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의 四‧七論에서 因說에 대응한 對說의 論理
천병준(대구교대)
[한글요약]
본고의 목적은 退溪(李滉, 1501-1570)와 高峯(奇大升,1527-1572)과의 四七 논쟁에서 고봉의 因說에 대응한 퇴계의 對說에서 종합과 분석의 양면성의 논리를 살피는 데 있다. 퇴계에서의 理는 氣라는 개별자를 개별자로 되게 하는 보편자 즉, 리의 “규정짓는 기능”을 리의 發動性이라 하고, “理動” 또는 “理發”이라 일컫는다. 퇴계는 리동을 골격으로 하여 이기이원의 철학구조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고봉이 주장하는 기는 우주의 근본이며, 리는 기에 수반되는 부차적 원리로서 기의 속성이다. 이러한 속성은 기의 작용 안에 내포되어 음양의 유행과 기의 본체를 서게 하는 所以가 된다. 이것이 바로 리인 것이다. 따라서, 고봉에게 있어서, 리는 기에 의존해야만 존재하는 것이며, 기를 떠난 리는 있을 수 없다. 發動의 문제에 있어서도 리는 어디까지나 정의‧계탁‧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조리이며 원리이다. 고봉은 氣만이 “동‧정”, “개‧벽”, “취‧산”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리발을 주장하는 퇴계 입장을 배격하고 오직 세계존재는 기의 발만 허용된다는 “氣發一途”를 주장한다. 왜냐하면 고봉은 자신의 철학적 구조로서의 실체(기)와 속성(리)이라는 실제적 존재의 입장에서 “理氣不相離”의 기본 입장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봉의 인성론, 역시 주자설의 “性이 발하여 情이 됨”과 중용의 성에서, “하늘이 명해준 것을 인간의 성”으로 보고 있다. 그 성이 발하여 희‧노‧애‧구‧애‧오‧욕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칠정이다. 그러므로 사단도 성이 발해서 된 것이니 정 속에 포괄하지 않을 수 없다. 칠정밖에 따로 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가 동함에 리의 주재에 따라 “중절”과 “부중절”로써 혹은 “선” 혹은 “악”으로 기준을 삼고 있다. 그런데, 퇴계가 말하려는 인성의 핵심은 고봉의 서신 속에 잘 짙게 드러난다. “나는 공의 주장대로 사단과 칠정을 모두 하나의 정이라고 보는 점은 승인한다. 그러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갈라서 말하는 이상, 정도 성과 마찬가지로 사단과 칠정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 무슨 하자가 있겠는가?” 곧 사단은 인‧의‧예‧지의 본연지성에서 발해 나온 것이고, 칠정은 외물과 형기의 감응에서 온 것이니 기질지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리는 래원에서 “소종래가 다르고”, 리와 기를 어느 쪽으로 “주로 해서 말했는가?”에서 다름이 있다. 그리하여 퇴계는 자신의 입설에서 사단과 칠정을 구체화시키려는 배경은 바로 소종래부동을 구분함에서 선천적 인성에 본래 갖추어진 도덕적 법칙 즉, 선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주제분야: 한국철학, 심성론.
주 제 어: 사단, 칠정 소종래, 전지론, 겸지론.
Ⅰ. 들어가는 말
퇴계(李滉, 1501-1570)는, 性이 情의 근거가 되고 性이 발현함에 따라 情이 발동한다는 심리현상, 즉 性은 어디까지나 獨自性을 이루면서 現象分析의 지반을 감정영역과 접목시켜 主情主義라는 韓國的 心性論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性을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구분하고 이것을 각각 理氣로 나누어 설명한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논리라면 情도 그렇게 나누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四端은 仁義禮智의 先天性에서 發해 나온 것이지만, 七情은 外物에 感觸되어 발한 것이기 때문에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함에서 고봉(奇大升, 字;明彦,1527-1572)과의 四‧七論爭이 발단하게 되었다.
더욱이 韓國哲學 중 心性부분에서 四‧七論爭이 갖는 위치를 고려해 보면, 중국의 송대 성리학은 理와 氣로서 “본체와 현상”, “보편과 특수”, “정신과 물질”이라는 우주론 중심의 理氣論에 주력해 왔는가하면, 퇴계는 주자학을 敎條로 계승하여 “四端과 七情”을 모두 理와 氣라는 두 원리에 적응시켰다. 그러함에서 철학적 구조 즉, 하나는 “존재론적 사유방식”에서, 다른 하나는 “존재적 사유방식”에서 전개하였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첫째로, “주자학의 한국적 전개라는 관점에서 心性에서 理와 氣의 결합은 처음 시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요 개념을 四端과 七情으로 제한하고 그것을 다시 제 규정함에서 이 논쟁에 이르러 비로소 개념적 명확성을 획득했다는 점”과 둘째로, 이러한 분석은 개인의 주관적 독단에 그치지 않고 퇴계와 고봉간의 장기간에 걸친 집요한 논쟁을 통해 객관적 사유과정에서 논쟁이 출현했다는 것은 충분한 학문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논쟁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퇴계와 고봉은 각각 어떠한 철학적 사유방식을 선택하고 있는가? 그러한 선택에서 만약 퇴계가 인간 本性은 先天的으로 本具된 善으로 보는 점은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고봉의 善은 氣의 발동에서 理의 主宰로 결정되는 善이라고 규정한다면, 이것은 도덕적 善으로 改變할 수 있는가? 그러하다면, 누가 주자학의 “人性論”에 더 가까이 근접하여 儒家의 本旨를 실행했는가를 밝히는 과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인간에 의한 철학적 규정성 문제는 개인은 물론 단체에서 국가나 사회를 더욱 至大한 發展으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본고는 한국철학의 인성론에서 하나의 金科玉條를 이루고 있는 퇴계와 고봉의 四七論辯에서 인설과 대설을 究明함으로써 퇴계와 고봉이 각각 주장하고 있는 철학적 방법론의 차이가 파악될 수 있으며, 누가 더 실천성 있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論題로서의 이 용어는 退溪四七理氣往復書에 자주 나오는 용어가 아니고, 유일하게도 고봉이 주자설을 언급하는데 한 두 번나올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쉽게 간과하고 넘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것이 퇴계와 고봉간에 性을 서로 논박하는 관점에서 빠뜨릴 수 없는 키워드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관된 입장 그리고 각자의 논리적 견해를 “因說”과 “對說”에 기조를 두고 한치도 물러섬이 없이 논박하기 때문이다.
