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5)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설 교 >
나는 참된 자유자를 만났다
시 23:1-6 /조상호목사
여러분들이 기도해주셔서 한국방문과 중국선교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중보하며 기도하여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중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원래 이번 중국선교여행은 지하에서 비밀리에 사역하고 있는 중국한족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훈련하는 주된 목적으로 계획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녀와서 보니 처음에 세운 목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저나 저와 함께 동행한 우리 팀원들도 훈련을 받은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금요집회에서 고동규 안수집사님께서 우리의 일정을 대략적으로 소개하셔서 이미 들으셨고, 또 찍어온 비디오와 가져온 자료들이 정리되면 소개할 예정이기 때문에, 저는 이번 중국 선교여행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몇 부분을 구체적으로 소개할까 합니다. 중국 OO에 도착한 후 두 곳의 삼자교회들을 방문하여 두 교회의 본당에 들어가서 그 교회들이 ‘말씀대로 올바르게 서는 교회’, ’마지막 때 중국과 세계를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위해서 통성으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때 어둠을 이용하여 북한에서 탈출한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탈북자 비밀숙소에 갔습니다. 이미 2년 전 우리 미션 2002팀이 찍어온 비디오에 등장하는 몇몇 아이들도 그대로 있었고 비디오를 통해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무서운 중국 정부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자비량으로 탈북아이들을 돌보며 그 아이들을 훈련하고 있는 조선족출신 OOO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의 얼굴이 밖으로 드러나면 사역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 분의 얼굴을 사진이나 비디오로 찍지 않아 그 분의 얼굴을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 분 말을 다 소개할 수 없지만 그 분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북한에 복음을 증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약 2년 전 북한을 배려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탈북자 검거 때 OO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살이까지 한 분이었습니다. 감옥에서 한 동안 어려움을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겨우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 후에도 그 분은 탈북사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OO에 있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탈북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포기하고 다른 도시로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OO의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한 후에 다시 아이들을 모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돈이 없어 시장 바닥에 떨어진 야채를 주어다가 먹이기도 하고, 멀건 죽을 먹이는 등, 오랫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하나님 한 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부모도 형제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북한출신 아이들을 돌보며 교육시키기고 있었습니다. 그 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믿음의 용기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구나’ 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열어주신다면 그 분을 초청하여 여러분들도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보았으면 합니다.
그 다음에 만났던 한족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통해서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 중국은 오는 2008년도 북경 올림픽을 두 가지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제 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고 중국 정부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문호를 개방하며 사회 전반에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 은행과 보험과 같은 금융업이나 자동차 산업이나 건설업 등의 문호를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사회주의 국가 체제가 무너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수십 개나 되는 소수 민족들이 자치 독립을 선언하여 중국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 정부에서는 자기들의 감독 감시를 받는 삼자교회들은 도와주되, 자생적으로 운영되는 가정교회들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외국 사람들과 연계되어 있는 종교 단체와 기관들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대도시에서는 이상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출입을 하면, 공안(Police)에 신고가 들어가서 공안들이 즉각 출동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벌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는 외국 선교사들과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복음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던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삼자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중국의 삼자교회란 중국 정부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애국운동이라는 명분으로 외국의 교회들과 단절하고 공산당의 지도를 받도록 만든 중국의 공식적인 교회입니다. 자전(自專), 자치(自治), 자양(自養), 등의 첫 글자를 따서 나온 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외세의 힘을 통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철저하게 중국 정부의 간섭과 감시와 감독을 철저하게 받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이나 예수님의 재림이나 성령의 역사나 선교에 대한 부분들을 전하지도 못하게 하고 공부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삼자교회에서는 하나님 말씀 66권 전체를 가르치지 않고 그저 ‘착하게 살라’, ‘선하게 살라’, 등의 도덕적인 부분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삼자교회들은 역사적인 유물로 보존하고 있는 소수의 교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현대식 시설에 음향이나 비디오 프로젝트, 조명, 등의 좋은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삼자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가정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온의 대로처럼 넓은 길을 놓아두고, 험난하고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좁은 길을 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학교 영어학교수와 회계사로서 안정된 삶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의 길, 선교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건물의 지하실을 빌려주고 얼마든지 돈을 벌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로 내놓은 분도 있었습니다. 옥수수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시골에서 어렵게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집을 기꺼이 예배당으로 내놓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자폐증을 앓고 있어 아들 돌보는 일도 힘들 텐데, 자기 돈을 들여 수년 동안 고생한 끝에 건축한 건물에서 동네에 있는 청년들을 모아 자비를 들여 공동체 훈련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얼굴에서 저는 단 한번도 찡그리며 걱정하고 근심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분들의 얼굴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분들을 통해 ‘참된 자유’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중국 현지에서 뿐 아니라, 중국을 다녀 온 후에도 ‘참된 자유’에 대해서 오랫동안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생각하고 묵상했던 ‘참된 자유’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 함께 생각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기록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죽 읽다보면 다윗은 도저히 자유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자유자였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자식으로부터 배반당했다면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식에게 있는 재산 다 빼앗기고 갑자기 알거지가 되었다면, 그리고 아들이 죽이려고 칼을 들고 쫓아오고 있다면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마 자식 잘못 키웠다고 가슴을 치며 후회할 것입니다. 탄식할 것입니다. 동네방네 다니며 하소연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불효자식인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궁궐에서 쫓겨난 후 망명생활 할 때에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보면 후회하고 있다든지, 두려워하고 있다든지, 복수를 꿈꾸고 있다든지 하는 내용은 커녕, 오히려 그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중국에서 만났던 분들이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1)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복이 소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소유를 통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고 행복하던가요? 원하던 것을 손에 넣고 얼마 있지 않아 또 다른 욕심이 생기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지금 중국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심양에서 북한 압록강과 마주하고 있는 단동까지 가려면 낡은 기차를 타고 오랫동안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1년 전에 심양과 단동 사이에 고속도로를 놓고 수많은 터널을 뚫어 약 3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시마다 벤츠, 아우디, 폭스바겐, 등 전세계의 유명한 자동차들이 뉴질랜드에서보다 더 많이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도시에 있는 역들이 초현대식으로 개조되고 있습니다. 도시마다 3~40층짜리 고층빌딩들이 계속 세워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중국이 빨리 변하고 있는지 중국에 사는 사람들조차 놀라고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신 OOO선교사님이 사시는 OO의 OO에 우리가 북쪽에 있는 흑룡강성을 6일 만에 다녀오고 보니, 6일 전에 없던 육교가 세워질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생활이 편리해지고 있으며 윤택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거리와 식당과 기차역에서 만난 중국 사람들은 결코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생활에 찌든 얼굴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출세할 수 있을까만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동하기 위해 올라탄 택시 안의 기사의 얼굴에서도, 그럴듯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지나가는 부자들의 얼굴에서도 웃음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콜롬보 스트리트라고 할 수 있는 북경의 가장 중심거리에 가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잔뜩 걱정 어린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중국을 돌아보았지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소유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 진정한 자유는 소유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부모를 잃어버린 채 울면서 길을 헤매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주고, 맛있는 과자도 사주고, 재미있는 곳을 구경해주면 처음에는 울음을 그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그 아이는 다시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 어떠한 것도 그 아이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잃었던 엄마를 찾아 엄마 품에 안기면 그렇게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칩니다. 그 아이는 장난감보다, 맛있는 과자보다, 재미있는 곳보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을 느낍니다. 만약 어렵게 엄마 품에 안긴 아이에게 장난감을 주면서 유인해도, 아이는 결코 엄마 품을 떠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바로 그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남부럽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아들의 반란을 피해 궁궐을 떠나온 상황에 있습니다. 그의 모든 소유를 놓아두고 정처 없이 피난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에게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탈북한 아이들을 돌보는 OOO이 그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저는 그 분이 고백한 말이 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저는 손이 커서 음식과 과일을 살 때 조금 사지 못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이려고 합니다. 제가 그 동안 일과 사업을 하며 벌어놓았던 것을 다 써버려 돈이 없지만,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감옥에서 나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습니다.“ OOO은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믿음을 가진 바울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주님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주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분이 손이 크신 분이기 전에, 믿음이 크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 그대로 믿는 믿음이, 그 분으로 하여금 그러한 사역을 할 수 있는 운동력이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처럼 이선생처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동행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라
우리가 살다보면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윌리엄 힌슨이라는 사람이 조련사가 사자를 훈련시키는 방법을 적어놓은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사자를 조련시킬 때 조련사는 회초리와 권총을 허리춤에 찾고 있으면서도 사자를 향하여 의자의 네 다리를 들고 우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사자 눈의 초점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의자의 네 다리를 사자를 행해 들고 들어가면 사자는 의자 네 다리를 동시에 보려고 애쓰다가 용맹스러운 사자가 서서히 무기력증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집중력이 분산된 사자가 온순하고 유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을 신경쓰다보면 우리 또한 무기력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 때 갈멜산상의 영웅이었던 엘리야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음성만을 들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보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신경을 쓰다가 결국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할 만큼 나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애굽의 박해를 받고 있는 자기 동족들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 모세는 자기의 부족한 언변과 피난살이하고 있는 자기의 형편을 돌아보면서, 겁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거절했습니다. 만약 엘리야나 모세에게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을 보십시오. 4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에게는 그와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목자가 되셔서 항상 동행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목자들은 지팡이와 함께 막대기를 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양들이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지팡이로 양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양들을 공격해 올 때는 막대기로 짐승들을 쫓아낼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는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시며 보호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중국 여행 중에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대도시의 길가와 식당과 기차간 등에서 만난 일반 사람들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 등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너무나 달랐습니다. 기차간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밀치고, 아무데서나 자기들이 까먹은 해바라기 씨앗을 뱉어버리고, 서로 눈길을 마주치게 되면 험상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울면서 기도했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한 채 내몽고 근처의 깡촌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지만, 학습을 받다가 공안에 당장 붙잡히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가정교회에서 예배드리다가 발각되면 이제까지 이루어놓은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질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 분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난 3일에는 경운기를 타고 캄캄함 밤에 흑룡강성의 한 마을에서 또 다른 마을로 이동할 때 얼마나 춥던지 태어나서 그렇게 추운 날씨는 처음 경험했습니다. 그곳은 OOO 근처로 그날 오전부터 계속해서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고 영하 30도 이하의 추운 날씨여서 눈과 귀와 얼굴이 얼어붙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들 만큼 추운 날씨인데도, 함께 동행하던 그 분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눈이 쌓여 경운기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요란한 엔진 소리만 내며 서서히 움직이는데도 찬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처럼 항상 동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 분들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 분들처럼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신경 쓸 것이 많아도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초점을 맞출 만한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맞추어야 할 초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오직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이 우리가 맞추어야 할 진정한 초점입니다. 만약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중국에 있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처럼,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결코 낙심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성령으로 동행하시는 주님만 신뢰하고 있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다윗처럼 두려워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3)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라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안을 상실하고 자유하지 못합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 ‘무얼 해야 하나‘하며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두려워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한국에서 돈을 가져다 쓰는 분들 가운데 어려운 한국 경제 때문에 걱정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워한다고 앞날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의 케냐와 탄자니아의 국경에 걸쳐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원인 <세렌게티 평원>을 여행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는 여행을 위해 많은 물건들을 준비해 갔습니다. 물건을 자르고 땅 파는데 쓰는 연장들과 문구용품과 갖가지 옷들과 각종 의약품과 무엇이든 보관할 수 있는 방수 봉투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지를 성공적으로 여행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해 갔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밀림에서 길을 잃어버렸다면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옷일까요? 의약품일까요? 여러 가지 공구들일까요? 이러한 것들도 길을 잃은 그에게 어느 정도 필요한 것들입니다만,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길을 잃은 그에게 있어서 그가 준비한 물건들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밀림에서 길을 잃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세렌게티 평원을 잘 알고 있는 마사이족입니다. 그를 안전하게 인도해 줄 마사이족 가이드가 그에게 가장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서 세상의 것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길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진정한 가이드가 그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이드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의 전장한 가이드를 알고 있었습니다. 1절부터 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말씀을 원문이나 영어 성경에 보면 인칭대명사 <그가>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문에 따라 읽어본다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니까 다윗에게는 참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그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고백 중에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3절 하반절의 “...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대목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다윗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택한 백성들이 잘못되면 당신의 이름이 조롱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조롱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는 단지 이 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하심과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까지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우리를 천국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까? 이러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오늘 저녁에 당장 죽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은 후에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을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되 천국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앞길이 깜깜하다 할지라도 의의 길, 복된 길로 인도해주시는 진정한 가이드이신 주님께 삶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당신께 맡긴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1998년 6월에 부임한 이후 6년 6개월 동안, 2주 이상 연속으로 주일을 비워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세 번의 주일을 비웠습니다. 출발하기 전 저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이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비워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교회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위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모든 사역도 내가 계획하고 준비하기 보다는 현지에서 안내하시는 분들에게 다 위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도착한 순간부터 11박12일 동안의 계획과 진행될 사역에 대해서 현지에서 안내하시는 분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맡겼습니다. 속으로는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또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성격상, 계획 없이 불투명하게 진행되는 것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맡겼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 철저하게 위임했습니다. 현지에서 안내하시는 OOO께서 가자면 가자는 대로 장소여하를 막론하고 따라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탈북자 비밀숙소도 가고, 북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단동에도 가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OOO도 직접 밟아 보기도 하고, 과거 독립군들이 말을 타고 달리던 만주 벌판에도 갔습니다. 또 음식을 주면 주는 대로 음식 종류와 상관없이 12일 동안 꼬박꼬박 다 먹었습니다. 중국 전통의 기름진 음식을 주면 기름진 음식을 먹고, 아침에 만두를 주면 만두를 먹고, 죽을 써주면 죽을 먹고, 양고기를 주면 양고기를 먹고 닭발 요리를 주면 닭발 요리를 먹었습니다. 또 말씀을 전하라고 하면 횟수와 상관없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에도 대여섯 번 이상 말씀을 전했습니다. 새벽예배 인도하라고 하면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1시간 동안 말씀을 전하라고 하면 1시간 동안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중에는 목이 갈라지고, 목이 꽉 잠겨 도저히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도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 기차를 타자고 하면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타자고 하면 택시를 타고, 배를 타자고 하면 배를 타고, 나중에는 경운기까지 타고 다녔습니다. 아무튼지 처음에 모든 것을 위임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을 12일 동안 지키려고 힘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차츰차츰 지나다보니 저는 ‘위임한 자의 행복’을 그 때 다시 한번 깊게 경험했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위임하니까, 내가 스스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어떤 교통편을 타고 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할까 계획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물론 저희들을 인도하신 분들은 안전을 위해 중국 공안들의 눈을 피해야 하고, 여러 가지 추운 날씨와 일기도 고려해야 하고, 시간 절약을 위해 교통편, 등을 알아보아야 하는 수고를 했겠지만, 저는 달랐습니다. 저희를 인도하는 분들께 모든 것을 위임하고 그 분들의 인도를 받으니까 너무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중국선교여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깨닫게 해 주신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위임한 자의 행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로 하나님께 여러분들의 짐을 맡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여러분들 스스로 여러분들의 삶을 개척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할 수 없는 일, 여러분들의 능력 밖의 일들은 여러분들 스스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들의 능력 밖의 일들을 우리들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요즘 인터넷 사이트에 각 지방 사투리로 변형된 시편 23편이 떠돌고 있습니다. 읽어보고 나름대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 시편 23편 1절 몇 편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경상도 방언으로 된 시편 23편 1절입니다. “여호와가 내 목자라카이 내사 마 답답할 끼 눈꼽만치도 없는기라.” 다음은 전라도 방언으로 된 시편 23편 1절입니다. “앗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겄냐?” 다음에는 충청도 방언으로 된 시편 23편 1절입니다. “여호와는 염생이 같은 지를 키우시고 멕이시는 분이시니 지가 부족한 것이 없네유.” 다음에 소개하는 방언은 어느 지방 방언인지 여러분들이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아, 여호와가 내 목잔데 뭐이가 부족하간? 고저 시퍼런 풀밭에 쉬라딜 않나, 목마르면 고저 물가로 데려가딜 않나. 야, 뭐이가 부족하간?” 이것은 평안도 방언으로 된 시편 23편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오늘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의지한 것처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다윗처럼, 중국에 있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처럼,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가이드가 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위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 23:1-6 / 피종진목사
부모가 자식이 항상 곁에 있어서 늘 눈 앞에 있고, 그 음성을 들려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여호와의 목전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또 기도와 찬송으로 주님께 대화하는 여러분들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음성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편 23편은 우리가 어릴 때에 찬송으로도 부르고 또 성경을 암송할 때에 가장 많이 애용하는 구절로서 다윗의 신앙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 안에 행복이 넘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신앙의 기도와 시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절실히 필요한 것을 양의 생리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양은 순진하고 저항력도 없고 분별력도 없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습니다. 사나운 짐승들이 잡아먹기 위해서 곁에 다가와도 눈만 껌뻑껌뻑하며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잠시도 양에게서 눈을 다른 데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양 곁에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순진하고 철없는 그런 연약한 인생임을 아시고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셔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0:14,15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이 확실히 믿고 살아간다면 절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외롭다, 고독하다, 쓸쓸하다, 적적하다, 따분하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어떤 목자이신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여기에서 '부족'이란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모자란다, 궁핍하다, 빈곤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어주시면 빈곤도, 부족함도, 모자람도 주님이 다 채워주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부족함이 없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①푸른 초장에 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2절상) '푸른 초장'이란 원어에 보면 '부드러운 초목, 비젼, 생명'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비젼이 있는 그런 부드러운 좋은 초장으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때를 따라 풍성히 공급해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에게 쉼을 얻게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②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2절하) '쉴 만하다'는 것은 '평화로운 물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소개하시기를 "나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예수를 똑바로 믿는 사람은 마음에서부터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마음에 화평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마음에 화평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 마음의 화평을 다른 사람에게 접목시켜주고, 분쟁과 분열의 상황에서 일치를 이루는 역사를 나타낼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평화는 인류 최대의 이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평화가 깨뜨려지면 무서운 전쟁마당과 같습니다. 평화가 있는 곳은 바로 잔잔한 물가와 같습니다. 쉴 만한 물가와 같습니다. 휘트만은 '평화는 아름다운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를 잘 따름으로 안전과 평안이 보장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소생시키시는 목자이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3절상) '소생시키다'는 말은 '새롭게 한다, 회복시킨다, 전환시킨다, 부흥케 한다'는 이런 의미입니다. 쇠하여진 자, 병든 자, 실패한 자, 좌절과 절망에 처한 자에게는 반드시 회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영혼을 회개시켜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부흥케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이라는 말이 '소생'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자가 되심으로 다 새로워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내 힘이 역부족으로 좌절하게 될 때가 있고, 우리가 기억을 다 못해서 안타까워할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마음에 원하는 욕구와 욕망은 있지만 안되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이것을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의미로 소생케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 여러분 육체도 건강하게 회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능력으로 이런 소생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슬픔과 괴로움, 고통과 절망, 낙심과 모든 한숨은 다 성령의 바람으로 소멸시켜주시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주시고, 오늘 모두가 이 말씀과 함께 소생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셋째,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3절하) 여기에서 '의의 길'이란 '죄악된 생활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정직하게 사는 길'을 의미합니다. 정직한 사람은 손해도 보고 기회를 놓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시편 84:11에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시편 11:7에도 보면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태양이 하늘에서 작렬하게 비취지만 먹구름이 가리우면 금방 캄캄해집니다. 사이판은 참 이상합니다. 작렬한 햇빛이 비취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몇 차례 내리다가 금방 개곤 합니다. 그런데 갑자가 먹구름이 하늘을 덮으면 이게 저녁때인가 할 정도입니다.
