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다해 사순 제1주일 (3월 6일)
*제1독서: 신명 26,4-10 (선택받은 백성의 신앙 고백)
*제2독서: 로마 10,8-13 (그리스도 신자의 신앙 고백)
찬미 예수님,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지난 재의 수요일을 거룩하게 보내셨습니까? 다들 단식과 금육재는 지키셨지요? 저는 원래 아침은 요구르트를 마시는 정도로 가볍게 먹기 때문에 점심식사를 하고 저녁을 단식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전에 얼마나 허기가 지는지 잠이 오지 않아서 고생했습니다. 나중엔 참다참다 도저히 안돼서 쿠키 한조각을 먹고 말았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사람이 한끼만 굶어도 오만 가지 갈등과 잡념에 휩싸여 바른 생각과 판단, 말과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먹는 욕구, 배고픔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능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과 동물 간의 구별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원초적인 욕망이기도 합니다.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합류했다고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밥을 굶는 노숙인들, 독거 어르신들, 보호자 없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우리 교구에서도 조만간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한다고 하니 자원봉사활동을 비롯하여 많은 관심과 후원을 바랍니다.
단식과 금육이라는 신앙의 재계를 지키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성찰하는 사순 시기가 개인의 소박한 회개를 넘어서 우리 사회 전체가 하느님 나라 실현을 위하여 공동선을 추구하는 더 좋은 공동체로 변화하는 데 우리의 역할과 소명은 무엇인지 깨닫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이런 넓은 차원에서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단식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는데,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 시장하셨다고 합니다. 죄 말고는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으셨던 예수님의 배고픔은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 참으로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며, 그분의 상태는 허기에 지친 동물과 다를 게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악마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리고 해 보시오.” 하고 달콤하게 유혹을 해왔습니다. 솔직히 “빵”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다른 것은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이었을텐데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머무는 순간, 가장 먼저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이 떠올랐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나치의 유다인 포로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 탈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포로들 중 10명을 뽑아 ‘굶겨 죽이는 형벌, 아사형’에 처하려는 순간, 콜베 신부님은 포로 한 명을 대신하여 자발적으로 독방에 갇혀서 굶어 주는 고통을 당하시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예전에 유럽성지순례 중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아우슈비츠에 직접 들러서 신부님이 순교하셨던 독방을 방문했었는데, 어두컴컴하고 좁디 좁은 단칸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신부님의 사진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굶어 죽는 과정은 이루말할 수 없이 참혹하다고 하는데, 육체가 바짝 말라가는 고통은 물론 특히 정신이 점점 망가지면서 극심한 공포을 느끼는 중에 온갖 무시무시한 환상을 겪는다고 합니다. 참수형이나 교수형처럼 순간적인 고통이 아니라 지속적인 고통 중에 몸과 마음, 정신까지 완전히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을 살리기 위해 배고파 굶어죽는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자신을 희생한 콜베 신부님의 순교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고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명명백백하게 증거하는 위대한 모범이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콜베 신부님 순교의 의미를 떠올리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신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신적 권능으로 자기자신의 욕구나 이익을 채우고 싶은 일체의 이기심을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경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전부 주겠다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셨던 것도,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 뛰어 내리라는 악마의 끈질긴 요구를 거부하셨던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군중을 위해서는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차고 넘칠 만큼 많은 “빵의 기적”을 베푸셨지만 정작 사십 일 넘게 허기진 자신을 위해서는 돌덩이 하나도 빵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셨으며,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오빠 라자로를 되살려주셨지만 정작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는 “너 자신이나 살려보아라.”라는 조롱과 모욕조차 기꺼이 받아들이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고 희생하셨지만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에는 아무런 힘도 권한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 6,9-10).”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발표하신 이번 사순 시기 담화의 주제 말씀입니다. 담화의 주제 역시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 신앙인이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 곧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선행의 씨앗을 뿌리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온 지난 삶을 철저히 반성하면서 예수님처럼 하느님 말씀으로 악마의 온갖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도록 영적인 힘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그 뜻을 성찰하는 데 더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입시다. 그리고 나의 능력과 권한과 재물과 시간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명심하고 감사하면서 이번 사순 시기를 사랑과 희생의 뜨거운 시간으로 하루하루 기쁘게 채워나갑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