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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4)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설 교 >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누림
시 23:1-2 / 이동아목사
인생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두 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실존주의 작가인 알베르 까뮈가 그린 시지프스 신화라는 그림입니다. 시지프스 신화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시지프스는 제우스신의 저주를 받아 그의 평생 정상을 향해 큰 돌덩이를 굴려 올려야만 했습니다.
이 돌을 힘들게 굴려 올리면 금방 밑으로 굴러 내려가 버리고 또 다시 올리면 금방 아래로 굴러 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스는 계속해서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알베르 까뮈는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여기엔 쉼도 없고 목적도 없고 보람과 완성도 없습니다. 끝없는 좌절과 고통만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열반경에서 말하기를 인생이라는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은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백팔번뇌의 무거운 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고해바다에서 떠서 생존한다고 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표현하는 정반대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시편 23편에 나타난 풍경입니다. 앞에는 광활한 푸른 초장이 있습니다. 옆으로는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실컷 풀을 뜯어먹은 양들이 배가 불러 옹기종기 모여 앉아 편히 쉬고 있는 목가적인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성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23편은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른 모든 시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입니다. 3천여 년을 두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함께 이 시편을 애송해 왔습니다. 불과 몇 줄밖에 안 되는 이 시편이, 인간에게 준 위로와 소망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비록 3천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외로운 사람들, 위태한 중에 있는 사람들, 병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이 시편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끼쳐 줍니다.
마이어(F.B. Meyer)라는 분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시 23편은 사막의 오아시스이며, 험한 등산길에 있는 휴게소이고, 타는 듯한 한낮의 시원한 동굴이며, 고요하고 신성한 묵상을 할 수 있는 정자이다. 시 23편은 성경의 성전 가운데서 가장 거룩한 곳 지성소이다. 곤비하고 쉼이 없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의 평온한 안식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준곤 목사는 시편 23편에 대하여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주기도문처럼 외우는 영혼의 시, 만인의 시, 영원한 시중의 시'라고 하면서 '결혼식 때, 장례식 같은 때, 언제 어디서 하루 100번 되새겨도, 밤에는 달 같은 시, 낮에는 태양 같은 시, 내 인생은 그의 푸른 목장의 목가, 한 폭의 그림같이 마음의 화판에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출판 협회가 주는 기독교 작가 금상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상을 두 번이나 받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라고 하는 분인데, 그 분이 쓴 책 가운데 [Traveling Light]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가벼운 여행이라고 번역할까요. 가벼운 여행길이란 뜻입니다. 이 책은 시편 23편을 들고 떠나는 영혼의 순례라고 하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이 책 내용 중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하나님 없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시편 23편을 이렇게 읽을 것이라고 나름의 현대인 version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현대인이 읽는 시편 23편은 이러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나의 목자는 나 자신이니 언제나 부족하리로다. 내가 이 백화점에서 저 쇼핑센터로. 이 병원에서 저 요양원으로 안식을 찾아 헤매고 다니나.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하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기어다니며 안절부절하는도다. 구충제에서부터 전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두려워하며 어머니의 치마 고리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하리로다. 매주 열리는 직원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적들이 나를 둘러 쌀 것이며, 집에 돌아간다 해도 하찮은 금붕어 까지 찌푸린 얼굴로 맞을 것이다. 내가 강력 진통제로 두통에 찌든 머리에 기름을 부었으니, 독한 술이 내 잔에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정녕 고통과 불행이 나를 따르리니 죽는 날까지 신에 대한 회의 속에서 영원히 거하리로다.]
오늘부터 시편 23편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시편 23편은 5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단계/2절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단계 -초등학교
2단계/3절 의의 길의 단계-중학교
3단계/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단계-고등학교
4단계/5절 전장의 단계 -대학교
5단계/6절 평생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단계-대학원
1)여호와는 나의 목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목자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말씀합니다. 신약에 와서 그 목자가 성육신 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살아 계신 우리의 목자장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10: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 을 버리노라(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 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삼위 일체되신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고 구속을 위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완결된 영으로 우리의 목자로 갖추시고 적합하게 부활 안에서 생명을 주는 영으로 우리의 내적인 목자이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함께 거하실 뿐 아니라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이 양이요 그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인 것입니다.
미국의 소설가운데 모리스웨스트라는 사람이 쓴 "악마의 옹호자"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을 보면 한 신부가 한창 일할 나이에 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 불치의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이제 생명이 수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병원에서 나온 이 신부는 공원을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지저귀는 아름다운 새소리, 아름다운 꽃들, 장난하는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벤치에 앉아서 속삭이는 연인들, 지팡이를 짚고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노인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 신부에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이제 몇 달 후면 죽을 것인데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러면서 갑자기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때이 신부는 시편23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 생명은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라며 기도하는 순간에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이 시편 23편이 그 경상도, 전라도, 또 평양 방언으로, 사투리로 크리스챤 인터넷 싸이트에서 모은 글입니다.
경상도 버전으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님이 내 목자라 카니 내사 마 답답할 끼 눈꼽만큼치도 없는 기라"
전라도 방언으로는요. "앗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 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것냐?"
피양, 피양 버전으로는 "아 여호와가 내 목잔데 뭐이가 부족 하간, 그저 시퍼런 풀밭에 쉬라딜 않나 목마르면 그저 물가로 데려가딜 않나 야, 뭐이가 부족 하간?"
오늘 성경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는 말로 시작되는 다윗의 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목자가 아닙니다. 나의 목자. 창조주 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십니다. 나는 그의 양이요. 나는 그의 어린양이고 나는 그의 목자라고, 아주 간결하게 선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저자인 다윗은 본래가 목동출신입니다. 그 자신이 목자였습니다. 목자로 있으면서 양들이 어떻게 사는 가를 잘 알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영어 번역이 더 맘에 듭니다. I shall not want.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바랄 것이 없는 바로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바라는 것이 많은지. 기도만 하면 끝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소원이 많습니까? 저는 소원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저는 소원이 없습니다. I want nothing.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바로 그것이 신앙고백입니다.
2)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푸른 초장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문이며 목자이이며 초장이십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초장이며 우리의 자양분이며 그분이 모든 양들을 먹이는 안식의 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 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양들을 위한 떡은 푸른 초장이며 푸른 초장도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후 우리의 영양공급을 위하여 푸른 초장으로 우리안에 자라고 계십니다.
아기가 태어난 후 아기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젖을 주며 양육합니다. 누림의 초기 단계에서는 어린양들은 푸른 초장이신 그리스도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젖먹이들은 식사예절을 모릅니다. 모든 어린양들은 예절을 생각지 않고 다만 푸른 초장에서 먹으려고 눕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푸른 초장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고 눕게 하십니다. 초장에 누워 풀을 먹는 양들은 바른 식사 예절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머니 가슴에서 젖먹는 어린이와 같습니다.
필립 켈러(Phillip Keller)는 목사이며 작가입니다. 그는 목사와 작가가 되기 전에 호주에서 8년간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는 「목자가 바라본 시편 23편」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하기를 양은 초장에 잘 눕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양이 누울 수 있는 때는, 첫째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위험이 없다고 느껴야 하며, 둘째는 양들 사이에 다툼이나 싸움이 없어야 하며, 셋째는 파리나 기생충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넷째는 충분하게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이 다 만족되어야만 양들은 초장에 눕게 된다고 합니다.
3)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는 그 영입니다. 그 영은 생수이며 그리스도는 푸른 초장이십니다. (요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 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것은 그 영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그 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 못박힘과 부활을 통하여 완결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영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 는 영이 되었나니"
랠프바톤은 미국에서 가장 성공했던 만화가였습니다. 엄청난 돈, 명예, 인기도 가졌습니다. ⇒ 세계 도처의 명승지에 별장을 마련+그곳마다 현지처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60회생일(회갑)날 친구들에게 고백 : "난 60년 동안 살면서 내 마음의 피로가 하루도 풀린 적이 없었다. 내 인생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고 했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젊은 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호색함과 방탕함이 그의 모든 쾌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 위대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의 참회록에서 고백합니다.
"오 주여! 내가 당신의 품안에서 쉴 때까지는 나에게 진정한 안식이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품에서야 비로소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주님께 엎딘 내 영혼.. 그는 여호와를 그의 목자로 삼았을 때 이런 참된 풍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굶주리고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심리학자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속에 들어간 후에 각자가 손에 쥐고 있을 빵을 한 조각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 있도록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서 평안히 잠들었던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만 했던 이 아이들이 내일 염려를 해결 받았을 때 비로소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전쟁 고아들만의 심리 상태이겠습니까?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가진 사람 중에도 자식들 대에 먹을 것까지 염려하느라 평안히 자리에 눕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함을 느끼기 오래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에 대해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급을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묘사했습니다. 푸른 초장에 누워 있는 겁니다. 왜요? 배가 이미 너무 부르기 때문에 앞에 푸른 초장이 있어도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속이 꽉 찼어요. 포만감으로 이제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그 음식 위에 쭉 누워있는 양의 모습!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당신의 필요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쉬지 못하고 힘들어하며,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이유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내 자식의 학비를 대는 것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아파트를 유지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자가용을 유지하는 것이고, 능력이 있어서 내 사업을 유지하는 거예요. 삶의 모든 짐을 나 자신이 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왕궁에 음식과 재물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들 압살롬이 반역해서 광야에 쫓겨나가 누군가가 음식을 갖다주지 않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쌀 한 톨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내 목숨을 위해 양식을 공급한 것이 아니구나! 내가 내 가족, 내 부하들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니로구나!" "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습니다. 당신이 나를 지금까지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여러분의 저의 고백이 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교회(성도)로 세워야 합니까
시 23:1-2 / 지태일목사
성경은 교회에 대해 말씀할 때 끊임없이 세우고 건축한다는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베드로와의 대화를 보더라도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합니다.
엡2:20 이하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랬고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4:12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교회가 완성된 것으로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건물같이 지어져간다든가, 아니면 몸처럼 날마다 자라가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다 부르심을 받아 성도, 교회가 된 무리들인데 어떤 자세로, 어떤 태도로, 어떤 관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야 하는가? 어떤 교회로 세워 나갈 것인가? 어떤 분위기의 교회로 세워 나가야 할 것인가? 또한 우리는 교회와 성도를 어떻게 세워 나갈 것인가? 우리는 그 한 모델을 시편 23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시편 23편은 다른 모든 시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입니다. 성경 말씀중에서 가장 널리 애송되고 있는 말씀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좋은 목자되심을 찬양하고 감격하는 시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귀한 노래입니다. 이 말씀을 노래한 시인 다윗도 그렇고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이 3000여년 동안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고 계시며 인도해 오셨는지를 마음 깊이 되새길 수 있는 그런 시입니다.
불과 몇 줄밖에 안 되는 이 시편이, 인간에게 준 위로와 소망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비록 3천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외로운 사람들, 위태한 중에 있는 사람들, 병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이 시편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끼쳐 줍니다.
마이어(F.B. Meyer)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시 23편은 사막의 오아시스이며, 험한 등산길에 있는 휴게소이고, 타는 듯한 한낮의 시원한 동굴이며, 고요하고 신성한 묵상을 할 수 있는 정자이다. 시 23편은 성경의 성전 가운데서 가장 거룩한 곳 지성소이다. 곤비하고 쉼이 없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의 평온한 안식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묵상하면 상당히 목가적이며 평온합니다. 푸른 목장의 목가, 한 폭의 그림같이 마음의 화판에 펼쳐집니다. 목자가 앞에 서가고 뒤에는 양들이 뒤따르고 거기에는 광할한 푸른 초장이 있고 옆에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 갑니다. 실컷 풀을 뜯어 먹은 양들이 배가 불러 옹기종기 모여 앉아 편히 쉬고 있는 목가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23편의 분위기는 꼭 목가적인 풍경과 평화롭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3-4절을 보면전투하는 분위기도 보여집니다. 언제 사나운 맹수의 치명적인 공격을 당할는지 모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서 있는 양들을 보여 줍니다. 양들을 넘어뜨리려는 원수의 궤계가 있고 그들은 죽음의 그림자로 덮여 있는 골짜기에 서 있는 양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시편 23편의 분위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외적 환경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 나가면서 평화를 만들고 지키고 세워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니면 삶의 어떤 외적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마치 돈이나 집이나 옷이나 음식 아니면 명예나 인기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관계속에 서 있느냐? 그리고 어떤 존재로 서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그러한 평화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 있고, 내가 하나님앞에 바로 서있을 때, 죄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을 때 이루어지는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은 꼭 목가적인 분위기속에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속에서 그리고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어떤 교회,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1. 먼저 목자이신 주님이 드러나는 교회입니다.
시인이 가장 먼저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심니다” 그의 신앙고백속에 가장, 먼저 크게 드러내는 것, 가장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핵심 단어는 이 시편의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영어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주어를 보면 He, He, He, He입니다.
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 me beside quiet waters.
He restores my soul.
He guide me in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계속 He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계속 I, I, I가 나옵니다.
Even though I walk.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comfort me,
table before me,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all the days of my life,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내가 주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체입니다. 그 모든 결정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뱡향을 결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니다. 서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니다. 앉게 하는 분도 일으켜 세우는 분도 하나님이심니다. 찢기도 하시고 싸매시기도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심니다.
사람들은 다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 생각이 주관이 되고 그런 생각들이 모아져서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해 살아 갑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설계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면서 교회도 자신의 생각이나 인생간을 따라 이러이러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는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요10:14절 말씀처럼 나는 선한 목자라,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이 앞장서 가시고 우리는 양으로 그 뒤를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누구보다도 목자이신 주님이 크게 드러나는 교회로 만들며 섬길 수 있기를 바람니다. 사람이, 세상의 그 무엇이 드러나는 것은 참 교회가 아님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목자이심이 고백되어지기를 바람니다. 내가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 목자가 되시는 주님만이 드러나기를 바람니다. (찬 204장,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주님이 크게 보이는 교회, 세상과 나는 점점 더 작게 보이는 것이 믿음이요 참 신앙이요 교회입니다.
