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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6)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설 교 >
영원한 절대긍정
>성경본문|
시23장 04절 ~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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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신앙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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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용기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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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영원한 절대긍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죄, 유혹, 정욕, 탐심, 질병, 고통, 가난, 미움, 절망, 죽음 등등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와같은 수많은 부정적인 환경속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적으로 부정적인 생각과 인격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데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쉽게 부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결단과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갖게 되면 영원한 절대 긍정적인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절대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길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체험
첫째로, 시편은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체험을 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에는 기쁨과 활기와 희망과 꿈과 행복이 따르지만 사망에는 슬픔과 무기력과 절망과 좌절과 불행과 고독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망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에 오늘 세상에는 슬픔이 꽉 들어차고 무기력, 절망, 좌절, 불행, 고독이 횡횡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2절로 23절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속에 넓은 들판을 걷고 평탄한 평지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침한 골짜기를 마귀의 습격이 있는곳, 으시시한 공포의 곳, 버림받은 곳, 피할곳이 없는 곳, 벗어날 힘도 방책도 없는 이와같은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경제적인 고통속에서 파산을 당하고 생활고에 허덕이며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강도를 하다가 잡혀온 사람의 말을 들으니까 부인은 만삭이 되고 먹을 것은 없고 직장은 잃고 할수 없어서 강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에는 그는 버림받은, 피할곳이 없는, 벗어날 힘도 방책도 없는 절망 상태에서 강도로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삶중에서 체험하는 최악의 어두운 곳이 바로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이럴 때 사람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타락을 하든지 자살합니다.
성경 시편 107편 10절로 11절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 한 여론조사 결과 우리나라 성인 다섯명중에 한명은 자살충동을 느껴본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살 이유로는 경제적인 이유가 34%로 가장 많고, 다음이 고부갈등, 부부문제, 미혼자는 애인, 친구문제, 직장문제 순서로 자살을 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주부들은 절반 가량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요즘 생활고나 성적비관으로 자살이 속출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 심정이 이해된다고 하는 사람이 국민중에 70%나 되는 것입니다. 지구촌 전체로는 40초에 한사람씩 자살을 합니다. 복지시설이 잘된 선진국에서는 주로 알콜중독, 가정불화, 무력감 때문에 자살합니다. 스위스는 매년 1,300여건, 홍콩은 1,100명, 일본에서는 90년대 이후 장기침체로 대량실업이 발생하면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이가 하루에 평균 100명입니다. 자살율 세계 최고요, 정신질환수도 세계 최고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그러나 주를 의지하는 사람은 이와같은 것들을 지나면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희망을 잃어 버리고 큰 상처를 입고 제기불능이 된다고 생각하므로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처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이길수 있는 것은 사망보다 더 크시고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두려움보다 더 위대하신 이를 우리가 확실히 알고 그를 모시고 있으면 두려움이 사방에서 오더라도 두려움보다 크신 이분앞에 두려움은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크고 작은 이가 부딪히면 큰이가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보다 더 크고 위대하기 때문에 이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8절에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들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가슴에 받아 들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밑에 들어가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는 1930년대 세운 세계에서 가장 높고 긴 교각을 가진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다리 위에서 아래쪽 바다를 내려다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습니다. 이 금문교를 지을 때 많은 중국 노동자들을 불러다가 금문교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문교를 짓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난간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다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기 때문에 할수없이 시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금문교 다리를 짓는 밑에 철망을 쳤습니다. 서커스 하는 사람밑에 망을 쳐놓고 서커스 하는 사람이 떨어지더라도 받아 주도록 그렇게 철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짓는데 희안하게도 철망을 쳐놓고 난 다음에는 한사람도 다리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똑같은 금문교 다리요, 똑같은 바다요, 똑같은 바람이 부는데도 철망을 치기 전에는 사람들이 종이장같이 떨어졌는데 철망을 치고 난 다음에는 난간을 유유이 걸어 다니면서도 떨어지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마음에 안심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철망이 없을때는 ‘내가 떨어져 죽지, 떨어져 죽지’하고 불안과 공포심을 가지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망이 있으니까 ‘떨어져도 나는 죽지 않고 산다’는 마음에 확신과 안심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떨지않고 난간을 걸어 다녀도 헛발을 딛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고 주의 능력의 날개아래 피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알게 되면 마음속에 안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흙같이 어두워도 주께서 나와 동행하시고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의지할때가 있다 할 때 마음에 안심이 되고 이 모든 좌절과 절망을 이길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부활했잖아요. 주님은 어떤 사망도 극복하시는 부활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죽음조차도 예수님을 막아 놓을수 없습니다. 사망은 그 음침한 골짜기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광명한 천지가 되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이기듯 예수님은 사망조차도 다 물리치고 이기신 것입니다.
요한1서 5장 5절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그 안에 있는 우리들은 사망의 세력조차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크리스탈처치 목사인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절대 긍정의 신조는 이렇습니다. ‘산이 앞에 가로막힌다 해도 나는 단념하지 않으리라. 나는 계속 도전하리라, 나는 산에 오르리라. 아니면 산밑에 터널을 파고 통과하리라.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산을 변화시켜 금광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절대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항상 같이 계신다는 것을 알면은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능히 지나갈수 있고 헤를 두려워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시편 91편 2절로 12절에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면 그가 여러분을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800년도에 6천명에서 만명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 교회당을 짓고 인도한 영국의 위대한 목회자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체험을 말했습니다. 그가 목회할 그때에 영국에는 콜레라가 만연했습니다. 템즈강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콜레라에 걸려 수없이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당국에서 조차 겁을 내어 가지고서 콜레라 환자들을 돌보지 아니하고 죽은 시체를 끌어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스펄젼 목사님은 자진해 가서 콜레라 환자들을 돌보고 기도해 주고 죽은 사람 시체를 끌어 내어서 화장을 하고 그렇게 하는데 너무나 지치고 스펄젼 목사님 자신도 하루에 콜레라에 걸려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는 온몸에 열이 확확나고 구토가 나고 설사가 하기 시작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해서 ‘나도 이제 콜레라에 걸려서 죽는가 보다’하고 생각하고 한 콜레라 환자집을 심방하고 오는 중에 어느 조그마한 가게를 지나는데 가게 종이 쪽지가 바람에 휙휙 날리고 있거든. 그래서 그는 차를 세워서 내려 가지고서 그 종이쪽지를 보니까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야웨는 나의 피난처시라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내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내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시편 91편 9절로 10절. 딱 적어 놓았다고... ‘아~ 하나님이 나를 절망에서 살리려고 이름도 모르는 이 가게 앞에 이러한 성경구절을 적어서 붙여 놓았구나. 그래서 그말을 읽고 자신의 영혼을 크게 흔드는 체험을 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야웨는 나의 피난처시며 내가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콜레라의 화가 내게 미치지 못하고 콜레라의 재앙이 나의 장막에 오지 못함을 믿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쏟아지더니만 그만 열도 뚝 떨어지고 구토도 나오지 않고 콜레라가 나아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만일 스펄젼 목사님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놀라고 떨었다면 그도 콜레라 환자가 되고 희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그냥 같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언제나 손에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없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할 때 그 손에 항상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지팡이는 건지는 도구입니다. 양이 올무에 걸렸거나 빠지면 주님께서는 그 지팡이로 건져냅니다.
