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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옥저동부여설 비판적 검토
1. 서론
'북옥저동부여(北沃沮東夫餘)' 설이란 북옥저 지역에 동부여가 건국되었다는 설로 크게 '3세기 북옥저동부여설', '3세기 고구려령 북옥저내 동부여설', '기원전 북옥저동부여설'로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일본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 宏)교수가 주장한 '3세기 북옥저동부여설'은 285년에 부여(夫餘)가 모용선비(慕容鮮卑)로부터 공격당하자, 북옥저(北沃沮)로 피난한 부여 왕족 중 일부가 남아서 그곳에 세운 나라가 동부여(東夫餘)라는 주장이다이다. 한일 고대 사학계에서 이 설이 갖는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거의 통설을 넘어선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통설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다만, 중국에서는 여러 동부여 설 중 하나라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3세기 북옥저동부여' 설의 지지자 중 한 명인 노태돈 교수는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이라는 기록에 주목하여 치(置)와 책(柵)은 음(音)이 통하고 구루(溝婁)는 성(城)을 뜻하기 때문에 치구루는 곧 책성(柵城)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추론을 이케우치 히로시 교수의 설을 적용하여 285년 이후에 북옥저에 동부여가 건국된 것으로 보고 책성이 『광개토태왕비문』에 나온 동부여의 도성인 여성(餘城)과 같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410년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때에 이르러서야 동부여(곧 북옥저) 지역을 완전히 차지했기 때문에 『위서』고구려전에서 고구려(高句麗)의 동계(東堺)를 책성이라고 한 것으로 보았다.
쉽게 말해 북옥저=치구루=책성=여성으로 파악한 것으로 여기까지가 현 학계의 동부여에 대한 통설인 것이다. '3세기 고구려령 북옥저내 동부여설'은 '3세기 북옥저동부여설'과 큰 차이는 없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뢰정도에서 차이가 있으며, 고구려의 배려 하에 동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기원전 북옥저동부여설'은 이도학 교수의 주장으로 앞의 두 북옥저동부여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을 재검토 하여 동부여가 기원전부터 있었으며 그 위치는 북옥저에 위치했다고 보는 설이다.
물론 이러한 '북옥저동부여' 설에 심각한 회의를 갖고 비판을 하는 학자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학자의 신분은 아니나, 이 설에 대단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여러 선학들의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필자의 소견을 덧붙이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2. 3세기 동부여북옥저설의 타당성 여부 검토
우선 '3세기 북옥저동부여' 설의 근간이 되는 기록들을 살펴보자.
A-1. [西晋]의 武帝 때에는 자주 와서 朝貢을 바쳤는데, 太康 6년(A.D.285; 高句麗 西川王 16)에 이르러 慕容廆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夫餘]王 依慮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沃 沮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武帝는 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부여 왕이 대대로 충성과 효도를 지키다가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되었음을 매우 가엾게 생각 하노라. 만약 그의 유족으로서 復國할만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세 울 수 있도록 하게 하라.”
이에 有司가 보고하기를,
“護東夷校尉인 鮮于嬰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민하게 대응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고 하였다. [武帝는] 조서를 내려 [선우]영을 파면시키고 何龕으로 교체하였다.
이듬해에 夫餘後王 依羅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 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감은 戰列을 정비하고 督郵 買沈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夫餘의 사자를]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모용]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A-2. 그리고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夫餘를 정벌하여 왕 依慮가 자살했다. 慕容廆는 그 국성(國城)에 들어가 만여 명을 몰고 돌아왔다. 東夷校尉 何龕이 督郵 買沈을 보내어 장차 依 慮의 아들을 세워서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모용외는 그 장군 孫丁을 보내어 요격하다. 買沈 은 역전 끝에 孫丁을 죽이다. 마침내 夫餘를 회복시켰다.
B-1. 또 동쪽으로 夫餘를 격파하여 왕 依慮는 자살하고 자제는 달아나 沃沮에서 (몸을) 보 존했다. 모용외가 그 국성(國城)을 파괴하고 만 여인을 몰고 돌아왔다.
B-2. 여름 옛 夫餘 왕 依慮의 아들 依羅가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예전 나라를 회복하기를 구하고 東夷校尉 何龕에게 도움을 청하니 何龕이 督郵 買沈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호송하 게 하였다. (모용)외가 그의 장수 孫丁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기다렸는데, 買沈이 힘껏 싸워 孫丁을 베고 마침내 夫餘를 회복시켰다.
위 사료들에 의하면 북부여는 285년에 모용외(慕容廆)의 강습을 받고 패하여 북부여의 의려왕(依慮王)은 자살하고 자제들이 옥저(沃沮)로 도망갔다고 한다. 이듬 해 의려왕의 아들 부여후왕(夫餘後王) 의라(依羅)가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서진(西晉)에게 옛 나라를 회복하길 원하며 구원을 요청하고 결국 도움을 받아 모용외를 깨뜨려서 부여의 복국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사료 어디에도 옥저로 피신한 북부여 왕족들이 복국 된 본국에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새로운 나라 즉 동부여를 건국했다는 내용은 없다. 물론 잔류했다는 기록이 없듯이 돌아갔다는 기록도 없다.
그러나 유의해서 볼 점이 A-1과 A-2를 종합해서 볼 때 의려왕의 아들 의라(依羅)는 부여후왕으로서 의려왕의 뒤를 이은 위치에 있었고, 그것을 서진 측으로부터 인정도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려왕의 정통성을 확실히 이어받은 의라왕이 서진의 도움으로 복국에 성공했는데, 상식적으로 옥저(沃沮)로 피신했던 북부여왕족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잔류할 이유가 없다. A-1과 B-1에 의하면 서진은 북부여 왕족들이 옥저로 피신한 것을 파악할 정도로 북부여 왕족들의 행방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그들이 귀국하지 않고 옥저 지역에서 무언가를 했다면 특히나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겼을 것이나, 그러한 기록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의라왕(依羅王)이 복국을 하면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이도학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A-1의 "이듬해에 夫餘後王 依羅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라는 기사에 이미 상황이 모두 축약되어있다. 이미 의라왕과 서진에 의해 복국 된 마당에 지지기반과 연고도 없는 북옥저에서 새로이 나라를 건국할 당위성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기록상 북옥저로 피신한 북부여인들은 왕족들로 신속한 피신을 위해 호위병들을 대동한 매우 소규모일 것이다. 이들을 나라를 건국할 정도의 세력이라고 볼 수 없다.
애초에 북부여 왕족들이 복국 된 본국에 귀환하지 않고 북옥저 지역에 잔류했다는 발상 자체가 개연성이 극히 낮은데다가 그곳에 그들이 나라까지 세웠다는 것은 물론 그 나라가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된 동부여(東夫餘)라는 추론은 상당히 지나치며 자의적이기까지 하다. 다시 말해 북옥저(北沃沮)로 피난 간 북부여의 왕족들이 그곳에 잔류했다는 기록과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북옥저 지역 즉 두만강 유역에 동부여와 관련된 유물, 유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285년 이후에야 북옥저 지역에 동부여가 건국되었다는 이 설은 고구려 당대 금석문인 『광개토태왕비문』를 볼 때 더 더욱 성립할 수 없다. 『광개토태왕비문』을 살펴보자.
C-1. 20년(410년)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 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 이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 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 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 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 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상기한 바와 같이 C-1에는 동부여는 추모왕(鄒牟王) 때부터 고구려(高句麗)의 속민(屬民)이었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부여는 추모왕 때도 존재했다는 것과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것이다. 노중국 교수는 『광개토태왕비문』에서 동부여가 추모왕이 속민으로 기록된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 없다고 하였다. 그는 동부여가 어느 시기에 고구려의 속민이 된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시기를 주몽대로 설정한 것은 고구려가 동부여와의 관계에서 그들의 우위성을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분식(粉飾)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부여가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었다는 기록이 과장임을 감안하더라도 동부여가 최소 추모왕 때에도 존재했다는 것까지 부정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고구려가 동부여를 두고 굳이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라고 과장한 것에는 동부여가 추모왕 때에도 존재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3. 3세기 고구려령 북옥저내 동부여 건국설 검토
공석구 교수는『광개토태왕비문』의 C-1에서 고구려가 동부여를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라고 간주한 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근거가 있는 것으로 동부여가 추모왕 때 정복한 북옥저 지역에 건국됐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를 보였다.
김용만 소장도 이 견해에 동의하여 비문에는 과장이 있을지언정 거짓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동부여가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라는 기록은 당대 고구려인의 의식을 충분히 반영했다고 보았다. 송기호 교수 역시 285년 이후 옥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북옥저 지역에 동부여가 건국됐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나, 스스로 인정했듯이 그렇다고 북옥저 대신 동부여가 기록에 나온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285년 이후에 옥저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이 곧 북옥저 지역에 동부여가 성립된 것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고구려가 추모왕이 정복했다는 북옥저와 285년에 북옥저 지역에 세워진 동부여를 등치시켜서 동부여가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었다는 논리를 만들었다면 추모왕은 결과적으로 동부여를 정벌한 것이 된다. 따라서 적어도 이러한 논리가 만들어진 『광개토태왕비문』 이후의 기록에서는 추모왕이 북옥저를 정벌했다는 표현 대신에 동부여를 정벌한 것으로 기록할 법도 하다. 그러나 『광개토태왕비문』보다 후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오히려 추모왕 시기에 북옥저와 동부여는 완전히 별개로 다뤄지고 있다.
전술했듯이 노태돈 교수는 책성을 북옥저의 치구루와 같은 곳으로 추정하고 『광개토태왕』비에 나온 동부여의 도성인 여성(餘城)을 책성과 같다고 추론했다. 그런데 기실 이 여성이라는 지명은 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비문에 나온 신라성(新羅城)처럼 동부여 측의 입장이 반영된 지명이 아니라 고구려가 동부여의 도성이라는 의미에서 임의로 만든 것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후술하겠지만, 책성은 고구려의 초기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중진(重鎭)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입장에서 오랜 세월 동안 부른 보다 익숙한 지명인 책성을 두고서 임의로 여성이라는 지명을 만들어서 부를 정도의 개연성을 찾기 어렵다.