먼저 因說의 개념을 짧게 언급하자면, 理와 氣의 두 존재를 즉, “上下로 渾淪함”, “因仍底”, 혹은 “上이 下에 墮在함”이라고 규정함에서 同時共存으로 實際하는 存在的(Ontisch)방식이다. 반면에, 對說은 理氣를 “左右로 竝行함”, “對待底”, “水平을 이룸”으로 규정하는 存在論的(Ontologisch)방식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退溪四七理氣往復書에 나타난 論爭의 제 문제점을 발췌하고 그것을 논의해 가도록 한다.
Ⅱ. 朱子의 對說에 根據한 退溪의 理動論
퇴계는 秋巒 鄭之雲의 天命圖說에서 “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한 구절을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고 손수 수정한 후 고봉과의 서신왕래에서 四‧七論爭이 發端한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어디로부터 發했느냐”는 “來源의 의미”를 묻고 있으며, 후자는 “發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實體의 存在”를 묻고 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전자보다는 후자에서 “실체의 존재”에 더 많은 철학적 관심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理라는 實體”는 무엇인가? 그것은 情意, 計度, 造作하는 능력이 전혀 없는 보편성의 원리이다. 이러한 보편성의 원리를 “理發” 혹은 “理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봉은 퇴계가 修訂한 것 즉, 四端과 七情은 모두 인간의 같은 情인데, 어찌 양자를 “理의 發”이니 “氣의 發”이니 하고 分屬시킬 수 있느냐고 하는 반론이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고봉의 입장은 “七情 밖에 다시 四端이 있는 것이 아니다.”(非七情之外 復有四端)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논쟁이 반드시 철학적 논증을 갖으려면 그가 주장하려는 학자들의 세계관이나 인간관에서 확실한 증거가 제시될 때 논쟁자들 간에 일반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에서 퇴계가 立說하려는 理發과 理動은 어디에서 淵源하고 있는가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고, 理發과 理動을 이루고 있는 기존의 학설은 어디에 있는가? 또 그러한 관점은 각자 사유방식에서 일관성 있는 주장인가에서 우리의 의문은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퇴계의 철학적 구조는 주자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退溪集理氣往復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퇴계는 “특히 자신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부분에서 주자의 本說로 대신한다.”라고 함에서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理發의 작용성을 확보하려고 주자의 太極論을 직접 인용한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하여 理는 직접 움직이지는 않지만 理는 陰陽이라는 氣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움직임을 실현할 수 있다고 규정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다. 그는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天地간에는 다만 動靜 兩端으로 순환이 있을 뿐이지 그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 이것을 易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動과 그 靜에는 반드시 動靜케 하는 所以의 理가 있다. 이것이 곧 이른바 太極이다.”
“理에도 動靜이 있으므로 氣에도 動靜이 있다. 만약에 理에 動靜이 없다면 氣가 무엇으로부터 動靜할 것인가?”
그 다음, 주자는 太極이 自體動靜함은 있을 수 없고, 體와 用의 動靜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일컬어 “太極含動靜”과 “太極有動靜”이라 한다. 이것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太極에 動靜이 포함되어 있다고 함은 本體에서 한 말이고, 太極에 動靜이 있다고 함은 流行함에서 한 말이다. 만약에 太極이란 그것 자체를 곧 動靜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形而上者를 분별할 수 없게 하고, 따라서 易有太極이라는 것은 쓸모 없는 군더더기 말이 된다.”
주자는 “저것의 動之理가 있기에 이것이 動하여 陽이 生하고 저것의 靜之理가 있기에 이것이 靜하여 陰이 生한다. 이미 動하면 理도 또한 動 가운데 있고, 이미 靜하면 理도 또한 靜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理有動靜에서 理자체가 動함과 靜함을 피한다는 의미에서 動之理, 靜之理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理에 動靜의 法則이 있다”는 것은 “理 自體가 動靜한다”는 말과는 意味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그것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부연 설명한다.
“動靜하는 것이 태극이 아니라 動靜케 하는 所以(法則, 條理, 原理)가 바로 태극이다. 그러므로 動靜 밖에 태극이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 옳다. 그러나 動靜이 곧 태극의 道라고 함은 옳지 않다.”
