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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아리랑’의 귀향
김영수
육중한 랜딩기어가 몸통 밖으로 빠져나가는 소리가 나더니, 비행기는 어느새 김포공항 활주로에 미끄러지듯 착륙을 했다. 1등 석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무릎에 하얀 무명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싼 유골함을 꼭 잡았다. 32년 만에 침묵의 귀향인 것이다. 비행기 안 스피커에서는 착륙하면 내보내 달라고 내가 승무원에게 특별히 부탁한 ‘밀양 아리랑’이 기쁜 듯, 슬픈 듯, 조용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비행기 문이 열리면서, 아직은 쌀쌀한 3월 초순의 아침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밀림 속에서 얼마나 그리웠던 바람인가! 입사 2년 만에 첫 본국 휴가였다. 집안 식구들에게는 공항 마중을 나오지 말라고 먼저 당부를 해 놓았기에 마중객이 아무도 없었다. 대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본사 총무과 유 과장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골함을 조심스럽게 안고 우리는 회사 승용차가 있는 공항 주차장으로 향했다. 유 과장이 준비해 온 지방을 유골함 앞에 모시고 우리는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로 출발했다.
2년 전인 1973년 봄에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나는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에서 열대 원목을 개발하는 A 회사에 취업이 되어 인도네시아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A 회사는 1969년 한국의 해외 직접 투자 제 1호 기업으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중견 기업이었다. 그 회사의 현장 base camp인 생산본부 총무과 신입사원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3월 초,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홍콩에서 하룻밤을 자고 후끈거리는 지열이 아직 남아 있던 그 이튿날 저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난생처음으로 적도 이남의 땅을 밟은 것이다. 3일 정도 회사의 자카르타 지사 숙소에서 체류한 후, 남부 칼리만탄 도청 소재지인 반자르마신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시간 30분 정도 비행한 후 반자르마신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슬람교도가 많은 인도네시아에서 반자르마신은 이슬람 색채가 더욱 강한 곳이었다. 그곳 회사 출장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회사의 벌채권이 있는 바투리친 지역을 가기 위해 9인승 경비행기에 몸을 싣고 바투리친 인근에 있는 ‘바다 섬’을 향해 출발했다. 바투리친에 비행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바다 섬’에 있는 간이 비행장인 스타겐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다시 모터보트를 타고 해협을 건너 육지에 있는 바투리친으로 건너와야만 했다. 반자르마신과 바투리친 간 거리는 약 300 킬로미터가 되는데 열대 우림으로 덮여 있어 자동차 통행이 불가능하고 다만 고산 종족인 다약 종족들이 다니는 도저히 길이라고 할 수 없는 통로가 있을 뿐이었다. 내가 현장으로 들어간다는 연락이 무전기인 SSB (single side band)를 통해 현장에 알려졌다. 반자르마신에서 약 1시간 정도 비행한 후 스타겐 공항에 도착했는데 나를 마중하기 위해 모터보트가 나와 있었다. 다시 해협의 거친 물결을 헤치고 2시간여 달려간 곳에 생산본부 현장 부두가 있었다. 한국인 직원 서너 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신입사원 들어 왔다고 다들 두 손을 높이 흔들고 있었다. 황갈색 작업복을 입고들 있어 얼굴색들이 더 어둡게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 사람이 처음 열대 지방인 인도네시아에 오게 되면 몸속에 있는 지방이 땀구멍을 통해 땀과 함께 서서히 배출되어, 3, 4개월이 지나면, 피부가 윤기를 잃고 거칠어져 갔다. 피부색도 현지인처럼 황갈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황색도 아닌 아주 묘한 색을 보이게 된다. 몸의 체중은 자연스럽게 감량이 되기 시작한다. 그만큼 근무 여건이 좋지 않았다.
현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국인 직원이 전부 14명이었고 현지인 인력이 약 3천여 명 있었다. 한국인 직원들의 숙소는 마루 밑에 둥근 원목을 부착시켰기 때문에 불도저에 연결하면 언제라도 이동이 가능한 목조 가옥이었다. 현지인들은 현장 사무소 아래쪽에 그들만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열대 나무 중, 특히 나왕을 집중적으로 벌채하기 위해 다양한 중장비가 동원되고 있었다. 나왕 목은 당시 한국의 아파트 건설 붐이 일 때 합판제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원목 벌채권을 받은 지역 면적은 한국의 충청북도 면적 크기였는데 나무를 벌채하여 그 나무를 원목선에 선적하기 위해 바닷가 부두까지 운반하는 것이 제일 큰일이었다. 이를 위해 원목을 운반할 수 있는 트레일러가 다닐 수 있는 길인 임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깊고 험준한 정글을 뚫고 나가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종종 임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여 인명들이 다쳤다. 바닷가에 현장 본부가 있었고 본격적으로 나무가 벌채되는 지역에 사업소가 있었다. 원목을 벌채하는 단계는 우선 팀버 크루징이라고 해서 벌채할 나무에다가 일련번호를 기록하면서 나무 위치를 지도상에 함께 표시하는 작업이 첫 단계이다. 이를 위해 경비행기나 헬리콥터를 띄워 항공사진을 촬영하고 그 사진을 근거로 경위도가 있는 지도를 작성한 후, 그 지도를 갖고 팀버 크루징 팀이 정글 속으로 투입되게 된다. 지도에 표시되어있는 나무를 찾아 그 나무에 일련번호를 기록하게 된다. 보통 10명 정도 인력으로 구성되는데 회사의 방침 중 하나가 신입사원은 의무적으로 팀버 크루징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있었다. 나 역시 팀버 크루징 팀에 속해 보름간 밀림 속을 누비고 다녔다.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 열대 우림은 산속에서 건너편 산을 한가롭게 바라볼 수 있는 우리나라 산세가 절대 아니었다. 검푸른 녹색 감옥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열대 우림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대낮인 경우에도 그 안은 컴컴했다. 햇볕이 보통 수십 미터씩 높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지상까지 투과하여 내려 오지 못했다. 발길은 오랜 세월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이 발목을 아래로 잡아끌고 촘촘한 나무와 수풀로 인해 바람이 통하지 않아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숲에는 야생 소, 멧돼지, 곰, 아나콘다 (현지에서는 ‘피톤’이라고 부른다), 오랑우탄 등이 서식하고 있었는데 제일 두려운 것은 불개미와 전갈이었다. 팀버 크루징 4일째 아침을 먹기 전에 동료들과 야영장 앞 냇가에서 대충 몸을 씻고 나오다 무심결에 왼손으로 잡은 바위 위에 꼬리를 바짝 말아 올린 전갈 한 마리가 내 손가락 방향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전갈까지는 불과 10 센티미터도 안 되는 짧은 거리였다. 그때였다 언제 보았는지 내 옆에 있던 현지인 직원이 이를 닦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굵은 소금을 전갈에다가 냅다 뿌렸고 전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십년감수라는 말이 절로 생각이 났다. 산 거머리도 결코 유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나뭇잎에 붙어 있다가 그 밑으로 지나가는 사람이나 동물이 있으면 툭 떨어져 살갗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빨판을 살갗에 대고 피를 빨게 된다. 문제는 피 빨리는 사실을 사람이나 동물이 모른다는 것이다. 통증을 못 느끼는 것이다. 팀버 크루징 일과가 끝난 후 냇가에서 목욕하기 위해 옷들을 다들 벗을 때 온몸 여기저기에 산 거머리가 붙어 있고, 피를 양껏 빤 산 거머리들이 몸에서 툭 툭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산 거머리가 피를 빤 자리는 부스럼 자국처럼 붉게 오래도록 가려움증을 남기게 된다. 불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정글 속은 열대 지방이지만 기온이 내려가 생각보다 쌀쌀해진다. 유행가 가사에서나 들었던 머나먼 남쪽 나라 남십자성이 이마 위 밤하늘에서 거짓말처럼 십자를 그리며 떠 있는 것을 보면서 잠이 들면 깊은 정글 속에서는 여러 종류의 동물들 소리도 잦아들기 시작한다. 그런 팀버 크루징 과정을 거쳐야만 회사 동료들은 진정한 신입사원으로 인정을 해 주었다.