죄악의 먹구름이 우리에게 가로막히면 아무리 주님의 영광이 우리를 조명해도 어두움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아 기도가 막히고 영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하나님의 복을 죄악이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즐거움을 죄악이 막아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쳐 인도하십니다. 성도가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짐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성도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양떼와 같은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복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전 10:31).
넷째, 최후의 승리로 이끌어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여기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베푼 상'이란 전쟁에서 포로되어 온 대적들 앞에서 전쟁의 승리자를 위하여 베푸는 승전 축하 잔칫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싸우면서 살아가는데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걱정, 근심, 불안, 공포 속에서 매일 살아가게 되면 마음이 쇠약해지고 뼈와 육체도 쇠약해지고 나중에는 용기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플라톤은 '인생의 최대의 승리는 나를 이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공자는 시련을 극복할 줄 아는 사람, 반대자도 이용할 줄 아는 사람, 비젼을 안고 과감하게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또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반드시 승리해서 하나님 앞에 큰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목자,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 최후의 승리로 이끌어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자이심을 감사하면서 귀하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1-3 / 조용기목사
뉴질랜드는 양의 수가 인구 수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또 그곳에는 목자가 필요없습니다.
전 국토가 목초지이고 사나운 짐승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냥 양을 방목합니다. 그러나 이스
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메마르고 험해서 물이 귀하고 목초지가 많지 않
으며 사나운 짐승도 많습니다. 그곳에는 목자의 도움이 없이 결코 양이 살아날수가 없습니
다. 목초와 샘물은 목자가 찾아내어야만 하고 밤낮으로 목자가 양무리와 함께 해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은 이스라엘의 양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시
는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시편 23편에는 ‘여호와는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
습니다. 이 여호와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 목자께서 우리
를 어떻게 돌보십니까?
1. 푸른 초장에 누이심
오늘날 우리의 푸른 초장은 어디입니까? 갈보리 십자가 밑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
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서 가꾸신 것이 바로 십자가 밑의 푸른 초장인 것입니다. 푸
른 초장에는 우리가 먹고 자라날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의 축복이 있습니다. 푸른 초장에서
어떠한 은총을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까?
첫째 죄사함과 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
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이 만드신 푸른 초장에 가면 그
보혈로 말미암아 이루어 놓으신 목초가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용서와 의와 영광
과 화목을 얻는 놀라운 영양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 거룩한 초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초장 밑에 가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과 마귀를 다
내어 쫓으시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십니다. 셋째 치료의 초장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치
료의 하나님이신데 치료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있는 초장에 치료
의 목초가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넷째 형통의 초장을 발견합니다. 이 세상은 가난의식, 패
배의식, 절망의식으로 꽉 들어 찹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한 초장은 우리들을 율법의 저
주에서 속량하시는 초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주시는 초장
인 것입니다. 다섯째로 영생복락의 초장입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 가서 보면 죽으면 끝이라
고 생각하지만 십자가 밑에 가면 죽음은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복락의
초장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마련한 초장을 항상 기도로써 방문하고 거
기에 주님이 예비한 오중복음의 은혜의 풀을 늘 마음속에 믿음으로 받아 먹어야만 되는 것
입니다.
2.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심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마음에 기갈이 다가오고 목마름이 다가옵니다. 행복과 평화의 기
쁨의 목마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의 목마름을 채
워주십니다. 목마른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시면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납니
다. 이 생수의 강은 바로 성령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와서 구하
여 생수의 강을 체험하면 그 생수의 강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세속에 때묻고 죄악이 우리를 붙잡지 않습니까? 가는 곳마다 죄악
이 발목을 잡고 세속의 때가 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 의롭게 살 힘이 없습
니다. 그러나 성령의 생수를 마시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생수는 평강의 생수입니다. 세상에 염려와 근심 바람
이 불어오지 않습니까? 마음에 불안과 초조가 꽉 들어찹니다. 그럴 때도 주님 앞에 엎드려
서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고 성령을 향하여 입을 넓게 열면 우리의 지각을 뛰어난 하나님
의 평강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를 채워주는 평안 때
문에 이 불안한 세상 속에서도 평안하게 살 수 있고 불안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은 바로 우리 목자가 생수를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장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희락의 생수를 주십니다. 인생
들이 얻는 부귀, 영화, 공명을 통한 기쁨이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
아가면서 성령이 우리 갖다주는 희락, 이것이 있어야 삶의 참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의 목자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하늘 나라 체험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
의 생수가 흐르고 평강의 생수가 흐르고 희락의 생수가 흐르도록 우리 목자께서 만들어 주
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수는 마시고 나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세상 물은 마시면 또 목
마르고 또 목마르지만 주님이 주시는 생수는 끊임없는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갖다줍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는 포도주와 젖이 되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기쁨
을 줍니다. 그리고 젖은 우리가 마음에 영양실조를 면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
면 우리에게 취할 정도로 기쁨을 주시고 마음에 영양을 공급해 건강한 심신을 가지고 살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목자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되신 예수께
나아가서 그를 구하면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3. 영혼을 소생시킴
너무나 힘든 일을 하고 지치거나 더위나 추위에 고생하면 기운을 잃고 마음이 완전히 퇴락
해집니다. 그때 충분한 영양분과 휴식을 취하면 소생하지요. 오늘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한 우리들을 소생시켜 주시는 역사를 합니다.
예수님 목자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사 기도하게 하므로
소생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사 세속에 찌들고 죄악에 빠진 우리들을 회
개하게 하시고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시므로 우리의 영과 마음을 소생시켜 주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 일어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마음을 고치시고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생
명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때문에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영양실조가 걸리고 더 악화가 되지요.
이러므로 말씀의 떡을 먹어야 우리가 소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인데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생명의 떡을 먹으므로 우리
가 주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으로 살 것이라 했는데 우리 영혼이 사는 떡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
님께서는 이 세상에 살면서 지치고 피곤한 우리의 심신을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소
생케 해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다시 용기와 힘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4.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심
우리 한국에서는 옛날에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면 그 가문을 위해서 자식들을 엄하게 교육
시켰습니다. 가문을 위해서 엄하게 교육하지요.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을 때 우리를 내동댕이쳐 놓고 키울 줄 압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이
름 때문에 그 이름을 따라 자녀가 된 우리들을 의의 길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 허
물과 죄로 죽어서 마귀의 밥이요, 마귀의 종으로 살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살려주셔서 하나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목자되신 예수님은
새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지음받은 새로운 피조
물입니다.
또 성경은 썩어질 구습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옛사람은 아담의 성
품,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은 별도리 없
이 세속의 썩어진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 우리가 새롭게 못하
지요. 오직 예수를 믿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놀라운 능력을 통해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은 살아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따라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우리들에게 입혀 주십니
다. 죄와 사망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야 됩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
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믿음은 느낌이 아닙니다. 우리들
의 의지로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입술로 시인하십시오.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나는 그리
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 마귀야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누더기를 입고 썩어진 구덩이
에 들어가 있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이 되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산
다. 사단아 물러가라’고 입으로 강하게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고 바라봄이 달라지고 입술의 고백이 달라지면 새롭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양들로서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
게 기르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목자가 누군지 알아야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며 목자의 손에
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좋은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이 목자
앞에 우리가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목자를 바라보고 목자를 따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좋은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이끌어 주시고 승리하게 만들어 주십
니다.
신앙의 사계절
시 23:1-6 / 조용기목사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1~6)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시편 23편 1절로 6절을 가지고 “신앙의 사계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을 통해서 보면 신앙이란 항상 축복만 쏟아지는 생활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고난만 다가오는 생활도 아니지요. 일 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신앙에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본론>
1. 은혜와 축복의 계절
첫째, 계절은 은혜와 축복의 계절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을 때 먼저 체험하는 것은 은혜와 축복의 계절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봄이 다가와서 만물이 푸르러 청청하고 아름답고 아지랑이 끼고 생명이 충만한 것처럼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굉장한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고 생명이 넘치는 축복 속에 사는 때가 있습니다. 은혜의 말씀과 푸른 초장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2절에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푸른 풀밭에 누이신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양은 좀처럼 풀밭에 눕지 않습니다.
목사이며 작가인 필립 켈러는 원래 호주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는데 목사가 된 이후 그는 「목자가 바라본 시편 23편」이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보면 양이 초장에 드러 누울 때는 네 가지 조건이 있어야 드러눕는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 조건이 양을 잡아먹으려는 원수가 없어야 초장에 눕지 이리나 사자나 여우가 주위에 있으면 절대로 초장에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양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화목해야 장에 눕지 뿔로써 싸우고 머리로써 밀치고 하는 싸움이 있을 때, 절대로 초장에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초장에 눕지 않을 때는 몸에 빈대 벼룩이 있을 때는 절대로 초장에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충분히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 목장에, 푸른 초장에 드러 눕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눕힌다는 것은 우리에게 원수를 없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 가운데 화목함이 있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의 빈대벼룩을 없애 주시고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도록 만족케 해주면 우리가 하나님 목장에 드러눕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계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하심으로 원수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모두다 원수가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병든 것을 고치시고 염려, 근심을 재하여 주시고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셔서 정말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사는 꿀맛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계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와 축복의 계절에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알고 간증하고 찬송하고 기뻐합니다. 그때는 성령의 생명수가 마음에 넘칩니다. 우리가 목마르고 마실 물이 없을 때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옛날 제가 어릴 때는 여름철에 밭에 가서 일을 종종 했는데 콩밭을 매든지 여러 가지 밭농사를 지을 때 얼마나 더운지 말로다 할 수 없어요. 땀이 비같이 흐르는데 그때 우물에 가서 찬물을 길러 와서 그냥 찬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간장을 좀 섞어 가지고서 그래서 마시면 굉장히 시원합니다. 아예 천당 같아요. 제가 일정시대에 강제노동에 동원된 보국대들이 화물선을 타고 필리핀을 위시한 남방으로 운송될 때 체험을 들었었습니다. 화물칸에 꽉꽉 한국 노동자들을 태워서 물을 한 방울도 주지 않고 장시간 며칠을 항해를 하니까 사람들이 목말라서 죽을 지경입니다. 물 달라고 아우성을 쳐도 일본 사람들이 물을 안주니까 나중에 목을 쭉 뽑아서 픽 쓰러지고 쭉 뽑아서 푹 쓰러지고 그래서 제일 처음에는 급하게 물을 좀 갖다 먹이더니만 나중에 쓰러진 사람 많으니까 몽둥이를 가지고 두들겨 패고 물을 안줘서 수많은 사람이 목말라 죽었다는 말을 들어본 것입니다. 물을 나흘만 안마시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항상 광야를 지나면서 물이 없어서 불평을 하고 원망, 탄식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도 우리 영혼이 언제나 갈급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이 죽었든 살았든 영혼을 사모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돈만 벌면 만족하지 싶어도 돈 가지고 만족하지 않습니다. 물질만 많으면 행복하지 싶어도 행복하지 않아요. 권력이 있으면 행복할까 싶어도 행복하지 않아요. 그 무언지 모르게 마음에 언제나 갈급함이 있어요. 무슨 갈급함인지 꼬집어 말하지 못하지만 갈급함입니다. 그 갈급함이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인 것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항상 마음속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사람은 고향이 바로 하나님 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은 모든 세상 것을 다 가져도 항상 마음에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리움을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 쾌락으로 채워 보려고 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의 생수를 마시기 전까지는 마음에 결코 안주함이 없고 만족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축복의 계절에는 푸른 풀밭에 누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생수를 마시게 해주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2절에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요한복음 7장 37절로 38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즐거워지고 상쾌해지는 것은 성령의 생수가 마음속에 솟아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수를 주시면 마음이 흡족해지는 것입니다. 교회 늘 나오고 싶은 마음이 왜 생깁니까? 교회 나오면 마음이 상쾌해지고 평안해지고 즐거워지는 이유가 생명수를 마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혼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
한참 은혜를 주실 때는 내 영혼이 살아서 홀쩍 홀쩍 뛰는 것입니다. 죽은 생선같이 눈이 썩어서 있지 않고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생선 같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5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전에 몰랐던 찬송을 부르게 되고 전에 못하던 기도를 하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찾고 보니 새로운 세계가 내게 다가오고 내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영적인 갈구가 없었는데 이제 주일날이 기다려지고 새벽기도가 기다려지고 수요일날이 기다려지고 철야기도가 즐겁고 말씀을 읽고 기도드리고 예배드리는 것이 굉장히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소생해 일어났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23편 3절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날 누가 말을 하지도 않는데 이제는 죄의 길이 싫습니다. 옛날 세상 친구가 싫고 옛날에 술, 담배, 세상 쾌락을 쫓아가던 생활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믿는 친구들이 좋고, 교회가 좋고, 하나님 따라가는 것이 좋고, 죄를 버리고 의롭게 사는 것이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억지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어서 우리가 죄를 버리고 의를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의가 좋아야 의롭게 되지 의가 싫으면 의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죄를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죄와 세상을 따라가지만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의를 좋아하고 거룩함을 좋아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주님을 따라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느니라”
우리가 주님께 나오면 하나님께서 죄를 버리고 값없이 선물로 의를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것이 축복의 계절인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는 기가 막힌 좋은 계절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이 계절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항상 예수만 믿으면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서 성령의 생수를 마시게 하시고 그리고 내 영혼이 살아서 벌떡벌떡 뛰게 하시고 나를 의의 길로 걸어가게 해 주시는구나!’하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2. 시련의 계절
