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너무도 아파서
박태언
2월 1일부터 일본강점기동원 피해 신고를 하라는 신문과 방송을 보았다
서류와 자료 준비를 하면서 명절 때 아버님 말씀을 들었다. 다시 되새기자니 다시 한
번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하려고 한다.
오늘 들려준 아버님에 전쟁이야기는 6.25 발발하던 해인 1950년 음력으로 6월 1일이고
둘째 오빠를 낳은 지 삼일 되는 날 시작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 밑에 동생 이였던 셋째
삼촌이 부대에서 도망 나와 집에 숨어있다면서 내무서원이 찾아와 누가 밀고를 한 것처
럼 집에 없는 삼촌을 내 놓으라 하면서 안 내놓으면 형이 동생 대신 가야한다면서 아버
지를 강제로 끌고 가셨다.
그것이 의용군 동원에 계략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아버지는 의용군
이 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시게 되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북으로 북으로 인민군 장교들이 인솔하여 낮엔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사람 눈을 피해 깊은 산 속을 졸면서 걸어갔다.
어둔 밤 가다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
냥 끌고 갔단다. 개성 어디쯤으로 생각되는 곳에서 무슨 일인지 의용군은 놔두고 장교
들이 심각한 회의를 하더니 하나하나 도망을 쳤다. 이에 국군을 찾아가 자수를 했더니
무조건 차에 태우고 배에 태워 끌려서 당도한 곳이 거제도였다. 6월에 한국 전쟁이 나
서 끌려간 사람이 거제도 당도하니 벼가 누렇게 익은 가을이었다.
아버지를 논으로 밀어 넣고는 물이 아직 질벅한 논배미에 그대로 나락를 쓸어 누이고
는 거기서 잠을 자라고 했다. 늦가을 추위와 습기가 너무 많아 설사병에 걸려 죽는 사람
이 거의였다.
고향에서 가신 친구 분들도 거기서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참으로 통곡 할 일이다. 말 한번 잘못하면 인민군끼리 좌익우익으로 서로 몰아 드럼
통에 집어넣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여러 번, 죽은 시체를 바다에 버리면 그만, 그리
고 산등성이에 파놓은 구덩이에 수십 체의 시체를 묻어 지금도 땅을 파면 유골을 셀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제도에 산성을 쌓는데 무거운 돌을 감시 감독 하에 날라 쌓고 하루 한 끼 식사로 버
티시기도 하셨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민군 포로로 자기나라 같은 동포끼리 싸우는 포
로수용소에서 그 지긋지긋한 생활을 성치도 않은 귀와 우골 먹은 몸으로 시작하시게 된
다.
참으로 어이없고 기가 막히는 일이다.
어머니는 아들 낳은 지 삼일 만에 끌려가 어수선한 세상과 소식 없는 아버지는 필경
죽었을 거라고 재가하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는데 어머니는 편지 써주면 보내준다는 신
문을 보고 편지를 보냈는데 아버지는 거제도 당도 전에 편지를 받고 보고 또 보면서 그
힘든 일을 참을 수 있었다고 하신다. 지금처럼 그 시대엔 TV나 라디오가 그리 흔한 시대
가 아니었으니 상세하고 빠른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고 본다.
아버지께서는 답장도 할 수 없는 곳에서 어머니 편지를 읽고 또 읽어 가며 만 3년 동
안 피눈물 나는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하신다.
만 3년 뒤에 닳고 닳아 다 펴진 편지를 가지고 오셔서 어머니와 밤새 울던 날이 음력
칠월 초이틀이라고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신다고 증언을 해주셨다.
어머니는 1950년 1951년 1952년을 다 보내고 오신 아버지, 일제 때는 고막파열로, 거
제도에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병든 몸으로 버티셨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대학동문에서 여행 스케쥴 중 거제도가 있어 다시 가보니 비디오 틀어주었다.
행여나 거기 아버지에 젊은 날의 영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열심히 보았다. 보
리밥 한 그릇씩을 주는 장면을 보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어린이와 이 장면을 보다가
하는 말이 "수용소에서 밥 잘 먹고 편히 살았구먼" 하는데 가슴 아픈 본인과 자손들에
마음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관계당국에서 한 그 멘트가 고생을 안 한 것 같은
뉘앙스가 풍기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당국에게 꼭 물어 보고 싶다. 준비된 자료가 그 화면뿐이었을까? 편히 먹고 재워 주
었는가 하고, 어느 한 부분만을 보여 주기보다는 표현 화면에 사실화 된, 진실한 면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하루 한끼, 심한 노동, 쉴 새 없이 채찍으로 다스리는 짐승 같은 생활을 이해는 못한
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있을까 한다. 친구들도 돌아가시고 홀로 돌아오신 아버지, 시
대에 부산물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순박하기만 한 농촌 청년이 나라에 저
항이나 거역은 상상도 못 할 일이고 이리 저리 전쟁에 끌려 다니느라 20대를 고스란히
나라에 바친 분이 아버님이시다.
왜정 때 군인으로 끌려가 생긴 후유증으로 늘 폐결핵 치료 주사를 맞으며 생활하셨고
약해진 몸 후유증으로 종기로 생긴 농 을 치료하던 모습을 매일 보면서 자랐다. 딸로 언
제나 못 알아들으시는 아버지를 껴안고 안타까운 대화를 할 때는 늘 귀에 대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다.
보청기를 끼고서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남들이 보면 다정하게 얘기
한다고 보기 좋단다. 허지만 내 가슴엔 울분과 아려오는 이 아픔을 그 누가 정말로 이해
할 수 있을까?
묻어 두었던 울분이 다시 고개를 들고 올라온다. 알아듣지 못함으로 인한 대인 기피
증, 정신분열증, 그저 말 걸어오면 어정쩡한 미소만 지으며 피해 버리시는 등 굽은 우
리아버지, 오늘도 알 수 없는 미소만을 보내신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도 좋으신 듯 딸
을 보며 웃으신다.
나는 이만큼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가슴에는
눈물로 가득 고이는 내 마음은 감출 수가 없으니 말이다.
세상을 잘못 만나 당한 고통이라기에는 너무도 큰 형벌이다. 아버지에 알아듣지 못하
는 답답함을 평생 지니고 사시는 아버지는 말씀 하신다. “이나마 느이 엄마 정성이 아
니었으면 나는 벌써 죽었을거여." 하시는 아버지, 불쌍하신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여든 셋이 되신 나의 아버지! 오래오래 사시어 미약한 딸에 효도를 받으시기를 빌고 또
빌어봅니다.
2005/23집
첫댓글 묻어 두었던 울분이 다시 고개를 들고 올라온다. 알아듣지 못함으로 인한 대인 기피
증, 정신분열증, 그저 말 걸어오면 어정쩡한 미소만 지으며 피해 버리시는 등 굽은 우
리아버지, 오늘도 알 수 없는 미소만을 보내신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도 좋으신 듯 딸
을 보며 웃으신다.
나는 이만큼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가슴에는
눈물로 가득 고이는 내 마음은 감출 수가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