그다음 단계는 벌채 단계이다. 팀버 크루징에 따라 일련번호를 매긴 나무를 벌채하기 위해 불도저가 길을 내면서 진입하게 된다. 평지에 평탄하게 서 있는 나무일 경우는 쉽게 나무를 전기톱으로 잘라 넘길 수 있으나 대부분 나무는 그렇지가 않았다.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서 있는 나무일 경우, 쇠사슬로 연결된 나무를 불도저가 윈치를 감아 가면서 나무에 접근하게 된다. 이때 급한 경사일 경우 나무와 연결된 쇠사슬이 터져 나가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하곤 한다. 불도저가 곤두박질 되면서 사망으로 이어지는 인명 사고가 생기게 된다. 그렇게 전기톱에 잘려나간 나무들은 보통 직경이 1 미터 이상, 높이는 15미터에서 20 미터 정도였는데 나무가 쓰러지는 광경은 볼만했다. 전기톱에 잘려 서서히 넘어가던 나무가 일정 각도로 기울어지면 가속이 붙어 급격한 속도로 굉음과 함께 쓰러지게 된다. 노련한 전기톱 기능공들은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과 각도를 정확히 가늠하여 나무의 상품 가치가 훼손되지 않게 처리한다. 회사가 1969년에 처음 이곳 남부 칼리만탄에 진출했을 때에는 전기톱이 없어서 현지인들이 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그 위에서 여러 명이 도끼로 나무를 잘랐다고 한다. 그렇게 나무가 쓰러진 후, 박피공들이 달려들어 긴 철 막대를 이용하여 나무껍질을 급하게 벗겨내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벌레가 나무 속으로 파고 들어가 원목이 운송되는 동안 구멍을 내어 원목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었다. 특히 합판이나 제재목을 만들 때 구멍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벌레가 나무 안에서 서식하면서 시간이 경과 함에 따라 합판이나 제재목을 갉아 먹게 되어 결국 나무를 못 쓰게 만든다. 나무가 쓰러질 때 밑에 있는 작은 나무까지 끌어안고 쓰러지는데 간혹 같이 넘어갔던 작은 나무들이 다시 튕겨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때 쓰러진 나무에 접근하던 사람을 치게 되는데, 사망에 이르게까지 하는 사고가 나곤 했다. 나무는 불도저에 연결되어 싣고 갈 트레일러가 기다리고 있는 지역까지 끌려 나오게 된다. 트레일러에 실린 나무들은 24시간 쉬지 않고 임도를 따라 바닷가 부두에 있는 나무 저장소인 록 폰드 (log pond)에 모이게 된다. 나무가 벌채되어 나오는 사업소에서 록 폰드까지 거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멀어져 갔다. 특히 벌채권 지역 북쪽은 험준한 산악지대였는데 그쪽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나왕 목과 꺼루잉이라고 불렀던 철목이 많이 밀집해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도가 그쪽으로 가지를 쳐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우리 회사 한국인 직원들과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다약족이 그 산악지대에 흩어져서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회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중 제일 큰 마을이 구눙 비루비루라는 마을인데 산 정상 근처에 있다고 했다. 외부인에게 잔인하기로 유명한 다약족이라 아직 이슬람이나 기독교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수렵과 농경 생활이 어우러져 있는 반유목민으로 19세기 말까지 식인 풍습이 남아 있던 종족인데 중국 남부에서 유입되어 온 종족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여성들 귀 볼에 구멍을 뚫어 무거운 귀걸이를 여러 개를 계속 착용해서 그 구멍을 크게 아래로 늘리는 독특한 풍습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다만 다약족들이 모아 놓은 로딴 (등나무 일종)과 우리 회사 현지인들이 가져간 담배와 소금을 서로 물물교환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물물교환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암묵적으로 지정된 장소에 담배와 소금을 갖다 놓고 일정 기간 지난 후 다시 그 장소에 가서 쌓여 있는 로딴을 가져오는 방식이라고 했다. 철저한 신용거래였다. 그렇게 모은 로딴이 나왕 원목과 함께 한국으로 수출되어 한동안 우리나라에 등나무 가구 유행을 이끈 적이 있었다.