봄은 지나가면 여름이 다가오는 것처럼 축복의 계절이 지나면 시련의 계절도 꼭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계절과 같습니다. 항상 봄이 있으면 좋지 않겠어요? 그러나 봄이 오면 봄이 가고 여름이 또 오는 것입니다. 축복의 계절이 있으면 그 축복의 계절 다음에는 시련의 계절이 옵니다. 대개 예수 처음 믿을 때 축복의 계절이 오지요. 처음 예수 믿을 때 얼마나 마음이 뜨거워지고 좋고, 기쁘고, 예수 믿는 것이 기쁘기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보고 “저 여자는 발뒤꿈치에 말발굽을 달았느냐? 아침 새벽부터 뛰어 다니면서 교회만 간다.”고 그렇게 비난하는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만 그럴 정도로 좋습니다. 그러나 그 계절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가는 계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던 것이 다 사라지고 사방이 어둑 캄캄해지고 눈앞에 캄캄하고 불안과 공포가 나를 휩싸는 어려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집안에 우환 질고가 생겨나고 잘되던 사업에 부도가 나고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고 육체에 어려운 병도 다가오고 아~ 그렇게 좋던데 왜 이렇게 되느냐? 하나님이 천리 만리 밖에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이 완전히 나를 버린 것 같습니다. 교회와도 나는 외톨이 같고 부르짖어도 응답을 안 해 주는 것 같고 나는 완전히 하나님이 잊어버린 것 같은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꼭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망의 음침한 계절은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아홉 자녀를 낳았으니까 내가 우리 누님 다음 둘째로 태어났는데 동생들 보면 어린애부터 끝까지 젖을 먹이고 난 다음 그 다음 젖 떼려고 할 때 옛날에는 젖에다가 금계랍을 칠했어요. 굉장히 쓰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 젖을 물었다가는 막 화를 내서 울고 어머니 젖을 때리고 그냥 어머니를 쥐어박고 웁니다. 그래도 애에게 거기 젖꽂지에다 금계랍을 발라서 쓰게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는 너무 써서 빨다가 못 빨고 빨다가 못 빨다가 낙심하고는 그 다음에는 젖을 빨지 않고 밥을 먹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젖을 빨지 밥을 안 먹으려고 하거든요. 우리 신앙생활도 축복의 계절을 체험한 사람은 전부 축복 속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 부르고 춤만 추기를 원하지 고난의 길을 걸어가서 믿음으로 서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축복의 계절이 지나가고 고난의 계절이 다가오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이 이제는 나를 버리고 그렇게 나를 사랑하던 사람이 사라지고 은혜도 다 가둬가 버리고 나는 완전히 버림받은 그런 심정을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43장 2절은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해주는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는 성인이 되면 반드시 밤에 산에 올라가서 나무에다가 밧줄로 묶어 놓고 난 다음 혼자 밤을 지내야 되는 것입니다. 성인식을 하고 난 다음에 20세가 되면 그 아들을 아버지가 끌고 산에 가서 나무에 묶어 놓습니다. 점점 어두워지고 캄캄해지는데 짐승의 우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있지 아니하여 사나운 짐승이 곁에 와서 빙글빙글 돕니다. 그런데 짐승이 곁에 가까이 오기만 하면은 휙 하고 어디서 화살이 날아와서 짐승을 쏘아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무서워서 부들부들 떠는데 짐승이 곁에만 오면 어디서 화살이 날아와요. 그래서 아침에 보니까 바로 앞 나무 위에 아버지가 올라 앉아 가지고서 아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만 오면 화살로 쏘아 버리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바로 앞 나무에 올라가 있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자기 혼자 나무에 묶여 있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보호하면서 곁에 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도 해를 받지 않도록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눈에는 안보이고 귀에는 안 들리고 손에는 만질 수가 없어도 하나님은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를 받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면서 고통을 당해도 그 고통이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오고 절망을 가져오고 파괴를 가져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어서 계실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오직 주님이 같이 계심을 믿음으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계시가 오지 않고 은혜도 느낄 수 없을지라도 주님은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눈으로 보는 것으로 믿지 말고 귀로 듣는 것으로 믿지 말고 손으로 만지고 느끼는 것으로 믿지 말고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일지라도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주님이 같이 계신 것을 믿음으로 살아라. 그 믿음을 훈련하는 시절이 바로 고난의 시절인 것입니다. 캄캄한 밤을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하나님은 주위에 숨어 계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가지고서 값주고 산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쉽게 내버리지 않습니다. 저는 50년의 목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지을 때 그때 오일쇼크가 와서 성도들이 생활이 어려워지고 직장을 잃고 헌금이 나오지 않고 건축업자들은 저를 고소하고 철근은 오랫동안 비를 맞게 해서 녹이 슬어 녹물이 떨어지고 얼마 있지 아니하면 전부다 거둬내야 된다고 하니 절망에 젖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대답도 없습니다. 꿈에도 나타나지 않고 환상도 주지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기도도 안 나오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래서 교회 가운데 저기 엎드려 가지고 “하나님, 이 철골이 내 위에 떨어져서 합법적으로 죽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자살하면 지옥가지만 합법적으로 죽으면 천당은 갈 터이니까 “주님 내가 죽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고통치며 몸부림 친 것이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영원히 버린 줄 알았습니다. 영원히 나는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만 지금 지나보니 옛날이 아주 우습고 재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저의 믿음을 자라게 만든 것입니다. 눈에는 안보이고 귀에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를 믿어라. 돌아보니 하나님이 그 환난 가운데서 다 건져 내시고 이렇게 훌륭한 교회를 짓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로 6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바로 이런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게 하는 것입니다. 눈에 안보이고 귀에 안 들리고 만질 것 없고 느낄 수 없어도 하나님은 안 버린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하나님은 나를 안 버린다. 마귀가 아무리 나를 첩첩이 둘러싸도 하나님은 나와 같이 계신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보호하여 주시고 해를 받지 않게 해주신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팡이는 우리를 인도하는 지팡이입니다. 캄캄하고 아무것도 안보이고 내가 눈을 감고 걸어가도 내가 걸어가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르게 지팡이로 인도하고 막대기는 짐승이 오면 내리치는 무기인 것입니다. 원수가 와서 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면 주님의 권능의 막대기가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이 날 버린 것 같고 나는 버림 받은 것 같아도 하나님은 같이 계셔서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고 막대기로 원수를 쳐서 나를 멸하지 못하게 하고 그를 통해서 우리가 믿음을 연단 받고 튼튼한 믿음으로 서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젖만 먹지 말고 밥을 먹고 남의 도움만 받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서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믿음의 용사가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잠언서 3장 5절로 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난이 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다가온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겨 놓고 너희와 같이 있으므로 너희는 마음에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내 안에서 평안을 가지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꼭 환난의 시절이 필요한 것은 이 환난의 시절을 통해서 우리가 굳센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성도들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환난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자는 사람은 조그만 어려움이 당해도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조그마한 짐도 짊어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억센 시험과 환난을 당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은 무거운 짐도 짊어지고 나가고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넉넉히 이기고 나가며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란 성도가 되어야 되고 힘이 있는 성도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운동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운동을 하는 것은 근육을 살려 놓기 위한 것입니다. 근육이 튼튼해야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동을 안 하면 근육이 말랑말랑 해져서 힘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의 근육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의 계절을 주어서 시련을 통하여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고 몸부림도 치고 울고 가슴을 치고 몸부림치는 그런 삶을 통해서 신앙의 근육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우리 신앙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이 어려운 세계를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능력 있는 신앙이 있어서 기도를 통해서 흑암을 물리치고 사탄을 이기고 고난과 괴로움을 승리로 이끄는 그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날 큰 시련을 당한 성도가 호프먼 목사를 찾아와서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그와 같이 울부짖었습니다. 호프먼 목사가 기도해 주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으니 이 어려운 짐을 혼자 지지 말고 예수님께 맡기고 의지하면 주님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위로를 하고 난 다음 기도를 해주니까 이 성도가 말하기를 “그래요. 이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성도가 나간 후 갑자기 목사님에게 찬송시가 떠올라서 그 시를 지은 것이 찬송가 363장입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우리 다함께 한번 1절만 불러 보십시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시련은 반드시 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신앙 스케쥴에 하나님이 그것을 넣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계절만 오는 것이 아니라 시련의 계절이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아무리 시련이 어둡고 캄캄해도 주님께서 숨어서 나와 같이 계시며 내가 해를 받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나와 같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당해서 이제는 벼랑에서 떨어진다. 떨어진다. 이제는 떨어지면 죽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주님이 와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홀로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근심과 고통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께 의지하고 나가면 주님이 반드시 우리를 붙들어 준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3. 원수와 싸우는 계절
셋째는 이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시련의 계절이 지나고 나면 ‘아휴~ 이제 한숨 돌리고 살겠다’싶은데 상당히 믿음이 강해졌지 않습니까? 그러면 원수와 싸우는 계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제는 갑자기 내 주위에 원수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내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는데 대적하는 원수의 공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경쟁자의 시기와 질투와 비난, 사방으로 우겨 싸이고 답답한 일이 생기고 핍박을 당하고, 넘어뜨리고 온갖 괴로움이 다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네가 믿음이 있으니까 이제 원수하고 한번 씨름을 해봐라. 실습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계절에 반드시 원수와 싸우는 계절이 옵니다. 안 그렇더니 갑자기 남편이 사나워지고 혹은 아내가 바가지를 긁기 시작하고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고 형제간에 원수가 되고 그렇게 친한 친구가 배반을 하고 사업적인 동업자가 원수가 되고 사면초가성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나하고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나를 그렇게 버릴 수가 있느냐. 마음이 답답하고 의지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얼토 당토 않은 말로써 비난하고 공격하고 고발을 하고 고소를 당하고 얻어맞고 발길로 차이고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나를 이렇게 버리십니까? 그렇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원수와 싸우는 계절인데 왜 원수와 싸우게 하느냐. 하나님은 원수가 오면 축복의 밥상도 차려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원수와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축복해 주시고 승리로써 축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에게도 큰 축복을 받기 전에 반드시 원수의 진을 꿰뚫어야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진을 꿰뚫지 않고는 축복의 밥상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오늘날 있기 전까지는 얼마나 많은 원수와 싸웠는지 모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믿지 않는 세계와도 싸우고 같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타 교단이 우리를 이단이라고 해서 우리를 몰아치고 싸우고 우리 본 교단에서 우리를 쫓아내고 고통을 당하고 우리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서로 분열해서 싸우고 온갖 투쟁과 고통을 다 당한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오면 밥상도 차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반드시 우리를 시험에서 다가오는 그 계절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갑자기 예수 믿고 평안하고 좋더니 왜 가정이 분란이 다가오느냐? 우리 남편이 안 그런 남편이 왜 지금 싸우고 달려들며 아내가 저렇게 온순하고 좋던 아내가 왜 투쟁을 부리고 대적을 하며 자식들이 왜 저렇게 나를 거역하는고? 내 친구들이 왜 나를 이제는 멀리하고 비난하는고. 내 동업자가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가. 왜 만사가 나를 우겨 싸고 답답한 일이 생기고 핍박을 하고 내가 넘어지고 자빠지는 것이 이 일이 왠일인가. 그럴 때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너희 친구와 너를 돕는 자는 주님밖에 없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는 나를 안 버려. 세상이 너를 버릴 때 일수록 너는 네 주님 품에 가까이 오라. 그것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친척과 자기 이웃과 친구들을 의지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세상에 모든 것을 의지할 수 없고 하나님밖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 물론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고 일가도 있고 친척도 있고 친구도 있지요. 옛날에는 그들을 전적으로 믿었다가 마음에 손상을 입고 고통을 당했지만 이 체험을 하고 나면은 그때 마음에 손상과 고통을 안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계신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므로 나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만 의지하고 산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다 너를 버려도 주님은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만 꽉 의지하고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마음에 인내를 가지고 나가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원수와 싸우는 계절이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로 37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환난이 다가와 보고 고난이 다가와 보고 기근이 다가와 보고 적신이 다가와 보고 칼이 다가와 보고 원수가 다가와 봐야 주님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진실한 하나님이고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체험해 봐야 영생을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고난을 체험해 봐야 평안을 주는 주님을 체험하는 것처럼 배가 고파 봐야 먹을 것을 주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처럼 원수가 와야 나의 영원한 친구는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주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 중심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것을 사랑하고 또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만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원수의 진에 던져 놓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우리를 마음대로 취급하고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짓밟아도 우리 주님은 우리와 같이 계셔서 그를 통해서 이기고 승리하고 오히려 원수들 보는 앞에서 밥상 차려주고 용용 죽겠지.. 용용 죽겠지.. 이렇게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밥상 차려진다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따라 말씀하세요. 원수가 오면 밥상도 온다. 반드시 주님이 좋은 일이 일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좋은 일이 그 뒤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심하여 뒤로 넘어지면 안 되고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한길로 오면 하나님은 일곱 길로 물리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공과 축복을 주님이 원수 앞에서 내리시므로 원수 앞에 길을 당당히 세워주는 것입니다. 원수가 짓밟는데 하나님도 우리를 짓밟으면 우리가 갈 데가 없지 않습니까? 원수가 짓밟으면 하나님이 내가 너하고 같이 있노라 하고 밥상을 차려 주면 원수가 보고 속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저것 죽어야 되는데 왜 저렇게 잘 사느냐? 북한이 6.25를 일으켜서 우리를 쳐서 우리를 멸하고 점령하려고 했는데 6.25가 나고 난 다음 60년째가 이제 명년이 되는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밥상을 차려 주셔서 세계 경제대국이 되게 만들어 주시고 북한은 우리를 보고 동동 발걸음을 치지 않습니까? 왜냐, 주님께서는 원수 앞에 밥상을 차려 주어서 내가 이 백성을 사랑하고 이 백성과 같이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원수 때문에 속상하지 마십시오. 원수가 오면 여러분에게 좋은 일도 생겨나고 원수가 여러분을 도적질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더 채워 주시고 원수가 여러분을 쥐어박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품에 더 안아 주시고 더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2절로 13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야훼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야훼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이런 일이 그냥 오는 것은 아닙니다. 원수 앞에서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원수가 보아야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원수도 없는데 나 혼자 있는데 그렇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복 받으려면 원수의 앞에서 고통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여러분을 치거든 하나님이 복 주려고 준비하시는 줄 알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신앙이 한 단계 높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원수가 오면 밥상도 차려주고 그 다음에는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서 여러분의 인생의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잔이 넘친다는 것 영혼이 잘되고 범사도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잔이 넘치는 삶은 반드시 축복의 계절도 지나가고 시련의 계절도 지나가고 원수의 공격을 받은 계절도 지나가면 그 원수의 계절이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밥상을 차려 주시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셔서 여러분의 생활에 생명이 넘치고 축복이 넘치고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시편 28편 8절로 9절에 “야훼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과 감사가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이 결국에는 부족함이 없게 만든다. 인생의 가을철인 것입니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면 그 다음에는 가을은 추수기 아닙니까? 열매가 풍성하고 먹을 것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도 축복의 계절이 지나가고 시련의 계절이 오고 시련의 계절이 지나가고 싸움이 계절이 오고 싸움의 계절이 지나가면 이제는 가을의 계절이 오는 것입니다. 삶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계절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종국에 가서는 전부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행복과 만족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로 10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제는 도적은 완전히 지나가고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4. 뒤돌아보고 감격하고 천국으로 감
그리고 넷째로, 마지막에 시편 23편 6절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뒤돌아보고 감격하고 천국으로 가는 계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나이가 먹어서 이제 인생길에 다 은퇴를 하고 앉아서 뒤를 돌아봅니다. 초년시절부터 중년, 장년, 노년이 될 때까지 시대를 지나오면서 그때는 괴로웠는데 이제 돌아보니까 모든 것이 합동하여 유익이 되었구나. 축복의 계절, 시험과 환난의 계절, 원수의 공격을 받던 계절, 열매를 맺던 계절 모든 것이 다 합쳐서 내게 유익이 되었구나. 큰 축복이 되었구나.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17살에 형들에게 팔려서 종이 되어 끌려갈 때는 얼마나 큰 절망이었습니까?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의 극치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더 어려운 고통이 들어갔어요.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어서 1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는데 그 때 종살이는 짐승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부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겨우 종살이에서 쉬게 되고 가정총무가 되었을 때 보디발 아내의 참소를 받아서 그만 시위대뜰 감방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에 감방은 완전히 생지옥입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3년을 감옥살이 합니다. 그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얼마나 큰 저주입니까? 그러나 결과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국무총리가 되어서 온 가족을 이스라엘에 있는 가족을 다 불러서 애굽 고센땅에 살게 하고 온 애굽 국민들을 다 먹고 살게 만들어 주고 벼슬이 높아지고 모든 사람이 그를 경배할 때 요셉은 뒤를 돌아보니까 형들이 종으로 판 것이 그때는 고난인데 나중에는 축복이었습니다. 안 팔았으면 애굽에 올 턱이 없습니다. 10년 동안 종살이 한 것이 큰 축복이었습니다. 종살이 안했으면 보디발의 집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거짓말로 강간하려고 했다고 해서 고소해서 감옥에 들어온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큰 절망이었지만 돌이켜 보니 그것이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남은 여생을 큰 영광중에 살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노년이 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 뒤를 돌아 보십시오. 젊었을 때 당한 그 심한 고통과 괴로움이 지나고 보니 전부 축복으로 변한 것입니다. 전부 기적적으로 은혜가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탄식했으나 이제 돌아보니 그것이 다 축복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평생에 주님은 선하시게 인도하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슬픔의 날들도 지나고 보면 늘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이 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 5절에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나중에 장차 지나고 보면 정말로, 정말로 큰 축복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천만번 죽어야 할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구원해 주신 주님을 되돌아 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 은혜 고마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옆길로 나가고 죄많이 짓고 반역하고 마귀를 따라가고 하나님을 괴롭힌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나이 늙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격과 감사가 되돌아 볼 때 마음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2절로 13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한 것처럼 이렇게 자상스럽고 긍휼히 여겨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가 보니 우리 행위로써 구원 받은 것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게 되면 이제는 살아온 날은 다 과거가 되고 앞으로 죽을 날이 가까우므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70이 넘으면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요사이는 오래 살아서 80을 살고 90을 산다 해도 70이 되면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날을 생각하면서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죽기를 원해서 기도하게도 되고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아름다운 천국을 생각하고 사모하고 기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절망과 슬픔이 앞에 다가오기 때문에 죽음의 날을 생각하면 몸서리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괴롭습니다. 어떻게 죽을까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하여 죽고 장사지냈다가 부활하시므로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예수님 안에 영생과 복락과 천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안보이고 귀에는 안 들리고 잡히는 것 없어도 이미 우리 속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우리의 상황의 변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의 옷을 벗어 버리고 신령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그 변화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6절로 17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결론>