2. 다음의 교회는 목자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로서의 교회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싸워 이겨야 사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즉 사자나 늑대는 싸워 이겨야 사는 동물들입니다. 또한 소나 나귀처럼 열심히 일해야 살아갈 수 있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이라고 하는 동물은 목자와 함께 거닐면서 즐기며 사는 동물입니다. 매일 매일 먹고 마시면서 새끼도 내고 우유도 내고 털도 내는 그런 동물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처럼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을 직장이나 가정을 심지어 신앙생활, 교회생활까지도 그 곳을 사자나 늑대처럼 싸움터로 생각하고 싸움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도 전쟁처럼 다른 사람 긁어 내려야 잘 되는 줄 압니다. 운전을 한번 하더라도 전쟁터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한편, 세상을 일터로 알고 목적도 재미도 없이 소처럼 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없이 탐욕을 부풀리며 그저 모으기 바쁘고 쓸줄 모르는 이기심으로 채워가는 것이 인생살이인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이라는 동물은 싸워서 이겨야 사는 사자나 늑대같은 동물이 아닙니다. 싸움도 못하고 싸움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동물입니다. 소처럼 멍에 매고 쟁기 짊어지고 일터로 나갈 수도 없는 동물입니다. 약하고 약한 동물이 양입니다. 자기를 보호할만한 무기 하나 없습니다.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발톱도 없습니다. 맹수처럼 힘차게 달리지도 못합니다. 독사처럼 독도 없습니다. 소처럼 남을 들이받을 수 있는 뿔도 없습니다. 말처럼 뒷발질할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등도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삼거나 해치려하지 않습니다. 만약 양이 들이받고 산다면 그건 염소지 양이 아님니다. 양은 오직 푸른 초장에서 사는 신비한 동물입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싸움 잘하는 이리 떼도 있었고 일 잘하는 소 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컬어 싸움 잘하는 사자나 이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 잘하는 소나 나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시 95편에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컬어 “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한 마리 양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일까요?
첫째로, 양은 매우 약한 동물입니다.
조금만 비탈지고 험한 길에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하고 도무지 제 몸도 보호할 줄 모르는 놈이 양입니다. 또 겁이 많습니다. 물소리만 나더라도 놀라서 뒤로 나자빠집니다. 한없이 한없이 도망가다가 뒤로 벌렁 나자빠져서 네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경끼를 일으키는 동물이 양이라는 동물입니다.
지독한 근시안이어서 불과 몇 미터도 보지 못하는 그런 동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지어서 삽니다. 떼를 지어 붙어 다님으로 짧은 거리에서도 옆의 양을 보며 무리지어 삽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돌봄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양입니다. 양은 털이 계속 자라나기 때문에 누군가 털을 깍아 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안 깍아 주면 지전분해 지고 더워서 견딜 수 없는 그런 양입니다.
둘째로, 매우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기가 늘 먹는 풀인데 이게 먹을 수 있는 목초인지, 못 먹는 독초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매일 다니는 길인데 안내해 주지 않으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개는 십리 백리 길도 찾아옵니다. 소도 말도 자기 집을 찾아 온답니다. 벌이란 놈은 눈을 떼어내도 자기 집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양은 모퉁이만 돌려놓으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이러한 미련한 동물이 험한 팔레스타인 산 중턱에서 살아 간다는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산은 험하지요 계곡의 물은 급류지요. 그뿐입니까? 사자 늑대 곰과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적잖이 살고 있었습니다. 산에는 온통 가시덤불이었고 뜯어 먹을 풀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쯤 되었으니 그 양을 돌보고 인도해 줄 목자가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양을 돌보는 목자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우선, 길도 모르고 어디에 좋은 풀이 있는지 모르는 양들을 안전한 길로 인도해서 좋은 목초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먹어도 된다. 이것은 먹어선 안된다. 독초와 목초를 구별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양들이 너무 가파른 곳이나 돌이 많아서 못 가는 곳이 있으면 엉덩이를 떠밀어 주기도 하고 정히 약하거나 어린양이 있으면 품에 안아서 험한 길을 건너 주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가시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릴 때는 품에 안고 따스한 우리안에 눕혀주는 일이 목자의 일이었습니다. 사나운 이리떼나 도적떼가 나타나면 생명을 걸고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 줍니다.
세상 살다보면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인 지혜가 얼마나 부족한지 미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많은데 진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지식이 모자랍니다. 경험도 모자랍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모자라는게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주는 좋은데 재정이 부족해서 일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갖추었는데 건강이 부족해서 애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나는 부족함없이 모든 것이 충족하다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개인을 보나 가정을 보나 교회를 보아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목자를 가지고 있는 양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의 목자는 강하시다는 것입니다. 나는 미련하지만 우리의 목자는 지혜로우시다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부족함 투성이지만 우리 목자는 풍요하신 부자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과 노래와 선언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풍성한 축복의 노래입니까?
지금까지 부족함 때문에 울며 불며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내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심한 난관에 부딪친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누구에게 얼굴조차 보여주기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며 살아가다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 시간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는 능력이 되지만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미련한 말이 될 것입니다.
■ 찬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우리의 가늘 길이 멀고 험해도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인생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의 작정과 손길 아래 있는 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양으로 산다는 것은 그 분의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멋대로 내 기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인도를 따라, 음성을 따라 사는 것을 말씀하심니다. 요10: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귀한 양들의 교회, 성도가 다 되시기 바람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삽니다. 얻습니다. 무엇을 얻습니까? 2절에 나오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입니다. 그래서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으로서의 교회입니다.
3.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자가 예비하고 양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푸른 초장 맑은 물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다시 말하면 양들이, 우리 성도가 힘으로 애써서 이루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아시고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푸른 꼴, 하늘의 양식이십니다. 그는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흘러남니다. 주님안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고 거기에는 참으로 풍성함이 있습니다.
필립 켈러(Phillip Keller)는 목사이며 작가입니다. 그는 목사와 작가가 되기 전에 호주에서 8년 간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는 “목자가 바라본 시편 23편”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하기를 양은 초장에 잘 눕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양이 누울 수 있는 때는, 첫째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위험이 없다고 느껴야 할 때라 합니다. 둘째는 양들 사이에 다툼이나 싸움이 없어야 한답니다.
셋째는 쇠파리나 기생충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야 양은 눕는다 합니다. 넷째는 특별히 충분하게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만 된다고 합니다. 꼴을 먹고 배부름이 있을 때 양은 비로소 잔디에 누어 평화롭게 쉴 수가 있습니다.
배고픈 양은 눕지를 못합니다. 영혼에 굶주림이 채워지지 않는 사람, 그 갈증이 해갈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양은 이리저리 헤매고 뛰어다닙니다. 쉴 수가 없습니다. 신령한 양식에 배부르고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안식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이 다 만족되어야만 양들은 초장에 눕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양은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면 초장에 누울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부에서 다툼이나 분쟁이 있어 가정에서 부부가 부자지간에 형제지간에 성도지간에 불화하면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심령 속에서 죄와 정욕과 시기와 질투와 염려와 근심이 쌓일 때 안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곤한 양, 고달픈 양, 쇠파리떼에 시달리는 양은 눕지 못하고 놀지 못합니다. 길 잃은 양은 결코 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부요하신 주인되시는 그분을 아버지로,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풍요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신령한 고백은 바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인생입니다. 기쁘게 뛰놉니다. 즐겁습니다. 재미있게 뛰놉니다.
양들이 맛있게 먹고 마시며 재미있게 놀면 목자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재미있게 놀면 목사는 행복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수고하며 위로하며 격려하며 힘을 다하여 섬기는 모습들 보면 목회자는 너무 기쁨니다. 우리가 신앙안에서 신앙생활가운데 행복하게 놀면 잔치하며 살아가면 우리 하나님, 우리 주님, 얼마나 행복해 하고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교회요 성도의 귀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쉬지 못하고 힘들어 하며, 염려근심하며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이유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내 자식의 학비를 대는 것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아파트를 유지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자가용을 유지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사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짐을 나 자신이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렵고 근심이 쌓이고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아픔을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왕궁에 음식과 재물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들 압살롬이 반역해서 광야에 쫓겨나가 누군가가 음식을 갖다주지 않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쌀 한 톨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내 목숨을 위해 양식을 공급한 것이 아니구나! 내가 내 가족, 내 부하들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니로구나!" "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습니다. 당신이 나를 지금까지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런 고백, 이런 삶의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양이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것 아님니다. 그저 우리는 그 분의 음성을 따라 순종하며 나갈 때 하나님의 풍요함을 누리며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이 메마른 중동 팔레스타인 땅에서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복인지 모름니다.
오늘 다윗은 우리 앞에,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푸른 초장 맑은 물가가 우리 앞에 있음을 노래하며 고백합니다. 좋은 교회는 따로 우리가 어떻게 만드느냐가 아님니다. 원래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푸른 초장 맑은 물가로서의 교회, 목자되신 주님이 성도들에게, 양들에게 베푸신 좋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삶의 분주함과 피곤함과 수많은 아픔과 지친 영혼들이 이 곳에 나와서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으며 새힘을 얻으며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시는 목자 주님을 새롭게 예배하고 경험하고 나누며 돌아가는 그런 귀한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아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 23:1-3 / 지태일목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옛날 영어 성경에 보면,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라고 하였지만, 요즘 새로운 영어 성경에 보면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everything I need 라고 하였습니다. 직역을 하면 '주께서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즉,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은 나의 필요한대로 채워 주시는 분이란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이 하나님이요, 그런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는 한 폭의 그림에서 보는 그런 낭만적인 관계만 아니라 생사(生死)를 함께 하는 생존(生存)의 관계입니다. 즉 양은 목자가 없으면 죽습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초장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어느 순간 맹수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을 때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갑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갑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과의 관계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목자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그렇게 비유하였습니다.
여름에 한참 더울 때에 이스라엘은 그 들판이 전부다 노랗다고 합니다. 전부 풀이 말라서 푸른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짝 마른 풀만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산이 전부 오선지를 그려놓은 것처럼 줄이 쫙 그려져 있습니다. 이 줄은 목자가 양을 붙들고 가자하고 앞서면, 양이 한 마리, 한 마리 한 줄로 그 뒤를 뒤따라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꼭 한 줄로. 그러니까 한번만 지나가면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대로 그 발자국만을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어느 짐승처럼 목을 맨 것도 아니고 코를 깨 가는 것도 아니고 다리를 묶어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목자가 가는 대로 줄을 서서 쭉 따라가는 그 양들을 볼 때에 너무 그 목자가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의 목사는 엡4:11의 양을 돌보는 목자와 가르치는 교사가 합쳐진 말입니다. 목사도 목자의 직무를 감당하는데 교회는 양들의 우리이고 성도는 야들인데 우리 교인들이 다 양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다른 길로 잘 가지 않습니다. 좋은 양, 착한 양은 목자만 의지하고 목자만 따라갑니다.
또 그뿐 아니라 양들은 서로 사이가 좋습니다. 들판에 흩어져 풀을 뜯을 때에도 양들이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쫙 퍼져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서 풀을 뜯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했더니? 양은 착해서 여기에 좋은 풀이 있을 때에도 다른 양이 있으면, 자신도 먹겠다고 가서 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풀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래도 어떤 곳이 좋기도 하고 양이 많기도 하겠는데도. 다 퍼져서 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양은 착하고 좋은데 엄밀히 말하면 사실 양은 좀 어리석습니다. 좀 미련하기도 하고 무방비 상태입니다. 약합니다.
그러나 목자와 함께 있기 때문에 어느 짐승보다도 평안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도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심니다. 양들은 먹을 만큼 먹은 후에 푸른 초장에 눕습니다. 누워서 되새김질을 합니다. 되새김질을 하면서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만족한 것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자가 다 알아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먹어야 할 지, 어느 때에 먹어야 할지 어떻게 먹어야 할지. 다 목자가 알고 있습니다. 선한 길로 인도하고. 여기에 풀 다 없어지면, 어디론가 인도해줄 것을 다 알고 있고, 다 믿고 있습니다. 모든 필요와 충족이 목자로부터 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심합니다.
또 한 가지는 목자가 선한 길로 인도합니다. 그 인도한다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도 알게 해주십시오. 깨닫게 해주십시오. 주십시오. 그 기도가 많지만, 대체로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십시오. 주세요. 주십시오. 하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돈만 주십시오. 사업은 제가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있고, 건강만 주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 중에 가장 좋은 기도가 찬442장처럼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합소서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합소서“ “인도해 주십시오” 이것은 나의 선택과 판단 능력을 반납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판단을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따라서 가겠으니 인도만 해주십시오. 목자는 양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양에게 무슨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목자가 먼저 가면, 양이 따를 뿐입니다. 인도하십니다. 목적지도 그가 알고 목표도 그가 알고 방향도 그가 알고 마지막 종착지점도 목자가 알고 인도할 뿐입니다. 저들은 묵묵히 목자를 따를 뿐입니다. 그 때 푸른 초장 맑은 물가로 인도해 주심니다.
이런 관계를 깊이 볼 때 교회와 성도는 그 무엇보다도 목자되신 주님이 크게 드러내는 교회가 되야 합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는 이 고백을 할 수 있음이 참 교회 성도입니다.
다음으로는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따르는 양들로서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진정 양입니다. 양같이 살 수 밖에 없고 목자없이 못사는, 주님없이 나는 못삽니다. 이 고백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찬송가 415 주없이 살 수 없네...)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은 푸른 초장에 뉘여지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따라서 좋은 교회 참 교회 즉 푸른초장 맑은 물가는 양들이,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만드냐, 꾸미느냐가 아님니다. 그저 목자가, 우리 주 예수님이 예비해 놓으신 그 길을 따라 순종하며 나갈 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생활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목양을 잘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예수님이신데오늘날 자기가 목자인양, 양도 주님의 양인데 자기양인양 다루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양들은 인도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모습이 바로 주님의 집, 교회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목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의에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입니다.
1. 내 영혼을 소생시키심니다.
양들이 목자되신 주님을 잘 따르다가도 세상에서 때가 묻기도 하고 더러워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실족하여 넘어지기도 합니다. 아예 일어나지도 회복하지도 못하고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도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런 일들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도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연약한 양들입니다.
여러분! 이 때 부르는 노래가 바로 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영혼을 다시 소생시키는 목자로, 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로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시골에서 보면 소는 뒤에서 몰아가며 으랴으랴 하며 쟁기질도 하고 달구지를 몰고 갑니다. 말도 뒤에서 고삐를 잡고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양은 뒤에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앞에서 인도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짐승입니다. 시력도 안 좋을 뿐 아니라 방향 감각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조금만 방심하면 각기 제 길로 갑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양은 넘어지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살찐 양이나, 새끼를 밴 암양은 가장 넘어지기가 쉽다고 합니다. 몸집이 무겁거나 살찐 양은 편안하게 눕기를 좋아하는데,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져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는 경우, 제힘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나자빠진 양은 발로 허공을 치면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몸부림쳐 보지만, 그럴수록 사정은 더욱 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이 누워서 바둥거리고 있는 동안, 위에 가스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 가스가 확산되면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사지를 마비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무더운 여름 날씨의 경우, 넘어진 양은 서너 시간 지나면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넘어진 양은 매, 독수리, 들개, 늑대에게 가장 잡아먹히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눈에도 뜨지 않는 곳에서, 홀로 넘어져 발버둥치는 양은, 미칠 듯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의 양치기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양들의 수를 세어 봅니다.(오늘의 목회자도 성도들의 일군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불러보며 찾아야 목자입니다) 그러다가 없어진 양을 발견하게 되면, 지체 없이 찾아 나섭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는 것이 목자입니다. 여러 시간을 찾아 헤메이다가 멀리서 넘어져 발버둥치고 있는 양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갑니다.