낮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는데 밤에는 캄캄한 밀림 속 임도를 따라 달려 내려오는 트레일러 불빛에 반응을 보이는 숲속에 있는 야생동물들이 임도로 나와 트레일러와 마주 대하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다. 보통, 들소, 곰, 산양 등이 트레일러와 부딪쳤는데 어떤 때는 숲을 가로지르는 큰 뱀도 있었다. 가속을 붙여 내려오는 속도로 인해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뒤에 실려 있는 원목이 밀리면서 운전석 뒤를 치기 때문에 현지인 운전사들은 급브레이크를 밟는 것보다 마주하고 있는 야생동물을 그대로 치고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끔 사업소로 올라가는 길에 흩어져 있는 동물들의 사체를 독수리와 까마귀들이 쪼고 있는 광경을 종종 보곤 했다. 언젠가는 사업소에서 야간에 생산본부로 원목을 가득 실은 트레일러를 같이 타고 내려오다가 들소와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자동차 불빛에 비친 들소의 붉게 타는 눈을 그날 처음 보게 되었다. 모든 상황이 낯설고 위험하고 위태로운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 1975년 3월 1일 토요일, 우기 막바지 스콜이 천둥소리와 함께 무섭게 지나간 오후 나는 생산본부 사무실에서 원목 수출에 따른 서류를 정리 중이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멀어져 가는 천둥소리와 가끔 들리는 창문 흔드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창문 밖 국기 게양대에는 비에 젖은 태극기와 인도네시아 국기가 회사 방침대로 날씨에 상관없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대한민국 해외 직접 투자 제 1호 기업이라는 자부심이었다. 열대 태양이 환하게 빛나는 푸른 하늘에 야자수와 함께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잠시 상상할 때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사무실에서 심부름하는 남자아이인 조코가 비를 흠뻑 맞은 채 들어 왔다. 사슴처럼 까만 눈을 깜빡이며 손님이 찾아 왔다고 내게 전했다. “뚜안 김, 밖에 한국 여자가 찾아 왔어요?”(‘뚜안’은 인도네시아어로 외국인 남자를 호칭하는 존칭어) “한국 사람?” 나는 깜짝 놀라 되물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무실 출입문 쪽으로 급히 발을 옮겼다. 사무실 밖에는 비에 흠뻑 젖은 젊은 청년과 그의 등에 업힌 여자가 있었다. 청년의 복색은 눈에 익은 현지인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에는 두건을 둘렀고 웃옷을 걸치지 않은 가슴과 양팔은 문신이 가득했다. 체구는 단단하게 보였으며 눈매가 날카로워 회사 현지인 직원들의 순한 눈매와는 차이가 있었다. 허리에는 빠랑이라는 단도를 차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다약족임을 직감했다. 우선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안내를 했다. 등에 업힌 여자는 의식을 잃었는지 아니면 잠을 자는지 기척을 하지 않았다. 야간 당직자용 간이침대에 여자를 급한 대로 눕혔다. 비를 맞아 머리가 헝클어지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지만 분명 초로에 접어든 깊은 병색이 있는 여자였다. 눈은 감고 있었고 체구는 작고 메말랐다. 키는 대략 160 센티미터가 되지 않았고 피부는 검게 햇볕에 그을렸지만 열대 풍토병 일종인 카스카도 피부병은 앓지 않아 깨끗했지만 여기저기 문신한 것이 보였다. 얼굴에는 이미 검버섯이 피어 있었고 머리는 반백에 가까웠고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틀어 올리는 머리인 상굴을 했지만 비를 맞아 흩어져 있었다. 인도네시아 천연 나염 바틱천으로 만든 옷을 위, 아래 걸쳤지만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생산본부장에게 방금 벌어진 상황에 대해 전화로 보고를 했다. 해병대 장교 출신이라 간단명료하게 보고 받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생산본부장은 중장비 정비 기술자 남편을 따라와 현장 식당 조리를 담당하고 있는 양 씨 아주머니와 함께 생산본부 사무실로 급하게 짚 차를 타고 왔다. 그때까지 여자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조코가 다약족 말, 인도네시아 말을 섞어가며 나와 여자를 업고 온 청년과의 대화를 통역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느냐?” “구눙 비루비루에서 왔다.” “저 여자가 한국 여자라고 했는데 맞느냐?” “그렇다.” “저 여자가 구눙 비루비루에 언제부터 살았는가?” “잘 모르지만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있을 때부터다.” 그 사이 양 씨 아주머니는 더운 물수건으로 여자의 얼굴과 팔, 다리를 조심스럽게 닦고 있었다. 발은 밀림을 걸어오느라 그랬는지 피범벅이었다.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생산본부장은 양 씨 아주머니에게 여자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라고 말하면서 당분간 여자를 옆에서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여자의 정확한 신상이 파악될 때까지는 본사 보고는 일단 하지 않는 것으로 생산본부장은 나에게 지시를 했다. 어느 사이에 한국인 전체 직원들에게 여자의 출현 소식은 퍼졌다. 생산본부장은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 사무실 당직실을 여자의 임시 거처로 정했다. 나는 여자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온 다약족 청년과 함께 직원 식당으로 갔다. 조코가 따라 왔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청년은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이름과 나이를 물어보았다. “이름은 아누그라. 나이는 대략 열아홉 살.” 구눙 비루비루 마을 촌장의 셋째 아들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여자는 먹는 것도 잊은 채 산 아래로 내려보내 달라고 마을 사람에게 사정했다고 한다. 병이 깊은 여자의 애원이 워낙 간절해 마을 원로회의에서 여자를 그만 마을 밖으로 내 보내 주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 자기가 길 안내자로 선발이 되어 이렇게 같이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제 여자는 마을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마을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여자도 자기가 마을로 돌아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자기는 여자를 안내했으니 산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조코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일찍 산으로 출발하라고 나는 아누그라에게 말했다. 여자의 짐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는데 작은 손가방이 하나뿐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여자는 빈 몸이었다.