한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면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의 한없는 선하심과 인자하신 손길을 마음에 깨닫고 우리는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축복의 계절이 오거든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즐기십시오. 그 축복의 계절이 영원히 계속하지는 않습니다. 축복의 계절이 오면 젖 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어머니 품에 앉아서 젖을 물고 어머니의 응석을 받던 계절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반드시 밥을 먹을 계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의 계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과 환난이 다가와서 몸부림치며 고통 하는 시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의 계절이 늘 계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나가고 난 다음 이제 좀 살만하면 원수가 다가오는 계절이 오는 것입니다. 원수가 와서 여러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 계절이 있을 동안에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밥상 차려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시고 여러분에게 잔이 넘치는 삶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절도 영원히 계속하지 않습니다. 그 계절도 지나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계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과거를 살펴보고 회개할 것 회개하고 감사할 것 감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앞에 내가 거할 영원한 집으로 갈 준비를 할 계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계절을 지나서 우리 인생이, 일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라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원수가 와서 여러분을 대적할지라도 주님은 밥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잔이 넘치게 해주시고 그 다음에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여러분 평생을 따랐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의 집에 갈 준비를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절이 항상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이상한 일 당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계신 것이구나 이를 통해서 나를 완성시켜서 영원한 영광의 집에 거하게 만들어 주시는구나. 이것을 알고 믿음으로 감사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체험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의 축복의 계절, 시련의 계절, 원수에게 공격을 당하는 계절, 하나님의 열매를 만끽하는 계절, 죽음의 계절이 반드시 다가오는 것을 알고 아버지 하나님 낙심하지 말고 어떤 계절이 다가와도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의 영혼을 완성시킨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주와 함께 인생의 모든 계절을 다 지나고 난 다음에 이런 변화와 계절이 없는 천국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우리 성도들이 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시 23:4 / 조용기목사
<서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들은 매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땅 자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예수님 없이는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고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니 어두컴컴한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을 등진 사람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고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본론>
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우리 모두는 세상에 살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체험을 반드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희망이 없는 좌절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므로 그 체험을 통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가를 깨닫게 해주시고 소망의 근원되신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만들어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빛을 보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별들이 태양을 보고 밤에 얼마나 하늘에 은구슬 같은 별들이 반짝거리는지 아느냐? 태양이 별들을 보고 밤이 뭐냐? 밤을 몰라? 우리는 밤에 별들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고 있는데 우리 따라와! 해가 밤을 보기 위해서 별들을 따라 나서니까 가는 곳마다 환한 낮만 있지 밤이 없습니다. 별들을 보고 해가 말했습니다. “밤이 어디 있냐?” 그러니까 별들이 “이상하다. 너만 안 따라오면 밤이 있는데 너만 따라오면 밤이 없잖아.” 그와 같이 햇빛을 알려면 밤이 있어야 빛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고 예수님이 우리 구주 되심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의 밤을 지나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밤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거짓된 빛을 만들어서 그 빛 아래서 기뻐하지만 인조광택은 얼마 안 있으면 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는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다 편안할 때는 새벽기도도 안 해도 괜찮다. 수요일날은 빼먹어도 괜찮다. 주일날도 어지간하면 안 가도 괜찮다. 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고난이 있으면 새벽에 교회 나가지 말라고 해도 나갑니다. 괴로우니까. 산기도를 가고 기도원도 가고 주님께 부르짖는 것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없으면 참소망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 빛과 소망되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고 배고픈 사람이 밥을 찾듯이 환난과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우리가 빛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왜, 빛은 하나님 밖에 없느냐. 빛이라는 말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은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소망은 하나님밖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절망이 꽉 들어찬 곳에 절망을 완전히 정복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져서 갚아버렸으니 죄가 가져오는 절망을 패하고 말았지요. 허물진 인생에 허물을 다 패하여 주셔서 더러운 인격을 정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병들어서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우리 예수님께서 질병을 대신 짊어지시고 매를 맞아 온 전신이 다 찢어져서 청산해 주셨으니 병이 절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주도 주님께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서 고통을 당하시고 저주를 청산했으므로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밖에는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습니다. 죽음과 음부도 예수님이 죽어서 음부에 내려가서 멸하고 부활하셨으므로 사망과 음부도 이제는 절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절망을 정복해 버리시고 우리에게 어디를 가든지 예수 이름 안에서 소망을 얻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찾으면 소망이 어디든지 있어요. 죄인은 의인이 될 소망이 있고 허물진 사람은 거룩하게 될 소망이 있고 병든 사람은 고침 받을 소망이 있고 좌절과 절망에 처하고 가난한 사람은 소망과 축복을 받을 꿈이 있고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영원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어두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밝은 빛을 얻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로 5절, 9절로 12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 빛이 누구냐, 예수님인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면 어느 곳에나 빛이 있어서 어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죄악의 어둠이 사라지고 허물의 어둠이 사라지고 질병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저주의 어둠이 사라지고 죽음의 어둠이 사라져서 어둠을 찾아가도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가면 어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어두움을 박멸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오늘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시면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빛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희망이 있습니다. 빛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보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어둠을 제하는 것이 빛이므로 예수님은 어두움을 제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가슴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속에 어두움을 제하고 희망의 빛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어둠이 없습니다. 주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오른편에는 기쁨이 넘치는 것처럼 예수님 안에는 어둠이 사라지고 어느 곳에 가나 빛이 충만한 것입니다. 빛은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없는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하나님이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가면 하나님은 소망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고난을 인생에게 허락하시느냐.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허락하시는데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강하게 믿을 수 있도록 성장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팔에 힘이 없는 사람은 아령을 한 팔로 자꾸 들어 보십시오. 이게 근육이 생깁니다. 높은 산고개를 걸어다니면 다리에 근육이 생깁니다. 편안하게 내버려두면 좋지 싶어도 편안하면 근육이 사라져 버리고 몸에 저항력을 잃어서 병이 쉽게 들고 쉽게 죽습니다. 그러므로 운동을 하라는 것은 근육이 생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사선생님이 저를 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 나이가 이제 80대에 이르렀으니까 어찌하든지 근육을 키우십시오. 편안하면 좋은데 왜 근육을 키워야 됩니까? 편안하기 원해서 앉아있으면 근육이 사라집니다. 근육이 사라지면 저항력이 없어져서 쉽게 병들고 쉽게 죽습니다. 오래 살려면 근육을 키우십시오. 우리 병원에서 의사들이 아무리 좋은 약을 주고 수술을 한다고 해도 근육을 키우는 운동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걸으십시오. 아침에도 걷고 저녁에도 걷고 늘 걸으십시오. 그러면 근육이 생깁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여러분, 우리 육체의 근육을 만들려면 걸어야 되고 운동을 해야 되는 것처럼 영혼의 근육을 만들려면 시험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야 돼요.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왜 예수 잘 믿으려고 하는데 고난을 당하게 하느냐고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신앙의 근육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면 믿음이 강해져요. 기도가 강해지고 믿음이 강해지고 능력있게 세상을 이겨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아담스는 “그대에게 시련을 주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의 유익으로 계산하라.”
시험이 오거든 아~ 이것 내 유익이다. 플러스로 계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나아가면 고난이 변하여 복이 되는 것입니다.
2.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 우리가 늘 알아야 될 것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는 마귀가 두려움을 냇물같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우리 주위에 냇물같이 흐르고 강물같이 흐르는데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365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싸우면 더 두려워지고 두려움이 더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나를 점령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두려움을 정복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날 위해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당신이 생명처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황공하기 짝이 없지요? 하나님이 나를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하신다. 무슨 하나님이 나 같은 못난 놈을 생명같이 사랑하시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지요. 독생자는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생명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 생명처럼 귀중한 아들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우리가 두려움에 쌓여있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생명처럼 사랑하셔서 품에 품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사망이 아무리 다가와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안고 십자가에서 죽어서 멸해버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이겨서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여러분을 생명처럼 귀하게 생각하시고 품고 계시고 이 예수님이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시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이길 수 있지요.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서 시련이 다가오거든 다른 것 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쳐다보고 눈을 감고 마음속에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이 여러분을 둘러 진치고 있고 품어 주심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여러분이 사랑한다고 입으로 말씀하십시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나를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나와 같이 계신다. 그렇게 자꾸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능력 속에 들어가 있음으로 사망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27편 1절에 보면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예수님이 나의 빛이라는 것은 나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 소망이 되고 내 구원이 되어 있으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항상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시므로 나를 당신의 생명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처럼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굉장히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과 땅에 능치 못하심이 없으니 그 주님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고 여러분은 그 주님을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누가 여러분을 건드린다 말입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여러분은 더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날보고 귀중하게 안 여길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신도 나는 벌레 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주님은 아니야, 아니야~ 너는 내 생명같이 귀하다 너를 위해서 내가 몸 찢고 피 흘려 죽었지 않느냐. 내 생명같이 귀하고 그 때문에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가지고 너를 끌어안고 같이 있으니 그것을 좀 알아라. 깨달아라. 바라보라. 그것을 믿어라. 그것을 말하라. 그러므로 예수님이라고 말하면 여러분 마음속에 다른 것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 누가 무어라고 말해도 사랑받고 있고 모든 권세와 능력을 다 가진 그분이 있으니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마음속에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주고 두려움을 내어 쫓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안 믿어지는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생명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믿을 수가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못 믿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왜 못 믿어요?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이 믿음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사랑 안에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아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 두려움이 있으면 형벌이 있다는 것은 고통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형벌은 때리는 것 아닙니까? 채찍으로 때리고 고통당하는 것이 형벌인데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마귀가 마음속에 두려움을 넣어주고 난 다음에 그 두려움에 따른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평범하게 보이나 가장 위험한 병균은 두려움인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들어오면 그것을 보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귀가 여러분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서 주님 앞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죄악을 버리고 언제나 십자가 밑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아오지만 마귀를 좋아하는 자는 어둠을 찾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이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예수님을 찾으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여러분에게 의로움을 주시고 거룩함을 주시고 심신에 건강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영원한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빛을 따르면 어둠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태양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어둠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해를 따라다니는 사람 여러분 밤이 없습니다. 해를 등지는 사람에게 어둠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인 예수님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어둠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어두움은 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원수 마귀의 손에 잡혀서 시련을 당하고 어두움에 몸부림쳤었는데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이 세상에서 행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속에 살아야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은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모셨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믿음이 꽉 들어차고 빛이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주부들은 가족이 병들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건강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학생들은 성적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원하는 대학에 못 가면 어떡하나 두려워하고 직장인은 해고당하면 어쩌나, 직장을 잃어버리거나 은퇴 후엔 어떻게 해야 되나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암으로 치료받는 사람은 암이 재발할까 싶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밤을 두려워했습니다. 프랑스의 앙리 3세는 눈앞에 고양이가 어른거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고양이를 두려워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장미꽃을 절대로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장미꽃을 두려워했습니다. 꽃 두려워하는 여자가 다 있어요.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을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누가 안 두려워하느냐. 두려움이 곁에 못 오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으로 충만하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태양 앞에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 앞에 두려움은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3.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해를 가져오는데 두려움이 사라지니까 해를 받지 않지요. 마음에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 마귀가 두려움을 통해서 해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두려움이 어떻게 우리를 파멸시킨다는 극적인 장면을 기록한 구약이 있습니다. 욥기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한 사람인데 한 가지 잘못된 것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마귀가 갖다 주는 두려움에 귀를 기울여서 두려움이 꽉 들어찼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그는 재산 다 잃어버렸습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재산 다 잃었는데 양 7천 마리가 벼락을 맞아서 다 죽어버렸습니다. 약대 3천 마리를 강도들에게 뺏겨 버렸습니다. 소 5백겨리를 다 도적맞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7명이고 딸이 3명인데 맏아들 집에서 잔치 베풀다가 집이 무너져서 다 압사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갑자기 몸에 동양성 문둥병이 생겨서 옷을 입지 못하고 몸에서 진물이 흐르고 잿더미 위에서 몸을 긁었습니다. 부인이 그 장면을 보고 그래도 하나님을 믿느냐 이 정신 빠진 영감아, 죽어라 죽어! 하고서 떠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세 사람이 멀리에서 와서 위로하러 왔다가 비난만 하고 공격만 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보다 더 비참한 상황을 겪은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왜 자기가 그렇게 되었느냐.