왜냐하면 방금 말씀을 드린 것처럼 뒤로 넘어진 양은 1분 1초가 양의 목숨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뒤로 넘어져 배에는 바둥바둥 거리는 동안 배에 가스가 차오르지요. 숨이 차지요. 혈액순환이 안되지요. 그냥 두면 사지가 마비되지요. 더구나 무더운 여름 날씨에 넘어진 양은 서너 시간만 지나도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넘어진 양은 매, 독수리, 들개, 늑대에게 가장 잡아먹히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빨리 달려가 넘어진 양을 일으켜 세우고, 다리를 문질러 혈액순환을 회복시켜 주면, 양은 다시 일어나 정확하게 걷습니다. 마침내 넘어진 양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양떼 가운데로 뛰어가 두 번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심방 가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양이 뒤집힐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양은 우묵하게 파인 곳에 눕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둥그렇고 우묵하게 파인 적당히 편안한 땅을 택하여 눕다가 잘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양의 몸에 난 털 때문이라고 합니다. 털이 길면 진흙과 똥이 가시돋힌 풀이나 가지에 들러 붙게 되면 걸려 쉽게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살이 너무 쪄서 뚱뚱한 양이 잘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잘 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이 잘 넘어지지 않도록, 움푹 파인 웅덩이는 메워주고, 수시로 양의 털을 깎아주고, 양이 너무 뚱뚱해지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있는 ‘소생시키신다’는 단어의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소생시킨다는 말은 먼저 '뒤집힌 양을 일으켜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뒤집힌 양은 혼자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일단 뒤집히게 되면, 공포에 사로잡혀서 네 발을 미친 듯이 버둥거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버둥거리면 거릴수록 사태는 더 어려워집니다. 이렇게 버둥거리는 동안 그 양의 '혹위'(되새김질하는 동물의 첫 번째 위) 속에는 가스가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가스가 차면 몸의 끝 부분, 특히 사지 부분에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다가 결국은 숨이 멎어버리고 맙니다.
만일 날씨가 매우 덥고 햇빛이 내리쪼일 때면 뒤집힌 양은 수 시간 내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목자는 뒤집힌 양이 없는지 수시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뒤집힌 양이 있으면 재빨리 가서 일으켜줘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소생케 된다는 것은 새롭게 되며 변화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롬12:2 말씀처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소생케 된다는 것은 우리 심령의 주도적인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 양을 먹이고 마시우며 보호하시면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회복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피곤한 것도 압니다. 햇볕에 지치는 것도 알고 배고픈 것도 알고, 때때로 쓰러질 때고 있고, 목마른 것도 목자가 알고 있습니다. 양이 물이 있는 곳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답답하고 괴롭지만 그냥 기다립니다. 그러면, 목자가 알아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그 영혼을 소생케 합니다. 시원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할 일이 무엇입니까? 양의 입장에서는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의 선하심도 알고 그의 사랑도 알고 지혜도 알고 나아가서는 운명을 맡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목자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립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기를 잃어버린 인간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생기를 불어넣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요10:10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가 오셔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바로 생명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너무나 힘든 일을 하고 지치거나 더위나 추위에 고생하면 기운을 잃고 마음이 완전히 퇴락해 집니다. 그때 충분한 영양분과 휴식을 취하면 소생합니다.
오늘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한 우리들을 소생시켜 주시는 역사를 하심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심니다. 성령을 보내사 기도하게 하므로 소생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셔서 세속에 찌들고 죄악에 빠진 우리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시므로 우리의 영과 마음을 소생시켜 주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 일어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마음을 고치시고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생명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때문에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영양실조가 걸리고 더 악화가 되지요. 이러므로 말씀의 떡을 먹어야 우리가 소생하게 됩니다.
요6:35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인데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생명의 떡을 먹으므로 우리가 주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했는데 우리 영혼이 사는 떡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살면서 지치고 피곤한 우리의 심신을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소생케 해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다시 용기와 힘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찬송가 442장,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여!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시 23:1-3 / 지태일목사
가장 휼륭한 교회는 주님을 목자로 고백하며 주님만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가장 휼륭한 성도는 양들의 성향을 잘 깨닫고 목자가 되시는 주님만을 따름으로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함을 받는 양입니다.
이러한 시편의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서 목사의 사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교회와 성도들을 목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교인들의 성향을 양들의 성향을 통해 깊이 깨달으며 바르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늘 주님만을 따르도록 인도하는 목자의 사명말입니다.
오랫 동안 산이나 들길을 걷다보니 지치기도 하고 목이 마르기도 하고 배가 고픈 양들에게 좋은 꼴과 물을 마시우게 하고 휴식하게 하여, 힘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하고 길 잃고 방황하는 양들, 지친 양들까지도, 그 한 마리의 양도 찾아서 꼴과 물을 주어 힘을 회복시키는 것이 목자의 사명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의 ‘소생시키신다’는 말은 먼저 '뒤집힌 양을 일으켜준다'는 의미가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목자를 따르던 중 양들이 종종 넘어지는 일들이 생기는데, 살이 쪄 몸집이 무겁거나 새끼를 벤 암양은 눕기를 좋아하는데 우묵하게 파인 곳에 눕기를 좋아 합니다. 그렇게 둥그렇고 우묵하게 파여 눕기에 편안한 땅을 택하여 누우려다가 잘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경우는 양의 몸에 난 털 때문이라고 합니다. 털이 길면 진흙과 똥이 가시돋힌 풀이나 가지에 들러 붙게 되면 걸려서 쉽게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뚱뚱한 양이 걸려 넘어지게 되면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 짧은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므로 제힘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자빠진 양은 발로 허공을 치면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몸부림쳐 보지만, 그럴수록 사정은 더욱 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이 누워서 바둥거리고 있는 동안, 위에 가스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 가스가 확산되면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사지를 마비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무더운 여름 날씨의 경우, 넘어진 양은 서너 시간 지나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넘어진 양은 매, 독수리, 들개, 늑대에게 가장 잡아먹히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눈에도 뜨지 않는 곳에서, 홀로 넘어져 발버둥치는 양은, 미칠 듯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의 양치기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양들의 수를 세어 봅니다. 그러다가 없어진 양을 발견하게 되면, 지체 없이 찾아 나섭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는 것이 목자입니다. 여러 시간을 찾아 헤메이다가 멀리서 넘어져 발버둥치고 있는 양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갑니다.
왜냐하면 뒤로 넘어진 양은 1분 1초가 그 양의 목숨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빨리 달려가 넘어진 양을 일으켜 세우고, 다리를 문질러 혈액순환을 회복시켜 주면, 양은 다시 일어나 정확하게 걷습니다. 마침내 넘어진 양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양떼 가운데로 다시 뛰어가 두 번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을 `소생하다'(슈브)는 말은 `되돌아오게 한다', 또는 "회복시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길을 잃은 양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고, 지친 양에게 새 힘을 회복시켜 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영혼들을 옳은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여정 속에서 지치고 낙심한 영혼들에게 말씀의 꼴과 성령의 생수를 마시게 하여, 그 영혼들이 힘을 회복할 수 있게 하심니다. 선한 목자는 길을 잃고 방황하던 양들을 찾아 힘을 회복시켜 주신 후에,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심니다.
1. 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심니다.
오늘 본문 3절 하반절에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 자기의 양들을 의의 길로,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 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인도한다"는 말은 이 모든 일이, 양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심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의의 길'은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올바른 길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심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길을 헤메는 영혼들을 찾아 힘을 회복시켜 주시며, 그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해 주심니다. 목자는 양들이 가야 할 길을 자신이 먼저 앞서 가면서 인도합니다. 그의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가면 실족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따르며 가르쳐 주신대로 살면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만 믿고 의지하며 나갈 때 받는 도움이 바로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심니다. 의의길로 인도해 주심니다. 내가 방황할 때 나를 소생시켜 주심니다. 짐승 가운데 양처럼 쉽게 한눈을 파는 짐승은 없습니다. 양들은 길을 쉽게 잃어버리고 또 길을 찾아 되돌아 오기가 어렵습니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자기들의 양같은 성향을 깨닫습니다(119: 176). 그들은 길을 잃고 샛길로 접어드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보여 주시고 회개케 하시고 다시 그들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영혼을 소생시키심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없이 유리하여 파멸했을 것입니다. 그 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두려운 길입니다. 사나운 맹수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되돌아오게 하심 참 감사한 일입니다.
다윗이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범했을 때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습니까? 하나님은 나단 선지를 보내어 99마리의 양을 가진 부자와 한 마리의 양을 가진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의 양을 빼앗아다가 잔치를 벌였던 부자, 그 부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그에게 말해줌으로써 다윗을 회개케 하시고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셨습니다.(시51편)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고 넘어질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계속 그 속에 누워있게 하지는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 목자되신 주님은 내가 병들 때 나를 회복시키시고, 내가 기진할 때 활력있게 해주시며 내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치료의 하나님이심니다.(출15:26).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여러 번 활기를 소망을 잃었을 것입니다. 지금쯤 신음하다가 그냥 죽었을지도 모름니다. 그러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옳은 길로 인도하심은, 인간 편의 어떤 좋은 조건 때문이나 공로가 아니라 3절을 보면 하나님 자신의 "이름" 때문이라 했습니다.
3절 하반절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러 가지 환란과 역경속에서도 사나운 인생길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여지껏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은 나의 어떤 업적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영광을 위해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우리 모두를 의의 길로, 의인의 길로, 성도의 길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무가치한 나를 소생시킨 주님을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그래서 목동 다윗이 불레셋 거인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갈 때 외침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의 이름이 불려지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21:33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 후에 창22장에서 그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부활의 생명으로 돌려줄 것을 믿고 모리아산에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습니다.
창22:7에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8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러 모리아산을 오르면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준비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대로 하나님은 준비하시지 않습니까?
그 양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잃은 양의 비유는 바로 이런 생명의 회복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양떼를 떠나서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메고 돌아온 목자는 절망에 빠졌던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 주며 특별히 보살펴 줄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자기의 목동의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와 같이 보살펴 주셨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한 젊은 사업가가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사업에 실패하고, 삶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은 그에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시편 23편을 아침에 10번, 점심에 10번, 저녁에 10번 읽으시오." 이 젊은이는 그 처방대로 시편 23편을 아침에 10번, 점심에 10번, 저녁에 10번 읽었습니다.
3년쯤 지난 어느 날, 한 성공한 사업가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알아보지 못하자 신사는 쪽지를 내보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3년 전에 목사님께서 이 쪽지로 처방을 내린 후, 저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성공하여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처방대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심을 믿고 살았더니 부족함이 없게 해주셨습니다."
목자장 되신 우린 주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눕게 하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심으로 나의 목자가 되면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2.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광야에는 길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을 트레일(Trail)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일부러 길을 잘 닦아 놓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꾸 밟아서 생긴 산길 같은 것을 Trail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의 길"이란 것은 바로 이러한 길입니다. 짐승이 밟았든, 사람이 많이 밟았든, 거기에는 수 많은 길이 있습니다. 그 많은 길들 중에 바로 의의 길로,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길들은 사나운 짐승이 밟아서 생긴 잘 닦여진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로 가면 양은 죽습니다.
수 많은 길들중 옳은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아야 삽니다. 길이라고 다 같은 길이 아님니다. 사나운 짐승이 밟아서 닦아진 길로 가면 죽습니다. 목자의 인도하시는 길로 나가야 삽니다. 모든 것이 회복됨니다.
더구나 사막에서는 좋은 길을 한번은 알았다고 해도 사막에 모래 바람이 불고 나면 그 길이 금방 다 숨어져 버려 어디가 길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더구나 양들이 그 길을 어찌 암니까? 그러나 목자는 압니다. 목자는 알고 그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괴로운 일이 무엇입니까? 가장 부담이 되고 괴로운 것은 바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어떤 직장을 가질 것인지, 사업을 할 것인지? 사업을 한다면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가? 어떤 상황에 부딛힐 때 이렇게 해야 되는가, 저렇게 해야 되는가? 이렇듯 어떤 상황에서 무언가 결정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유행가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서 갈까~" 무엇이 옳은 줄 압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환한 길이고, 대로 같지만 결국에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를 누가 의의 길로 인도한다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크게 받으며 나가시기 바람니다.(찬송가 424장 .....주를 믿고 나가면 나의 길을 잃지 않겠네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주께 맵소소)
예화) 아프리카의 최전방 선교기지에 있던 여자 선교사가 위독한 병에 걸렸습니다. 게다가 한달 동안 선교생활비도 도착하지 않아 매일 보리죽과 깡통에 든 분유만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30일 정도 지나자 건강이 회복됐고, 생활비도 도착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후, 안식년으로 귀국한 선교사가 당시 힘들었던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한 의사가 찾아와 말하기를 "선교사님의 생활비가 제 때 왔더라면, 선교사님은 아마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런 소화장애 질병은 30일간 보리죽 처방을 해야 낫는 병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그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자기를 인도하며 돌봐주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심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만 따라가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95%는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잠언 3:5-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당신을 좇겠습니다. 주여,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항상 뚜렷한 길을 지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인정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양입니다. 가르쳐 주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거친 길로 가라해도 그 길이 주님이 가신 길이라면 주님의 뒤를 좇아 그 길을 주저 없이 선택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의의 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확신하시기를 바람니다.
(찬 514장 환란 핍박 많고 원수 강하나 주의 용사 더욱 힘이 강하니 누가 능히 이겨 넘어뜨리랴 변함없는 진리 승리하리라 기쁜 찬송하며 주의 은혜로 주를 따라 가네 주만 따르네)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내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소생함을 얻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심니다. 죽음의 다리도 찬양하며 건너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찬양집 8장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지금도 때묻은 내 영혼을 깨끗케 하시고 소생시키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람니다. 그것도 무슨 소생받을만한 이유가 있어서 나를 소생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하여, 그 이름 때문에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니다. 의인의 길로, 성도의 길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길로 인도하심니다.