또한 김용만 소장의 비문에 과장이 있을지언정 왜곡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에도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그가 말하는 비문 상에서의 과장과 왜곡의 경계가 다소 모호한 감이 없잖아 있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을 기록한 『광개토태왕비문』와 『위서』 그리고 『삼국사기』를 차례대로 살펴보자.
C-2.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 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 이 있었다(5字 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순행 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 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 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 되고 거북 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 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D-1.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所生이 아니기 때문에 장차 딴 뜻을 품을 것이라고 하여 그를 없애 버리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말 마다 남모르게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고, 준마는 먹이를 줄여 마르게 하 고 굼뜬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 게 주었다.
그 뒤 사냥할 때 주몽에게는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한 마리를 잡는데] 화살 하나로 한정 시 켰으나, 주몽이 비록 화살은 적었지만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 모의를 꾸미자, 주몽의 어머니가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말 하기를,
“나라에서 너를 해치려 하니, 너 같은 재주와 경략을 가진 사람은 아무데고 멀리 떠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주몽은 이에 烏引·烏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중도에서 큰 강을 하나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는 없고,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 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河伯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 길에 추격하는 군사가 바짝 쫓아오니,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자, 이 때 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와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은 마침내 普 述水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무명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붙들고 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과 함께 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성을 高氏라 하였다.
E-1. 금와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재주와 능력이 모두 주몽 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 니어서 사람됨이 또한 용감합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그 를 제거할 것을 청하옵니다.”라 하였다.
왕이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이 날랜 말을 알아보고 적게 먹여 마르 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이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 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쏘아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 몽이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주몽 의 어머니가 몰래 이를 알아차리고 알려주며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찌 가지 못하겠는가?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는 것은 멀리 가 서 뜻을 이루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주몽이 이에 오이(烏伊) · 마리(摩離) ·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 수(淹㴲水) 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 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는데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봐 두려워 물에게 알려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쫓으니 어 찌 하면 좋은가?”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 이 가다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위서(魏書)≫ 에서 음술수(音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 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마의(麻衣)를 입고, 한 사람은 납의(衲衣)를 입고, 한 사람은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이 “너희들은 어디 사람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마의를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이 재사(再思)입니다.” 하고, 납의를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이 무골(武骨)입니다.”하고, 수조의를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 하였으나, 성(姓)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 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씨를 주고, 무리에 일러 말하 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크나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3명 의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에서는 “흘승골성(紇 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상기한 바와 같이 『위서』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추모왕의 행적을 분명 부여로부터 생사의 위협을 받아서 급히 탈출한 것이지만, 『광개토태왕비문』에서는 이와 달리 추모왕의 행적을 두고 '순행(巡幸)'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순행이라는 표현은 한 나라의 군주가 나라 안을 살피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위서』와 『삼국사기』를 배제한 채 『광개토태왕비문』만 본다면 추모왕이 한가로이 수례를 타고 남쪽으로 순행을 하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건너려 하는데, 배가 없자, 추모왕의 외침에 거북이 등이 다리를 만들어줘서 건널 수 있었다는 인상을 주게 한다. 물론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석비(石碑)라는 제한된 공간으로 인해 생략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순행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이상 비문에 석비의 공간제약에 상관없이 비문의 작성자가 작정하고 추모왕이 북부여의 기병들에게 쫓기는 모습을 은폐하고 왜곡했고 생각된다. 따라서 비문에 고구려 측의 고의적인 왜곡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동부여가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었다는 기사에 대해 서영수 교수의 견해를 따르면 이는 고구려와 동부여의 추모왕 때부터 있었던 관계를 당시의 정토와 관련하여 합리화한 명분일 뿐이다.
더욱이 공석구 교수 등과 김용만 소장의 견해와 상호보완을 해주는 285년 이후에 북옥저 지역에 동부여를 세웠다는 통설 자체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전술했듯이 문헌적, 고고학적 근거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앞서 '3세기 북옥저동부여' 설에서 동부여의 도성이라고 주장하는 책성이 고구려의 중진이라고 한 바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삼국사기와 위서 그리고 금석문들에 기록된 고구려와 책성 관련 기록들을 보자.
E-2.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E-3. 46년(98) 봄 3월에 왕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다. 책성의 서쪽 계산 (罽山) 에 이르러서는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와 더불어 잔치를 열어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물건을 하사했는데 차등이 있었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기록하 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왕이 책성 에서 돌아왔다.
E-4. 50년(102) 가을 8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성(柵城)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졌다.
E-5. 21년(217) 가을 8월에 한(漢)의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데 리고 투항해 오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안치하였다.
D-2. (435) 敖가 그들이 사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곳을 방문한 뒤 이렇게 말하 였다.
“[高句麗는]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栅城, 남쪽으로는 小 海에 이르고, 북쪽은 예전의 부여에 이른다. 民戶의 수는 전 魏나라 때보다 3배가 많았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여 리이며 남북은 1천여 리나 된다.
F. 아버지 양은 3품 책성도독(柵城都督) 위두대형(位頭大兄)겸 대상(大相)이었다.
G. 조부 양은 본번(고구려)에서 3품 책성도독(柵城都督) 위두대형(位頭大兄)겸 대상(大相)이 었다.
H. [이타인은] 책주도독겸총병마 고려의 12주를 거느리고 37부의 말갈을 거느렸다.
위 기록들에 의하면 책성은 추모왕(鄒牟王)의 북옥저(北沃沮) 정복 이래 고구려(高句麗)에게 있어 국초부터 멸망하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곳이다.
게다가 만일 통설처럼 북부여의 왕족들이 고구려의 북옥저 지역으로 피신해서 동부여(東夫餘)를 세우고 책성(柵城)을 도읍으로 정한 것이라면 고구려는 동쪽의 중진을 떼어준 것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정책을 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하는 송기호 교수는 태조대왕 대와 산상왕대에 등장한 책성이라는 지명을 아예 후대에 부회한 것으로 간주한다. 노태돈 교수 역시 당시 책성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 아니었다고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만이 북옥저 지역으로 피신한 북부여 왕족들이 동부여를 건국했다는 설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인들이 왜 하필이면 태조대왕(太祖大王)과 산상왕(山上王) 대에 책성을 가필한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다만, 당시까지 북옥저가 고구려와는 별개의 지역으로 독립적인 존재였다고 보는 것으로 그 근거로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동옥저전이 따로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그러나 송호정 교수의 지적처럼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그 역사성에 대해 면밀한 검토를 요하지만 기본적인 역사상의 전개는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기 때문에 고구려가 초기부터 북옥저를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지』에 동옥저전이 별도로 기재됐다고 하여 『삼국사기』 기록을 불신하고 북옥저를 고구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볼 이유는 없다. 우선 김현숙 교수의 지적처럼 동옥저전에 북옥저가 독립적인 정치체로 볼만한 기록은 없으며 그 내용은 단순히 북옥저(혹은 치구루)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에 왔다갔다는 일종의 견문 보고서이다. 오히려 동천왕(東川王)이 북옥저 지역으로 도망갔다는 기록으로 볼 때 북옥저와 고구려는 상당히 밀접했으며 아무리 보수적으로 봐도 북옥저는 고구려가 간접지배하고 있는 즉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이다. 이에 대해 문안식 교수는 『삼국사기』와 동옥저 전에 기술된 고구려의 동옥저(남옥저)와 북옥저에 대한 지배방식 차이를 연구하여 북옥저 통치는 책성(柵城)을 위시한 지방관을 파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남옥저(동옥저)는 토착민을 통한 간접지배를 통해 이뤄졌다고 파악하고 있다.
노태돈 교수, 송기호 교수와는 달리 김현숙 교수와 박경철 교수는 북옥저 일대를 고구려의 영역 내지 영향권으로 파악하고 북부여의 왕족들이 고구려의 용인과 협조 아래 북옥저 일대에 동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른 바 이 견해가 본고에서 명명한 '3세기 북옥저동부여설'의 수정보완 된 형태인 '3세기 고구려령 북옥저내 동부여'설이다. 우선 김현숙 교수는 C-1에 나온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라는 기록을 동부여전에서만 얻은 전과(戰果)로 보지 않고 광개토태왕이 생시에 확보한 최종전과로 보았다. 그 이유는 거란전(契丹戰)이나 백제전(百濟戰)은 전투과정과 전과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것에 비해 동부여전은 그 서술이 너무 간결하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의 동부여 친정(親征)은 상징적인 행차로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64개성 1,400촌이라는 거대한 전과를 동부여전(東夫餘戰)에서만 얻은 전과로 볼 수 없으므로 동부여는 고구려 영역 안에 존재한 작은 정치체로 보았다. 즉, 김현숙 교수는 동부여의 성격을 신라의 보덕국(報德國)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상징적인 국가일 뿐 넓은 영토를 포괄하는 영역국가가 아니라고 보았다. 일종의 괴뢰정부인 셈인 것으로 동부여가 책성에 안치되었다고 해서 고구려의 동방경영에 무리가 생기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285년 이후에 고구려가 동부여의 건국을 용인하고 국가로서의 독립성을 보장한 이유를 명분론적 시각에서 보았다. 즉, 북부여(北夫餘) 지역으로 진출을 도모했던 고구려는 모용선비(慕容鮮卑)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북부여 지역 진출을 위한 명분을 확보하고 또 한편으로는 복국 된 북부여 세력을 견제하며 북부여왕실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기 위해 북옥저에 동부여가 건국되는 것을 용인하고 협조했다는 것이다.
