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문제점(총신대원 김지찬교수)
출처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052436
1. 오직 은혜로만 (Sola Gratia)의 지나친 강조
오늘날 한국 교회는 기독교를 지나치게 "구원의 종교" 로만 보고 있다. 물론 폭넓은 의미에서의 구원, 즉 현재적인 삶에서
구원을 이야기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매우 좁게, 그리고 지나치게 내세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 믿고 천당" 이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천당 간다는 단순 논리가
교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본 회퍼가 "과연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독일 루터파 교회의 모습이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과
유사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1937 년에 쓴 "제자도의 댓가" (The Cost of Descipleship) 란 책에서
"값싼 은혜"를 판다는 이유로 일부 교회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교회가 진정으로 죄의 용서를 갈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죄의
사유를 선포하고, 진정한 권징과 징계가 없는 세례를 베풀며, 참된 고백이 없는 성찬을 베풀고 제자로서 마땅히 치루어야할 댓가를
언급하지 않는 은혜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없는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고 본 회퍼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본 회퍼는 이렇게 값싼 은혜를 파는 루터파 교회를 비난한 후에, 구약을 무시한데서 한 원인을 찾고 있다. 신약이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실제 삶에서 구원의 모습이 드러나게 살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
만큼 구석구석에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 회퍼는 구약을 무시하고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임을
강조하고 있는 신약을 강조한 결과 이런 모습이 연출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이같은 본 회퍼의 지적을 전적으로 다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진리의 일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특별히 구약의 지혜문학의 경시는 값싼
은혜만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내세적 종교인들을 양산해내기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구약의 지혜 문학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2. 오직 믿음으로만 (Sola Fidei) 의 지나친 강조
한국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구호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바울-어거스틴-칼빈으로 이어지는 개혁교회의 전통에서는 전적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선택할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가르친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선택하는 것마다 죽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물론 이것은 옳은 일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점만은 포기해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중생한 후에도 인간의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며,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다. 물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책임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속으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해질 수 있으며, 또
온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는 점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인간이 빠져 있었던 덫만을
이야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중생한 후에도 계속 인간의 절망과 좌절만을 이야기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우리는 어차피 인간이 아닌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니까?" 라는 말을
쉽게 교회 안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에 연유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덫에서 구원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구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리를
통해 모든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이 마치 목적인양 생각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입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요,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시켜 천당으로 데려가는 것이 목적인가? 그렇다면 왜 구원한 즉시
천당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고 살도록 우리를 덫에서 구원해 내신
것이다. 따라서 덫에서 구원을 받았으면, 그 구원에 합당한 모습을 실제 삶 가운데서 드러내야지, 자꾸 덫 이야기만 하면서 죄를
저질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 교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는 이신칭의의 가르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것도
그리스도인은 실제로는 의인이 아니지만 법정적으로 의인으로 선언하셨다는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주장하였다. 이러다 보니까 인간은
결코 의로와질 수 없다는 인간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 견해만을 양산하였고,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중 갖게 한 것이 사실이다.
3. 게토화되는 한국 교회
그러다 보니 현대 한국 교회는 점차 "게토화" 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모습을 찬란히 드러내지 못한채
초췌하고 초라한 모습의 삶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경제적으로 초췌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초라한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정신적으로 당당하게 삶으로서
비그리스도인들 앞에서 떳떳한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사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맞서 담대하게 맞서 싸우기 보다는 기드온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산에다 굴이나 파고 동굴에 갇혀서 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기들끼리는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바가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값싼 은혜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의 수가 늘어가는 한국 교회의 모습은 게토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
21 세기 목회자 후보생들은 이런 게토화 현상을 직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업이 한국 교회 앞에 놓여있음을 깊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한국 교회의 게토화 현상의 악화는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게토화 현상의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지나치게 구속과 이신칭의를 강조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런 불균형을 원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경 안에서 이런 불균형을 자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면 바로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 안에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 안에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신앙의 사람 (persons of faith) 이면서 동시에 문화 속의 사람 (persons in culture)
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신앙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점을 잘
밝혀주고 있는 것이 성경의 지혜문학이다. 우리는 지혜 문학의 목소리를 통해서 한국 교회의 영적 게토화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지혜문학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 지혜문학을 경시하게 된 배경을 먼저 살피면서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자.
첫댓글 아니.... 이렇게 잘 아는사람이.... 답답하구만 머리 따로 입따로 행동 따로 뭐 이런건가?
신앙 양심에 따른 행동이 없으니 꽹과리 소리일 뿐이지요!
아멘. 몽자님께서...방금 제가 하려든 말을 하셨군요. 평소에 소박한 행복과 기쁨을 아는 사람 같이 보이고 그러면서도 늘 아내이야기를 예화로 들며 빼놓지않고, 적당히 유머와 위트가 있어도 보이고 해서...믿었었지요. 그런데...그도, 아니더라구요. 그러구선 회자가 되는 그날 그자리에서 또...ㅅㄹㅇ교회가 연착륙하기를 바란다는 한말씀을 했다고 합디다.
(늘 설교에 등장해서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했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녀였더라면...확실한 내조를 했을터인데.)