욥기 3장 25절에 한번 따라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여러분 마귀는 언제든지 와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마귀가 우리를 파멸하기 위해서는 꼭 두려움을 먼저 넣어주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암에 걸리겠지. 암에 걸리겠지. 그러면 벌써 반은 걸려있습니다. 마귀가 그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한다. 실패한다. 두려워하면 벌써 실패한 것입니다. 내 나이 일찍이 죽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60대 죽었고, 우리 할머니가 50대에 죽었고 우리 아버지가 40대 죽었는데 나는 일찍이 죽을 것이다. 꼭 그대로 일찍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여러분에게 문을 열고 들어오면 여러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에 뭐라고 말합니까?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지킵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마음에 모시고 있으면 보혈은 죄도 쫓아버리지요. 병도 쫓아버리고, 저주도 쫓아버리고, 사망도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예수의 보혈에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지켜야 돼요. 두려움에서 십자가 보혈로 대결을 하고 있으면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꿈을 놓으면 안 됩니다. 꿈이 없으면 망합니다. 꿈이 바로 두려움이 들어와서 꿈을 빼앗아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의 생활에 꿈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나아지는 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마음에 믿음의 빗장을 꽉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믿음의 빗장이냐.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고 이 하나님이 나를 자기의 목숨처럼 사랑하고 계신다. 그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의 빗장을 열고 못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입술로 시인하는 시인을 통해서 두려움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축복받았다. 나는 하나님이 같이 하신다. 나는 승리한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오려고 할 때 두려움이 생각을 통해서 들어오고 꿈을 통해서 들어오고 믿음을 통해서 들어오고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4차원의 영성인 이 네 가지 요소를 여러분 마음속에 꽉 붙잡지 아니하면 언제나 두려움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밝고 맑고 환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마음을 딱 묶어 놓아요. 그리고 꿈이 없으면 망하니까 꿈을 자꾸 제합니다. 마귀는 자꾸 와서 꿈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낙심을 하게 하고 꿈을 잃게 만들어서 개인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사업도 망하고 생활에 고난이 다가오도록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믿음이 없다. 너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꼭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는 우리 믿음으로 살지 우리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목숨처럼 사랑해 주신다. 야~ 잘못 오해하면 큰일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신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다 못 믿어도 하나님은 믿을 수 있어요.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안 버린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로써 언제나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못한다. 안 된다. 죽는다는 소리 절대하지 마십시오. 그때가 오면 죽을지라도 죽기 전까지라도 희망이 있다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으면 두려움이 들어오지 못하고 두려움이 들어오지 못하면 해를 받지 않습니다. 욥은 그동안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동방에서 욥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마귀를 바라보게 되고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서 그 마음속에 두려움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생각에 두려움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가족에게 큰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고 자꾸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다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병들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가정이 파탄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사람들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나는 재앙 당할 것 같아. 불행이 올 것 같아.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막 일시에 다 잃어버립니다. 양이 7천 마리니까 얼마나 부자 아닙니까? 7천 마리가 벼락이 떨어져서 다 타죽었습니다. 약대 3천 마리를 다 뺏기고 소 5백 겨리를 다 도둑맞고 아들, 딸들이 큰 아들 집에서 잔치하다가 집이 무너져서 다 죽고 온몸이 병들고 부인조차 욕하고 떠나가 버리고 요사이 사람 같으면 자살했을 거예요. 그런데 자살은 안했습니다. 그가 노래처럼 한 것이 내가 두려워하던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탄식을 했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이러한 탄식을 하는 분이 없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죽음으로써 내 생명을 건져주신 예수님을 예배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면 성령이 와서 여러분과 같이 있고 성령은 마음에 평안과 믿음을 주시고 평안과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서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파괴를 가져오지만 평안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기도할 때 기도를 간절히 하다가 마음이 편안해지잖아요. 그것은 하나님이 이제 책임진다는 증거를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게 와서 묻습니다. 기도할 때 얼마나 오래 해야 하나님이 응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마음이 평안해지면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이 불안해지면 보통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보통기도해서 마음이 불안해지면 아~ 보통기도는 안되는구나. 철야기도를 해야 되겠구나. 철야기도를 해도 편안하지 안거든 새벽기도를 해야 되고 새벽기도를 해도 불안하거든 오산리에 들어가십시오. 굴속에 들어가서 기도하면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이 계시므로 두려움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성경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두려움에서 건지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많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통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보장해 주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3절도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하나님이 이처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두려움은 마귀의 사자이고 우리를 파멸케하는 선구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도 먼저 두려움을 막는 평안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속에 두려움을 보통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은 아주 나쁜 마귀의 사자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의 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고난의 밤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때일수록 원망이나 불평이나 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이나 불평이나 탄식하면 두려움에 보태어서 더 큰 불행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온몸에 피가 철철 흐르고 배고프고 고통스러웠는데 그들이 그 두려움을 이기고 불행을 이기는 하나님의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통당할 때 기도하고 난 다음 찬송한 것입니다. 그들이 감방 안에서 기도하고 두 사람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쇠고랑을 철컥철컥 맞춰가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찬송을 들으시고 깊이 마음에 감동을 해서 하나님이 발로 보좌에서 찬송의 박자를 맞춘 것 같습니다. 온 감옥에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쇠고랑이 다 벗어졌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난의 밤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거든 기도하고 오히려 고난을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고난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섭리할 때가 많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고난과 그 동등 이상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기한 기적을 베푸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면 고난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다가올 때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면 모든 묶인 것이 풀어지고 모든 믿음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감사하는 것 참 힘듭니다. 그러나 고난당할 때 하나님, 고난당함을 감사합니다. 제가 이것을 이길 줄 하나님이 아시고 고난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때쯤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감당할만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더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믿어주시고 감당할 수 있도록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찬양을 부르고 할렐루야를 부르면 하나님께서 박자를 맞춰주시고 영적인 지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묶인 것이 풀리고 자유와 해방이 다가오고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종교를 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에게 묶여있는 우리에게 해방을 주고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마귀의 나라 지배권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묶임에서 해방을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마귀의 나라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아들 사랑의 나라로 옮겨서 시민권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사람은 마음속에 하늘나라 시민권, 하늘나라의 페스포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마귀의 나라에 있을 때 우리에게 억압된 것을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귀의 억압에서 자유를 얻는데 심신의 억압, 질병의 억압, 고통의 억압, 불안의 억압, 공포의 억압, 좌절의 억압, 절망의 억압, 미움의 억압, 원한의 억압 온갖 병의 억압에서 자유를 얻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러분은 자유인이지 종의 멍에를 맨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위해서 십자가를 달게 받으시고 여러분의 종의 멍에를 벗겨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시는 그 고통당하지 마라.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마라. 세상의 허물에 끌려 다니지 마라. 다시는 병의 노예 되지 마라. 심신에 병들어서 고통당하지마라. 다시는 저주받지 말라. 헐벗고 굶주리지 마라. 다시는 지옥에 내려가지 마라.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천당은 주님이 이미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에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천당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도 함께 있게 하리라. 주님은 2천년 동안 여러분의 처소를 예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걱정할 것 없어요.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이 땅에 두신 것은 이 땅에서 천당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가정과 생활에 천국이 이루어지기 원하셔서 주님은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이 땅에서 교회 왔다갔다하고 예수 믿는다고 말만하고 이 세상 다 버리고 천당 가기만 기다리자. 될 수 있으면 일도 하지 말고 힘쓰지도 말고 이럭저럭 있다가 죽어서 천당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걱정할 것 없어요. 다 해놓았어요. 천당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보증해 줄테니까. 나는 주의 종이니까 주님께 나가면 여러분에게 내가 보증 서 드리지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천당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여러분이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병도 이기고 저주도 이기고 가난도 이기고 절망도 이기고 여러분께서 주님 앞에서 천국을 소유하고 그것으로써 온 만인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여러분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천국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요. 우리 집이 생지옥입니다. 그러면 절단이잖아요. 예, 마음 천국, 가정 천국, 생활 천국, 천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니까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함께 공포 속에서 걸어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니까 그곳으로 들어와서 빛을 비춰서 어둠을 없애버리고 천국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천국을 이루어서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무엇을 했던 천국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우리에게 선언했었습니다. 오늘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지 들어보세요.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6~21)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이 일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복된 소식을 주고 그다음에는 포로 된 자에게는 자유를 주고 눈 먼 자는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에게는 해방시켜 주고 주님의 해를 전파하는 것이니까 주님은 가시는 곳마다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들어와서 여러분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시고 해방시켜 주시고 가족을 가정을 해방, 여러분의 생활을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써 자유와 해방이 있습니다. 북한에 자유와 해방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북한에 역사하시면 제일 먼저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예수님이 계시면 자유와 해방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 아닙니까?
<결론>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빛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소망을 주며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산천초목은 다 빛을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이 초목들은 그 잎의 엽록소를 통해 탄소동화작용을 일으켜서 그것으로 영양분을 만듭니다. 영양분을 만들어서 저장해 놓은 그것을 모아 놓으면 열매도 되고 과일의 살도 되는데 이것을 짐승이 먹고 사람이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사는 것은 햇빛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햇빛이 엽록소와 탄소동화작용을 해서 영양분을 만들지 아니하면 먹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짐승이 풀어 뜯어 먹고 엽록소 속에서 햇빛이 만들어 놓은 양식을 먹고 사람들도 그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것이니까 직접 간접으로 햇빛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을 먹고 살고 영적으로도 예수님이 빛이시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먹지 않고는 살지를 못해요. 오늘날 우리가 자연을 훼손시켜서 자연이 사막화 되면 양식이 없어져서 다 굶어죽지 않습니까? 우리 양식은 햇빛이 만들어 내놓은 양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햇빛을 먹고 살고 영적으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인데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빛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하늘에 있는 저 햇빛을 보고 감사하고 우리 마음속에 와 계신 영혼의 해인 예수님을 인하여 감사하고 햇빛을 많이 이용하십시오. 세상의 햇빛을 받아서 육체가 살고 영적인 햇빛을 받아서 우리 영혼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영적 전쟁
시 23:4-6 / 조용기목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4~6)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영적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이 있는 곳에 죄가 있고 죄가 있는 곳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파헤쳐 있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사망의 골짜기인 세상에 태어났고 그 골짜기를 통하며 고생하다가 궁극적인 사망의 골짜기인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 셰익스피어는“안락은 하늘에 있고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는 오직 불안과 고뇌와 탄식이 있을 따름이라”고 말했었습니다. 미국의 사상가요 문학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인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요한 절망 속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영국의 성직자인 토마스 풀러도 “사람은 비명과 함께 울면서 태어나고 고통과 함께 살다 결국에는 절망하여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땅에서 영적 죽음과 환경적인 저주와 육체의 죽음이라는 3대 재앙을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골짜기에서 고생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께 절대 믿음, 절대 순종으로 의롭게 사시고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시고 사망과 마귀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구주가 되셔서 우리에게 희망의 근원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다윗이 노래한 시편 23편 중에 왜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가를 우리는 알아보아야 될 것입니다.
<본론>
1.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해를 당하지 않는 길
이 세상에 허다하게 좋은 일도 있는데 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야 되는가.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고 교만을 깨뜨리려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오만하고 교만하고 탐욕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한 이후로 이 세상이 사망의 골짜기가 된 것은 사망의 골짜기가 다가와야 사람은 깨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쓸모가 없고 사람에게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망의 골짜기를 통해야 깨어지는 것은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만사가 형통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교회 갈 것을 생각 안 합니다. 성경은 아예 들춰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본주의적으로 살고 세상 쾌락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통만 하면 그 사람은 부자와 같이 일락을 즐기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할 때 사람들은 깨어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의 허약과 무능력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고 자복하고 신앙으로 들어오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고통이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에게 지나고 보면 굉장한 축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통당하지 아니하면 안 깨어집니다. 딱딱한 돌을 정으로 치는 것은 돌을 깨어지게 하기 위해서 치는 것인데 주먹으로 정을 쓰지 않고 바위를 쳐서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은 수없이 많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도 안 깨어지다가 나중에 한 번에 박살이 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로 7절에“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서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적하면 우리에게 고통이 안 다가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깨어지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시고 오히려 복을 허락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망을 이긴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므로 예수님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긴 사람은 역사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죽고 난 다음에 누가 부활했습니까? 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무덤의 문을 박차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 예수님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으면 찾을 수가 있나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항상 같이 있겠다고 말씀 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공기와 같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이 자리도 같이 계시지요.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찾지 아니하면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곁에 계셔도 우리가 찾지 않고 무관심하게 내버려 놓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를 지나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서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어 배가 파선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제자들이 살펴보니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어디에 계신가 보니 배 한 구석에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들이 가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죽게 된 우리를 돌보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이 잠에서 깨어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깨어나지 않고 그대로 주무시는 것입니다. 깨워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 이 자리에 계시면 어떤 사람은 깨어 일어난 예수님과 같이 앉아 계시고 어떠한 사람은 쿨쿨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깨어 일어나야 바람과 파도도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람과 파도만 보고 원망하지 말고 그를 잠잠케 하는 예수님을 깨워야 되겠는데 어떻게 깨웁니까? 회개하고 자복하고 주님께 부르짖으며 철야기도, 금식기도, 혹은 기도원 기도, 새벽기도, 집중적인 기도를 하면 예수님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간절히 찾아서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찾지 않고 예수님은 만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고 만나고 그 다음 믿고 순종하게 하려고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믿고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타락했나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아니하고 순종도 아니하고 그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인간에게 최대의 죄악은 불신앙과 불순종인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우리가 신앙이 들어가야 되고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 신앙을 가지느냐. 자기가 약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어져서 자기 힘과 능력으로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주님을 믿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는 자기를 바라보지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깨어진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쉽게 깨어지지만 고집이 센 사람은 여간해서 안 깨어지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통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깨뜨려서 주님을 순종하게 하고 주님을 믿게 만들어 주는 귀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 주님은 반드시 자기를 찾는 자에게 나타나서 상을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순종해야 되기 때문에 믿음과 순종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교만, 자기 오만이 깨어지고 자기를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한다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양을 인도하는 지팡이, 희망의 풀밭으로 물가로 인도하는 지팡이요 막대기는 사자나 곰이 오면 막아주는 치는 막대기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십자가가 우리의 막대기가 되시고 지팡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은 희망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때 주님 십자가에 매달려 주시므로 십자가의 나무를 통해서 이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의 쓴물을 달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지팡이는 여러분과 나를 희망으로 이끄는 지팡이인 것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용서와 의로움을 얻는 희망, 우리가 불의에서 신령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는 희망, 병들어서 죽게 된 우리에게 치료와 건강을 얻을 수 있는 희망, 좌절과 절망과 저주 속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재기할 수 있는 희망, 죽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의 길을 이끄는 것이 주의 지팡이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막대기인 십자가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피난처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고 능력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4절의 말씀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기도로 깨워 일으키면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지팡이와 십자가의 막대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장 위대한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하고 붙들어 주겠다고 했으니 우리가 주님을 찾고 나가는 것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잭 캔트필드가 쓴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는 책에는 친구 사이인 암전문가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가 실려 있는 것입니다. 한 의사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난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 자네나 나나 암환자에게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으로 같은 스케줄에 따라 처방을 하지 않는가.” “그렇지.” “그런데 왜 나는 내 약을 먹은 사람은 22%밖에 살아나지 못하고 자네가 주는 약을 먹은 사람은 74%나 살아나오니 무슨 비결이 있는가.”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약만 처방하지 않느냐. 너는 약 만주지 자네는 이 약을 줄 때 환자에게 이 약을 어제와 똑같은 것입니다. 열심히 드세요 라고 말할 꺼야. 그러나 나는 약을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 당신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 약은 당신에게 생명을 갖다 줄 것입니다. 