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양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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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한주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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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기사해제(解題)
이 문헌은 홍주의병에 참가한 체험자요 학자인 임한주(林翰周)가 저술한 것인데,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의 족제 달한(達漢)이 침판(鋟板) 본으로 수십 부를 제작해서 측근자에게만 제공한 것이었다.
내용은 을미(乙未)년(1895) 명성황후(明成皇后)시해사변을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무렵, 김복한·이설(李偰) 등이 상소문·격고문 등 문서활동을 통해서 대중을 분기시키던 사실과, 당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서 선행 방법으로 관찰사 이승우(李勝宇)를 명목만이라도 홍주의병에 앞장서게 했던 내력 이야기와, 병오(丙午)년(1896) 1월 17일,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이 홍주에 모여서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하고 각처에 통문을 돌리고, 이승우도 군사를 모집하는 전령을 내렸으며, 이설을 맞아 임금께 올리는 소장(疏狀)과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글을 기초하게 한 사실들이 적혀 있다. 그런데 이승우는 처음에는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라는 직위를 가졌었으나, 본시부터 의아심을 품고 있던 차에 의병 궐기는 잘 진전이 되지 않고, 그 위에 내심 의병을 반대하는 아전 이주승(李周承) 등이 의병이 성공할 가망이 없음을 말하고, 또 강호선(姜浩善) 등이 마음을 흔들어, 김복한을 만나, 지금 고을 안에 있는 선비들이 호응하지 아니함을 들어 트집을 잡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이승우는 배신하여 김복한 이하 우국지사들을 잡아 가두던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이같이 이승우에게 체포된 의사 김복한·이설·안병찬·이상린(李相麟)·홍건(洪楗)·송병직(宋秉稷)·임승주(林承周) 등 6명을 홍주7의사(洪州七義士)라고 일컫는데, 그 뒤에 임금의 칙서로 석방되었다. 그 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복한·이설 등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무저항운동으로 국권회복을 모의하다가 수차 감금을 당하고, 병오(丙午) 4월 26일에 민종식(閔宗植)을 총수로 하고 의병을 일으켜, 홍주를 무대로 왜적과 싸워 윤4월 초9일(1906년 5월 31일) 적을 패주케 했으나, 미구에 적의 대군이 사방으로부터 모여들어 도로 패배를 당하여 민종식 이하 의병들이 탈주하던 이야기와, 민종식을 감추어 보호해 준 이남규(李南珪) 부자가 일병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과, 패전한 뒤에 적에게 체포된 83명 중에서 이식(李侙)·유준근(柳濬根) 등, 홍주의사 9명이 대마도로 잡혀가던 사실 전말이 소상하게 적혀있다.
그러므로 이 문헌은 의사(義士) 이용규(李容珪)전과 함께 홍주의병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는 쌍벽이 되는 좋은 자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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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기사(洪陽紀事)
팽성(彭城) 공우(公羽) 임한주(林翰周) 지음
나라가 장차 망할 적에는 반드시 소인들이 나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며, 내란을 빚어내어 적국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있는 반면에, 또한 반드시 충의의 인사가 몸을 던져 나라에 순절하고 대의를 외치며 원수놈을 토벌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지 않으면 천하의 큰 윤기가 밝혀질 수도 없고 난신적자의 죄상이 드러날 수도 없는 것이라,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멸망을 구출하지 못한 것은 천수(天數)요, 끓는 물 속에 뛰어 들고 새파란 칼날에 부딪쳐 혹은 죽고 혹은 사는 것은 명이다.
명(明)나라는 망하고 우리나라만이 상기 보존되었으나, 옛날 중국의 빛나던 문물과 예악은 보존되어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해져서 마치 하나 밖에 없는 큰 과일이 그것마저 따먹히고 만 것같이 되었으니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지 않는 적이 오래인지라 지사와 인인(仁人)의 통탄이 어찌 나라 망하는 일에만 그칠 따름이랴.
흥기한 나라는 당장에 흥기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유래가 있고, 멸망한 나라도 당장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역시 반드시 그 유래가 있다. 저 중국을 보라. 간당(奸黨)과 위학(僞學)의 집단이 실로 금·원(金元)의 화를 불렀고, 절림(浙林)이 서로 분쟁하여 만청(滿淸)의 침입을 열어 준 것이다.
무릇 군자를 등지고 소인끼리 당을 하며 자기만 살찌고 백성을 여위게 하여 내부가 이미 손상되면 외사(外邪) 마침내 침입하고 만다. 그래서 첫번에 병인(丙寅)년 양란(洋亂)이 있었고, 두번째로 병자(丙子)년 통상조약이 있었으니 밝은 사람은 싹트기 전에도 볼 수 있는데, 하물며 이미 나타난 데 있어서랴.
벽산(蘗山)[李恒老]·중암(重庵)[金平默] 이하 여러 군자가 피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걸고 입이 마르도록 언쟁하다가 혹은 귀양가고 혹은 죽었다. 마침내 울타리가 한 번 철거되자 다른 종족이 밀려들었으니 당시 나라를 그릇되게 한 역신(逆臣)들은 비록 능지처참을 당한다 해도 어찌 속죄할 수 있으랴.
이로부터 20년간에 당화와 난리가 함께 시작되어 마침내 갑진(甲辰)·을사(乙巳)년의 변고를 불렀은즉 하늘이 멸망시키려고 드는 바에야 그 누가 일으킬 수 있으랴.
비록 그러하나 중화(中華)의 일맥을 하늘이 영영 끊어 버릴 것인가. 선왕의 끼친 덕택을 백성이 영영 잊어버릴 것인가. 시국이 어찌할 수 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오, 또 내 힘은 약하고 적은 강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오직 앉아서 망하기만 기다리는 것보다 한 번 싸우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불행히 실패하여 죽을지라도 역시 대의를 천하에 떨치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 창의한 여러분의 뜻도 역시 이와 같을 따름이리라.
대의를 제창한 것도 실상 홍양(洪陽 : 洪州)에서 시작되었고 창의하여 성공이 없을 징조도 역시 홍양에서 시작되었으므로 홍양기사(洪陽紀事) 1편을 짓게 된 것이다.
옛날 명(明)나라 말엽에 장헌충(張獻忠)·이자성(李自成) 등이 굶주린 백성을 선동하여 난리를 꾸몄었다. 그래서 숭정(崇禎) 갑신(甲申)년에 의종황제(毅宗皇帝)가 마침내 그 민란으로 말미암아 사직(社稷)에 목숨을 바치고 청(淸)나라 사람들이 연경(燕京)에 들어오자 명나라도 따라서 망해 버렸다.
그 후 2백 50년을 지내 갑오(甲午)년을 당하여 조선에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척신(戚臣) 민영준(閔泳駿)이 일본 병대를 불러 들여 토벌했다.
이듬해 을미(乙未)년에 적신(賊臣)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으로부터 본국에 돌아와 외세를 빙자하고 임금님을 협박하여 종래의 제도를 변경하고 검은 색을 숭상하니, 조정에 있는 벼슬아치들이 머리 깎는 자가 많았다.
가을 8월 20일. 적신(賊臣) 김홍집(金弘集) 등이 왜놈을 끌어 들여 왕비(王妃) 민씨를 시해했다.
겨울 11월 15일. 여러 적신이 무기로 협박하여 임금님이 머리를 깎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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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전승지(前承旨) 김복한(金福漢) 등이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많은 군사가 아직 모이지 않아서 미처 성토를 못하고 있던 중 관찰사(觀察使) 이승우(李勝宇)에게 잡혀 갔다.
앞서 국가가 왜놈과 더불어 화친을 통할 적에 임금과 신하가 모두 무사태평에만 심취해서 자강(自强)할 것을 힘쓰지 아니하니 왜놈이 마침내 빼앗아 삼킬 뜻을 품고 날로 그 틈을 노렸다.
박영효란 자는 영효왕(英孝王)[哲宗]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로서 가만히 분수 아닌 뜻을 품고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서재필(徐載弼)·서광범(徐光範) 등과 더불어 역적모의를 하다가 실패하여 마침내 일본으로 달아났으니 이들이 바로 갑신(甲申)년 5역(五逆)이다.
이 때에 직위에 있는 자들이 거의 국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사리사욕에만 급급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백성의 재물을 박탈하여, 10년 사이에 나라 형세가 날로 위태롭게 되어가니 필부(匹夫)가 난리를 일으키매 8도가 향응하여 무매한 민병(民兵)[漢池之兵]이 온 나라에 가득했다. 이것이 바로 갑오(甲午)년 민란(民亂)이다. 그 괴수가 처음에 요사한 술법으로 군중을 현혹시켜 동학(東學)이라 칭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동비도(東匪徒)라 일커렀다.
김복한(金福漢)은 안동(安東) 김씨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온갖 서적을 범람했는데, 더욱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을 좋아했다. 과거에 급제하여 시종관(侍從官)이 되자 임금의 덕을 보좌하는 데 뜻을 두고 매양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왕세자(王世子)를 위해 정성껏 학문의 도를 진술하였다.
나라 일이 날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자 충성을 바칠 길이 없어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옛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으니 바로 홍주성 밖 마을이었다.
이때 홍주목사(牧使) 이승우(李勝宇)가 사람됨이 민첩하고 지혜가 있어 자주 꾀를 내어 동비(東匪)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기로 마침내 관찰사(觀察使)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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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되었다. 그래서 관찰부를 홍주에 설치함으로써 위엄과 물망이 매우 중하였다.
을미년에 이르러 여러 적신이 변란을 일으켜 민심이 몹시 울분한데 또 머리 깎으라는 본의 아닌 명령이 내리어 선비들에게 미치니, 승우는 벼슬을 버리고 본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이윽고 머리를 깎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내부(內部)에 보고했다. 바로 11월 26일이었다.
전번 8월 변란이 생긴 직후에 김복한(金福漢)이 그 내종형 전승지(承旨) 이설(李偰)과 더불어 이승우에게 창의할 것을 힘써 권했으나 승우는 듣지 아니했고, 선비 안병찬(安炳瓚)도 역시 때때로 승우에게 권했으나 매양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안병찬은 순흥(順興) 안씨인데 본래 성품이 강직하여 애매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며, 비록 일찌기 세력가에 출입하기는 했지만 가정적 교양이 있어 의리의 큰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때마침 본부 향교(鄕校) 소임이 되었는데, 하루는 임한주(林翰周)를 찾아왔기로 한주는 물었다.
“근일 사태가 어떻게 되는가.”
병찬은 문득 통탄하여 대답했다.
“단발령(斷髮令)이 내렸으니 우리는 장차 어찌하랴.”
그는 언사가 격분하며 눈물이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병찬이 떠나자 한주는 혼자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 사람의 뜨거운 눈물이 어찌 까닭없이 나왔겠느냐. 그는 반드시 머리를 깎지 아니하고 구차히 살지는 않을 것이다.”
11월의 변을 당하자 이설(李偰)이 이승우를 만나보고 밤을 새워 울며 권하니 이승우는 종시 듣지 아니하였다.
이설은 마침내 술잔을 던지며 통곡하고 나와서 김복한에게 말했다.
“이승우가 죽음을 무서워하니 족히 더불어 일을 할 수 없은즉 우리는 상소(上疏)하고 역적을 토벌할 따름이다.”
복한은 평소의 분심을 품고 있는지라 노상 답답하여 여러 적신과 함께 살고자 아니했는데 더구나 머리 깎는 일은 큰 의리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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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을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대부(士大夫)가 죽을지언정 어찌 머리를 깎여가며 구차히 살겠느냐. 비록 그러하나 초야에 있는 신하가 해볼 만한 권력이 없고 또 제몸을 깨끗이 하여 선왕에게 바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복한은 다시 가만히 승우에게 말을 했다.
“의리상 당연히 해야 할 것은 성패를 가릴 까닭이 없다. 공은 저 옛날 안중후(安衆侯) 유 숭(劉崇)의 일을 알지 않는가. 왕망(王莽)을 토벌하고자 하여 수백 명 군사로 완현(宛縣)을 공격하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주자(朱子) 강목(綱目)에 오히려 칭찬하였으니 인생이란 결국 죽기 마련인데 무엇이 겁나서 이러는가.”
승우는 종시 굳이 사양하고 또 함부로 말하다 화를 당하지 말라고 경계하므로 복한은 탄식하고 나왔다.
대개 승우는 본래 충의심이 없는 데다 젊어서부터 명예와 의욕의 와중에 빠져 있으므로 매양 이·김의 강직한 언론을 들으면 시혹 감동되는 바 없지 않으나, 필경에는 삶의 애착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앞서게 되며, 설혹 의향이 있더라도 그 일이 성사되기 전에 말이 먼저 날까 염려하여 감히 현저하게 그 의향을 표시하지 못하는 고로 그 말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말이 머리 깎는 일에 미치면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도 하고 또 지위와 권력이 사뭇 중한 데다 대중을 규합하고 일을 만드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필 일을 같이 하려고 했던 것이다.
임피현령(臨陂縣令) 오영석(吳榮錫)이 이승우의 생질 남(南)씨에게 말을 했다.
“지금 23부(府)의 관찰사 중에 오직 공의 외삼촌이 중망을 짊어지고 있으니 그에게 창의할 것을 권하지 않겠는가. 만약 창의한다고 하면 내가 비록 변변치는 못하나 집안 일군 백 명과 군자금 만 냥을 가지고 진중에 나가 사생을 같이 하겠다.”
승우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자못 의병을 일으킬 뜻을 두었다.
이 즈음에 안병찬 이승우가 머리 깎는 일은 부당하다고 내부(內部)에 보고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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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듣고 곧 달려가서 김복한을 만나니 복한은 말했다.
“관찰사가 내부에 보고한 것을 미루어 보면 반드시 창의할 의향이 있는 모양이요, 또 전 영장(營將) 홍건(洪楗)이 가서 권한즉, ‘인심의 향배를 보아 결정하겠다고 했다’고 하며, 청양현감(靑陽縣監) 정인희(鄭寅羲), 대흥(大興) 선비 박창로(朴昌魯), 부여(扶餘) 정산(定山)간의 선비 이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송병직(宋秉稷)·이상린(李相麟)·이병승(李秉承) 등이 12월 초 1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오기로 기약했으니, 그래도 빨리 나와서 민병(民兵)을 많이 모집하여 기약한 날짜보다 앞서 와서 민심이 이렇다는 것을 보이고 또 이웃 고을에 대한 체면도 세워 주는 것이 좋겠다.”
선비 안창식(安昌植)은 병찬의 부친이다. 선대로부터 본군 남쪽 화성(化城)에서 살면서 문학으로 전해 왔다. 그는 형체가 장대하고 기개가 고상하며 침착하고 강개하여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나라 일을 걱정해 왔다.
그는 이 해 여름부터 박영효(朴泳孝)의 하는 짓이 기탄이 없어 장래 역적질할 것이 뻔함을 보자 비밀히 거의(擧義)할 뜻을 두고 한두 사람 동지와 함께 광호(廣湖) 등지로 가서 저자 사람을 앞세워 먼저 일어날 계획을 하려고 하다가 못했다. 그래서 마침내 박창로(朴昌魯)·이 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정제기(鄭濟驥)·송병직(宋秉稷)·조병고(趙秉皐)·김정하(金正河) 등과 더불어 가만히 서로 내왕하며 긴밀히 계획을 하던 중이었다.
이 즈음에 이봉학이 김복한을 찾아보고
“동모자가 이미 수백 명에 달했으니 따라서 격동해 일으키면 수천 명을 얻을 수 있다.”
고 말했다. 그래서 서로 날짜를 정하여 약속했으므로 복한의 말이 이와 같았다.