위에서 주지하듯이, 주자는 태극의 발동성을 太極含動靜과 太極有動靜이라고 규정한다. 전자는 本體上에서, 후자는 流行上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다시 전자는 太極 속에 動之理와 靜之理가 포함되어 있으며, 후자도 전자와 같이 氣의 動靜 속에 각각 動靜의 理가 들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체”와 “유행”의 철저한 二分法 즉, “理氣不相雜”의 사유방식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러므로 理는 보편자로, 氣는 개별자로 간주된다. 理의 역할은 氣 속에 內在되어 氣라는 개별자를 개별자로 되게 하는 보편자 즉, 理의 “규정짓는 기능”을 가리켜 “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理의 역할에서, 퇴계는 理의 發動性을 일컬어 “理動” 또는 “理發”이라고 함은 “物上看의 論理”에는 무리가 있을 수 없다. 예컨대, 우리의 실제 현상에서 理動이라는 의미는 정말 애매하기 그지없다. 이 “理動”을 실제 상황에서 비유하자면, “법률이 효력을 발동한다”고 하는 의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제정한 보편 타당한 법조문들은 언제나 개인의 행위에 엄격한 규정을 내리는 동시에 “효력을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서의 감정 또한 일차적으로 신체를 통하여 나타나지만 이 “감정을 규정하는 근거”는 감정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주자는 理의 作用에서 규정짓는 근거를 적용하여, “理有動靜” 혹은 “太極含動靜”이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理와 太極自體가 動한다는 “理動靜” “太極動靜”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理發 혹은 理動의 쟁점은 퇴계의 대설, 즉 理氣二元的 입장에서는 원활한 解明이 가능하지만, 고봉의 인설, 즉 理氣一元的 입장에서는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는 고봉의 답변에 충족하게 해 주면서 理動의 作用性을 인정하는 주자의 논증을 제시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주자가 理의 發動性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퇴계가 고봉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이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가 理發의 작용성을 인정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주자는 朱子語類에서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l과 “人乘馬出入”을 비유하여 “理發氣隨 氣發理乘”이라 하여 理發의 작용성을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理는 직접 움직일 수 없지만 理는 氣를 통해서 자신의 움직임을 實現할 수 있다고 규정한 사실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자학설에서 理의 작용성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理動을 檢證받는 동시에, 논리적 타당성도 보장받게 된다는 것이 퇴계의 입장인 것이다.
그와는 달리, 花潭의 主氣說을 철저히 답습한 고봉은 “太極과 理”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을 서로 비교해 보면 퇴계의 理發의 問題는 더욱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고봉은 태극의 개념을 이렇게 말한다.
“최고위의 한 圈域은 이른바 太極이고 그 아래의 한 圈域은 이른바 陽動陰靜이다. 그 가운데 그린 작은 圈域은 곧 태극의 본체이다. 이것은 이른바 陰陽에 卽하여 그 본체를 음양과 섞지 않고서 말한 것이다. 陰의 靜이라 함은 太極의 體가 서는 所以이고 陽의 動이라하면 太極의 用이 행하는 所以이다. 그러나 太極은 陰陽으로써 體用이 되는 것이 아니며, 특히 太極의 體用은 陰과 陽으로 인한 후에 나타나는 것이다. 대개 太極은 無象이고 陰陽에는 氣가 있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流行할 적에 이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봉이 주장하는 太極의 意味는 퇴계와는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고봉은 氣에 의존해야만 理는 존재하는 것이며, 氣를 떠난 理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 물질의 실체는 곧 氣이고, 운동과 변화는 氣의 작용이다. 그러할 때, 氣의 운동형식을 가리켜 太極 즉, 理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太極은 陰陽으로써 體用이 되지 않으며, 특히 太極의 體用은 陰陽으로 인한 後의 무엇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太極은 無象이고 陰陽은 두 氣가 된다. 이 두 氣가 流行할 때의 氣의 운동원리를 理 또는 太極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봉은 자신의 철학적 구조로써 因說 즉, 實體(氣)와 屬性(理)이라는 실제적 存在의 입장에서 理와 氣의 관계를 渾淪한 理氣不相離의 理氣一元論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動(發)의 문제에 있어서도 퇴계와는 달리, 四端‧七情에서 四端의 理發이나 七情의 氣發을 이루는 理氣互發의 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理는 條理이며 原理일 뿐이다. 반면에, 氣는 본질자체가 운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고, 또 스스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必然性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氣만이 動‧靜, 開‧闢, 聚‧散을 가능케 하는 점에서 理發이란 거론조차도 할 수 없으며 오직 세계존재는 氣發만의 발동을 고수하는“氣發一途”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
Ⅲ. 退溪의 四端과 七情에서 所從來不同說
논쟁에서 고봉이 性을 대전제로 보는 근거는 바로 中庸 「天命章」에 있다. “하늘이 命해 준 것이 性이다. 그 性이 發하여 喜‧怒‧哀‧樂이 된다. 이 喜‧怒‧哀‧樂이 喜‧怒‧愛‧懼‧哀‧惡‧欲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七情이다. 그러므로 四端과 七情은 다 같은 하나의 情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퇴계가 “두 개의 情으로 구분”하여 언급한다. 그리하여 고봉은 四端을 七情속에 포함시키고 七情밖에 따로 情이 있을 수 없다라고 퇴계를 반격한다. 그래서 이에 대응한 퇴계는, “나는 公의 주장대로 四端과 七情을 모두 하나의 情이라고 하는 것은 승인한다. 그러나 性을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갈라서 말하는 이상, 情도 四端과 七情으로 갈라 보는 것에 무슨 하자가 있는가? 四端은 仁義禮智의 本然之性에서 發해 나온 것이고, 七情은 外物이 形氣에 感하여 생기는 것이니 氣質之性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는 理와 氣는 來源의 “所從來에서 다름”이 있고, 理와 氣를 어느 쪽으로 “主로 해서 말했는가”의 철저한 논리와 분석도 없이 고봉처럼 理氣를 무조건 하나로 合하여 兼理氣, 또는 不可分離로 보는 것은 너무나 큰 오류를 범하는 일이라고 격렬하게 반론을 편다. 그리하여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구체화하려는 몇 가지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첫째로, 天命에 의한 四端理之發과 現象에 의한 七情氣之發은 엄연히 所從來에서 구별돼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퇴계의 所從來不同說에 의해 導出된 인간의 道德法則 으로서의 本然之性과 후천적 실천에서 修鍊되어야 할 氣質之性과는 根本的으로 다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의 立說에서 所從來의 근거를 살펴보도록 한다. 儒家의 인성론은 周易에서 비롯하여 宋學을 거처 한국유학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蓋然的 論據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中庸의 首章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에서 中의 所以然의 自然法則으로부터 和의 所當然의 道德法則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天命之謂性에서 性이나 命이나 理는 모두 天理로써 自然法則이다. 이러한 天理의 자연법칙은 반드시 도덕법칙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사회 그리고 크게는 국제간의 경제‧사회‧문화에서도 모두 所當然의 道德法則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道德法則은 모두 天理가 그렇게 한 것이라고 주자는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말한다.
