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오디세이] 35. 염불사지 아웃사이더 스님, 아미타불 독송으로 왕경을 들썩이게 하다
경주 남산동 일원, 삼국유사는 서출지와 염불사 일원의 칠불암길을 ‘피리촌’이라 불렀다.
8월 경주 남산 동록의 칠불암길은 삼국유사 속 설화(說話)를 풀어내는 꽃길이다. 남산동 칠불암길은 신라시대 의 ‘피리촌(避里村)’이다.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마을’이다. 길의 시작은 서출지를 옆구리에 붙이고 있는 통일 전이며 길의 끝에는 산 능선 아래 칠불암이 있다.
경주 서출지.소지왕때 천천정으로 가는 왕의 길이었다.
서출지는 소지왕과 선혜왕비, 궁궐 분수승이 벌이는 ‘사랑과 전쟁’ 이야기의 무대다. 이 못에서 왕비의 부정을 고발하는 투서가 나왔다. ‘거문고갑을 쏘라’는 글이 왕에게 전달됐고 왕은 갑을 쐈다. 갑 안에서 ‘선혜와 묘심’ 이 죽어 나왔다. 선혜와 묘심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애달파하는 것인가, 서출지 못 둘레에는 100일을 붉게 핀다는 배롱나무가 시립해 있다. 나무는 핏빛 선명한 선홍빛 꽃을 달고 오랫동안 못을 시위하고 있다. 못 안은 ‘순결하고 청순한 마음’을 뜻하는 연꽃으로 가득하다. 왕비의 권위와 영화를 버리고 사랑을 택했던 선혜야 말로 순결하고 청순한 마음을 가진 여인이 아니었을까.
경주 남산동 동서삼층석탑. 양피사지 탑으로 추정된다.
양피사지는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이라고도 한다. 보물 124호다. 절터 하나에 이름이 여러 가지인 이유는 명쾌하다. 문헌자료만 놓고 보면 절 이름을 추정하는 일이 어렵지 않은데 이를 증명할 명백한 고고학적 증거, 유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피사 옆 양피지에 핀 연꽃. 양피지가 서출지라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양피사는 염불사지의 위치로 설명하는 보조 수단으로 쓰였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절 이름은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에 따라 얻은 이름이다.’ 이 대목에서 이 마을을 피리촌 말고도 양피촌이 라고 불렀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양피사지 앞에 있는 못이 양피지다. 못 안 가득 연꽃이 피어 있고 못 둘레에는 꽃댕강나무꽃, 개망초가 절정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염불사지는 양피지에서 약 600m 칠불암 쪽으로 깊숙이 들어앉았다. ‘봉구곡’ 또는 ‘쑥두듬골’이다. 쑥이 우거진 마을이라는 뜻이다. 계곡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는데 여기서부터 평지가 끝나고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이다. 칠불암은 산능선 아래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한다.
염불사지 삼층석탑. 신라의 아웃사이더 염불스님이 아미타불을 염송해 성안 360방 17만호에 아미타불 공덕을 알린 절터다.
염불사지에는 동서 두 기의 탑이 우뚝하다. 폐사지로 방치되다가 2009년 1월 복원됐다. 8세기 통일신라기에 세워졌을 이 사지의 동탑은 역사가 파란만장하다. 오랜 세월 풍파를 겪으면서 쓰러져 있던 탑은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던 해, ‘강제 이주’를 당했다. 경주에 특별히 애정을 쏟았던 박정희정권의 희생물이 됐던 것이다. 불국사 가 전국적인 관광명소였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 신혼여행, 수학여행, 단체 관광의 핫플레이스였다. 관광객들은 불 국사역에 내려 불국사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불국사역 앞에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을 역사적 조형물이 필요했다. 역 앞에 공원을 만들고 공원에 탑을 세웠다. 탑은 신라폐사지에서 징발됐다. 이 탑의 부재가 염불사지 동탑이다. 1층 옥개석은 이거사지의 탑재를 동원했다. 이거사지는 성덕왕릉 근처에 있는 사찰로 성덕왕릉의 원찰도 추정된다. 성덕왕이 행차할 때 여기서 쉬어갔다고 대기실마을이라고도 했다. 현재 청와대에 있는 보물 제1977호 ‘경주방형대좌 석불좌상’ 일명 ‘청와대미남부처’가 이거사지 부처다. 이 불상은 일제 강점기 경주금융조합이사인 고다이라(小平)가 자기 집 정원에 두었다가 1912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불상을 보고 탐을 내자 서울 남산 총독관저로 옮 겼다. 당시 고다이라가 데라우치 총독에게 얼마나 잘 보이고 싶었던지 총독이 관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불상을 옮겼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데라우치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짐작이 가도고 남는다. 차원이 다른 아부의 세계를 펼쳐 보인 고다이라가 그 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
염불사동탑 옆에 ‘전시’된 이거사지 석탑부재. 한때 이 탑의 1층옥개석이 염불사지 동탑부재와 한 몸이 돼 불국사 역앞 삼층석탑으로 조성됐다.