안병찬이 대단히 기뻐하고 곧 돌아가니 그 아버지는 이미 시골 사람 채광묵(蔡光默) 등과 더불어 백 80명의 민병을 모집해 놓고 병찬과 광묵을 시켜 원통한 사정을 하소연한다고 핑계하고 바로 관문(官門)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니 곧 11월 2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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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찬은 의리를 들어 말하고서 통곡하니 이승우도 역시 울었고 관리·관노(官奴)와 많은 인사들도 모두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선비 이근주(李根周)가 때마침 화성(化城) 우사(寓舍)에 있다가 밤에 임한주를 찾아와 말했다.
“나는 관찰사에게 글월로서 군신의 대의와 화·이(華夷)의 큰 한계를 극력 진술하고자 하여 원고가 소매 속에 들어 있으니 내일 부중에 들어가 전달하고 겸하여 동정을 살펴보겠다. 그대 형제 중에 공무(公武)는 일에 익숙하여 임기응변(臨機應變)을 잘 하니 조만간 반드시 의거에 참여하려니와 공우(公羽) 나이 아직 적고 병도 많아서 종군하지 못할 것이니 이 글에 연명이나 하는 것이 좋겠다.”
공무는 바로 한주의 형 승주(承周)다. 한주는 말했다.
“이미 일을 같이하지 않는 바에야 연명을 해서 무얼 하는가. 그러나 이 글은 실로 천하의 큰 의리에 관계되는 글이니 어찌 감히 모른다 하겠는가.”
드디어 그 원고를 받아 수정해 주었다.
12월 초1일에 이르러 이웃 고을 의병은 미처 규합되지 못했는데, 오직 이봉학 등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상고하는 나그네로 가장하여 저물녘에 와서 성안에 숨어 있었다. 이 때 홍건(洪楗)이 항상 부중에 있으면서 비로소 나에게 말하기를,
“의리로서 관찰사에게 역권하여 이미 8, 9분의 의향을 얻었다.”
고 했는데 얼마 후에 홍건의 말과 의향이 전보다 조금 변해서 자못 두려워하고 겁내는 태도가 보이며, 또 홍건은 편지를 보내어 복한을 책망했다.
“이 일이 어떤 큰 일인데 이와 같이 소홀히 하는가. 관찰사가 한다 해도 마침내 자신이 주장하거나 먼저 발동할 생각은 없다.”
이 날을 당하여 복한은 약조했던 사람들이 다 모이지 아니하고 또 이승우·홍건도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이튿날 곧 편지를 띄워 이설(李偰)을 청했다.
이설은 연안(延安) 이씨인데 일찌기 어버이를 여의고 또 집이 가난하였으나 주림을 참고 글을 읽었다. 어릴 적에 주흥사(周興嗣) 천자문(千字文)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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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려면 마땅히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하려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구절을 가장 좋게 여겼다.
그는 급제한 후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사람됨이 기개가 있고 또 문장에 능했다. 결성(結城)의 산 집에서 사는데 홍주부와 거리는 겨우 10리 남짓했다. 갑오(甲午)년에 동학당이 난리를 일으키자 이승우와 함께 방책을 계획하여 유익된 것이 많았다.
이 해에 들어 역적의 변이 생긴 이래로 의논이 서로 배치되어 마침내 의병을 일으키자는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하의 의로 보아 이런 큰 변을 만나서 직접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지는 못하나 글과 말로서만이라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므로 방금 집에서 상소를 짓는 중이었는데, 홍주의 소식을 듣고는 곧 달려왔다.
복한은 마침내 회기를 약속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고 알리고 또 말하기를,
“남사(南史)가 약속을 위반할 뜻이 있으니 일이 급하다.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
남사는 홍건의 별호다.
이설은 바로 성중에 들어 이·홍을 보고 물은즉 뜻이 모두 막연했다. 이설은 일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곧 나와 복한을 보고 말했다.
“잠간 피했다 서서히 도모하는 것이 좋겠으며, 만약 미처 피하지 못하고 의병이 와 모 인다면 그 때는 특별한 수단을 써야 이 관찰의 마음이 굳어질 것이다.”
이 때에 이설은 자기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여 이 말을 끝마치고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 날에 박창로(朴昌魯)는 마침내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왔고, 정인희(鄭寅羲)는 선비 이창서(李彰緖)를 시켜 역시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왔다. 이에 송병직(宋秉稷)·이세영(李世永) 등은 김·홍 2사람의 뜻을 받들어, 호소한다 칭탁하고 곧장 관문으로 들어가 참서관(叅書官) 함인학(咸仁鶴)을 꾀어내어 옹위하고 경무관(警務官) 강인선(姜仁善)의 처소에 당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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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군사를 지휘하여 일제히 고함치며 새로 설치한 경무청을 부쉈다.
그리고 함·강을 끌어내어 호통하고 꾸짖으며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니 성안의 남녀들이 달아나며 법썩을 부렸다. 여러 군사는 강호선을 결박하여 동문 밖으로 나가서 박살을 하려드니 이승우는 듣고 버선발로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 달려와 죽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며 또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거사할 수 있으니 오직 일을 맡아 볼 만한 사람 6, 7명만 나와 함께 관저(官邸)로 들어가서 일을 의논하자.”
여러 사람이 마침내 함·강 2사람을 버리고 달려가 복한을 맞아오니 복한은 바로 동헌(東軒)으로 들어가 승우를 만나보고 말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중의 소원에 의하여 창의하는 것이 좋겠다.”
이승우는 오랫동안 허락을 하지 아니하며 또 말을 했다.
“관원을 끌어내는 것이 선비로서의 도리가 아니니 더욱이 일을 같이 할 수 없다.”
복한은 정색하고 말했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자기 한 사람의 욕망으로 천하를 얻으면서도 오히려 죄 없는 진양령(晋陽令)을 베었거늘 지금 종묘사직을 위하고, 중화(中華)의 명맥을 위하고, 민생을 위하여 구사일생(九死一生)의 계획을 하는데 어찌 평소의 규모로만 뜻있는 선비을 책하고, 천하 만고에 내세울 만한 대의는 허락하지 않는가.”
이승우는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다가 비로소 허락했다.
이 때에 여러 선비들이 역시 동헌으로 들어가니 이 관찰은 그제야 말했다.
“여러 선비들의 이번 거사는 실로 충의심의 발로이니 누가 불가하다 하겠느냐.”
드디어 서로 방약을 강구하고 온갖 군무와 각처의 절제(節制)에 있어서는 자수로 써서 그날로 각 포구와 열읍에 발송하되, 숭정(崇禎)의 연호를 사용하고 관찰사란 새 직함을 버리고 홍주목사(洪州牧使) 겸 창의대장(倡義大將) 이승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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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성중 백성들이 날뛰며 서로 돌아보고 말했다.
“장하도다 이공이여, 쾌하도다 이공이여, 아마도 검은 구름이 흩어지고 다시 밝은 날이 오게 될 모양이다.”
12월 3일. 여러 인사들이 김복한을 추대하여 수석으로 삼고 홍주 관하 17군과 본부 27면에 통문을 띄웠다. 그리고 승우도 역시 명령을 전달하여 당일로 군사를 모집해 오게 하였다. 또 이설(李偰)에게 무릇 소장(疏狀) 및 각국 공사관에 조회할 문자와 격문(檄文)등을 모두 대작시키기 위하여 급히 사람을 보내 청했다.
이설이 오자 승우는 즉시 곁방으로 끌어 들여 반나절 동안 안팎 일에 관한 글월을 초잡게 했는데, 이설은 전혀 모르던 일이었다.
통문이 화성(化城)에 이르자 각 이장(里長) 이 민병(民兵)을 모집하는 데 독자와 늙은이·어린이를 제외하고 집마다 군정 1명씩을 내게 했으며, 모집에 응한 자도 모두 도피하려는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자는 몽둥이를 들고 크게 외쳤다.
“머리를 깎고 살진대 차라리 의(義)에 죽는 것이 낫다.”
한 경내가 이러하니 다른 곳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것을 보고 임한주는 탄식했다.
“민심이 이와 같으니 하늘이 혹시 이 나라를 부흥시키려는가.”
이때에 송병직(宋秉稷)은 서면(西面)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나갔고, 채광묵(蔡光默)·이창서(李彰緖)는 남면 소모관이 되어 나갔고, 이세영(李世永)·이봉학(李鳳學)·이병승(李秉承)은 공주(公州) 일을 보기 위해 나갔고, 박창로(朴昌魯)·정제기(鄭濟驥)는 임존산성(任存山城)[今禮山郡內]을 수리하는 일로 나갔고, 오직 김복한·홍건 및 안병찬·이상린(李相麟)이 성안 창의소(倡義所)에 있었는데 홍건만은 관저에 있었다.
청양현감(靑陽縣監) 정인희(鄭寅羲)는 창의소를 본읍에 설치하고 사환을 시켜 연락하여 포군(砲軍) 5백 명과 화포(火砲) 천 자루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데 군기가 준비되지 않아서 수송하지 못했다.
홍건은 관저에서 나와 김복한을 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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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어떻게 계획했기에 나를 죽게 만들려고 드는가.”
승우는 처음부터 의리에 죽을 마음이 없었는데, 지금 비록 마지못해 거의(擧義)는 했으나 이 일이 만약 성공된다면 몸과 명예가 모두 완전하지만, 불행히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온 집안만이 멸망한다고 생각되어 정의와 의욕이 가슴 속에 교착하므로 망서리고 있었다.
전승지(承旨) 송언회(宋彦會)는 비밀히 편지를 승우에게 보내어 저지하였다.
“홀로 상투 하나만 지니고 장차 어디로 가려는가.”
아전 이주승(李周承)·이종응(李鍾應)·박봉흠(朴鳳欽) 등 이승우의 뜻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만나서 적(賊)의 형세가 워낙 강대하여 의병으로서는 대항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누차 말리는 동시에 큰 화가 조석으로 닥쳐 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비밀히 이방(吏房) 최학연(崔學淵)을 시켜 각면에 내통하여 사태가 측량하기 어려우니 행동을 삼가해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본군 민병(民兵)이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이 주승은 밤에 나가서 성(城)을 돌며 비밀히 문을 지키는 군사에게 일렀다.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이러는가. 빨리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때문에 몇 명의 유림군(儒林軍)도 차츰 차츰 흩어져 갔다.
강호선(姜浩善)·함인학(咸仁鶴)이 또한 좌우로 종용하여 관찰사의 마음이 이미 8, 9분은 동요되었다. 이종응(李鍾應)은 마침내 창의소로 나타나 여러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일이 이미 급해졌으니 마땅히 자결해야 한다.”
복한은 그 이유를 힐문하니 종응은 부질없는 말만 늘어놓고 갔다.
안병찬은 사태가 변해가는 것을 알고 가만히 복한에게 말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장차 어찌 하오리까.”
복한은 대답했다.
“설사 불행이 오더라도 우리야 어찌 피신해서 구차히 살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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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에 복한은 관저로 들어가 승우를 만나니 승우는 복한을 책했다.
“나에게 거의(擧義)하라고 권할 때는 불과 수일 내에 8도가 반드시 호응할 것이라 했는데, 지금 군내 명망가 중에 한 사람이 오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명망가란 것은 과거 출신으로 세력가에 줄을 대고 있는 자들이었다.
초4일. 복한은 이설과 함께 성중에서 술을 불러 번민을 달래기로 했는데, 술이 오기 전에 관찰사의 보호 순검 김영준(金泳俊)이 나와서 2사람을 초청한 편지를 전달했다.
이윽고 강호선(姜浩善)이 또 순검 몇 사람을 데리고 나와서 ‘대장 사또가 2영감을 불러오라’한다고 했다. 이는 장차 여러 사람을 구하려 하는데 2사람을 먼저 할 계획이었다.
강호선이 빨리 가자고 재촉하므로 복한은 이설과 함께 천천히 들어가니 승우는 울며 말했다.
“문석봉(文錫鳳)은 비록 패전했지만 오히려 수백 명을 모았는데 나는 한 사람도 모으지 못하고 이 지경을 당한단 말인가.”
이설은 말했다.
“오히려 머리 깎고 사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이윽고 또 웃으며 말했다.
“우리들이 복고파(復古派)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승우는 ‘무슨 말이냐’고 묻자, 이설은 다시 말했다.
“옛날 곽순(郭珣)공이 을사(乙巳)년 사화(士禍)에 형을 받을 적에 회재(晦齋)[李彦迪]를 쳐다보며 위관(委官)이 문초 받는 자리에 있으므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승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2사람이 마침내 구금을 당하니 안병찬은 듣고 크게 외쳤다.
“이·김 2승지(承旨)가 만약 잡혔다면 정의는 항상 외로운 것이 아니니 여러분은 마땅히 나를 따라서 관문을 두들겨 부수고 구원해서 빼내 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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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즉시 이상린(李相麟)과 더불어 관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여러 사람이 소위 대장이란 자가 이와 같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말을 듣고 모두 놀라서 서로 돌아보며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
이윽고 안병찬·이상린이 역시 잡혀 구금되고 임승주(林承周)가 성안에 들어가자마자 잡혔다. 그리고 이튿날 송병직 및 홍건도 잡혔다.
이상린은 단양(丹陽) 이씨인데 젊어서 건달로 돌아다니다가 이윽고 마음을 고쳐 학문 길로 향하여 장령(掌令) 전우(田愚)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함에 있어 많의 내왕하여 의논해 왔다.
송병직은 은진(恩津) 송씨인데 사람됨이 작아도 날래고 사나우며 매양 술을 마신 뒤에는 시국을 이야기하는데 기운이 솟아서 산과 같았다.
홍건은 남양 홍씨인데 처음에 승우의 책실(冊室)[비서]로 있었다. 문장이 능숙하고 지혜가 있어 동비(東匪) 토벌에 대한 협찬의 공이 있으므로 마침내 승차하여 영장(營將)이 되었다. 특히 승우와는 사생을 같이하는 사이인데 이제 와서는 역시 면하지 못하고 잡히어 구금되었다.
여러 사람이 잡히게 되자 유림군(儒林軍)도 모두 놀라 흩어지니 호선(浩善)이 순검(巡檢)을 파견하여 사방으로 색출하여 성중에 있는 남은 사람까지도 보이는 대로 잡아가므로 횡액에 걸린 사람도 많았다.
안창식(安昌植)은 집에 있다가 변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곧 떠나서 읍내로 가다가 친구에게 저지를 당하여 중도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다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승우를 토벌하려다가 못했다.
이근주(李根周)는 변을 듣고 직접 나타나서 구금을 당하려고 하다가 늙은 어머니 때문에 2형에게 붙잡혀 중지했다. 그 후 경술(庚戌)년 국치의 날을 당하자 왜놈의 백성이 되고 싶지 않아서 마침내 목 찔러 죽었다.
전 감찰(監察) 김영석(金泳奭)은 비로소 승우가 거의(擧義)했다는 말을 듣고 임한주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로 치하하기를,
“이 일은 만고의 대의인데 이관찰이 능히 실행하였으니 어찌 만고 대인(大人)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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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는데 나중에 변을 듣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통탄해 마지 않았다.
“이승우는 참으로 만고 소인이다.”
서산(瑞山) 군수 성하영(成夏永)이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해미(海美) 대치(大峙)에 이르러 승우가 약속을 뒤엎었다는 기별을 듣고 즉시 돌아갔다.
남양부사(南陽府使) 남백희(南百熙)가 수군(水軍) 수백 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중류(中流)에서 기별을 듣고 돌아갔다.
대흥(大興)군수 이창세(李昌世)가 군사 수백명을 거느리고 본군 경내까지 왔다가 역시 기별을 듣고 돌아갔다.