시편 5편 8절에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말했고
시편 43편 3절에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으며
시편 107편 14절에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팡이를 가지고 여러분을 인도하며 여러분이 수렁에 빠졌을 때 건져 내는 역할을 하십니다. 막대기는 원수를 물리치는 도구입니다. 막대기를 가지고 원수가 오면 주님이 후려쳐서 원수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5절로 7절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키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스바냐 3장 15절에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6일 전쟁이 있었습니다. 병력면에서 열세인 이스라엘이 막강한 아랍을 6일만에 격파하여 세계 전쟁사에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전쟁이 끝난후 한 기자가 이스라엘의 백인 총리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막강한 아랍을 이길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군대에서는 절대로 내려서 안되는 명령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명령을 내립니까?“ 기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묻는 질문에 백인 총리는 짤막하면서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이스라엘의 장교는 절대로 밑에 있는 하사관이나 군인들을 보고 ”앞으로 나가라 는 명령은 안내립니다. 이스라엘 장교는 언제나 나를 따르라! 최전선의 앞에 서서 나가기 때문에 모든 군사들이 두말하지 않고 따라와서 전쟁에 이겼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디에서 전략을 배웠습니까?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님은 결코 양무리의 뒤에서 채찍을 때려서 인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앞장서서 인도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양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지팡이로 우리가 잘못가면 목을 걸어 당겨 주시고, 건져 주시고, 막대기로 원수를 치면서도 앞장서서 주님이 걸어 가시면서 ”나를 따르라. 나를 처다보고 따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 살 때 주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든 환경에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로 39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끈질기고 크기 때문에 우주에 어떤 세력이 와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어마어마한 사랑을 가지고서 우리와 같이 계시며 사나운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건지시고 싸워 주셔서 헤를 받지 않게 하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 마음속에 여러분 긍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어떻게 부정적이 될 수 있습니까?
미국 시사주간지 내셔널이코노미스트지에 도너츠의 세계적인 대명사인 ‘던킨도너츠’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너츠 회사의 설립자이자 회장인 빈 로덴버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치명적인 암에 걸렸으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긍정적인 생활태도를 통해서 암을 다 물리치고 세번 다 살아난 사실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85세까지 장수하다가 작년에 작고했는데요. 로덴버그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각종 질병이나 시련과 가지가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1971년에 폐암에 걸렸으나 절대긍정적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산다는 확신과 기도를 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뻐하며 견뎠는데 폐암이 낫고 말았습니다. 6년후에는 임파선 암이 걸렸으나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감사와 찬양하고 기도하며 나는 암으로 죽지 않는다. 절대 산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싸운 결과로 또 임파선 암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1990년에는 고환암을 앓았는데 이것은 치명적인 암이라고 진단을 받았으나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치료받은 결과 그것도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막대한 재산을 환원하고 암퇴치에 앞장서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긍정적인 마음의 믿음을 가지고 열심을 하면 당신의 삶은 가장 가치있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위해서 몸을 찢고 피흘려 값주고 사신 끔찍한 사랑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이 다가와도 긍정적인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2.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심
둘째로, 성경은 원수의 목전에 진수성찬을 베푸시는 주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원수가 멀리있지 않습니다.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사울은 그 사위 다윗과 싸웠습니다. 다윗의 원수는 바로 장인이 원수였습니다. 여러분 가인은 그 형제 아벨과 싸웠습니다. 바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처죽였습니다. 스승과 제자간에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은 스승이고 가룟유다는 제자인데 가룟유다가 스승을 죽는데 내놓았습니다.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어느곳에나 원수는 있습니다. 원수가 없이 살려면 이땅을 떠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땅에 있는 이상 가장 가까운 내 혈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웃, 친족, 친지간 원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어느 사람에게나 들어가서 우리를 죽이려고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의 삶의 태도가 우리의 힘으로 원수와 싸우려고 하면 안됩니다. 바울선생은 말하기를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면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요, 예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요, 하나님은 주인으로써 내 몸에 계시기 때문에 주인인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아 주시고 나는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만 살면 주인이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집의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집의 주인이 자기가 된다면 자기가 그집을 지키고 보호하고, 수선하고 돌봐야 되지 않습니까? 자기의 힘이 모자라면 자기 집을 지키거나 보호하거나 수선하거나 돌보지 못하잖아요. 그러나 우리의 성전 하나님의 집에 주인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섬기는 종이 된다면 우리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전지전능, 무소부지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집을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수선하시고 돌보아 주시니 집이 무너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인되신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다가오면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베풀어 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다윗이 베푼 골리앗 상을 보십시오. 여러분 골리앗은 블레셋 군대의 장군이었습니다. 바로 블레셋 군대가 보는 앞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능력을 주어서 골리앗의 목을 치고 진수성찬을 베풀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50절로 51절에 보면 블레셋 군대의 목전에서 골리앗 상을 베푸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블레셋 원수 군대들이 목전에서 다윗에게 골리앗 진수성찬을 차려 주었습니다. 골리앗을 다윗은 쳐서 이겼기 때문에 온 이스라엘에 알려지게 되고 만성천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베푸신 상을 보십시오. 느브갓네살 대왕의 목전에서 풀무불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천하에 대왕이요, 공중에 나는 새도 명령으로 떨어 뜨리는 위대한 왕, 그 왕을 대적해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우상에 절하지 않았습니까? 왕은 진노해서 일곱배나 뜨겁게한 풀무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던져 넣었습니다만 하나님은 그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정찬을 차려 주었습니다.