“天下의 사물은 반드시 존재해야 할 그러한 법칙(自然法則)과 당연히 있어야 할 법칙(道德法則)이 있는 고로 소위 이것을 理라고 한다.” 그리고 또 “所當然의 法則은 모두 天理가 그렇게 한 것이다. 所當然을 안다는 것은 天命을 앎이고, 所以然을 안다는 것은 天理를 앎인 동시에 天理의 所從來를 앎이다.”
퇴계는 천지만물의 存在를 위주로 해서 볼 때는 理와 氣는 본래 “無先後”이고, “渾淪不可分開”로써 각 一處에 있다는 고봉의 말을 승인하면서, 對說에 의해 理와 氣를 存在論에서 본다면, 物이 있기 전에 이미 物의 理는 先在한다. 그리고 이 氣가 있기 전에 이미 이 理는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는 所從來를 추구하려면(欲推其所從來)모름지기 이 理가 氣보다 먼저 존재(須說先有是理)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라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주자의 “氣自氣와 性自性” 그리고 儒家哲學의 전통적 宗旨로 있는 “天卽理, 命卽性 性卽理라는 等式이 성립되는 天命性理의 四者의 同等한 完全性에서 天理의 자연법칙으로부터 인간의지의 도덕법칙을 연역해내는 것이다. 그러할 때, 여기에서 사단과 칠정을 來源에서 본다면 어디까지나 所從來는 不同이라는 立說을 가능케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適宜하게도 퇴계는, 一元論의 構造를 주장하는 고봉으로서는 先天性에서 人性을 論究하기란 쉽지 않다는 盲點을 고려하여 理의 선천적 來源에서 “所從來”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주자는 우리에게 四性의 존재근거에서 四端의 인식근거가 發現한다는 즉, 우리가 현상에서 “天理의 所從來를 인식할 수 있는 端緖”를 確信시키고 있다. 그것을 말하는 주자의 주장은 이러하다.
“무릇 物에는 반드시 본래부터 根本이 있다. 性의 理는 비록 무형이지만 端緖가 發할 때는 최초로 理의 證驗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惻隱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仁이 있음을 알 수 있는 所以이고, 羞惡로 말미암아 반드시 義가 있음을 아는 所以이다. 그 恭敬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禮가 있음을 아는 所以이다. 是非로 말미암아 반드시 智慧가 있음을 아는 所以가 있다. 만약에 이 理가 內에 없다고 한다면 무엇으로써 이 端이 外에 있을 것인가? 이 端이 外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이 理가 內에 있음을 아는 所以가 된다. 이것은 거짓이 될 수 없다.”
주자는 惻隱‧羞惡‧辭讓‧是非의 四端으로서의 情과 仁‧義‧禮‧智의 四性으로서의 理를 外端과 內理로, 또는 內理와 外端으로 구분하고 이것에서 인식근거는 존재근거에서 이루어진다고 천명한다. 일반 감정의 惻隱‧羞惡‧辭讓‧是非의 端緖가 外로 드러나면 已發로써의 情이다. 仁義禮智는 우리가 보거나 만지고 證驗할 수 있는 有形이 아니고 未發의 性이며 理이다. 만약 본래 이 理가 본성 內에 없다고 한다면 무엇으로 이 端이 外에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四端이 外에 나타남으로써 內에 이 理가 있다는 것을 認識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仁이란 것은 惻隱한 情으로 말미암아 先天的 존재근거가 부여되고, 惻隱한 情은 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證驗이 가능한 인식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주자는 “이 측은지심이 있음으로 仁이 있음을 안다”라고 함은 感情의 已發에서 仁의 先天性을 導出해내는 동시에 현상에서 理의 證驗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점을 착안한 퇴계는, 인간의 감정이 未發之前에는 四德具焉이지만 已發之際에는 四端著焉이라는 性情에 입각하여 四德(선천성)과 四端(감정분석의 정)에 경계를 두고 “所從來는 어디까지나 不同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四端의 未發의 純善은 性이 情으로 發함에 道德的 價値로써 本具된 性에 內在한 先天性의 善이 發現된다는 결론이다. 이 때 善의 本質은 理의 來源에서 인간 감정이 已發하기 전에 이미 先天的으로 本具되어 있다는 理純善‧氣或善或惡의 人性論이 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퇴계는 理上看의 입장에서, 고봉에게 四端의 所從來가 당연히 本然之性에 있다면, 七情의 所從來가 氣質之性에 있다는 것을 갈라서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라고 하며 所從來不同說을 규정함에서 四端과 七情의 對立的 立論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고봉보다는 퇴계가 주자의 學問的 構造에 더욱 더 近接했다고 볼 수 있겠다.
Ⅳ. 高峯의 兼指論과 退溪의 專指論
고봉이 兼指論을 주장함에서, 氣之發의 氣는 專指氣로 보지 않고 兼指理氣로 보았다. 그러면, 고봉이 왜 理之發의 理는 專指라고 주장하면서 氣之發의 氣는 왜 專指로 보지 않는가? 그러면 주자가 이 두 자를 왜 對說로 말했겠는가? 라고 퇴계는 강하게 반문한다. 우리는 고봉이 因說에서의 氣를 兼指理라고 주장하는 데는 당연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봉의 주장은, 四端은 七情에 따른 屬性이지만 七情은 實體인 것이다. 그러므로 “七情이 理氣를 兼했다”는 말은 七情만 外物에 感하여 動한 것이 아니라 四端도 그러하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퇴계와는 다른 立場을 취하는 것은 철학적 구조에 따른 理氣를 보는 규정성의 문제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규정성 문제에서 비교작업을 착수함으로써 주자학설에 理氣의 “개념적인 면”과 “구조적인 면”에서 누가 더 가깝게 접근하여 논거를 제시하고 있는가? 그리고 心性面에서 儒家의 道德的 宗旨를 闡發함에서 누가 더 表裏(이론과 실천)에 맞게 符合시키고 있는가를 究明해 보려는 것이다.