낫게 해 줄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한 사람의 의사는 그냥 의무적으로 약을 잡수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의 의사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항상 말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약을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약을 주고 처방할 때는 10명 중 7명이 죽었는데 희망을 주었을 때 10명 중에 7명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위대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 들여서 끌어안고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죄에는 용서의 희망을 주고 거룩하지 못한 자에게는 정결하게 되는 희망을 주시고 병든 자에게는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는다고 희망을 주시고 저주받은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의 복을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고 죽는 자에게는 오늘날 너가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시는 희망의 주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여러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절망을 청산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부활하시므로 희망의 근원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희망의 근원되신 예수님이 두 손을 활짝 내밀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니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붙들어 주겠다고 했으니 이 예수님께 나가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절망에서 왔더라도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종교를 믿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의식을 집행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얻으러 왔는데 바로 잘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희망의 근원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38편 7절로 8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야훼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야훼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주께서 계시므로 해를 당하지 않고 좋은 결과가 올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내 원수의 분노를 막으시며 오른손으로 구원을 해주시니 얼마나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좋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인간사회에서 실패한 자, 이기주의자, 정신병자들을 연구한 결과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공통점이 있는지 자세히 가슴에 손을 얹고 들어 보십시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비난하고 비판했습니다. 즉, 말씨가 곱지 않은 사람의 결말은 자신이 말한 대로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기주의자, 실패한 자, 정신병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증상이 말이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늘 앉으나 서나 비난하고 남을 비판했습니다. 그런 말을 계속하게 되면 남의 불평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대로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1950년대 미국 위스콘신대학 우수문학 지망생들이 교내에 정기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남자들 정기모임을 만들고 여자들도 정기모임을 가졌는데 남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들이 시나 소설을 적어서 서로 읽어 보고 엄청나게 비평을 했습니다. 막 옷을 벗기고 살을 찢는 비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의 모임은 학생들이 모여서 절대로 부정적인 비판은 하지 말고 잘한 점을 칭찬했습니다. 시도 잘한 점을 칭찬하고 소설도 잘한 점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졸업하고 난 다음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조사를 해보니까 남자들 중에 문학자가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칭찬을 서로 한 여자들은 모두 다 우수한 문학자들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자녀들 교육할 때 여러분, 자녀들에게 비평하지 마십시오. 대개 이 세상에 성공하게 된 사람은 부모가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너는 할 수 있다. 잘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 그 이름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흑인인데 학교 다닐 때 학생들이 흑인으로써 비평을 많이 하고 인종차별을 하고 괴로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리고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학교 갔다가 울고 오면 언제나 그 아들을 끌어안고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하면 된다. 너는 할 수 있는 소질이 있다. 능력이 있다. 피부색깔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머니 말을 듣고 칭찬으로 격려를 얻어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서로 붙은 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에 성공해서 세계적인 의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애들 칭찬 하십시오. 잘못해도 한 번, 두 번 잘못했다고 해서 애가 버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칭찬이 그 애를 끌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3절을 우리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물 지날 때 같이 하고 강을 건널 때 물이 침몰하지 못하게 하고 불을 지날 때 타지 못하게 하고 불꽃이 너를 거스르지 못하게 하겠다. 여러분 누구기에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잘났습니까? 그렇지도 못한데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왜냐,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했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을 찾아서 구속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는 고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속하셨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께서 이래 뵈도 나를 지명하여 불러주셨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저 같은 사람도 용기야! 내게로 오너라. 불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이나 섬기고 농사나 짓고 짐승이나 치는 무식한 사람이 75세 갈디아우르까지 살았는데 그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왔습니까?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내 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불러 주셔서 아브라함이 되었지 자기가 아브라함이 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천지를 지은 하나님이 여러분께 관심을 가지고 불러줄 정도니 야~ 대단하시다. 오늘 청와대 대통령이 저녁 같이 먹자고 여러분 부르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넥타이 새로 매고 연지곤지 새로 찍고 옷 새로 입고 아주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이 불러도 영광스러운데 하늘의 대통령, 하늘의 임금,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러분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입니다. 예수님 보혈로 산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 가운데 지날 때도 같이 있고 홍수가 나지 못하고 하고 불 가운데 지날 때 타지 못하게 불꽃이 거스르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귀하여 여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국의 목회자이자 설교가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가 은퇴하기 전에 영국에서 목회할 때, 콜레라가 굉장히 심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콜레라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때는 콜레라에 대한 아무런 예방약도 없었습니다. 콜레라에 걸리면 죽었습니다. 정부는 겁을 먹고 환자들을 돌보지 않았고,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자진해서 콜레라가 있는 템즈 강뚝 근처에 있는 빈민촌에 들어가서 열심히 돌보아주고 기도해 주고 하다가 자기가 콜레라에 걸렸습니다. 열이 나고 설사를 하고 온몸이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두려운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제 내가 죽는구나. 여러분, 가장 이 세상에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칼이 죽음, 두려움인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오면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마귀가 우리에게 와서 제일 먼저 주는 것이 두려움인 것입니다. 두려움을 주어서 두려움에 빠지면 우리는 마귀의 손에 잡혀서 죽습니다. 욥이 고난당하고 난 다음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 두려워하던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 무서워하던 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 벌써 마귀의 올무에 빠지고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다가오면 두려움을 잠재울 수가 없어요. 두려움을 어떻게 잠재웁니까? 저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번 두려움이 마음을 휩쓸면 인간의 힘으로 안 두려워한다. 안 두려워한다. 안 두려워한다. 마음은 두려워한다. 두려워한다. 두려워한다. 이길 수가 없어요. 어떻게 두려움을 이깁니까? 스펄전은 마음에 이제 죽었다고 두려움을 잔뜩 가지고서 교회로 돌아오는데 길거리에 상점에 문 닫아 놓은 문에 종이 쪽지가 하나 팔락 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이쪽지를 보니까 시편 92편 9절로 10절의 말씀이 적혀 있었어요. “네가 말하기를 야훼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 말씀 주의 종이 늘 읽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그 말을 읽을 때 그 말이 종이 쪽지에서 튀어나와 그 마음을 부여잡고 그 마음에 한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가 다가온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믿음인데 믿음은 하나님 말씀으로 오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는 두려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을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두려움이 있을 때 성경을 찾아가야지 다른데 찾아가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시편 92편 10절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마음속에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야훼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주를 나의 피난처로 나의 요새로 의뢰하는 하나님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므로 내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는 화가 내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내 장막에 이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주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화가 없습니다. 믿습니다.”마음에 평화가 와서 그냥 웃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망아! 너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담대하게 두려움과 콜레라의 사망에 대결했는데 집에 걸어오다가 보니까 구토도 안 나오고 몸이 가볍거든요. 집에 와 보니까 병이 깨끗이 나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우리가 환난과 고난당해서 마음에 두려움이 있을 때는 무한정으로 파괴됩니다. 그때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마음에 두려움을 재하고 평안을 얻으면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교회에 왜 오십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는 동안에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모든 불안과 초조와 절망과 두려움을 청산해 주기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평안을 가지고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여러분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2. 영적 전쟁
둘째로, 이 성경말씀에는 영적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전쟁이란 내가 야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에는 마귀의 억압 속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마귀가 꽉 들어차느냐. 마귀에게 우리가 항복하고 마귀의 노예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마귀는 귀신들과 함께 우리 주위에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언제나 하나님과 같이 안 있으면 마귀와 같이 있습니다. 마귀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뒤에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괴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늘 말합니다. 왜 하나님이 계시면 마귀를 미리미리 쫓아버리시지 그 마귀를 내버려 놓아서 우리를 시험하게 하느냐고... 그 이유는 이러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날 때 여러분 무균실에 그대로 두어서 5살 6살까지 무균실에 두어서 키웠다가 무균실에서 데리고 나오면 하루 만에 병들어 죽습니다. 이 세상에 병균이 얼마나 있는지 병균 없는 세상에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균이 있어도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우리는 병균과 싸워서 이겨서 저항력이 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영적으로 보면 저항력 투성이입니다. 마귀가 와서도 마귀를 이겼기 때문에 예수 믿고 교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병균도 극복해야 건강을 가지고 살지 병균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없는 것처럼 마귀가 없는 세상에 살 수 없습니다. 마귀를 극복해야지 마귀를 피해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어떻게 하느냐. 마귀를 이길 수 있도록 은혜의 성찬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야 힘을 얻지 않습니까?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이 없어요. 옛날 어른들이 밥이 보약이라고 늘 말하기에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제가 몸이 허약해지고 난 다음에 보니까 큰 부흥회를 나갈 때 배가 부르도록 밥을 먹지 아니하면 중간에 가서 배가 고파서 허덕허덕하게 돼요. 힘이 없어요. 그래서 비로소 밥이 과연 힘이구나. 보통 때는 밥이 힘 인줄 몰랐는데 집회하러 나가서 보니까 밥을 충분히 먹지 아니하면 중간쯤에 가서 힘이 없어서 입에서 말이 안 나와요. 배가 등허리에 붙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귀가 오면 마귀를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은혜의 밥상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면 은혜를 받게 돼요. 마귀가 오면 좋은 일이 생겨서 은혜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시험을 당하게 되면 꼭 하나님께서 제게 집회를 주세요. 시험을 당하는데 왜 집회를 주느냐.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큰 집회를 열어서 은혜가 쏟아지도록 만들어 놓아서 은혜의 밥상에 잔뜩 밥을 먹고 힘을 얻게 만들어줘요. 그냥 원수의 공격을 당할 때는 낙심하고 좌절하고 힘이 없어 어깨가 축 늘어졌다가 집회에 나가서 수만, 수십만 사람들이 모이는 가운데 성령의 불이 임하여 은총이 쏟아지면 집회하고 나와서는 어깨에 힘이 딱 주어지고 허리가 딱 바로 서게 되고 고개도 삐딱하지 않고 바로 서게 되고 아주 힘과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원수가 오면 밥상 차려 준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없을 때는 진수성찬이 없지만 원수가 오면 밥상이 차려진다. 그리고 밥상만 차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 주셔서 여러분의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가정도 돌보고 사업도 하고 생활도 하게 해서 잔이 넘치는 성공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은 성령이 오시면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가 오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성공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 말하기를 고난은 고난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온다고 말하는데 고난이 바로 원수가 가져오는 무기인 것인데 원수가 오면 여러분 은혜도 오게 되고 반드시 성령이 와서 여러분에게 성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어떠한 일에도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처했으나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 앞에 속했고 원수 마귀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밥상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주셔서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에 대항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은혜의 밥상을 차려 주시고 마귀의 공격이 오면 하나님의 은혜도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5절을 한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따라 말씀하세요.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좋지 않은 일은 좋게 만들어 주시니 좋다. 성령이 오시면 여러분 왜 좋으냐. 성령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한 것을 원수가 공격할 때 성령이 오셔서 눈에 다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10절에“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원수가 오면 성령이 오셔서 어떻게 성공할까 길을 보여 주시고 어떻게 이길까 길을 보여 주시고 어떻게 행복할까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면 우리 눈에 안 보여요. 하나님이 예비한 이 놀라운 축복이 눈에 안 보이는데 원수가 오면 하나님이 원수 앞에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이 모든 예비한 것을 보여 주시므로 우리에게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가 올 때 통탄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3. 좋으신 하나님
세 번째로, 다윗은 이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평생토록 우리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풀어 준다고 말했었습니다.
시편 23편 6절에“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선하시다는 것은 좋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압니까? 제가 불광동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 정말 마음도 춥고 몸도 춥고 생활도 추웠어요. 천막교회를 치고 가마니를 깔았는데 교인이라고는 5명 있으니 5명이 연보 한 푼도 없습니다. 무슨 내가 돈을 벌어서 줘야 돈을 헌금을 내지 누가 헌금 낼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 항상 밥상은 비어 있지요. 항상 잠자리는 추워서 벌벌 떨지요. 예배 볼 때는 낙심되지요. 그럴 때 하나님 성령께서 제게 알려주신 진리가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다. 천막에 있어도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고 가마니 위에 예배를 봐도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고 빈 밥상을 만나도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고 어떤 형편에도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좋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하라.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다. 그게 마음에 굉장히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니까 결국은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 결국에는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 내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결과가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좋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결과 우리 한국 보십시오. 60년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나라 중에 세계에서 거꾸로 1등 된 나라가 60년 만에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은 우리 한국이 백만 명도 안 되는 신자가 천만 명이 넘어서 좋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시편 84편 11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야훼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야훼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시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나쁜 마귀는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에 욥의 경우를 보면 참 처절하게 마귀가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와서 욥을 참소해서 하루아침에 그 재산을 다 빼앗아가고 그 자식들을 죽이고 마지막 그 아내도 배신하고 나가게 만들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와서 공격하게 만들고 정말 그는 사면초과에 백척간두에 진일보로 처참한 상황 속에 처했었습니다.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감사하고 나는 죽이더라도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정도의 신앙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욥아, 이래도 네가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겠느냐.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이 재산 다 잃어버리고 자식 죽고 마누라 잃어버리고 친구들은 원수가 되어서 너를 조롱하는데 이래도 하나님 믿느냐. 욥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나를 죽이셔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아멘 소리가 굉장히 작네. 우리도 욥처럼 말해 보십시다.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겠노라. 그게 진짜 신앙이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있을 때 우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불에 던져 죽이겠다고 왕이 말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이 왕이여, 우상의 왕을 안 섬긴다고 우리를 잡아서 불에 던지면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거니와 안 건져 주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 절하지 않겠나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서 불속에 던지니까 제4번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불 가운데 나타나서 그들을 불꽃을 이기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나오면 하나님이 보좌에서 일어나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욥은 전에 보다 후에 더 큰 축복을 받아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온 이유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해도 우리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보기에 좋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난 다음에 여섯째 날 마지막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니 심히 좋았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빛을 지어놓고 좋으시고 세계를 지어놓고 다 좋으시다고 말했는데 하나님이 계시면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면 좋은 일이 안 생겨날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는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롬 8:28) 좋게 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좋게 된다. 나쁜 것은 좋게 될 것이니 좋고 좋은 것은 좋으니까 또 좋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좋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환경과 이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하나님을 닮아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은 꿈을 꾸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으며 좋은 말을 하자. 왜 좋은 하나님이 계신데 우리가 나쁜 일을 생각하고 나쁜 꿈을 꾸고 나쁜 말을 하고 나쁜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귀와 하나님이 동시에 거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마귀는 나쁜 마귀, 쫓아내고 좋은 하나님을 모셨으니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나 좋다. 우리는 감사하고 찬미하며 좋은 것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꿈꾸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고 좋은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인 것입니까? 예수 믿고 좋지 않은 사람 누가 있는 것입니까? 제일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과 내가 예수 믿고 제일 좋은 것이 뭡니까? 천당 가는 것 아닙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 주님 계신 곳에 함께 있으니 하늘나라보다 좋은 데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곳에 여러분 우리가 공짜로 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행위로써 좋은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니 얼마나 팔자 좋은 것입니까? 좋은 팔자가 늘어진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세상 자체가 사망의 골짜기며 영적 전쟁터이지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라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을 하루에도 수십 번 암기하십시오.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 시편 23편을 암기하며 그를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약속이 그곳에 다 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느 곳에 가든지 염려가 있고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근심, 불안, 두려움이 항상 있어요. 이것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파도가 늘 치고 바람이 불지요. 이 두려움 가운데 여러분 안심을 하고 평안을 가져오고 믿음을 가져올 수 있는 길은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 가까이 있고 성경이 있으니 이것을 읽고 믿고 받아들이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생명의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좋은 선물이 말씀이요, 제일 위대한 힘이 말씀이요, 우리 마음을 지켜주는 이도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는 신앙생활은 축복받고 승리하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목자가 되시고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깨어지고 회개하고 변화 받아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같이 계셔서 주님을 의지하는 우리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도록 주님의 지팡이가 희망을 주시고 막대기가 보호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시여! 오늘 이 자리에 온 모든 우리 성도들 주님을 바라보고 공포를 버리고 불안을 털어버리고 믿음과 평안을 얻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동굴과 터널
시 23:4-6 / 조용기목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4~6)
<서론>
오늘 저는 “동굴과 터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겉으로 보기에는 동굴이나 터널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다 땅굴이니까. 그러나 무엇이 다르냐. 동굴은 들어가면 감옥입니다. 나올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터널은 아무리 어둡고 캄캄하고 땅 밑의 깊은 굴이라도 나갈 곳이 있습니다. 터널은 들어가면 나가는 길이 있는데 동굴은 들어가면 나가는 길이 없어요. 우리가 일생이 동굴과 같을 수도 있고 터널을 가지고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시련은 크고 작은 동굴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기 때문에 절망이 있고 좌절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같은 동굴인 것 같지만 반드시 출구가 있습니다. 그 출구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는 어떠한 동굴도 터널로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 왜 인생을 살아가는데 동굴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동굴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동굴이 있어요. 여러분, 북극 탐험을 하는 우리 탐험대들이 크렉에 빠져서 생명 잃은 적을 신문에 난 것 보았지요? 얼음 동굴 속에 떨어져서 나오지 못하고 죽은 사건인 것입니다.
