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왈츠 - 세계로 피어나는 대한민국의 봄
I. 클레멘타인의 애상
‘멀고 멀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잡이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가사가 정확히 이랬는지는 이제 헷갈립니다. 하지만 내게 이 노래는, 오래된 기억과 함께 되살아나는 하나의 풍경, 하나의 감정입니다.
어느 봄날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TV 채널을 건성으로 돌리다가, 이상하게 눈을 끄는 장면이 있어 그냥 보고 말려던 것이 끝까지 붙들려 보게 된 프로가 있었습니다. 제목은 ‘봄의 왈츠’.
처음에는 영화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월화 드라마로 기획된 연속물이었습니다. 형식이 무엇이건, 첫 회와 초반부만 놓고 보면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아름다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이중섭과 아이들’이라는 책을 읽다가, 어른이 된 이후 처음으로 거의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쏟았던 적이 있습니다. ‘봄의 왈츠’를 보면서도 비슷한 종류의 울음이 밖으로, 또 안으로 흘렀습니다.
어릴 적 기억들이, 잊힌 줄 알았던 감정들이,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이 빛을 되찾듯이 하나하나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속에, 글 맨 앞에 적어 둔 ‘클레멘타인’을 변주한 피아노 곡이 나옵니다. 어린 시절의 불우를 딛고 자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극 중 인물 ‘재호(Chris)’. 그가 콘서트를 마치고 앵콜로 이 곡을 연주하는데, 그 장면의 울림은 정말로 ‘애상(pathetique)’ 그 자체입니다.
피아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예술의 세계가 얼마나 찬란하고 동시에 처절한지, 그 몇 분 동안, 그 음표들 사이로 가슴이 저릿저릿 바스러지는 듯했습니다.
II. 섬마을, 황금빛 바다
어린 시절의 배경은 외딴 섬입니다. 완도에서 촬영했다는 자막이 잠깐 지나가는데, 그 섬의 풍경은 굳이 이름을 몰라도 충분히 하나의 시(詩)입니다.
재호는 국민학교 5학년 무렵, 아버지에게 버림받듯 섬에 남겨지고 어떤 인연으로 한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 집의 외동딸이 바로 극 중 여자 주인공 ‘은영’.
은영은 몸이 아픈 아이입니다. 아빠 없이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생일 소원으로 ‘친구 하나 생기게 해 주세요’를 빌던 아이. 그 소원처럼, 재호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납니다. 둘은 친 오누이처럼 정을 쌓고, 강아지 사랑에 비길 만한, 어린 마음의 온기를 서로에게 옮겨 줍니다.
숨바꼭질 장면이 압권입니다.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노란 유채꽃인지, 메밀꽃인지 알 수 없는 황금빛 꽃밭에서, 또 한 번은 허리까지 올라오는 풀숲에서입니다.
은영의 천사 같은 마음씨, 재호의 불안과 기대가 서로 엇갈리며 스며들고, 그 위를 ‘클레멘타인’ 변주가 간간이 흐릅니다. 그 장면들은 거의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를 위해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드라마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서정시라고 해도 좋겠지만, 유독 눈에 박힌 장면이 더 있습니다.
재호가 장난반, 진심반으로 ‘바다를 헤엄쳐 서울에 가겠다’고 하다가 물에 허우적거리며 놀고 있을 때, 은영은 오빠가 정말로 물에 빠진 줄 알고 옷도 잊은 채 바다로 뛰어듭니다. 그러다 스스로 물에 빠져 버리고, 재호는 그 모습을 보고 허겁지겁 헤엄쳐 나가 은영을 끌어내지요.
그 순간, 화면은 황금빛 태양, 황금빛 하늘, 그리고 황금빛 바다로 가득 차 있고, 그 위에 재호와 은영의 모습만을 검은 실루엣으로 처리합니다.
누가 찍었는지, 감히 말하건대 천재입니다. 문득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1부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지평선과 비슷한 언덕 능선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붙잡고,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가 흙을 움켜쥐며 ‘이 땅과 함께 살겠다’고 선언하던, 영화사에 길이 남는 그 명장면.
‘봄의 왈츠’의 바다 실루엣은, 그 명장면에 버금가는 하나의 영상시(映像詩)였습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무지개 장면’입니다. 언젠가 다시 보면 그 장면 또한 또 다른 시로, 또 다른 애상으로 다가올 것 같지만, 첫 방영 당시에는 이미 마음이 넘칠 만큼 차 있었던 탓에 세세한 묘사까지는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방송 당시 이 드라마는, 다른 계절 연작들―‘겨울연가’, ‘가을동화’, ‘여름향기’―에 비하면 스토리 전개가 늘어지는 등의 이유로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한 부분들만큼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강추’입니다.
전체를 다 보지 않더라도, 초반 몇 회 혹은 유튜브에 남아 있는 음악과 장면들은 한 번쯤 찾아볼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III. 어둠의 자식들, 카수 영희의 꿈
얼마 전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영화를 다시 찾아 보게 되었습니다. 1981년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본 이후 두 번째였습니다.
이장호 감독, 황석영 원작. 우리 세대에게는 물론, 한국 영화사의 고전으로 자주 이름 오르는 작품입니다.
이번 재관람에서 새삼 놀란 것은, 이 영화에도 ‘봄의 왈츠’의 완도 꽃밭·풀밭 장면과 매우 유사한 정조의 장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인공 ‘카수 영희’가 서울 상경 이전, 가난한 시골 소녀로 가수를 꿈꾸며 들판을 나비처럼 뛰놀던 그 시절.