다시 산 쪽으로부터 비구름이 몰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한국인 직원들은 식당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모두 나를 보자마자 산에서 내려온 여자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물었다. 나 역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어 아는 것이 하나 없다고 대답을 했다.‘후두둑’하며 빗방울이 식당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저녁 반찬으로 나온 양고기 꼬치구이를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 나는 생산본부장과 함께 식당에서 마련한 쌀죽을 들고 여자를 다시 찾아갔다. 양 씨 아주머니가 여자 곁을 지키고 있었다. 여자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들고 간 쌀죽과 김치를 양 씨 아주머니에게 전달하고 생산본부장과 나는 짚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생산본부장 입에서 아무래도 여자가 일본군 종군 위안부 출신인 것 같다는 말이 무겁게 흘러나왔다. 그럼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바로 그 위안부란 말인가? 갑자기 아린 아픔이 가슴으로 밀려 왔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동남아 지역을 공략할 때 제일 우선했던 지역이 인도네시아로 알려져 있다. 그 배경은 전쟁에 필요한 인도네시아의 자원 중 원유와 고무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인도네시아 중에서도 원유와 고무가 생산되는 수마트라와 칼리만탄이 일본군의 주요 공략 지점이 되었다. 따라서 위안부들도 자연스럽게 수마트라와 칼리만탄에 집중적으로 배치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1975년 3월 2일 일요일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 바투리친 날씨는 모처럼 화창했다. 양 씨 아주머니로부터 여자가 의식이 돌아왔다는 전화를 받고 생산본부장과 나는 다시 당직실로 향했다. 힘겹게 침대에 일어나 양 씨 아주머니에 기대어 앉아있는 여자 앞에 가지고 간 쌀죽과 김치를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여자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김--- 치’라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더니 여자는 소리 없이 힘겹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우리는 당황했다. 양 씨 아주머니가 여자 손에 수저를 쥐여 주었다. 여자는 수저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힘없이 놓쳤다. 양 씨 아주머니가 여자 입에다 쌀죽을 떠먹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 먹는 듯하더니 입에서 죽을 흘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 여자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거의 풀린 눈동자였다. 예순 가까운 나이로 병색이 깊었지만 젊은 시절 아름다웠을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메마른 얼굴이었다. 그러나 분명 한국 사람이었다. “----- 여기 --- 조선 사람들 --- 맞지예 ---?” 여자가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뿌연 눈동자로 우리에게 경상도 사투리 흔적이 남아 있는 말로 띄엄띄엄 희미하게 물었다. 생산본부장이 열대 나무를 벌채하러 온 한국 회사라고 우리를 소개했다. 이곳 칼리만탄에 언제, 어떻게 왔느냐고 여자에게 생산본부장이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고개를 다시 숙이더니 여자는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 고맙---습니더 -- 공 -책--.” 그리고는 다시 힘없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비상 연락망을 통해 서울 본사와 자카르타 지사에 여자의 출현에 대해 정식 보고가 전화로 이루어졌다. 여자의 정확한 인적 사항을 파악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산에서 여자와 같이 내려온 촌장 셋째 아들이 산으로 돌아간다고 조코와 같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나는 식당에 이야기하여 커피와 설탕을 청년이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만큼 준비해 주었다. 별도로 담배를 청년 몫으로 챙겨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 여자를 마을 사람들이 잘 돌봐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이 고마운 마음을 마을에 돌아가면 촌장께 잘 전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언제라도 촌장께서 좋은 시간에 우리 회사를 방문해 주면 열렬히 환영하겠다. 우리 회사도 구눙 비루비루 발전에 적극 지원을 하겠다.” 생산본부장은 청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청년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대낮이지만 컴컴한 밀림 속으로 향해 사라져 갔다.
양 씨 아주머니가 우리를 급하게 찾고 있었다. 여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간이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의 입에서 간헐적으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눈물 반, 땀 반이었다. 우리 회사 생산본부에서 여자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당장 응급 치료가 급했다. 병원이 있는 남부 칼리만탄 주청 소재지인 반자르마신으로 여자를 이송하여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일 아침 스타겐에서 무조건 반자르마신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생산본부장은 여자의 병원 이송 책임을 인도네시아어가 가능한 나에게 일임했다. SSB 무전으로 내일 내가 여자의 응급 치료차 반자르마신으로 나간다는 연락이 반자르마신 출장소에 전달되었다. 어김없이 오후부터 스콜이 땅이 파일 정도로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덮었던 박쥐들도 다들 날개를 접고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비를 맞기 시작했다. 양 씨 아주머니는 따스한 물수건으로 여자의 몸을 조심스럽게 닦고, 여자에게 갈아 입히기 위해 아껴 두었던 서울에서 가지고 온 여름 원피스를 꺼내 놓았다. 파란 하늘을 닮은 푸른색이었다.
