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6일(화)
* 시작 기도
주님...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 사람들이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여 결국 그녀를 죽게 하였습니다(삿 19장).
이에 격분한 레위인은 그 시체를 토막 내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적이 격동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은 공명심이 발동되어 베냐민 지파와 싸움을 하려고 40만이나 되는 군인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실은 그 일을 자행한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이 바로 자기들이었음은 자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내가 바로 그 불량배임을 고백합니다.
내가 바로 그렇게 쪼개어 죽임 당해야 할 자입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비난한 자들이 아님은 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하여 이 시간 나를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에 내어놓습니다.
죄를 먹고 마시는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이 하루도 주님의 품안에서 거하는 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19:29-37
제목 :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29 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3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20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185,000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나의 묵상
남 유다가 앗수르의 2차 침공으로 인하여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지만 거기서 회복될 것을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올해와 내년에는 저절로 자란 곡식을 먹고 내명년에는 경작해서 얻은 열매를 먹을 것이다(29).
이는 앗수르 군대가 물러갔지만 땅이 황폐해지고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은 정상적인 농사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2년 동안은 들에서 저절로 난 곡식을 먹고, 3년이 되어서야 정상적으로 경작이 가능한 땅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땅만 아니라 유다 족속 중에서 남은 자, 즉 사람 또한 회복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는 예루살렘이나 시온산에서부터 살아남은 자가 나와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무엇보다 이 일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것을 천명하신다(30-31).
여기서 남은 자는 일차적으로 남유다 백성을 의미하며 무엇보다도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패역한 세상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주를 떠나지 않는 자를 말한다.
(롬 9:27-29)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남은 자’ 사상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택하심의 은혜에 기초하여 얻는 수혜라고 말한다.
따라서 앗수르의 퇴각으로 인하여 남유다 백성들이 구원을 얻는 것을 뛰어 넘어 죄와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아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오늘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그리고 앗수르 왕에 대하여는 산헤립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대하여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온 길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32-34).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결과는 그날 밤에 나타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 앗수르 군대를 쳤는데 하룻밤에 185,000명이 죽은 것이다.
산헤립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니느웨에 머물고 있을 때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죽이고 도망함으로써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서 왕이 되었다(35-37).
오늘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남은 자’ 사상이다.
이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구원하심에 대한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남은 자’ 사상은 이사야서의 핵심 내용이며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씨를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아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어 영생의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언약적 교제의 존재로 삼으셨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와의 언약이 깨지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이는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요셉과 모세를 통하여 입애굽과 출애굽을 이루신다.
그러나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을 사람들에게만 맡기지 않으신다.
요셉이나 모세와 같이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하시면서 일을 만드시고 사람을 세워서 그 일을 진행하도록 하신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기까지 쉬지 않으시고 활동하시는 ‘하야’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출애굽 구원을 시키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또한 세부적인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것이 바로 시내산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에 계명을 주시고 이를 쉐마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언약에 대하여 쉐마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불의하나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 없으신 분이다.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항상 신실하신 하나님은 불의한 이스라엘을 돌보시기 위하여 시내산 언약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언약으로 갱신하신다.
그것이 바로 모압 언약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온 광야에서도 그 언약이 지켜지지 않았는데 풍요와 쾌락의 신, 즉 바알과 아세라가 있는 가나안에서 지켜지기란 더욱 힘든 일이다.
결국 모압 언약도 폐기 되고 여호수아와 함께 세겜 언약을 체결하지만 400년의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최악의 불순종하는 자들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보내기로 작정하시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새 언약을 약속하신다.
물론 이는 그들을 진멸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시기 위함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고난이 닥치면 그 상황을 극복하고 피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런 일반적인 사고와는 전혀 다르게 말한다.
즉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과정이지만,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잡아 가두고 박해를 서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따른다.
물론 예레미야의 말에 순종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70년 만에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전을 지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새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물줄기가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았던 이스라엘에서 이방으로 바뀌고 만다.
새 언약을 당신의 피로 세우시고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래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 되며 또한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이 되는 것이다.
(눅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나는 언약에 대하여 무지한 자였다.
언약의 물줄기도 알지 못했고, 새 언약 백성의 특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창세전에 아들과 생명을 약속하셨는데 나는 창세전의 세계에 대하여는 더더욱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돌아보면 여전히 그 자리요 혼미하고 흔들리기 일쑤였다.
목회를 하기 이전에는 보란 듯한 사업을 하여 그 사업에 성공해서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이 꿈이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인 줄 알았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항상 지키시고 보호하시니까 하는 일도 잘 되고 가능하면 모두가 부자로 사는 것을 아버지는 원하신다고 생각하였다.
목사가 되고 난 후에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도 부자로 살기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했다.
나 역시 빨리 교회를 부흥시켜서 인정도 받고 싶었고 예배당도 크게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설교를 해도 우리 교회 성도들은 부자로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의 없었다.
교회도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기도회 때마다 달라고 부르짖고 고쳐달라고 떼를 쓰며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부자가 아니라 더욱 가난하게 되고, 고쳐달라는 병은 더욱 악화되어 죽기까지 하였으며, 자식들은 잘 되기보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만 하였고 교회는 부흥이 아니라 정체되었다.
이것이 목회를 하기 이전이나, 한 이후의 나의 솔직한 모습이다.
나는 복음을 전혀 몰랐다.
언약은 배워서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구원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 알았고 이 땅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그 심판 앞에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런 와중에 복음을 듣게 되었고 이 복음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복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이었다.
나는 땅의 것을 구하고, 또한 이를 이루도록 축복하는 것이 복음이었는데 참 복음은 땅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토록 원하시고 또 원하셨던 영생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영생이라는 복음이 우리의 삶과 전혀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이고 들리기도 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창세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알면 알수록 이 복음은 나의 고착화된 지식들을 깨트렸다.
그리고 복음을 통하여 참 생명인 영생을 얻어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영생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실재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매일 영생을 맛보고 누린다.
영생을 살기에 하늘의 기쁨으로 땅의 고통을 넉넉히 삼킨다.
영생을 누리는 삶만이 하늘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오늘도 말씀 묵상을 통하여 영원을 잇대어 살아가는 참 맛을 누린다.
그 은혜가 나뿐 아니라 지금 이곳 베트남의 우리 성도들에게도 임하길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언약도 모르고 영생도 모르던 자가 이런 큰 복을 받았나이다.
아들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창세전부터 일하셨던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를 이 시대의 ‘남은 자’로 세워주시고 새 언약 백성 삼아주신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복음을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여전히 혼미하며 흔들려서 나도 헷갈리고 목양을 받는 성도들도 헷갈렸을 것입니다.
이제 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이 복이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복음을 통하여 성도들이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모두가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자들 되게 하소서.
베트남을 떠나 한국으로 복귀한 가정이나 주의 신실한 자녀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두려워하며 진심으로 경외하는 자녀들 되게 하소서.
복음을 알고 복음으로 영생을 누리는 이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