전승지 김병억(金炳億)이 군사 백여 명을 모집하여 서문 밖에 당도했다가 역시 기별을 듣고 돌아갔다.
정인희(鄭寅羲)는 군사를 발동하여 정산(定山)으로 향하여 여러 고을을 연합하여 토복(討復)하려는 초지를 관철코자 하다가 마침내 강호선에게 패하고 말았다.
여러 사람이 이미 잡혀 가자 호선은 공갈하고 꾸짖고 때리고 차서 사사 원망을 갚고 또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캐물으니 복한은 바른 말로 대답하며 흔들리고 굴복하는 일이 없었다. 승우는 복한을 불러 말했다.
“너는 항상 머리를 깎이게 되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이제 말대로 되었다.”
복한은 전후 반복한 죄를 책하니 승우는 탄식하며 말했다.
“당초 나에게 창의할 것을 권할 적에 잡아 넣었으면 이런 분란은 없었을 것인데, 생각 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으니 한이라. 장차 서울에 가서 대질하고야 말 것인데 어찌하랴.”
호선은 또 순검을 시켜 여러 사람의 의관을 강제로 빼앗아 몸에 붙이지 못하게 하니 상린은 차분히 말했다.
“나는 마땅히 이 의관과 더불어 함께 죽을 것인데, 어찌하여 빼앗아 가느냐.”
이 말을 들은 자는 모두 감탄하며 참으로 학자의 기상이라고 일렀다.
병찬은 처음에 복한과 더불어 한방에 구금되자 변에 대한 처신의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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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으니 복한은 말했다.
“일이 이미 실패되었으니 죽을 따름이다.”
이윽고 복한을 딴 곳으로 이감하니 병찬은 승우의 사람 아닌 행동에 통분히 여기고 또 머리 깎는 치욕을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자 즉시 칼을 뽑아 자수로 목을 찔러 진한 피가 쏟아졌다. 그래서 땅에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니 이설은 듣고 반드시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겨 만장(輓章)을 지었다.
장부가 죽음은 안 아끼지만,
자수로 죽기란 가장 어려워.
이 일을 능히 할 이 몇이나 될고,
열렬한 사내 하나 여기 있읍네.
이튿날 새벽에 병찬은 갑자기 손을 휘둘러 붓을 찾아 문 종이를 찢어서 목에서 나는 피를 찍어 써서 간수에게 주고 눈을 부릅떠 꾸짖으며 급히 이 쪽지를 관찰사에게 전하라고 하니, 간수가 황급하여 그 쪽지를 가져다 승우에게 전했다. 그 글은,
지사는 낮은 생활을 잊지 않고,
용자는 목숨 바칠 것 잊지 않네.
차라리 머리 없는 귀신될망정,
머리 깎은 사람은 아니 되련다.
승우는 그 상황을 듣고 역시 놀라서 안색이 변했다.
병찬은 무슨 물건이 턱 밑에 있음을 보고 왜놈의 약이란 것을 알게 되자 문득 손을 들어 집어던지며 말했다.
“곱게 죽을 따름이다. 이 물건을 내 어찌 사용한단 말이냐.”
임승주가 마침 함께 갇혀 있게 되어 극력 구호하여 차츰 깨어나는 것을 보고 미음을 가져다 입 안에 넣어 주니 병찬은 역시 손을 저으며 마다고 하므로 승주는 말했다.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을 바에야 며칠을 연장하여 춘부장을 뵙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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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찬은 마침내 물리치지 않았다.
이설은 잡혀 갇히게 되자 이번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면 반드시 죽음이 목전에 있다고 생각되어 곧 편지를 써서 그 어머니에게 영 이별을 고하였다.
“대종가(大宗家)에 양자로 들어갔으니 우리 어머니 아들이 아니오, 국가에 몸을 허락 하였으니 우리 어머니 아들이 아닙니다. 지금 당한 경우는 조온(趙溫)의 죄인을 면할지 모르겠읍니다.”
그리고 또 벽에 써 붙였다.
“5백 년 예의의 나라와 수십 대 양반의 집이 이 지경에 이르니 원통하고 또 원통하다. 천운이라 어찌하랴.”
그는 또 복한을 두고 모의(摹擬)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목을 끊을망정 머리를 끊으랴.
몸은 삭아도 이름은 삭지 않아,
만년을 내린 문명의 전통이
네 한 사람 힘입어 지켜지도다.
그대는 의거를 주장했었고
나는 상소로 항쟁하려 했으니,
뜻한 바는 비록 각기 다르지마는
함께 죽어 이름은 함께 전하리.
또 자만시(自輓詩)를 지었다.
네 지금 어디로 돌아가려나,
네 어미를 어찌 차마 잊을소냐,
네 임금을 어찌 차마 여읠소냐.
머리를 안 깎는 건 큰 효도라면,
몸을 잘 갖는 건 참 충성일세.
의(義)란 글자 하나를 들어
공·맹(孔孟)의 영혼에게 질문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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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은 어렴풋이 본가에서 뇌물을 바치고 화를 면해 볼까 한다는 말을 듣고 즉시 중지시켰다. 그 아내 숙부인(淑夫人) 이씨는 단식하고 냉수만 마시며 밤이면 반드시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그리고 병찬의 아내 조(趙)씨도 역시 저녁마다 하느님께 기도드려 신의 도움을 바라고, 성안 사람 여자 박씨는 한익봉(韓翼鳳)의 자당인데 역시 밤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려 여러 의사를 살려 주도록 청원하고, 성 북쪽 홍천촌(洪天村) 한 여염집 여자도 역시 그러하니 이로써 인심이 곧 천심임을 볼 수 있다.
송병직(宋秉稷)·이상린(李相麟)이 처음 갇혔을 적에 복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복한은 대답했다.
“여러 형은 오늘날 같은 일이 있을 것을 알지 못했는가. 이미 알았다면 다시 물을 필요가 있는가, 나는 단념한지 이미 오래다.”
함께 갇힌 사람 임헌(任憲)이 처음에 너무도 겁을 내어 때로는 울기도 했다. 하루는 늑삭(勒削)한 관계로 감금을 당한 관속(官屬)이 임헌과 더불어 기탄없이 농담을 하다가 말경에는 임헌의 상투 머리를 잡고서 ‘이것을 깎아 버리라’고 하니 복한은 방금 피곤해서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정색하고 꾸짖었다.
“우리가 비록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네가 언감히 이토록 무례하게 군단 말이냐.”
그 자는 마침내 상투를 놓고 죄를 내려 달라고 청했다.
어느날 밤 꿈에 복한은 어떤 사람과 더불어 주역(周易) 명이괘(明夷卦)의 기자(箕子)의 형상을 토론하고 또 정포은(鄭圃隱)·조중봉(趙重峰)·김청음(金淸陰)의 일을 토론하고 또 한 곳에 당도한즉 새 사랑이 있어 단청이 찬란한데, 바로 대로(大老)[宋尤庵]의 사랑이라 칭하며 여러 선비들이 다투어 들어가 배례드리는 것이 보였다.
꿈을 깨자 추연히 일어나서 고남(高南) 면장 조항교(趙恒敎)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동방이 문명을 받아 들여 오랑캐 습속을 변경한 것은 실로 기자(箕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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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되었으며, 포은·중봉·청음 3 선생이 모두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고, 대로(大老)에 이르러 대의의 결국이 되어서 지금 조정의 벼슬아치나 선비들이 다투어 그 사당에 참배하고 있으니, 만약 머리 깎은 놈이면 감히 이 사당에 들어서지 못한다 할 것 같으면 머리 깎는 일이 마땅히 중지될 것이다.”
그 뒤에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이 때에 적의 무리가 더욱 흉악하여 얼핏하면 역적의 누명을 씌우므로 친구와 친척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한 사람도 물어오는 이 없었는데 전 주부(主簿) 김상우(金商愚)가 강개히 편지 1장을 보내어 조문하면서 겉봉투에 복암정공(復庵正公), 지산정공(志山正公) 8자로 썼다. 복암은 이설의 별호요 지산은 복한의 별호인데 그 뜻인즉 이 2사람이 의를 위한 일로 죽음을 얻었다 하여, 옛 사람의 산 이에 대한 만사와 사시(私諡)를 정하는 의에 견준 것이다.
복한은 김상우와 서병태(徐丙台)·김용제(金龍濟)에게 편지를 보내어 후사를 부탁하고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일은 모두 내가 안식(眼識)이 없어서 사람을 볼 줄 모르는 허물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고집하는 것은 진실로 천하 만고를 통해 바꾸지 못할 정의이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고 허물하랴. 내가 죽거던 심의(深衣)와 복건(幅巾)으로 염습하고 명정(銘旌)은 ‘유명조선국통정대부대사성김공(有明朝鮮國通政大夫大司成金公)’으로 써주기를 여러 형들에게 바라는 바다.”
복한은 또 말했다.
“헛되게 일을 착수하여 실패를 당했으니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그 뜻인즉 천추의 강상(綱常)을 붙잡고 한 가닥 양맥(陽脈)을 보존하려는 것이니 뒷날 내 마음을 양해하는 자는 어찌 원통하다고 단정하지 않으며 또 어찌 충성심을 허락하지 않겠는가.”
17일, 왜적과 대장(隊長) 신우균(申羽均)이 각각 수백 명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왔다. 왜놈은 우균과 자리를 같이하고 복한더러 무슨 까닭으로 의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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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켰느냐고 물으므로 복한은 말했다.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이미 역적 한 놈을 베어 죽이지 않았는가.”
복한은 그 역적 놈이 누구냐고 물어 알고서 마침내 정색하고 말했다.
“그 놈은 바로 명색 없는 하나의 졸병이다. 큰 괴수야말로 한 놈도 형을 받는 일이 없으니 내가 의병을 일으킨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왜놈이 말문이 막혔다.
강호선은 세력을 얻은 뒤부터 미친 듯이 날뛰며 순검을 시켜 각면을 순회하면서 머리 깎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부근 동리에는 한 사람도 머리를 보존할 수가 없어 원망하는 소리가 온 고을에 달했다.
왜병이 오게 되자 호선은 크게 위협 공갈하며 소위 죄인이란 자들을 한꺼번에 잡아내어 모두 처참해 버리겠다고 하니, 이설은 이 말을 듣고 시 한 수를 지었다.
큰 군사 내려올 적 북녘 바람 쌀쌀한데,
왜적의 호각 소리 야단스레 들려 오네.
죄인을 다 죽인다고 공갈 마소,
잠간이면 죽는데 무엇이 어려우랴.
20일. 안창식(安昌植)도 역시 잡혀 왔는데 호선은 그가 나이 늙어 머리가 벗겨진 것을 보고 물었다.
“머리칼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엇이 아까와서 안 깎느냐.”
“내 머리야 비록 몇 개 남지 않았지만 8도 백성의 머리가 모두 내 머리라. 기자(箕子) 이후 몇 천 년에 처음 있는 변괴요, 득성(得姓)한 이래 조상에서 행하지 않은 일인데 어찌 즐거이 따를 이치가 있겠느냐.”
“네 아비, 네 할아비는 머리 안 깎는 시대에 살았으니 말할 나위 없거니와 너로 말하면 이런 개화(開化) 세상에 나서 나라 임금 이하 열읍 관장이 다 머리를 깎는데 너희들이 이와 같이 소란을 피우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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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식이 말하기를,
“30년 동안 군림하신 국모(國母)가 적당에게 시해를 당하셨는데 도리어 원수 갚으려는 자를 역적이라 한다면 국모를 시해한 자는 마침내 충신이란 말이냐. 시골의 미천한 자가 혹시 높고 귀한 이의 상투나 수염을 움켜잡아도 오히려 패악무도한 자라 이르는데, 하물며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는 자이랴. 도리어 역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역적으로 만든다면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는 자가 마침내 충신이란 말이냐.”
호선은 크게 노하여 연달아 곤장으로 때리며 끝까지 심문하며 또 바로 말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다고 꼬이니 창식은 말했다.
“나는 벌써 바로 말했으니 다시 할 말이 없다.”
승우는 물었다.
“너는 이 번에 잡혀 오게 된 이유를 아느냐. 머리 깎으란 명령이 있은 이래로 나는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부당하다는 뜻을 내부(內部)에 보고했는데 어리석게도 백성들이 이것으로 창의의 기회를 삼아서 나에게 명령을 내리라고 요구하므로 처음에는 비록 부득이한 허락을 했지만 필경에는 번의하고 즉시 서울에 올라가 내부(內部)에 품달했다. 그리고 임지로 돌아와서 민심을 진정시킬 계책을 하고 있는데 너는 군중에게 말을 지어내기를 ‘관찰이 내려오게 되면 반드시 다시 창의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나를 불칙한 지경에 빠뜨리는 것이다.”
승우는 또 말했다.
“개화(開化)의 법이 나라나 백성에게 모두 편의하게 되었는데 시골 오활스러운 선비들이 의미를 모르고 공연히 비방하여 이런 소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창식은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공이 이미 번복했다고 자인했는데 뒤에 아무리 창의하고자 한들 누가 즐겨 따르겠는가. 나는 이미 안 될 줄을 아는데 어찌 그런 말을 만들어 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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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개화가 편의하다면 역적들이 횡행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임금도 없고 나라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어쩐 까닭인가.”
승우는 대답하지 못하고 호령하여 도로 가두라고 할 따름이었다.
29일. 승우는 역시 호선의 모함에 빠지게 되어, 서로 갈라설 작정으로 서울에 올라갔는데, 호선은 승우가 무사하게 될까 염려되어 역시 서울에 올라갔다.
승우는 길을 떠나 본 고을 대교(大橋) 주점에 당도하여 경군(京軍)과 왜병(倭兵)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경군대장과 왜병의 두령 이승우의 보호 순검을 잡아다 시위 협박하며 말을 물었다.
“너희 관찰이 대포(大砲)를 어느 곳에 묻어 놓았느냐.”
승우가 쫓아가 보고서 애걸하였다.
“나는 이미 난리를 일으킨 자를 잡아 가두었는데 어찌 대포를 묻어 두었겠는가. 공 등은 염려를 말아 주시기 바란다.”
그 자 들이 비로소 염려하는 마음을 놓고 성중으로 들어왔다. 승우는 헛 이름을 가지고 남을 꺼리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믐날, 법부(法部)의 명령에 의하여 여러 사람을 장차 서울로 압송할 양으로 아침 후에 경무소(警務所) 문 아래에 일제히 집합시켜 열지어 앉혔다.
안병찬은 비로소 그 아버지 창식을 뵙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꺼번에 극형을 받게 되면 할 수 없지만 혹시 뽑아서 처형당하면 내가 죽고 너는 살아야 한다.”
병찬은 그 아버지께 고했다.
“도의를 지키다 죽는 것은 소자(小子)의 숙원이오니 아버님께서는 행여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시고 과히 염려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설은 이 광경을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부자가 서로 죽음을 경쟁하니 어찌 저 옛날 공(孔)씨의 형제와 같은가.”
죄수로 된 사람이 모두 23명인데 모두 결박된 채 혹은 가마를 타고 혹은 말을 타고 혹은 짚신발로 걸어서 길을 떠나니 이 날 이 광경을 본 사람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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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렸다.
병신(丙申) 정월 초1일, 전승지 김복한 등은 압송을 당하여 예산(禮山) 관자곡(關子谷)에 당도하니 순사 병대 10 여명이 문득 노상을 가로막고 서서 교자를 정지시키고 가지 못하게 하며 기색이 수상하여 망칙한 변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이설은 복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는 갑자년 난리에 칼 맞아 죽은 사실을 아는가. 우리들이 반드시 뜻밖의 변을 당할 것이다.”
복한은 대답했다.
“비록 그렇게 될 줄을 알지만 어찌한단 말인가.”