1. 兼指論에 의한 高峯의 性情問題
고봉은 理氣를 兼指하는 입장에서, “理는 氣를 벗어 날 수 없음”(理之不外於氣)을 定說로 굳히고 있다. 그는 이 命題를 하나의 사물을 이루는 根本原理로 여기는 동시에 이것은 인간의 道德的 實踐에서도 理氣를 겸한 兼指에서 모든 合理性을 갖는다고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학문하는 자는 모름지기 알아야한다. 理는 氣에서 벗어날 수 없다. 氣의 過‧不及없이 自然發現하는 것은 곧 理의 本體가 그런 것이다. 이것을 알고 힘쓰면 거의 착오가 없을 것이다.”
먼저 고봉의 입장에서 四端의 性은 하위 범주로 취급되며, 七情은 모든 情을 포괄하는 상위 범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그러므로 性情을 논함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을 나눠보려는 의도가 아니고 오직 “氣質之性”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퇴계 철학과는 다른 입장에서 논리를 전개함은 물론이다. 張載(1020-1078)와 花潭(1489-1546)에 이어진 고봉의 氣哲學 構造는 氣를 實際로 하여 실체(氣)가 속성(理)을 포괄하는 內在關係를 이룬다. 그러므로 理氣는 人性에서나 物性에서나 항상 서로 떠날 수 없다는 논리에서 “理氣不相離”(同時共存를 대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전제로 한 고봉의 주장은 이러하다.
“인간의 情으로 논하면 소위 氣質之性이란 것은 理가 氣質 속에 墮在한 것이며, 별개의 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性을 논할 때는 本然之性이다 혹은 氣質之性이다라고 하는 것은 天地‧人物을 말할 때처럼 理氣를 나누어 각각 하나의 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性만 있을 뿐 그 所在에 따라 구별하여 말할 뿐이다.”
위에서 주지하듯이, 고봉은 역시 渾淪性의 立場에서 性을 말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봉이 주장하는 理는 실제 현상의 운동과정 속에 內在하는 原理이며, 理의 主宰性은 氣 운동과정 속에 顯現하지만 實際의 모든 現象體에서 氣之妙를 이루게 하는 屬性을 理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理가 현상 속에 內在한 후 一物이 發現되듯이 性이 氣質 속에 墮在한 시점부터 性의 槪念을 獲得하는 것이다. 이 말은 性이 이미 氣質 속으로 墮在하기 전에는 本然之性이라고 말하지만, 일단 氣質之性 속으로 들어오면 氣質의 一物로 간주되어 유일하게도 “氣質之性”만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봉은 그것도 부족하여 實體에 있어서는 同一하지만 이름만 다를 뿐이라고 하여 “同實異名”이라고 주장한다.
그 다음, 고봉은 退溪理氣往復書에서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의 구별을 “所在에 따라 구분한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소재라는 것은 바로 “氣의 所在”를 말함이다. 이것은 자신이 立說함에서 “本然之性은 太極本然의 妙요 萬殊의 一本이며, 氣質之性은 理氣交運하여 生하는 一本의 萬殊이다”라는 “理一과 分殊”라는 각각의 개념으로 하여 “氣의 所在”에 대응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그는 天地之性은 天地에 의거하여 萬殊의 一本이며, 氣質之性은 人‧物에서 天理의 本性을 稟受받는다는 의미에서 오직 “一本의 萬殊”인 것이다. 고봉은 이러한 理一分殊의 전제를 근거로 해서 “氣의 所在”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봉은 氣의 所在를 “理一”과 “分殊”에 유비하여 “天上의 달”을 “水中의 달”에 墮在시킴으로써 달은 오직 “하나의 所在”에 있음을 확실히 부각시킨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天地之性을 비유하면 天上의 月이고, 氣質之性에 비유하면 水中의 月이다. 月이 비록 하늘과 水中에서 장소는 不同에 하지만 月은 하나일 뿐이다. 이제 天上의 月은 月이라 하고, 水中의 月은 물(水)이라 하여도 되겠는가?
위에서 보듯이, 고봉의 “所在性”이란 性의 理가 氣 속에 墮在하는 시점에서 성립되는 개념인 것이다. 理 자체로 보면 天理는 完全하지만, 일단 天理가 氣質에 墮在하게 되면 氣質의 所在는 일차적이고 天理는 이차적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人間의 本性은 現象에서 오직 “氣質之性” 하나 뿐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봉은, 四端을 善一邊만으로 剔言하거나 七情을 情 全體로 말하거나 간에, 心性을 主情主義 立場에서 본다면, 언제나 現象分析의 基盤위에 感情意識은 實現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四端이 이미 七情의 所在에 墮在하여 所在 區分이 되듯이, 마치 天上의 月이 水中에 墮在하면 두 개의 月이지만, 다른 月이 될 수 없다는 유비에서 理氣渾淪性의 論理를 추론해 내는 것이다. 고봉의 이러한 사유의 배경은, 心 자체로 따지고 보면 實事的 세계의 具體的 사물이며 즉, 具象物이다. 현상의 具象物은 아직 理氣를 떠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떠날 수가 없다. 따라서 心이 發하는데는 理만이 發한다던가 氣만이 發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봉의 心의 發에는 오직 中節‧不中節로써 善‧惡의 기준을 삼을 수밖에 없다. 韓國哲學의 人性論의 목적은 善을 실현하는데 있다. 고봉이 주장하는 善의 발현문제는 단조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理氣一元論의 東洋的 道德價値의 意味를 깊이 함축하고 있다.