우선 김현숙 교수가 취한 다수설인 64성과 1,400촌을 광개토태왕의 최종전과로 보는 견해의 타당성여부부터 살펴보자. 이 견해에서는 64성 1,400촌이 광개토태왕 평생의 전과로 보지만, 『광개토태왕비문』에서 광개토태왕의 군대가 공파한 성의 수를 합치면 64개가 넘는다. 또한 1,400촌을 영락 6년에 백제에서 빼앗은 700촌과 영락 5년 비려 정벌에서 깨뜨린 6, 700영을 합친 것으로 해석하는 다케다 유키오 교수의 견해도 있지만, 김용만 소장의 지적처럼 유목민이 사는 영(營)과 농경민의 촌(村)은 전혀 다른 지방행정단위이기 때문에 이들을 합쳐서 계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다케다 유키오 교수의 견해가 가진 난점을 보완하기 위해 여호규 교수는 영락 5년 비려 정벌에서 고구려가 깨뜨린 비려의 영의 개수를 700개라고 확정한 뒤 영을 촌으로 치환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는 영락 5년에 백제로부터 획득했다는 700개의 촌과 영락 6년에 비려로부터 획득한 700개의 영을 합하면 1,400촌으로 64개성 1,400촌의 1,400촌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유목민의 주거단위인 영은 유동적인 단위로 이를 농경민의 촌으로 치환했다는 발상 자체가 상당한 무리이며, 고구려가 비려로부터 정확히 700영을 획득했다는 근거 없다. 왜냐하면 비문의 찬자는 고구려가 공파한 비려의 영의 개수를 정확히 몰라서 600개 내지 700개의 영이라고 애매하게 기록하였는데, 갑자기 딱 집어서 700개로 그것도 촌으로 치환해서 파악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공파한 비려의 영의 갯수를 700개가 아닌 600개로 볼 경우 1,400촌이 아닌 1,300촌으로 그의 주장은 더더욱 성립하기 어렵다. 따라서 64개성 1,400촌의 전과를 비려와 백제로부터 얻었다는 주장은 따르기 어렵다. 노태돈 교수는 64개성 1,400촌을 광개토태왕의 최종전과로 파악하여 이 중 58개 성 700촌은 영락 6년의 백제전, 6성 700촌은 영락 17년의 백제전과 영락 20년의 동부여전에서 얻은 성과로 파악했지만, 이렇게 나눈 것에 대해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도학 교수는 64성 1,400촌을 영락 6년조의 58성 700촌과 영락 17년의 6성을 합한 개수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영락 17년조 기록은 영락 6년조의 58성 700촌이라는 기록처럼 전과를 6, 7성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단순히 깨뜨린 성의 이름들을 나열했을 뿐이며 전과 중에 700촌에 대한 기록도 없다. 사실 영락 17년 조는 결자도 있기 때문에 이때 고구려가 깨뜨린 성이 6개인지 7개인지조차 불분명하고 700촌에 대한 기록은 아예 전무한 상황에서 64성 1,400촌을 영락 6년조와 17년조를 합산한 결과로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1) 따라서 64성 1,400촌은 오로지 동부여전역에서 획득한 전과로 보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 이렇게 볼 경우 동부여가 지나치게 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조공을 거부하고 대항을 하고 이에 광개토태왕이 친정한 만큼 그 영토가 작다고 볼 수 없다. 광개토태왕의 동부여 정벌은 그의 마지막 정벌이기 때문에 석비라는 공간의 제약에 따라 비려전과 백제전처럼 전투과정이나 공파한 성의 이름을 일일이 적지 못하고 전과만 기재했을 가능성도 있다.2) 특히 64개의 성이 무조건 항복한 것이 아니라 공격하여 깨뜨렸다(攻破)는 표현으로 볼 때 전투가 있었지만, 생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이 많은 성들을 함락시키고 동부여의 도성인 여성(餘城)에 이르렀기 때문에 동부여 전체가 놀랐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김현숙 교수의 북부여지역 진출을 위한 명분을 확보하고 한편으로는 복국 된 북부여를 견제하며 북부여 왕실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기 위해서 동부여의 건국을 용인했다는 견해도 쉬이 납득이 가질 않는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이미 북부여는 의라왕이 의려왕의 정통성을 이은 북부여의 왕이 된 상황으로 애초에 종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동부여는 단순히 상징적인 단순 정치체에 불과한데, 이런 그들이 복국 된 북부여를 어떤 식으로 견제할지도 미지수거니와 복국 됐다하더라도 국력이 약한 북부여를 견제할 필요성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당시 모용선비의 성장으로 위협을 느끼던 고구려로서는 모용선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복국 된 북부여를 서진처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할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경철 교수는 조위의 침공당시 고구려가 북옥저 지역을 최후 방어선으로 하여 조위군에 대해 반격을 했음을 주목하여 당시 책성 거점의 고구려 군사 전략을 감안할 때 285년 동부여의 입지가 책성보다는 오히려 화룡지방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으나, 뚜렷한 근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3세기 고구려령 북옥저내 동부여'설 역시 기존의 '3세기 북옥저 동부여설'과 마찬가지로 북옥저로 피난한 북부여의 왕족들이 본국에 귀국하지 않고 남아서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국호가 동부여라는 근거를 전혀 대지 못하였다. 즉, 이케우시 히로시 교수의 '3세기 북옥저동부여' 설은 문헌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가 전혀 없으며, 이 설을 바탕으로 한 노태돈 교수 등 다수 한국학자의 동부여 설은 견강부회(牽强附會)를 거듭한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4. 매구=치구루설 및 매구= 미구루설 검토
노태돈 교수는 『삼국지』 관구검전의 매구를 북옥저 지역으로 파악하고 매구를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광개토태왕비문』에 나온 동부여의 지명인 미구루의 오탈자로 보는 이병도 교수 설의 일부를 수용하여 매구는 매구루가 탈자 된 것이며 매구루는 『광개토태왕비문』에 나오는 동부여의 지명 미구루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삼국지』 관구검전의 매구와 『삼국지』 동옥저전의 치구루 둘 다 북옥저 내에 있던 별개의 지역으로 파악하였다. 이렇게 동부여의 미구루를 북옥저의 지명 중 하나로 파악함에 따라 북옥저 지역에 동부여가 건국된 것으로 추론한 것이다. 그러나 매구는 치구루가 있던 북옥저와는 다른 지역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자.
E-6. 13년(30) 가을 7월에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가 그 동생 위수(尉須) 및 사촌 동생 우도(于刀) 등과 함께 투항해왔다.
E-7. 20년(246)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사람을 죽이고 장군 왕 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분산 되어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홀로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하기 를 “지금 추격해오는 병력이 가까이 닥쳐와 언저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이 결 사적으로 저들을 막을 것이니 왕께서는 달아나소서.”라 하였다. 마침내 결사대를 모아 그들 과 함께 적진으로 가서 힘껏 싸웠다. 왕이 샛길로 달아나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졸 을 모아 스스로 방비하면서 말하기를 “밀우를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하부(下部)의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기를 “신이 가보겠습니다.” 하 였다. 드디어 싸웠던 지역에 밀우가 땅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업고 돌아왔다. 왕 이 그를 무릎에 눕혔더니 한참 만에 깨어났다.
왕이 샛길로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군(魏軍)은 추격을 멈추지 않 았다.
I-1. (정시正始)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 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 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 돌을 새겨 공적을 기록함) 하고 환도(丸都)의 산(山)과 불내(不耐)의 성(城)에 글자를 새겼다.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 가 모두 8천여 구(口)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 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I-2. 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의 王 宮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毌丘儉은]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沃沮의 邑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級이 목 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宮은 北沃沮로 달아났다. 北沃沮는 일명 置溝婁라고도 하는 데 南沃沮와는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挹婁와 접해 있 다. 挹婁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 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王頎가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宮을 추격, 동 쪽 경계의 끝까지 갔다. 그곳에 사는 노인에게,
“바다의 동쪽에 또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어느 날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 일을 바람 부는 대로 표류, 동쪽으로 흘러가서 한 섬에 도착 하였다. 그 섬 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말 을 서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습속은 해마다 7월 달이면 童女를 구하여 바다에 집어 넣는다.”