그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선한 목자가 되신 예수님, 그 이름은 계속 나의 강한 성이 될 것이며, 나를 일생 동안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그가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연약하고 무가치한 나를 주의 이름을 위하여 소생시킨 주님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멸망의 길에서 나를 붙들어 의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은혜와 사랑이 늘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찬송가 494 나 죄중에 헤메며.... 주 언제 나 나함께 늘 동행해 주시네..... 아멘.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시 23:5 / 지태일목사
사람은 살면서 대체적으로 후회를 많이 하게 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렇게 할걸 그 때 좀더 이렇게 잘 할걸...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은 젊은 시절을 후회합니다. 내가 그 때 왜 그렇게 했지 좀더 이해하고 사랑하고 잘 할 걸 하는 일들도 많았고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앙생활에도 후회가 있습니다. "내가 그때 좀더 잘 믿었더라면" 그런 후회의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까? 제일 아까운 것이 시간입니다. 한없이 있는 것이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화살처럼 유수처럼 지나갑니다. 그래서 지난 세월들을 한하며 후회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후회가 없는 사람을 봅니다. 후회가 없는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는 인생입니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성공한 사람, 가장 무서운 죽음 앞에서도 후회가 없는 사람, 여러 가지 사망의 골짜기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 후회가 없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울에게 골리앗을 무찌른 것이 애매한 일이 되어 10년 이상을 사울 왕의 도망을 다니면서 고통의 눈물의 양식을 먹었던 사람입니다. 아들인 압살롬에게 쫓겨가는 설움도 고통도 있었습니다. 장인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들고 군사를 풀어서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잘 데가 없어서 엔게디라고 하는 동굴에서 잠을 자는데 사울이 추격해왔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어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5절 하반절에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후회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인생을 살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원수의 목전에서도 잔치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시23:5절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1) 내게 상을 베푸시고
5절에서 먼저 눈여겨 볼 말씀은 ‘상을 베푸신다’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상’이란 ‘밥상’을 뜻합니다.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신다는 것은 개선 잔치를 말합니다. 싸움을 이긴 후에 상을 베풀고 축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양들에게 밥상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론 풀들이 잘 자란 푸른 초장을 의미합니다.
2) 원수의 목전에서
그러면 양들에게 있어서 원수는 누구일까요? 양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인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독초이고, 또 하나는 맹수들입니다.
이른 봄이 되면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목자는 양떼보다 앞서서 거칠고 높고 험한 길을 지나 고원 방목장 초장을 향하여 답사를 떠납니다. 고원의 초목들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를 살핍니다. 양들 앞에 베풀 상을 위하여 목초지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가볍게 풀을 뜯게 할 빈터나, 오래 머물면서 충분히 뜯게 할 장소를 정합니다.
이렇게 목초지를 정하고 나면, 양떼를 이끌고 이동을 하며 풀을 뜯게 합니다. 그런데 목초지에 양들을 풀어놓기에 앞서서 반드시 목자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초를 뽑아주는 일입니다. 독초는 양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린 양들에게 있어서 독초를 뜯어먹거나 단순히 입에 넣고 씹기만 해도, 그 풀에서 나온 독으로 인해 전신에 마비 증세를 일으켜서 뻣뻣하게 굳어서 죽어 버립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이 풀을 뜯기 전에 목초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독초를 다 뽑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어느 일보다 무척 힘들고 고된 작업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양들에게 있어서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베푸는" 작업이기 때문에 결코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양들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독초를 다 뽑아주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해야 할 일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맹수들을 감시하는 일입니다. 목자는 맹수가 쳐들어와서 양을 습격하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합니다. 맹수들은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잽싸게 공격하기 때문에, 목자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자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속에 원수의 고역과 대적의 모든 현상에서 풍성한 상을 베풀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를 이미 체험한 것입니다.
삼상 17장에서 다윗은 불레셋 군대와 골리앗앞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상을 체험했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골리앗의 협박과 공갈에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서서 숨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과 언약도 없고 할례 받지 못한 불레셋의 골리앗이 누구기에 사실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며 담대하게 골리앗에게 나갔습니다. 다윗은 원수가 다가올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상을 베푸시고 요리해서 성찬을 만들어 먹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강한 믿음으로 골리앗에게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물 맷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쳐 넘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 목을 베었습니다. 그 결과 불레셋 군대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시고 골리앗앞에서도 상을 베푸셨습니다.
요한복음 10:11-15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리나 맹수가 오면 삯꾼 목자는 양들을 버리고 도망을 치지만, 예수님은 도망치지 아니하고 목숨을 버릴지라도 양을 지키고 양을 위해 헌신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원수가 아무리 둘러 진쳐 올지라도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30미터나 되는 금신상을 세우고 모든 문무백관들을 다 모아놓고 음악은 연주할 때 금신상에게 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도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절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때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기록했습니다.(찬송가 359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하나님은 느브갓네살이 만든 우상앞에서도 절하지 않는다고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앞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앞에 상을 베푸시는 분이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세운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 금신상에게 절을 하며 생명을 구해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여 그렇게 하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 내시겠거니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에 절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왕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수들이 자신들을 공격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었으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잡아 7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풀무에 던진 사람은 세 명이었는데 순식간에 네 사람이 손을 잡고 풀무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춤을 추는 네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나오라고 하매 그들이 풀무 가운데서 나오는데 조금의 해함도 없고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 불속에서 그들과 거닐며 오히려 즐거운 곳이 되게 하셨습니다. 고통과 환난의 자리에서 구해내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 환경이 즐거움이 잔이 되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들을 위해 요리상을 베푸시는 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거대한 골리앗이 나타나도, 느부갓네살의 그 뜨거운 풀무불이 나타나도 하나님께서 그 앞에 상을 베풀어 주심니다.
얼마나 많은 원수들이 다윗의 생명을 노렸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한 대접을 받아온 것입니다. 여기서 `베푸시고'란 미완료 시제로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계속적인 행동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아무리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원수앞에서, 여러 가지 환란앞에서도 상을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원수 중에 있고, 원수가 우리를 지친다 할지라도 원수와 우리 사이에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면서 우리들을 보호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3) 기름을 바르시고
세 번째로 5절에서 ‘기름을 바르신다’는 단어입니다.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준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언제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어야 할까요?
1) 먼저 해충을 쫓기 위해서 기름을 발라줍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여름철은 파리철이라고 합니다. 무더운 날씨와 함께 그들에게 찾아오는 쇠파리나 날파리, 코파리, 진드기나 모기 등의 해충 때문입니다. 양들은 이런 해충들로 인해 거의 미칠 지경입니다. 특별히 코파리는 양의 코에 덮여 있는 촉촉하고 끈적끈적한 점막에 알을 낳을 기회를 노리면서 양의 얼굴을 윙윙거리면서 귀찮게 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무나 바위에 머리를 사정없이 들이받기도 하고, 나무숲에 데굴데굴 구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이때 목자는 유황과 그 밖의 여러 가지 향료를 섞어 만든 올리브 기름을 양의 코와 머리에 발라줍니다. 그래서 코파리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충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양들은 일순간에 평온하게 풀을 뜯게 됩니다.
2) 또 피부병 같은 전염병이 돌 때 기름을 발라주게 됩니다.
양들은 애정과 사랑의 표시로 서로 머리를 비벼대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히 여름철에는 미세한 기생충으로 인해서 양들이 피부병에 많이 감염됩니다.
이때 피부병이 감염된 양이 다른 양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비벼대다 보면 순식간에 다른 양들에게 퍼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도 목자는 기름을 사용합니다. 어느 때에는 온 몸이 피부병으로 고생하면 기름을 탄 약물 통에 양의 온 몸을, 머리까지 잠그게 해서 소독을 해주는 것입니다.
3) 또 기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짝짓기 철입니다. 선선한 가을이 찾아오면 암양들이 발정을 하는 시기여서 수양들 사이에 암양을 차지하기 위해서 큰 싸움이 벌어진답니다. 몸통에 서로 상처나 나도록 싸우기 때문에 목자는 수양의 머리와 코에 온몸에 윤활유를 발라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싸우기 위해 머리를 부딪칠 때 윤활유 때문에 미끄러져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몇 번 하다보면 서로 멋쩍어서 싸움을 단념하게 됩니다.
이처럼 목자는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줌으로 해충을 쫓아주고, 피부병을 막아주고, 양들간에 싸움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다윗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며 기름을 바르시니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잔치 때에 주로 사용되었던 향유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필수품은 아니었고 귀족들, 특히 왕실에서 주로 사용한 귀중품이었습니다. 이들 귀족들은 잔치에 참여할 때 이 기름을 머리나 수염 등에 발랐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크게 높이시고 부요하게 하신 데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왕실에는 이 값비싼 기름이 풍부했었습니다(대상27:28).
주님은 우리의 심령속에 물과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이렇게 될 때 내 속사람의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윗은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잔'은 기업을 비유한 말입니다(시16:5). 이러한 잔이 단순히 가득찬 정도가 아니라 흘러 넘치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다윗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다윗이 차지한 왕실의 재산과 사유 재산은 실로 엄청난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대상27:25-31; 29:2-5). 예루살렘에 있는 왕의 창고들, 각 성읍과 촌과 산성에 흩어져 있는 창고들이 나오는데 관리자들의 이름들도 나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토록 풍성한 기업을 자기의 쾌락을 위해 사용하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전(殿)을 건축하는 데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고전10:16에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첨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첨예함이 아니냐" 축복의 잔입니다. 은혜의 잔입니다.
이 축복의 잔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잔치이신 아들, 기름 바르는 성령, 축복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 잔이 넘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마름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목말라서 남편을 다섯이나 얻었던 수가 성의 여인이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의 갈증이 해소되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키만큼이나 돈을 쌓고, 명예를 쌓았던 삭개오는 그 많은 부요와 지위가 그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으나 그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과 마음속에 모실 때에 비로서 행복한 삶이 그에게 열렸습니다.
푸른 초장이신 쉴만한 물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목자이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정말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너무도 많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뒤집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너무 편한 웅덩이를 여기저기 찾다가 넘어집니다. 때로는 몸에 거추장스런 것들을 너무 많이 걸치고 있어서, 이런 것 저런 것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영혼이 세상적인 것들로 살이 너무 쪄있어서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넘어질 때, 목자 되시는 우리 하나님은 얼른 달려오셔서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또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웅덩이를 메워주시기도 하고, 몸에 너무 자란 털을 깎아주시기도 합니다. 또 살이 너무 많이 쪄있으면, 풀이 별로 없는 곳으로 격리시켜서 우리 살을 다이어트 해주시기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위에 이곳저곳에 숨어서 우리를 해치려고 하는 독초의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쉬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독초를 뽑아주고 계십니다.
또 우리를 해하려는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기 위해 두루 찾아다니는 것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십니다. 그래서 해충의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를 공격하는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병들게 하는 수없이 많은 전염병들이 있습니다. 먹는 것을 통해서, 입는 것을 통해서, 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세상 쾌락 즐거움으로 권력이나 명예를 통해서 은밀히 다가 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기름물통에 우리의 온몸을 담가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수양처럼 자기를 뽐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때에도 목자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 다투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합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상처가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문제는 그런 아픔과 고통, 상처와 허물 속에서도,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 또 의의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다윗은 많은 고난과 아픔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이 없고, 아픔이 없어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많은 아픔과 고난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이 나의 참 목자가 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이렇게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눈 저와 여러분, 모두 다윗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바람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섬기고 따르면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승리의 잔치상을 베풀어 주실 것이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실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의 축복의 잔이 풍성히 넘칠줄 믿습니다. 아멘.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도
시 23:6 / 지태일목사
찬송가511 이 세상 떠날 때
여러분!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리고 임종을 맞는다면 그 때에 어느 성경구절을 읽을 것입니까? 또 옆에 있는 분에게 성경을 읽어 달라한다면 성경 어느 구절을 읽어달라고 부탁을 드리시겠습니까? 성경 66권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성경을 외우기도 하고 읽기도 하겠지만, 아주 절박한 시간에, 그 때에 어느 성경을 읽겠습니까?
기독교 2000여년 역사를 보더라도 많은 성도들. 휼륭한 믿음의 선배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가 좋아하던 성경 아니면 그 시간에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성경구절을 읽기도 하고 외우기도 하고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제일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읽으며 외우며 들으며 세상을 떠난 성경이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로 어떤 소년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여러 가지 해 주지만 그 위로의 한계가 있잖습니까?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운 마음이어서 아들 곁에서 성경말씀을 읽어 줍니다. 그 중 시편 23편을 읽어 주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돼, 네가 힘들 때, 아플 때 이 말씀을 생각해라.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하나님이 너의 목자가 되고 나의 목자가 된다면, 그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 영어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이 다섯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그래서 엄마가 애, 너 다섯 손가락처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거야 꼭 기억해, "the Lord is my shepherd" 손가락을 이렇게 만지면서 하나님이 네 목자란 것을 기억해 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너무 아파하는 것을 보고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준비했던 반지가 있었습니다. 그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면서 "네 번째가 제일 중요해, 여호와는 "나의, 나의" my, my shepherd, "너의 목자야 너의, 하나님이 너의 목자란다" 이것만 확신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어느 날 그 소년이 아파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그냥 자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보니까 벌써 아들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다시 손을 보다가 엄마가 깜짝 놀랐답니다. 뜻밖에도 이 세상을 떠나간 어린 소년 아들은 오른손으로 자기 왼손에 엄마가 늘 짚어주던 손에 네 번째 손가락, 링이 끼워진 그 손을 잡고 숨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의 목자시니"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 짧은 말씀이, 인간에게 준 위로와 소망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비록 3천 여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외로운 사람들, 위태한 중에 있는 사람들, 병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이 시편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끼쳐 줍니다.
그동안 우리는 다윗의 유명한 시편 23편을 6주간 주일마다 한 절씩 생각했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으로 6절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큰 축복의 말씀으로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1.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한 목자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양은 어떤 일이 생겨도 그런 상황 속에서라도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의 돌보심 아래 있는 양은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속에서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한 달이나 두 달이 아니고 1년이나 2년이 아니라 나의 평생에" 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시면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어느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될 것을 확신합니다. 머저는 평생에, 내 생명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입니다. 정녕은 불변함, 확실함을 고백합니다. 따른다는 말은 방법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함께 하심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생애와 운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랑스러운 외침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나의 선한 목자로 삼고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분들이 다 되시기 바람니다. 우리 삶 속에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사시기 바람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 될 때 모든 일이 형통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내 건강이 좋고, 수입이 넉넉하고, 가족마다 평안하고, 내 친구들이 다 나를 좋아하고, 사회에서 어디가나 인정받는다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몸에 심각한 병이 들었을 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볼 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며 준비했는데 진학에 실패했다면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말 가운데, "하면 된다! 해서 안되는 일이 없다! 사람이 노력하는데 안되는 것이 뭐가 있냐?" 이런 얘기를 하지만, 정말 일을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농사를 잘지어 곡식이 익고 추수를 눈 앞에 두고 있는데, 큰 비가 내려 가지고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시험 준비 열심히 해서 올해는 대학에 꼭 붙겠다고 했는데, 그 날 감기가 심하게 들어 컨디션이 나빠가지고 시험을 망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뜻밖에 직장을 잃고 가족들은 가난속에 시달리게 될 때 뭐하고 말하겠습니까? 양심적으로 말하고 말한대로 살고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한 일이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멀리하고 돌아서며 손가락질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나의 마음이 무너지고, 기대와 소망이 수포로 돌아갈 때, 그래도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이 터무니 없는 거짓 아님니까?
여러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사시는 분의 간증을 들어보시기 바람니다.
