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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고종(高宗) 32년 을미년(1895) 8월에 국가에 변란이 일어나 왕후께서 시해를 당하셨고, 11월에 조정에서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으므로 전국이 흉흉하였다. 나는 이때 서울에 있었는데, 변란 소식을 듣고는 바로 일어나 밤을 틈타서 성을 넘어 달아났다. 이천(利川)에 도착해서 서명심(徐明心)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곳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연안인(延安人) 이덕승(李悳升)을 만나 상의하게 되었는데, 내가 수심에 잠겨서 탄식하기를, 오늘의 화변(禍變)은 역사가 있은 이래 한 번도 없었던 것일세. 내가 의병을 일으켜 복수를 할 생각이지만 적절한 방법이 없으니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이덕승이 말하기를, 전국이 놀라 들끓고 있는 마당이니 의병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화를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 생각이 이미 정해졌으니 자네는 잘 주선하여 뜻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그리하여 함께 큰 일을 이루어 우리 종묘 사직을 영원히 보존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하네. 우리 나라에 오랑캐 종자가 뿌리를 내리게 해서는 안 되네 하니, 이덕승이 말하기를, 심상희(沈相喜)가 여주(驪州)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리로 사람을 보내어 기회를 보아 일어나고 형세를 보아 도모해야 합니다. 저들은 여주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우리는 이천에서 군대를 일으켜,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진격을 할 경우에는 함께 공격하고 후퇴할 경우에는 함께 수비를 한다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심상희(沈相禧)와 가까운 이겸승(李兼升)을 뽑아 보냈다. |
이날 이덕승과 함께 양지(陽智)·안성(安城)·죽산(竹山)·광주(廣州) 등 고을을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함께 의논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기를, |
하늘이 나를 돕지 않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오랑캐가 되고 말려는가 보다 하니, 이덕승이 말하기를, 모든 성의를 다해서 하다 보면 종국에는 뜻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니 공은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온 세상이 모두 오랑캐요 짐승인 마당에 우리 나라만이 지금껏 의관(衣冠)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데, 어찌 완전히 멸망시킬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
어언간에 동짓달이 지나가고 섣달 초순이 되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다시 이천으로 가서 강재능(姜在能)을 찾아가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서명심(徐明心)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본군(本郡) 적고현(赤高峴)에 전주석(全周錫)의 수하(手下)에 있는 포병 50, 60 명이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을 이용하여 일을 성사시켜 볼 만합니다 하기에, 해볼 만 하겠다고 하고는 이날 밤에 이덕승과 함께 전 지사(全知事)를 방문하였는데, 오경(五更)이 되어서야 만나볼 수 있었다. |
현재 나랏일이 매우 위급한 상황이므로 하늘을 향해 서서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자 쳐놓고 저 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어떻게 앉아서 구경만 하며 태연하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뜻을 좀 알고 싶네 하였더니, 지사가 말하기를,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앉아도 자리가 편안하지 않고 먹어도 음식 맛을 모르는 채로 오늘까지 지내왔습니다. 지금 공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기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충청도에 의병들이 매우 많다고 들었네. 여주(驪州)의 심상희(沈相禧)도 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군대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하네. 내가 그곳의 형편을 분명히 알고 있어서 호응하여 일을 해볼 만 하니, 자네는 나를 따라 속히 일어나도록 하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네의 목을 베겠네 하였더니, 지사가 말하기를, 저는 본래 출신이 한미하기 때문에 앞장서서 창의(倡義)할 수가 없으니 공께서 먼저 일어나십시오. 저는 뒤에서 호응하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되네. 나는 죽산(竹山)으로 들어가서 거사할 터이니 자네는 여기에서 얼마간의 병사를 보내주게 하였다. |
