊어 버리면 끝입니다.
축복을 해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감사 할 줄 모르면 더 주실 것이 없고, 더 주어야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도와 주셨고, 주야로 위험한 일 없게 하시고,병들면 고쳐 주시고, 어려울 때 살려 주시고, 죽게 되었을 때 살려 주셨는데, 조그만 불편이 있으면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뭐라 하시겠습니까?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면 저 사람은 고마워 하는 줄 아는구나 하시고, 점점 더 축복 해 주시고, 더 높여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막을 자가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을 자가 없으며, 여시면 닫을 자가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방법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사무엘 라이프울츠라는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아주 성실하고 유능한 변호사였습니다.
이 분의 변호를 통해서 사형 받을 사람이 78명이나 사형 언도를 면했다는 것입니다.
그 78명이 사형 언도를 면해 생명을 건졌는데, 성탄절, 감사절에 많은 사람들이 카드를 보내왔는데, 한 사람도 감사의 카드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누가 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사람의 문둥 병자가 치유함을 받았건만, 한 사람만 오고, 아홉 사람들은 말 한마디 없이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는 주님께서 아홉은 어디에 갔느냐고 물으시던 사건과 같다는 것입니다.
죽을 자가 살았으면 감사해야 될 줄 믿습니다.
김 남기 목사님을 위하여 여러분들께서 기도 많이 해 주셨습니다.
19세에 백혈병에 걸려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 고쳐 주셔서 30년을 살았습니다.
49세에 어느 날 다시 백혈병이 재발 되었습니다.
제가 암 센터에 데리고 갔는데, 현금으로 몇 십만 불이 필요하다며 내 쫓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셔서 건강을 회복하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물어 보다 불평이 없느냐고 하면, 죽었다 살아난 자가 무슨 불평이 있겠냐며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생각 해 보면, 우리가 다 예수 안에서 예수님 없었으면 죽었을 사람들 인 것입니다.
죄는 사망인 것 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주께서 건져 주시고, 살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았는데, 이제 죽을 자가 살았는데, 이것을 다 잊어 버리고 불평하거나, 무슨 이유가 있다면 그 자체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배신 인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분에 대한 배신인 것입니다.
큰 감사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감사하는 습관을 갖고, 감사하는 버릇을 들이고, 감사하는 성격을 만들어 가면 감사하는 인격이 생기고, 감사하는 인격 속에서 감사하는 축복의 삶이 열리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데, 우리가 감사 촌으로 빨리 이사를 가서 어떤 상항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밥 먹는 것도 감사합니다.
여러분! 쌀 밥이 얼마나 귀했습니까?
보리는 흔해서 보리 밥을 해서 먹었지만, 쌀 밥은 명절 때나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 와서 보니 쌀 밥은 건강에 이롭지 않다고 하니 우리가 축복을 받고도 받아 넘은 줄 믿습니다.
고기 역시 명절 때에만 구경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우리가 지금은 고기가 콜레스테롤이 많아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렵던 시절을 생각해야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축복하셔서 미국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미국에 와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면 성공한 것입니다. 축복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더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평범한 삶 속에서, 잠자는 것, 먹는 거도 감사, 옷 입는 것도 감사, 자식 있는 것도 감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어떤 분이 자식이 속 썩인다고 하자, 자식을 잃은 분이 매일 자식의 묘에 가서 우는 것 보다 살아 있는 자식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교회도 감사하고, 교인도 감사하고, 목사도 감사하고 모든 것에 감사 해야겠습니다.
제가 양선, 소망 교구 부흥회에서 제가 모자라는 부분이 많은 목사지만, 감사함으로 받고, 부족한 것을 사랑으로 덮고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점이 싫고, 이렇게 해서 싫다고 하면 그 신앙이 어디로 갈 것이며, 여기서 떠나면 어디로 가겠으며, 다른 곳에 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감사하면서 주님을 섬기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불평이 있어도 서로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선인과 악인의 다른 점은 감사와 불평의 차이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감사와 불평의 차이입니다.
은혜 받은 것과 은혜 못 받은 것의 차이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남이 갖지 않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남이 가진 것을 갖지 못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시각 장애자 한 사람이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습니다.
연주를 하기 전에 교회에서 두 번 연습하는 것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오르간의 위치를 한 번 점검 하고는 훌륭한 연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훌륭한 연주 솜씨를 감탄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웃으면서 저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다 없지만, 하나 주셨기에 이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감사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고, 사업이 파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다시 섬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모든 것이 다 회복 될 것입니다.
감옥과 수도원은 고립이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내용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근본적인 차이는 불평이냐, 감사이냐의 차이입니다.
수감된 죄수가 수도자와 같은 감사의 마을을 가질 때, 감옥은 수도원으로 변할 것이고, 수도자가 불평의 마음을 가지면 수도원은 감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것이 환경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것이고, 감사하는 자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 먹는 것과 입는 것, 지난 날의 과거와 오늘,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주신 은혜 감사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고, 조국과 가정과 아내와 남편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 저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 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고마우시고,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좋으신 주님!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시간,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이제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부족함이 없는 신앙
시 23:1-6 / 마경훈목사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롬10:10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즉 신앙고백을 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고백으로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좋고 고백을 통하여 주님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고백을 반석으로 삼으시고 교회를 세우셨으며, 그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천국 열쇠를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신앙고백의 명수입니다. 그가 기록한 시편의 글들을 읽어보면 거의 자신의 신앙고백입니다. 시18:1-2절을 보면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불이시오 나의 산성 이시리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요즘 제가 은혜 받은 다윗의 고백을 하나 소개하자면 시27:1의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입니다. 그의 생명의 능력은 돈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다윗의 고백 중에 가장 유명한 고백은 아무래도 본문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 아버지의 양을 치는 목자로서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한 이 고백은 강한 체험을 동반한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고백은 삶의 경험을 통하여 묻어 나오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다윗이 본문에서 하는 고백을 들어봅시다.