마음이 發함에서 氣의 작용이 理의 발현을 방해하면 不中節의 惡이 되고, 마음이 發함에서 氣의 작용이 理에 순종하여 理의 발현이 자연스러우면 中節의 善은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주자의 “氣의 過‧不及이 없이 自然發現하는 것은 理의 本體가 그런 것이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 것이다. 이 점에서 자연발현이란 理의 자연발현이다. 理의 自然發現은 바로 氣 作用에 있다. 그것은 氣의 過‧不及이 없는 데서 성립된다. 그러므로 고봉이 이루고자하는 善은, 理의 自然實現에 있다. 理의 자연실현은 반드시 人間이 氣를 調節함이 절대적 要件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立說 자체에서 “理氣不可分離性의 논리”를 완성시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특히 “氣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氣를 조절함에서 善이 實現된다”는 것은 儒家哲學의 實踐的 本旨를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2. 氣發에 의한 高峯의 兼指理
高峯答退溪第二書,9에서 고봉은 “四端만 仁‧義‧禮‧智에서 發하는 것이 아니고 七情도 仁‧義‧禮‧智에서 發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情을 性의 發이라 하였겠는가? 주자도 喜‧怒‧哀‧樂은 情이라고 하였다.”라고 하면서 퇴계를 반격한다. 고봉이 거듭 부연 설명하려는 요지는 이러하다. 四端은 氣가 작용하여 理에 順從하면 그것은 中節의 發로써 善이 되고, 七情은 氣의 작용이 理에 不順함으로써 中節‧不中節 그리고 有善‧有惡이 있다. 그러므로 “七情밖에 따로 四端이 있을 수 없다”(非七情外 復有四端)라고 하는 것이다. 고봉은, 퇴계가 七情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四端을 七情과 서로 대립시켜 “理之發” 혹은 “氣之發”이라고 다시 말한다. 이것은 部分을 들어 全體와 對立시킴으로써 自體에 이미 矛盾을 앉고 있는 상황이다. 또 兼理氣하여 發하는 七情을 단순히 氣之發이라고 말하는 것은 七情 속에 理를 빼고 氣만 發하는 허황한 논리를 세우고 있다. 이러한 논리라면, 理가 없어도 氣만 發하면 情이 된다는 결론이다. 비록 그러한 논리를 성립시킨다하더라도, 理없는 氣發만의 七情이 外物과 감응할 때 단연 感性的인 惡으로 轉變된다. 이것은 우리의 實踐意志로 있는 價値에서 보더라도 반드시 不善으로 轉落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봉의 氣發은 專指氣가 아니고 兼指理로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퇴계의 “理氣의 相互 發함”(互發)과 “理氣二元性”(互言)의 專指理에서 오는 단도 직입설을 공파하는 방패막이가 된 것이다. 다시 퇴계는 性情의 배경을 맹자의 “天之所予我”와 “仁義禮智는 不由外鑠我”와 주자의 “內理”(四性은 인간의 本性 속에 이미 先天的으로 本具함)에 연유하여 四端은 純理無不善이지만 七情은 外感內應한 것이므로 氣를 兼한 理의 本體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고봉은 다시 의의를 제기한다. “心이 理氣의 合인 이상 情이란 두 理氣를 兼한 것이다. 따로 어떤 情이 있어 理에만 발하고 氣를 兼하지 않는 發이 있겠는가? 物에 感하여 發하는 것은 七情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四端도 그러하다” 라고 다시 주장한다.
예컨대, 孺子入井하는 일에 感하여 仁의 理가 內에서 應하여 惻隱之心이 나타난다. 종묘 앞을 지날 때 그 일에 感하여 禮의 理가 內에서 應하여 공경심이 나타난다. 이것은 즉, 物에 感하여 發함에는 四端도 七情과 다를 바가 없다. 또 孟子의 「喜而不寐」의 “喜”와 舜의 「誅四凶」의 “怒”와 孔子의 「哭之慟」의 “哀”와 「弟子侍側」의 “樂”은 理의 本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반 사람이라도 天理가 발동한다. 부모친척을 만나면 흔연히 기쁘고, 死喪疾病을 보면 惻隱하여 슬퍼하는 것이 理의 本體가 그러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形氣만이 그렇게 하겠는가? 라고 주장한다.
고봉은 “氣之自然發現 乃理之本體然也”라는 주자의 논제에 근거를 두고, 四端은 專指理로 간주하면서 七情속에 四端을 兼指하려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孺子入井이나 宗廟등의 현상 분석의 지평을 감정영역에 두려 하였다. 그것은 즉, 仁과 禮의 理가 心性 內에서 應하기 때문에 惻隱之心이나 恭敬心이 밖으로 우러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퇴계가 주장하는 理氣分開의 對說에서는 일부분만 受容할 뿐 전면적 立說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은 오직 고봉의 因說에서만 部分을 全體 속에 폭넓게 受容할 수 있는 構造를 갖고 있는 것이다.