1975년 3월 3일, 현지 시각 오전 6시. 급하게 만든 들것에 누운 여자와 함께 나는 모터보트를 타고 간이 비행장이 있는 ‘바다 섬’ 스타겐으로 출발했다. 육중한 체구의 생산본부장이 한참을 부둣가에 서서 배웅을 했다. 반자르마신으로 나가는 비행기 좌석 상황도 모른 채 무작정 ‘바다 섬’으로 향한 것이다. 좌석 확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라는 해병대 출신 생산본부장의 특명이 있었다. ‘바다 섬’으로 건너는 해협은 잔잔했다. 어부들의 어선들이 한가롭게 지나가면서 손들을 흔들었다. 여자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얕은 신음을 냈다. 얼굴색은 더욱 파리해진 것 같았다. 멀리 스타겐의 이슬람 사원 첨탑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모터보트는 항구에 도착했다. 들것에 누운 여자를 모터보트에서 간이 비행장 대합실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9 인승 반자르마신행 경비행기는 들어와 있었다. 표 파는 곳으로 가서 항공사 매니저를 만났다. 회사 직원들 출장 항공권 결재 건으로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인도네시아인이었다. 반자르마신행 좌석 9석은 예상한 것처럼 이미 만석이었다. 여자의 긴급 상황을 설명하고 금액은 요구하는 대로 지불할 것이니 특별 지원을 요청했다. 매니저는 여자 상황을 확인한 후, 승객 9명을 불러 이 중 4명 탑승을 일방적으로 취소시켰다. 독특한 인도네시아식 비행기 탑승객 관리 방법이었다. 항공권과 별도의 추가 비용을 우리 회사가 그들에게 지불하는 조건이었지만, 누구도 여자의 상황을 보고는 불평을 하는 승객이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심성들이 착한 사람들이었다. 3개의 좌석이 뉘어지고 여자의 들것이 그 위에 놓였다. 나는 여자의 손가방을 손에 꼭 쥔 채 조종사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남부 칼리만탄 주청 소재지 반자르마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도시에 있는 유일한 종합병원인 수아까 인산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필리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수아까 인산은 병원비를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받으면서도 치료를 잘해 평판이 좋은 병원이었다. 내가 연전에 말라리아에 걸려 입원했을 때 원장 수녀와 좋은 인연을 맺게 된 병원이기도 했다. “뚜안 김, 어쩐 일이세요?” 낯이 익은 간호사가 병원 출입문에서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한국 여자분을 모시고 왔는데 상황이 좋지 않아요.” 나는 차 유리문을 내리면서 간호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응급실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여자에 대한 응급 치료가 시작되었다. 다양한 검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원장 수녀도 응급실에 잠시 들러 여자 상태를 심각하게 둘러 보고 갔다. 나는 여자의 가방을 안고 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해안가라 반자르마신이 바투리친보다 더 후텁지근했다. 천장의 선풍기는 있으나 마나 한 장식품이었다. 유난히 피부가 검은 간호사가 여자의 하늘색 원피스를 내게 갖다 주었다. 나는 그 옷을 넣기 위해 여자의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잡다한 잡동사니가 있었고 낡은 공책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여자의 삶이 이 가방 안에 다 들어 있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작았다. 응급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내게 다가왔다. 여자가 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급히 응급실 안으로 달려갔다. “정신이 좀 드세요?” “괜찮아질 것이니까 안심하세요.” 여자의 귀에 대고 크게 말을 했다. 여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 — 점 — 례, 고향 갱상도 밀양. 고맙 --- 습니더. 가방 안에 공책. 밀양 ----- 아리랑 –박—점--- 례 ----.” 아주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여자는 초점 잃은 눈동자를 내게 어렵게 맞추면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이어갔다. 그리고는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급하게 산소 호흡기를 연결하였다. 응급실 담당 의사가 나를 불렀다. 책상 위에 여러 검사 결과표가 있었고 그 너머에 심각한 의사의 얼굴이 있었다. “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신체 온전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 상태로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한 것이 기적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폐 기능은 거의 상실된 상태이고 몸의 염증 수치가 매우 높은 상태입니다. 병원에서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만일의 상황을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자카르타에 있는 큰 병원으로 이송을 하면 혹시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환자가 자카르타로 이송될 때까지 체력적으로 견디지를 못할 것입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내용과 여자에게 들은 박점례, 고향이 경상도, 밀양, 가방 속의 공책, ‘밀양 아리랑’에 대한 내용을 반자르마신 출장소 무전을 통해 생산본부에 보고하게 했다. 생산본부는 그 내용을 자카르타 지사, 서울 본사 그리고 한국대사관에 보고했다. 본사로부터의 지시는 반자르마신 수아까 인산 병원에서 최선을 다해 여자의 생명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응급실에 들어가 이제는 박점례라고 이름이 알려진 여자의 손을 가만히 잡아 보았다. 바싹 마른 풀뿌리 같았다. 그래도 따스했다. 어떻게 보면 내 어머니 나이뻘 되는 여인이었다. 무슨 깊은 아픔이 있었길래 정든 밀양 땅을 놓아두고 칼리만탄 반자르마신 외진, 낯선 병실에서 이렇게 가쁜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여인의 머리맡에 있는 바이탈 사인은 계속 불안한 수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인의 눈가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느새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보호자 대기실로 나와 여인의 가방을 조심스럽게 다시 열었다. 자크가 녹이 슬어 잘 열리지 않았다. 그 안에서 공책 두 권을 꺼내 첫권, 첫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철자법은 볼 것 없지만 한글로 정성껏 쓴 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얼핏 보아도 꽤 오랜 기간 쓴 것 같았다.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고 종이가 찢겨 진 곳도 있었다. 그 내용을 천천히 눈으로 읽다가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박점례라고 합니다. 고향은 경상도 밀양, 산내면 남명입니다. 얼음골로 알려진 곳이지요. 대정 11년, 임술년, 개띠생입니다. 언제부턴가 새해가 되면 산 아래에서 담배와 소금이 올라올 때면 달력도 같이 산 위, 구눙 비루비루 마을로 따라왔는데 그 달력 속에 조선 한복 입은 사람들 사진이 있었습니다. 사진 속 사람들은 새배도 하고, 연도 날리고, 널도 뛰고 오래전 밀양에서 친구들이랑 했던 모습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산 아래에 일본 사람 닮은 한국 사람들이 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준 달력이라고 했습니다. 꿈에도 잊지 못할 조선 사람들이 산 아래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 내려가 고향 밀양으로 보내 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까지 밀림 속 길을 여자 걸음으로 4, 5일을 걸어야 한다고 하는데 길도 모르고 마을 관습에 얽매여 감시를 받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언제 산 아래로 내려가 조선 사람을 제가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날을 위해 그동안 제가 겪었던 참담한 이야기 모두를 여기에다 모두 적어 놓겠습니다. 혹시 제가 고향 밀양을 가지 못하더라도 이 공책만이라도 고향 땅을 밟기를 바랍니다.
