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서도 적었다시피 석공(찬자에서 수정합니다)이 정부에게서 받은 텍스트를 받은 것이 있지만, 석공이 너무 크게 글씨를 쪼아 내려가다가 실수를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비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 공간을 주지 않고 빈틈없이 빽빽하며 평균 글자 크기도 유래 없이 큰 편이라고 합니다. 중원이나 백제 사택지적비, 신라 진흥왕순수비 등 다른 국가들의 금석문을 비교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것들은 비록 크기는 광개토태왕비문보다 작지만서도 깔끔하게 여유분도 주고 글자 크기도 거의 일정하게 적을 내용은 다 적습니다. 즉, 몇 배나 큰 광개토태왕비문보다 공간 활용을 잘한 셈입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한학 수준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글자를 새기는 석공의 역량문제입니다. 광개토태왕비의 석공은 엄청난 크기의 원석에 글씨를 빽빽하게 여유분 없이 새김에도 불구하고 글자 크기를 조절하지 못한 탓에 공간 활용에 실패한 것입니다. 원석임을 감안하더라도 글자 크기의 최소치와 최대치의 편차는 상당히 심한 편입니다. 장수태왕이 정말로 부왕을 기리기 위해 제대로 만들고자 했다면 원석부터 깔끔하게 잘 다듬어서 글자 크기 관련한 애로사항도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석을 깔끔하게 다듬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과정을 생략하고 덜 다듬은 원석에 바로 글자를 새기는 졸속과정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장수태왕의 광개토태왕비 건립목적의 최우선순위가 부왕을 기리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석공의 실수에 의해 원래 텍스트에 비해 비문의 내용이 다소 변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비문 전개에 큰 무리가 없다면 장수태왕 입장에서는 관용으로 봐줄 수 있는 사안의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광개토태왕비는 크기로 인한 과시용의 성격이 강하며 만인이 쉽게 볼 수 있는 비문이 아닙니다. 중원 고구려비만 해도 탁본을 뜨지 않고서는 육안으로 글자 확인이 어려운데, 엄청난 높이의 광개토태왕비를 누가 처음부터 읽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삼엄한 경비로 인해 비문에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입니다. 광개토태왕비문의 건립목적이 광개토태왕의 훈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 하지만, 탁본을 받아서 읽을 수 있는 소수의 지배층에 한할 뿐 반드시 만인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물전사님과의 이번 토론 원인은 비문상 동부여 전역에서 고구려가 공파한 64개성의 이름들이 생략된 원인에 대해 제가 김태식 기자의 견해를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제 생각에 장수태왕 입장에서 동부여 전역에서 얻은 64개의 성을 일일이 적든 안 적든 그것은 크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일이 다 적으면 자세해서 좋겠지만, 그것을 다 적지 않더라도 고구려가 동부여의 64개의 성을 공파한 사실은 변함없으며 비문 전개에도 큰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김태식 기자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더라도 제 논지에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김태식 기자의 견해를 수용한 이유는 구조가 비슷한 영락 6년 조에 비해 영락 20년 조가 지나치게 간략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영락 20년 조만 생략이 됐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 영락 6년 조에서 전투과정과 58성을 거의 일일이 기재한 것에 비해 영락 20년 조는 전투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 채 중국 사서에도 자주 나오는 수사적인 표현인 온 나라가 놀랐다고 표현을 할 뿐 전과로 합산수치인 64성 1,400촌만 나옵니다. 비문에서는 영락 6년 조뿐만이 아니라 영락 17년 조에서 보이듯 공파한 성의 이름들을 예외 없이 일일이 기재합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영락 20년 조의 전과에 대한 기술상의 차이는 분명 존재합니다. 저는 이러한 차이가 생긴 원인을 현재로써는 김태식 기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의 견해를 주석으로 단 것입니다. 혹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에 대해 다른 좋은 의견을 갖고 계신다면 김태식 기자의 의견 수용을 철회하고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첫댓글 제가 명치호태왕님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한 부분도 김태식 기자의 주장 부분에 국한된 것입니다. 나머지 부분까지 현재로서는 태클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뭐 그것도 반드시 님의 주장이 옳다고 느끼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자연석에다 새긴 것이 졸속과정이라...석공의 역량을 기본적으로 파악 못할 정도로 엉망으로 비문이 무계획적으로 새긴 것이라...탁본을 받아보기 위해 비문을 만들었고 삼엄한 경비...? 님의 주장에 따르면 대충 만든 비문인데 왜 삼엄한 경비를 할까요? 탁본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하시는 말씀인지...?
물론 능비의 내용을 모든 백성들이 한자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다 이해를 못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글쎄요...저도 딱히 대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님의 답변을 보니 더 이상 토론을 해봤자 평행선만 달릴 뿐이라는 것을 재삼 느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질문에 대한 것은 답변 드리겠습니다. 원석을 다듬는 기술이 있음에도 원석에 새긴 것에 의문이 있어 졸속으로 추정한 것입니다. 석공의 역량은 원석에다가 예서체를 새길 정도이니, 기본적으로 뛰어난 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글자크기의 조절을 수월하게 할 정도까지의 역량은 부족한 것으로 봅니다. 원석인 탓이 크겠습니다만. 사실 비문의 석공은 영락 6년조에서도 성 2, 3개를 기재하지 않는 실수를 하기도 하는데, 그 역시 사람이기에 실수를 했을 것입니다. 삼엄한 경비는 그래도 일국의 군주의 비인데,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문은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훼손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경비를 했을 것 입니다.
또한 크기에 의한 과시용일 수도 있는 만큼 경비도 붙여서 위엄을 돋보이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만들어놓고 경비도 없이 방치한다는 것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탁본의 근거는 태왕의 훈적을 비를 세움으로써 후세에 알리고자한다는 비문의 내용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광개토태왕비의 글자는 아무리 한문에 능숙한 사람이더라도 육안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비문의 내용을 전하려면 탁본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수묘인 내용은 관리들에게 하는 경고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꼭 탁본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비문의 내용을 전할 수 있겠지만 탁본도 그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되기에 언급한 것입니다.
저 역시 토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