다니엘 3장 28절로 30절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느브갓네살이 아주 감탄했습니다. 세사람이 풀무에 던졌는데 네사람이 불풀무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네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뛰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풀무에서 나왔을 때 그는 묶어 놓은 밧줄만 타버렸지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고 옷하나 그슬리지 않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느브갓네살 대왕 목전에서 풀무불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은 크고 비밀한 일을 나타내셔서 우리에게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아는 것이야 우리가 해결할수 있지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역사로써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차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했었습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마음에 생각도 못한 것을 주님은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베푸시기 때문에 원수가 오면 밥상도 오는 것입니다. 원수가 안오면 밥상도 없어요. 원수가 오면 주님이 원수의 눈앞에서 진수성찬 차리시고 자기 자녀들에게 먹이시고 힘을 얻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셔서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성령의 기름을 주셔서 능력을 주시고 높여 주심을 말합니다.
미가서 7장 8절에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여러분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엎드러져도 일어나고 어두운데 앉아도 하나님이 빛이 되어서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92편 10절로 11절에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에게 보응하심을 내 귀로 들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33대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은퇴후 어느날 트루먼 기금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마침 동네 초등학교 학생들이 와있다가 노인 대통령을 발견하고 “야~”하고 모여 들어서 대통령 주위를 감쌌습니다. “대통령 할아버지는 우리들 나이에 인기가 있었죠? 학교에서 반장을 하셨겠죠?” 트루먼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정반대야, 나는 어려서부터 눈이 몹시 나빠 안경없이는 맹인과 같았단다. 재주도 없고 공부도 별로 잘하지 못하고 정말로 겁쟁이였단다.” 아이들은 뜻밖이라 놀라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까지 되셨어요?” 그러자 트루먼씨는 차분한 음성으로 아이들을 둘러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 계시고 나를 도와 주시고 내가 힘에 겨워서 아무것도 할수 없을때에도 나에게 힘을 주신다는 성경말씀을 평생으로 믿었단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지 다 할수있다고 믿었단다. 하나님이 내 등뒤에 계시니까.” 트루먼 대통령은 제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신 위대한 대통령이었지만 그는 말하기를 ”나약하고 겁이 많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속에 계신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알고 긍정적인 믿음으로 고백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미국을 구출할수 있었습니다.
우리 복음성가에 있지 않습니까?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주, 평안히 길을 갈때는 보이지 않지만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때는 다가와 손내미시네. 일어나 걸으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으리 내가 너를 도우리 (아멘) 할렐루야~. 그 결과로 우리 하나님과 같이 있으면 잔이 넘칩니다. 잔이 넘친다는 것은 큰 기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슬픔과 환난에 눈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주십니다.
시편 68편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30편 5절에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3. 야웨의 집에 영원히 거함
셋째로, 성경은 우리의 미래에는 야웨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에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같이하여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해 주시고 또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 차려 주신다고 해도 미래에 죽고 난 다음에 아무것도 없어 진다면은 얼마나 좌절과 절망이 다가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야웨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야웨의 집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장막집은 병들고 쇠약해지고 무너집니다. 우리의 몸이 얼마나 오래 간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도 소년시절이 있었고 청년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장년의 활기찬 시절도 있지만은 쉬 백발이 되고 온몸엔 병들이 생겨납니다. 전문가의 말을 들으니까 사람은 35세부터 완전히 늙기 시작한답니다. 35세가 피크랍니다. 옛날에는 35세에 거의다 죽었답니다. 요사이는 음식이 좋고 약이 좋아서 몸에 염증이 생기고 고장이 생겨도 좋은 영양과 약을 통해서 35세를 극복하고 80세까지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80을 살고 90을 산다해도 사람이 한번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 90편 3절에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안돌아갈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돌아갑니다.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 우리들도 30년의 세월만 지난다면 거의 다 갈길을 가고 맙니다.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가을이 와서 낙엽이 뒹구는 것을 보면 우리 마음에 감회가 깊습니다. 그렇게 여름철에 싱싱하고 푸르청청하던 나뭇잎이 이제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떨어져서 바람에 날려 갑니다. 그것을 볼 때 우리 인생의 종말을 우리도 가슴속에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있다 사라지는 안개니라. 내일일을 자랑치 말라. 오늘 네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세상 삶의 집도 그렇습니다. ‘아~ 나는 대통령이다. 나는 총리다. 나는 장관이다. 나는 회장이다. 나는 사장이다. 나는 이렇다’ 하고 으시댑니다. 세상집을 지어놓고 큰 소리 합니다. 바다에 가면 여러분 조그마한 바닷게가 모래안에 자기 집을 지어놓고 “아~ 내집이다. 내집이다.” 파도가 확 치밀어 오면 내집이 어디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모래위에 지은집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부딪혀 무너지는 것입니다.
전도서 5장 15절에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을 안고 지고 갈수 있습니까? 빈손들고 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6절로 27절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생의 집은 육신의 집도 늙고 병들어 무너집니다. 세상에 지은 집도 다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 시편 127편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 선생님이 애들을 데리고 소풍을 갔다가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 자유시간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놀이가 많지만 우리 어릴때는 놀이가 없어요. 애들이 그때는 땅에 줄을 그려놓고 땅따먹기를 합니다. 가위, 바위, 보하고 땅을 따먹고, 가위, 바위, 보하고 땅을 따먹고. 그렇게 하다가 네가 내 땅을 많이 차지했다. 아니다. 나는 억지로 땅을 차지하지 안했다고 패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패싸움이 벌어져서 엉켜가지고서 멱살을 잡고 머리를 박고 치고 박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호르르르’ 불었습니다. 놀라서 처다보니까 “자~ 이제 한줄로 다서라~ 집으로 돌아가자” 털털 털고 줄을 서기 위해서 나오보니 뒤에 남은 것은 네땅도 내땅도 없고 모래땅만 남았습니다. 이땅에 우리는 땅따먹기를 하고 있습니다. 좀더 많은 땅을 따먹은 사람들이 좀 땅을 잃어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요사이 정치권에도 여당과 야당이 땅따먹기 합니다. 대통령과 야당 당수도 땅따먹기를 해서 한분은 안내놓겠다고 하고 한분은 내놓으라고 금식까지 하고 앉아 있습니다. 주님이 호루라기를 불면 네땅도 내땅도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속에 아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야웨의 집으로 가든지 영원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든지 둘중에 하나를 택해야 됩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은 야웨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계시면 그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곳에 삶의 의미와 가치와 영광과 평안과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야웨의 집에 있을 것을 생각할 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야웨의 집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냐, 성경은 거기에서 조금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로 7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것이 야웨의 집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집이요, 예수님이 2천년이 걸려서 예비한 아름다운 있을 곳입니다. 저 건너편 강언덕에 아름다운 땅이 있도다. 믿음으로 그곳에 가겠네. 주님이 황금종 울리면 우리 다 손 털털털 털고 눈물과 근심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얼룩진 땅을 뒤로 두고 아버지 집으로 가게 될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희망입니까?