라 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곳에는 순전히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
고 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떠올라 있는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그 시체는 마치 中國사람 같고 입 은 옷의 두 소매 길이는 3丈이었다. 또 난파되어 해안에 밀려온 배 한척을 잡았는데 그 배 에 있는 사람의 목 부분에 또 얼굴이 있었다. 생포하여 함께 말을 해 보았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라고 하였다. [노인이 말한] 그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E-6에 의하면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가 그 아우 위수와 당제 우도 등과 더불어 고구려에 내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E-7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I-1에 의하면 조위의 2차 침공 때 동천왕이 매구로 달아나서 왕기(王頎)가 옥저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의 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E-6에 나온 매구곡(買溝谷)과 I-1에 나온 매구(買溝)는 한자가 같고 동명이지로 해석할 여지가 없으므로 동일한 지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노태돈 교수는 이 매구를 북옥저 지역으로 비정하였다고 한 바 있다. 그는 『삼국지』의 동이전 총설과 동옥저조에서 모두 동천왕이 북옥저 방면으로 달아났고 위군이 숙신 또는 읍루의 경계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관구검전에서도 동천왕을 추격한 뒤 위 장군 왕기가 숙신의 경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동천왕 '남주(南走)설'에 입각해서 매구를 함경도에 비정한 이병도 교수의 설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I-1과 I-2에 의하면 동옥저와 북옥저는 둘 다 옥저로도 불리며 특히 동옥저는 남옥저로도 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I-1에서는 동천왕이 매구로 달아나자 왕기가 옥저를 지나 천 여리를 추격하여 숙신의 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왕기가 매구로 달아난 동천왕을 쫓아서 옥저를 지나쳤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동천왕이 처음 달아난 매구는 옥저 내의 지명이든가 옥저 근방에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때 왕기가 지나쳤다는 옥저가 동옥저(남옥저)인지 북옥저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I-1에서 왕기가 지나쳤다는 옥저는 I-2에서 알 수 있듯이 동옥저 즉 남옥저를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I-2에서는 옥저와 북옥저를 구분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I-2에 의하면 북옥저는 남옥저와 8백 여리 떨어져있으며, 읍루와 접해있기 때문에 읍루로부터 자주 피해를 입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남옥저로부터 8백 여리를 가면 읍루의 경계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I-1에서의 남옥저를 지나서 천 여리를 더 가면 숙신의 남계에 이르렀다는 기록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8백 여리와 천 여리 그리고 읍루와 접한다는 것과 숙신의 남계라는 서술상의 차이가 있지만, 8백 여리와 천 여리는 그렇게까지 큰 차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읍루와 숙신이 개별적인 종족임을 인정하더라도 이 두 종족은 같은 곳에 위치했으며, 또한 읍루를 숙신의 후예라고 본 중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읍루와 숙신은 동일체이므로 이 역시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I-1과 I-2를 종합해서 볼 때 동천왕의 도주로는 매구곡→ 동옥저(남옥저)→ 북옥저→ 숙신(읍루)남계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E-7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E-7에서는 동천왕이 왕기의 추격으로부터 남옥저의 죽령으로 도망가서 밀우와 유옥구로 하여금 분전케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서 샛길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남옥저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선 동천왕이 남옥저로 도주했다는 것은 I-1, I-2와 일치하나 이후 행적은 일치하지가 않다. I-1과 I-2에서는 남옥저로 간 다음에 다시 북옥저로 도주를 해서 왕기가 숙신의 남계까지 추격할 정도였는데, E-7에서의 동천왕이 남옥저로 도주 후 반격이 여의치 않자, 이리저리 떠돌다가 남옥저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술은 문맥상 굉장히 어색하기 그지없다. 동천왕이 떠돌다가 남옥저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북옥저에 이르렀다는 것의 오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동천왕은 분명 남옥저로 도주한 행적이 있으므로 노태돈 교수의 견해처럼 동천왕의 남주설이 무리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전술했듯이 매구곡은 북옥저가 아니라 남옥저 일대로 파악된다.
매구곡이 북옥저 일대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근거로는 E-6이다. 매구곡 사람 상수 등이 고구려에 내투했다는 것은 매구곡이 당시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즉, 당시 북옥저는 추모왕 이래 고구려의 영토 내지 영향권에 있던 지역이므로 매구곡은 최소 북옥저와는 별개의 지역이어야 한다. 물론 이 기록에 대해 매구를 치구루의 오탈자로 파악하여 북옥저의 잔여세력이 고구려에 투항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매구를 과연 치구루의 오탈자(誤脫字)로 볼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치구루(置溝漊)를 책성이라고 파악하는 근거로 치와 책은 음이 통하고 구루는 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 이에 따르면 치구루는 곧 책성이기 때문에 지방행정단위가 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매구곡(買溝谷)의 지방행정단위는 성(城)이 아니라 곡(谷)이다. 성과 곡은 『광개토태왕비문』와 『모두루 묘지명』 그리고 『삼국사기』에 나온 여러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명확히 구분되는 지방행정단위이다. 즉, 『삼국지』에 나온 매구의 정확한 지명은 『삼국사기』에 나온 매구곡이이다. 『삼국지』에 나온 매구라는 표현은 일례로 건안성(建安城)을 두고 편의상 건안(建安)이라고 부른 것처럼 매구곡을 편의상 부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매구곡(買溝谷)은 매구(買溝)라는 이름의 곡(谷)이며 책성(柵城: 置溝漊)은 책(柵: 置)이라는 이름의 성(城: 溝漊)이다. 매구곡을 뚜렷한 근거 없이 억지로 치구루의 오탈자로 만들면서까지 북옥저의 잔존세력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치구루를 두고 통전에서 매구루라고 했다고 했으나, 통전에는 그런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한치윤이 오독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병도 교수 역시 뚜렷한 근거 없이 매구(買溝)를 매구루(買溝漊)의 탈자로 간주하여 동부여의 지명인 미구루(味仇婁)와 매구루를 연관시켜서 '함남동부여 설'을 보였지만, 강조했듯이 매구는 매구라는 이름을 가진 곡일 뿐 미구루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미구루의 구루(仇婁)는 성(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구루 자체가 하나의 지명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비문』에서는 시종 성(城)을 뜻하는 음차표기인 구루 대신 한자식 표기인 성(城)으로 표기했는데 굳이 미구루만 음차표기를 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남옥저 일대의 매구곡(매구)과 북옥저의 책성(치구루) 그리고 동부여의 미구루는 서로 다른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한편, 송기호 교수는 동부여를 두만강 유역에 비정하는 근거로는 동부여를 북옥저 지역에 비정하는 설외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해부루왕이 세웠다는 동부여가 동해가의 가섭원에 도읍했다는 기록도 들었는데, 이 기록에 나온 동해가 지금의 두만강 유역에 있는 동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이미 북옥저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동부여를 두만강 유역에 비정하면 북옥저의 강역과 겹치는 결과가 나온다. 이는 동부여 신화에 나온 동해를 곧이곧대로 바다로 해석하면서 생길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결과이다. 주지하다시피 삼국사기에서 북옥저와 동부여는 서로 다른 정치체로 공존했다. 통설은 이 같은 모순을 해결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광개토태왕비문』에서 기원전부터 존재했다는 동부여 기록을 신뢰하지 않고 동부여는 285년 이후에 북옥저 지역에서 건국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노태돈 교수는 그 근거로 중국 측 기록에 동부여가 일절 보이지 않는 것과 당대 고구려 금석문들에서 추모왕의 출자를 북부여라고 기록한 것과 달리 후대의 삼국사기에서는 동부여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동부여출자(東夫餘出自) 설은 6세기 후반에 있었던 고구려의 정치적 변동에서 410년에 고구려에 귀부했던 동부여 출신들의 후예들이 고구려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정권을 잡으면서 성립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도학 교수의 지적처럼 중국 사서에서 동부여의 존재는 3세기 후반 이전이나 이후에도 명확히 확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 사서에서의 등장 여부를 기준으로 동부여의 성립 시기를 가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또한 6세기 후반에 동부여 출신 세력들이 중앙 정계에서 크게 부상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리고 강경구 교수가 지적했듯이 사료의 성립이 늦었다고 하여 거기에 담긴 전승 자체는 오랜 경우도 있다. 자료 성립 연도만 가지고 그 내용의 형성을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지나치게 평판적이다. 더불어 김기흥 교수는 고구려 건국 신화의 전승 과정에서 약간의 가감이 있을 것이며, 고구려의 초기 역사는 그것을 후대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후대의 인식과 경험이 투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관점, 예컨대 지나치게 후대의 정치사 중심의 이해에서 이미 완성됐던 건국신화의 변질 가능성을 과도하게 생각한다면 상고기의 역사상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했는데,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5. 기원전 북옥저동부여 설 검토
이도학 교수는 『삼국지』 동옥저전에서 동옥저가 북쪽으로는 읍루와 부여와 접한다는 기사를 주목하였다. 그는 이 사료에서 말하는 부여가 길림 일대의 북부여라면 함경도 일대에 있던 동옥저와 서로 남북으로 접할 수 없으므로 동옥저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된 부여가 바로 동부여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동부여가 통설인 285년 이후가 아닌 한국의 사서들처럼 기원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 부여에 대한 정보라고는 개별적으로 열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동부여가 중원과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따로 열전에 남지 못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외국 열전이란 게 대게 중국에게 조공을 바친 이들을 적는 거고 이를 적는 목적은 중원의 천하관을 과시하려는 목적인데, 동부여는 중원과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열전을 남길 수 없던 것이다.
계속해서 이도학 교수는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태조왕 69년조의 기사에 두 번 나온 부여의 정치적 행위가 서로 모순됨을 지적하여 이 기사에 나온 부여는 각기 다른 두 개의 부여로 파악하였다. 또한 동부여가 북옥저와 소재지가 겹친다고 파악하여 285년 부여의 왕족들이 북옥저에 피난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유화와 해모수가 사통한 웅심산이 지금의 압록강 일대이고 금와왕이 지금의 백두산으로 비정되는 태백산 남쪽에서 유화를 얻은 기록도 동부여가 북옥저에 위치했다는 그의 주장에 하나의 근거로 들었다. 이도학 교수의 설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그가 근거로 든 사료들을 살펴보자.
D-3.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如栗이 왕이 되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莫來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복속 되 었다.
E-8. 14년(서기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으니 그 왕 금와가 태 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E-9. 69년(121) 봄에 한의 유주자사 풍환(馮煥),현도태수 요광(姚光),요동태수채풍(蔡諷) 등 이 병력을 이끌고 침략해 와서 예맥 거수(渠帥)를 공격해서 죽이고 병졸과 군마, 재물을 모 두 빼앗았다. 왕이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병력 2천여 인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이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 이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의탁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와 요동 두 군 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인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이 선비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가서 공격하였다. 요동태수채풍이 병 력을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 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막아냈으나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죽은 자가 1백 여 명이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 사당에 제사지내고, 백성으로 딱하고 곤 란한 자들을 위문하고 물건을 하사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숙신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 가죽 옷과 흰 매,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잔치를 열어 그를 위로해서 보냈다. 11월에 왕이 부 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수성에게 군국의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12월에 왕이 마한과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력 2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의 병력과 힘을 합쳐 대항해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E-10.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때에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 水)에서 여자를 만났다. 물으니 말하기를 “저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더불어 나가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저를 웅심산(熊心山) 아래로 유인하여 압록강 변의 방안에서 사랑을 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벌로 우발수 에서 살게 되었습니다.”라 답하였다.