일행이 신례원(新禮院)에 당도했는데 이승우는 중로에서 서울 기별을 듣고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에게 사람을 달려보내어 죄수를 본부 감옥에 도로 가두게 하였다.
대개 세전 28일에 이범진(李範晋)이 러시아 병정을 끌어 들여 김홍집(金弘集)·정병하(鄭秉夏) 등을 베어 죽임으로서 시국이 돌변된 때문이다.
승우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압송하게 한 것이 실로 여러 적신(賊臣)의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알므로 이 기별을 듣고서는 반드시 압송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일행이 마침내 본부 감옥으로 돌아오자 이·김 2 승지 및 안병찬·송병직·이상린·홍건 6사람은 특별히 보석하여 거처를 편의하게 하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무죄백방시켰다. 그래서 안 창식 및 여러 사람들이 모두 본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사방의 인사들은 6사람이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앞을 다투어 와서 위문하며 술 고기를 서로 이바지하였다. 당시에 이 6사람을 6의사라 일컬으며 대련(對聯)을 크게 써서 성동문에 붙였다.
천지에 낯짝 없는 이승우로써
일월이 빛이 난다 저 6군자여.
12일에 이르러 법부(法部)로부터 또 압송해 올리라는 명령이 있었다.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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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主上)의 전교(傳敎)에 ‘이설·김복한에 대해서는 일이 시골에서 처리할 성질이 아니니 반드시 압송해 올려 재판을 받아서 석방되어야 그들에게도 영광이 된다.’ 하셨기 때문이다.
이 때에 역신(逆臣)이 이미 처단되어 마침내 단발령이 취소되고 정사와 명령이 많이 주상의 자의에서 나왔었다.
6 사람이 길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니 근처 친구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나와 전송을 했다. 홍건은 시 1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눈 속에 걸어서 성을 나갈 적
날 보내는 벗님네들 슬픈 빛 없네.
길거리에 가득 찬 웃음소리에
한 가닥 봄 바람이 불어오누나.
이설이 이 시에 화답했다.
하고 한 세상 일 그 때 그 땐데
즐겁고 슬픈 것 무엇이 있나.
다만 저 봄 소식은 편사가 없어
더운 바람 골고루 불어를 주네.
이설은 또 시를 지었다.
간사스런 원숭이를 어찌 책하랴,
올빼미 같은 심술도 관계치 않아.
무엇보다 미운 건 박쥐 새끼라,
쥐가 되었다 다시 새가 되거든.
이 시는 대개 생각이 있어 지은 것이다.
6 사람이 서울에 당도하니 법부(法部)로부터 고등재판소로 이송했다 가 다시 한성부로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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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이 처음 홍성에서 갇혔을 적에 시혹 망건을 씀으로써 저 명(明)나라 말세에 망건을 이마에 그린 화망선생(畵網先生)의 예를 따르기로 했었다. 그래서 여기 와서도 여러 사람이 역시 망건을 쓰고 지내려고 하니 복한은 말했다.
“옳지 않다. 지금은 임금님의 뜻으로 압송되어 왔으니 죄인으로 자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 때에 선비 유인석(柳麟錫) 등이 춘천(春川)·원주(原州) 등지에서 창의를 했고 그 밖에 다른 여러 고을에도 거의한 이가 많이 있어, 고을 원을 죽이고 무기와 양곡을 끌어내어 왜적을 토벌했다.
이로 말미암아 각읍이 소란하여 와전된 말이 자주 비등하고 또 조정에서 방금 역당(逆黨)을 다스려 큰 옥사(獄事)가 아직 처결되지 못했으므로 6의사는 그날그날 지나간 일과 지금 일들을 이야기하며 시를 지어 주고 받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으며, 때때로 공경(公卿)·대관 및 경향의 친지들이 술을 가지고 찾아와서 고적한 회포를 풀어 주곤 하였다.
2월 8일. 3도 선유사(宣諭使)가 명령을 받고 내려왔다. 이윽고 남도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이 정부에 보고했다.
“처사가 정당성을 잃으면 사람이 복종하지 아니하고, 상·벌이 분명하지 못하면 백성이 믿지 아니하옵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데 당연한 벌을 시행하지 않으면 모든 악을 진습시킬수 없사옵고 죄가 없는데 드러난 사면(赦免) 형을 입지 못하면 뭇 울분이 배설되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물을 만한 죄가 없고 권장할 만한 충성심 있는 자에게야 더 말할것이 있사옵니까.
김복한·이설 등의 지난 섣달 의거로 말하오면 명분이 정당하고 논리가 온당하온데 어느 누가 불가하다 하오리까. 삼강오륜이 전복되고, 선과 악이 뒤섞여 마침내 옥중의 고생을 면하지 못한 채 섣달 28일 세상이 다시 밝아진 뒤에까지 미처왔사오니 마땅히 곧 옥중을 벗어나서 충의의 표창을 받아야 할 것이옵기로 본 선유사는 이미 내각(內閣)의 여러 대신에게 보고하여 그들이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에 석방하기로 의논이 되었사온데, 지금까지 옥중에 유치된 채로 있는 것은 생각밖이옵니다. 본 선유사는 홍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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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도하여 보온즉 일반 민심이 울분에 싸여 혹은 형정(刑政)이 아직도 자유를 못 얻었는가 의심도 하옵고 혹은 조정이 전일 정부를 위해 혐의를 갚는 것이 아니냐 하는 원망도 하여 근거 없는 풍설이 하도 많아 차마 들을 수 없사오니 장래를 위해 염려됨이 적지 않사옵니다. 이 2 사람에게 장차 무슨 죄를 물으려고 이렇게 오래 감금해 두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이에 대한 칙유(勅諭)가 내렸다.
‘무릇 내 신하로서 격분을 참지 못해 의병을 일으켰다면 어찌 명분이 없다 하랴. 지난 섣달 28일 이전의 창의야말로 정당한 의거인데 오히려 죄수를 면치 못한 채 달을 넘겼으니, 하물며 28일 이후에 거사한 자도 어찌 즐겨 선유(宣諭)를 듣고 해산하여, 포박당하고 죽어 없어지는 근심을 자초하지 아니하랴. 이 일은 한갖 홍주 한 지방의 안위에 관한 것만 아니라 실로 각처 의병에 대한 향배(向背)의 계기가 될 것이니 곧 조회해서 김·이 2 사람을 재판할 것 없이 즉시 석방해 보내어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23일.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李範晋)이 6사람을 불러 문초를 받는데 김복한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복한은 대대로 녹(祿)을 먹은 집안으로 남달리 나라 은혜를 입었사오니 죽음을 맹서하고 나라에 보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본래부터 축적된 것입니다.
갑오(甲午)년 6월 이후로는 시골에 엎드려 그대로 깨끗이 죽으려고 했던 것이온데, 지난 8월에 큰 변을 보고서는 너무도 원통하고 분하여 더 살고 싶지 않은데다 다시 또 11월 15일 사건이 생겼으니 이것이 도두 흉역(凶逆)의 행위가 아닙니까. 임금님의 욕되심이 극도에 달하자 신자의 충정이 더욱 격하여 마침내 시국 형세와 자기 역량을 계산하지 않고 다만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어 보겠다는 목표하에 의거를 제창했던 것이온데, 모사가 치밀하지 못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경솔히 거사했다는 이유로써 죄를 주신다면 실로 달게 받겠으며, 본시 의리를 망각하고 당을 모아 변을 일으키자는 것은 아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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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감옥에서 12월 28일에 나라 원수를 대강 갚았다는 말을 들었고, 또 조칙(詔勅)이 여러 번 내리어 사연이 간곡하심을 보오매 저절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읍니다. 복한이 잡혀 가던 날은 바로 역당이 일을 꾸미던 날이온데, 어찌 이제까지 살아 있어 오늘날을 다시 보게 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사옵니까.”
안병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궁하게 살면서도 글을 읽어 대강 의리를 아옵기로 지난 가을 국변이 있은 이래로 원통함을 참으며 스스로 부르짖어 울고 있었는데, 이윽고 단발령이 내렸으니 이에는 문명과 야만의 구분도 없고 사람과 짐승의 분별도 없는 것이오라, 병찬이 비록 극히 우매하오나 그래도 이것이 전혀 역당의 강제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로, 마침내 힘을 헤아리지 않고 김복한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성토하고 원수를 갚을 계획을 했는데,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이윽고 실패로 돌아가자 제 손으로 제 목을 찔렀으나 죽지 못하고 모진 목숨이 살아서 오늘을 보게 되었으니 만번 죽어도 유감이 없읍니다.”
이설은 말했다.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하면 힘이 모자라 적을 토벌할 수는 없으며, 임금의 욕됨을 보고 차마 의리상 그대로 살 수도 없으므로 마음에 붓으로 적을 죽일 생각을 품고 임금께 상소하여 항쟁하려 하다가 이들이 의병의 명부에 올라 마침내 잡혀 갇히게 되었으니 죽을 따름이요, 할 말은 없읍니다.”
송병직·이상린의 진술사도 대개 병찬과 같은 데 홍건만은,
“복한의 말을 듣고 그 의리에 감동되어 허락했었는데 계획을 잘못하여 이와 같이 낭패되었으니 경거망동한 죄는 죽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25일에 이범진은 고등 재판소 정청(正廳)으로 6사람들을 불러들여 선고문(宣告文)을 낭독했다.
“김복한은 10년 귀양살이를 보내고, 홍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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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3년 징역을 하고, 이설은 곤장 80대로 한다.”
이 날 밤 자정에 또 불러들여 판사 김교헌(金敎獻)을 시켜 임금의 특령을 받들어 낭독케 한 다음 일제 석방시키고 곧 홍주재판소 판사 김상덕(金商德)에게 훈령을 내렸다.
“특지(特旨)를 받들어 보온바 ‘김복한 등이 시기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관리를 협박하여 민중을 선동하여 여러 고을을 소란하게 만들었으니 죄가 없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 뜻인즉 원수를 갚고 역적을 토벌하자는 것이니 아울러 석방하여 국가의 관대한 처사를 보이라’는 뜻으로 하교(下敎)하셨으므로 성지(聖旨)에 준하여 김복한 등 6사람은 당일로 석방하고 또 귀 재판소 관하에 있는 죄수 안창식(安昌植)·이종응(李種應)·이두종(李斗種)·박봉진(朴奉鎭)·박춘장(朴春長)·임헌시(任憲始)·이봉승(李奉承)·조항교(趙恒敎)·이천근(李千根)·임승주(林承周)·이재근(李在根)·신영균(申永均)·유치방(兪致邦)·최인원(崔仁元)·유진모(兪鎭模)·남사원(南士元)·김연하(金演夏) 등 17명은 모두 김복한의 수종이니 아울러 즉시 석방함과 동시에 빨리 전말을 회보하라.”
이에 서울 친지들이 6의사가 풀려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전송하러 많이 나왔다.
이승우도 이미 관찰사의 직을 떠났는지라 역시 만나 보러 오니 좌중 사람들이 그 뻔뻔스러운 행동을 더럽게 여겨 냉대하며 서로 한 마디 말이 없었는데, 안병찬이 아래와 같이 말을 했다.
“공과 나는 오늘에 있어 시비가 서로 혼동되지만, 그러나 후일 공론은 반드시 공을 반복 무상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니 그윽히 공을 위해 애석히 여기는 바이다.”
승우는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처음에는 토비(土匪)의 유라 하여 잡혀갔는데 필경에 의병으로서 석방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공론의 결정은 백년까지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설이 돌아와서 제문을 지어 문순공(文純公) 한남당(韓南塘) 선생 묘소에 고했다.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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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 나라 이후로는 우리 도가 왕자(王者) 아닌 아래 사람에게 있어 공자(孔子)·안자(顔子)·증자(曾予)·자사(子思)가 그 전통을 받았으며 맹자(孟子)가 가신 뒤로는 그 전통이 끊어져서 마침내 저 진시황(秦始皇)의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생매장시킨 화가 있었고 그 후 천여년을 지나서 주자(朱子)·정자(程子)·장자(莊子)가 그 전통을 찾았는데 주자(朱子)가 가신 뒤로는 또 그 전통을 잃어서 이에 견양(犬羊)의 화를 만났었고, 도가 이미 우리 동방으로 온 뒤에는 조정암(趙靜庵)·이 퇴계(李退溪)·이율곡(李粟谷)·송우암(宋尤庵)이 그 통서(統緖)에 접했는데, 선생이 가신 뒤로는 또 전통을 잃어서 이에 이단(異端)과 사학(邪學)이 잠잠한 가운데 생장하여 개화(開化)의 논을 빚어내어 예측할 수 없는 화를 불렀읍니다.
그래서 마침내 문물(文物)이 다 무너지고 윤강(倫綱)이 모두 끊어져서 국모를 시해하여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임금을 협박하여 머리를 깎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저 포악한 진(奏)나라가 선왕(先王)을 경멸히 여기고 더러운 원(元)나라가 중국을 어지럽힌 것과 같을 뿐만 아닙니다.
아! 맹자·주자 두 성인께서 장차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여 괴로운 말과 피어린 정성이 지극하지 않은 바 아니었으며, 우리 선생님께서도 역시 평소에 입이 마르도록 말하여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형세로서 선생의 교훈을 상기해 볼 때 유(儒)·석(釋)이 이미 분별이 없고 사람과 금수가 이미 분별이 없고, 중화와 오랑캐가 이미 분별이 없어졌으니 절절이 징험되어 다시 여망이 없읍니다. 이것이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천운입니까, 원통하옵니다.
선생께서 일찌기 말씀하시기를 ‘절개가 있고 학문이 없는 자는 오히려 한 개의 지사로서 살수도 있지만, 학문만 있고 절개가 없는 자는 바로 거짓된 학문이다.’ 하셨는데 이는 실로 춘추(春秋) 이래 맹자·주자·율곡·우암의 서로 전수한 법인 동시에 가르침을 남기신 그 뜻이 지극히 절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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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은 즉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집을 옮겨 보령(保寧) 산중으로 들어가 학도들과 더불어 의리를 강론하며 쓰러진 집과 무너진 담장에 벌레와 뱀이 모여드는 데도 편안히 여기며 지냈다.
이 해에 한재상이 김복한을 천거하여 문학과 성망이 진실로 유사(儒師)의 직에 합당하다 하니 학부(學部)에서 임금께 아뢰어, 성균관장을 삼고 여러번 불렀는데, 복한은 의리상으로 보아 조용히 들어앉아 있어야 한다 하고 굳이 사양하며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홍주 관찰부(觀察府) 서리(署理) 함인학(咸仁鶴)이 학부(學部)에 보고장을 냈다.
“인학이 몸소 보령(保寧)군 김복한의 우거(寓居)를 가서 훈령(訓令)을 전달하고 빨리 올라가라고 권했는데 김복한의 말이, 갑오년 이후부터 정녕 폐인으로 자처하고 있다가 거년 가을에 큰 변이 일어난 것을 보고서 분하고 원통함이 극도에 달하여 역량도 헤아릴 겨를이 없이 망녕되고 경솔한 거사를 하여 마침내 일은 실패되고 죄만 졌으니 죽음을 달게 받아라 할 터인데, 성은(聖恩)이 하늘 같으시와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니 몸이 분가루가 되어도 보답을 다할 수 없은즉, 다만 산중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글이나 읽으며 몸을 지키는 것을 보답으로 삼는 것이 성훈(聖訓)에 어긋나지 않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 관장(館長)이란 새 직함을 이 궁벽한 산중에 내려 주시니 스스로 생각할 때 학식 없는 몸이 이 직책을 맡을 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받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본다. 지금 의리가 없어지고 강상이 무너져서 원수놈도 아직 물리지 못했고 역적도 다 처벌되지 못했는데, 만약 이 때에 은혜를 느끼고 위엄을 두려워하여 명령을 받게 된다면 소신을 어김과 동시에 교화에 대한 죄가 어떠하랴. 은명(恩命)을 거역하는 것이 극히 불안스러움을 모르는 바 아니나 천성을 변할 수도 없고 소신을 고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정유(丁酉)년에 또 김복한에게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제수했는데 역시 굳이 누워 일어나지 아니했다.