"저도 지금까지 사는 동안 감당키 어려운 일들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생각되었었습니다. 정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밤처럼 어두운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 모든 일들이 제 생애에 유익한 것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렵고 힘들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더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찬송가 503장, 이 큰 물결 일어나 나쉬지 못하네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유한한 인간의 제한된 지식을 가진 저로서는 무한한 지혜와 섭리로 행하시는 주님의 섭리와 경륜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을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하나님의 간섭을 벗어나서 내 자신의 노력으로 더 훌륭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주님을 떠나고 싶어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 오심에 대하여 감사를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의심해도, 아니 주님의 품을 떠나려고 해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찾아내서 다시 사랑과 긍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어떤 재난도, 우리를 낙심하게 하거나 두려워하게 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생활 중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에 큰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고 인자하심이 따르기 위해서는 고난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도,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다윗 왕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나 사도 바울도 다 고난 받았습니다. 이 고난 속에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고난이 정의입니다.
시편 90편에도 사람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인생 자체는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그랬습니다. 고난은 사람에게 필연적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에 속을 썩이는 교인이 있어서 `하나님 이 교인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애, 너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한테도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유다가 있었다." 예수님도 가룟유다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그 기도 안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함께 먹고 마시고 배웠던 제자가 배반했으니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는가요? 주님은 가롯유다의 배반으로 아픔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남들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괴롭게 한 사람이 바로 가롯유다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것부터 마지막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까지 고난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으로 어려움의 세월을 사셨지만 그 고난 때문에 넘어지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될 지혜고 신앙인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작다고 좋고 크다고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고난이나 시험에 넘어지려면 접시물에 빠져도 죽는 것이고, 살려면 망망대해 파도속에서도 살아나는 겁니다.
문제는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고난을 대처하는 마음과 방법의 문제입니다. 어떤 자세를 가지고 고난에 대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고백했잖습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고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나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누구보다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것은 환경에 대한 어려움입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이것은 사람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 합니다. 좋은 시절도 잇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나쁜 사람도 많이 만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어려움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든지 나에게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데 있습니다. 이런 생각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다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나 항상 있는 것이 고난입니다.
문제는 이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며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이 고난이 좋다고 해서 좋고 나쁘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고난의 상황이 좋은가 나쁜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욥도 그 고난의 의미를 다 알 수 없었습니다. 훗날 하나님앞에서 깨닫는 것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도 알고 있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고난중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딱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날 향해 와도 그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잔을 넘치게 하는 승리를 주신다는 겁니다.
다윗에게는 고난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는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이 얼마나 크냐 얼마나 힘드냐, 이것보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고난을 당할 때, 이 고난 속에서 고난의 아픔이라든가 고난의 크기라든가 보다는, 물론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이 고난도 기쁨으로 감당하시기를 바람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갈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반듯이 따른다고 확신있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롬8:28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좋고 심지어 나쁜 것도 성공도 실패도 고난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선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선입니다. 내가 볼 때 좋은 것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이 물은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을 분석해보면 물은 산소 더하기 수소입니다. 산소는 사람이 마시면 좋은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호흡이 잘 안되는 사람에게 산소를 마시게 하기 위해 산소호흡기를 입에 물려주면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산소 호흡기를 띠면 바로 죽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계속 호흡기를 댈 것인가 뗄 것인가 고민 많이 합니다. 산소는 사람을 살게 하는 겁니다.
반면에 수소는 어떻습니까? 수소는 산소하고 반대로 사람이 마시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산소와 수소가 합쳐지면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생명과도 같은 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산소와 수소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도 이렇게 평탄한 것만이 아닌 고난 역경속에서도 가는 겁니다.
그런데 수소도 언제나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자동차 공해가 심해서 공해 없는 자동차 만듭니다. 그런데 전기로 가는 자동차와 함께 수소로 가는 자동차가 개발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물에서 수소를 분리시켜 가지고 그 수소를 자동차 원료로 쓰는 자동차가 실용화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이제는 이 수소도 나쁜 것만이 아니라 좋은 것이란 말은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모든 것이 좋은 것이 다 좋은 것 아니고, 나쁜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님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세계2차대전 때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600만명이나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고난과 시련과 그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이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 가지고 이것을 간증하며 다니는 코리텐 붐이라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이 코리텐붐 여사는 신앙간증을 하고 나면 마지막에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수건 한 장을 꺼냄니다. 그런데 그 수건에 이쁜 자수가 되어 있는 겁니다. 보면서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냐고 하고 뒤집어서는 뒤를 보여주는데, 수를 놔 보신 여자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앞에는 아름다운데 뒤는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지요. 얼마나 엉망진창입니까? 그런데 이 엉망진창이 그렇게 아름다운 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인생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뒤집어볼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름다운 수와 같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합력하여 이루는 선인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고난을 선하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양을 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양의 거름은 다른 가축의 거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합니다. 양들이 목장 전체에 퍼져 있으면 양의 거름을 통해서 토양이 비옥해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대 문헌에는 양을 가리켜서 '황금 발굽의 가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양들이 가는 곳에는 풍요와 번영이 뒤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양의 거름이 땅을 아주 비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들이 지나간 곳에는 비옥한 목초지가 뒤따랐습니다. 양들이 살았던 곳에는 아름다움과 풍성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나간 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발자취를 남겼습니까? 우리가 다녀간 길 뒤에 축복과 은혜를 남겨둡니까?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발자취를 남기셨습니까? 슬픔의 흔적을 남기셨습니까? 아니면 기쁨의 흔적을 남기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대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차라리 잊어버리고 말까요? 우리는 우리 뒤에 축복을 남깁니까? 아니면 잊고 싶은 추억을 남깁니까? 우리를 아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를 아는 것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여러분!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 보시기 바람니다. ‘나는 어디에 가나 화평을 남겼는지? 아니면 불화를 남겨 두었는지?’ ‘나는 누구에게나 용서를 남겨두었는지? 아니면 원한을 남겨두었는지?’ ‘나는 만족을 남겨 두었는지? 아니면 불만을 남겨두었는지?’ ‘나는 어디가나 희망을 남겨두는지? 아니면 좌절을 남겨 두는지?’ ‘나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남겨두느니? 아니면 미움을 남겨 두는지?’
여러분 우리는 양들과 같이 가는 곳마다 좋은 선한 발자취를 남기시기 바람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남기시기 바람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어떤 성도들이 어떤 종들이 지나갔는지 훗날에 보면 다 암니다. 우리의 교회를, 지역을 세상을 비옥하게 만들 수 있기 바람니다. 어떤 사람은 가는 곳마다 불결한 흔적을 남겨두기 때문에 그의 발자취를 차라리 가리우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큰 일입니다.
어떤 발자취를 보면 양이 지나갔는줄 알았는데 이리가 지나갔습니다. 선한 목자가 지나갔는줄 알았는데 삯군이 지나갔습니다. 충성스러운 일군이 지나갔는줄 알았더니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평생에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귀한 양들이 되시기 바람니다.
2.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적극적이고도 소망으로 가득찬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마지막 6절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어떤 교회로 세워져야 합니까? 모두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합니까? 어떤 자세로 목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요? 떤 일군들이, 어떤 양들이 다 되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먼저 양에 대한 말씀입니다/ 목자의 인도 돌봄 따라 다른 양들과 함께 잘 어울려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양입니다. 그는 목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하게 잘 자람니다. 목자가 인도하는대로 순종할 때 푸른 초장 맑은 물가으로 다니며 먹고 마시며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에 목자를 떠나 곁길로 갈 생각은 해 본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목자의 세심한 관리를 따라 다른 양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은 만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음은 목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건강 안전 풀을 뜯는 양들 보는 것이 기쁨이요 상급입니다. 목자에게는 자기 양떼에 대한 깊은 애정과 헌신이 나타나 있습니다. 양들이 목자를 떠난다는 것, 떨어진다는 것 상상할 수 없듯이 목자도 양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하고 안전하고 만족해 하는 양의 모습은 목자에게 기쁨이요,재산이요,상급입니다.
더구나 양이 6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예비하신 집에, 교회에, 목장에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하고,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 교회에 권속이 된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알고 다른 사람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증거해야 합니다. 양들은 항상 어디에 잇고 싶어하는가? 양들은 항상 목자가 볼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어합니다. 양은 목자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안정감과 평온감을 가질 수가 있고, 자동적으로 어려움과 위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함께 있는 한 양에게는 풍성한 풀밭이 있고, 잔잔한 맑은 물이 있고, 신선한 들로 통하는 새로운 길이 있고, 고원지대에서서도 안전한 여름이 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파리와 질병과 기생충을 없애는 기름이 있고, 평온과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그런 곳이 어디입니까? 양들이 목자와 함께 있는 그곳이 바로 이런 곳입니다. 찬송가 495장처럼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내 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주예수와 동행하는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고백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마지막 고백의 말씀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이 육신도 이 땅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90편 말씀처럼 사람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신속히 가니 날아갑니다. 빨리 지나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 육신, 겉 사람은 계속 낡아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의 장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장막이 새 것(젊을 때)일 때는 색깔이 선명하고, 줄이 팽팽하여 햇빛도 가리고 비도, 바람도 다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지면(늙을 때) 색깔도 누렇게 바뀌고 줄도 늘어져 힘이 없어지고, 여기저기 구멍이 뚫어지고, 이리저리 흔들거리다가 바람이 좀 세게 불면 쓰러지고 맙니다. 여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러함을 보여 주잖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바울은 고후5: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영원한 집이 없습니다. 이 육신의 장막 집 벗는 순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갑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누가 이 집에 가서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나의 목자로 삼는 사람입니다. 주님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목자로 삼으셨습니까?
오랫동안 교회 다녔다고 해서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 맡았다고 그 집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찬송가 292장에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못다한 일 많아 부끄럽네 아버지 사랑이 날 용납하시고 생명의 면류관 주시리라”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날 용납하시고 생명의 면류관 주신다 말씀하심니다.
양들은 평소에는 목자와 함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또한 살면서 여러가지 아픔과 환란과 역경속에서고 승리하며 살던 양들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있잖습니까?
양은 털과 새끼를 그렇게 많이 내고 마지막에는 고기로 드려진다해도 이런 일로 서러워하거나 아쉬워 하지 않습니다. 평생 목자에게 털과 젖을 제공하던 양은 죽음의 순간에도 고기로 아니면 피로 제단에 거룩한 제물로 드려져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목자와 더불어서 살게 될 영원한 길임을 알게 되겠기에 그런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인생의 밤이 되었으나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세상 살아가다가 상처를 받았으나 위로 받을 피난처가 없는 사람은 가련한 인생입니다. 인생의 열차가 종착역에 섰으나 갈 곳이 영원히 없는 사람들 망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예화) 해변가에 조그마한 고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낮이 되면 마을의 아들과 고아원 아이들이 해변가에 가서 모래성을 쌓아놓고 땅 뺏기 게임을 합니다. 한 뼘이라도 한 웅쿰이라도 더 뺏어 보겠다고 아웅다웅 싸움을 합니다. 그러다가 해가 서산에 지고 나면 언니 형아 엄마 아빠가 달려와서 “얘야, 저녁 먹어라. 그러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해안선을 지키는해병대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러면 집으로 향하여 그렇게 아옹다옹 한뼘이라도 더 뺏을려고 더 모아 보려고 아귀다툼을 하던 아이들이 모래를 툭툭털고, 땅 뺏앗기 하던 모래를 발로 슥슥 문질러 놓고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한켠에서는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해병대 군인 아저씨가 “얘들아, 이제는 집에 가야지. 그러니까 ”아저씨 우리는 집이 없어요. 아차 이 아이들이 고아원 아이들이구나! “엄마 아빠 기다린다. ”우린 엄마도 없어요. “원장님이 엄마지. ”엄마는 엄마고 원장님은 원장님이지요. 우린 여기 있으나 집에 있으나 똑같아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한 뼘이라도 더 찾아보겠다고, 한 웅큼이라도 더 움켜쥐어 보겠다고 아웅다웅 싸우다가 내 인생에 땅 거미가 내려지면, 하나님이 오라하시면 우리가 이 땅에 쌓아왔던 것을 발로 슥슥 뭉게 놓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인생들이지만 우리는 갈 곳이 없는 인생들이 아님라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고백처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영원한 집,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지으신 집 그 영원한 집에 거하리라는 이 고백을 가지고 산다는 것,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러나 거할 곳이 없는 인생, 갈 곳이 없는 인생, 영원한 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쌍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을 교회를 가정을 싸움터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목적없는 생존경쟁의 일터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세상에다가 너무나 화려한 집을 지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너무나 세상 깊숙이 들어가 살면 안될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만을 추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언젠가 부르면 다 가야 하는데 이 세상을 왜 싸움터로 전쟁터로, 서로 경쟁하며 다투며 의미없이 다람쥐 쳇바귀 돌 듯이 그렇게 삽니까? 왜 잠시 잠깐의 화려하고 쾌락적인 세상으로 살아야 합니까?
목자되신 주님을 만나 그 안에서 인생의 무거운 죄짐들 다 내려놓고 주시는 생명양식 먹으며 주시는 성령의 생수를 마시며 가는데마다 주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즐기며 즐겁게 사는 인생이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 뉴스에 야구시합중 재미있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재미있게 놀고 즐기며 운동하는 스포츠가 무슨 대박이나 요행을 바라며 홈런 볼 하나 받으려고 야구장 모습이 완전히 무슨 긴장감이 너무 감돕니다. 이승엽의 56호 홈런볼 잡으면 몇억 어떤 분들은 몇십억한다고 하면서 너무 무섭게 야구를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결과는 대구에서 터졌고 그 볼을 주은 이벤트대행업체 직원 2사람은 구단에 기증키로 해서 일단락되었습니다만.
56호 홈런볼을 잡기 위한 팬들의 뜨거운 행렬이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행렬이 경기 3시간 전부터 주변 도로에까지 길게 줄을 섰고 입장이 시작된 4시15분쯤부터 잠자리채를 든 팬들은 우측 외야석에 먼저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일찌 감치 외야에 자리를 잡은 열성팬들은 삼성 타자들의 타격 훈련 때 외야로 넘어오는 연습타구를 잠자리채를 이용해 잡는 등 '실전 훈련'까지 합니다.
이승엽의 홈런볼을 잡으려고 서로 잠자리채 바구채 들고 무슨 전쟁이라도 하듯이 경쟁적으로 몰려 듭니다. 좋은 자리잡느라 다툼니다. 경기중 내내 들뜨고 불안한 마음들입니다. 나중에 뜻대로 홈런이 안나오니까 있는 것 모조리 운동장으로 던집니다. 분해합니다. 건전하고 즐거운 스포츠도 전쟁터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전쟁입니까? 아니면 일입니까? 노동입니까? 고역입니까? 아니면 로또 대박이 터져 인생을 역전시키듯이 한탕해서 뭔가를 이루려 합니까?