본문내용 같은 것도 모두 말을 위한 말이요, 글을 위한 글이요, 공허한 이야기들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들리고 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심장과 그분이 우리에게 간절히 초대하고 싶은 하늘나라가...출애굽한 난민들과 그후손들이야기 그리고 어부들과 그무리들 붙들고 엮어간 이야기입니다. 그냥 그대로 읽다보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약간의 상상력까지 시믈레이션으로 가동되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심정을 알게되고...그러면 그로써 끝인데...뭐가 은혜니 죄니...머리로 수학문제 풀듯하려고 하시고 그걸 알아서 공식에 맞추어서 사시려나...미꾸라지처럼 어찌하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것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여기와서는 이 말, 저기 가서는 저 말 해대는 양심에 화인 맞은 신학자들...!
그들은 과연 신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결국 그들도 <우리가 남이가?> 인가?
저런 신학교 교수들에게 배운 합동 목사 후보생들....
기대됩니다...미래의 한국교회가...
옛날 바리새인들과 똑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하는 말은 다 지키되, 그들처럼 살지는 말아라 했을까요?
삼천만의 ㄸ ㄱ 는 짖어도 당신은 그입 다물라
삶으로 실천되지 않는 말들은 공허하죠...
말 따라 행동 따로인 목사님은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공허한 메아리로 들립니다 교수님,
진정한 은혜의 깊이는 모르고 하는 말인것 같습니다.하나님의 은헤를 아는자는 결코 대충살지 못합니다.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 갑니다
김지찬 교수님! 다음번에 무슨 제목으로 설교하시려구요? 언행이 평행선을 걸으시군요
교수님의 논리정연한 설교 좋아했는데 이렇게 다른 모습이었다니 실망입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교계에 이런 분이 너무 많아...
참 ....누굴 위한 설교를 하신 것일까? 청취들을.........살피지 않는 설교가는 웅변가이지 그것이 설교가인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에 해당되지 않기를 바란다
교수 월급 보다 우리교회에서 외부 강사료로 받아간 사례비가 더 많을 듯
근데 위로 모임에 왜 참석했는지? 짭짤한 강사료에 대한 감사 표시인가? 강단에 더 이상 세우지 말아야 할 사람입니다
O가 떠나지 않는 동안은 지난 6개월 동안과 다르지 않겠지요. 우리는 지속적으로 불량식품만을 먹기를 강요 받겠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왜 ㅇㄷㅇ목사님이나 ㅅㅌㄱ목사님, ㄱㅈㅊ교수님이 확실히 본인의 의사를 모든사람앞에 표현을 하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더 o 목사님이 더욱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않겠느냐? 하며 속상해 하셨어요. 저는 홍정길목사님 손봉호교수님은 그 그릇만큼 존경을 받듯이 이 분들도 그릇이 이 정도일 뿐이라고요. 저 같은 평신도도 믿음의 문제에서 우선순위에 처할 때 항상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주님편에 서고 싶지 않을때 그동안 말씀과 삶 속에서 확실하게 가르쳐주신 옥목사님의 모습이 떠오르며 좀 무섭기까지 느껴졌어요. 살아계신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고 판단할 수 있게 가르쳐 주셨죠.
우리들도 우리그릇만큼 세상 속에서 주님을 알다가 천국에 가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동안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면 그저 감사한 것이고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지요. 단지 주님께서 나를 이제까지 사용하여 주셨다는 '믿음의 자긍심'은 스스로에게 있지요. 생김새가 다르듯이 각자 주신 본분대로 최선이든 차선이든 믿음생활하다가 천국에 이르는 것이라고 보아요. 저는 옥목사님을 바라보니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좀 신앙생활이 힘든 시절도 있었지요. 율법주의에 빠진 것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은 깨달았어요. 제 그릇은 이만큼이라고요. 이 모습 이대로 항상 주님은 저를 사랑하고 계신다구요.
한국 교회 뿐 아니라 신학교 교수도 문제 투성이라는 것을 김교수 본인이 웅변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교수는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면 곤란하지요.
이제 이런글 올리지 마시죠. 낯 간지런 소리로 들리고 신뢰감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냥 소신껏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사세요. 요즘 교회도 왜 이다지 이중성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많은지요. 도데체 신뢰할 수가 없으니 이러다 의심병이 생기겠어요.
누군가가 여기 있는 댓글 보내드리면 어떨까요? 그런 교수님 밑에서 수학하는 신학생들
우리나라 교회의 앞날이 정말 걱정입니다. 그래서 신학교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친절한 금자씨던가요? 이영애의 영화 속 대사가 생각납니다.
ㄴ ㄴ ㅈ ㅎ ㅅ ㅇ
에라이~~~~
저는 위로예배 모임에 참석하셨다고 해서 ㅇㅈㅎ목사님을 동조한다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우리교회 설교하러 오신 분들이 모두 담임목사님을 동조하시는 분들이라고도 생각하지않습니다. 우리교회의 성도들을 더 사랑해서서 오신분이 분명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감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텐데...그렇다면 그분들은 아마도 그 사랑일랑은 가슴 깊이 묻어두고서, 하나님께 골방에서 간구와 금식으로만 지내시나 봅니다. 그러다가도 부르는 곳은 어디든 마다 않으시고 6개월간 강대상에서도, 위로여배 모임에도 부지런히 다니시지만...(횡설수설 우왕좌왕) 하시면서 성도들의 비명은 못 들은 척,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어쩌면 하나같이 모두가 똑 부러지게 그렇게 잘 하시던 말은 극도로 아끼면서...다같이 (묵언수행) 들어 가셨을까요.
"사랑은 벙어리도 말하게 하고 바보천치도 행동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