보령군수 박제경(朴齊璟)은 의장에게 보고장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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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의 말이 병신년 여름, 성균관의 제수에 대해 의리상 부임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관찰부를 통하여 글월을 올려 심정을 폭로하고 엄한 꾸지람이 내리기를 기다리던 차, 또 뜻하지 않은 새 제수가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라 원수를 갚지 못한 것도 전과 같고, 역적을 토벌하지 못한 것도 전과 같고, 전장(典章) 문물(文物)에 있어서도 한 가지도 복구된 것이 없으니 이야 말로 은혜와 원수를 둘 다 잊어버리고, 충신과 역적이 서로 혼돈되어 하나의 비빔밥 같은 세계를 만들었다. 어찌 차마 이 시기에 체면을 무릅쓰고 벼슬 길에 나가서 소신을 어기고 본심을 상실한단 말인가. 더구나 각기병이 정녕 고질이 되어 문을 닫고 앉은뱅이 노릇을 하며 인사를 폐기하고 있으니, 비록 염치불구하고 급히 달려가고자 해도 못 갈 형편이라고 합디다.”
이 때에 조정에서 이미 중전(민씨)을 복위(復位)하여 장차 예장(禮葬)을 거행하게 되자, 판서(判書) 김종한(金宗漢)은 바로 복한의 족형인데 편지를 보내어 나오라고 권하므로 복한은 회답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러 가지 교훈은 미욱한 소견을 깨우쳐 주시니 감명된 바 깊습니다. 그러나 그윽히 생각하면 오늘의 거취는 옛일을 거슬러 찾아보아도 방징될만한 것이 없고 다만 원릉(元陵) 을사(乙巳) 이후 여러 명현의 처신한 일이 있어 약간의 참정이 될 뿐입니다. 정승 김재로(金在魯), 정승 홍치중(洪致中)의 권세와 지위가 높고 혁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김퇴어(金退漁), 윤임제(尹臨齋) 두 분이 종신토록 스스로 깨끗이 지내어 인륜(人倫)을 붙잡은 것과 견주어 보면 과연 어느 것이 득이겠읍니까.
을사년의 일로 말하면 임금의 무욕(誣辱)을 잊지 못하고 국적(國賊)을 토벌하지 못한 것뿐이지만 오늘날은 깊은 원수를 갚지 못하고 여러 역적을 처단하지 못하고 의리가 없어지고 법도가 무너졌으니 실로 5백 년에 처음 있는 변괴입니다. 김·윤 두 공은 오히려 초연히 물러나서 굳건히 소신을 지키며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화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 아우의 거취(去就)로는 이 난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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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國喪)으로 말하더라도 예전에는 밖에 있는 자가 반드시 도성으로 들어와서 곡하지는 않았읍니다. 예를 들면 퇴계(退溪)가 부름을 받고 왔다가 인산(因山)을 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도암(陶庵)은 시골에 있으면서 끝내 국상에 참여하지 않았읍니다. 이에 대해 비록 간혹 당시의 물의는 있었으나 후세의 군자는 비난한 일이 없었읍니다.
옛 사람은 진퇴에 구차스럽지 않은 것이 이와 같으니, 아우가 비록 우매하고 용렬하오나 평소 원하는 바는 여러 선생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인산 날짜가 정해지면 그 날에 교외로 나가 엎드려 바라며 슬픔을 풀고 돌아올 따름입니다. 직책을 맡는 일에 있어서는 염치가 지극히 중하고 분의는 도리어 경하니 위엄에 두려워서 변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갑진(甲辰)년에 왜놈이 묵어 있는 땅을 빌어쓰자고 청하니 이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랑캐가 중국을 침략하여 화친을 강요하며 땅을 빼앗은 일이 예로부터 퍽으나 많았지만, 근세 왜놈들 같은 반복무쌍한 짓은 없었고 간신이 임금을 기만하여 도적을 끌여들여 나라를 팔아먹은 일이 역시 많았지만 오늘날 역도(逆徒)와 같이 기탄없는 행동은 없었다.
개화(開化)한 이래로 세계 각국이 내왕하여 온갖 변이 날로 생기는데 저 왜적이 그 틈에 끼어 교활하고 간사하여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1번 변해 갑신(甲申)년에 임금을 겁박한 액이 있었고, 2번째 변해 갑오(甲午)년에 대결을 침범한 화가 있었고, 3번 변해 을미(乙未)년에 국모를 시해한 역적이 있었고, 4번 변해 머리를 깎는 욕이 있었으며, 이제 와서는 산립(山林)·천택(川澤)·원야(原野)의 묵은 땅을 빌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대개 이 왜적은 우리나라에 있어 여러 대를 내린 원수다. 지금 개화를 인연하여 우리나라를 삼키기로 계획하고 있으니, 이웃 나라 끼리 사귀는 도의를 들어 그놈들에게 책하는 것은 웃으운 일이지만 통탄스러운 것은 실로 우리 내부의 변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대개 왜놈들의 음모와 비계가 마치 대청을 빌어 달라 핑계하고 방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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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식으로 나오고, 역적놈들의 심술이 손님을 불러들여 주인으로 만들고자 하므로 묵고 있는 땅을 빌인다는 구실을 만들어서 우리를 우롱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묵고 있는 땅이라 구애될 것이 없다고 여겨, 그 말을 들어 준다면 그 놈들이 문득 산림·천택·원야의 주인이 되어서 위로 종묘(宗廟)·궁궐(宮闕)·사직(社稷)·능묘(陵廟)와, 아래로 농사짓는 자, 고기잡이·사냥군·그릇 굽고 풀무하는 자, 매장(埋葬)하는 자, 나무하는 자, 논에 물대는 자에게까지 장차 일일이 세금을 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도 발 들여 놓을 땅이 없고, 죽어도 뼈 묻을 곳이 없으며, 나라도 자기 나라가 아니어서 사람이나 귀신이 의지할 데 없을 것이니 어찌 차마 말하랴.
무릇 나라를 경륜하는 법과 임금을 간하는 도는 의리가 일정하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말할 수 있고, 모든 관료는 말하지 않는 것과, 모든 관료는 말할 수 있고 선비로는 말하지 않는 것과, 선비는 말할 수 있고 일반 서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지금 땅을 빌어 주는 변고야말로 역대 역사에 없었던 일이요, 종묘·사직·민생이 모두 멸망하는 날이다.”
마침내 글을 만들어 동지와 더불어 8도에 통고함과 동시에 죽음을 무릅쓰고 대궐에 나아가 아뢰어 주상의 뜻을 견고히 하려고 했으나 마침내 여러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서 중지했다.
이 해 여름에 근신(近臣) 이용태(李容泰)가 주상께 이설은 진정한 충성심이 있다고 아뢰어, 특별히 안주(安州) 군수를 제수하고 빨리 부임하라는 명령이 연달아 내렸는데 3번 상소하여 사면했다.
을사년 겨울에 왜놈이 또 3가지 조건을 내세워 주상과 여러 대신을 위협했는데 주상은 고집하고 듣지 않았다. 그런데 역신 이지용(李址鎔), 박제순(朴齊純) 등이 사적으로 허락하고 조인(調印)을 했다.
이에 민영환(閔永煥)공·조병세(趙秉世)공은 모든 관원을 인솔하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역적을 성토하는 소를 올렸다. 이설은 기별을 듣고 호통하며 김복한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된 자는 죽어 마땅할 따름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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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 한 마디도 없이 죽는다는 것도 역시 의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10여 년 동안을 폐인으로 자처하여 나라에 큰 일이 있어도 한 차례나마 달려가 물은 적이 없었으나, 이 번에 이르러는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백성이 오랑캐로 변하느냐는 판가름이니 벙어리·귀머거리·앉은뱅이라도 역시 모두 분격하는데, 소위 세록(世祿)을 누리는 신하가 오히려 굳이 누워 일어나지 않으며, ‘나는 절개를 지킨다’ 하면 옳겠는가.
붓대로 성토하고 말로 싸우는 것만으로는 일에 유익될 바 없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우리들의 남은 것은 오직 붓대와 말뿐이외다. 조중봉(趙重峯)이 도끼를 들고 궐문 밖에 엎드린 것과 김청음(金淸陰)의 화의서(和議書)를 찢은 것은 어찌 꼭 성사될 줄 알고 그랬겠는가.”
2 사람은 마침내 병든 몸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상소했다.
“신이 비록 불초하오나 역시 역대 선왕의 세록을 먹은 후손이요, 우리 성상(聖上)을 모신 구신(舊臣)이옵니다. 이미 갑오년 여름에 죽지 못했사옵고, 또 을미년 가을에도 죽지 못했사옵기로 분통을 참고 원한을 머금고 시골에 엎드려 폐인으로 자처하며, 세상 일에 인연을 끊었으니 신의 죄는 더욱 커졌사옵니다.
근일에 뜻하지 않은 3 가지 변고가 또 나타나서 종묘사직의 멸망이 호흡의 사이에 결정되고, 문명과 야만의 판가름이 머리칼 하나 차이와 같사오니 슬프고 원통하옵니다.
대개 저 왜국이 우리나라와 지역적으로 서로 연접되어 습속도 비슷하고 문자도 본래 같아서 언어도 통하기 쉬우므로, 실의(失意)하여 위를 원망하는 무리나 죄를 얻어 목숨을 도생하는 족속들이 모두 그 나라로 들어가 좀 노릇하고 구더기 노릇하여 도리어 우리나라를 해치고 있사온데, 하물며 일종 음사(隆邪)하고 안악하고 염치없는 무리가 조정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뱀처럼 얽히고 이(虱)처럼 파고들어서 몰래 서로 일을 꾸며 오늘의 변을 만들어 낸 것이오니 어찌 하루 아침 하룻 저녁의 일이겠사옵니까.
아! 옛날 사화동(沙火同)은 한날 천한 포로로서 마침내 큰 난리를 이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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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종척(宗戚)·귀신(貴臣)이 모두 사화동이요, 공경(公卿) 대부(大夫)가 모두 사화동이라 나라를 팔아먹는 변이 일어날 것은 신이 이미 짐작했던 바이옵니다.
대범 저놈들이나 우리나 다 각기 일체의 자주(自主)를 지니고 있으니 저놈들이 우리에게 요구할 것도 없고 우리가 저놈들에게 의뢰할 것도 없사온데, 지금 보호(保護)라는 말 따위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욕설이 아닙니까. 소위 동경(東京)이란 곳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우리 외부(外部)가 거기에 무슨 관계며, 소위 이사(理事)란 것이 무슨 벼슬인지 모르는데 우리 주군(州郡)이 그에게 무슨 관계며, 소위 통감(統監)이 무슨 명칭인지 알지 못하는데 우리 황성(皇城)이 그에게 무슨 관계란 말이옵니까.
신은 그윽히 3가지 조문의 뜻을 보온즉 제딴은 한·당(漢唐)의 도독부(都督府)처럼 자처하고 백제·고구려의 망해버린 나라와 같이 우리를 처우하자는 것이니 얼마나 통분한 일이옵니까. 한 치 남짓한 종이쪽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임금님을 협박하던 날에 한 사람도 저 하무저(夏無且)가 약주머니로 진시황(奏始皇)을 죽이려던 형가(荊軻)를 치 듯이 단수실(段秀實)이 수판(手版)으로 당(唐)나라 반적 주자(朱泚)를 치 듯이 하는 자가 없었으니 너무도 슬픈 일이옵니다.
이로써 반복무상한 간신놈들의 왜놈과 결탁한 흉계가 여지없이 탄로됨과 동시에 오늘날 임금만 계시고 신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성상께옵서 종전부터 고립되신 것을 더욱 징험할 수 있사옵니다.
신은 듣자오니 장곡천(長谷川)이 제 나라에 돌아가서 말하기를 ‘조선은 용이하다. 그 나라 조정에 있는 신하가 모두 우리 심복이 되었다. 다만 굴복시키지 못한 것은 민심이요, 의심스러운 존재는 야(野)에 있는 신하들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이등(伊藤)이란 자가 급급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은 대개 한 번 시험해 보자는 것이옵고 반드시 성사할 것을 알고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우리 성상께옵서 준절히 거절하시자 도성 안 백성들이 분격하여 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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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저 적을 친 일까지 있었으니 무릇 임금의 뜻이 이와 같고서 그 나라를 안보하지 못하는 이치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옵서 용단과 위엄을 발휘하시와 빨리 유사(有司)를 시켜 전후의 나라 팔아먹는 역적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포박하여 모두 백일하에 처형하게 하시고, 곧 애통의 조서(詔書)를 내리시와 충신 의사를 소모(召募)하시고 또 13도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각기 관하의 사민(士民)을 뽑되 큰 고을은 많이 뽑고 작은 고을은 적게 뽑으며, 군량에 대해서는 각 고을마다 1년 조세(租稅)를 허급하게 하면 백만 대군을 단시일내에 모취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신이 오랫동안 산골에 엎드려 있으면서 깊이 사민(士民)의 동향을 살펴 보온즉 머리 깎는 것도 의복을 변경하는 것도 모두 다 치욕으로 생각하며, 비록 어린아이들까지라도 일인(日人)이라 칭하지 않고 반드시 왜놈이라 부르고, 길거리에서 속삭이는 말들도 차라리 다른 되놈에게 망할망정 왜적에게 망하지는 않는다 하오니, 지금 만약 조정의 명령이 한번 내린다면 내리쏟는 물과 같이 쏟힐 것이오라 누가 능히 막아내겠사옵니까.
가사 힘이 대적하지 못하고 일이 성공되지 못하여 마침내 극단의 화가 있을지라도 나라가 망하고 사람이 죽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으며 어찌 죽지 않는 사람이 있겠사옵니까 오직 성상께옵서 후진(後晋) 석경당(石敬瑭)이나 송(宋)나라 건염(建炎)[고종(高宗)의 연호]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시고 반드시 명나라 의종(毅宗)으로 법을 삼으시며, 신하들은 장낙로(長樂老)[馮道] 허평중(許平仲)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반드시 문천상(文天祥)의 연옥(燕獄)을 돌아갈 곳으로 삼는다면, 지하에 가서도 조종(祖宗)을 뵈올 수 있으며 만세라도 영원히 말이 있을 것으로 믿사옵니다.”
또 작은 첩자(帖予)를 올렸다.
“신은 소위 변명소(卞明疏)란 것을 얻어 보옵고 부지불각중 간담이 써늘하여 이가 저절로 갈리옵니다. 그 궁흉극악(窮凶極惡)한 음모가 일일이 탄로되었다는 것은 바꾸지 못할 공론이니 무릇 혈기가 있는 족속이라면 그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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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어 먹으려고 하지 않을 자 없사온데, 유독 성상께옵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고 차마 적의 무리로 하여금 목숨을 유지케 하여 대궐 안에 출입하도록 남겨 두신단 말입니까.
저 왜놈도 역시 나라가 있는 이상 반드시 군신의 의와 충역(忠逆)의 구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5적에 대하여 겉으로는 비록 끌어들여 결탁할지라도 속으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니, 우리나라가 우리 역신을 처단하는데 저놈들이 어찌 간섭하겠사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조금도 염려 마시옵고 빨리 5적의 목을 베어 사방의 의혹을 풀어 주시고 만고의 강상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김복한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신은 지난 을미년 섣달 일에 실패하였사오니 만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다행히 은택을 입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자 곧 병이 들어 폐인이 되었사온즉 오직 깊은 산골에서 깨끗이 평생을 마치는 것을 보답으로 삼을 수 밖에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부질없는 나라 걱정이 그칠 때가 없어 혹은 식사 때가 되어도 밥먹을 줄을 모르고 밤중에도 잠을 못이루며 삶의 낙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지금 10년이옵니다.