I-3. 夫餘는 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高句驪와, 동쪽은 挹婁와,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
I-4. 魏略에서 말하길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
I-5. 東沃沮는 고구려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 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이도학 교수는 I-4의 부여는 3세기 중반까지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적이 없다고 하는 반면 D-3에서는 고구려의 막래왕이 1세기 전반에 부여를 정벌하고 부여는 대패하여 고구려에게 통속되었다고 기록의 차이를 주목하여 D-3과 D-1에 나온 부여는 서로 다른 나라임을 알려준다고 하였다. 또한 E-9에 나온 부여를 모두 하나의 부여로 보기 어려우며 2개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태조대왕이 121년에 10월에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부여 백성들을 위무하며 지내다가 11월에 귀국을 할 정도로 고구려와 부여는 매우 긴밀한 관계인데, 같은 해 12월에 갑자기 부여가 고구려를 공격한 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도학 교수는 특히 E-9의 부여에서 태후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E-8의 추모왕의 모친인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어서 금와왕이 신묘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주목하였다. 그는 E-9에 나온 태후는 부여인인 태조대왕의 모후가 아닌 E-8에 나온 유화태후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고구려를 통치했던 태조대왕의 모후가 부여에서 묻혔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인 판단이며 추모왕과 함께 남하하지 못하고 동부여에서 죽은 유화태후를 일컬음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D-3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부여를 통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대왕의 부여행차는 어려운 발걸음이 아니며 태조대왕이 행차한 부여는 E-9의 기록처럼 동부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필자는 이상 이도학 교수의 주장에 매우 공감되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E-9에 나온 부여를 하나의 부여가 아닌 2개의 부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도학 교수의 주장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부여와 고구려, 후한의 관계를 121년 전후의 상황도 종합하여 함께 다시 한 번 정리검토 할 필요가 있다. 해당 기록들을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J-1. 建武 25년(49)에 夫餘王이 사신을 보내어 貢物을 바치므로, 光武帝가 후하게 報答하니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E-11. 25년(77) 겨울 10월에 부여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 다. 왕이 좋은 징조가 있는 물건으로 여겨 크게 사면하였다.
E-12. 53년(105) 봄 정월에 부여의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다. 길이가 1장(丈) 2척(尺) 이고 털 색깔이 매우 밝으나 꼬리가 없었다. 왕이 장수를 보내한(漢)의 요동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내어 항거하니, 왕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가 을 9월에 경기가 맥인(貊人)을 쳐부수었다.
E-13.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한(漢)에 보내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을 축 하 하였다.
J-2. 安帝 永初 5년(111)에 宮이 使臣을 보내어 貢物을 바치고 玄菟에 예속되기를 求하였 다.
B-3. 安帝 永初 5년(111) 3월에 고구려왕 궁이 예맥과 더불어 현도를 침략하였다.
J-3. 安帝 永初 5년(111)에 夫餘王이 처음으로 步兵과 騎兵 7~8千명을 거느리고 樂浪을 노 략질 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으나, 그 뒤에 다시 歸附하였다.
E-14. 66년(118) 봄 2월에 땅이 흔들렸다. 여름 6월에 왕이 예맥과 함께 한의 현도를 습격 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J-4. 永寧 元年(120)에, 嗣子 尉仇台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서 朝貢을 바치므로 天子가 尉 仇台에게 印綬와 金綵를 下賜하였다.
E-9. 69년(121) 봄에 한의 유주자사 풍환(馮煥),현도태수 요광(姚光),요동태수채풍(蔡諷) 등 이 병력을 이끌고 침략해 와서 예맥 거수(渠帥)를 공격해서 죽이고 병졸과 군마, 재물을 모 두 빼앗았다. 왕이 이에 아우수성(遂成)을 보내 병력 2천여 인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이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 이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의탁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와 요동 두 군 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인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이 선비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가서 공격하였다. 요동태수채풍이 병 력을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 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막아냈으나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죽은 자가 1백 여 명이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 사당에 제사지내고, 백성으로 딱하고 곤 란한 자들을 위문하고 물건을 하사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숙신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 가죽 옷과 흰 매,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잔치를 열어 그를 위로해서 보냈다. 11월에 왕이 부 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수성에게 군국의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12월에 왕이 마한과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력 2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의 병력과 힘을 합쳐 대항해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E-15. 70년(122)에 왕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략하였다. 부여 왕이 병력을 보내 이를 구하고 쳐부수었다.
사료 E-11, E-12에 의하면 77년, 105년에 부여는 고구려에 조공을 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J-1에 의하면 49년에 부여가 후한에게 조공을 바치고 광무제가 후하게 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료 E-13, .J-2, B-3, J-3에 의하면 109~111년에 고구려와 부여는 후한과 화친과 전쟁을 반복한다. 그러나 사료 E-9, E-14, E-15, J-4에 의하면 고구려는 후한에게 적대적으로 입장을 굳히고 부여는 우호적으로 입장을 굳히며 후한과 고구려가 전쟁을 하면 부여는 후한의 편을 적극적으로 들고 있다. 특히 사료 J-4에 의하면 120년에 부여는 태자인 위구태를 고구려의 적국인 후한에 입조시키기까지 한다. 문제는 E-9에 나온 121년의 기록이다. 121년 10월에 부여는 태조대왕이 자국에 와서 숙신의 조공을 받고 자국의 백성들을 위무하는 것을 방관한다. 이때 태조대왕은 부여에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있었는데 같은 해 12월과 이듬해인 122년에 부여가 고구려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후한의 편을 들면서 고구려에 적대적으로 나오는 등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에 대해 김용만 소장은 서기 200년대까지 부여의 속민으로 기록된 읍루를 숙신과 같은 존재로 파악한 후 태조대왕이 부여에 행차했을 때 태조대왕이 부여의 속민인 숙신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부여의 백성들을 위무한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부여가 태조대왕이 고구려로 돌아간 직후에 고구려에 반감을 갖고 이하 고구려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후한 편을 들었다는 견해를 보인 바 있다.
그러나 기록상에서는 읍루가 부여의 속민이라는 기록은 있어도 숙신이 부여의 속민이라는 기록은 없다. 읍루가 숙신의 후예라는 기록은 중원인들의 입장에서 숙신과 읍루의 주거지가 겹치기 때문에 나온 인식이 여겨진다. 통설에서는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로 시기마다 종족명만 다를 뿐 일원적인 계통이었다고 하는데, 이 같이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 가지 예로 통설 상에서는 이미 사라졌어야 할 종족명인 숙신이 5세기에 국제무대에 등장하고 물길과의 활동시기도 겹치면서 다른 정치체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당시 고구려에 조공한 숙신은 부여에 신속했다는 읍루와는 다른 별개의 실체로 볼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즉, 고구려가 부여에서 숙신의 조공을 받은 것을 계기로 굳이 부여가 자존심 상해야 할 당위성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J-4에 의하면 태조대왕이 부여에 행차하기 전에 부여는 이미 태자인 위구태를 후한에 입조시키면서 후한과의 관계를 돈독히 한 상황이었다. 고구려가 부여의 자존심을 긁었다고 해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고구려가 후한과 전쟁을 할 때 후한의 편에 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사료 E-9와 E-14에 나온 부여를 하나의 부여가 고구려와 후한을 상대로 양면외교를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양면외교 자체가 부여가 독자성을 갖고 고구려와 후한을 상대로 어느 정도 최소한의 억제력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외교이다. 기록상 부여의 후한에 대한 외교정책은 대체적으로 우호적이기는 하나,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를 침공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후한에 대해 어느 정도 억제력이 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억제력은 당연히 고구려에게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료 E-9에서 부여는 고구려에게 이러한 억제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 했다. 부여는 자국에서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지 못 했다. 오히려 태조대왕의 모후가 부여인이고 부여가 고구려에 조공하고 부여에 태조대왕이 한 달 동안 머물었고 타국인 그곳에 유화태후의 사당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태조대왕이 머문 이 부여는 단순히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속국이 아닌 최소한 반 이상은 고구려의 내지나 마찬가지인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부여가 태조대왕이 고구려로 귀국한 직후부터 고구려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2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후한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군사력이 있었다면 진즉에 억제력을 발휘하여 자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았을 것이나, 그렇지 못했으며 뒤늦게 군사행동을 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다.
후한, 고구려 두 강국과의 전쟁에서 2만 명을 동원하고 고구려가 후한과의 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할 만큼 국력이 강했고, 동쪽의 사나운 종족인 읍루를 전한 때부터 200년대까지 속국으로 거느린 부여가 고구려에게 조공을 하고 태조대왕에게 안방을 내어 주어 한 달 동안 머물고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방관 하다시피 한 것 등의 기록은 하나의 부여로 봤을 때 상당히 모순적이다. 이는 이도학 교수의 주장처럼 막래왕의 정벌에 의해 고구려에 통속한 동부여와 후한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고구려를 적시한 부여 이렇게 서로 다른 별개의 국가로 지목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6. 막래에 대한 재검토
그렇다면 동부여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만든 막래는 고구려의 어떤 군주를 말하는 것일까?
우선 사료 D-3이 기록된 『위서』 고구려전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던 이오의 견문 기록을 바탕으로 서술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사료 D-3에 나온 고구려 왕실의 계보가 『삼국사기』와 다른 것으로 볼 때 이오는 고구려에 갔을 때 고구려의 왕실로부터 공식적으로 고구려의 왕계를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고구려의 왕계를 전해 들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사료 D-3에서는 주몽의 아들이 여달이고 여달의 아들이 여율 그리고 여율의 아들이 막래라고 한다. 특히 여달의 행적은 『삼국사기』에 나온 유류왕의 행적과 같다. 여율은 여달의 아들로 여율의 대를 이었는데, 여달이 유류왕이므로 유류왕의 뒤를 이은 무휼 즉 대주류왕을 여율로 둘 수 있다. 문제는 여율의 뒤를 이었다는 막래이다. 통설에서는 막래를 대주류왕으로 파악한다. 부여를 정벌했다는 『삼국사기』에 나온 대주류왕의 행적과 일치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해당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E-16. 5년(22) 봄 2월에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아 왕이 평지 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 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몰아 전진해 왔 다.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이 이에 괴유에게 지시하니, 괴유가 칼 을 빼서 소리를 지르며 공격하니 대부분의 군대가 이리저리 밀려 쓰러지며 능히 지탱하지 못 하였다. 곧바로 나아가 부여 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 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 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 므로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워하다가, 하늘에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 안이나 지척에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없었다. 왕이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여 무기를 쥐 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적의 눈을 속이는 가짜 군사를 만들어 놓고, 샛길을 따라 군대를 숨겨 밤에 나왔다. 골구천의 신마와 비류 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병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급식하였다. 왕이 나라에 돌아와 여러 신하를 모 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을 죽 였으나 그 나라를 아직 멸하지 못하였고, 또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와 아픈 자를 조문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 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다.