언제 마을에 흘러들어 왔는지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마을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처지로 외지 출신 꼽추였습니다. 나이 40이 넘어도 장가를 들지 못하고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마침 이웃 마을에 마음은 착한데 좀 정신이 모자라는 30이 넘은 여자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 주선으로 두 분은 살림을 차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두 분 사이에서 첫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저를 출산 후 7일 만에 세상을 뜨셨지요. 70 넘은 외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라나기 시작했는데 제가 세 살 때 외할머니마저 노환으로 돌아가셨지요. 아버지와 저는 먹고살기 위해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못 배우신 것이 한이 되셔서 저는 중학교 2학년까지 어렵게 마쳤습니다. 당시 시골 여자아이로는 많이 배운 축에 들지요. 그러나 일도 열심히 했지요. 아버지와 함께 뼈 빠지게 일했습니다. 물론 결혼은 꿈도 꾸질 못했습니다. 우선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씨가 나카무라인 동네 일본 순사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남방에 있는 일본군 병원에 임시 간호 보조사로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데 희망자는 자기를 찾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월급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남방 일본군 병원에서 근무할 임시 간호 보조사로 일하기 위해 저는 망설임 없이 응모했습니다. 학벌이 크게 중요치 않았고 신체 건강한 여자이면 조건 안에 들었습니다. 다만 결혼한 여자는 응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밀양 출신 다른 여자들 4명과 함께 응모하였는데 모두 다 응모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21살 때인 1943년 2월이었습니다. 한 해 전인 1942년 아버지께서 겨울 빙판길에 넘어지셔서 그 길로 자리를 보존하다가 변변히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기에 제가 밀양을 떠나더라도 이제 누구 하나 관심을 두고 저를 돌아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홀가분하게 임시 간호 보조사에 응모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희 일행 5명은 나카무라 순사 일솔 아래 밀양으로 나가 ’태양 여관‘이라는 곳에서 이틀을 머문 후 부산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7살 막점이, 19살인 순이와 용순이 20살 필순이 그리고 21살 저, 박점례가 일행이었습니다. 모두 집안이 가난해서 먹는 입 하나 덜기 위해 등 떠밀리듯이 온 처녀들이었습니다. 막연한 불안 속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에 나가 돈을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태겠다는 큰 희망에 다들 부풀어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48명의 경상도 출신 처녀들이 부산에 집합한 것은 1943년 3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4월 초, 나중에 인도네시아로 알게 된 남방이라는 지역에 있는 일본군 병원의 임시 간호 보조사로 근무하기 위해 ’이치마루‘라는 철선에 승선하여 조선을 떠났습니다. 진달래가 활짝 핀 좋은 봄날이었습니다. 배의 창문은 커튼을 모두 내려 철저하게 빛을 차단하였습니다. 일본 군함의 호위를 받고 항해를 했습니다. 우리가 배에 승선 후, 하얀색 임시 간호 보조사 복장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신체검사를 한다는 구실로 각 방에 있는 한 명씩 의무실로 불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항해한 지 3일 만에 불려갔고 대머리인 50대 일본인 의사에게 제 몸은 철저하게 유린 되었지요. 그날 밤 그 의사는 저를 놓아주지 않고 아침이 될 때까지 몇 번이나 제 몸을 범했습니다. 일행 48명 모두 다 예외 없이 배 안에서 몸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아직 초경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린 여자아이도 있었습니다. 20여 일 가는 동안 내내 우리는 배 승무원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었지요. 우리끼리 얼굴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서로가 부끄럽고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배는 대만 가오슝이라는 곳에 잠시 기항한 후 다시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날씨는 더워졌습니다. 20여 일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다가 우리는 1943년 4월 말경 인도네시아 바타비아, 딴중 뿌리욱 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는 도중에 고향이 진주인 19살 먹은 순례가 바다에 투신자살해서 우리 일행은 47명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자포자기가 된 상태에서 인도네시아에 첫발을 디디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공책을 읽고 읽는데 응급실 간호사가 급하게 나오면서 나를 찾았다. 예감이 불길했다. “뚜안 김. 임종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나는 응급실로 급하게 들어갔다. 이미 산소 호흡기는 얼굴에서 떼어져 있었다. 손을 꼭 쥐었다. 아직은 따스했다. 혈압, 맥박, 호흡 수치는 거의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손으로 초점 잃은 눈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며 귀에다 대고 조용히 말을 했다. “아주머니. 이제 고향 땅 밀양으로 편안히 가세요.” 그리고는 마음속 깊은 울림으로 ’밀양 아리랑‘을 속으로 속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여자의 53년 깊은 한이 ’밀양 아리랑‘ 곡조를 타고 훨훨 날아 그렇게 살아서 가고 싶었던 고향 밀양 땅에 가기를 기원했다. 담당 의사가 공식 사망 판정을 했다.
사망자 : 박점례 (여성). 나이 : 53세. 국적 : 대한민국 (국적 회복 예정). 사망 원인 : 급성 폐렴. 사망 장소 :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 반자르마신 수아까 인산 병원 응급실. 사망 일시 : 1975년 3월 3일 오후 6시 15분. 사망자 후견 회사 : A 기업 (한국 원목개발업체).담당 의사 : 밤방 위도도
멀리 이슬람 사원에서 저녁 기도인 마그립 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들려 왔다.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후 아크바르 --- ’
나는 시신을 정중하게 수습할 것을 병원 측에 부탁하고 생산본부에 무전으로 박점례씨의 사망 사실을 알렸고 본사와 자카르타 한국대사관에 그 사실을 전화로 긴급하게 알렸다. 반자르마신 출장소 직원들 중심으로 장례 치를 모임이 꾸려졌다. 시신 처리가 문제였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매장 문화라 지방 도시에는 화장 시설이 없었다. 대사관, 회사, 현지 경찰서 간 긴밀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일생을 한을 품고 힘들게 살다 간 원혼이기 때문에 유골이라도 고향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났다. 장례는 한국의 전통에 따라 3일 장을 치르기로 하고 상주는 내가 맡기로 했다. 빈소는 수아까 인산 병원 장례식장으로 했다. 조문객 중에는 마침 우리 회사 원목을 구매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 중에 잠시 반자르마신에 나와 있던 일본 마루베니 상사 직원 두 명도 있었다. 그들로부터 심심한 사과의 말과 함께 조문을 받았다. 그들은 영정 사진 대신 모신 하늘색 원피스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주머니의 사연이 반자르마신 시내에 순식간에 알려져 지방 신문 기자들이 취재차 장례식장에 대거 몰려와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들에게 태평양 전쟁 당시 한국의 ‘위안부’들이 일본에 의해 인도네시아까지 어떤 배경으로 끌려 왔는지를 반복해서 설명해 주었다. 인도네시아 역사에도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기자들이 예상 밖으로 적었다. 주인도네시아 한국 대사가 조화를 보내왔다. 조국은 박점례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준 증표로 보였다. 