1.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목자라는 말은 몇 가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당시 목자들은 광활한 목양지에서 양떼를 푸른 초장과 실만한 물가로 인도하였습니다. 양떼를 먹이기 위해서는 어떤 고생도 감수했습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양을 치기 위해 먼 지역으로 이동해 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양떼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세겜에서 다시 북쪽으로 더 올라갔습니다. 거리로 따지면 약 1,000Km가 됩니다. 양떼를 먹이기 위해서 목자들은 그렇게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서 도망 다녔습니다. 그가 도망 다니는 중에도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번도 다윗이 굶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윗을 먹이셨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까지 공급하셔서 다윗과 그의 일행들을 먹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바울은 빌4:19에서 "나의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보호자라는 고백입니다.
중동지역은 사막 기후라서 땅은 메마르고 물이 귀합니다. 목자는 불볕 같은 태양열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피지역을 알고 양들을 그곳으로 인도했습니다. 4월부터 10월까지는 건조기이며 11월부터 3월까지는 우기입니다. 그들은 건기에는 양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우기에는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기에는 목자들이 양떼를 남쪽 광야나 중북부 고원지대로 인도합니다. 협곡을 통과 할 때는 어두워서 야생동물의 공격을 받기 쉽습니다. 만약 야생동물이 공격을 하면 목숨을 걸고 양들을 보호합니다. 또 목자들은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임시대피소를 짓기도 합니다. 가시덤불 등을 사용하여 임시 우리를 지어놓으면 어리거나 병든 양들에게 안전한 휴식처가 됩니다. 목자는 양들을 노리는 도둑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양떼 곁에서 살았습니다. 잠을 잘 때도 양떼 곁에서 잠을 잡니다. 부상당한 양이 있으면 목적지까지 메고 다녀야 하고 병든 양이 생기면 정성껏 간호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보호자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목자장 되시는 주님의 흘리신 보혈은 우리를 보호하는 강력한 보호막이 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죽음의 천사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했던 것처럼 주님의 피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신자를 보호해 줍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고백하는 것은 영적 보호에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일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세월을 보내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시며 목자되신 하나님은 나의 보호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안내자라는 고백입니다.
목자는 양떼들을 안전한 길로 인도해야 하므로 독풀이나 맹수들의 서식처를 피해서 인도합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함을 받기만 하면 독풀과 맹수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비 진리와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잘 받기만 하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이 없이 천성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양들은 한눈을 잘 팔고 방황기가 많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길을 잘못 들어서면 굶주려 죽거나 미아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떼를 자주 헤아려서 숫자를 확인합니다. 그러다가 한 마리라도 결손이 생기면 시내를 건너고 온 산을 헤매면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닙니다.
옛날 뱃사람들은 별을 보면서 뱃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주님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두운 세상에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어두운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는 비결이 있습니다. 광명한 새벽별이 되시고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2. 자신은 하나님의 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겸손한 고백입니다. 그는 왕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양에 불과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양은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힘이 없으면 지혜라도 있거나 머리라도 좋아야 살아남을텐데 양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IQ가 낮은 동물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 고백을 통해서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16장을 보면 그의 노래와 무용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습니다. 인물도 남달리 뛰어났으며 시편을 보면 문학적인 소질 역시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는 영적인 면에서도 영감이 풍부한 선지자들보다 더 풍성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시대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역사적인 면에서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람과 비교하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하고 미련한 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가 그런 존재라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결코 교만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양은 대단한 근시입니다. 멀리를 내다보지 못합니다. 단지 눈앞의 것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양들은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사람은 정말 양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양은 철저한 무방비상태의 동물입니다. 동물들은 저마다 적들로부터 자기를 방어할 수단을 가지고 잇습니다. 하다 못해 스컹크처럼 방귀를 뀐다든지, 사슴처럼 도망을 잘 친다든지, 아니면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으로 적의 시선을 따돌린다든지 하는 보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은 방어 무기가 없습니다. 자기를 지킬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재해 앞에서 무방비 상태입니다. 사단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입니다. 온갖 사건과 사고에 무방비 상태입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사고 앞에 자신이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가를 실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기에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나는 영생도 천국도 승리도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산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양은 눈이 좋지 않은 대신 귀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특히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분별합니다. 그리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 주님의 음성은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십니까? 세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주님의 음성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의 뜻을 기록하시고 그 뜻대로 만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주님의 뜻을 모를 때 그 일에 해당되는 성경 말씀을 찾으면 됩니다. 그 말씀이 그 일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둘째, 성령의 인도하심이 주님의 음성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지만 우리의 영안에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성경과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만약 성경과 동일한 말씀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셋재, 설교가 주님의 음성입니다. 설교는 성령의 영감을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풀어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경을 전해야 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성경을 풀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한다면 그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양이 되어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살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자신의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순종하여 낭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든지 아니면 육신의 소리나 세상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3.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다윗의 목자가 되시고 다윗이 주님의 양이 되니 다윗의 인생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이 고백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므로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혼부부의 예를 들어봅시다. 가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서로 만족하고 삽니다. 만족한다는 말은 부족함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비록 돈에 부족함이 있고 사는 집에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면 부족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환경은 어려워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바국 선지자는 합3:17-18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말하며 다윗과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이 고백은 현실적인 고백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는 어려운 시절에 여호와를 향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을 계속해서 고백했습니다. 그의 이런 고백들은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고백이 결국 그를 그 자리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것 즉, 현실에 의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존재입니다.(고후5:7). 우리가 믿는 것을 고백하면 그것이 내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