보다시피 사료 E-16의 대주류왕과 사료 D-3에 나온 막래의 행적은 부여를 공격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일치하지 않다. 대주류왕은 부여를 공격하였으나, 부여를 대패시켜서 통속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패배하여 이를 교훈 삼았다는 것이 대주류왕의 부여 정벌 전에 대한 고구려 왕실의 공식입장이다. 이는 막래가 부여를 정벌하고 크게 이겨서 고구려에 통속시켰다는 위서에 나온 막래의 행적과는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이오가 고구려에 방문했던 시기와 비교적 비슷한 시점에 만들어진 『광개토태왕비문』과 고구려 왕실 계보의 공식입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대주류왕은 고구려의 3대 군주이지, 사료 D-3에 나온 것처럼 4대 군주가 아니다.
또한 막래를 대주류왕으로 볼 경우 여율의 존재도 의문이 들 수 있다. 따라서 부여를 공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막래를 대주류왕과 등치시키는 것은 매우 성급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의 4대 군주는 민중왕이고, 사료 D-3에 나온 고구려의 4대 군주는 막래이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온 관련 기록들을 검토해보자.
E-17. 12월에 왕자 해우(解憂)를 세워서 태자로 삼았다.
E-18. 민중왕(閔中王)은 이름이 해색주(解色朱)이고 대무신왕의 동생이다. 대무신왕이 죽고 태자가 어려 정사를 맡아볼 수 없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세웠다.
E-19. 모본왕(慕本王)은 이름이 해우(解憂)이다 해애루(解愛婁)라고도 한다. 대무신왕의 맏 아들이다. 민중왕이 죽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사납고 어질지 못하며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였다.
K-1. 제4대 민중왕(閔中王)은 이름은 색주(色朱)고, 성은 해(解)씨이다. 대무신왕의 아들로, 갑진(甲辰)년에 즉위하여 4년간 다스렸다.
K-2. 5대 모본왕(慕本王)은 민중왕의 형이고, 이름은 애류(愛留)인데, 우(憂)라고도 한다. 무 신(戊申)년에 즉위하여 5년간 다스렸다.
『삼국사기』에 나온 사료 E-18을 신뢰할 경우 민중왕은 대주류왕의 동생이며 대주류왕의 태자인 모본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렇다면 민중왕을 막래로 보기 어렵다. 막래는 여율 즉 대주류왕의 아들인데, 민중왕은 대주류왕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사료 K-1, K-2 를 보면 민중왕이 3대 왕인 대주류왕의 아들이며 모본왕의 동생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들은 언뜻 보면 사료 D-3에서 막래가 3대 왕인 여율의 아들이라는 기록과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들을 신뢰할 경우 모본왕이 민중왕보다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동생이 죽자 왕위에 오른 다소 이상한 경우가 발생하며 민중왕이 태자인 모본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경위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에 비해 E-18에서는 민중왕이 모본왕 보다 앞서 왕위에 오른 경위가 분명하다. 민중왕은 대주류왕의 동생인데, 대주류왕의 태자가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기에 민중왕이 태자 대신 왕위에 오른 것이다. 대주류왕의 태자는 사료 E-17, E-19에서 보듯이 모본왕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어떠한 이유로 민중왕과 모본왕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걸까?
이는 일연이 왕력을 기재할 때 참고한 사료의 편찬자가 사료 D-3에서 고구려 4대 군주의 전왕(前王: 如栗)과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기록한 것과 사료 E-19에서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맏아들(元子)이라고 기록한 것을 두고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절충하여 서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모본왕과 민중왕의 관계가 『삼국사기』가 『삼국유사』보다 개연성 있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신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사료 D-3에 나온 여율의 아들인 막래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모본왕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물론 모본왕이 막래처럼 동부여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에 모본왕 대에 동부여를 통속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매우 성급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사료 D-3에서 어떻게 하여 모본왕의 동부여 정벌 과정이 전해지고 민중왕이 생략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우선 모본왕은 부덕하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시해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모본왕 이후 왕위에 오른 태조대왕 세력이나 그 후손들에 의해 모본왕의 치적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모본왕의 동부여 정벌 기록이 은폐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본왕의 치적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E- 20. 원년(48) 가을 8월에 큰 물이 나서 산 20여 곳이 무너졌다. 겨울 10월에 왕자 익(翊)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한(漢)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해하고 친하게 지냈다.
3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4년(51)에 왕이 날로 더욱 사납고 잔인해져서 앉아 있을 때는 늘 사람을 깔고 앉고, 누워 잘 때에는 사람을 베개 삼아 베었다. 사람이 혹 움직이면 죽이고 용서함이 없었다. 신하로서 시정을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를 쏘았다.
6년(53) 겨울 11월에 두로(杜魯)가 임금을 죽였다. 두로는 모본사람으로 왕의 좌우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죽임을 당할까 근심하여 울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우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어루만지면 임금이고 나를 해치면 원수이다.’라 하였다. 지금 왕의 행실이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이다. 네가 그를 도모하라.”고 하였다. 두로가 칼을 품고 왕 앞으로 나아가니 왕이 끌어당겨 깔고 앉았다. 이에 칼을 뽑아 왕을 해쳤다. 마침내 모본(慕本) 들판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모본왕이라 하였다.
사료 E-20에 기록된 모본왕의 치세를 살펴보면 모본왕이 장수를 보내서 북중국을 공격했다는 것과 나라에 기근이 생겨 백성을 구제했다는 것 그리고 익을 태자로 세웠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시종 나쁘게만 묘사되어 되어 있다. 이중 모본왕의 유일한 외정으로 그나마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모본왕의 북중국 공격인데, 이는 사실 고구려 측 고유 기록을 전한 것이 아니라 『후한서』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서 기록한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후한서』의 기록을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참고하여 기재했기 때문에 모본왕의 업적이 전해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구려 측에서 고의로 모본왕의 북중국 공격을 은폐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정에서도 백성을 구제했다는 기록이 남은 이유도 곱게만 볼 수 없는 게 당시 군주가 부덕하고 포악하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모본왕이 백성을 구제하라는 명을 내릴 정도로 당시 천재지변이 극심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남겼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사료 E-19에 나왔듯이 모본왕은 애초에 그의 치세를 기록한 고구려인들로부터 사납고 어질지 못하고 나라 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싫어하는 군주로 평가를 하고 있다. 이러한 판국에 그가 백성들을 가엾이 여겨서 구제했다는 의도에서 기록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모본왕의 백성구제는 편찬자의 순수한 의도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기 힘들며, 악의적인 의도로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사실 『삼국사기』를 보면 중간 과정이 생략된 채 태조대왕 대에 이르러서야 갑자기 동부여가 고구려에 제대로 종속되었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 이는 모본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태조대왕계가 모본왕의 북중국 공격과 동부여정벌 업적을 은폐하고 태조대왕이 동부여를 관리한 기록만 남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료 D-3에서 이오가 전한 고구려의 왕계가 고구려의 공식입장과 다른 것은 물론 따로 고구려의 공식왕계를 전하지 못한 것으로 볼 때 그는 고구려의 정보를 공식적인 경로로 얻을 수 있는 환경에 있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가 전한 고구려의 정보는 비공식 경로로 얻은 정보라는 것이다. 이오가 이러한 비공식 경로를 택할 수밖에 없던 원인은 서영교 박사와 시노하라 히로카타(篠原啓方) 박사의 지적처럼 당시 고구려의 보안이 생각이상으로 철저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북위와 고구려는 북연을 둘러싼 긴장관계로 보안이 더더욱 철저했음이 자명하다.