나는 본사 총무과에 연락해 전화 녹음을 통해 ‘밀양 아리랑’을 카세트테이프 앞뒷면에 옮겼다. 한편 우리 회사 현장 중장비 부품을 공급하고 있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인 구나완에게 부탁하여 반자르마신 시가지 옆을 관통하는 바리토 강 상류 지역 중 깨끗하고 한적한 지역을 택해 시신을 화장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물론 관련 인허가까지 처리해 달라는 요청도 같이했다. 아주머니 신상에 대한 서류는 하나도 없기에 공책에 적혀 있는 것을 중심으로 우리 회사가 인적 사항을 보증하는 것으로 하고 공증을 받아 경찰서에 제출하였다. 3일 장 마지막 날 밤, 나는 빈소 외진 곳에서 조용히 아주머니의 공책을 펼쳐 나머지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지옥보다 더한 처참한 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적도 바로 아래라 30도가 넘는 열기가 땅에서 올라왔지요. 조선의 삼복더위와 비교하면 이곳이 더 더웠습니다. 일행 47명 중 39명은 수마트라 팔렘방으로 가게 되었고 저를 포함해서 나머지 8명은 보르네오로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떨어지기 싫어 울며불며 서로 안고 목 놓아 울었지요. 팔렘방으로 가는 일행은 일본군 트럭이 와서 헌병들이 인솔해서 출발했습니다. 새카만 인도네시아 현지인들은 무슨 구경거리가 난 줄 알고 우리 일행을 신기한 듯 큰 눈망울로 쳐다보고 있었지요. 보르네오로 가는 우리는 다시 바타비아에서 3일 동안 배를 타고 자바해 건넜습니다. 파도가 심해 다들 배멀미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남부 보르네오 반자르마신에 도착하여 1주일 정도를 대기하면서 다시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지만, 일본 헌병대의 집요한 감시는 이어졌습니다. 신체검사라는 것이 별 것 아니었습니다. 여성 성기 내부를 오리 주둥이처럼 생긴 기구를 사용하여 들여다보면서 성병 유무와 부인병 유무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냈습니다. 느낌으로 원래 약속한 임시 간호 보조사 업무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것 같았습니다. 반자르마신에 있는 호텔에서 1주일 정도 머문 후 우리는 인근에 있는 뜰라왕이라는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여기서도 일본 헌병들의 철저한 감시가 뒤따랐습니다. 다들 희망이 없는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은 목조로 지은 큰 단층 건물이었습니다. 방이 30개가 되는 건물인데 남부 보르네오에 진주해 있는 일본군들을 위한 위안소였습니다. 내가 ’위안부‘가 된 것이었습니다. 되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이 ’위안부‘가 된 것입니다. 자포자기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제 운명이었습니다. 참 야속했습니다. 위안소에서 제 이름은 아키코가 되었습니다. 방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는데 저는 11번 방이 배정되었습니다. 방이라고는 침대 하나, 거울이 붙어 있는 간단한 옷장 하나, 베개 두 개, 간단하게 뒷물을 할 수 있는 물병 7개, 수건 몇 장, 담요 3장이 그리고 카푸체라고 부르는 콘돔 몇 개가 든 주머니 한 개가 전부였습니다. 뜰라왕 위안소에는 이미 중국에서 ’위안부‘들이 21명이 와 있었습니다. 위안소 관리는 치카다라는 40대 중반의 일본인이 했는데 성격이 악랄했습니다. 인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위안부‘를 동물 취급을 했습니다. 위안소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어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고 일본 헌병이 철저하게 감시했습니다. 첫날부터 일본 군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그들을 하룻밤에 보통 10명에서 15명을 받아야 했는데 주간에는 일본인 공무원들도 받을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지요. 점차 내가 태어나고 자라났던 경상도 밀양의 아름다운 고향 모습은 점차 머릿속에서 지워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담배가 없으면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의 연속이었습니다. 중국 ’위안부‘ 중에는 아편을 담배에 말아 피면서 일본 군인을 상대하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위안부‘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떤 일본 군인은 카푸체를 끼고 관계를 하면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그냥 하는 사람도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위안부‘를 무턱대고 두들겨 패는 군인도 있었습니다. 가학적으로 관계를 유도하는 군인들도 있었고, 그러다가 단골도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오면 단 몇 시간이라도 편안하게 쉴 수가 있었습니다. 차차 모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악착같이 군표를 모으기 시작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중국 상해에서 끌려 온 스물 두어 살 먹은 중국 여자가 아편 중독으로 사망하게 되었는데 시신을 현지인 남자들을 시켜 뜰라왕 시장 쓰레기 처리장에 갖다 버리라고 치가다 지시를 했지요. 그것을 보고 우리가 집단으로 반발을 했습니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사람답게 보내고 싶다고 치카다에게 요구를 했지요. 각자가 얼마씩 돈을 모아 목관 하나를 마련해서 현지인 남자들에게 수고비를 주어 반자르마신 옆에 흐르는 바리토 강가에 묻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지요. 우리들의 반발이 워낙 강했기에 치카다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라고 승낙을 했지요. 날이 갈수록 우리들 몸은 어디 하나 성한데 없이 철저하게 망가져 가기 시작했지요. 우리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동물이었습니다.
뜰라왕에 도착해서 5개월 정도 지났을 때 제 몸의 변화를 느꼈습니다. 임신이 된 것이었습니다. 위안소 전속 의사 진찰 결과 임신 5개월째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마음도 없었지만, 치카다의 강력한 지시로 낙태를 하게 되었죠. 변변한 마취 주사도 없이 낙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몸에서 강제로 빼낸 5개월 된 태아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이 아직 분리되지 않았었지요. 그때부터 저는 출산 기능을 영원히 상실했습니다.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랐지만 동부 보르네오 발릭바빤 위안소가 연합군 폭격을 받는 바람에 그곳에 있던 ’위안부‘들이 많이 사망했고 일부는 살아남아 우리가 있는 뜰라왕 위안소로 이송해 들어 왔지요. 7명이 새로 들어왔기 때문에 따로 건물을 마련했습니다. 일본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았지만 뜰라왕 위안소는 매일 군인들로 장사진을 쳤습니다. 그렇게 1944년이 저물어 가고 있었지요.
고향에 대해 이제 기억나는 것은 얼마 없지만 고향의 노래 ’밀양 아리랑‘만은 지금이라도 부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들과 같이 불렀던 노래였지요. 동물보다 못한 위안소 생활에서 유일한 낙은 담배와 단골이었던 군인이 주고 간 하모니카로 ’밀양 아리랑‘를 연주하는 것이였지요. ’밀양 아리랑‘을 연주하면 잊었던 밀양의 아름다운 여러 풍경이 머릿속에서 떠오릅니다. 그렇게 모진 목숨 연명을 하는데 제 기억이 맞는다면 1945년 8월 3일 연합군 공습이 뜰라왕 지역과 반자르마신 지역을 강타했지요. 뜰라왕 위안소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 공습으로 저와 중국인 ’위안부‘ 2명만 살아남고 악명 높았던 치카다를 포함하여 전원이 폭사했지요. 큰 화재가 발생하여 시신들도 수습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인 ’위안부‘ 2명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이 데려갔고 저는 오갈 데가 없어 위안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인도네시아인 집에 임시로 피해 있게 되었지요.】
그때 구나완이 다가와 입관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구나완과 함께 병원 장례식장 뒤편에 있는 영안실로 향했다. 그곳 냉동실 안에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얼굴 화장까지 한 아주머니는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그렇게 3일 장이 끝나가고 있었다.