이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내 비록 아무리 약해도 주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와 함께 계시고 해를 받지 않게 해주시고 원수의 무자비한 공격도 주께서 대신 싸우셔서 오히려 잔치상으로 만들어 기쁨이 넘치게 하시고 죽음이 오면 아버지 집으로 이끌어 주시니 어떤 절대절망이나 부정적인 세력도 이 막강하신 주님 앞에서는 빛앞의 어두움처럼 사라지고 영원한 긍정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두움은 사라지고 빛만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사라지고 생명만 있는 것입니다. 고독은 사라지고 항상 주께서 목자로 계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정은 없습니다. 죽으나 사나 긍정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품에 품고 가시는 그길에 어떠한 부정적인 세력도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게 되실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총과 사랑에 감격하지 아니할수 없습니다.
야웨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저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니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버지여 이 계시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계시의 말씀을 가슴가득히 받아 들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우리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는 종으로써 넘치는 기쁨과 소망과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내 원수의 목전에서
시 23:5 / 이동원목사
제가 20대초에 처음 예수를 믿고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뜨거운 첫 믿음 첫 사랑의 감격으로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열심히 전도를 하곤 했었습니다. 하루는 서울에서 시내 버스를 타고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버스가 정류장에 서자 스님이 한분 차에 오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어쩐지 그분이 내 곁에 앉으실 것 같은 감이 들었습니다. 예감대로 제 옆 빈자리에 앉으시었습니다. 속으로 이분에게도 전도를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말을 어떻게 시작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기도하다가 마침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신약성경을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스님이 드디어 저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학생, 예수 믿으시오?"하길래 "그래서 네 예수를 믿습니다."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왜 하필이면 예수를 믿나?"하셔서 저도 그분에게 반문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왜 예수를 안 믿으십니까?"고. 그러자 느닷없이 이분이 "기독교는 차원이 너무 낮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하고 다시 묻자 "거,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았오?"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하자 이분이 말하기를 "우리 불교에는 원수가 없오. 기독교는 자꾸 원수를 만드는 것이 탈이오"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그러면 스님은 지금까지 살아 오시면서 마음에 부담이 되거나 만나고 싶지 않은 분, 어쩐지 피하고 싶은 스님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신 사람이 없으셨습니까?" 했더니 "아 그런 사람이야 어떻게 없을 수 있겠오?"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기회가 이때다 싶어 "그것이 바로 원수입니다. 성경은 있는 원수를 없다고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원수라고 인정하고 그다음 그를 어떻게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거든요.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도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성경에 쓰여 있거든요"했더니 "알았네 그만하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유달리 원수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게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네 원수가 네 집안식구가 될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머도 있잖아요. 결혼을 앞둔 손녀가 할머니에게 "할머니, 할머니는 처음 시집오셔서 할아버지를 뭐라고 부르셨어요? 처음엔 영감이라고 안하셨지요"하고 물었더니 "물론이지 처음엔 나도 당신이라고 했지"하시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요즈음은 어떻게 부르세요?"하자 지체없이 "응 요새는 웬수라고 해" 그러나 사실 성경적으로 성도들의 궁극적인 원수는 사단 마귀입니다. 그래서 대적 마귀라고 합니다. 마귀는 평생 성도를 따라 다니며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시편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펼쳐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묘사합니다.(북한에서 번역된 성경에 보면--원쑤를 보라는듯/상을 차려 주시고/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내 잔이 넘치옵니다.) 그러면 원수의 목전에서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1. 풍성한 공급의 은혜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결코 낭만적인 산책로는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때로 하나님의 양들인 우리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시련과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을 언제까지나 시련과 고통의 연속으로만 그리는 것은 또한 합당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귀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방법의 하나가 예수를 믿으면 혹은 믿음을 바꾸게 되면 집안에 우환이 생길 것 같은 그런 마음의 그림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원수의 목전에서 주님되신 목자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이땅에 오신 목적을 요한복음10:10에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파괴하고 빼앗고 손해보게 하는 것-그것이 사단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예수믿고 간신히 구원만 받아 고생하다가 죽을 때 천당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땅에서도 풍성한 생명, 풍성한 기쁨, 풍성한 의미, 풍성한 평화를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을 맛본 사람들로 하여금 "내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중동지방의 양들의 일생에서 가장 위험한 때가 골짜기를 따라 고원지대의 방목장으로 올라가는 시기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양들이 고원 산악지대에 당도할 때 그들이 안전하게 쉬며 양식을 공급받을수 있는 편편하고 넓은 바위가 있는 곳, 따스한 햇빛이 머무는 양지 바른 곳을 미리 답사하여 준비해 두는 데 이런 곳을 "메사"(MESA)라고 부른다 합니다. 일단 여기에 당도하면 목자들은 먼저 주변에 독풀들을 제거하고 가까운곳에 물웅덩이나 샘들이 있는가를 살펴 그 주변 환경을 깨끗이 정리하고 또한 맹수들의 불의의 습격을 대비하여 울타리나 둑을 만들어 자기의 양들이 마음껏 안심하고 향연을 즐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Table)을 베푸시고(한상 차려 주시고)--"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시는 지요? 이런 천연의 잔치자리 고산의 목초지에서 긴 여정에 지친 양들이 오래만에 마음껏 먹고 마실때의 소감이 무엇이겠습니까?--"내잔이 넘치나이다"이지요. 그래서 바울사도는 다소간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있던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도 로마의 감옥에서 시련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이런 약속을 전달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고.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메사의 은총 혹은 풍성한 공급의 은총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여정이 조금은 힘들고 피곤해도 저 높은 곳-고원의 목초지에 예비된 향연을 기대하신다면 우리는 오늘의 시련을 견딜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골짜기를 오르며 지쳐가는 양들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조금만 참아 곧 우리는 메사에 도착한단 말이야"고. 저는 어린 가난했던 시절을 회고하면 그 암울한 시기를 견딘 힘이 잔치날에 대한 기대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집 잔치가 아니래도 상관없습니다. 동네 잔치만 열리면 그 날은 내 잔치 날 그리고 내 잔이 넘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민족이 겪고있는 고통도 내일의 잔치를 위한 산고와도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모두 내일의 잔치날을 그릴수 있다면 오늘의 고통을 슬기롭게 이겨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그리면서 하나님 나라가 잔치집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잔치 날이 다가옵니다. 그 날 원수의 목전에서 누리게 될 그 풍성한 공급의 은혜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2. 완벽한 치유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원수의 목전에서 경험하게 될 두 번째 은혜는 완벽한 치유의 은혜입니다. 믿음의 여정에도 상처는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상처를 치유하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여행은 머지 않아 좌절할 것입니다. 목동출신의 목사인 필립 켈러는 여름철 여행하는 양들을 공격하는 가장 큰 원수들이 파리떼라고 합니다. 그는 파리떼의 다양한 종류들을 열거합니다. "쇠파리, 말파리, 발뒤꿈치 파리, 코파리, 사슴파리, 진디, 등에, 모기, 각다귀, 날개달린 각종 해충파리등--"양은 특히 코파리에게 약하다고 합니다. 이 작은 파리들은 양의 코에 덮힌 촉촉하고 끈끈한 점막에 알을 낳으려고 기회를 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의 주위를 윙윙거리며 귀찮게 한다고 합니다. 만일 코 파리가 알 낳기에 성공하면 며칠안에 부화되어 작고 가느다란 벌레와도 같은 유충이 되어 콧구멍을 통해 양의 머리속까지 파고 들어가 각종 염증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양은 이런 고통을 받으면 머리를 나무나 바위에 부딪치며 데굴 데굴 구른다고 합니다. 이때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여러 가지 향료를 섞은 올리브 기름을 양의 코나 귀, 목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에 계속 발라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심할 경우 아예 목자들은 양들을 약물 기름통에 양들의 머리를 잠시 잠기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때에 사용되는 올리브 기름은 이미 받은 양들의 상처를 치유하며 더 이상의 파리떼의 공격에서 양떼를 보호합니다.