이오가 비경식 경로로 접근한 고구려 내의 비주류 세력으로는 모본왕의 직계 내지 방계 후손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고구려의 권력에서 소외된 세력으로 고구려의 현 정권에 대해 다소 불만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며 이오가 접근하자, 그에게 고구려 왕계 등 고구려의 국력에 대한 정보를 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이오가 접한 비주류 세력을 모본왕계 파악할 경우 사료 D-3에 나온 초기 고구려 왕실 계보에 민중왕이 생략된 이유도 자연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
우선 민중왕이 왕이 된 이유는 태자였던 모본왕이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모본왕 계열의 입장에서 볼 때 민중왕은 모본왕이 장성할 때까지 왕위를 잠시 맡아준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민중왕을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오에게 고구려 왕실 계보를 간단히 설명할 때 민중왕을 생략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로로 사료 D-3에 민중왕이 생략되고 모본왕의 동부여 정벌 기록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사료 C-1에서 동부여가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었다는 기록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광개토태왕 및 장수태왕 대에 이미 모본왕은 폭군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사실상 은폐된 지 오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동부여 통속이라는 모본왕의 업적을 후대인 민중왕이나 태조대왕 대에 끼워 넣기보다는 시조인 추모왕 대에 끼워 넣어서 동부여 정벌의 명분을 보다 강조하려 했을 수도 있다. 왜 하필 동부여는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라고 기록을 한 것일까? 『광개토태왕비문』의 사료 C-2에서는 추모왕의 도피행적을 순행이라고 왜곡을 한 바 있다. 이는 추모왕의 도피행적은 물론 도피의 배경이 되는 동부여에서 받은 핍박까지 은폐하려는 것이다. 아예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받은 굴욕도 은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동부여가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삼국사기』등 『광개토태왕비문』보다 후대에 쓰인 사료에서 추모왕이 동부여를 정벌해서 속민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이 같은 이유는 고구려인 스스로도 동부여를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었다는 왜곡은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어느 시점에 고구려 내부에서 인식의 변화가 생겨 다시 수정을 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앞에서 『광개토태왕비문』의 C-2와 『위서』의 D-1 그리고 『삼국사기』의 E-1의 사료를 검토했듯이 C-2에서 추모왕의 남하행적을 순행이라고 왜곡한 것을 E-1에서는 도망으로 수정한 예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추론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7. 동부여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이도학 교수는 I-5에서 함경도 일대에 있던 동옥저가 북으로 읍루와 부여와 접한다는 것에 주목하여 동옥저의 북쪽에 있던 부여는 I-3의 송화강 유역에 있던 부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우선 필자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중국 사서에서 동부여의 흔적을 찾아낸 것은 탁견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지리적으로 송화강 유역에 있던 부여는 함경도 일대에 있던 동옥저는 지리상 서로 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송화강 유역에 있던 부여를 기록한 I-3에서는 부여가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한다고 했을 뿐 동옥저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옥저가 접했다는 부여는 송화강 유역에 있던 북부여와는 다른 정치체인 것이 분명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도학 교수는 동옥저의 북쪽에는 엄연히 북옥저가 소재했기 때문에 북옥저 지역에 동부여가 같이 소재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여 동부여를 기존의 다수설처럼 북옥저에 비정하였다. 그는 유화와 해모수가 사통한 곳이 압록강변이며 금와왕이 지금의 백두산으로 비정되는 태백산에서 유화부인을 만났다는 기록을 이 같은 주장에 대한 하나의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이 같은 근거로 동부여의 위치를 북옥저로 비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다음 기록들을 살펴보자.
I-6. 北沃沮는 일명 置溝婁라고도 하는데 南沃沮와는 8백 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挹婁와 접해 있다.
I-7. 挹婁는 夫餘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北 沃沮와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I-8. 濊는 남쪽으로는 辰韓과, 북쪽으로는 高句麗·沃沮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우선 I-5에서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가 접했다는 동옥저가 정말로 북옥저와 경계를 이룬 남옥저를 일컬은 것인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I-4와 같은 『삼국지』동옥저전의 기록인 I-6 그리고 역시 『삼국지』에 기록된 I-7에 의하면 읍루와 접한 것은 동옥저가 아니라 북옥저이다. 또한 동옥저로도 불린 남옥저의 북쪽에는 북옥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I-5에서 동옥저가 북으로는 읍루와 부여와 접하고 남으로는 예맥과 접한다고 기록한 이유는 찬자(撰者)가 북으로 읍루, 부여와 접했던 북옥저와 I-8에도 나왔듯이 남쪽으로 예맥과 접했던 남옥저의 경계를 접한 상황을 한데 모아서 동옥저의 남북 경계라고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삼국지』동옥저전에 북옥저에 대한 기록이 실린 것으로 볼 때 동옥저라는 명칭은 남옥저의 이칭(異稱)임과도 동시에 남북옥저 모두를 대표하는 범칭(凡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I-5에서 읍루, 부여와 접한다는 동옥저는 글자 그대로 동옥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북옥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즉, 동부여는 읍루와 더불어 북옥저의 북쪽에 있던 것이며 읍루는 송화강 유역의 북부여와 북옥저의 북쪽에 있던 동부여 모두와 어떤 식으로든 경계를 접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태백산을 뚜렷한 근거 없이 안일하게 지금의 백두산으로 비정한 통설도 그대로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에 대해 강경구 교수와 중국의 劉子敏 교수가 회의론을 펼친바 있으며 타당하다고 생각되기에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L. 백두산은 해발 2744m의 고봉으로서 그 산만 높은 것이 아니라 주위를 개마고원이라는 험준한 산지가 수천 리에 걸쳐서 에우고 있다. 상식적으로 보아서 연못이나 큰 강을 상정하 기 힘든 지형이다. 우발 연못의 어사의 존재나 주기적인 漁撈 활동 등은 태백산 남쪽에 위치 하던 우발택의 크기가 상당하였음을 짐작하기에 힘들지 않다. 그곳에 동부여 왕 金蛙가 직접 순행하기까지 한 것으로 보아 첩첩산중의 오지였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太白山 東南에 있 던 荇人國을 시조왕 대에 정벌하였다는 기술이다. 고구려가 건국한 동가강 - 압록강 일원이 므로 그 곳에서 태백산 동남방의 소국을 공격하는 것은 지리적으로 불합리한 점이 너무 많 다. 지금의 집안 일대에서 백두산 동남방으로 행군을 하려면 두만강 유역을 통과하거나 아니 면 험난한 개마대지를 넘어가는 것이 작전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압록강 계곡에서 상류 로 올라갈수록 산세는 가파르고 길은 小路밖에 없다.
M. 주몽이 정벌한 '荇人國'을 어떤 학자는 길림성 장백현 부근이라고 한다. 역시 불가능하다. 필자는 이른바 '太白山 東南 荇人國'이 흘승골성에서 별로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태백산도 지금 장백산이 아니다. 당연히 고구려족이 분포한 지구 중의 한 산이었을 것이다.
강경구, 유자민 교수의 견해처럼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다. 최근 김락기 교수가 도태산(태백산)=백두산설에 대해 적극적인 반론을 펼쳐서 태백산=백두산 설은 만주지역의 으뜸 산이란 전제를 바탕에 둔 설로 도태산을 안일하게 백두산에 연결시킨 데서 나온 착오라고 지적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백두산 일대가 물길의 경역에 포함된다면 고구려가 그 지역을 영유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되는데, 이는 고구려의 성곽 분포 등을 통해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물길의 중심지라 추정되는 지역과 백두산과의 거리도 400km 이상이어서 도저히 동일권역으로 묶어내기 어렵다. 그밖에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 고려시대 기록에 백두산의 북쪽 돈화시가 틀림없는 발해의 건국지를 태백산의 남쪽이라 한 것도 간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해모수와 유화가 상통한 웅심산이 압록강 일대라는 사료 E-10의 기록도 신뢰하기 어렵다. 기록상 웅심산은 부여의 옛 도읍에 자리하여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활동반경이기 때문에 송화강 유역에 있어야 한다. 기록에 나온 압록강을 두고 송화강이라고 비정하며 무리하게 논지를 전개하거나 북부여와 웅심산을 지금의 압록강 일대에 있었다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웅심산이 압록강 일대라는 기록의 원전은 『구삼국사』를 인용한『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에서 찾을 수 있다. 동명왕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N. 성(城)의 북쪽에 청하(靑河)가 있다.[청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하백(河伯) 三女 예쁘더라.[맏딸은 유화요, 둘째딸은 훤화요, 셋째 딸은 위화이다.]
압록 물결 헤쳐 나와 웅심연(熊心淵)에 떠서 놀다.[청하로부터 나와 웅심연가에서 놀다.]
주지하다시피 사료 N에서는 주석형식으로 『구삼국사』의 내용을 인용했는데, 『구삼국사』에서는 웅심연가의 강을 청하(靑河)라고 기록하고, 압록강으로 비정해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압록강이라는 지명은 애초에 본문에 기재되지 않은 주석형식으로 고려인들이 청하를 압록강과 등치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점차 압록강=청하라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구삼국사』보다 후대에 편찬 된 『삼국사기』에 웅심산이 압록강일대라는 기록이 남겨졌을 것이다. 이 같은 고려인들의 지리인식 때문에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 청하가 압록강이 된 것이다. 일찍이 정약용 등은 이 같은 고려인들이 가진 지리인식의 맹점을 간파하여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에서 안정복의 설을 쫓아 청하는 압록강이 아니라고 비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청하가 압록강이라는 기록은 당시 고려인들의 인식을 알려줄 뿐 청하의 실제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청하는 정약용의 견해처럼 압록강이 아니라 만주에 흐르는 강이어야 한다. 이상 지금까지 동부여를 북옥저 지역으로 비정한 설들을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동부여는 어디에 있었을까?
동부여의 지리적 요건은 동부여 금와왕의 활동반경에 있던 태백산의 동남에 행인국이 위치했다는 기록과 사료 I-5를 볼 때 남쪽으로 행인국과 북옥저를 경계하고 읍루와 이웃하며, 도읍인 가섭원은 동해일대임을 알 수 있다. 앞서 필자는 동부여 건국신화에 나온 동해(東海)를 두만강 유역의 동해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고대에는 큰 호수를 바다(海)로 표현한 사례도 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온 동해를 보다 열린 시각으로 동쪽의 큰 호수로 생각한다면 상충되지 않는 답이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동해의 후보로는 목단강 일대의 홍개호를 거론할 수 있다. 동부여 건국신화에 나온 동해가 흥개호를 가리켰을 가능성을 염두 한다면 가섭원에 중심지를 둔 동부여는 홍개호 일대의 삼림지대에 위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서영수 교수는 동부여를 장백산맥 이동과 목단강 일대로 비정하였으며 북한의 손영종 교수 역시 동부여를 목단강 일대로 비정하였는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해모수에게 쫓겨난 해부루왕 세력이 동해 가섭원 일대로 도읍을 옮기면서 우수한 선진문화를 바탕으로 삼림지역의 종족들을 정복(혹은 회유)하고 동부여를 세웠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가섭원(迦葉原)이라는 지명에서 나뭇잎을 뜻하는 葉자가 주목된다. 물론 단순한 가차문자일 가능성도 크지만, 아주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홍개호 일대는 '3세기 북옥저동부여' 설과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근거가 전무하다는 큰 문제가 있다.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문화는 장광재령 이동을 넘지 못하며 장광재령 이동에는 부여의 서단산 문화와는 차이가 큰 앵가령 문화와 동강 문화라는 불리는 비예맥권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C-1에 의하면 410년 고구려가 동부여전에서 얻은 전과 가운데 산곡(山谷)을 따라 거주하는 형태를 나타내는 단위인 곡(谷)이 없는 것도 하나의 문제가 될 것이다.