<본론>
1. 동굴이 생긴 원인
오늘날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벌써 동굴에 빠져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악의 동굴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더라도 조상이 죄인으로써 우리를 세상에 낳았기 때문에 죄악의 동굴에서 빠져서 그곳에 허덕여 예수님 도움이 없이는 결코 나오지 못하고 동굴에서 죽습니다. 허물의 동굴, 사람들은 허물이 많습니다. 오늘날은 더구나 게임 중독의 허물이 한 사람을 죽으면 어린이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그 동굴에서 허덕이며 인생 파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질병의 동굴도 있어요. 이 질병 하나 고치면 다른 질병 다가오고 또 어떤 질병 고치면 더 무서운 질병이 다가오고 끊임없이 인생은 질병의 동굴에서 허덕이며 완전히 병에서 해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죽음의 동굴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번 들어가고 난 다음에 나오질 않아요. 어제 제가 어떠한 교회단체에 인터뷰를 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참 훌륭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저보고 그 목사님 현재 무덤에 들어가셨는데 할 말이 있느냐. 무덤에 들어간 사람보고 내가 무슨 말을 합니까? 그래서 제가 기왕 인터뷰하러 나왔으니까 말은 해야 되겠고 야 이 사람아, 무덤에서 뭘하나 빨리 오너라. 여기 인터뷰하고 있다. 빨리와서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그런데 사람들이 웃지 아무도 그 사람 나오는 것 못 보았어요. 제가 나오라고 했는데 안 나왔어요. 살아있을 때 같으면 좋다고 나왔을 것인데... 죽음의 동굴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친해도 못나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비극인 것입니다. 아담이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떠나자 마귀의 종이 되고 그 다음부터 이 죄악의 동굴, 허물의 동굴, 질병의 동굴, 가난과 낭패의 동굴, 죽음의 동굴이라는 감옥에 들어가서 허덕이며 못나오고 발버둥치다가 일생을 끝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은 동경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의 마지막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데 이렇습니다. “온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경제 문제는 군대 문제입니다. 군대 문제는 정치 문제입니다. 정치 문제는 정치가의 양심 문제입니다. 양심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고 도덕적인 문제는 즉 종교의 문제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은 종교 문제이므로, 종교가 바로 서야 양심이 바로 서고, 정치가 올바르게 되어야 평온한 가운데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이런 시를 적었습니다. “모든 범죄는 그 속에 천벌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고통의 씨를 품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근본에는 종교가 있고, 종교가 바로 서야 위기에서 나올 수가 있는데 그 종교를 바로 세우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양심을 바로 세우면 그를 통해서 동굴에서 나오는 문이 우리의 생활 속에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이나 가정, 생활, 사업에서 고통을 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들어가면 못나오는 동굴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갈길을 모르고 방황하고 허덕이고 고통을 당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곳이든지 동굴에 문이 열리면 터널이 되어서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동차 타고 요사이 서울 시내나 지방을 내려갈 때 동굴을 통해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터널입니다. 바깥에 나가는 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반드시 동굴은 터널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떠난 죄
하나님을 떠난 죄는 불신앙과 불순종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로 17절에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 말을 아담과 하와는 안 믿었습니다. 그리고 먹지 말라는 것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내밀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가난의 동굴입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죽음의 동굴입니다.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지금 당하는 이 고통은 모두다 아담과 하와가 불신앙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들어온 동굴입니다. 이 동굴에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동굴에 굴을 뚫어야 되겠습니다. 누가 뚫어줘야 되겠어요. 죽음의 동굴, 죄악의 동굴, 불의의 동굴, 질병의 동굴, 저주의 동굴, 절망의 동굴을 뚫어줄 사람이 누굽니까? 그 보통 뚫는 것이 힘이 들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뚫을 수 없습니다. 그런 무서운 동굴입니다. 그를 뚫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그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 6시간 동안 주님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 죄악을 뚫었습니다. 허물을 뚫었습니다. 질병을 뚫었습니다. 저주를 뚫었습니다. 죽음을 뚫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할 때 마지막 삽을 던진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 놓고 만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터널이 있습니다. 들어오는 길이 있으면 나갈 길이 있는 것입니다. 죄악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허물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병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저주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죽음과 지옥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주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한 예수님이 바로 동굴에서 터널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캄캄한 동굴 속에 들어갔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그 동굴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가운데서 문이 되어 열려서 터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심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동굴에서 주님이 같이 계시면 터널문이 자기와 같이 있기 때문에 주의 지팡이, 막대기, 주님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권능과 권세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문인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는 해를 받지 않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주님이 우리의 해결책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밥상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원수가 와야 그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없는데 주님 밥상 안차려 줘요. 원수가 오면 밥상 차려 주고 성령 기름 부으셔서 일을 성공시켜서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든지 원수의 공격을 받아서 고난당하든지 예수만 있으면 그 땅굴은 터널로 변화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죽으시는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삶의 동굴에서 출구가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 10장 19절로 20절에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구약의 생수는 지성소와 성소의 휘장에 가려 있습니다. 그 휘장에는 아무도 못들어가요. 1년에 제사장이 한번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제사를 드릴 따름이지 못들어가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운명할 때 가장 큰 변화는 하나님이 성소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께 못들어도록 휘장을 쳐 놓았는데 그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쫙 찢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캄캄한 휘장이 찢어져서 하나님의 광명의 빛이 우리에게 태양처럼 비치고 이제 예수 이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막힌 휘장이 찢어지고 동굴이 터널로 변화되어서 아버지 앞으로 나가는 길이 열려버린 것입니다. 지금 아버지의 사랑이 햇빛처럼 여러분에게 비취고 여러분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품 속에 뛰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는 사랑의 관계요, 사랑이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여러분 정의는 사랑이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정의는 율법으로써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옛날 구약시대에 인간중심의 낮은 단계의 정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하는 정의는 여러분, 율법으로써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용서와 의와 영광을 선물로 주는 것이 정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여러분의 죄, 나의 죄, 우리의 불의, 여러분의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셔서 그 속에서 우리에게 용서를 주시고 의를 주시고 거룩함을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사랑이 최고 선물이요,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이 정의인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정의인 것입니다. 심판을 베푸는 것이 정의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심판을 베푸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해서 돌로써 사람을 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으로써 덮는 것이 그 정의인 것입니다. 제가 자꾸 이 말을 해서 여러분 귀에 못이 박힐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성전 뜰에서 가르칠 때 율법주의자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께 끌고와서 그 발 앞에 던졌을 때 성경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7계명에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는 자는 쳐 죽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쳐 죽이라고 했어요. 그것은 율법입니다. 정의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주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율법대로 집행해야 되겠는데 그 정의는 이 여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최고의 증인인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이 정의를 어떻게 판단하시는가 보십시다. 예수님이 그래 좋다. 내가 먼저 돌로 칠테니 너희들도 돌을 치자. 하나, 둘, 셋, 쳐라~ 돌이 비오듯이 떨어져서 그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습니다. 아무도 예수님 잘못했다고 말 안합니다. 정의를 실천했으니까.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 죄를 지은 육체는 돌에 맞아 죽으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정의를 실천하는데 그런 인간적인 정의를 실천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남에게 정의를 실천하기 전에 너부터 먼저 정의를 실천하라. 남의 허물 들춰내기 전에 네 허물부터 먼저 드러내어라. 남 벌거벗기기 전에 너부터 먼저 더러운 옷을 벗어 보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정의를 실천하라. 인간이 말하는 낮은 단계의 율법적인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죽여라. 그 사람이 정의를 실천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들은 돌을 다 버리고 다 도망쳤습니다. 왜냐, 주님께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데 그들의 지은 죄를 낱낱이 다 적어내는 것입니다. 그 여자에게 행한 인간의 정의의 심판은 결국 자기들에게 심판을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지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마라. 용서와 사랑이 하나님의 정의인 것입니다. 여러분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것인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으로 죄를 짓고 또 짓고 또 짓습니다. 인간은 조그만큼 발전하고 조그만큼 발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느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 갈대가 지금 상해서 바람에 휘청휘청 하면서 끊어지려고 하는데 주님이 그걸 쳐내어서 상한 갈대가 꺾이지 않게 하시고 심지가 꺼져갑니다. 기름이 없어서... 후~ 하면 꺼져 버릴... 여러분의 생명이 간들간들 합니다. 그것 나쁜 놈의 자식 게으르게 있다가 저 모양이다. 꺼버려라. 후~! 그러면 사람들은 박수를 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어서 끄지 않고 가서 그 불을 감싸서 자기 기름을 부어 주셔서 활활 생명으로 타오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정의입니다. 그게 뭡니까? 용서와 사랑인 것입니다. 최고의 정의는 용서와 사랑인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개인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의로써 심판을 내리므로 가정이 화평하게 안됩니다. 남편을 심판하고 아내와 화합이 안됩니다. 아내를 심판하고 화합되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하고 그리고 서로 얼싸 안으면 그곳에 평화가 오고 행복이 오고 가정이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정의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정의에서 우리는 돌아서야 되는 것입니다. 돌로써 치는 정의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정의를 베풀어서 우리는 끌어안아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고 꺽어진 갈대를 꺾지 말아야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려면 우리 전부 심판을 받아 죽어야 된다. 십계명에 안 걸린 사람 어디 있어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거기에 하나도 안 걸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하나라도 걸리면 죄를 지은 사람은 죽으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죽였으면 이 자리에 아무도 와서 앉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 내려다 볼 때 여러분 얼굴은 없고 시체만 볼 것입니다. 시체도 못보지요. 나도 죽었을 테니까... 시체만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정의를 그렇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죽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고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서 정의를 세우신 것입니다. 정의를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낮은 단계의 정의도 실천했는데 죄는 다 하나님이 다 대신 걸머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청산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서 여러분과 나에게 정의를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정의가 무엇이냐고 많이 질문하는데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우리가 생각해야지 사람 편에서 생각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이 있기 때문에 한평생을 살면서 감사하고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도 교육이 없고 출신이 천하더라도 남녀 노유 빈부 귀천 차별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예수님을 내 가슴 속에 무셔드리면 예수님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안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가르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길을 생명이 있는 곳에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동굴에서 터널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어떠한 동굴도 터널로 변화시키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모시면 여러분 문제에 해결책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동굴에 터널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캄캄하던 앞날에 저 터널 입구에 밝은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거룩함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건강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너가 더 공부해라. 너가 더 노력해라. 너가 더 수양해라. 너가 도덕을 더 닦으라. 그래서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라. 죽도록 손톱이 다 뒤틀려도 해도 동굴을 터널로 못 뚫어내요. 우리 힘으로 안돼요. 그러나 다른 종교는 전부다 너희 힘으로 뚫으라고 합니다. 더 많이 굶으라. 더 많이 수양과 도덕을 닦으라. 그런데 수양과 도덕 닦는 것 얼마나 힘듭니까?
3.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명령에 믿고 순종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절망의 동굴을 전부 터널로 뚫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망의 동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없이는 안돼요. 예수를 만나야 돼요.
시편 23편 4절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음침한 골짜기에 주님이 같이 계시면 동굴이 터널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권세와 능력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우리의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히브리서 13장 5절에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고 순종함을 배울수록 삶의 출구는 넓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더 믿고 주님께 더 순종하면 할수록 우리가 나갈 터널의 입구는 더 넓어지고 더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주님은 상을 주려고 와 있지 여러분에게 고통주려고 와 있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상주시는 예수님을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를 여러분, 상을 주시는 예수님 좋은 이미지의 예수님을 갖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믿고 순종할까요? 믿고 순종하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밑에 나가서 내 신발을 벗어 놓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베풀어 주신 그 축복을 마음속에 생각해서 십자가를 통한 오중복음의 생각을 꽉 마음속에 가지고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꿈을 꿉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꿈을 꾸고 현재에 내가 아무리 생활이 형편없고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잘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겠네. 현재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믿음으로써 더 나은 내일을 향해야 될 것이고 입술의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입술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좋아진다. 나는 튼튼해진다. 나는 밝아진다. 나는 해결된다. 나는 승리가 온다. 나는 축복이 올 것이다. 입술로써 여러분의 운명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개미도 집을 짓지 않습니까? 까치도 집을 짓고... 누에도 집을 짓습니다. 여러분도 집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집을 짓습니까?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누에가 여러분 고치를 지을 때 보면 굉장합니다. 한때 뽕잎을 잔뜩 먹더니만 그 다음에 고치를 만들 때 많은 누에고치를 칠 때 소리가 쏴~아 하고 소리가 납니다. 하도 어릴 때 봐서 세월이 오래 되어서 많이 잊어버리기는 잊어버렸지만 입에서 실을 가지고 나와서 자기 집에 들어갈 집을 짓는데 대단합니다. 입술로... 이렇게 해서... 비단옷도 해 입는 집을 지어요. 여러분의 집은 여러분의 입술에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에서 나온 말로 내가 사로잡힌 바 되었다. 죽고사는 권세가 입에 있으니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그러므로 여러분도 전부 다 고치를 만드는 누에들입니다. 누에라고 말하니까 사람을 누에로 비유하느냐 그러지만 비유컨대 그렇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쉽지 않습니까? 아 내가 누에 입에서 나와서 비단으로써 집을 짓는 것처럼 나도 집을 지어야 되겠다. 여러분 집을 지으세요. 병이 든 사람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고 자꾸 말하므로 건강의 집을 지으세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였으므로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입으로 자꾸 축복의 집을 지으십시오. 얼마 안 있으면 아름다운 집이 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그 속에 살게 될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믿고 순종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금세 안심, 내세 복락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금세는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금세는 버리고 죄사함이나 받고 내세에 들어가서 잘 살아라. 그것이 주님의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금세 안심, 내세 복락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주님 오셔서 못박힌 것은 금세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은 내세에 우리에게 영생 복락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금세에 오늘날 여러분의 죄를 청산하고 우리의 허물을 청산하고 우리의 병을 청산하고 우리의 저주를 청산하고 내세에 영생복락을 주고 하나님의 보좌를 주고 시민권을 주고 영생복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혼이 잘되는 것이 첫째지만 둘째 범사도 잘되고 강건도 해지는 전인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면 이와 같은 주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 남은 여생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은 바꾸지를 못해요. 태어날 때부터 그 성품 그대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여러분 성격을 가지는데 성격은 못 변합니다. 그러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인격입니다. 그 사람 참 훌륭한 인격자다. 인격은 자기가 노력해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시련을 겪는 것은 시련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인격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시련이 없으면 믿음을 배울 수가 없는데 시련이 오면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연단을 받아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4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우리도 같이 동참을 하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면 참여한 만큼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걸머지면 걸머질수록 십자가의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반드시 고난 그 동등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는데 그 고난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다가와서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인격적 변화가 다가온 것은 고난을 통해서 다가온 변화지 여러분이 수양과 도덕을 닦아서 얻은 변화는 지극히 적은 것입니다. 고난이 괴로움 같지만 심히 적은 고난이 큰 영광을 여러분 생애 속에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반드시 여러분에게 해롭지 않습니다. 고난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고난 앞에 여러분 하나님이 밥상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밥상차려 주시고 그것을 미끼로 해서 성령 기름을 주어서 능력을 주어서 더 큰 일을 하여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밥상도 없고 성령기름 부음도 없습니다. 편안하게 살아서 좋기는 하겠지만 밥상이 없습니다. 원수 앞에서 하나님 밥상 차려 주시는 것은 원수를 극복하라고 밥상 차려 주시는 것이므로 밥상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밥상 맛있습니다. 소금국에 쌀밥 지어주지 않습니다. 일류음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먹는 음식이 아니라 원수 앞에서 하나님은 밥상 차려 주신다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온갖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권세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퍼부어 주어서 체험할 수 없는 영적인 밥상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원수 보는 앞에서 기름 부어 주셔서 하는 일마다 성공을 척척 시키고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땅굴 속에 가둬 버리지만은 예수님은 땅굴에 터널을 만들어서 밖으로 나가서 더 큰 성공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게 되면 자기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깨닫게 되므로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당하면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더 배우게 되고 회개하고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로 7절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징계를 통해서 여러분을 아들로써 장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아들 교육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이 다가와야 주님을 찾고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편안하니까 하나님 찾지 않지요. 내가 고통스러우니까 새벽기도도 나오고 철야기도도 나오고 오산리기도원에도 가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도 그래요. 대개 답답하면은 오산리기도원으로 갑니다. 편안하면 우리 집에서 잡니다. 제가 옛날에 목회할 때는 매주일 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하루에 4시간, 5시간씩 엎드려 기도했는데 요사이는 그 반도 반도 못해요. 내가 은퇴하고 난 다음 책임이 없어졌으니까. 내 양심에 야~ 너 5시간씩 기도했는데 너 요즘 몇시간이나 기도하나? 그것요? 이영훈 목사님이 할것이고 내가 할 것 아닙니다. 나는 이미 다 졸업하고 나왔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되는데 자꾸 그렇게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기도원에 가라. 아이구 오늘 기도원에 가기 너무 피곤해요. 오늘 집회 갔다와서 너무 피곤하고 잠이 모자르니까 잠 좀 한숨 자겠습니다. 가는게 좋지 않으냐. 거기 이영훈 목사 가는데... 내가 책임을 벗고 나니까 편안하게 되니까 어려운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고 갈망하는 마음이 없어요. 왜냐하면 전에는 힘이 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 총명으로 못하므로 하나님 도와달라고 부르짖고 갈망했는데 하나님 도움 없이도 이제는 일 잘 끝내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키고 천당갈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편안하게 살다 가야지 그런 마음이 자꾸 생기는데 그것 못된 생각이지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언제 사라지느냐. 고통이 다가오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고통만 다가오면은 그런 변명 안해요. 아이고 하나님 날 좀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리기 시작하지요.
