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벌교읍 보성여관 ?ㅡ
1935년 건립된 일본식 전통 료칸(旅館) 2층 목조건물이다.
1층 온돌, 2층 다다미 4칸 연회장이던 처음용도 그대로다.
오늘날 5성급 호텔로 모임, 파티, 상거래 등이 이루어졌다.
2004년 등록문화재 132호로, 보성군 태백산맥길 19에 있다.
2008년 문화재청이 대지 529㎡과 연면적 416㎡을 매입해서, 2012년 중건 개관하고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운영 중이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이기도 하다.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의 숙소였던 남도여관이다.
<태백산맥>은 1945년 해방부터 1953년 휴전협정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지만, 중심인물과 공간은 다 벌교다.
그들이 쏟아내는 걸쭉한 육담과 전라도 우리말 사투리,
홍교부터 철다리, 부용산, 벌교역 차부 등이 너무 친숙하다.
“워메 내 새끼 꼬막 무치는 솜씨 잠 보소, 저 반달 겉은 인물에 손끝 엽렵허기가 요리 매시라운 니는 천상 타고난 여잔디. 금메, 그 인물 그 솜씨 아까워 워쩔끄나 와.”
무당 월녀가 딸 소화를 칭찬하면서도 한탄해지는 소리로,
매시랍다는 손끝이 야무지고 하는 일이 깔끔하다는 뜻이다.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는 10권 <태백산맥> 의 한토막이다.
벌교(筏橋)는 포구에 놓인 뗏목다리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홍(예)교 자리다. 1728년 유실되며 선암사 초안선사가 승선교처럼 쌓은 반원형 돌다리다. 80m 중 현존 세 칸 24m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가 됐다. 그런데 덧대어진 현대식 다리는 조화로워 보이지가 않는다.
아치를 뜻하는 무지개형상 홍예(虹霓)처럼 되게 해야 한다.
벌교는 1937년 읍이 되며, 목포와 광주 다음으로 번성했다.
1930년 말 광주~여수 철도가 개통되며 벌교역을 중심으로 주먹자랑, 돈 자랑 마라했지만 이제는 어디로 다 가버렸다.
그래도 매일 서는 장과 사계절 초장집 맛은 그때 그대로다.
벌교는 또한 민족음악가 채동선, 대종교 창시자 나철, 뿌리깊은나무 한창기, 제석산과 부용산의 고향땅이기도 하다.
부용산(芙蓉山)은 해발 192m 야트막해도 노래가 된다.
박기동 시에 안성현이 애처롭고 서정적인 곡을 붙였다.
그런 연유로 조선인민유격대원 빨치산의 애창곡이 된다.
본래는 벌교보통학교 재직 시인이 누이를 잃은 슬픔을 담은 시였다. 그 비극은 1948년 목포항도여중(목포여고)에서, 애제자를 폐결핵으로 또 잃고 만다. 이때 곡이 붙여졌다. 동료교사였던 안성현이 625 전후로 월북하며 문제가 된다.
이후 금지곡이 되고 박기동은 1951년 교직을 그만뒀지만,
계속된 사찰로 급기야 1993년 호주로 단신이민을 떠난다.
그런 사실이 1997년 안치환과 1998년 방송으로 알려지며,
긴 고난은 ‘부용산오리길’과 목포여고에 시비가 되고,
2003년 귀국하여 아들과 지내다가 이듬해 생을 마감한다.
벌교가 이어가야 할 많은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벌교천의 갯벌과 갈대무리의 소리마냥 그 끝이 없다.
태백산맥문학관의 작품 설명과 작가의 필기구, 문진 돌, 80년대 군사정권의 두려움에 쓴 유서, 16,500매 육필원고, 아들부부의 필사본이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를 담은 것처럼 발굴해야 한다.
벌교 보성여관에서 발견한 또 다른 남도의 가치다.
이제껏 몰랐다니 부끄럽기도 한다. 늘 다시 찾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니 혼자라도 기대며 보듬고 싶다.
그림 속 문학기행 길에서 옛 시간으로 되돌리고 싶다.특히 보성여관과 읍사무소에소장중인 벌교출생 꼬막화가 춘포김성수 화백의 수작 뻘배를 타고 뻘밭 꼬막채취하는 꼬막아낙들의 노동의 실경작품들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아울러 벌교를
지날 때마다 그 가곡이 스민 녹차 한 잔을 더 하다가,보성녹차와 벌교꼬막과 전동리녹차막걸리가 모두의 입 맛을 유혹하는
참맛이 살아있는 토속적 진미로 벌교읍을
최고관광지로 추대 하고 싶다.끝.ㅡㅎㅎ
첫댓글
ㅡ꾸벅요 고마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