신앙생활은 목자되신 예수님 만나 은혜 받고 잘 먹고 마시며 잘 쉬고 기뻐하며 새끼도 양도 많이 낳고 젖도 내고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율법에 매여 사단에 매여 억지로 신앙생활하느라고 자유함을 잃어버리신 분 계십니까? 은혜안에서 주신 참 자유를 맛보시기 바람니다.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하나님의 자녀된 내 신분의 영광스러움을 잃어 버리고 싸구려 신앙생활을 하듯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이제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인하여 우리가 죄씻음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된 값비싼 신앙생활의 비밀을 깨달아 살아가시기 바람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아름다운지, 멋있는지, 아름다운지, 영광스러운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전쟁이 아닙니다.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 삶을 나누며 그 분의 힘과 지혜와 능력을 누리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의 임무가 아님니다. 주님의 생명 말씀 들으며 기뻐하는 성도들만의 귀한 특권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우리의 삶속에서 신앙을 축하하는 최고의 기쁨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양무리가 된 성도들이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와 함께 뛰노는 신비의 영적 세계를 날마다 깨달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내 영혼을 소생케 하는 목자
시 23:1-3 / 이동아목사
필립 켈러(Phillip Keller)는 목사이며 작가입니다. 그는 목사와 작가가 되기 전에 호주에서 8년 간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는 「목자가 바라본 시편 23편」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하기를 양은 초장에 잘 눕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양이 누울 수 있는 때는, 첫째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위험이 없다고 느껴야 하며, 둘째는 양들 사이에 다툼이나 싸움이 없어야 하며, 셋째는 파리나 기생충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넷째는 충분하게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이 다 만족되어야만 양들은 초장에 눕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양은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면 초장에 누울 수 없습니다. 내부에서 다툼이나 분쟁이 있어 가정에서 부부가 부자지간에 형제지간에 성도지간에 불화하면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파리나 기생충으로 심령의 속에서 죄와 정욕과 시기와 질투와 염려와 근심이 쌓일 때 안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은 꼴을 먹고 배부름이 있을 때 비로소 잔디에 누어 평화롭게 쉴 수가 있다는 것을 필립 목사님은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에는 부족한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건강의 부족을 느끼는 사람, 물질의 부족을 느끼는 사람, 자기 속에 늘 사랑이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 지혜나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욕구불만에 늘 목말라하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내적인 것으로 인하여 만족이 없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외적으로 소유하지 못해서 걱정 근심이 있습니까?
오늘 시편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로 믿고 섬기며 예배하고 찬양하며 사는 성도들은 그가 푸른 초장으로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여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 믿음 없는 사람들, 신앙 없는 사람들은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세상적인 방법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기, 물질, 명예, 권력이 나의 목자시니 내가 늘 부족합니다"하고 살아갑니다.
인기와 물질을 추구합니다. 개그우먼 이 모씨가 남편에게 야구방망이로 구타당해 전치 6-8주의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항상 유쾌하고 씩씩하게 웃음을 선사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던 이씨가 이런 불행한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연예인들도 보통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나름대로의 사생활과 가정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번 폭행사건에서 드러난 것은, 돈도 잘 벌고 유능하고 직업적으로 성공한 여성이 사실은 그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온 매맞는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씨가 남편에 폭행에 대하여 말하기를 "다만 본인이 사랑해서 그렇다는데 그 사랑이 부담스럽다. 대학교 2학년 스무 살 때 만났는데 이젠 서른 일곱 살이 됐는데도 남편은 끊임없이 스무 살이었으면 하는 것이 답답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불만족을 명예가 물질이 결코 채워주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과 마약을 찾습니다. 브루스 캔리히-'광야에서'라는 시에서, 마약 중독자의 독백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습니다
'마약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 그가 나를 빈민굴에 눕게 하시며, 조용히 미친 곳에 인도하는도다. 내 영혼을 멸망시키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지옥 길로 인도하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죽음을 두려워 아니함은, 마약이 나와 함께 함이라. 내 주사기와 그 바늘이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가 원수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내가 미치도록 기름을 바르셨으니, 슬픔으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미움과 악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망신거리와 비참한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렇습니다. 마약과 술이 인생을 만족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추구합니다. 돈으로 침대를 살 수 있어도 잠은 사지는 못합니다. 돈으로 음식은 사먹을 수 있지만 식욕은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대궐 같은 집은 살 수 있지만 단란한 가정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보약은 사 먹을 수 있지만 우리의 건강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쾌락은 누릴 수 있지만 돈으로 행복은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십자가 목거리를 살수는 있어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또 복권을 탄 사람이 10년 만에 그 돈 다 쓰고 거지가 되었답니다. 결코 물질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족하게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추구합니다. 요즈음 청와대 사람들은 사면초과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초라한 결과라면 왜 그렇게 그 자리를 부러워하는 것입니까?
인생이 가진 이 공허함과 부족함을 누가 채워주며 무엇으로 채울 수 있습니까? 오늘 시편의 기자는 우리 인생의 잔이 이처럼 비어 있음을 느끼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믿고 부족함이 인생을 살기로 결단하고 푸른 초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꼴로 먹고 쉴만한 물가으로 생명수 시냇가에 나아와 이물을 마시는 자마다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지만 주께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하려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인생의 빈곳을 채움 받고 감사와 감격으로, 만족과 기쁨으로 천국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양들은 푸른 초장인 하나님을 떠나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生水)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貯蓄)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시23:3) "내 영혼을 소생(蘇生)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목자를 그리고 있으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 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23편에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누리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유아기의 신앙을 말씀하고 있다면 우리의 목자장 되신 주님께서는 인도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소는 뒤에 몰아 쟁기질을 합니다. 말은 고삐를 잡고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양은 인도하는 목자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짐승입니다.
시력도 안 좋을 뿐 아니라 방향 감각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양같이 각기 제길로 간 인생들입니다.
양은 넘어지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필립 캘러 목사는 넘어진 양, 곧 낙심한 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생생한 체험을 들려줍니다. 그의 체험에 의하면 양처럼 한 눈을 잘 팔고, 잘 넘어지는 동물도 없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살찐 양이나, 새끼를 밴 암양은 가장 넘어지기가 쉽다고 합니다. 몸집이 무겁거나 살찐 양은 편안하게 눕기를 좋아하는데,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져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는 경우, 제힘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나자빠진 양은 발로 허공을 치면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몸부림쳐 보지만, 그럴수록 사정은 더욱 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이 누워서 바둥거리고 있는 동안, 위에 가스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 가스가 확산되면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사지를 마비시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무더운 여름 날씨의 경우, 넘어진 양은 서너 시간 지나면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넘어진 양은 매, 독수리, 들개, 늑대에게 가장 잡아먹히기가 쉽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눈에도 뜨지 않는 곳에서, 홀로 넘어져 발버둥치는 양은, 미칠 듯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양은 공격무기가 없습니다. 양은 이리나 사자나 호랑이처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자구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방비 상태로 생명이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보호가 없이는 양은 생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잃어진 양은 이리에게 찢기고 상하여 다리를 절기고 한 것입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양은 소생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양치기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양들의 수를 세어 봅니다. 그리고 없어진 양을 발견하게 되면, 지체 없이 찾아 나섭니다. 여러 시간을 찾아 헤메이다가, 멀리서 넘어져 발버둥치고 있는 양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갑니다. 1분 1초가 양의 목숨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넘어진 양을 일으켜 세우고, 다리를 문질러 혈액순환을 회복시켜 주면, 양은 다시 일어나 정확하게 걷습니다. 마침내 넘어진 양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양떼 가운데로 뛰어가 두 번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소생케 된다는 것은 새롭게 되며 변화를 받는 다는 말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소생된다는 것은 우리의 혼의 주도적인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양을 목양하시면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회복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피곤한 것도 압니다. 햇볕에 지치는 것도 알고 배고픈 것도 알고, 때때로 쓰러질 때고 있고, 목마른 것도 목자가 알고 있습니다. 양이 물이 있는 곳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답답하고 괴롭지만 그냥 기다립니다. 그러면, 목자가 알아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그 영혼을 소생케 합니다. 시원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할 일이 무엇입니까? , 양의 입장에서는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의 선하심도 알고 그의 사랑도 알고 지혜도 알고 나아가서는 운명을 맡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목자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기를 잃어버린 인간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생기를 불어넣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가 오셔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바로 생명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고 하셨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목동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갈 때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삼상17:45)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불려지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부활의 생명으로 돌려 줄 것을 믿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습니다.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러 모리아산을 오르면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준비하신 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대로 하나님은 준비하시지 않습니까?
그 양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 예수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잃은 양의 비유는 바로 이런 생명의 회복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양떼를 떠나서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메고 돌아온 목자는 절망에 빠졌던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 주며 특별히 보살펴 줄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자기의 목동의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와 같이 보살펴 주셨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한 젊은 사업가가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사업에 실패하고, 삶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은 그에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시편 23편을 아침에 10번, 점심에 10번, 저녁에 10번 읽으시오.”이 젊은이는 그 처방대로 시편 23편을 아침에 10번, 점심에 10번, 저녁에 10번 읽었습니다.
3년쯤 지난 어느 날, 한 성공한 사업가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알아보지 못하자 신사는 쪽지를 내보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3년 전에 목사님께서 이 쪽지로 처방을 내린 후, 저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성공하여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처방대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심을 믿고 살았더니 부족함이 없게 해주셨습니다."
목자장 되신 우린 주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눕게 하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심으로 나의 목자가 되면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3-14).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주님 예수는 우리를 의의 길로 가도록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부흥케 하시며 변화시키십니다. 여기에서 길과 의는 그리스도 예수인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요 길인 것입니다. 의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안에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이루어진 우리의 혼안에 소생되고 변화됨으로 의의 길을 취하여 가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균형이 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길에서 목양을 하십니다. 그의 막대기로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길을 잃고 헤맵니다. 영을 따라 행할 때 의의 길로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영적으로 우리는 다 양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찾아 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또한 외부로부터 오는 침략자와 노략자를 막아 주십니다. 목자의 막대기는 무기입니다. 침략자나 도적이 오면 목자의 막대기도 막아줍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양들의 길을 지시하고 바른 길로 몰아세우는 일을 합니다. 목자는 병든 양을 돌보고 치료하여 낫게 하십니다. 내 영혼의 목자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활기 넘치는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미국에서 어떤 소년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여러 가지 해 주지만 그 위로의 한계가 있잖아요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운 마음이어서 아들 곁에서 성경말씀을 읽어줍니다. 시편 23편을 읽어주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돼, 네가 힘들 때 아파질 때 이 말씀을 생각하라,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하나님의 너의 목자가 되고 나의 목자가 된다면, 그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 영어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이 다섯 단어로 되어있어요. "The Lord is my shepherd" 이 다섯 단어로 되어있어요 그래서 엄마가 얘, 너 다섯 손가락처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거야 꼭 기억해, "the Lord is my shepherd" 손가락을 이렇게 만지면서 하나님이 네 목자란 것을 기억해 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 아파하는 것을 보고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준비했던 반지, 링을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면서 "네 번째가 제일 중요해, 주 여호와 는 "나의, 나의, 너의" my, my shepherd, "너의 목자야 너의, 하나님이 너의 목자다" 이것만 확신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어느 날 아파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어요 아들이. 병석에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자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새벽에 보니까 벌써 아들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의 이렇게 얼굴을 보고 손을 보다가 엄마가 깜짝 놀랐답니다. 뜻밖에도 이 세상을 떠나간 어린 소년 아들은 오른손으로 자기 왼손에 엄마가 늘 짚어주던 손에 네 번째 손가락, 링이 끼워진 그 손을 잡고 숨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나의 목자시니, 나의 목자 시니"
하나님이 내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죽음의 다리도 찬양하며 건너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부활하여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그가 나를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에 길로 인도하는 도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푸른 초장에서 배부름이 있고 쉴만한 물가에서 쉼이 있고 그분 안에서 영혼이 회복되는 이 진정한 자유, 복음이 주는 기쁨, 이 평안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의 안위
시 23:1-4 / 이동아목사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 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 그곳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어떤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큰 고통을 당한 사람은 작은 고통은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체험을 통해서 주께서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경험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헤매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새의 아들 목동으로 태어나 약관 15세까지 양치기를 하다가 사울 왕의 악사에서 군대장관으로 발탁되면서 골리앗 대장과 숭리한 뒤에 사울의 시기와 질투를 인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삼상18:6-11)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7)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唱和)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 만이로다 한지라(8)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 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注目)하였더라(10)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 서 야료(惹鬧)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삼상18:12-16)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14)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15)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삼상19:9-11)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 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10)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 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11)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12)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13)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14) 사울이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가로되 그가 병들었느니 라(15) 사울이 또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채 내게로 가 져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16)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17)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 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 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 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 수없이 이런 위기의 순간을 만났습니다.
사울을 두려워하여 가드로 도망한 곳에서 생명을 부지하려고 미치광이 행세를 할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가 되셔서 그를 지키셨습니다(삼상21:10-15).
(삼상21:10-15)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 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12)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13)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 염에 흘리매(14)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 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사울이 시기하여 다윗을 죽이려 할 때 황무지 엔게디 광야에서 피신할 때에도(삼상23:29-24:1) 여호와는 다윗의 목자로서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피의 길을 걸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그는 여호와가 다윗의 목자인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으로 보와 양을 쳐본 체험을 빌려 하나님의 안위하심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막데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실 때가 있습니다. (삼하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연단 하시는 하나님의 훈련 방법입니다. 10년 동안을 연단 받았습니다. 요 16:33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10년이 넘은 사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양을 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위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목자들은 여름철이면 그들의 양을 먼 산간 목장으로 이끌어 가게 됩니다. 양들은 풀을 뜯으면서 매일 매일 천천히 이동하는데, 이 여행은 무척 힘들고 지루하다고 합니다. 늦여름쯤이면 멀고 먼 높은 산간 목장에 도달하게 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양들은 저들의 고향 목장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고 합니다. 오랜 여행을 하는 동안 양들은 야산을 통과하고, 시내를 건너고, 험한 골짜기를 지나며, 높은 산을 오르게 됩니다.
가을이 다가오며 고산지대에 첫 눈이 오게 되면 양들을 사정없이 몰아서 낮은 지대로 내려오게 됩니다. 겨울을 날 본부 목장으로 되돌아 오게됩니다. 양들을 고지의 방목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어려움과 위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납게 넘쳐흐르는 강들과 눈사태와 굴러 내리는 바위들과 독풀들과 습격해온 맹수들의 피해 혹은 진눈깨비와 우박과 눈을 동반한 폭풍 등의 모든 위험들이 있을 때 목자는 양들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행에는 수많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독성이 강한 식물의 위험이 있고, 맹수의 습격이 있는가 하면, 폭풍우와 산사태, 시내의 범람은, 항상 위험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간, 충성스런 목자는 한시도 떠나지 않고, 양떼의 곁에서 밤낮으로 정성껏 양들을 보살피게 됩니다. 양들은 감기와 폐렴 그리고 그 밖의 호흡기 장애 등의 합병증에 아주 쉽게 걸리는 민감한 동물입니다.
