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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 공직자에게 세종대왕이 내린 끔찍한 형벌^^
^^조선왕 집권기간 TOP5^^
^^'조'와 '종'의 차이^^
나라를 세운왕은 고려나 조선이나 태조,
뛰어난 업적을 세운왕은 태종,
제도를 완성시킨왕은 이룰성자써서 성종이고
종과 조의 차이는 종가집에 종자처럼
부자간의 왕의 대를 이어가면 종을쓰고
세자출신이 아닌 임금은 조를 써요
그래서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까지는 종을쓰다
세조가 왕위찬탈해서 조가 쓰입니다.
그러다 선조부터 원래는 선종이였는데
광해군이 업적이 높은왕은 조를 쓰는 인식이 생겨 선종을 선조로 바뀌고
영종 정종 순종도 그래서 영조 정조 순조로 합니다.
^^ㅡ친일로 변절한 조선지식인들 ㅡ^
친일 반민족행위 708명 명단 중 조선지식인 층 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인및 사회 예술계 명단은 아래와 같다.
◇ 친일문인 명단
▲시 분야 = 김동환 김상용 김안서 김종한 김해강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이찬 임학수 주요한 최남선
▲소설·수필·희곡 분야 = 김동인 김소운 박영호 박태원 송영 유진오 유치진
이광수 이무영 이서구 이석훈 장혁주 정비석 정인택 조용만 채만식 최정희 함대훈 함세덕
▲평론 분야 = 곽종원 김기진 김문집 김용제 박영희 백철 이헌구 정인섭 조연현 최재서 홍효민
◇사회·문화·예술계
▲고황경(일제 국방비지원단체인 '애국금채회'간사,
일제전쟁지원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김활란('애국금채회' 간사,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모윤숙(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 '국민의용대총사령부' 간사)
▲박인덕(일제 전쟁지원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 실천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송금선(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의원)
▲황신덕(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김은호(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채봉납도' 헌납,
'반도총후미술전'의 일본화부 심사위원)
▲심형구('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친일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이사)
▲현제명(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 이사, 전시선전단체인 '경성후생실내악단'이사장)
▲홍난파(친일단체인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친일가요 '정의의 개가' 작곡)
▲이능화('조선총독부 학무국편집과' 편수관,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정만조(경학원 부제학.대제학,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
▲김성수(일제 전쟁지원 조직인 `국민정신 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임전대책협의회의' 위원)
▲방응모(친일잡지 '조광' 창간,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
고사포 구입.기증, 조선항공공업사에 자본출자)
▲장덕수(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연사,
후생부 후생위원, '징병의 감격을 말함' 등 찬일 논설 다수)
▲권상노(친일강연 '선각자로서'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연사)
대부분 사람들은 위 명단을 보면 깜짝 놀란다.
우리 학창시절 교과서에도 나왔던 작품을 쓴 유명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언뜻 떠오르는 것만 해도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광수 흙, 무정' '주요한 불놀이' '홍난파 울밑에선 봉선화'
'현제명 희망의 나라로' 를 비롯하여 김동인, 유치진, 채만식,
정비석, 김상용, 김기석, 모윤숙 , 서정주 등등
모두 우리 학창시절 배운 교과서에 그들이 쓴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교과서에 나온 민족의 아픔을 주옥같은 글로
표현한 작품들을 쓴 문인들이 왜 대거 친일로 변절했을까?
먼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밝힌 친일문학인들이 다룬 글을 분석해 보자!
그 내용은 대체로
① 영미 英美는 귀축 鬼畜이라고 비난하거나, ② 대동아공영권 강조,
③ 생활 풍습 등 일본화 계도, ④ 천황 찬양,
⑤ 일어 사용(국어화) 주장, ⑥ 학병 권유, ⑦ 창씨개명 선전,
⑧ 내선일체 선동, ⑨ 동조동근 同祖同根 수용 등이다.
사실 이들이 변절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민족 최대 저항정신을 보여준 3.1운동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최린은 3.1 운동을 주도했다.
최남선 이광수는 3.1운동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3.1운동이 표면적으로는 실패로 돌아 가자 이들은 큰 낙심을 한다.
그에 발맞춰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이들을 회유한다.
조선지식인들은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세를 빨리 판단했다. 앞 편에서 쓴 최린과 이광수 말에 그 답이 있다.
변절 이후 심지어 최린은 자신이 독립운동한 과거를 후회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루스벨트여! 귀가 있으면 들어 보라.