하늘이 여전히 죄 준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여 간신이 발호하고 왜놈이 협박하더니 이윽고, 10월 21일 사건이 생기어, 5백 년 종묘 사직과 3천리 강토가 마침내 왜놈의 소유가 되고 말았읍니다.
이 기별을 듣고서 곧장 자결하려다 못 하고 이에 감히 병든 몸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이 짧은 소장을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옵서 먼저 나라를 팔아먹은 흉역 지용(李止鎔)·제순(朴齊純) 이하 모든 적을 하루 빨리 처형하시와 그 목을 네거리에 매달게 하시고, 특별히 애통하시는 조서(詔書)를 내리시와 사방의 충의 있는 선비들을 소모하여 원수 오랑캐를 물리치고 왕실(王室)을 부흥케 하시옵소서. 만약 신의 말을 망언으로 여기신다면 신의 목을 베어 간신과 원수놈의 마음을 쾌하게 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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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선조(先祖) 문충공(文忠公) 신상용(尙容)은 종묘 사직이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하여 애착없이 자신을 희생했사옵고 방조(傍祖) 문정공(文正公) 신상헌(尙憲)은 통곡하며 국서(國書)를 찢어버리고 구금되어 나오지 않았사온즉 신이 비록 불초하오나 매양 두 조부의 만분의 하나라도 배우고자 하였던 것이온데, 지금이야말로 그 길을 얻었다고 생각되옵니다.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범하오나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옵서 인자심은 많으시나 강단력이 부족하시와 나라 일이 망극하게 되는 것도 반드시 여기에 근원이 되는 것 같사오니 빨리 반성하시고 격려 진작하시와저 주선왕(周宣王)의 중흥을 이룩한 것으로 법을 삼으시기 바라옵니다.
끝끝내 세궁력진(勢窮力盡)하여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할 때는 차라리 사직(社稷)에 바쳐 명(明)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와 같이 가는 것도 어찌 늠름하고 열렬한 처사가 아니오며, 또 영원히 천하 만세에 절개로써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겠사오며, 만약 다시 현상만 미봉하려 든다면 몇 달 사이에 종묘 사직이 영영 왜놈에게 넘어가서 평양(平陽)의 치욕과 오국(五國)의 천도(遷都)가 목전에 당할 것이니 장차 무슨 낯으로 역대 선왕의 영령을 뵈오리까.”
이 때에 역신 완용(完用)이 외무대신으로 앉아서 각국에 훈령(訓令)을 띠워 주재한 우리 공사들을 소환하고 새로 맺은 조약문도 역시 조보(朝報)에 반포되었다. 이와 같이 외구(外寇)와 내적(內賊)이 임금을 협박하고 견제하여 말 한 마디와 한 번 움직이는 것조차 자유가 없었다.
이 상소가 들어가자 모두 경무청에 유치되었다. 왜관(倭官) 도변(渡邊)은 이설에게 물었다.
“공이 5대신더러 역적이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설은 언성을 높여 크게 꾸짖었다.
“외적(外賊)을 끌어들여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가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도변도 역시 목소리를 높이면서 말했다.
“황제가 칙령을 엄하게 하여 상소를 드리지 말라 했는데 지금 또 명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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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하니 5대신이 역적이 아니라 공이 실로 역적이다.”
이설은 또 꾸짖었다.
“의(義)의 문제가 막다른 절정에 달하였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는 것이 충성이라, 우리나라 사대부(士大夫)가 5백 년 동안 임금을 섬기는 법이 이러하다. 지금 내가 내 임금께 상소하는 것은 내가 내 일을 하자는 것이어서 우리 임금도 죄를 주지 않으시고 나라 사람도 역시 묻지 않는데 네 왜놈이 무슨 관계로 따지고 달려드느냐.”
노기가 등등하여 연달아 꾸짖고 호통치니 도변은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마침내 손을 저어 중지시켰다. 그리고 김복한과 더불어 문답했다.
“신병이 저러한데 무슨 연유로 올라왔는가.”
“소(疏)를 올려 적을 성토할 작정으로 왔다.”
또 묻기를
“누구와 일을 같이 하고 누구와 서로 왕래하는가.”
“동사하는 사람도 없고 왕래하는 사람도 없다.”
도변은 또 말했다.
“공은 시세와 형편을 왜 모르는가.”
“시세와 형편은 내가 비록 모르나 아는 것은 의리일 따름이다.”
두 사람은 한달 동안 구금을 당해 있으면서 서로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며 비분한 심회를 풀었다.
12월 그믐날에야 석방되어 돌아왔다는데, 그동안 이설의 제자 이길성(李吉性)과 김복한의 제자 이우직(李禹稙)이 따라가서 어려운 고비에 시중을 하여 가진 곤욕을 당했다. 더구나 이우직은 재취 장가드는 일자를 정해 놓고도 그대로 넘겼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어렵게 여겼다.
이설은 본시 병이 많은 데다 한 달 동안 냉방에서 떨며 지냈으므로 돌아오자 병이 더욱 심했다. 그래서 자신이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유소(遺疏)를 지어 제자에게 부탁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 유소의 대략은 아래와 같다.
“신이 비록 불초하오나 당당한 우리 조정의 구신(舊臣)이온데 신을 가두는 자는 어떤 사람이며 신을 석방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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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삶은 하루의 욕이옵고 이틀의 삶은 이틀의 욕이오라 신은 실로 부끄럽고 원통해서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할 수 없사옵니다.
이 때문에 출감하는 날부터 병세가 더욱 심하여 적잖이 5개월을 지나고 보오니 한 가닥 실올 같은 맥박이 거의 끊어져 가서 얼마 아니면 죽게 되었사온즉 다시 무슨 유감이 있겠사옵니까. 오직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일념은 마침내 죽음과 더불어 함께 죽을 것입니다.
아! 왜적, 이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온데 현재 이등(伊藤)의 목이 그대로 붙어 있고 통감(統監)이란 역적의 칭호를 성토하지 못한 채신이 먼저 죽게 되오니 신의 이 걸음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오리까. 신이 살아서는 조장하고 용렬하여 비록 대의를 들어 적을 토벌하지 못했사오나 죽어서는 반드시 여귀(厲鬼)가 되어 적을 죽여 원수를 갚을 것이오며 역대 선왕의 하늘에 계신 영령도 반드시 음조하여 주실 줄 아옵니다.”
이설이 죽으니 그 제자 이병량(李秉良) 등이 소장(疏章)을 정하게 써서 봉해 올리자 다행히 득달되어, 성상께서도 역시 감탄하셨다.
이설은 또 만장(輓章) 3 편을 지어 자기 뜻을 보였는데, 선왕을 두고 지은 만장은,
왕이여 왕이여 우리 선왕이여,
밝고 밝은 저 하늘에 계시도다.
나는 이제 가서 무얼 보여드릴고,
옛날의 복을 그대로 입었네.
선조(先祖)를 두고 지은 만장은
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충효(忠孝)를 물려 주어 세상이 추앙하네.
이제 나도 조상에게 욕될 일 없으니
견마(犬馬)의 정성이 임금을 사랑했네.
선사(先師)를 두고 지은 만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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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여 스승이여 우리 스승이여,
문명 야만 그 한계 뚜렷이 말씀했네.
이제 가 뵈어도 배척을 않으시며,
상투를 지녀서 반갑다고 웃으시리.
병오(丙午)년 12월 23일. 안병찬 등은 군사를 모집하여 왜놈을 토벌하려다가 못하고 잡혀갔다. 이에 앞서 이설은 국가가 날로 멸망의 길을 치닫고 있음을 보고 마음에 하고 싶은 바가 있었으나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병찬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지령(志令)은 본시 사암(思庵)의 기백을 가지고 퇴계(退溪)의 몸 감추는 법을 쓰고 있으니, 그가 사무를 담당하지 않을 것은 이미 짐작한 바이나 형도 역시 그렇고 저렇고 한단 말인가. 목의 피가 이미 다 빠지고 다시 뿌릴 만한 남은 피가 없어서 그러는가. 이미 국가의 존망에 매었다 한다면 그 화가 호흡 사이에 임박해 있음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터인데, 이제 와서 불가불 그 처음을 살펴야 하겠다는 것은 무슨 생각인가. 이미 처음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을진대 또 그 끝장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니 형 은 앞 뒤를 개운히 하고서야 이 일을 하겠다는 것인가. 장차 사람이 죽어서 성복(成服)한 뒤에 약을 쓸 형편이니 진실로 한탄스러운 일이외다.
천하에 혼자 싸우는 장군은 없으니 아우 내가 비록 뜻이 있지만 누구와 더불어 일을 같이 한단 말인가. 백 번 생각해도 머리를 풀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 밖에 딴 도리는 없는데 들어가는 산이 장차 누구의 산이 될 것인지 모르겠사외다.”
지령(志令)은 지산 영감을 말한 것이다. 김복한은 신병으로 폐인이 되자 영영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기로 맹서했으므로 이설의 말이 이와 같았는데, 을사(乙巳) 조약이 체결된 뒤에도 복한은 마침내 이설과 함께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가 상소로 진술하여 역적을 성토했다.
병찬은 선비의 처사가 벼슬아치와 같을 수는 없다고 여겼고, 또 지금 죽이고 살리는 대권이 모두 저 왜놈들에게 옮겨졌으니, 비록 천 장의 상소와 백 장의 공문서를 한들 또한 일에 대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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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진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릇 지혜와 용력이 있는 자를 심력을 다해 찾아내어 충의로 격동하고 이해로 달래서 약간 명의 동지를 얻었다. 이 해 봄에 이르러 민병(民兵)을 모집하여 수천 명을 얻게 되자, 성지(城池) 하나를 빼앗아서 험한 곳에 근거를 두고 나아가 싸울 것을 계획했다.
이설은 겨우 석방되어 돌아와 병이 들어 집에 누워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서 시 1 수를 지었다.
의병을 거느리고 누가 오나 했더니,
그 당년 목을 찔러 죽으려던 분이었네.
가소로운 사람들 돌아서서 웃지 마소,
앉아서 말만 해서 무슨 공이 있다던가.
이 때 왜놈의 병참소(兵站所)가 별 박이듯 바둑놓이 듯하고, 지방민이 왜놈의 금전 매수에 맛을 붙여 그놈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도 역시 많으므로, 마침내 홍주 합천(合川)에서 패전하였다. 그래서 병찬 및 박창로(朴昌魯)는 잡혀가고 채광묵(蔡光黙)은 병으로 집에 있었던 때문에 모면되었다.
박·안 2 사람은 잡혀 가서 곧 공주(公州)관찰부로 압송되었는데, 이 때 곽찬(郭璨)이 관찰서리(觀察署理)가 되어 병찬을 불러 문초를 받자 병찬은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병찬은 비록 용렬하여 사람 같지 않으나 오히려 의리의 큰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으므로, 국모를 시해하고 머리를 깎는 을미년 변고가 일어나자 절개가 있는 한두 선비를 따라 의병을 일으키는 계획을 하다가 흉하고 간사한 놈이 배신하는 바람에 일은 마침내 실패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본군 감옥과 서울 법부에 수감되었었다.
개미와 같은 미미한 목숨이 특별히 천은(天恩)을 입어 죽지 않고 오늘날까지 연장해 왔으니 실로 우리 성상께옵서 다시 만들어 주신 몸이다. 그 후로 동지와 더불어 1가지 약속을 정하여 결코 개화(開化)에 물들지 않을 것과 금수가 되는 것을 면할 것을 도모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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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불행하여 지난 해 겨울에 소위 새 조약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이는 곧 온 나라를 가져다 왜적에게 준 셈이다. 전후에 걸쳐 원수 오랑캐가 덤빈 것은 실로 임금의 측근에 있는 역당이 문을 열고 맞아들인 때문이지만, 그러나 중외 상하가 한 번도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은 일이 없어서 나라 형세는 위급하고 인심은 흉흉하니 헤아릴 수 없는 조석에 임박했다.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달갑게 왜적의 노예가 되고 말란 말인가.
옛날 당현종(唐玄宗)의 이른바 ‘24개 군(郡)에 일찌기 한 사람의 의사가 없었다.’ 는 것이 정히 이를 두고 이름이다.
병찬은 한갓 나라에 대한 근심을 품고 대의에 입각하여 간대에 깃발을 달고 몽둥이로 창을 삼아 의기 있는 인사를 규합하여 호응을 받아 석권(席卷)할 계획을 하려고 했는데, 본군에서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왜적은성에 웅거하여 굳건히 지키므로 세력이 모자라서 부득이 후퇴하다가 마침내 왜놈 헌병에게 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후일을 기다리던 계획마저 저절로 깨지고 말았으니 자신의 역량을 생각지 못하고 한갓 화와 욕만 당한 것이 극히 부끄럽지만, 그러나 을미년에 목을 찔러 죽으려던 몸이 다시 세상에 살아남아 이미 12년의 세월을 지냈으니 지금 비록 죽더라도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박용근(朴容根)은 일찌기 병찬의 문하에 출입한 사람인데, 병찬이 합천에서 잡혀 갈 때에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이 혹은 변성명하여 화를 면하려고도 했으나 유독 용근은 병찬의 뒤를 따라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함께 포박을 당했다. 마침내 본부 감옥에 구금되자 언 땅 바닥에서 거처하자니 사람치고는 견딜 수 없었는데, 역시 좌우에서 보살펴 정성을 다하고 석방되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왔다.
사령부(司令部)란 것은 일본헌병의 처소요, 그 부관(部官)은 경시(警視)라 하는데, 즉 왜의 관직이다. 그 자가 병찬을 불러서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물으니 병찬은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우리 종묘사직이 망해 가고 예의가 땅에 떨어지고 강토(彊土)가 우리 것이 아니오, 정령(政令)이 네놈들로부터 나오고 공석상에는 중의 대가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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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덕이고, 학교 안에는 새 소리가 지저귀니 유순한 우리 소중화(小中華) 수천 만 민중이 이미 금수가 되었고, 금수가 된 나머지에 또 장차 어육(魚肉)이 될 모양이다.
그런데 조야(朝野)의 공경 재상이나 도(道)·군(郡)의 감사 수령이 모두 개 돼지 같은 완악하고 지둔한 자들이라, 모두 난신 적자의 도당이 되어 하나도 적을 토벌해서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아니하므로 나는 녹녹한 일개 서생으로서 이를 갈고 피눈물 흘리며, 대의를 천하 후세에 펴 보고자 했는데 운수가 막혔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일단 패하면 죽는다는 것 쯤은 본래부터 생각했던 바다. 네놈들의 소위 법률이란 것은 나로서 알 바 아니고 나는 자신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것과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으니, 빨리 나를 서울로 압송해서 나로 하여금 가슴 속의 맺힌 피를 한 번 내 뿜고 죽을 곳에서 죽게 해 주기 바란다.”
병찬은 비록 험악한 지경에 처하여 사생이 목전에 있었으나, 언제나 문초가 있을 때는 반드시 의관을 단정히 하고 출입하며 무릇 힐난이 있게 되면 반드시 언성을 높여 굴하지 아니하니 왜놈도 역시 모두 경복하며 참으로 지사라고 했다.