하나님 떠난 사람들 믿음을 떠난 사람들 말씀을 떠난 사람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보호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푸른 초장과 싈만한 물가와는 대조가 되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을 떠난 곳은 천길 낭떠러지요 위태한 골짜기인 것입니다. 이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라"
1)막대기
능력과 권세와 방어의 무기가 보호합니다. 막대기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권세를 암시합니다, 권징의 차원입니다. 양이 무리를 이탈하여 곁길로 나가거나 독초에게로 접근하거나 위험한 곳에 접근하면 양을 막대기로 때리게 됩니다.
이리 표범 들개와 같은 약탈자를 쫓아 버립니다. 이처럼 막대기는 양과 목자 자신을 보호하는 호신용입니다.
신. 구약 성경 66권을 '정경' 곧 cannon(막대기, 잣대, 척도) 이라고 합니다. 양들이 목자의 숙달된 손에 막대기가 쥐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위로를 느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큰 능력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야말로,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권능의 막대기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사탄과 대결하실 때 사용하신 무기가, 곧 말씀의 막대기였습니다. 이 말씀의 막대기로 사탄을 쫓아 버리셨습니다.
목자들이 사용하는 막대기의 용도에 대해서 살펴보십시다.
고집 세고, 완고하고, 미련한 인생들을 그대로 놔두면,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사랑의 채찍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주께서 여러분을 치신다고 판단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식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위험하고, 참으로 불행한 것은, 하나님 품안을 떠나고, 신앙을 떠나 사는데도, 아무런 어려움이 닥치지 않고,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내버려두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1:24, 26, 28) 하나님께서 무관심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일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는 짓이 하도 못되어서, 부모로부터 버린 자식 취급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 사랑의 채찍의 의미를 잘 아시기 바랍니다.
2)지팡이
지팡이는 양들만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동정과 관심의 상징입니다.
오래 참음과 친절의 개념으로 나타납니다. 갈고리 모양 하나님의 성령의 상징입니다. 위로 혹은 보혜사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自意)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지팡이야말로 목자의 신분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직업인도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양을 관리하고 보살피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소나 말이나 돼지에게는 적합하지 않고, 오직 양에게만 필요해서 고안되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세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양들을 한데 모아 친밀한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데 사용됩니다. 목자는 새끼 양들이 흩어지는 경우, 저들을 어미 양에게 몰고가기 위해서 지팡이를 사용합니다. 암양들은 저들의 새끼 몸에서 사람의 손 냄새가 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손을 사용하지 않고 지팡이를 사용합니다.
2)양들을 인도하는데 사용합니다. 목자는 새로 생긴 길, 위험하고 좁은 길로 양떼를 몰고 갈 때가 많은데, 그 때에 길다란 지팡이로 양들의 옆구리를 살짝 때리기만 해도, 양들은 목자가 원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3)양들을 구출하는데 사용합니다. 양들은 완고한 동물이어서, 종종 엉뚱한 짓을 잘 저지르게 됩니다. 한 입밖에 되지 않은 풀을 욕심내고, 가파른 낭떠러지 가까이 갔다가, 강물에 빠지기도 하고, 깊은 구덩이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때 양을 구원할 유일한 도구가 바로 목자의 지팡이 입니다. 물 속에서, 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양을 건져낼 수있는 것은, 곧 지팡이 뿐이라는 것입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우리는 지난 한 주간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대구 전철 참사에서 보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엄마 지하철 안인데 사고가 났다. 검은 연기가 지금 계속 밀려 들어와 엄마, 숨을 못 쉬겠어.(…) 엄마, 나죽을 것 같애….”(사고 당시 딸과 어머니와의 휴대전화 통화)
“지금 어떻게 된 건가요 제 옆사람 지금 숨넘어갔어요. 빨리 좀 ….(‘콜록콜록’) 빨리!”(사고 당시 119 구조전화)
"사고가 난 것 같아요 아빠 어떻게 해야 해요? "침착하게 행동하고"...(5학년 조효정)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빠, 구해주세요. 문이 안 열려요.”(고등학생 딸이 아버지에게)
“오빠, 영원히 사랑해 ….”(갓 결혼한 20대 여성이 남편에게)
아빠도 엄마도 애인도 119 구급대도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망의 골짜기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오늘 시편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숱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께서 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경험을 한 다윗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구 전철 사고의 현장에서 어머니도 아버지도 애인도 남편도 아내도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한 노인이 어느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하늘에서는 그가 살아온 인생의 모습들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습니다. 몇 장면들을 보다가 해변을 문득 바라보니 모래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스쳐 간 뒤 남자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오랜 그의 인생 길에서 한 사람만의 발자국이 새겨진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너무도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웠던 때에 발자국이 하나뿐인 것을 알았습니다.
노인은 의아해서 주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여, 주님을 따르기로 하였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나와 같이 인생의 길을 걷자고. 그런데,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발자국은 하나밖에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한 때에 왜 저를 떠나 계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난 너를 사랑하여 한번도 너를 떠나 있는 적이 없다. 네가 고통 당하고 슬퍼할 때면 내가 너를 업고 인생의 길을 걸었단다. 모래 위에 새겨진 한 사람의 발자국은 바로 내 발자국이란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위인들은 거의가 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라는 분은 그가 육신의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고통에 처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파스칼이란 분은 말을 타고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밀턴이란 분은 나이 40에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육신의 시력을 거두어 가시고 영혼의 눈을 밝게 떠 주신다고 하면서 실락원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존 번연은 그가 감옥에 들어가 오랜 세월 자유를 잃고 지내는 가운데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감옥 안에서 썼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인생의 길을 인도하셨기에, 신앙인들이 그 고난 속에서도 위대한 신앙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왜 통과하게 하십니까?
(고후1:8-10)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 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9)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 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은혜의 영성으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한 경륜과 계획에 의해서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케 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케 하십니다. (딤후4: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 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류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습니까?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면서 골짜기에 가만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음침한 그늘을 감소하게 하시며 사망을 제거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면 할 수록 골짜기는 넓어지고 골은 깊어질 것입니다. 골짜기에 이를 때에 그곳에서 헤어 나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찾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형벌이 있습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가만이 있어 주안에 안식을 누리십시오.. 풍랑 속에서도 고요히 주무시는 주님의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이번 전철 사고에서도 한 초등학교 학생은 침착하게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코에 대고 어른들의 허리를 잡고 밀려 나왔던 것을 보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골짜기를 경험했다면 그곳은 주님의 임재의 장소요 기적의 장소요 응답의 장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체험합니다. 주님의 지팡이로 보호, 인도, 건지십니다. 막대기로 훈련 연단하십니다.다윗은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하나이다"(시 84:6)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9)고 하였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의 잔치상
시 23:1-5 / 이동아목사
텍사스 휴스톤의 알렌 박사는 '마음에 만족을 가져오는 5단계'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로,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는 연습을 하라고 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분수에 넘치게 탐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적은 소득이라도 조금씩 저축해 가며 살아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축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꿈과 모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만족한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될 수 있는 한 많은 친구를 사귀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최선을 다하면 항상 길이 열리는 것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이 있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면 거기에 길이 열릴 뿐만 아니라 시련과 역경이 도리어 축복으로 변해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렌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만족이라는 것은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자세에 따라서 만족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라서 신체적 욕구 충족만으로 생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표현하고, 탐구하고,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싶은 욕구를 가지는 동시에 그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고 싶어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Maslow(1954)에 의하면 인간은 여러 가지의 욕구를 가지는데 이것들은 단계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첫단계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인데 즉, 먹고 싶은 욕구, 따뜻하게 하려는 욕구, 고통받고 싶지 않은 욕구, 그리고 성적인 욕구를 말합니다. 이러한 욕구는 생물체로 생존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이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다음단계의 요구가 발생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needs)인데 이미 충족된 생리적 욕구를 박탈당하지 않으려는 욕구를 말합니다. 오늘은 의식주 생활이 충족되었지만 내일 일이 불안하다면 생존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안정상태의 유지와 관련된 욕구이며 환경 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려는 욕구입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는 예상할 수 없고 조정할 수 없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려는 욕구입니다.
세 번째 욕구는 소속과 애정에 대한 욕구(belongingness and love needs)입니다. 생물학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다른 사람과 친밀하고 정서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관계를 갖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을 주고 싶고, 또한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가족과 같은 집단을 형성하고 집단의 규범에 속하고 싶어합니다.
네 번째 욕구는 자존의 욕구(self-esteem needs)입니다. 이것을 자기존중에 대한 욕구이며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으려는 욕구입니다. 인간은 힘과 숙달, 자격, 능력, 독립, 자율성, 감당할 만한 능력, 지위, 인정, 주의, 평가 그리고 우월성을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열등감을 갖게 되고 나약해지고 의기 소침하게 됩니다. 자존의 욕구가 충족되면 자신감이 생기고 힘이 커지고 능력이 생겨납니다. 자존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존경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마지막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욕구는 앞의 4가지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된 후에 일어납니다. 자아 실현은 인간의 잠재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 능력의 충족입니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기능적인 자율성이라고 볼 수 있고 자아표현의 강한 욕구를 갖는 사람은 배고픔, 신체적 위험, 기타 다른 형태의 만족을 박탈당해도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탐구, 표현, 창의 등의 욕구이며 이러한 욕구 충족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감정의 잔에 욕구의 잔에 채워지지 않으면 성인아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대체적으로 후회를 많이 하게 됩니다. 이유는 허망한 것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 빈손으로 가면서도 후회가 없다면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을 때가 아니더라도 후회를 많이 합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는 젊은 시절을 후회합니다. 믿음에도 후회가 있습니다. "내가 그때 좀더 잘 믿었더라면" 그런 후회의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까? 제일 아까운 것이 시간입니다. 한없이 있는 것이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갑니다. 헌신의 때, 봉사의 때 젊음은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후회가 없는 사람을 봅니다. 후회가 없는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는 인생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성공한 사람, 죽음 앞에서도 후회가 없는 사람, 사망의 골짜기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 후회가 없는 다윗이라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애매한 일로 10년 이상을 사울왕의 도망을 다니면서 고통의 눈물의 양식을 먹었던 사람입니다. 자식인 압살롬이 아버지인 자신을 몰아내는 고통도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쫓겨가는 설움도 있었습니다. 장인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들고 군사를 풀어서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잘 데가 없어서 엔게디라고 하는 동굴에서 잠을 자는데 사울이 추격해왔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어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후회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후회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인생을 살수가 있을까요?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상을 경험하였습니다.
고원지대의 방목장을 스페인어의 메이사(mesa)로 불린 답니다. 이 말은 영어로 table (상(床),식탁, 고원)이란 뜻입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대륙의 높은 산 위 평평한 고원 방목장을 가키는 데 흔히 사용되는 말입니다.
목자들은 이른 봄 눈이 채 녹기 전에 그는 양떼보다 앞서 이 거칠고 험한 산지로 예비 답사를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장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독풀을 제거하여 양들 앞에 베풀 상을 위하여 여러 차례 답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목자는 약탈자를 감시하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할 대비책을 마련하는 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이 그를 시험하여 밀까부르듯 하리라고 경고하신 일에서 베드로가 당할 절망적인 상황 하에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게 되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 사단과 간계와 술수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에 권세 잡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시편 다윗의 목자로써 경험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속에 원수의 고역과 대적의 모든 현상에서 풍성한 상을 베풀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를 체험한 것입니다.
목자가 양들에게 상을 베풀기 위하여 지불한 희생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양들에게 상을 베풀기 위하여 지불한 희생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과 빌라도의 법정과 갈보리 언덕에서의 외로운 고뇌 또한 말할 수 없는 희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베푸신 우리를 위한 상을 대할 때 예배의 감격과 감동이 다르지 않습니까? 예배를 통하여 이 땅에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며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하러 왔지만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함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잔치)을 배설합니다. (고전10: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우리가 잔칫상을 받기 위하여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때에 원수들의 출현과 방해가 있는 것입니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 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오늘 우리는 생명의 떡상 앞에 주의 잔치에 초대됨으로 원수들의 앞에서 보아란 듯이 베푸는 상입니다. 주님의 상앞에 나오는 것은 푸른 초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꼴을 마음껏 먹는 것입니다. 생명수 시냇가에서 편히 쉬면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공기처럼 마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군대와 싸우는 형들을 위문하기 위해서 전쟁터에 갔다가 이스라엘을 협박하던 블레셋 군대의 대장인 골리앗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8절로 11절은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나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골리앗의 협박과 공갈에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서서 숨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과 언약도 없고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의 골리앗이 누구기에 사실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며 담대하게 골리앗에게 나갔습니다. 다윗은 원수가 다가올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요리상을 베푸시고 친히 원수를 가지고 요리해서 성찬을 만들어 먹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강한 믿음으로 골리앗에게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물 맷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죽였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 목을 베었습니다. 그 결과 블레셋 군대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스라엘 왕을 도움으로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아람왕이 진노해서 엘리사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엘리사가 사환과 함께 도단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이 모든 군대를 동원해서 엘리사가 머무르고 있던 도단성을 첩첩이 둘러 진을 쳤습니다.
다음날 아침 엘리사의 사환이 일찍 일어나서 밖에 나가보고는 혼비백산했습니다. 벤하닷을 비롯한 아람군대가 도단성을 둘러 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사환에게 " 이 사람아! 왜 두려워하느냐? 우리와 같이 계신 이가 저들과 함께 있는 이보다 더많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하나님이여! 이 사환의 눈을 뜨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때 또 엘리사가 "하나님,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즉시 아람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아람군대를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인도해 모두 인질로 잡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들을 박대하지 않고 그들에게 떡과 물을 먹여서 돌려보냈습니다. 그 후 상당 기간동안 아람은 이스라엘을 침공해 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어떠한 원수 중에 있고, 원수가 우리를 지친다 할지라도 원수와 우리 사이에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면서 우리들을 보호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로 15절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리나 맹수가 오면 삯꾼 목자는 양들을 버리고 도망을 치지만, 예수님은 도망치지 아니하고 목숨을 버릴지라도 양을 지키고 양을 위해 헌신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원수가 아무리 둘러 진쳐 올지라도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30미터나 되는 금신상을 세우고 모든 문무백관들을 다 모아놓고 음악은 연주할 때 금신상에게 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도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절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때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기록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세운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 금신상에게 절을 하며 생명을 구해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여 그렇게 하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 내시겠거니와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왕의 신에 절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왕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수들이 자신들을 공격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었으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요리상을 베푸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잡아 7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풀무에 던진 사람은 세 명이었는데 순식간에 네 사람이 손을 잡고 풀무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춤을추는 네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나오라고 하매 그들이 풀무 가운데서 나오는데 조금의 해함도 없고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원수의 목전에서 요리상을 베푸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불을 산책하 에 즐거운 곳이 되게 하셨습니다. 고통과 환난의 자리에서 구해내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 환경이 즐거움이 잔이 되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들을 위해 요리상을 베푸시는 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골리앗을 요리하신 하나님, 느부갓네살의 풀무를 요리하신 하나님, 오늘날 우리와 같이 계시면서 우리들의 원수를 요리해 주십니다.