이제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는지요?--"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잔이 넘치나이다"
사도 야고보는 교회 지도자들이 병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약5:14)고 가르칩니다. 상처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의 기름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61장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마음이 상한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며--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의 위로도 필요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위로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상처의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영, 그 영의 기름부으심만이 완벽한 치유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어제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오늘의 상처를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오늘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고통의 때가 민족 주체들 사이에 서로를 비난하는 때가 아닌 서로를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받는 기회가 되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만일 이 시기가 서로의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감정적인 비난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남북 분단의 고통에다가 남남 갈등의 또다른 상처를 추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부족하고 연약한 인생들인 것을 인정하며 보다 더 이상의 상처내기를 중단하고 하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경각심과 겸손의 자리에 선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원수의 목전에서 또 한번의 시련을 이겨낸 민족의 축배를 들게 될 것입니다.
3. 새로운 사역의 은혜입니다.
기름 부으심은 소극적으로는 치유의 역할을 감당하지만 적극적으로는 새롭게 다시 행진을 시작할 준비를 가능하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름 부으심은 새로운 사역의 은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잘 아시는대로 본래 구약시대에서는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이 임명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역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다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주실 메시야를 기다리게 됩니다. 메시야 혹은 희랍어의 그리스도는 바로 기름 부으신 자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사건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기름부음 받은 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먼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상처받은 이웃들을 위해 우리가 그들의 상처를 만져주는 작은 목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은 단순한 자기만족의 고백이 아닌 사명을 이루는 자의 감격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작가 정연희씨가 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감동적인 실화 소설을 읽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맹의순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여 쓰여진 것입니다. 맹의순선생은 조선 신학교를 다니던 20대의 피가 뜨거운 청년이었는데 6.25전쟁 당시 남하하다가 공산군 간첩으로 오인되어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이런 상황을 비관하기 보다 수용소내에 광야 교회를 만들어 포로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기로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맹선생의 신분이 확인되어 그는 수용소에서 나갈수 있었는데 그는 자원해서 남아 수용소내에서도 가장 열악한 형편에 있었던 중공군 포로들 특히 병든 환자들을 생명을 바쳐 섬기다가 자신이 병들어 쓰러져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다음은 그의 장례예배에서 한 중공군 포로가 대표로 읽은 추모사입니다.
"맹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인이셨던 맹의순 선생이 가시다니.--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가 우리의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했고 무시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그의 행동은 희생과 헌신으로 여일했습니다. 선생의 한손에는 성경책이,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물통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선생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골고루 만져주고 주물러 주면서 그렇게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알아 들을수 없었지만 그의 기도를 듣고 있으면 기승하던 고통이 스러지고, 신음과 함께 목이 타서 잠못 이루던 육체가 편안한 잠의 품에 안기게 되곤 하였습니다. 겨울이면 따뜻한 물로 여름이면 시원한 물로 우리의 얼굴을 씻어주고 손을 닦아 주셨습니다. 때로는 발도 씻겨 주셨습니다.--선생이 쓰러지던 그 마지막 날 밤--마지막 환자를 다 씻기고 일어난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 씻을 생각도 않으시고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 더듬 읽어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 봉독하신후 높은 곳을 바라보시며 다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따라 외었습니다."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잔이 넘치나이다." 이 말씀과 함께 마지막 환자를 씻겨낸 물통과 대야를 들고 일어나시다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 지셨습니다. 우리는 통곡했습니다. 염치없는 우리가 선생을 돌아가시게 했다고. --우리는 통곡합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맹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맹선생과 함께 주님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거제리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들 일동/이때 그의 나이 불과 26세--그러나 진실로 그의 짧은 생애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으로 이 기름이 부어져야 할 어린양들을 위해 다시 부어진 생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야말로 원수의 목전에서 베풀어진 은총의 삶이 아니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부어 주셨던 그분처럼 말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는 이때, 그리고 우리 민족이 참된 리더십에 목말라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 이때에 우리에게 맹의순 선생이 누리고 나누었던 그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빈잔에 넘치는 은혜 시
시 23:5 / 김근중목사
지난 주간에는 경남 지역아동센터 공부방 연합회 총회가 진주 강남교회에서 모였습니다, 전국에 저희 지역아동센터가 680개나 되니 굉장한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교회로서 70%이상이죠 특히 어려운 교회들이 많이나서서 지역 아동들을 돌보는것을 보면서 이제5년째를맞이하는 우리 센터들이 좀더 어려운 이웃을 향하여 가까이 가기를원하며 이번 총회에서 부족한 죄가 2년동안 경남을 돌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성도님들이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속담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서만큼 정확하게 적용되는 영역도 드물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허함을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가리려는 마음, 하나님과의 관계의 잘못에서 오는 불만족과 고통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아니하려는 인간의 회피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회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주신 첫 말씀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이 대목은 소위 팔복의 말씀이 실려 있는 첫 번째 부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 첫 번째 복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축복의 성격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모든 복들은 첫 번째 복 안에서 누리는 결과로서의 구체적인 복을 의미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 그 자체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결코 인간의 행함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앙이 가져다 준 마음의 상태입니다.