시편 91편 14절로 16절처럼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이렇게 하나님을 찾으면 좋은 일이 생겨난다구요. 하나님을 찾으면 구원해 주시고 높여 주시고 응답해 주시고 영화롭게 해주시고 장수를 주시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좋은 일 해주시기를 원해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으면 신앙의 성숙과 변화를 갖고 옵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변화 안될 때가 있습니까? 여러분, 사람도 훌륭한 사람을 만나면 그 제자도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여러분이 사귀는 친구가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더 많은 같은 시간을 지내는데 하나님 인격으로 우리가 닮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가 지금 보고 사는 것은 생이 살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잠깐 보고 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은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들어가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변화를 받고 성숙해지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당하는 고난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나에게 이루게 하십니다.
<결론>
여러분, 고난의 터널을 통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격의 수련을 받을수록 터널을 통과해 나올 때마다 믿음이 자라고 소망이 넘쳐나고 사랑이 충만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면 통할수록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의 인격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면 통할수록 그 자라나는 인격과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귀히 사용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인생에 다가오는 동굴을 피하지 마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통하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동굴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같이 계심이라. 예수님이 우리 터널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죄를 통과해 나가는 터널이다. 나의 모자란 행동을 벗어나는 터널이다. 병을 통과하는 터널이다. 가난을 통과하는 터널이다. 죽음의 감옥을 지나가는 터널이다. 우리를 가두어 놓을 감옥은 없습니다. 우리가 절망할 동굴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동굴은 터널이 되고 문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활짝 열린 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유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질병에서 자유를 저주에서 자유를 죽음에서 자유를 얻은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토굴을 지남으로 말미암아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얻고 예수님을 더욱 튼튼히 붙잡고 영혼이 더욱 잘되고 범사에 더욱 잘되고 더욱 강건하고 더욱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항상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삶과 고난
시 23:4-6 / 조용기목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4~6)
할렐루야~
오늘도 좋은 날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인사하십시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나님 아버지, 오늘 어떤 날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게 오는 모든 날은 아버지께서 좋은 날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우리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해주시는 하나님께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구하면서 하루를 지내야 해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하고 또 하루 종일 좋은 일만 생기나요? 괴로운 일도 생겨나지만 그 끝에 합쳐서 좋아져요. 여러분에게 항상 이런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삶과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그 자체가 고난의 연속인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평범한 삶속에도 모든 것이 고난이 다 있습니다. 빈손들고 신학교를 공부하고 천막치고 가마니 들고 나가서 개척을 했는데 참 절대로 제가 개척해서 성공 못할 것인데 우리 최자실 목사님 때문에 성공을 했어요. 그래서 오늘 셋째 보고서 “장모 사랑은 사위다.” 우리 최목사님이 나를 사위로 삼으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정말 헌신해 주었습니다. 고생을 하고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편안하게 안 살면서 고생을 해서 저의 목회 뒤를 도와주어서 제가 목회 안정을 얻고 성공을 했는데 그리고 보니 우리 장모님은 천당 가 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이 공로를 장모님에게는 갚을 수 없으니까 이제 딸내미에게 갚아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요. 반드시 심은데로 거두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장모님이 천국에서 내려다 보고 “내가 심어 놓았더니 그대로 거두는구나.” 기뻐하실 수 있도록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아담 이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 유혹, 정욕, 탐심, 질병, 고통, 가난, 미움, 절망, 죽음 등 수많은 부정적인 환경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올 때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진짜로 고난이 다가올 때 굉장히 괴롭습니다. 사업이 안 될 때 직장을 잃을 때, 불치의 병이 들 때, 이런 여러 가지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가 마음을 걷잡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고 탁 중심이 잡혀있으면 고난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데 마음이 중심이 잡히지 아니하면 막 흔들리고 굉장히 불안과 고통 속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에 마음이 주님께 딱 잡히고 중심이 섰을 때는 고난이 아무리 다가와도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는데 그 중심이 안 잡히면 마음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려요. 그 불안하고 초조하고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을 읽고 난 다음에 그 시편이 마음속에 굉장한 위로를 주었습니다. 일시적인 위로가 아니고 오랜 세월을 통해서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마음에 큰 위로를 주시므로 이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첫째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러분 좋을 때야 함께 하기 쉽지요. 내가 고난스럽고 어려울 때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데 고난당한 사람이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고난을 당하고 천지가 어둡고 고통스러울 때 모든 사람이 나를 도피할 때 주님은 나와 같이 계신다. 주님이 같이 계신다. 굉장히 평안하지요. 우리 어릴 때 시골에는 화장실이 먼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장남이기 때문에 우리 어머님이 밤중에 화장실 갈 때 꼭 나를 깨워 가지고서 데리고 갑니다. 내가 짐이 되지 도움이 안됩니다. 왜, 무슨 힘이 있습니까? 화장실에 가면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리는데 그것도 엄마는 늘 “거기 있냐? 용기야 있냐?” 묻습니다. 어린 아이라도 데리고 같이 있으면 마음의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하물며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면 그것은 보통 빽이 아닙니다.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큰 빽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려진 고난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고난도 있습니다. 알려진 고난은 사업을 하다가 망하든지 가정에 큰 풍파가 다가온다든지 불치의 병이 든다든지..
미국에 세계에서 이름날 정도로 부부간에 인정이 있다던 엘 고어 전부통령이 50년 동안 부인하고 잘 살다가 늦게 고난을 당했지 않았습니까? 이혼했거든... 50년 살았으면 그냥 살지 이혼을 뭐하러 하노. 그런데 이런 고난이 있다 말입니다. 그냥 알려진 고난도 있고 많은 사람이 내 가슴에 사무친 고난을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남하고 나눌 수 없는 고난이 많아요. 남편은 아내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고난이 많습니다. 사업에 자금이 떨어지고 계약이 무너지고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아내에게 말하면 걱정을 할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출 때가 많습니다. 저는 늘 몸이 약했기 때문에 정말 어떤 때는 몸이 고통스러워서 교회 못나갈 것 같은데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감춥니다. 이와 같이 알려진 고난도 있고 가슴에 감추고 사는 고난도 있는데 시편 25편 17절에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근심이 많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런데 주님은 고난을 당할 때 마음에 근심이 많을 때 그 고난이나 근심을 바라보지 말고 함께 있는 주님을 바라보라. 우리는 육체를 입고 있는 영혼입니다. 3차원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4차원 존재인 것입니다. 육체는 보이는 것만 취급하지만 우리 영혼은 안 보이는 세계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눈에 안 보이는 주님의 그의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포심에서 놓여놔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 그 자체 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에 공포심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능력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절제하는 마음을 주시지 우리 마음 속에 불안하고 공포하고 벌벌 떨고 밤새도록 잠 못자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욥기 3장 25절로 26절에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이것 보세요. 마음에 마귀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도록 만들어 놓고 그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 재산을 다 잃어버릴 것이라고 늘 두려워했습니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우리 재산 다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냐?” 그 다음에는 “자식들이 다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밑도 끝도 없는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이루어졌어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두려워 하는대로 될지어다.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먼저 마음 속에 두려움을 갖다 주어서 마음에 믿음을 빼앗아 놓고 우리를 짓밟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그 고난의 발자국들이 지나간 자리가 기쁨으로 가득 차고 넘치게 된다.” 이것은 독일의 시인 괴테가 한 말입니다. 주님이 같이 계시고 주님을 의지하고 고난을 통하면 그 고난이 기쁨이 가득한 체험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변화되어서 우리에게 큰 기쁨의 원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같이 계시냐 안계시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확실히 내게 계시면 고난이 다가올 때 더욱 주님께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 에릭 린드맨(Erick Lindman) 박사는 조사를 통해 고난당한 사람들의 85%는 자신의 고난이 결국 축복이 되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여러분 고난 다가오는데 결과 기다리다 보면 적어도 85%는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난이 반드시 우리를 멸절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 고난이 우리에게 지나고 나면 축복이 되냐면 첫째, 고난 때문에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좀처럼 나쁜 습관을 안 고치다가도 고난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고난을 털어버리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보니까 성령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된 것보다도 얻어맞고 변화된 일이 더 많아요. 지금 50년 목회를 하고 왔는데 하나님께 얻어맞고 고난 당하고 난 다음에 회개하고 버릴 것 버리고 가질 것 가지고 그런 체험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고난 안 당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고난으로 가정과 신앙, 사랑이 회복됩니다. 전에 등한이 여기고 내버렸던 것 이것이 다 회복되는 것입니다. 셋째,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인생이 새로워지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대신 감사하는 삶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도 주님을 믿고 기대하면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 상상, 말 등이 삶을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행복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을 보십시오. 마음이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적이고 두려움이 꽉 들어찼기에 자기 목숨을 던져 버렸겠어요. 성경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마음 잘못 지키면 생명의 근원을 뺏긴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주님 중심으로 서지 못하고 이 세상의 불안, 공포, 절망, 좌절 같은 것을 말하면 그 말이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말이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굉장히 힘이 있습니다.
내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말로 내가 사로잡힌다고 했는데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전부 말로써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로써 죄 용서하시고 병 고치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에게 먹이고도 열 두 바구니 남으시고 온갖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선언한다는 것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내 제자 교회 부흥회를 갔는데 부흥회를 하고 난 다음에 제자교회 제자가 굉장히 몸이 아파서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고 있다가 퇴원을 했는데 그 부인이 내게 와서 뭐라고 했냐면 “목사님, 아마 목사님 우리 남편 마지막 볼 것 같습니다. 더 못살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기도를 해보니까 아니야 산다. 그래서 내가 “아니 당신 남편 삽니다.” 걱정하니까 “아니요 목사님 몰라서 그럽니다. 완전히 이제는 끝장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하니까 마음에 살 것 같아요.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 말씀으로 그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이 말씀 자체가 힘이 됩니까?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 스스로를 보고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아주 황금 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을 담대히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읽고 이 말씀이 내게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선언하면 이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기도하고 찬양하면 그 기도와 찬양이 힘과 능력이 있어요. 두려움을 극복하고 말씀을 의지하고 믿음의 선언을 하면서 찬송하고 우리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5절로 7절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이것 여러분 보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보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매일 소리내어 읽고 묵상하고 그 하루를 출발하십시오. 얼마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지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언제나 마음에 외우고 이 말씀과 같이 삽니다. 주의 지팡이가 나를 인도하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고 그렇게 기도하고 선언하고 나가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이끌어 주신다. 지팡이는 길을 찾아 가는데 필요하고 막대기는 짐승이 오면 치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안내를 말하고 막대기는 건져주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2절에 이것도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아 이 정도면 보통 아니지요. 안 믿는 사람들은 이런 말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에 엄청난 약속이 들어있는 것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읽고 듣고 기도해야 마음에 그것이 축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주의 막대기가 나를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10절에 “야훼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아까 앞에는 인도하는 주님이지만 지금은 지키는 주님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로 6절에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왜냐면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나를 돕는자 이기 때문에 사람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망하게 하지 않으면 안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데리고 가시는데 자살하면 몰라도 그냥은 목숨을 빼앗아갈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자체가 굉장히 우리 마음 속에 위로가 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늘 잊지 말고 마음에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2.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두 번째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가 쳐들어 왔어요. 원수와 나하고 경계선을 두고서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생각과는 정 다른 생각을 주님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은 진수성찬도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그리고 기름을 부은 것은 우리를 높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기름을 높여 줘서 우리가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겠다. 원수가 우리에게 좋은 일 안해주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원수가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했는데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고난도 이와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고난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무서워서 못한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고난 그 자체보다 더 큰 위험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는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넣어 주어서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알아야 할 것은 저는 이 성경구절이 오늘날까지 굉장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목회를 해오니까 원수가 많잖아요. 같이 믿는 동료들도 시기심으로 미워하고 완전히 우리 신앙과 다른 원수들도 제가 망하기를 원하고 이런 시련을 많이 겪을 때 이 성경구절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원수야 오너라. 진수성찬 하나님이 차려주실 기회를 만드신 것이다.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잔이 넘친다. 그러므로 원수가 오면 손해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보탬이 된다. 진짜 그렇더라고요. 원수 안 오면 밥상도 안 차려요. 원수가 와야 밥상을 차립니다. 하나님이 보통 때는 밥상을 안차려줘도 원수가 오면 밥상을 차려줘요. 그 다음에 기도를 응답해서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높여 주신다. 결국 원수하고 싸움은 하나님이 하시지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말하기를 이 전쟁에서 너희들은 싸울 것이 없고 너희는 가만히 있어 야훼께서 어떻게 너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지는 것 보라. 다윗도 어릴 때 골리앗을 만나서 말하기를 전쟁은 창과 칼과 단창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
우리가 나가서 직접 손에 피 묻히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따라 말씀하세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주께 맡기면 주께서 날 대신 원수를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오면 진수성찬도 온다.
살아가면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한 믿음으로 그 모든 고난을 예수님께 맡기고 감사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주님 감사합니다. 진수성찬을 차리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절대로 기억하고 잊지 마십시오. 고난이 다가오면 고난과 동등 이상 그 축복을 하나님이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사막에 우리를 내던지지 않습니다. 주를 의지하고 주를 따르는 사람은 천사가 되어야 축복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약한 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사람치고 온전한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다 죄인이지. 의인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100%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회개하고 또 일어나고 회개하고 부르짖는 그 신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돌봐 주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원수가 왔을 때 진수성찬 차려주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기 전보다 훨씬 좋아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시편 92편 9절로 10절에 “야훼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굉장히 무섭고 까다롭다고 생각하는데 잘못 생각했습니다. 우리 하나님만큼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은 우주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성급하게 우리를 취급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당하는데 온전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조금만 기뻐하지 말고 온전히 기뻐하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보십시오. 시련 당하는 것이 내가 부족함이 없이 축복 받을 수 있는 인격자가 되는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인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벌써 하나님이 해결의 길을 예비했다고 마음에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요,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미 문제 해결점을 예비해 놓았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않고 시험을 향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기도하고 나가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그것을 기화로 마귀가 달라드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는 과수원을 했는데 과수원을 했기 때문에 사나운 개를 아홉 마리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 우리 집근처에 오는 사람마다 거의 개에게 안물린 적이 없습니다. 개가 짖으면 사람이 달아나거든. 달아나면 따라가서 물어버립니다. 그러나 달아나지 않고 딱 서서 개의 눈을 같이 쳐다보고 있으면 절대로 안물어요. 중간에 와서 빙글빙글 돌다가 말아요. 개도 사람이 두려워하면 얕잡아 봅니다. 그러니 마귀가 우리가 두려워하면 어찌 얕잡아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무서워하고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 기뻐하지 않습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들은 어떤 일을 당해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셋째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주 안에서 반드시 믿고 기대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 같이 신앙생활 한다면 우리가 늘 마음에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될 것은 주의 선하심, 우리 좋게 만들어 주는 주의 손길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굉장한 나의 구원자를 모시고 산다는 것입니다. 나를 좋게 해주는 분을 모시고 산다.
시편 100편 5절에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주님이 계시면 우리에게 이 크나큰 선하심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하심을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마음 속에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으로 계시므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다는 이 믿음을 힘차게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손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붙잡아서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안되더라도 주님이 그렇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우리 하나님을 바라볼 때 긍정적으로 참으로 좋은 하나님이라는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불러서 하나님을 믿게 하신 하나님은 정말로 좋은 하나님이요, 축복의 근원인 훌륭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고난은 왜 당합니까? 지금까지 설명했지만 고난이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얼마나 허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하는데 네가 고난 당해봐라. 네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니 네가 얼마나 허약하나 너 대신 내가 도와줄테니까 나를 믿으라는 허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얼마나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인 것을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인지 체험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깨달아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고난을 통해서 자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체험하므로 하나님이 위대하심을 체험하게 되어서 더 큰 일을 믿을 수 있고 꿈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야훼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므로 야훼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 여기 있지만 며칠 후 며칠 후 저 요단강 건너가 천국 아름다운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21장 1절로 7절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이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나면 하나님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자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서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 파괴적인 생각, 뒤로 물러가는 생각을 가지지 말고 내 어떠한 환경에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내일은 오늘보다 달라지고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달라지고 명연은 금년보다 달라진다고 긍정적으로 기대하십시오. 훌륭한 사람 만나게 될 때 많이 기대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늘 기대를 하십시오. 하루에 열두 번을 기도해도 열두 번을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는 놀라운 우리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