지금 핵문제로 국제 사회가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1천 2백만 성도가 있고, 5만 교회, 10만 주의 종들이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아무리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상을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심으로 잔이 넘치는 체험을 헸습니다.
주님은 우리 머리에 기름을 바르십니다. (히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여름철의 파리철을 만나게 됩니다. 쇠파리 말파리 발뒤꿈치 파리 코파리 사슴파리 흑파리 모기 각다귀 해충들이 기승을 부린답니다. 코파리는 양의 코에 덮여 있는 촉촉하고 끈적끈적한 점막에 알을 낳을 기회를 노리면서 양의 얼굴을 윙윙거리면서 귀찮게 군다는 것입니다. 이때 목자들은 기름을 양의 코와 머리에 발라주고 코파리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눅11:13)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 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우리 삶가운데 기쁨과 만족과 사랑과 온유와 평안과 같은 아름다운 열매들은 주께서 내주 하신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얻어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여름철은 옴병철입니다. 머리를 부벼대는일을 좋아합니다. 어느 때는 양이 온전히 통째로 약물에 잡기도록 하는 경우도 생긴 답니다.
가을은 암양들이 발정을 하는 시기여서 수양들 사이에 암양을 차지하기 위하여 짝짓기를 하기 위하여 싸움이 벌어진 답니다. 몸통에 서로 상처나 나도록 싸우기 때문에 머리에 온몸에 윤활류를 발라놓는 다는 것입니다.
빈집은 위험합니다. 우리 속에 나간 모든 마귀들이 물 없는 곳 상령없는 곳 기름 없는 곳을 찾아 헤메이다가 찾지 못하고 나왔던 제집으로 돌아와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거하니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악하다고 했습니다. 빈집으로 살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 속에 주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눅11:24-26)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25) 와 보니 그 집이 소제(掃除)되고 수리(修理)되었거늘(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 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주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물과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이렇게 될 때 내 속사람의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디윗은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첨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 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첨예함이 아니냐" 축복의 잔입니다. 은혜의 잔입니다. 다윗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며 기름을 바르시니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고백입니다.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축복의 잔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잔치이신 아들 기름 바르는 성령 축복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 잔이 넘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마름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목말라서 남편을 다섯이나 얻었던 수가 성의 여인이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의 갈증이 해소되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키만큼이나 돈을 쌓고, 명예를 쌓았던 삭개오는 그 많은 부요와 지위가 그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으나 그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과 마음속에 모실 때에 비로서 행복한 삶이 그에게 열렸습니다.
푸른 초장이신 쉴만한 물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목자이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첫단계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누리는 단계 [먹음, 쉼]을 체험합니다.
둘째 단계는 의의 길로 인도하는 단계 그리스도는 목양을 통해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며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소생, 의의 길]을 경험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부활하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십니다.[동행, 해를 두려워 않함]깊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네 번째 전쟁의 단계로 거기서 우리의 대적을 이기게 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십니다. 이 체험을 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 다"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먹이심과 회복하는 역사와 안전과 보호와 승리의 확실한 약속에 근거하여 부족함이 없는 인생 잔이 넘치는 인생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만족과 이 풍성한 생명이 우리 모두에게 체험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원히 거할 처소
시 23:1-6 / 이동아목사
인류 역사중 가장 사치스럽게 인생을 살아간 사람은 불란서 황제 루이 14세입니다. 그는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져보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았지만 그것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해 종래는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여러 유명한 의사에게 진찰을 했지만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의사를 청해서 진찰을 받았더니 "왕의 병은 보통병이 아닙니다. 이 병을 고치려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의 속옷을 빌려 입으면 병이 낫겠습니다" 라고 처방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루이 14세 황제는 행복한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돈 있는 사람도 만났고 지식 있는 사람도 만났지만 그들은 모두 불행 속에 사는 것을 보고 실망 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골길을 지나오는데 나무 밑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하프를 들고 켜며 찬양하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
그에게 당신은 행복하냐? 고 물었더니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루이 14세 황제는 그에게 자기의 사정을 말하며, "당신의 속옷을 얻어 입으면 내 병이 낫겠다"고 했더니 이 목동이 웃으며 옷을 벗는데 속옷이 없습니다. 맨살이 나왔습니다.
그때 루이 14세가 한 말이 유명합니다.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있어도 행복한 사람의 속옷은 없구나" 행복은 권력도 돈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한 목자로 부족함이 없는 삶인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목장에 사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고백함으로 주의 목장을 영원히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 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다윗의 시편 23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5단계의 체험을 공급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체험케 합니다.
첫단계는 교회생활의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에서 양의 문이 되신 주님께 나아와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먹는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자유롭게 방목하는 단계입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수로 마시는 영적으로 어린 단계입니다. 목자의 돌봄과 인도하심으로 전적인 의탁의 단계입니다. 푸른 초장이 교회생활입니다. 목장에 있어야 꼴을 먹습니다. 목장 밖 세상은 독초가 있습니다. 삭막한 사막과 같습니다. 갈급함이 있어야 쉴만한 물가인 교회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양의 문입니다. 들어오며 나가며 생명의 꼴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날 예배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푸른 초장에 누워 생명의 떡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생명을 주는 영 그 영은 말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분의 말씀을 영접하면 우리는 생명이신 영을 영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떡 하나님의 떡입니다. 말씀은 우리 밖에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 영접될 때 그 말씀은 즉시 영이 됩니다.
두 번 단계는 영혼이 소생케 되고 회복되는 체험입니다.
(시147:3) "상심(傷心)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傷處)를 싸매시는 도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痛悔)하는 자를 구원 하시는 도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교회 생활중 인간은 양과 같아서 세상 가운데 때로는 실족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길을 잃고 기진 하여 뒤집혀 쓰러지고 염소의 뿔에 받혀 찔려서 상심하여 마음이 상할 때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주의 영이 영혼을 어루만져 소생케 하시고 회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받으시며 통회하는 심령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푸른 초장의 누림과 쉴만한 물가의 쉼이 필요합니다. 목장을 떠난 양들은 영육이 만신창이가 되어 터지고 부러지고 절며 주앞에 손들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째시기도 하시지만 다시 싸매며 치유하시는 소생케 하여 주님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결단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용납하시며 인도하셔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세 번째 단계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시며 임마누엘 하나님을 체험케 하십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연단 하시며 다윗을 사울왕에게 붙여 10여년 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가두고 주님을 의지하는 공과를 체험케 하신 교회 생활을 말합니다. 형통한 날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엔 주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어느 때는 주의 막대기로 훈련시키십니다. 인간 막대기 사람막데기를 통하여 연단하십니다. 위험한 맹수와 환경으로부터 넘어지고 상처 났을 때 주의 지팡이로 건지시고 안위하십니다. 이런 신실한 하나님을 체험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다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함이라고 고백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십니다.
네 번째 단계는 교회 생활 중에서 전투적인 교회와 승리의 교회를 체험케 하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도 공중에 권세 잡은 불순종의 영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십자가로 마귀의 권세를 멸하신 부활의 영으로 인하여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이기고 원수의 목전에서 잔칫상을 베푼 것처럼 날마다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를 주시는 잔칫상을 베푸십니다.
소련이 공산화될 때 기독교인들은 핍박이 심해 비밀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모두 열 명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비밀경찰에 의해 전원 체포됐습니다.
단 한 사람 두목만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고문하고 죽이며 두목 이름을 대라 했으나 한결같이 결코 너희는 두목을 체포하지 못하리라 하고 죽었습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 사람에게 고문할 때 그 이름을 대고 죽었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우리의 두목 예수 그리스도가 전신갑주를 입혀 승리케 하십니다. 구원의 투구와 의에 흉배와 진리의 허리띠를 평안의 복음이 신발 믿음의 방패 말씀의 검을 통하여 넉넉히 이기고 원수 마귀의 목전에서 날마다 승리케 하신 영적인 승리자로 부활의 주님을 누리게 하십니다.
어느 감수성이 예민한 한 목사님이 10년 간 열심히 기도 생활하신 분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이 분은 17년이나 전신 마비로 누워지내는 분이었는데 10열전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 은밀한 기도생활을 꾸준히 해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큰 은혜로 역사 하시는군요." 목사님이 말하자, 전신마비 걸린 분이 대답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매 순간 내 병실을 풍성한 은혜로 채우십니다."
"그러면 은혜가 많은 곳에 시험도 많은 법인데, 사탄이 여기에 자주 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왜요, 가끔 오지요." "와서 뭐라 합디까?"
"사탄은 거짓의 아비라서 자꾸 거짓말을 합니다. 두마디 말로 저를 가장 많이 속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안 계신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너보다 나쁜 놈이 많고 많은 이 세상에서 네가 17년 간이나 전신 마비로 누워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은 안 계신다' 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다가는 얼른 말을 바꿉니다. '하나님은 계신다. 그러나, 야, 너같은 것은 사랑하지도 않는다. 너를 사랑한다면, 38년된 혈기 마른 사람도 고치고 앉은뱅이도 벌떡 벌떡 일으키신 하나님이 왜 너를 일으켜 주지 않겠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때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아, 네 설명을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은 바로 사랑이심을 알 수 있단다." 이분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리스도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살아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부어 주심으로 양의 머리에 기름을 붓듯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심으로 모든 질병과 충해로부터 보호하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공기와 같은 그리스도의 영을 누리는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단계에서 다윗은 이와 같은 여호와 집에 영원히 거하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윗은 더 이상 바라 것이 없는 목장 선한 목자의 먹이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으로 더 이상 부족함이 없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평안과 만족과 자유가 있기에 방목장을 떠나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것은 부활하여 살아 계셔서 만유를 포함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충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절정은 여호와의 집인 교회 안에서 영생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성전을 말하며 오늘의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목장입니다. 방목장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 몸안에 만물을 충만케 하는 모든 충만이 넘치도록 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급되는 모든 필요에 의해서 잔이 넘치는 삶과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집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거처를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유한 회사로 교회에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시온"이요, "예루살렘"이라고도 하고 "주의 장막"이라고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가나안"이라고도 했습니다. 그곳에 얼마나 아름다운 쉼이 있으면 시인은 고백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시84:1)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했겠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음식이요 음료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도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를 마시고 그리스도를 소화하고 그리스도와 섞여 그리도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그리스도를 가져오고 그들도 그리스도를 날라옵니다. 그리스도가 조직이 되십니다.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를 함께 하나님께 바치고 함께 누리고 그리스도를 전시하여 보여줍니다. 그들은 말할 때마다 예수가 나오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처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섞여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로 적셔진 매일 매일 그리스도만을 가지고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누리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가정이요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이 시편 23편은 언제 불러도 좋은 노래입니다. 우리 인생의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감격이 되고 기쁨이 되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는 이 시편 23편으로 축복해 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이 어린 아이의 목자이시니, 이 아이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늘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청소년기에 때론 방황합니다. 부모의 마음에 걱정을 끼칩니다. 그러나 그 때 아이들을 위해 이 시편 말씀을 들려줍니다. "여호와는 인생의 방황기를 걷고 있는 내 아이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런고로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저를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늘 함께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결혼식장에서도 이 말씀으로 축하해 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두 사람의 평생 목자가 되셔서 부족함이 없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새로운 가정에 그 잔이 넘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병들어 고통 중에 있는 환자에게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실 때에도 감사와 찬송의 하나님이시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에도, 주님은 목자가 되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셔서, 이 질병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에서도 바로 이 말씀은 놀라운 찬송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평생 이 분의 선하신 목자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이 분의 생애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살아생전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시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가 그분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사랑하십니다.(딤전3:15)
(딤전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요한 복음 14:2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합니다. 위 말은 예수님이 우리가 장차 하늘에 갔을 때 살게 될 집을 지으러 승천하신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어 KJV은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mansions...'라고 이 부분을 번역함으로 마치 아버지 집안에 우리가 장차 가서 살 수 있는 많은 '맨션하우스'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굳히게 합니다. 그러나 KJV 이 'mansions' 라고 번역한 헬라어 원문은 'monee'로서 그냥 '거할 곳' 또는 '거처'일뿐 맨션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물질적인 장소나 집'이라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똑같은 단어가 쓰인 요14:23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아버지와 예수님)가 저에게 와서 거처(모네, KJV는 여기서는 'monee'를 'abode'로 바로 번역함)를 저와 함께 하리라'라고 함으로 하나님의 거처가 하늘에 있는 물질적인 맨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 즉 교회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성경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이 지금 물질적인 성전에 거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거하신다고 말합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아들과 함께 교회인 성도들 안에 거하십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2:5).
(벧전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만일 믿는 이들이 죽거나 휴거 되어서 하늘로 올라간 후 저 하늘 어디에 있을 천당에 영원히 살고자 해도, 정작 성경은 성도들이 하늘로의 휴거와 공중에서의 그리스도의 심판대 심판이후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다시 이 땅으로 내려 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래 말씀들은 장차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며 그때 그의 (휴거 했던) 성도들도 함께 데리고 올 것을 말합니다.
1)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3).
2)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4).
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마24:31-13, 19:28, 렘3:17).
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슥14:4-5).
주님의 이 땅으로의 재림 후에 있을 천년왕국은 지금 이 땅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무저갱에 갇혔고 만물이 회복된 이후이기 때문에 마치 이 땅은 에덴동산처럼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인 예배당이나 저 하늘 어디의 맨션하우스에 계시지 않고, 지금 성전 된 우리들인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거처를 짓고 계십니다. 지금 이 집은 단체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영에서 혼으로 또 몸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즉 교회와 교회의 완성인 새 예루살렘이 참된 아버지의 집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이 참된 우리의 영원한 거처입니다(요14:20).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지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 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상과 자치는 그리스도입니다.
기름 부으시는 영입니다. 축복의 근원이신 아버지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누림은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여호와의 집(교회와 새 예루살렘) (계21:2-3)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 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양떼를 떠나는 것입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떼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교회의 집회에서 평생토록 성령의 교통 안에서 우리를 따르는 하나님의 선하심(그리스도의 은혜) 인자하심(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영원히 함께 만날 수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 될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푸른 초장/쉴만한 물가/풍성한 목장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병들고 상한 심령이 고침 받고 치유 받은 영혼이 소생함을 얻는 목장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연단(인내 연단 소망) 되는 목장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전투에서 두목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를 입고 날마다 승리하는 목장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자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기름을 부으시는 성령하나님을 누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는 제자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