전 참판(叅判) 이남규(李南珪)가 일찌기 곽찬(郭璨)에게 편지를 보내어 병찬의 을미년 사실을 매우 자상히 말했고 또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하느님이 무슨 까닭으로 이 사람에게 일찌기 그 뜻을 완수하게 하여, 바로 그 때에 죽게 하지 않고 마침내 오늘의 욕을 보여 이 도산검수(刀山劍樹)의 고초를 실컷 받게 하는지 모를 일이외다.
그를 죽이고 살리고 하는 조종은 왜놈의 손아귀에 달렸으니 형으로서는 반드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며, 설혹 있다 하더라도 원수놈에게 목숨을 구하여 또 광명정대한 죽음을 지연시키고 보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 결국 그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되니 이 아우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사외다.
만약 그 결단권이 왜놈에게 있지 않고 형에게 있다면 이 아우는 더구나 말할 필요도 없으니, 왜냐 하면 형의 마음이 곧 이 아우의 마음이라 그를 처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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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아우의 말을 기다릴 것이 없는 때문이외다. 그러나 다만 형이 그가 강개하고 격분하여 근일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배 없이 바다를 건너려 드는 헛된 용기 있는 것만 알고 종전부터 의리를 몸둥이보다 더 중히 여기며,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뜻이 본래 가슴 속에 자리잡혀 있는 것을 모를까 염려되므로, 근일의 일을 말하지 않고 을미년 일만을 소상하게 설명한 것이외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죽게 만든다면 우리들이 나중에 황보장군(皇甫將軍)이 없어서 당인(黨人)이 되었다는 수치를 받게 되지 않겠는가.”
이에 이르러 곽찬은 답서를 냈다.
“안병찬의 사건은 비록 진지하신 훈계가 없을지라도 어찌 사람치고 춘추(春秋)의 의가 없겠는가. 일본 헌병에게 교섭하고 내부(內部)에 명확히 보고하고 경시(警視)와 언쟁을 벌여 모든 역량을 기울여 간신히 빼내 왔으나 내부(內部)에서 문초를 받아서 보고하라는 훈령이 있으니 일이 상부에 매었으며 또한 어찌하랴. 문초를 받는 마당에 있어 조용히 의논하여 죄목”이 성립되지 않게 하려하는데 이 친구가 너무 강직한 병이 있어 구차히 면하려 들지 않으니 세상 일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이와 같으외다.
곽찬은 마침내 내부(內部)에 보고하기 위하여 문초를 받았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당당한 문명국으로 왜놈의 절제를 받아서 전장(典章), 법도, 관직, 세제(稅制)가 하나도 그 전대로 있는 것이 없으며 중화(中華)의 일맥을 그 영향마저 끊어서 인류는 금수로 변했으니 금인(金人)의 송(宋)나라를 우롱하는 정책이 불칙하매 노(魯)나라에 남았다는 주(周)나라 예가 어디 있는가.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남녀들도 다 왜놈을 원수로 삼아야 하고 역적을 베어 죽여야 할 것을 알고 있는데, 안으로 대소 관료와 밖으로 관찰 군수는 모두 다 왜놈의 앞잡이요, 역적의 도당이며, 경사(卿士) 대부(大夫)로 벼슬을 그만 두고 시골에 사는 자들도 역시 모두 머뭇거리며 겁을 내서 조중봉(趙重峯), 고제봉(高齊峯) 같은 의를 생각하는 일이 없으며, 특히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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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고 있는 자들도 몸을 깨끗이 하여 스스로 지키는 절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혹은 형세를 보아 들락날락하며 혹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울분에 싸인 자들이다.
나라의 공허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 가의(賈誼)가 통곡하여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어찌 오늘을 두고 이름이 아니랴.
병찬은 일개의 서생인지라 전혀 군사상의 일은 모르지만 망녕되어 성인(聖人)의 무리에 결부하여, 사민(士民)을 모집해서 난적을 토벌하려 했는데 기지(機智)와 계획이 주밀하지 못하여 또 지난 을미년 같은 화를 불렀으니 정히 오늘에야 죽을 곳을 얻은 것이다.”
이 때에 민종식(閔宗植)이 역시 의병을 규합하여 서천(舒川)·남포(藍浦) 여러 고을에 드나드는 바람에 헛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인심이 들끓으므로 일이 오래도록 체결되지 못했다가 4월 12일을 당하여 겨우 석방되어 돌아갔다. 박창로는 본래 지혜가 많고 말도 잘하므로 권변을 써서 병찬보다 먼저 석방되었다. 그러나 국변(國變)이 있은 이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분발하여 무릇 의거가 있으면 반드시 남 먼저 참여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역시 훌륭하게 여겼다.
4월 26일. 전 참판 민종식이 의병을 거느리고 홍주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서 여러 번 왜병과 교전하여 수백 명을 잡았는데, 마침내 윤 4월 9일에 성이 함락되어 달아났다.
이에 앞서 안병찬은 민종식을 끌어들여 응원을 삼고 전 판서(判書) 최익현(崔益鉉)을 추대해서 맹주(盟主)로 삼고자 하여 임승주(林承周) 및 여러 사람을 시켜 서로 왕래하며 일을 의논했었다.
이윽고 호남(湖南) 인사들이 역시 최익현에게 청하여 맹주를 삼으려 하니 최익현은 생각하기를, 한 구석에 홀로 있어 호응하는 자가 적으면 단연 외롭고 위태할 염려가 없지 않다 하여 마침내 호남 사람과 일을 같이 하려 하고 종식도 역시 여러 번 기회를 잃었으므로 머뭇거리며 발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병찬의 의거는 형세가 고단하여 기틀이 무너지고 일이 발로되어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고 잡히기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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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은 보국(輔國) 영상(泳商)의 아들로서 대대로 충효를 승습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기를 좋아했다. 거사하던 날에는 수만 금 재산을 털어 지략 있고 용맹 있는 인사를 구했다. 그래서 이달 초순에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이 종사(從事)가 되었다.
그 들은 서천(舒川)을 경유하여 남포(藍浦)로 들어가 자리잡고서 유준근(柳濬根)을 청해 오고, 또 군량과 무기로 구득하여 마침내 홍주부로 들어오자 신보균(申輔均)·신현두(申鉉斗)·이식(李侙)·안항식(安恒植) 등이 차례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유준근을 유병장(儒兵將)으로 삼고 이식을 의병 중군으로 삼고 신보균을 유병소(儒兵所) 서기로 삼았다.
이에 의병의 기세가 크게 떨치어 민심이 매우 기뻐했다. 전 승지(承旨) 김상덕(金商德)·선비 윤석봉(尹錫鳳)·유호근(柳浩根) 및 여러 인사가 많이 찾아왔다. 채광묵(蔡光黙)도 역시 병든 몸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윤 4월 7일. 남규진(南奎振)이 예산(禮山)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그러나 의논이 일정하지 않아서 지휘를 정하지 못한 채 외로운 성 하나만 사수하고 앞뒤에서 서로 적을 몰아칠 만한 형세가 못 되므로 적의 군대가 사방으로 닥쳐 와서 에워싸고 공격하니 성이 마침내 함락되어 종식은 어두운 밤을 타고 성을 넘어 나갔다.
성이 함락될 무렵에 대포 연기와 비오듯하는 탄환이 성중에 가득 찼는데 운량관(運糧官) 성재평(成載平)은 홀로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했다. 누가 함께 도망가자고 말하자 문득 나무라며,
“나는 중한 책임이 있다. 이 문부를 안고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고 드디어 죽었다. 채광묵 부자(父子)도 역시 다 불에 타 죽었다. 이번에 죽은 자가 백여 명이요, 잡혀 간 자가 83명이다. 잡혀 간 사람들은 경성 일본군사령부에 구금되었다.
6월에 군사령부로부터 70여 명을 석방했는데, 윤석봉은 그 수효 중에 끼었다. 그리고 남규진·유준근·이식·신현두·이상귀·문석환·신보균·최상집(崔相集)·안항식 등 9명을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감금키로 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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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죄의 경중을 따져 연한을 정하고 유독 남규진·유준근·이식·신현두에게는 무기의 징역을 가했다.
안항식이 처음 잡혀 갔을 적에 왜놈이 밥을 가져다 주니 항식은 분을 내어 밥 그릇을 던지며 꾸짖었다.
“나는 네놈의 밥을 먹어 가며 살고 싶지는 않다.”
유준근은 성품이 강직하여 무릇 심문이 있을 적에는 말과 기운이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니 왜놈이 이 때문에 더욱 꺼렸다.
18일에 9사람이 일본 병정을 따라서 기차를 타고 초량(草梁)에 도착하여 저녁 후에 윤선(輪船)을 타고 이튿날 아침에 대마도에 도착했다. 그래서 이즈하라(嚴原)경비대 안에 구금되어 궂은 비와 거센 파도에 갖은 고생을 다하니 이 소식을 들은 자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와서 보니 왜놈이 역시 대우를 잘하여 거처와 음식이 족해 견딜 만했다. 그러나 9사람을 시켜 2패로 풀을 뽑게 하고 검은 외투를 각각 1벌씩 내주어 빨리 입으라고 재촉하니 대개 역군으로 편입시켜 그 의복을 입게 한 것이다. 이식은 말하기를,
“나는 한국사람이니 당연히 한국의복을 입어야 한다.”
하고 드디어 유준근과 함께 항쟁하며 죽음을 맹서하고 입지 아니하니 왜놈도 마침내 강박하지 못했다.
이식은 유준근·안항식·남규진 3사람으로 하여금 매월마다 북쪽을 바라며 4번 절하는 예식을 행하여 왜놈에게 불복하는 태도를 보였고, 남은 사람들도 역시 때로 참여했다.
왜관(倭官)은 점점 경의를 표하여 중대장·소대장 및 통역배들이 날마다 와서 거처·음식이 편하고 안 편한 것과 질병이 있고 없는 것을 살폈다. 하루는 좋지 못한 통역 한 놈이 와서 말하기를
“방 안에서 관을 쓴 자는 당연히 밥을 주지 않겠다.”
하니 9사람이 모두 말했다.
“방 안에서 관을 쓰는 것은 한국의 제도다. 우리들이 차라리 굶어 죽을망정 잠간 사이라도 관을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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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밥을 물리치니 저녁 무렵에 통역 중도(中島)공이 나와서 밥을 들라고 권하며 말했다.
“아까 통사가 한국의 예법을 모르고 이런 망언이 있었으니 행여나 개의하지 마시기 바란다.”
7월 9일. 전 판서 최익현 및 전 군수 임병찬(林炳瓚)이 역시 이즈하라경비대 안에 구금되었다. 그래서 전후를 합쳐 모두 11명이 되었다.
최익현은 덕망이 높아서 선비들의 추앙를 받았는데, 그는 조국이 망해가는 것을 그대로 앉아서만 볼 수가 없어서 일찌기 적을 토벌하여 원수 갚을 뜻을 가졌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해 볼 만한 힘도 없고 나이마저 늙었으므로 절대 의병을 일으키자는 말을 내지 않았는데, 호남·영남에 있는 문도(門徒)가 무려 수백 명이라 지난 해 5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나라가 영영 망할 기회가 박두하고 인심은 흉흉하므로 드디어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거의(擧義)하여 의기(義旗)를 높이 들고 싸움을 시작하다가 잡히어 역시 대마도에 감금되었다.
왜병이 처음에는 그에게 위협을 가하다가 종말에는 그 인격에 경복했다.
10월 28일. 공주부(公州府) 보조원 정부주태랑(正富久太郎)이 순검 오운선(吳雲善)을 데리고 와서 김복한을 보고 하는 말이 고문관 고교천수(高橋淺水)가 질문할 일이 있다 하고 드디어 압송하여 경무청에 구금하더니, 나중에는 또 하는 말이 천수(淺水)는 출타하고 한성(漢城) 고문관 환산중준(丸山重俊)이 공을 뵙고자 한다 하고 마침내 서울로 압송해서 경무청 판자방에 구금했다. 날짜는 바로 11월 1일이었다.
이튿날 보조원 단우현태랑(丹羽賢太郞)이 복한을 문초하면서 말했다.
“공은 명예가 있는 학자라고 들었으니 반드시 질문하는 마당에 있어 숨김은 없을 줄 믿는다.”
따라서 지난 해 상소한 연유와 함께 와서 함께 의논한 사람들을 물으므로 복한은 사실대로 대답하니 단우(丹羽)는 또 물었다.
“이미 민종식과 더불어 친절히 지낸 적이 10여 년이 되었고 또 함께 상소 할 것을 의논했은즉 혹시 거의하자는 의논도 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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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과연 숨김이 없는가.”
“나도 또한 을미년에 거의한 사람인데 다시 무엇을 숨길 까닭이 있겠는가.”
단우는 따라서 을미년에 거의한 사유와 같이 거사한 사람을 묻고서 마침내 말을 했다.
“국모의 피화(被禍)에 대하여 허물을 우리나라에 돌리는 것은 과하지만 대한국 신하의 의(義)로는 당연하다. 함께 거의하자고 약속하고서 마침내 반복했으니 이승우는 참으로 무상한 사람이다.”
단우는 또 물었다.
“이설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지난 해 겨울에 찬 감옥에서 병을 얻어, 금년 윤달에 세상을 떠났다.”
단우는 역시 애석히 여기며 말했다.
“어려운 사람이 죽었다. 나도 일찌기 본 적이 있다.”
단우는 다시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국권을 잃어 버린 것을 통탄히 여기지만 그러나 당초에 독립문을 세우게 한 것은 누구의 공인가. 정치가 해이하여 자력으로 지키지 못할 때는 반드시 러시아 사람에게 빼앗기게 되므로, 우리 사람이 와서 한국을 지켜 교육시키고 발달시켜서 족히 국권을 회복할 만하게 되면 당연히 도로 내 주고 돌아갈 것이다.”
복한은 웃으며 대답했다.
“독립문을 세워 주지 말고 국권이나 빼앗지 말았으면 어찌 좋지 않겠느냐. 만약 과연 도로 내 주는 날이 있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부끄러워 죽을 일이나, 지금 보는 바로는 반드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
단우는 말문이 막혀서 다시 말을 못했다.
12일에 이르러 단우는 또 물었다.
“지난날 대답은 과연 숨김이 없는가.”
“내가 어찌 숨길 까닭이 있겠느냐. 그러나 나의 뜻은 불가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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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하는 것이 어찌 당당한 대의가 아니겠느냐만, 힘이 못 미쳐서 못하는 것이며 상소하여 국사를 말씀드리고자 않는 것은 아니나, 이미 국권을 잃어버렸으니 비록 충성스런 말과 좋은 정책이 있을지라도 어떻게 채용할 도리가 있겠는가. 이것 역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다만 몸을 조촐히 하여 산골작에서 말라 죽는 것 밖에 없는데 겨울 날 먼 길에 병든 몸을 이끌고 왕래하며 이런 곤욕을 당하니 실낱 같은 쇠잔한 목숨이 오직 빨리 죽지 않는 것을 한할 뿐이다.”
처음에 단우는 복한이 신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온돌방 하나를 마련해서 거처하게 하였는데, 이윽고 왜놈 하나가 저해하여 불을 넣어 주지 아니하니 거의 저 홍호(洪皓)의 냉산(冷山)이나 소무(蘇武)의 설고(雪窖)와 같은 고초를 겪었다.
민종식은 달아나서 성명을 숨기고 이집 저집에서 투숙하며 산골과 해변으로 왕래하니 참판 이남규(李南珪)가 데려다 자기 집에 숨겨 두었는데 마침내 토왜(土倭)[이를테면 일진회나 왜놈의 앞잡이 같은 것을 말함]에게 고발을 당하여 종식은 기미를 보고 달아났고, 남규는 부자(父子)가 같이 왜놈에게 학살을 당하였다. 그 밖에 잡혀 가서 모진 악형을 받은 자도 많았는데 얼마 후에 종식도 역시 왜놈에게 잡혔다.