‘가난한’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 ‘파산 선고받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집안이 몰락해서 법원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고 거리에 쫓겨나게 되어 가난한 자가 된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뜻밖의 호의(好意)에 대하여 거절하거나 마다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 호의가 주어졌을 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절대적인 의존의 상태, 이것을 ‘가난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회복에는 반드시 순서가 있습니다. 회복이 있기 전에 먼저 심령이 가난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한 없이 낮아져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도우심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소망을 줄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가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거나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가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한다고 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되겠습니까? 소유는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부요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응시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소유를 통해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또한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가난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마틴 루터(M. Luther)의 수도 생활의 체험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그는 수도 생활에 있어서 남다른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맨 무릎으로 돌계단을 기어오르며 다리가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숙제는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수없이 많은 날들을 굶었으며 때로는 물 한모금도, 빵 한 조각도 먹지 않은 채 3,4일 씩 동굴에서 금식하며 추위에 떨기도 하였다. 그렇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동안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다시 따뜻한 방에 누워 피곤을 풀면 죄와 욕심들이 영혼 깊은 곳에서 살아나기 시작했고, 나는 또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 같은 절망을 느꼈다.”
그러면 진정한 영적 회복을 위해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가난한 자가 되어 영적 회복을 넘어 심령의 부흥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인식(認識)’이라는 단어를 언제나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먼저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매우 궁핍하고 헐벗고 있으며, 자신의 삶의 모든 불행과 불만족의 원인이 바로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과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불만족스러운 삶,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목양 아래 있는 풍성함과 신령한 만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며 그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그릇된 만족입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만족입니다. 하나님의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만족이 아닌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첩경입니다. 영적인 회복과 소생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는 은혜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소생시키시는 은혜의 역사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는 심령의 가난함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령의 가난함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분명한 영적인 인식을 가질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인간은 모두 이런 빈 잔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령 속에 깃들여 있는 이 빈 잔은 영원한 가치가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잔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로도 채워질 수 없는 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식과 의와 거룩한 성품들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심령 속에 이렇듯 영원한 세계를 향한 갈망을 주셨고, 하나님 자신을 향한 목마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주셨지만, 인간의 죄악 된 성품과 악한 삶이 그들로 하여금 점점 더 그러한 갈망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가치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갈망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과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거받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할 때 느껴지는 절대자에 대한 감각과 영원에 대한 희미한 의식이 그들로 하여금 거짓된 신들과 우상에 굴복하게 하고 운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데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자신의 영혼에 빈 잔이 있으며 삶의 모든 허무와 불만족이 여기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깃든 다른 욕망의 잔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우고 그 결핍으로부터 마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 잊어버릴 수 있으나,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는 인간의 영혼의 빈 잔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십시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진정한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면서도 때때로 세상의 자녀들을 부러워하는 때가 있습니다. 마치 매일 기적의 만나를 먹으며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누리는 때의 세상 사람들의 즐거움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한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겪는 삶의 허무함과 향방 없는 몸부림으로 지친 그들의 내면의 세계를 주목해 보십시오. 목자 없이 살아가는 양떼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양떼의 대열을 이탈하여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이리저리 헤매는 길 잃은 양들이 잠시는 자유롭게 보일런지 모르나 목자 아래 있을 때보다도 더 큰 구속과 속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것을 우리는 자유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받으시고 구원 사역을 시작하실 때, 오히려 주님의 눈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이 세상의 백성들이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로 비쳤습니다(눅 4:15-19).
이렇게 극단적인 죄악과 범죄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과 땅에 있는 썩어질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을 추구함으로 삶의 만족을 얻어 보고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빈 잔에서 오는 허무함을 메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언제나 잠시 인간을 만족하게 할 뿐, 진정한 행복을 위한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가치들, 세상 학문이나 예술이나 문화나 이웃을 향한 진실어린 봉사나 세상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 넘치는 인정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갈망, 이 모든 것들도 역시 세상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치 있다고 해도 결코 절대선(絶對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안전한 행복을 위한 궁극적인 대안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자신의 영혼의 빈 잔에 채워지는 만족을 경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잔을 여전히 비워둔 채 쓸데없는 것들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영적인 회복과 치유의 출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고,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평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뜻을 다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고통 받고 있으나 회복으로부터 아직 먼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영적 회복을 위하여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정확한 인식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온 자신의 껍질뿐인 삶의 무가치함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언제나 더 크고 위대한 보상을 가져다줍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것은 나쁜 의미에서도 그러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위장(僞裝)의 천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참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감추려고 하는 위장의 몸부림이야말로 헛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가장하려고 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손으로 찬란한 빛을 가리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주여 보옵소서. 나의 영혼의 빈 잔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만이 나의 만족이시옵나이다. 이제껏 저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오래 참으시는 자비하심을 나의 방종의 기회로 활용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내게 베풀어 주신 원수 앞에서의 이 식탁을 인하여 내 영혼이 만족을 얻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제게 베푸시는 말씀 식탁을 인하여 제 영혼이 배부르며 내게 부으신 성령의 은혜로 나의 심령이 만족을 얻사옵나이다. 하나님, 당신이야말로 나의 전부이옵나이다.” 이렇게 온 영혼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깨우고, 세상에 있는 것들로 영혼의 빈 잔에서 오는 고통을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허무함을 보여주며 목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영혼 속에 타오르는 은혜의 불길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회복(回復)을 갈망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의 빈 잔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외로는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로 채워 보려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기자인 이 시인에게도 바로 이런 빈 잔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고 체험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언제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을 때였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고 기름으로 자신의 머리에 바르신 것을 생각했을 때였습니다. 어쩌면 이 일은 방금 일어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오래 전에 원수 앞에 수없이 식탁을 베푸시고 한 번 기름으로 부어 왕으로 세우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케 하셨던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는 그는 자신의 빈 잔이 오직 하나님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채우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교회가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復興)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 중 이 말보다 적합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차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가득 찬 상태이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넘친 은혜와 소망의 잔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흘러나온 그 기쁨과 변혁의 물결이 온 세상을 뒤덮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가장 불타오르는 열망(熱望)은, 그 백성들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내며 땅 끝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명백히 볼 수 있으리만치 하나님과 교회와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위하여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열방(列邦)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 때문에 타오르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불꽃을 간직하게 된 사람, 그 존귀하신 하나님을 아는 은혜의 불을 만나는 사람들 가슴마다 붙여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언젠가 그 불이 온 땅을 사르리라고 믿으며 사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은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회복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이런 열망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가난한 심령으로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기뻐 받으십니다. 아무 때나 어디서든지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하여 흘러가는 세상과 변천하는 사상 속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고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이렇게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熱望)이 너무나 간절하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대를 능가하는 은혜를 온 땅에 가득히 부어주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참된 영적인 부흥(Revival)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유혹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복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차게 하시는 것이야 말로 대치할 수 없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시 67:1-4). 고난 받을 때에 다윗의 기도는 그가 어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6-7).