내가 윌슨의 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역적 노릇을 하였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
이광수와 최남선은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장에서
왜 친일을 했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제가 앞으로 수 백년은 갈 줄 알았다."
그러면서 이광수는 또 말했다.
" 내가 한때 독립을 바라기도 했으나, 독립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하고,
피와 살이 일본인 처럼 되어 조선인들이 받았던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내 책무이며 이렇게 하지않으면 민중에 대한 지식인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일본군에 종군하여 일본군의 전쟁에서 죽어가는 것이야 말로
조선인이 일본인과 차별을 받지 않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징병제도가 선포되자 진심으로 기뻐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했다.
이광수는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장에서도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
자신이야 말로 애국자라는 어이없는 발언을 하다가
같은 반민족행위로 같이 재판을 받던 최린으로 부터
"입 닥쳐" 라는 말까지 듣는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일부와 동남아시아를 점령했다.
나아가 태평양전쟁까지 일으켜 당시에 조선지식인들이 보기에는
일본이 세계를 정복할 만큼 욱일승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강화하고 ‘내선일체’를 부르짖게 만들었다.
한국어를 말살하고 창씨개명까지 시켰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말은 조선지식인들을 혹하게 만들었다.
조선지식인들은 이런 상황이 몇 백년이 갈 줄 알았다.
우리 솔직해져 보자!
여러분들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겠는가?
' 우리 힘으로는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판단된다.
3.1운동이 그것을 증명해 주기도 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
자기들 세대에서는 끝나기 힘든 식민지출신이라는 숙명!
일제는 그들에게 당근을 주면서 회유한다.
작품 활동을 맘 편히 할 수 있는 편안한 삶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분들은 정말 어찌할 것인가?
고민스럽지 않은가?
이런 흐름에 순응할 것 같지 않은가?
솔직히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나도 친일문학인명단에 올라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친일 부역 문제는 본인 또는 後孫(후손)들의 조직적인 반대 와 진보니
보수 또는 左派 右派(좌파 우파)의 이분법적 논리에 떠밀려
본질은 사라지고 주제가 바뀐 채 해방 후 지금까지 미완의 장으로 남아있다.
문학을 하는 나약한 文人(문인)들에게 鬪士的(투사적)인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잣대라는 생각도 들고,
또 많은 분들의 경우에도 强壓(강압)에 의한 불가피한 사정으로
간단한 단평을 연재한 경우도 많았으리라 믿어지고
후일에 반성과 자책의 시간을 보낸 분들도 있다.
결론으로 나는 이문제로 작가들이나 작품을 매도하기 보다는,
문학적 관점과 수준에서 교과서나 학교에서 평등하게 다루어지더라도 ,
친일 문학을 하였다는 사실 자체와 그 이후의 공적을
함께 학생들에게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제 우리 사회도 성숙된 의식과 열린사회의 대처 능력으로
월북 또는 북한작가들의 문학 작품도 禁書(금서)에서 해제하여
한국문학이란 큰 틀에 넣고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정도는 흡수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사이버나 언론에서 每事(매사)를
좌우익의 이데오르기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회의 미숙한 세태를 보면,
아직도 더 긴시간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에 실망감도 찾아 든다.
모두가 고인이 되었고 100여년 전 일을 가지고
지금 친일이니 반일이니 재단을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한데
자꾸 이슈화하는 세력들이 있는데 자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에 자의든 타의든 친일 행적을 했지만
후일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망각한다면 잘못된 처사라 생각한다.'
그럴듯한 논리이다!
나는 왜 일제 말기로 갈수록 친일지식인들이 이토록 많은 가에 처음에는 많이 놀랐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깊이 생각해보니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진짜 놀라운 것은 그런 상황에서 일제에 저항하며 고초를 겪고,
생명을 잃은 지식인들도 상당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태준이나 정지용처럼 절필을 하고 외지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이육사, 김기림, 김사량같이 우회적인 글쓰기로 검렬을 피하며
일제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쓰며 저항한 문인들도 있었다.
김사량 같은 경우에는 우회적으로 글을 쓰다 그마저 여의치 않자 망명을 택했고,
이육사는 망명을 시도하다 잡혀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
윤동주. 송몽규는 일본 유학시절 아예 직접적으로 식민지 청년의 아픔을 시로 쓰고 저항하다
일본 감옥에서 인체실험대상이 되어 젋은 나이에 순국했다.