시신을 실은 구급차가 수아까 인산 병원을 떠나기 전에 노제를 격식에 맞춰 지냈다. 원목선 선원들이 갖고 온 한국산 소주 한 병을 땅에 흩뿌리고, 아주머니와 평생을 같이 한 담배를 계속 피워 올렸다. 화장할 곳에 도착해 보니 구나완과 경찰관 두 명 그리고 인부 몇 명이 분주하게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적한 강가였다. 철근으로 고정된 틀 위에 시신이 놓여다. 중국인 사찰에서 모셔온 스님의 독경이 시작되었다. 우리 귀에 낯선 염불 소리가 하늘로 퍼져 나갔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긴 향과 인도네시아인들이 즐겨 피는 정향 씨가 들어 있는 담배 타는 냄새가 묘하게 어우러져 코끝을 자극했다. 독경이 끝나고 시신 밑에 쌓여 있는 장작에 불이 붙었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곳 반자르 족 격언에 따르면 ‘바리토 강물을 한 번이라도 마신 사람이면 죽기 전에 꼭 한 번 바리토 강가를 다시 찾는다’라는 것이 있는데 아주머니는 원혼이라도 다시는 이곳에 오시지 말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바라고 또 바랬다. 나는 준비해간 간이 전축에 ‘밀양 아리랑’테이프를 넣었다. 노래는 애잔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는 아직 다 읽지 못한 아주머니의 공책을 펼쳤다.
【연합군 공습으로 저는 발에 화상을 입었지요. 그 인도네시아인 집에서 당장 입에 풀칠할 일이 급했지요. 갖고 있던 일본 돈과 군표도 폭격으로 다 잃었습니다. 몸에 지니고 있던 장신구를 먹을 것으로 바꿔 며칠을 연명하였지요. 그러다 결국 고산지대에 있는 다약족 남자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를 따라 산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몰랐고 수중에 돈도 없었고 도와주는 사람도 한 명 없는 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조선 사람 박점례는 이곳에서 아이코가 되었다가 다시 다약족 사람이 되었지요. 열대림 고산 생활은 말 그대로 원시생활이었지요. 산중 다약족 촌장의 네 번째 부인이 되었지요. 이름은 수미야티가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바깥 세계와는 담을 쌓고 사는 그들만의 세상이었습니다. 저 역시 살아남기 위해 다약족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마을 여자들은 절대로 산 아래로 혼자서는 내려갈 수 없는 불문율이 있었고 다른 지역 남자들과도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어겼을 경우 가혹한 처벌이 따랐습니다. 말라리아, 뎅기열 등 온갖 열대 풍토병에 시달리는 모진 삶 속에 다양한 독충과 야생동물들도 생명을 위협했지요. 철저하게 산 아래 세상과는 단절된 생활이었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지금까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촌장인 남편이 성격이 무던해서 다른 부인들과의 알력 없이 원만하게 지낼 수 있게 조정을 잘해 주었지요. 다약족 여자보다 피부색이 밝은 조선 여자에 대해 심한 열등감이 있는 이곳 여자들은 틈만 나면 저에 대한 이간질을 남편에게 했지요. 그런 남편이 세상을 뜬 것은 제가 산에 올라간 지 10년 정도 되던 해였지요. 야생 멧돼지를 사냥하다가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아마 제 나이 33살 때였을 것입니다. 마을 관습에 따라 저는 죽은 남편의 큰아들 부인이 되었지요. 큰아들 이름은 아흐맛이었는데 나이는 스무 살이 조금 넘었는데 벌써 부인이 두 명이 있었고 마을 무당 역할도 같이 하고 있었죠. 마을 전체 사람 수는 70명 정도 되었는데 한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떠돌아다녔지요. 아직 논 농사짓는 법을 몰랐습니다. 화전을 일구고 살고 있고 주로 타피오카를 키우고 있지요. 돼지가 재산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여자의 지위는 매우 낮습니다. 심지어 다른 부족 여자를 돼지나 창, 활 등, 값나가는 것을 주고 사오 곤 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저 역시 뜰라왕에서 연합군 공습으로 위안소가 파괴되어, 며칠 현지인 집에 피신해 있을 때 죽은 남편이 집주인에게 돼지 네 마리를 주고 저를 사 왔다는 것을 들었지요. 돼지 네 마리와 교환이 된 것이지요. 여기 사람들은 피부병인 카스카도에 시달리고 있고 미신과 귀신을 굳게 믿고 있지요. 어떻든 살아남기 위해 다약족 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목숨은 참 모질다고 봅니다. 죽은 남편의 큰아들, 두 번째 남편도 제 나이 사십 초반에 석청을 따러 절벽을 오르다가 떨어져 삼일 헛소리하다가 죽었지요. 제 몸이 워낙 망가져 두 남편 사이에 아이는 없었지요. 마을 회의에서 관습에 따라 저를 마을의 공동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아이를 출산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에 마을 남자 중 홀아비들의 성욕 해소하는 상대가 된 것입니다. 그 대가로 구눙 비루비루에서 밥을 먹을 수가 있게 된 것이지요. 이제 무엇을 더 숨길 것이 있겠어요. 참. 그래도 이곳 여자들은 다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데 조선 여자 체면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가슴만은 꼭 천으로 가렸습니다.】
나는 공책을 조용히 덮었다. 고무나무 농장 사이로 보이는 바리토 강물이 햇볕을 반짝이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유골은 밤 12시가 되어서야 수습이 되었다. 쇄골을 못한 유골을 회사에서 마련한 함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그 양이 많지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유골 함을 안고 자카르타를 경유하여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어느새 밀양, 표충사 경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직도 자동차 안에서는 김 기사가 틀어 놓은 ‘밀양 아리랑’이 어떤 때는 즐겁게 어떤 때는 슬프게 들리고 있었다. 내 품에는 32년 만에 귀향하는 한 여인의 한이 한 줌 유골이 되어 작은 함 안에 들어 있었고 그 앞엔 顯妣孺人密陽朴氏神位 라고 쓴 지방이 놓여 있었다. 태어나 박점례로 귀여움을 받다가 아키코로 온갖 수모와 치욕을 당하다가 수미야티로 죽은 한 여인의 한 많은 귀향인 것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이 이야기는 1991년 ‘위안부’참상을 국내에서 최초로 밝힌 김이순 할머니의 피 맺힌 증언보다 16년 앞선 어느 여인의 슬픈 귀향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