복한이 한성(漢城)경무청에 구금되었을 적에 종식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갇혀 있는 줄로 짐작하고 서로 보지 못해 한을 했다. (종식은 실상 감옥소에 구금되었음)
26일에 복한은 석방되어 돌아가려면서 시를 지어 종식에게 부쳤다.
충신 뒤에 또다시 충신이 있어,
혈성은 천신을 느낄 만하이.
계획 없이 착수했다 마무리지 마소,
세상에선 왜 의사를 원수로 보나.
이는 대개 그 충의를 찬양하면서 끝을 잘 마치도록 권면한 것이다.
종식도 그 후에 역시 석방되었다. 곽한일(郭漢一)·김덕진(金德鎭)·박윤식(朴潤植)이 일찌기 종식의 모의에 참여하여 종식보다 먼저 잡혔는데,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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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를 들어 항쟁하며 굴복하지 않다가 마침내 나주(羅州) 지도(智島)로 귀양가서 해를 넘기고야 석방되었다. 그리고 이세영(李世永)은 황해도 황주(黃州)로 귀양가서 4년 만에 석방되었으며, 안병찬의 아우 병림(炳琳)도 역시 잡혀서 한성에 구금되었는데, 찬 방에서 거처하다가 병을 얻어 거의 폐인이 될 번했다. 무릇 9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정미(丁未) 10월 초1일. 홍주 왜놈 순사 공팔(公八)이란 자가 조사할 일이 있다 칭하고 안병찬과 그 아우 병림·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사람을 압송하여 본군 감옥에 구금했다가 10여일이 지나서 또 공주부(公州府)로 압송했으니, 대개 왜의 앞잡이가 음으로 먹어대서 그렇게 된 것이다.
대개 협박으로 맺어진 보호조약 이후로 시국이 크게 변하여 겉으로 우리나라 사람이면서 속으로 왜놈 노릇 하는 자들이 때를 타고 일어나 의기양양하며 무릇 숙원이 있거나 이해가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문득 의병으로 뒤집어 씌워 함정을 만들어 허구 날조하여 닥치는 대로 몰아 넣으니 이 때문에 횡액에 걸린 사람이 자못 많았다.
이달 13일에 보령(保寧)파출소 왜놈 순사가 또 김복한 및 전 군수 박홍양(朴鴻陽)·주사(主事) 이훈영(李薰榮)이 중한 죄를 범하였다 하고 잡아다가 관로청(官奴廳)에다 구금했는데, 이 역시 왜의 앞잡이가 한 짓이다.
이튿날, 김복한을 불러 심문하면서 민심을 선동했다 하고 무수히 두들기다 못해 총·칼로 겨누기까지 하여 실지대로 말하라고 했으나, 복한은 그런 일이 없다고 시종 한결같이 대답했다.
이튿날 또 그들은 공주부로 압송하는데 가는 길의 방비가 매우 삼엄했다. 조현(槽峴)[홍주 청양 두 고을 접계임]에 당도하자 왜놈 순사 2명이 크게 공갈치며 교자를 멈추고 3사람을 끌어내어 곤장으로 사정없이 두들기다가 또 총을 복한의 머리 위에다 대고 터뜨리며 바른대로 말하라고 방망이로 위협함과 동시에 강도(强盜)가 둔치고 있는 곳이 어디냐고 자주 물어서 한참동안 서로 견지하고 있었다.
먼저 번에 복한은 친척을 방문하기 위하여 청양(靑陽) 서평(黍坪) 명정진(明鼎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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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렸는데, 강도 5,6명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갑자기 들어와서 정진을 두들기며 돈을 내라고 토색하며, 그 중 1명은 복한의 행구를 뒤지니 1명이 말려도 듣지 아니하자 마침내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 어른은 운대(雲臺) 김 승지시다. 언감히 이럴 수 있느냐.”
하고 이내 복한의 앞으로 나와 말했다.
“영공(令公)은 왜 창의를 하지 않으십니까.”
“지모도 재물도 없는데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 사람은 다시 말했다.
“민 참판 영감은 무슨 지략이 있읍니까. 재물은 제가 준비할 수 있으니 포군 천 명을 거느리고 돈 만 냥을 가지고 운대(雲臺)로 나갈 터이니 저희들과 의거를 같이 하여 왜적을 토벌해서 원수를 갚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복한은 대답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어찌 사양하겠느냐.”
주인 명정진은 이내 술을 대접하니 그 사람은 먼저 공손히 술을 부어 복한에게 올렸다. 복한은 집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을 대해 그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왜놈들이 이 말을 듣고서 협박해 물은 것이다.
복한은 모른다고 대답하고 굳이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니 본군 순사 정원조(鄭元朝)가 측은한 생각을 먹고 누누이 권하여 화해를 붙이며, 또 이 사건이 상부에 매었으니 사의(私意)로 취조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여, 왜놈이 마침내 길을 떠나기로 했다.
이 때에 공주 감옥에 갇힌 자는 모두 강제로 머리를 깎게 되는데, 경무관 황종복(黃鍾復)은 죄를 다스리는 것이 명확하고 또 인정이 있어서 무죄판결이 많았으며, 더구나 여러 관리에게 말하여 ‘미결된 죄수를 강제로 머리 깎는다는 것은 법에 벗어나는 짓이니 마땅히 공문을 써서 모두 서명하여 경무청에 회부하여 금후로는 강제로 머리 깎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했다.
때마침 관찰사 양주익(梁柱翼)이 아내 생일을 위해 한(韓)·왜(倭) 여러 관리를 불러서 술 마시고 즐기던 참이라 종복의 말에 이의가 없어서 여러 사람도 역시 응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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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 등 5명이 잡혀 왔는데 그 이튿날 종복은 한 번 심문해 보고서 사실 무근이라 하여 바로 석방했고, 이달 17일에 복한이 또 잡혀오자 역시 한 번 심문하는 척했다.
22일에 총순(總巡) 전모(全某)가 이르기를,
“서울에서 비밀 훈령이 있기 때문에 잡아 왔는데 심문을 거친 결과 실로 의심될 만한 일이 없어서 이에 석방한다.”
고 했다.
처음에 복한이 조현(槽峴)의 위기를 벗어났지만 사람들 생각에 그가 공주에 가면 반드시 강제로 머리 깎이는 욕을 당하게 될 것이니 평소의 고집이 보통 사람과 달라서 이번 걸음에는 필경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고 병찬의 생각도 역시 그러했는데 모두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은 바로 황종복의 힘이었다.
이 때, 임승주가 소송사건이 있어 공주부에서 머물러 있었기로 가장 그 곡절을 소상하게 알았다. 대범 우리나라에 충성하다가 저놈들에게 욕을 당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거니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왜의 앞잡이에게 먹힌다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복한은 석방되어 돌아오자 시를 지어 술회하였다.
어째서 해마다 횡액을 당하느냐,
남에게 못지 않는 수구심(守舊心) 때문이야.
죽고 삶은 마침내 운명이 있어,
병든 놈 금강을 다시 보다니.
갖가지 치욕이 연전보다 더하거니,
외로운 신하 산다는 것 부끄럽구려.
깨끗이 몸 갖기도 쉽지 않으니,
갑자기 도연명이 부러워진다.
이후부터는 본시 의병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역시 겁이 나서 감히 의(義)란 한 글자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을미년 창의가 1번 있은 이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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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미쳐 일어난 자도 역시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말하자면 이인영(李麟榮)·허위(許蔿)·이 강년(李康䄵)·민긍호(閔肯鎬) 등이 가장 드러난 이들이요, 그 나머지로 의병을 빙자하고 작란을 한 자도 역시 많았다.
그런데 저 왜놈들이 워낙 방비를 엄중히 하여 안으로 사찰에 집중하고 밖으로는 상금을 걸고 매수하므로 마침내 패배를 당하여 하나도 성과가 없었고, 경술(庚戍)년에 이르러 필경 왜놈에게 합방(合邦)되었다. 합방이란 말은 곧 멸망한 나라의 변칭이다.
외사(外史)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야흐로 의병이 홍주에서 일어날 적에는 만 사람이 모두 쳐다 보며 가슴 속에 가득 찬 울분을 풀어보려고 생각했고, 국가에 섞여 사는 왜놈들도 모두 놀라 겁을 내어 날마다 홍주에 귀를 기우리며 혹은 붓짐을 싼 채 발치를 쳐들고 서서 동으로 달아날 길을 엿보고 있었으니, 이승우란 자가 죽음을 걸고 초지를 지켰다면 열흘이나 한 달의 사이에 10만의 의병쯤은 앉아서 모을 수도 있고, 왜놈의 세력을 먼저 소리침으로써 빼앗을 수도 있었으며, 설사 불행하여 일이 실패되고 몸이 죽더라도 세신(世臣)된 의(義)로서는 국가와 함께 망하는 것이 당연하니 어찌 열렬한 대장부가 아니겠느냐.
이로 미루어 말한다면 승우 같은 자는 죄악이 하늘에 달했다고 할 만하며, 제공(諸公)의 거사는 곧 적태수(翟太守) 거록(鉅鹿) 남자의 의와 같은 것이라, 성패를 들어 의리를 따져서는 안 된다. 10여 년 사이에 충신 의사가 혹은 순절하고 혹은 스스로 깨끗이 지낸 이가 퍽으나 많았지만, 나는 일찌기 보고 들은 바라서 오직 홍주 사실에 자상하므로 우선 이와 같이 기록한다.
낙조는 더욱 밝고 가을 볕은 더욱 맹렬하듯이 여러 군자의 최후로 의리에 처한 사실도 역시 기록할 것이 많다. 그러나 당일 거의한 뜻은 국가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었는데, 그 일이 성과를 못 거두고 마침내 멸망하게 된 것은 어찌 제공의 마음이겠는가. 그러므로 나라가 망한 데서 붓대를 놓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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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續記)
병오(丙午)년 홍주전쟁에 전태진(田泰鎭)은 본래 충의심을 지닌 사람으로서 서기환(徐基煥)·전경호(田慶浩)와 함께 분연히 와서 참전했는데, 성이 함락되자 그들은 남은 군사를 정돈하여 힘껏 싸우다가 한꺼번에 모두 죽었다.
홍주의병이 한 번 패한 후로 김덕진(金德鎭)은 더욱 통분히 여겨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이때 참판 민종식이 참판 이남규의 집에 피신해 있으므로 덕진은 여러 인사를 데리고 내왕하면서 일을 모의하다가 미처 거사도 못하고 기밀이 먼저 누설되어 모두 왜놈에게 잡혀 갔다. 바로 10월 5일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공주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이윽고 경성(京城) 평리원(平理院)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는데, 덕진의 공사(供辭)는 다음과 같다.
‘아! 원통하다. 왜적은 옛날 임진(壬辰)년에 우리 능묘(陵墓)를 파고 지난 을미년에 우리 국모를 시해한 원수로서 실로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처지인데 하물며 또 10수년 이래로 위급한 화가 층생첩출하여 이윽고 작년 10월 21일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대개 천지개벽 이후 처음 있는 큰 변고다.
종묘·사직이 멸망에 직면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고, 예의가 땅에 떨어지고, 중화의 전통이 영영 끊어지고, 강토도 우리 것이 아니오, 정치 명령도 네놈들에게 빼앗기고, 민족도 다 네놈의 노예가 되고, 변해서 금수(禽獸)가 되고, 금수가 된 나머지에 또 장차 어육(魚肉)이 되게 되었으니 그 흉한 꾀와 악독한 솜씨는 너무도 참혹하다.
저 역적놈들 중에도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은 가장 흉하고 가장 악하여 죄상이 실로 천참 만육해도 오히려 싼데 마침내 조정에 자리잡고 있어 능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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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내지 못하니, 이러고서야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진실로 양심을 지닌 자라면 누구나 피로 목욕하고 눈물을 마시며 주먹을 부비고 팔목을 휘두르지 아니하랴.
덕진은 용렬한 한 선비로서 만 가지가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나, 다만 의리의 한계에 있어서는 일찌기 스승과 친구들의 강론한 나머지를 얻었으므로 충분심이 격동되어 역량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시세도 살펴 보지 아니 하고, 동지 6, 7명과 함께 대략 서로 모의하여 의기 있는 사람 천여 명을 규합해서 홍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하느님이 끝내 죄 준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여 필경 반목이 생기자 이로 인해 멀리 섬 중으로 귀양간 사람도 역시 적지 않았는데 모두 함께 죽기로 약속한 사람들이다. 나는 요행히 화를 면하여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노라니 그 마음조차 세상에 내 보일 수가 없어서 쳐다보아도 부끄럽고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뿐이다.
만 가지로 생각해도 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서 한결같이 ‘죽을사(死)’자의 부작을 간직하고 있자니 하루의 삶은 하루의 욕이요, 이틀의 삶은 이틀의 욕일 따름이다. 그래서 세궁역진(勢窮力盡)한 나머지에 죽기로 계획하고 지금 다시 의거를 경영하여 민종식을 삼고 황영수(黃英秀)·정재호(鄭在鎬)를 중군장으로 삼고, 박윤식(朴潤植)을 운량관(運糧官)으로 삼고, 곽한일(郭漢一)·이용규(李容珪)를 참모로 삼고, 나도 역시 참모가 되어 이 대의를 천하 후세에 펴 보고자 했었는데, 불행히 말이 먼저 누설되어 일은 시작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곤욕만 당하게 되니 역시 운수 소관이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랴.
아! 종묘 사직의 존망과 임금의 안위(安危)와, 문명과 야만의 한계나 사람과 짐승의 구분이 이번 거사에 달려 있으니, 만약 성공만 했다면 오늘날 먼저 네 머리를 베고 또 장차 네놈의 종자를 토벌하며, 저 5적놈들을 처단할 터인데, 시운 소관으론 형세가 당적할 길이 없으니 다시는 여지가 없다.
다만 유감되는 바는 그 뜻을 마침내 펴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못 감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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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방의 웃음거리를 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좋겠다. 나는 언제나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것과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으로 평생의 법을 삼아 온 처지다. 네놈들의 이른바 법률이란 것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이것으로써 보고하여 하루 빨리 처결해 주기 바란다.
안동(安東) 김노동(金魯東) 기록함.
발(跋)
대개 야사(野史)를 기술하는 자는 흔히 마음이 사정에 가리어 일이 사실과 틀리게 되므로 착잡 다단하여 정하지 못한 점이 있다.
오직 성헌(惺軒) 임(林)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구차히 남과 합하려 하지 않고 또 문장을 좋아하되 더 충의를 발양하는 데에는 남다른 고심이 있으므로, 이 책의 수미 서론 보면 강개 비장한 뜻이 문자의 사이에 넘쳐 흐르니 진실로 평소의 적축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와 같이 극진하랴.
공은 역시 그 뒤로 이름이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참여돼서 대구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니 그 험한 고비를 겪고 절개를 세운 것이 어찌 그리 열렬한가.
아! 창의한 제공(諸公)의 거사야말로 하늘을 떠받을 만한 일이니 성공하고 못한 것으로써 나타나고 묻힐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진실로 사실이 드러나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마음을 내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은 급급히 실지에 의거하여 바르게 써서 천추에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이 시끄러워서 능히 읽힐 수 없은즉 미상불 책을 만지며 한탄함과 동시에 앞으로 안정되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족숙(族叔) 달한(達漢)씨가 이 글이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자력으로 침판(鋟板)본으로 출판하였으니 그 의리를 사랑하는 진지성은 어찌 이 세상에 흔히 얻어 볼 수 있는 일이겠는가.
무술(戊戌)년 겨울
김노동(金魯東)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