8. 결론
지금까지의 고찰에 의하면 '북옥저동부여'설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여 북옥저 지역을 정치적 구심점이 없던 힘의 공백지대로 파악하여 이곳에 285년 이후 북부여의 피난민들이 동부여를 세웠다는 '3세기 북옥저 동부여'설을 들 수 있다. 둘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일부 긍정하여 고구려의 영토인 북옥저 지역에 고구려의 배려 하에 285년 이후 북부여의 피난민들이 동부여를 세웠다는 '3세기 고구려령 북옥저내 동부여'설이 있다,
그러나 이 두 학설은 285년 모용선비에게 공격당한 북부여의 왕족들이 옥저에 피난했다는 『진서』의 기록 하나로 온갖 무리한 추론과 자의적인 해석을 거듭해서 만들어낸 설이다. 현 학계의 다수설 내지 정설로 대우받는 설치고는 문헌적, 고고학적 근거가 전무하기 때문에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285년 이후에 북옥저지역에 동부여를 세웠다는 설을 전면 부정하고 『삼국지』와 『삼국사기』를 세심하게 재검토하여 기원전 무렵에도 동부여가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 위치를 북옥저 지역에 비정한 '기원전 북옥저동부여'설이 있다. 이 설은 『삼국지』에서 또 하나의 부여를 찾아내고 『삼국사기』에서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개의 부여의 흔적을 찾아내어 동부여가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하여 기원전부터 동부여가 존재했다는 『광개토태왕비문』과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에 신빙성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위치 비정에 있어서는 사료를 면밀히 재검토하지 않고 북옥저 지역으로 비정했다는 문제가 있다.
필자는 우선 3세기에 북옥저 지역에 동부여가 건국되었다는 여러 견해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면서 현 동부여 통설에 적잖이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국사기』의 매구곡이라는 기록을 주목하여 매구를 치구루의 오탈자로 보거나 미구루의 오탈자로 보는 견해도 함께 비판하였다. 또한 기존의 대주류왕으로 파악했던 막래에 대해 북위 사신 이오가 고구려에서 접한 정보의 한계성에 주목하여 당시의 정황과 사료들을 비교분석하면서 재해석을 시도한 결과 막래는 모본왕이라는 새로운 결론도 도출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북옥저동부여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동부여는 기존의 3세기에 북옥저 지역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이전부터 고구려와 병존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비정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여 『삼국지』에 나온 동부여의 위치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동부여 건국신화에 나온 동해(東海)를 재해석하고 일부 선학들의 연구결과를 수용하여 목단강 일대에 동부여가 있었다는 이른 바 '홍개호동부여' 설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홍개호동부여설'은 '북옥저동부여설'과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문제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동부여의 남쪽 경계 중 한 곳이라 할 수 있는 태백산에 대해서도 아직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보완해야 할 사안이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 다른 대안이 나올 때까지 '홍개호동부여'설을 주장하겠지만, 이 '홍개호동부여' 설에 여러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이상 지속적으로 보완하면서도 다른 가능성들도 함께 고민해볼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동부여는 285년 이후 북옥저 지역에 건국된 것이 아니며 『광개토태왕비문』과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기원전에 건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1) 광개토태왕의 평생 전과를 64성 1,400촌으로 보는 견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영락 17년을 대백제전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락 17년에서 고구려가 공파한 성의 개수를 6개로 파악할 경우 영락 6년조의 58성과 합산한다면 64성이라는 숫자와 맞아떨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적했다시피 영락 17년 조에서 고구려가 공파한 성의 개수가 6개인지도 불분명하거니와 700촌에 대한 것은 아무런 언급은 없으며, 무엇보다 407년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기록이 없으며 고구려가 백제를 칠 이유도 뚜렷하지 않다. 영락 17년조를 대후연전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천관우, 이인철, 문선종, 임기환, 강재광, 윤병모, 정명광, 김용만, 공석구 등 선학 분들의 연구들을 참조하라.
2) 김태식 기자는 동시기 비문들과 비교하며 유독 광개토태왕비문이 사면 모두 빈틈이 없을 정도로 촘촘히 각기 글을 쫗아 넣었다는 것과 광개토태왕비의 크기에 비해 글자수가 총 1775자에 지나지 않아 굉장히 비효율적이라는 지적과 함께 한 글자당 글자의 크기가 동시대 비문과 비교했을 때 평균 11센티로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이러한 현상의 배경을 제법 재밌게 추론하였다.
"쓰다가요, 쓰다가 모자라 쓴 거예요. 농담 아니에요. 쓰다가 모자라서 막 쪼내려갑니다 전체가 문장이기 때문에요(생략) 한문에는 끊어읽기 없어요. 한문장이기 때문에 처음에 유석부터 그냥 써내려갑니다. 유석부터 써내려가기 때문에 동시에 작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작업을 한다는 것은 뭔 뜻인가 한 놈은 1면에 찍고 한 놈은 2면에 한 놈은 3면에 찍고 할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유석부터 쫙 써내려가야 합니다 이놈이 분명히 장수왕한테 받은 어떤 글자나 텍스트가 이따만큼 되는데 분명 글씨를 너무 크게 썼어요 그러다보니까 아 모르겠다... 그럴듯하지 않아요? -녹취록-"
본인도 김태식 기자의 견해에 공감을 하여 원래 텍스트에는 영락 6년조에서 58개성이 일일이 적힌 것처럼 영락 20년조에도 64개성이 일일이 적혀있었으나, 석공이 초반부터 글씨를 너무 크게 쓰는 바람에 수묘인 제정을 적을 분량이 모자르게 되자, 광개토태왕의 최종정벌지인 동부여전을 간소화시키고 바로 수묘인 제정에 대한 기록을 빽빽하게 적은 것으로 생각한다.
3) 사실 책성=치구루(북옥저) 설에도 의문이 있다.
『신당서』渤海傳의 기록을 보면
"濊貃의 옛 땅으로 東京을 삼으니, 龍原府로, 柵城府라고도 한다. 慶[州]·鹽[州]·穆[州]·賀[州]의 4州를 통치한다. 沃沮의 옛 땅으로 南京을 삼으니, 南海府이며 沃[州]·晴[州]·椒[州]의 3州를 통치한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南海府를 두고 沃沮의 옛 땅이라고 거론한 데 비해 柵城府는 단순히 濊貃의 옛 땅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치구루=책성 설도 치와 책의 발음의 유사함과 구루를 성으로 등치시켜서 나온 발상이기 때문에 다소 안일하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 물론 북옥저와 책성이 모두 고구려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옥저도 예맥족이기 때문에 신당서의 기록 자체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북옥저의 이명인 치구루 자체가 하나의 지명일 가능성이 있으며 『신당서』 발해전에도 상기한 바와 같이 옥저와 예맥으로 구분한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할 수 밖에 없으며 치구루=책성 설이 생각보다 치밀한 논증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필자도 뚜렷한 대안이 없기에 의문을 꺼내는 선에서 마치며 책성=치구루 설을 따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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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도 장수왕이 부왕의 훈적을 기리어 만든 석비인데 찬자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써내려가다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했다구요? 참 내...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비문의 글자 크기는 평균 14, 15cm이며 가장 작은 것은 11cm이고 가장 큰 것은 16cm이라고 합니다. 가장 작은 글자와 큰 글자의 크기 차이가 무려 5cm이며 평균크기와도 2, 3cm입니다. 이 정도 차이면 찬자가 계획성있게 글씨를 쪼아내렸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광개토태왕비 자체도 그렇습니다. 고구려는 동시기에 만들어진 장군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상당히 깔끔하게 돌을 다듬는 기술이 이었음에도 광개토태왕비는 그야말로 원석에 가깝습니다. 이는 어딘가 졸속으로 비를 건립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할 정도입니다.
솔직히 비문과 비석 둘 다 그 자체로만 봤을 때 그다지 치밀한 흔적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물론 최소한의 규칙성이 있겠습니다만... 그리고 김태식 기자에 의하면 광개토태와비의 성격이 부왕의 훈적을 알리기 위한 것은 페이크고 실상은 수묘인제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장수태왕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으로 파악했는데, 실제로 오로지 훈적비로만 보기에는 비문에서 수묘인제도에 대한 내용이 약 3분의 1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인터넷 카페라도 명색이 토론방인데, 표현을 좀 더 부드럽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문의 글을 쓴 이의 성의를 봐서라도 말입니다.^^;
단순히 글자 크기를 가지고 계획 운운한 것이 아닙니다. 저 김태식 기자 말에 따르면 찬자가 원석에 전체적인 내용을 다 넣을 수 있을지도 제대로 판단을 못한 것으로 말하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거기에 님이 찬동하셨으니 제 답변의 모양새가 좀 이상하게 되었네요. 석비가 자연석에 만들었기 때문에 글자크기가 고르지 못한 것은 납득이 됩니다만 졸속으로 만들었다고 치더라도 명색이 부왕의 훈적을 기록한 것인데 김태식 기자의 주장은 오버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학계에선 수묘비라 보기도 합니다만 수묘제에 대
해 적은 것도 태왕의 치적의 일부로 볼 여지도 있는 듯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시는 학자분들도 꽤 있구요. 제 표현이 과격했다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하다못해 안악 3호분의 묵서만 보더라도 전체 벽의 크기를 감안해 거기에 내용의 분량을 맞춰 쓴 흔적이 보이는데 하물며 만인이 두고두고 볼 왕의 석비에 그런 시행착오가 있다고요? 게다가 비문 자체의 세련된 문장력과 표현 등은 이미 학계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공들인 것이 충분히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쓴 비문이 써야 할 전체적인 내용을 다 못쓸 정도로 무계획적으로 기본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주장은 좀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