3. 專指論에 의한 退溪의 性情問題
고봉은, 현상세계는 理와 氣의 혼합체이며, 理는 氣 속에 귀속된 하나의 원리로 규정함에서 인간의 性情도 예외는 아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응한 퇴계는, 만약 四端을 七情 속에 포함시킨다고 규정한다면 자신의 立說에 대한 모든 전제는 말살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理의 규정짓는 기능마저도 상실되므로 善한 心理現象은 물론, 자신의 立說에 一貫性을 기대하기란 정말 어렵게 된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고봉이 주장하는 兼指論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심리현상에서 七情은 氣의 精粗, 淸濁, 聚散에 의해 不完全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七情의 善惡을 욕구 속에 수용할 때 물욕에 매몰되어 不善의 여지가 많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리하여 퇴계는 결국 “人乘馬出入”에서 말은 사람의 統制하에 출입할 수 있고, 또 “氣發理乘”에서 氣는 理의 統制없이는 發動하지 못하듯이 七情에 대한 四端의 獨實性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理의 發動의 입장을 확보함에서 四端과 七情은 어디까지나 四端理發而氣隨, 七情氣發而理乘으로 專指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퇴계의 입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봉의 조건에 대응해 주면서 주자설에서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과 “氣가 존재하지 않아도 性은 오히려 常在하며, 비록 理가 비로소 氣가운데 있어도 氣는 스스로 氣이고 性은 스스로 性인 것”과 “對擧而倂疊云云”에서 對立과 倂疊이란 명제를 확인하고, 四端과 七情의 性情問題는 專指論에서만 자신의 立旨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또 양자가 주장하는 情을 의미차원에서 본다면 그 차이는 전혀 없다. 그러나, 七情 중에 惡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문제는 다르다. 왜냐하면, 七情도 情이다. 情의 근거는 性이다. 七情도 性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七情중의 惡도 純善無惡한 性에서 비롯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퇴계의 二元的 專指論의 短點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곧 이 점에 대비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구분하고 나서 이 둘의 관계를 “同中有異論”으로 성립시킨다.
1) 退溪의 同中有異論
퇴계는 理氣往復書,第三書를 고봉에게 보낸다. 그 내용은 “公은 어찌 같은 것 중에 취하여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반격한다. 그리고 퇴계는 주자의 “相待하여 體가되고 相須하여 用”이 되는 體用관계로 統合하면서 分離하고, 分離하면서 統合하는 구조로써 “同中有異說”을 주장한다. 그것은 人間에 本具된 先天的 道德法則에서의 四端과 現象에 기반을 둔 감정영역의 七情은 性과 情에서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四端과 七情을 “同中有異”의 관계로 그는 말한다.
“같은 것 가운데 취하여 다른 것이 있음을 알고, 곧 다른 것 가운데 취하여 같은 것을 아는 것이다. 나누어 둘이 되는 것은 아직까지 서로 떠난 적이 없고, 서로 해친 적이 없었다. 합하여 하나가 됨은 실제로 不相離에 實歸함이다. 이는 周悉이 無偏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퇴계는 孔子‧周子‧孟子학설에서 理氣가 相循하는 中에 剔撥하여 단적으로 말한 理와 理氣가 相成하는 中에 兼指하여 氣에서 말한 氣를 분석하지 못하고 “異中有同”이라고 주장하는 고봉을 몹시 배격한다. 그러나, 퇴계는 先天性, 無極, 四端의 純善無惡은 결코 性이라는 전체범주에는 異質이면서 同質이지만, 人性의 道德的 價値에서 理性의 先天性은 결코 後天性과는 근본이 다름으로 “同中有異”로 주장한다. 그것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자는 繼善成性을 논함이 있고, 周子는 無極而太極을 말했다. 이것은 모두 理氣相循하는 중에서 剔撥하여 단적으로 理를 말한 것이다. 또 공자는 相近相遠의 性과 맹자는 耳目口鼻의 性을 말했다. 이것은 모두 理氣가 相成하는 중에 兼指하여 주로 氣에서 말한 것이다. 이 네 가지를 어찌 같은 것 중에 취하여 다른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가? 자사는 中和를 논함에서 喜‧怒‧哀‧樂은 말했지만, 四端을 언급한 적이 없다. 程子는 好學을 논하면서 喜‧怒‧哀‧懼‧愛‧惡‧欲은 말했지만 四端을 언급한 적이 없다. 이것은 즉, 理氣가 相須하는 가운데 渾淪함에서 말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어찌 다른 것 중에 취하여 같은 것을 알지 못하는가? 지금의 논변은 이것에서 다르다. 즉, 같은 것은 좋아하고, 분리하는 것은 싫어한다. 渾淪한 것을 즐기고 分離하기를 싫어한다. 그리고 四端‧七情의 所從來를 窮究하지 않고, 개괄하여 兼理氣‧有善惡이 된다고 함은 깊이 있는 분별이 못될 것이다.”
다시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서신 내용은 이러하다. “公은 四端과 七情이 다 같은 情이라고 인정한 이상, 四端도 情이므로 七情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다시 그는, 퇴계와 같이 四端을 理發로 七情을 氣發로 分離하여, 理와 氣를 언제나 나누려는 것은 크다란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 人性에서 性의 경우는 둘로 나누어도 상관없지만, 情의 경우는 다르다. 情은 理氣가 겸하여 善惡이 있으므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러할 경우 두 개의 情과 두 개의 善이 있게 된다”라고 반론한다. 그리하여 그는, 주자학에서 말하는 “性은 理가 氣 속에 墮在할 때만 성립되는 개념이다.” 四端은 七情 속에 포함되는 것이니 四端과 七情을 상대적 개념으로 대응시켜 논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異中有同說”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써, 다시 퇴계는 四端과 七情이 다 같은 情이라는 점은 승인하나 四端과 七情은 각각 發生來源에서 철저히 구별돼야한다고 축약하여 보낸 서신 요지가 바로 “同中有異說”이다.