그런 의미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바로 환희(歡喜)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자라가는 신앙생활은 단지 불만(不滿)이 사라진 삶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만족(滿足)을 넘어서 환희의 고백이, 단순한 감사를 뛰어 넘는 희열의 찬송이, 평범한 즐거움을 능가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 안에 깃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기쁨과 희열에 넘치는 내면세계를 가지고, 소망이 없는 어두운 세상에 자신 속에 있는 소망(所望)에 관한 이유를 들려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 바라고 추구한 그 이상의 영원한 가치에 대한 소망,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되찾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환희(歡喜), 이것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단어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친숙해야하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갔던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환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를 지나며 눈물 골짜기를 더듬기도 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강당하기 위하여 애통하는 자로 이 세상을 살기도 하였으며, 슬픔을 머금은 나그네로 먼지 나는 황야 길을 걷는 것처럼 인생 여정을 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들에게는 슬픔을 능가하는 위로와 애통함을 능가하는 환희와 서러움을 초월하는 희락(喜樂)이 있었습니다. 환경은 그들을 울게 만들었고 그들 앞에 놓여진 거대한 사명들은 그들로 하여금 애통하며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지만, 영적인 삶 한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은 그들만이 아는 놀라운 위로와 기쁨을 가득히 채워 주셨습니다. 그들은 고난에 넘치는 위로,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기쁨, 박해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그 위대한 기쁨의 원천이 오로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별로 웃을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부어주신 그 놀라운 영적인 자선(慈善)들은 그들로 하여금 능히 불굴의 확신과 투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적인 승리와 완성을 대망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반드시 역사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세상의 나라는 망해도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영히 서리라는 불붙는 확신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삶 안에서 희락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기쁨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비밀은 곧 기쁨의 비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신앙의 기쁨은 언제나 은밀한 세계 안에서 경험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경험한 그들끼리는 서로 압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을 노래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은밀한 내면의 기쁨과 아픔을 이기고 상처받은 자의 고통을 위하여 희생의 포도주를 붓는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진정한 희락이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회복은 단지 상한 감정의 치유가 아닙니다. 지난날의 상처에 대한 기억을 합리적으로 바꾸어 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영적인 회복은 실로 치유나 회복 이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된 영적인 회복은 지난날에 상처에 대한 치유를 넘어서서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믿음 생활해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신앙의 회복을 초월하여, 이렇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희열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심령의 부흥입니다.
이렇듯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와 기쁨이 죄악 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거룩한 능력으로 충만하게 될 때 그는 이미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의 선교의 지도와 복음화의 판도가 변화될 수 있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방탕한 세상이 우리의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하였는지 기억한다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휘장을 여시고 보좌에 이르는 새로운 생명의 길에 당신의 보혈을 뿌려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지고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그런 사랑의 예수를 세상은 미워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자신을 구하려 오신 생명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람들이 온 세상을 구하려 오신 그분의 몸값을 은 삽 십으로 계산하였으니 이것은 당시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심을 못 박은 세상의 피 묻은 손과 악수할 수 있겠습니까? 그토록 주님을 미워한 세상의 가슴에 안길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몸에 흐르는데 그토록 그분을 저주한 세상의 입에 입 맞출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밀어(蜜語)는 오직 우리의 주님께 한 번 바쳐진 것으로 족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우리의 것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는 세상과 혼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언젠가 우리들에게 감격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매인 바 된 특별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原動力)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특별한 영적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렇듯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 가운데 살아야할 특권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펼쳐진 이 엄청난 고통과 슬픔의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무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어두운 세상을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원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합니다. 오직 그러한 힘이 하나님께로만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위대한 능력을 당신의 말씀의 숲속에서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숲속을 사모하십시오. 장엄한 성경 진리의 원시림 속에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경험하십시오. 어두운 세상을 찬란한 불꽃으로 살아서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말씀의 숲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배우십시오. 거기서 잠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의 영혼은 새로운 체질의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인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넘치는 성령의 부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인 삶을 허락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저절로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악한 욕망과 더불어 싸우고, 죄의 세력과 더불어 다투는 가운데 승리하게 하시는 당신 자신을 체험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신령한 원동력을 공급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가 이렇게 환희가 찬 고백을 하기까지는 그가 살아온 삶의 과정과 신앙의 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을 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 속에서 그는 날마다 그분과 자신의 관계를 붙들고 살아갈 새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그분 안에만 모든 부요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찾는 자들을...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시 23:5 / 이성희목사
추석 명절입니다. 일전 어느 기관에서 조사한 것을 방송에서 들었습니다. 추석에 시댁에 간 며느리가 시어머니로부터 가장 듣기 좋은 말이 “준비하느라 수고했다”, “어서 친정에 가야지”란 말이랍니다. 반면에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더 있다 가라”란 말입니다. 더 있다 가라는 말은 사실은 좋은 말인데 사랑이 없는 말은 듣기 싫은 말이 되고 며느리가 시댁에 잠시라도 더 있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뜻입니다. 왜 명절이 되면 꼭 며느리만 힘들게 일해야 합니까? 누구에게나 사랑이 넘치면 감사가 넘칩니다. 사랑이 없으면 불평이 넘칩니다. 감사가 넘치는 관계가 아름다움도 넘칩니다. 시어머니들, 며느리들 빨리 보내주세요!