섣달 12일에 먼저 배감시(倍甘市)에 도착하여 병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을 틈타서 전씨(全氏)가 보낸 방경옥(方敬玉)이 포병(砲兵) 7명을 거느리고 우리에게로 왔다. 이날 밤 촌락에 숨어 있다 보니 사방의 의사(義士)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
이튿날 아침에 내가 맹세하고 명을 내리기를, 군대에서는 사사로움이 없는 법이니 모든 일을 군율에 따라서 할 것이다. 명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어기는 자는 가차없이 처벌할 것이다. 각자 정신을 차려 염두에 두도록 하라 하고는, 방경옥(敬玉) 등을 불러 동쪽 어귀로 나가 경비하게 하고, 이덕승은 서쪽 어귀를, 박제익(朴濟益)은 남쪽 어귀를 지키게 하였다. 각 방면의 길이 험준하여 통과할 수 없었으므로 북쪽으로 난 갈랫길로 시중(市中)으로 들어가서는 은밀하게 계책을 세워 명령을 퍼뜨리기를, 대진(大陣)이 오늘 내일 사이에 도착할 것인데, 우리는 전도(前導)로서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먼저 온 것이니, 너희들은 놀라거나 동요하지 말라 하고 전령(傳令)하였다. 그래서 민군(民軍) 3백여 명을 얻었다. |
하루 이틀을 지내는 사이에 운량장(運糧將) 박제우(朴濟禹)가 사사로이 군량미를 감추는 사건이 발생하자 군대의 분위기가 흉흉해져서 오합지졸이 대오를 이루지 못했다. 나는 처음 의병의 기치를 세운 마당에 재물을 사사로이 차지하려 들고 제 일신이나 생각하려 들다니,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병사들을 해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에 정예병인 기병 몇 명을 뽑아서 즉시 출발하였다. 이천에 도착하여 강재능의 집에 머물면서 전주석을 만나보고 사과하기를, 일을 제대로 도모하지 못하여 끝내 낭패를 보고 말았으니, 자네가 나를 위해 계책을 내어주게나 하자, 주석이 말하기를, 광주(廣州) 고응선(高應善) 수하의 포병이 현재 50, 60명인데 춘천(春川)으로 향하려 한다고 합니다. 그들을 불러들일 수 있다면 세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그렇겠다고 하고는, 밤에 그의 집에 도착하여 의리를 끌어대어 설득하기를, 이같은 변란을 당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으니 의병들이 일어난 것은 모두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것이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섰다가 이 지경으로 곤궁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는지 . 모든 신하와 백성이 된 자가 수수방관하며 마치 남의 나라 일을 구경하듯이 해야 되겠는가,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그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겠는가? 하자, 고응선이 말하기를, 일로 보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은 귀하고 저는 천하니 뜻과 기상이 맞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귀하고 천한 것이 의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에 유 황숙(劉皇叔 - 유비(劉備))은 관우(關羽)·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어서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니 그 당시에 귀천이 어디 있었는가.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오늘 마땅히 유비·관우·장비가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고사(故事)를 본따서 사생(死生)을 함께 하도록 해야겠네 하고는, 하늘에 맹서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고응선이 말하기를, 의병들은 힘이 약하고 적의 세력은 한창 강성하니 일이 매우 위급합니다. 형께서는 계획을 잘 세우십시오. 저도 병사들을 수합하겠습니다 하기에, 그날 밤으로 즉시 전씨 집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고 있자니 고응선 등이 밤에 포병 50명을 거느리고서 왔고, 방경옥도 포병 40명을 거느리고 도착하였다. 이에 군대가 조금 위세를 떨칠 수 있게 되었다. 고응선이 말하기를, 무기는 제법 모였지만 탄약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요?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여주로 가서 심 아무개를 만나보아야 하겠네 하고는 종사(從士) 몇 명과 함께 즉시 심상희(沈相禧)의 진영으로 달려들어가서 많은 양의 탄약을 요구하였다. |
