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가 먹었던 미약의 출처를 알아내었다.
청나라 불법상인들과의 밀거래였다.
도성의 저잣거리 왈패들까지 조금만 주머니를 채워주면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만연해진 것이다.
대복은 잡힌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았으나, 그 죄가 가히 막중하여 결국 목이 잘려나갔다.
흉측하게 잘린 목을 도성문밖에 내걸고 까마귀가 뜯어먹게 했다.
풍월당의 큰 기생 홍이는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며 분노로 몸을 치떨었다.
진범을 잡아주었던 보리일행에게 엎드려 삼천배라도 해야했지만 보리를 다시 볼 순 없었다.
꽤죄죄한 거지꼴로 밥을 빌어먹던 처지라 여겼는데 기방 초야에서 제일가던 미인이 바로 보리였고,
본래 신분은 무려 임금의 왼팔, 좌의정 가문의 여식이 바로 보리였던 것이다.
여인의 몸으로 어사를 자청하며 조선팔도를 이 잡듯 뒤지면서
부패관리와 살인자까지 잡아내었다는 사실이 전국 지방 곳곳까지 퍼지는구나.
어느새 백성들 사이에서는 귀한(貴)신분으로 귀신(鬼)같이 다닌다고 하여
그녀의 이름인 보리를 합쳐 '귀맥'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신분이 드러난 이상 더는 자유로이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집을 떠난지 1년이 훌쩍넘었다가 다시 아비 남택원의 집으로 돌아갔다.
한달여만에 다시 찾은 집은 약간 어수선한 상태였다.
"뭐어? 혜연이가 시집을 가게되었다고?!"
사랑방마님까지 온 가족이 둘러앉은 안방에서 보리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잔뜩 풀죽은 얼굴로 보리의 무릎에 앉아있던 막내아씨 혜연이 입을 삐죽거린다.
느닷없는 큰 소리에 밖에서 엿듣던 하인들이 화들짝 놀랐다.
다시 안방에선 점잖은 아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승지 김영감댁에 장성한 손 하나가 있는데 혼기가 꽉 차서 신붓감을 고르고 있다한다.
너도 잘 아는대로 동승지와 나는 오랜 동무사이라, 젊었을 적 우리는 반드시 사돈의 연을 맺자 했다.
허나 정연이와 너는 이미 나이가 스무해가 넘었다.. 그 집 장자가 벌써 열 여덟이니,
나이차이를 보자면 올해 생일이 지나면 열넷이 되는 혜연이와 짝이 맞아 그리 정한 것이다."
아버님하는 말씀마다 정직하시고 우직하시다. 그만큼 왠간 고집도 있으시다. 보리의 생고집은 바로 아비를 닮았다.
말투를 듣자하니 이 고집, 쉬이 거두지는 않을 듯 하다. 벌써부터 혼례라니 저 어린 아이를..!
게다가 동승지영감의 장자라..?
분명 낯이 익다. 아니, 익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에게 주먹까지 날릴 뻔 한 적이...
연과 함께 처음으로 기방 초야를 찾은 날, 연화에게 시덥잖은 수작을 부리다가...
'내 아비가 누군줄이나 아느냐? 내 아버님께 말씀드려 네 놈 집안 삼대가 멸하게 할 것이다!'
그 철없는 주정뱅이 도련님이 아니었던가?!
아아. 갑자기 없던 두통이 생기는 듯 했다. 그런 난봉꾼에게 하나밖에 없는 귀여운 여동생을 시집보낸다?
귀엽고 어린 아이를 얼마나 못살게 괴롭힐 것이며, 또 얼마나 희롱할 것인가!!!
"아버지!!!!!"
다시한번 커다란 소리에 이번엔 지나가던 한량이 놀라나자빠진다.
제 어미와 감격의 재회를 나누고 있던 갑돌을 억지로 끌고 나와서, 씩씩 거리는 발걸음으로 입궐하였다.
보는 눈들이 많아진지라,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초야에서 기생흉내를 내며 입었던
질질끌리는 옷보다야 훨씬 낫다. 단정히 땋아내린 머리와 다홍색치마가 요란스레 나풀거리며 대전앞으로 향했다.
"오늘은 왠일로 제대로 갖춰입으셨소."
나인의 명을 받고 대전에서 나온 제조상궁 지씨의 첫마디였다.
지씨는 나이가 든 얼굴에서도 은은한 고귀함이 풍기는 인상이었다. 선조를 국모다음으로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분이다.
매사에 여유롭고 현명하시다. 지금의 지존인 연이 어릴적부터 저 이처럼 되어야지 마음속으로 그려오시던 분이었다.
그녀는 지밀상궁 송씨의 상궁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송씨가 유모처럼 편히 전하를 뫼셔왔다면,
지씨는 엄하고 호되게 연을 가르쳤다. 깐깐하고 매섭다고 궁안의 나인들에게는 그저 무서운 존재였지만
속내는 누구보다 따스한 이다.
송씨처럼 보리에게 높임체를 쓰진 않는다.