또 일본에서 독립운동에 나서다가 잡혀 조선인 최초의 대역죄인,
말 안 듣는 조선인 중 가장 말 안 듣는 조선인,
일본 재판 역사상 가장 버릇없는 피고인으로 일본 열도를 들썩이게 한 '박열' 도 있었다.
일제에 저항한 조선지식인들 이 분들을 생각하면 위에 쓴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친일 했을 것 같다' 는 내 생각이 부끄러워 지고
위에 언뜻 그럴듯 주장하는 논리가 전혀 그럴듯 하지 않게 느껴진다.
이 분들을 생각하면 친일부역조선지식인들을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하면 안된다.
독립투사들이 험한 세상을 의기 하나로 고통스럽게
버티다 죽어 갔을 때 그들은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리고 나서도 역사 속에서 까지 명예로워 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우리 민족과 나라가 존속하는 한 그들의 행위는 비난, 지탄 받아야 마땅하다!
친일 부역한 당대 최고의 작가와 지식인들이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에 수많은 고뇌를 했을 것이다.
그들 같은 명석한 지식인들이 그들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을리 없다.
역사 속에 그들의 이름이 오명으로 남을 줄 알면서도 그들은 그 길로 갔다.
일제에 협조함으로써 대가로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 또는 풍요로운 경제적 이득에 혹 했다.
친일부역자들 그들도 가정의 가장으로서 궁핍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만큼은 냉정하게 그들을 평가해야 한다!
정말 더 나쁜 것은 이광수처럼 정말로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일본인들 생활 풍습을 배워서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굳은 신념을 가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조금이나마 남은 양심을 그 명분으로 감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명분을 더 확실하게 하기위해
조선 젋은 청년들을 천황의 자식으로서 일제를 위해 죽음으로 내 몰았다.
학병이나 징용, 일제 위안부 역할을 하라고
앞장 서서 연설을 하고 글을 써서 선동을 하였다!
이광수처럼 아예 확신범이 되어 감동에 차서
연설을 하고 글을 쓰면 양심에 조금이나마 가책을 덜 느꼈을까?
민족과 나라에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을까?
반민특위 재판장 행위로 봐서는 최린같은 부류는
그래도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거 같다.
그러나 이광수 노덕술 부류들은 확신범이었다.
전혀 반성도 안했고 양심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지금도 이런 일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앞 서 말했듯이 우리 학창시절 배우는 교과서에 반성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사과한 적도 없는 친일부역자 작품들이 다수 실려있다.
동인문학상, 춘원문학상, 미당문학상, 채만식 문학제 등
친일작가 이름들의 문학상이 대한민국 가장 명예로운 문학상이 되어있다.
친일 음악가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현재도 애국가로 불리어 지고 있다.
윤해영 조두남 선구자는 표절에 가사내용도
독립운동이 헛되다는 노래인데 민중가곡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현제명의 희망의 나라에서 희망의 나라는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고 만든 만주국을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도 우리나라 최고가곡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일제로 부터 해방 후 이광수는 반민특위에서도
당당하게 자기 친일을 합리화 시켰다. 그리고 곧 바로 풀려났다.
해방 후 거의 대부분 친일 문인이나 지식인들은 전혀 처벌 받지 않았다.
아니 일제강점기 시절 못지 않게 지식인으로 존경받고 교과서에도 작품이 실린다
이 처럼 친일 조선지식인들 청산에 실패한 것은 우리 역사의 큰 잘못이다.
그래서 이들이 행방 후에도 승승장구하는 우리 역사가 비틀려지는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는 프랑스 드골 정부가 나치에 협조한 인물을
철저히 조사하고 처벌한 것을 역사적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이광수처럼 친일지식인들 해방이후 행적과 변명은 참으로 뻔뻔했다.
이광수는 6.25때 납북되었다.
그러나 이광수 부류의 나머지들은 해방 이후 이승만 독재 정권,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독재정권에도 협조하며 자신의 문학적 명성을 이어 갔다.
일제말기 그 당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 상 일제에 조금 협력한 것은
인간의 모습으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 해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광수 부류 그들의 행적을 보면
사실 그들은 지식인 탈을 쓴 타고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에 불과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친일 조선지식인들!
그들은 우리 역사 속 교훈을 위해서라도 냉정하게 평가하여 거세게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첫 번째 사진 최남선 이광수
세 번째 사진
뒷 줄 맨 오른 쪽 윤동주
앞 줄 중앙 송몽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