위에서 보듯이, 퇴계는 공자의 繼善成性의 性과 주자의 太極而無極의 性을 理라고 한 것과 다시 공자의 相近相遠의 性과 맹자의 耳目口鼻의 性을 氣라고 한 것을 확인한다. 다시 그는 性을 구분함에서 本然과 氣質로 나누듯이 情도 그렇게 나누지 못할 것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고봉이 제기한 性은 둘로 나누어도 무관하지만 情을 둘로 나눈다면 두 개의 善, 즉 四端의 善과 七情의 善이 있게 된다는 것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러자 퇴계는 결국 자신의 답변에 한계를 느끼게 된 셈이다. 이것은 퇴계의 理氣二元論 즉, 專指論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로 남는다. 그것은 고봉의 理氣一元論 즉, 兼指論에서의 氣의 淸濁에서만 해명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4. 退溪의 理氣互有發用
고봉은 退溪理氣往復書二에서 퇴계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이러하다. “四端은 理에서 發하고 七情은 氣에서 發한다고 하면 옳으나 그림을 그려서 四端을 理圈에 고정시키고 七情을 氣圈에 두는 분석은 너무 심하다.”라고 씌어 있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모든 자연현상은 “理가 發할 때는 氣가 따르고, 氣가 發할 때는 理가 乘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라고 반론한다. 그는 妙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人乘馬出入」에 비유하여 人馬는 상호 互發關係를 이루고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을 理가 氣를 타고 행하는 데 비유하면 이제 이 譬喩는 이러하다. 사람은 말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궤도(制御)를 잃는다. 사람과 말이 서로 기다려 떠나지 못하는데 이것을 가리켜 말할 때, 일반적으로 “간다”고 말하면 사람과 말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四七을 渾淪해서 말한 것이 이런 것이다. 혹은 “사람이 간다”고 말하면 말을 함께 말하지 않아도 말의 감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四端이 그런 것이다. 혹은 “말이 간다”고 指言하면 사람의 감을 並言하지 않아도 사람의 감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七情이 그런 것이다. 이제 내가 四端과 七情을 分別해서 말하면 公은 매번 渾淪해서 말하는 이론을 끌어내어 공박하니, 이것이 “사람이 간다” “말이 간다”할 때 사람과 말을 나눌 수 없다고 力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氣發로써 七情을 말하면 理發을 力言하니 이것은 “말이 간다” 할 때 반드시 “사람이 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理發로써 四端을 말하면 또 氣發을 力言하니 이것은 “사람이 간다”할 때 반드시 “말이 간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朱子가 말하는 숨바꼭질로 장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퇴계가 주장하는 理氣의 互發說은 어느 쪽을 “주로 하여 말했는가?”(所主而言)에 있다. 그것을 “사람과 말”에서 비유하여 “사단과 칠정”으로 확산시킨다. 이 때 그는 理와 氣를 서로 分離시켜서 말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理發而氣隨之는 理에 主로하는 데 理가 氣밖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四端이 그러한 것이다. 氣發而理乘之는 氣에 主로 하여 말하는데 그것은 氣가 理 밖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七情이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四端七情의 互發에서도 “所主而言”에서 다르다는 分離說을 내세워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Ⅴ. 맺는 말
본고는 퇴계와 고봉의 退溪理氣往復書에서, 고봉의 因說에 대응한 퇴계의 對說의 논리를 고찰하려는데 있다. 이것은 퇴계가 자신의 立論을 確立함에서 “理는 發動性을 갖는다”는 사유방식에 대응한 고봉은, “理의 發動性”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며, “理氣不可分離”의 因說로서 퇴계의 對說에 맞선 것이 바로 四‧七論爭의 發端이다.
고봉은, 퇴계의 “四端은 純粹하게 天理가 發한 것”이란 명제에서 “情이 發한다는 것은, 理가 발동함에 氣가 갖추어지고, 혹은 氣가 感應함에 理가 탄다.”라고 修訂한 후 퇴계의 理의 발동성을 여전히 인정했다. 이것은 분명히 자기 결함과 논리적 모순을 동시에 갖는 셈이 된다. 사실, 주자는 “太極含動靜”을 本體上에서 말했고, “太極有動靜”은 流行上에서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또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을 말한 바 또한 있다. 이 때 四端의 感情을 일으키는 규정근거가 바로 “性”이라는 것이다. 이 보편법칙으로써 理는 특수자인 氣를 규정지어 특수자를 특수자로 되게 하는 보편자 즉, 理의 규정짓는 기능을 가리켜 “理의 發動性”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조금도 논리상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고 하겠다. 바로 이러한 性의 선천적 도덕법칙과 본성의 자유를 원활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봉의 일원적 因說의 입장에서 해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오직 퇴계의 주장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 다음, 일반적으로 四端과 七情은 다 같은 情의 개념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동일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사실 四端의 善은 심리현상에서 논의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렇지만 七情중의 惡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좀 더 깊이 논의하자면, 七情은 情이고 情의 존재근거는 性이다. 七情도 性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하다면, 七情중의 惡도 純善無惡하다고 보아야 마땅한데 왜 惡이 존재하는가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논리라면, 퇴계가 주장하는 四端의 善한 감정영역마저도 그 正體性과 一貫性을 유지하기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사실, 心性論은 현상분석의 기반을 감정영역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국철학에서 四七論爭은 더 더욱 그러하다. 이 爭論의 결론은 氣의 淸濁에서 解明하는 길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퇴계의 立場에서 그것을 해결하기란 영원히 遼遠한 점으로 남는다.
끝으로 고봉은 理와 氣를 통합하려는 그의 學究的 執念은 집요하면서 무척 예리하게 보인다. 그는 끝까지 朱子마저도 “四端은 理之發이고 七情은 氣之發이라 말한 것은 주자가 진실로 對說에서 말한 것이 아니고 因說에서 말했을 뿐이다.”라고 하여 주자의 학설까지도 자신의 因說의 立場으로 끌어들이는 점을 목격할 수 있다. 그는, 理와 氣를 槪念 適用에서 말하면, 주자학의 心性論 體系에 近接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퇴계는 고봉이 四端을 七情 속에 포함시키려는 意圖를 충족시켜 주면서 어디까지나 인간의 道德的 價値는 물질 속에 陷入돼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에서 도덕적 실천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物質보다는 精神 즉, 氣質보다는 理性을, 七情보다는 四端을 우선하여 理의 發動性과 四端의 獨步性을 중시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것은 주자학에 대한 自己檢證이라는 문제의식을 앉고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의 心性論에서 理氣가 分離되는 對說의 구조를 확립시킨 것은 퇴계만의 獨創的 見解라고 하지 않을
[출처] 退溪의 四‧七論에서 因說에 대응한 對說의 論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