염불사지 석탑과 이거사지 석탑은 2008년 불국사역 앞 ‘위조된 삼층석탑’이 해체되면서 원래위치로 돌아왔다. 이거사지 석탑부재는 이거사지에 있다가 다시 염불사지 동탑 옆에 ‘보관’되고 있다. 동탑 옆에 2열로 정렬돼 ‘전시’되고 있는 석탑부재가 이거사지 탑이다.
염불사 관련 기사는 『삼국유사』 ‘피은(避隱)’ ‘염불사(念佛師)’편에 간략하게 나온다.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다. 마을에는 절이 있었는데 (마을 이름으로) 인하여 ‘피리사(避里寺)’라 고 불렀다. 절에는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그 소리가 성안에 까지 들렸다. 360방 17만 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염불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여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하게 여겨 공경했다. 모두가 염불스님이라고 이름을 삼았다. (그가) 죽은 후에 흙으로 모습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내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는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한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讓避)’라고 하였으니 마을로 인하여 얻은 이름이다.”
염불사지 가는 길에 핀 꽃댕강나무 꽃. 염불사지로 가는 길은 각종 여름 꽃이 흐드러진 꽃길이다.
기사 중 360방 17만 호는 같은 책 ‘기이’편 ‘진한’조에 ‘1360방 55리’로 나오는데 주보돈 전 경북대 교수는 ‘1360방’이 ‘360방’의 표기상 잘못으로 풀었다. 이 일대가 피리마을임은 ‘사금갑(射琴匣)’편에 이미 나와 있다. “왕은 기사에게 명하여 이를 쫓게 하였다. 남쪽 피촌(지금의 양피사촌이니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한참 동안 구경하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때 노옹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리니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라는 대목에서 서출지가 ‘피촌’ 즉 피리촌임을 말하고 있다. 서출지에서 염불사까지는 거리가 1㎞ 조금더 된다. 이 길 전체가 ‘피리촌’이다.
‘염불사’ 편은 ‘피은’ 조에 들어 있다. 피은은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이들에 대한 10개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다. 이 스토리 중 상당수가 숨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소개되는 염불스님의 행적 은 숨어 사는 사람이 하는 일로 보기 힘들다. 우선 염불사의 위치다. 피리촌이라고는 하지만 이 길은 왕이 행차 하던 ‘로열마일(Royal mile)’이다. 로얄마일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과 애든버러성을 잇는 1.6㎞ 왕 의 길이다. 서출지에서 염불사까지가 1㎞ 남짓이므로 신라의 ‘로열마일’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서출지는 488년 정월 보름에 소지왕이 천천정으로 가던 길목이었고 염불사는 8세기 전반 왕실에 의해 조성된 추정되는 칠불암의 입구였다. 1㎞가 조금 넘는 이 길이 왕과 귀족의 주요 이동로였다. 하이 소사이어티 (high society)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핫플레이스였을 것이다. 그러니 위치로 보면 상당히 노출된 곳이지 은거지로 보기는 어렵다.
염불스님의 행적도 숨어 사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눈길을 끌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신비주의를 택했다. 소문이 불길처럼 번질 것이다. 관음신앙이 대세이던 시절에 그는 줄곧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미타신앙을 신봉했다. 염송을 할 때도 고저장단 강약조절 같은 음악적 기능은 배제하고 한결같이 낭랑한 목소리로 진심을 담았다. 음악적 기능을 배제한 염불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360방 17만 호에 스님의 염불 소리가 들렸다는 말은 ‘로열마일’을 지나던 사람들의 입을 타고 소문이 왕경에 두루 퍼 졌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스님이 죽자 스님은 염불사(念佛師)로 피리사는 염불사(念佛寺)로 이름하고 염불스님 소상은 왕경에 있는 민장사에 모셨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염불스님의 일을 왜 ‘피은’ 조에 배치했을까. 염불사 가 있는 곳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마을’ 피리촌이라는 지명이 이유라면 이유가 되겠다. 그보다는 염불스님 의 아웃사이더적인 행적이 더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관음신앙이 대세인 시절에 홀로 미타신앙을 추종 하며 나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아웃사이더, 방외인적인 행적이 일연스님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아닐까. 보편타당 한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독창적인 가치 체계와 진리 속에 숨어 살며 자기 정신세계를 올곧게 지켜나가는 일을 ‘피세은거(避世隱居),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산다’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l 승인 2021.08.05 l 1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