저물녘에 이천읍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밤은 깊고 사람은 주리고 말은 지쳐서 계속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언덕 위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마침 왜병 5, 6명과 마주쳤다. 한참 동안 서로 욕을 하다가 꾀를 써서 벗어나서는 남쪽으로 도주하여 강씨 집으로 들어오니 5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덕승이 진영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군졸 중에 김 아무개는 본디 서울 사람이니 그 마음을 알 수 없다고 떠들어대는 자가 있자 서로들 의아해하며 각자 해산하기를 고집하는데, 만류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도 광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주공께서 오셨으니 잘 생각해서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군졸들 중에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는 것도 그럴 법한 일이다 하고서 이덕승 등에게 화약을 지급해 주고서 위로하고 달래 보라고 하였으나, 군졸 중에 배반하고 흩어진 자들이 태반이었으므로 그 즉시 대포를 쏘아대며 추격하였다. |
얼마 뒤에 날이 밝았는데 적 50명이 습격해 왔다. 우리 군사는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 남은 병졸들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적병이 사방으로 둘러싸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석양 무렵이 되었다. 배회하고 있는 사이에 어떤 노인 하나가 산골짜기에서 내려와서 말하기를, 지금 이천(利川) 의병이 여주에 머물고 있다고 하니 공은 그리로 가도록 하시오 하였다. 내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노인은 무척 신통하고 이상하다 하고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 부분의 열두 글자는 해독이 불가함.) 그 의심을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고응선(高應善) 등이 모두 환영하였다. |
이날 병사들에게 맹서하고 단(壇)에 올라가서 고응선(高應善)을 중군(中軍)으로, 이덕승을 운량장(運粮將)으로 삼았는데, 이날은 바로 을미년(1895년) 12월 25일이었다. |
한밤중에 왜병 3백 명이 우리 군대를 공격해 왔다. 새벽에 심상희(沈相禧) 진영과 함께 동쪽과 서쪽으로 협공하여 적병 2백 명의 머리를 베고 적 2명을 사로잡고는 40리를 추격하다가 돌아와서 여주읍(驪州邑)에 머물렀다. |
심상희(沈相喜)와 이천읍의 적을 치기로 약속하고 날짜를 정했으나 심상희의 진영에서 약속 날짜를 어기고 오지 않았다. 행군하다가 덕치현(德峙峴) - 이천읍의 뒤에 있음. - 에 이르렀을 때 혼자서 적과 마주쳤는데, 동리에 사는 김귀성(金龜性)이 탄약을 공급하고 싸움을 도와서 적 1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 왜병이 불을 지른데다가 눈까지 내리는 바람에 적을 당해내지 못하여 우리 군사가 싸움에 지고 말았다. 이날은 바로 섣달 그믐날이었다. |
병신년(1896년) 정월 3일에 흩어졌던 병졸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양지읍(陽智邑)에 이르렀다가 용인(龍仁)으로 진영을 옮겼다. 금양시(金陽市)에 들어가 병사들을 불러 모았는데, 여기에서 유영순(柳永淳)의 군사 5백여 명을 얻었다. 유영순을 후장군(後將軍)으로, 김귀성을 좌익장(左翼將)으로 삼아 무기를 수합하였는데, 지나는 고을에서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섰다. 행군하여 안성에 이르렀을 때는 병졸이 3천, 참모가 수백 명이 되는 등 군대가 비로소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그 군사로 아산(牙山) 둔포(屯浦)의 적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쌀 3천 섬을 빼앗아서 안성(安城)으로 수송하였다. |