품계로 따지면 당연한 이치다. 어딜 감히 우의정 좌의정과 같은 품계인 제조상궁마마님과 그 여식을 비교할소냐.
보리는 지씨의 그 고고함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도 다 필요없다.
살짝 핀잔주는 지씨의 말투에 보리가 왠일로 성을 낸다.
"어째서 그런말을 하는거지? 나도 본래는 여자라구."
어머나, 그랬나? 하는 표정으로 제조상궁 지씨가 보리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 보리가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조선 방방곳곳에 엄청나게 각색된 남보리의 이야기가 퍼지고 있거든.
옷이라도 평범하게 입어야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지. 평소처럼 독설과 비방이라면 오히려 당당하게 들어주겠는데..
이건 무슨 호걸이니, 영웅이니 귀맥같은 이상한 소리들을 하니까 도저히 닭살이 돋아서 들어줄 수가 없더라구.
전처럼 입고 다녔다간 금방 둘러쌓여서...으윽 생각만해도..!"
뒤에서 서 있던 갑돌이 애써 고개를 돌린다. 원래 입어야할 옷을 입었건만 갑돌은 그게 싫다.
자꾸만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으로 보이는게 싫다. 그냥 전처럼 거지꼴이 훨씬 잘어울린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여인이라...보리에 꽃이 피는 것 만큼이나 보기 힘들겠소. 전하께오선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았으니 더 기다리시게."
제 할 말만 하고는 휙 돌아서 가버린다. 여전한 분이셔..보리가 피식 웃으며 혀를 내둘렀다.
이윽고 회의가 끝나고 품에 두꺼운 책을 낀 실학자들이 우르르 나온다.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멀뚱멀뚱
그들을 바라보는 보리의 모습에 낮은 신분의 젊은 학자들, 영문을 몰라 저도 모르게 꾸벅 인사까지 한다.
"샌님네들은 내가 누군줄 알고 덜컥 허리굽혀 인사하는거야?"
"...예?"
갑자기 초면에 말을 놓고 기둥에 기대어 팔장을 낀 여자가 말한다. 그야말로 어리둥절. 열명쯤되는 학자들이 주춤거렸다.
"꼬장한 노인네영감들도 아니고, 아직 그렇게 젊은데 벌써부터 굽신거리기 시작하냐는 말이야. 내가 누군줄도 모르면서."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대전앞에 계신 분이라면...당연히 높은 신분의...."
게 중 좀 똘똘해보이는 학자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보리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웃으며 학자들을 지나쳐 대전으로 들어간다.
벙쪄서 서 있는 젊은 학자들을 향해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혼잣말하듯 중얼댔다.
"그저 질 좋은 비단을 궁에 팔러온 장사치였을수도 있잖어?
요즘 것들은 자심감도 없고~패기도 없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보리와 못말린다는 표정으로 갑돌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학자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헛기침만 하면서 서둘러 돌아간다.
"안그래도 내일 일찍 부르려고 했는데, 이 밤에 호걸 귀맥님께서 왠일이지?"
코에 걸치는 동그란 렌즈를 내려놓으며 책을 덮는다. 보리의 차림새에 약간 웃으며 연이 일어났다.
보리는 호걸은 무슨..하며 털석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 옆에 앉으라 연이 말하자 뒤에 서 있던 갑돌도 앉는다.
"부탁이 있어서 왔어!"
밑도끝도 없이 부탁이란다. 보통은 당황해할 법도 한데, 연은 자연스레 받아쳤다.
"말해봐."
"동부승지 영감이 우리 막내 혜연이를 며느리 삼고 싶어해,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그래?"
대수롭지 않게 듣던 연이 잠시 멈칫했다. 동승지의 아들이면 그때 그 철부지도령이렸다? 피식 웃음이 난다.
보령군도 보는 눈 참 없군..
보리는 잔뜩 성난 얼굴과 말투로 마치 고자질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 놈이 보통 망나니가 아니라는 둥,
두 집안 영감끼리 소싯적 말장난이라는 둥, 자기가 혜연이를 어찌 키웠는데 그런 날도적같은 놈에게 줄 수 있겠느냐는 둥.
한참을 듣던 연이 알았다는듯 보리의 말을 자른다.
"그러니까 짐이 나서서 보령군에게 막내여식을 동승지가로 시집보내지 말아라, 하라는거야?"
"바로 그거지!"
"이 나라의 임금을 아-주 유용하게 써먹는군. 그래, 무슨 연유를 대고 그리하지?"
이유? 그러고보니 거기까진 미처 생각치 못했다. 그래 맞다. 임금이라도 그저 강요할 수는 없다.
아무리 신하라도 그 집안 사정에 일일이 감놔라, 대추놔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잠자코 앉아있던 갑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전하의 비로 삼겠다 하시면 연유가 됩니다."
첫댓글 이야기가 더욱더 흥미진진해 지는 것 같은데요?? ㅎㅎ 작가님 파이팅!!
재밌어요 ! 계속 기다리구있어요 작가님 힘내세요 ㅎㅎ
헉....무슨 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