훗날 삼류 가수가 되었다가, 더 불운한 인연과 운명 탓에 직업 여성의 나락으로 떨어져 ‘카수 영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그 인물의, 비참한 현재가 잠시 접히고 과거로 돌아가는 대목입니다.
고향 들녘을 나풀나풀 건너다니며, 영희가 흥얼거리듯 노래를 부르는 장면.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노란 유채꽃과 초록빛 나뭇잎이 뒤엉킨 들판이고, 그 위를, 세상에 막 나온 나비처럼 호기심과 꿈으로 가득 찬 소녀가 작은 점으로, 화면 5%도 안 되는 크기지만 모든 시선의 중심으로 느리게, 혹은 가볍게 traversing 합니다.
영화가 영희의 비참한 현재에서, 가난하지만 소박한 꿈이 숨 쉬는 과거로 의식의 흐름과 비슷한 방식으로, 무작위로 되돌아가는 구조를 취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장면’ 속에서 느끼는 슬픔, 즉 애상의 무게는 더 큽니다.
그 장면은 하나의 기억이 아니라, 두 개의 시간―현재와 과거―를 겹쳐 놓은, 그래서 더욱 깊어지는 슬픔의 화폭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스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우리나라 분들은 참으로 재능이 뛰어나다.’
IV. 세계정상급인 한국영화의 시적 서정성
영화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특히 ‘서정성’, 그리고 그 서정을 시적으로 표현해 내는 힘, poetic display라 할 만한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글로벌급입니다.
‘봄의 왈츠’, ‘어둠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웰컴 투 동막골’, ‘미인도(신윤복)’, ‘서편제’는 그런 서정성과 시적 표현력의 정점에 놓여 있습니다.
최근 나온 영화들 다수가, 이 ‘시적 서정적 표현력’을 이미 기본값처럼 장착하고 출발합니다.
심지어 많은 대중들이 쉽게 기대하지 않는 감독―예컨대 김기덕―의 작품 중에서도 ‘활’(2005년, 그의 12번째 작품)은 서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발군의 영상시입니다.
한동안 우리 영화가 스토리텔링과 편집 측면에서 약점을 지녔다고들 했지만, 이 문제도 90년대 중반 이후 20여 년 동안 괄목할 만하게 개선되었습니다.
한 세대의 감독과 연관 스태프들이 등장하며, 내러티브와 구조 자체가 세계 정상급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세계적 쾌거는 그 변화를 상징적으로 입증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영화뿐이 아닙니다. 음악, 미술, 무용, 스포츠, 학문… 편차는 물론 크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세계적 수위를 보여주는 분야들이 적지 않습니다.
동시에, ‘저성장 속의 양극화’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민생은 힘겹고, 이웃 공기는 척박하며, 일상의 삶은 곤고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닌 잠재력과 저력을 보여주는 사건들과 장면들은 이른 봄꽃, 연둣빛 신록처럼, 이미 우리 사방에 조용히 피어 있습니다.
V. 날개를 펼칠 ‘소망의 때’
이제, 어쩌면 우리는 문턱 위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지닌 재능이 온 세상을 무대로 꽃필 ‘새로운 큰 때’의 문턱.
오랫동안 꿈꾸며, 꾸준히 자신을 가꾸고, 기다리며 준비해 왔던 그 때.
그 시절은, 먼 훗날의 막연한 이상이라기보다 이미 우리 곁을 서성이는 어떤 호명일 수 있습니다. 삶의 끝에서가 아니라, 어느 날 문득, 평범한 하루의 오후와 저녁 사이, 아주 사소한 틈으로 스며드는 부름 말입니다.
누군가는, 우리 각자가 인생 숙원을 펼 수 있는 시절은 예고편 없이 온다고 말합니다.
번개처럼, 느닷없이. 어린 천사(seraphim)가 창공을 갈라 수직 하강하듯이, 빛의 한 기둥이 우리의 어깨와 마음을 관통하듯이, 그렇게 찾아온다고 말입니다.
그런 ‘소망의 때’가, 사실은 이미 우리 생활 반경 안쪽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마당의 앙상한 나무, 뒷뜰 구석에 서 있는 마른 가지, 아파트 화단 한켠의 보잘것없는 묘목, 그 모든 것이 사실은 ‘꿈의 나무’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직 메마르고, 흙은 여전히 척박하지만, 그 나무의 심층에는 이미 봄의 수액이 오르내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새순은 아직 껍질을 뚫지 않았을 뿐, 언젠가 갑자기, 아무 예고 없이, 어느 새벽이나 해질녘에 온통 연둣빛으로 터져 나올 준비를 끝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나가서 한 번 찾아봅시다. 우리 곁에 서 있는 꿈의 나무들을.
눈길을 주고, 손으로 만져도 보고, 가만히 보듬어도 봅시다.
그리고 마음 한 칸을 비워, 각자의 인생숙원의 시절이 어느 날 불쑥 ‘봄의 왈츠’ 한 소절처럼, 클레멘타인의 애상 한 구절처럼, 삶의 무대 위로 내려올 그 순간을 맞이할 자리를, 조용히 마련해 둡시다.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2020.4.11 대평리 가대아
우세돌식 꾸벅
[우천식]
수년전 봄에 쓴 글인데 지금봐도 느낌이 괜찮은 해서 좀 손봐서 다시 올립니다.
봄의 왈츠, 어둠의 자식들.. 등을 관통하여 우리 영화는 시적 서정성이 독보적이며,
이미 글로벌급에 들어섰다고 감히 주장했었는데,
실로 세상은 세게로 피어나는 대한민국의 봄을 얘기해도 무리가 아닌듯 펼쳐지고 있네요.
우리 각자의 봄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살렸으면...
2026.8.10 우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