광주(廣州)의 의병장 심진원(沈鎭元)이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격문을 보내오기를, 이달 10일에 산성으로 들어와서 주둔하고 있는데,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이 병사 8백 명을 거느리고서 몇 겹으로 포위하고 있다. 지역은 더할 수 없는 요해처인데 병사의 수가 많지 않으므로 성이 함락될까 염려스러운 상황이다 하면서 하루에 세 차례나 급한 상황을 알려왔다. 이에 친히 정예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서 즉시 포위를 뚫고 진격하여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 물리치고는 성으로 들어갔다. 이날의 전투에서 운량장 이덕승이 전사하고 병졸 수십 명이 죽었으며, 나도 여러 군데에 탄환을 맞았다. 이날은 정월 15일이었다. 이에 병사들을 정돈하고는 말하기를, 아, 이덕승이 죽다니! 강개하고 지혜로운 자였는데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먼저 죽었구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들 죽지 않겠는가마는 이덕승은 참으로 가치있게 죽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
심진원이 성에 들어온 이후로 음란하고 포학하고 무도한 행위를 일삼는가 하면 날마다 기생들과 술을 마시며 패만스럽게 행동하였으며, 백성들의 재물을 거두어들여 제 배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군인들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병사들은 사나워지고 백성들은 배반하여 안팎으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
성을 지키는 군사 수백 명을 급히 불러 음식물을 나누어 주며 위로하니 사졸들이 모두 다 크게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밤낮으로 적과 대치하여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이 봉화가 서로 이어졌으며, 밤에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낮에는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
지역은 요해처이고 책임은 막중한데 그 중요한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는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의논하기를, 나는 장수의 재목이 못 되는 사람이므로 큰 일을 그르칠까 염려스럽다. 그러니 제군들은 대중의 뜻에 따라 인재를 뽑아서 나를 대신해서 군대를 다스리게 하라 하였더니, 구연영(具然英)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장군께서 이렇게 큰 일을 당하여 비록 겸양을 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병사들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고 있는 마당에 별안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겸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의 마음에 부응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사람들의 바램을 만족시켜줄 수가 있겠는가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내가 누누이 의논을 하고는 이러한 뜻을 심진원의 진영에 알렸더니, 그곳에서 박주영(朴周英)이라는 자를 보내왔다. 군영에 도착했길래 그와 이야기를 해보았더니 수작이 영민하고 빈틈이 없으며 고금을 두루 꿰뚫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믿을 만하다고 말하기에 그를 추대하여 대장군으로 삼고, 나는 선봉장이 되어 군중(軍中)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그에게 물어서 결정하였다. 구연영을 중군(中軍)으로 삼았다. |
하루는 장기렴(張基濂)이 비밀리에 박주영에게 글을 보내기를, 만약 의병을 쳐부수고 우리에게 귀순한다면 광주군수(廣州郡守) 자리를 주겠다 하고, 좌익장 김귀성에게도 그런 내용의 글을 보내었다. 박주영이 그 말을 그럴 듯하게 여겨 병사들을 이끌고 달아나려던 차에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박주영을 묶어서 심진원의 진영으로 보내어 목을 베게 하였다. 그러자 김귀성이 크게 겁을 먹고는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달아나서 성안이 온통 소란스러웠다. 내가 다시 군중(軍衆)을 정돈하니, 군중이 말하기를, 군대에는 하루라도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면서 다시 나를 장수로 추대하였다. 나는 사졸들을 배불리 먹이고는 성을 순시하였다. 이렇게 몇 달 동안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사이에 적의 형세가 더욱 강성해졌지만 우리 병사들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
김귀성이 장기렴을 만나서 의병의 허실(虛實)에 대하여 갖추어 말하고는 그가 온 뜻을 말하였으나 장기렴은 믿지 않았다. 김귀성이 삭발을 하면서까지 다짐을 하자 장기렴이 그제서야 믿고 계책을 세웠다. |
