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원의 문이 열려있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동화사를 찾은 회수를 따진다면 ’수도 없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동화사의 창건설화에서 심지대사가 법주사에서 법상종의 불간자를 받아 팔공산으로 오니 팔공산 산신령이 영접했다. 심지대사는 산신령과 팔공산 산마루에 올라 간자를 던져서, 떨어진 곳에 동화사를 지었다고 하였다. 산신령, 산의 지리적 조건 등을 따져보면 불간자를 던진 산마루는 동봉이고, 불간자가 떨어진 자리는 지금의 금당원 자리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 부부가 동화사라고 찾아가는 곳은 금당원이 아니고, 대웅전이 있는 절집을 찾아간다.
고려사 세가 정종 2년 조에 의하면 계단에서 불교 경전과 계율에 관한 시험을 보았다고 했다. 따져보면 계단이 있는 자리는 바로 금당원의 극락전이라고 했다. 동봉과 일직선상에 있다. 금당원 뒤편에 있는 전각이 수마(극락)제전이다. 그래서 수마제전 자리에 불간자가 떨어졌다고 해석한다. 금강원에는 신라시대의 건축물 기대(基臺)가 그대로 남아있다. 쌍탑의 건립 년대도 비로암의 석탑과 년대가 비슷하다. 이런 자료들이 이곳이 동화사의 본래 자리라고 한다.
나는 대구의 문화답사 모임에서 답사를 다녔으므로 이런 사실들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도 금당원을 일부러 찾아 가 본 일은 없었다. 금당원의 문은 의례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참선 수행하는 곳이라서(그래서 금강원이라고도 하였다.) 일반 대중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예전에는 사립문이었다. 사립문은 닫혀 있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금지서만 붙어 있었다. 그래서 돌아서곤 했다.
오늘은 금강원을 찾으러 동화사에 들리지 않았다. 대구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 동화사이고, 갓바위 부처님이다. 집사람과 빵 두쪽과 물병을 하나 들고 동화사를 찾았다. 하지도 지났고, 하루, 이틀만 더 지나면 7월이다. 대구의 날씨는 무덥다. 동화사에 들어서니 산고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배운 노래 가락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 실감이 난다.
불이문에 해당하는 봉서루 앞에 서서, 집사람 더러 ’왜 봉서루라 했는지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모른다고 했다. 봉황은 오동나무 열매를 먹고 살므로 오동나무 절인 이곳에 봉황이 찾아와서 머문다는 뜻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불교와 봉황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가 모호하다. 인도 고대 신화에 ’바루나‘라는 우주 새가 있긴 하지만 봉황과는 연결이 안 된다.
오늘도 버스를 탔다. 예전에 팔공산 산행을 다닐 때는 으레 버스를 탔다. 노년으로 접어 던 후로는 지하철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 거의 없다. 버스를 탄 일도 10여 년 전으로 느껴진다. 집사람과 동화사를 찾기로 정한 후에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며, 버스비는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지를 서로 묻고 웃었다.
대경교통카드가 지금도 통할까? 안 된다면 현금으로 지불하지 뭐. 그래서 천 원짜리와 백원짜리 동전도 준비했다. 대경카드를 꺼내보니 내가 걱정했던 것은 모두가 기우였다. 카드를 대자 핑인지, 찍인지 하여간에 소리를 내고는 결제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토속신앙에 관심이 많았다. 불교의 기록에는 토속신은 모두 나쁘게 나온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의 유명 사찰은 거의가 토속신앙지에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동화사도 틀림없이 토속신앙 터였으리라고 믿는다. 불교가 절을 지을 자리로 내어놓으라고 했을 때 ’예 예‘ 하면서 자기의 성지를 내어놓았을까. 그러나 동화사의 창건설화에 산신령은 심지대사를 반가이 영접했단다. 저항한 흔적은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심지대사가 동화사를 창건했을 때는 신라말로서, 토속신앙의 힘이 아주 미약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동화사의 창건 이야기에 오동나무는 왜 나올까. 나는 이것이 토속신앙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동나무는 불교와의 인연보다는 우리의 민속에 가깝다. 우리 민속에 오동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통로이며, 또 여성의 상징으로 여긴다. 벽오동 심은 뜻은 님(봉항)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팔공산 산신령은 여신이었고, 오동나무는 여신을 숭배한 흔적이 아닐까. 어쨌거나 동화사는 봉황이 깃들었던 곳이었다.
동화사에서 봉서루 앞에 서서 집사람더러 여기는 본래의 절터가 아니다 라고 하니 그럼 어딘데 한다. 금당원을 가르키면 저 곳이라 하니, 초여름의 무성한 나뭇잎 때문에 절집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집 사람은 자꾸 그곳에 가보자고 한다. 예전에 금당원을 찾아가면 문이 항상 닫혀 있었다. 지금 금당원에 가도 담 너머로 절집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좋다면서, 자기는 처음 알았으니 가보자고 한다.
금당원의 문은 열려 있었다. 아니, 아예 문짝이 없었다. 절집 안으로 들어서니 너무 조용하다. 이, 삼십 분을 머물면서, 스님 한 분도, 방문자 한 분도 만나보지 못했다. 극락전과 쌍탑, 그리고 수마제전까지 둘러 본 집 사람은 금당원을 찾아오기를 잘 했다고 한다.
나는 탑이며, 극락전의 기대(축담)가 신라 때의 것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집사람은 내 설명보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절을 하기가 바쁘다. 나는 스마트 폰으로 카카오 톡에 실을 사진촬영을 했다. 폰으로 찍은 사진이 왠만한 사진기로 찍은 사진보다 더 선명하다.
사진에 담긴 금강원의 영상들은 극락세계와 관계있는 것들 뿐이다. 창건설화대로라면 법상종에서 모시는 미륵부처님이 있어야 하는건데, 미륵불의 자취는 찾을 수가 없다. 어인 일인가?
절 마당 저쪽의 빨랫줄에는 스님들의 빨래 옷이 바람따라 흔들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