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핀 방가지똥꽃
십이월 둘째 화요일이다. 어제 대설이 지나도 남도의 겨울은 그렇게 매섭지가 않다. 24절기는 중국 화북지방을 기준으로 정해져 우리나라로는 중부 이북 기상과 일치한다. 가을 이후 중부 산간 내륙은 몇 차례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초겨울이다. 우리 지역은 아침 최저기온이 빙점 부근에 내려가도 체감으로 추위는 더 느껴졌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와실을 나서 연사 들녘으로 나갔다.
매일 아침 마스크는 방한용보다 방역용으로 쓴다.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꼈다. 겨울이면 이마가 시려와 모직 헌팅캡을 머리에 얹음으로써 출근 채비를 마쳤다. 단단히 대비해서인지 추운 줄 몰랐다. 거제 고현 연초 기후는 창원 정도로 생각하면 되었다. 거제 남부와 동부는 대한해협과 가까워 통영 날씨와 같을 듯했다. 연초는 거제 내륙이라 쓰시마 난류 영향은 받지 않는 데다.
들녘을 둘러 학교로 들어가도 이른 시각이라 교정은 조용했다. 배움터 지킴이만 난로를 켜 놓고 어슬렁거렸다. 현관으로 드니 보건교사는 열화상 카메라 노트북을 설치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1/3 등교 방침이라 2학년만 등교해 정기고사를 치른다. 시험은 오전만 보고 점심을 먹고 나면 곧장 하교해 오후는 교정은 적막하지 싶다. 3학년은 일과 시간에 맞춰 원격수업을 해야 한다.
문화보건부실로 올랐다가 현관으로 내려가 열화상 발열 체크를 도왔다. 오늘부터 시행되는 정기고사는 2학년만 등교해 붐비지 않았다. 그래도 한 학년 3백 명이 넘는다. 학생들의 입실이 끝나고 다시 문화보건부실로 들었다. 3학년부 기획이 보낸 쪽지가 와 있었다. 교사 전원이 감독으로 배정되기에 다른 학년 원격수업은 과제제시형이라 매 시간 줌 접속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묵음으로 해둔 폰에 같은 아파트단지 초등학교 동기가 보낸 카톡이 왔다. 친구는 도청에서 정년 이후 몇 해째 우리 아파트단지 뜰에 꽃을 가꾸며 소일한다. 최근 유튜브에 ‘꽃대감 TV’를 개설해 몇 편 영상을 받아봤다. 평생 공직에 몸담아 농사나 작물을 키울 줄 몰랐는데 연전부터 작정하고 꽃을 가꾸는 열정이 대단해 아파트 주민들은 친구가 가꾼 꽃밭을 보고 탄복하고 있다.
문화보건부실에 동료가 있어 친구가 보낸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면 소음이 될까 봐 밖으로 나갔다. 뒤뜰로 내려가니 응달이어선지 이마가 시려왔다. 아침 출근길엔 모자와 목도리와 장갑을 꼈기에 추운 줄 몰랐는데 방한 소품을 챙기지 않아 쌀쌀했다. 앞뜰로 나가니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친구가 보낸 영상은 열대 화초 ‘란타나’를 노지에서 겨울을 넘겨보려는 도전이었다.
친구가 보낸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고 교정에서 서성이다 서편 언덕 가장자리 자라는 애기동백나무에 눈길이 갔다. 한 달 전부터 꽃잎을 펼치던 애기동백은 활짝 피어 지상에는 붉은 꽃잎이 널브러져 있었다. 애기동백은 동백꽃보다 먼저 피고 먼저 저물었다. 한동안 노란색과 자주색으로 수를 놓았던 소국이 시들어 삭막한 교정이었는데 애기동백꽃이 화사하니 마음마저 밝아왔다.
몇 그루 애기동백나무 아래 초본으로 뭔가 잎사귀를 펼쳐 달린 꽃망울이 보였다. 비탈진 언덕으로 내려가 허리를 굽혀 살피니 민들레와 비슷해 보이는 꽃이었다. 잠시 떠올려 보니 민들레 사촌쯤 되는 방가지똥이었다. 어린 순은 민들레 잎처럼 먹는 방가지똥은 늦은 봄부터 여름에서 초가을까지 꽃을 피웠다. 그런데 내가 근무하는 교정에는 겨울이 오는 길목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현 근무지에는 초본에서 피우는 들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름에는 교정에 봉숭아를 가꾸어보기도 했다. 가을까지 알록달록한 봉숭아꽃을 완상했다. 계절이 바뀐 겨울이 왔다. 애기동백이 피운 꽃이 저무는 때 철을 잊은 방가지똥이 꽃을 피우니 신기했다. 지난 초가을에 몇 차례 스쳐간 태풍으로 생채기가 난 방가지똥 잎줄기가 새로 돋아 꽃을 피우는가 싶기도 했다. 20.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