처음에 성에 들어가 순시를 할 때에 못 북쪽의 장대(將臺) 부근의 성가퀴가 파괴되어 있기에 잘 지키라고 주의를 주었었는데, 적은 그때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김귀성이 우리를 배반하고 장기렴에게 들어간 후에 얼마간의 병사를 얻어가지고 앞장서서 인도하여 성의 허물어진 곳을 통하여 우리 군대를 습격해왔다. 적병이 일제히 그곳으로 올라와서 양 진영이 서로 공격하였는데,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어서 방향을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3경부터 새벽까지 교전하는 불빛이 끊어지지 않아 시체가 쌓이고 피가 땅에 흥건하게 고였다. 우리 쪽에서 전사한 병사와 말이 5백 가량이었고, 적병은 3백여 명이 죽었다. |
이에 포위를 뚫고 동쪽으로 나와 싸우면서 행군하였다. 처음 성을 나올 때에 따르는 병사가 4백여 명이던 것이 분원역(粉院驛)에 이르렀을 때는 겨우 8십여 명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고응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천시(天時)가 지형(地形)의 이로움만 못하고 지형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나 하고는 갑자기 기침을 몇 번 하고 피를 토하며 기절하여 땅에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부축해서 간호한 지 반 식경만에 호흡이 비로소 통하였다. |
이때부터 절대로 교전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었다. 고응선을 보고 말하기를,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제천(堤川)의 대장 의암 유인석 군대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하니, 그리로 가서 의지하여 뒷일을 도모해야겠네. 그랬다가 만약 뜻이 맞지 않으면 그대로 영남으로 가야겠네 하고는 출발하였다. 양근(楊根)으로부터 지평(砥平)·여주·원주를 거쳐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는 걸어서 수십 일만에 제천 경계에 도착했다. 읍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군사들을 정지시키고 장군에게 명을 전하였는데, 제천 진영 내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서야 의암 유인석이 특명을 내려 받아들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8백 명의 군사를 나눠주어 원주 수성장(原州守城將)으로 삼는 바이니 잘 해보도록 하라 하였으나, 나는 처음 들어갔을 때에 여러 사람들이 논의하는 중에 헐뜯으며 배척하는 자가 있었던 것 때문에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사실대로 그 이유를 말하고 영남으로 떠나려 하였는데, 의암 유인석이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부득이하여 소토장(召討將) 경암(敬庵) 서상렬(徐相烈)에게 먼저 통보하였다. |
4월에 내가 단양에서 죽령(竹嶺)을 넘어 예천읍(醴泉邑)에 이르자 소토장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친히 맞아주었다. 매우 너그럽고 두텁게 대해주고 자상하게 깨우쳐 주었는데, 의리를 끌어대는 것이 매우 정밀하고 절실하였으므로 그 말에 감동하고 그 마음을 인정하여 군사를 합치고 세력을 합하였다. |
적을 만나 패배함에 미쳐서 군대를 단양으로 돌렸는데, 이때 장기렴(張基濂)이 남한산성으로부터 승승장구하여 대진(大陣)과 며칠을 대치하던 중 우리 군대가 패하였기 때문에 의암 유인석도 단양으로 합류하였다. 다시 풍기(豊基)로 갔으나 또 패하여 경성으로 향하였다. 영춘(永春)을 출발하여 음성(陰城)에 이르렀을 때 또 적을 만나는 바람에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군대를 원주로 돌렸다가 정선(旌善)에 이르러서 10일 동안 머물렀다.
의암 유인석이 상소하여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진달하여 화이(華夷)의 큰 한계를 밝혔으나 비답(批答)을 내려주지 않았다. 이에 다시 의리에 입각하여 압록강을 건너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하고는 경암 서상렬을 도로장(道路將)으로, 나를 선봉장으로 삼았다. 행군해 가다가 6월에 낭천읍(狼川邑)에 이르러서 또 적을 만났다. 대진(大陣)과 길이 어긋나 구원의 손길이 비치지 않자, 전군(前軍) 엄기섭(嚴基燮)이 적이 다가왔다는 말을 듣고는 3백 명의 군인을 데리고 밤을 이용해 달아났다. 여러 군사들도 적병에게 겁을 먹고 달아나 흩어진 자가 태반이었으므로 겨우 휘하에 2백 50여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와 경암 서상렬이 닭이 울 무렵부터 사시(巳時)가 될 때까지 힘을 다해 싸웠으나, 병사들이 먹지 못하고 길이 막혀 통하지 않는 바람에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낭천이 적에게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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