성경은 다른 경전과 달리 ‘감사’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감사의 종교라고 합니다. 감사는 은혜 받은 자가 은혜 베푼 자에게 고마움을 보답하는 뜻으로 마음과 행동, 그리고 입술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감사하라”는 말은 아주 강한 부정과거 명령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 어디에도 원망하라는 말이 있습니까? 그런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성가 로널드 롤하이저는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바울과 실라를 보세요. 복음 때문에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억울한 매입니다. 억울한 투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했습니다. 감옥에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찬송했습니다. 이 때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립니다. 간수가 “형제들아 어찌할꼬?”하면서 회개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빌립보가 변화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감사로 시작한 2차 전도는 복음의 열매가 풍성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30에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라고 합니다. 비록 비방거리이지만 감사하면 비방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무엇이든 넘치면 독이라고 하지요? 좋은 것도 과다하면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지요?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습니다. ‘과하면 또한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매사에 넘쳐도 안 되고, 그렇다고 모자라도 안 되는 삶을 사는 것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비가 와야 하지만 넘치면 홍수가 납니다. 바람이 불어야 시원하고 좋지만 지나치면 태풍이 됩니다. 음식도 먹어야 하지만 과식은 금식보다 해롭습니다.
그런데 넘쳐도 좋은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은혜를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고후 9:8). 지혜와 총명이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엡 1:8). 넘치는 기쁨이라고 합니다(고후 8:2). 영광이 넘치다고 합니다(고후 3:9). 의의 선물이 넘치다고 합니다(롬 5:17). 넘쳐도 괜찮은 것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은혜를 헬라어로 ‘카리스’라 합니다. 이 말은 분에 넘치는 호의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감사란 말의 헬라어는 ‘유카리스타’입니다. ‘카리스’란 말과 비슷하지요? 감사는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넘치는 감사로 보답해야 합니다. 은혜가 넘치는 호의라면 감사도 넘쳐도 좋습니다. 넘치는 감사의 조건이 무엇인지 다시 우리의 마음에 새겨보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6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합니다. 넘치는 감사의 조건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에바브라라는 사람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 받아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아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골로새 교인은 이전에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구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주인이 바뀐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식당이나 어떤 영업장도 주인이 바뀌면 리모델을 합니다. 식당에는 맛이 바뀝니다. 심지어 홀 서빙하는 알바들이 바뀌고 웨이터가 교체되기도 합니다. 주인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주인이 바뀌면 우리의 모든 것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바울 서신 전체에는 예수님이란 단어는 219회 나타납니다. 주님이라는 단어는 272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란 단어는 389회 언급되어 있습니다. 반면 사탄이라는 단어는 10회 나타나고, 마귀라는 단어는 6회 정도 언급됩니다. 성경은 주님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헬라어의 ‘키리오스’란 단어는 주인 혹은 위엄의 존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밝은 빛을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주’라는 말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위엄스런 존재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까지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이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관한 사람이었지만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선생이여”라고 합니다. 그물을 내리고 많은 고기를 잡았을 때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그는 “주여”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하는 순간 그의 삶의 주인은 바뀐 것입니다. 그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의 것을 다 버릴 수 있습니다. 이전에 무엇을 따랐든지 관계없이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고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젊은 관원의 경우를 보세요. 그는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도 죄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율법을 행하라고 했을 때에 “내가 어릴 때부터 율법을 다 행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자세가 전혀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것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그의 마음의 주인이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그의 주인은 여전히 물질이었고, 지식이었고 명예이었고, 지위이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대표 시 ‘인빅터스’(Invictus)는 유명한 시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다. 내 영혼의 선장도 나다”. 정말 그렇습니까? 자신이 자신의 주인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삶과 죽음을 자신이 조절할 수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오만한 자는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반면에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고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쾌락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끔찍한 수치감 속에서 내 인생이 끝나 버렸다”. 누가 더 겸손합니까? 누가 더 확실합니까? 누가 더 지혜롭습니까? 헨리가 아니라 와일드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넘쳐 보이지만 미련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돈은 최상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주인으로 모시지 마십시오. 돈을 종으로 부리십시오. 내 주인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지식입니까? 명예입니까? 권력입니까? 건강이나 미모입니까? 무엇이든 내가 주인으로 섬기면 그 주인에게 지배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 때문에 절망하고 그것 때문에 파멸에 이릅니다. 낭패와 실망이 끊이지 않습니다.
최근의 복음성가 가운데 너무 가사가 좋은 찬양이 있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내가 주인 삼은 것을 내려놓는 순간, 내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십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집에 불이 났습니다. 어떤 이가 와서 웨슬리에게 집에 불이 났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웨슬리는 “주님의 집에 불이 났군. 내가 책임질 일이 하나 줄어들었군” 하였답니다. 그리스도를 주인 삼은 자의 당당함입니다. 감사입니다.
시편 23:5에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다윗은 노래합니다. 이 절은 23편의 클라이맥스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주님 때문에 넘치는 잔입니다. 하나님이 주님이시기에 다윗은 늘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넘치는 감사의 삶을 우리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면 감사함이 넘칩니다.
7절입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뿌리를 잘 내리면 감사함이 넘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란 말은 ‘에르리조메노이’란 헬라어입니다. 식물을 비유한 말로서 완료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 단번에 그리고 영구적으로 되어진 것임을 시사합니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절대로 옮기거나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움을 받아’는 굳건한 터 위에 건물을 지어 올라가는 형상을 비유한 것입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잘 세워집니다. 이런 삶이 감사가 넘칩니다.
나무는 뿌리를 통하여 수분이나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나무를 지탱하게 합니다. 나무의 잎은 엽록소를 가지고 나무를 풍성하게 합니다. 줄기와 가지는 각자의 교류와 작용을 통하여 나무가 잘 살게 합니다.
뿌리는 나무가 자라기 위한 기본입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뽑히지 않습니다. 물을 잘 빨아들입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위로 잘 자랍니다. 땅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것들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뿌리입니다. 깊은 뿌리가 높은 나무를 지탱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18에는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나무 가지가 아무리 멋있게 뻗었고, 잎이 푸르고, 줄기가 든든해도 뿌리가 약하면 태풍에 뽑히고 맙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말씀하신 돌밭에 떨어진 씨앗을 보세요. 마태복음 13:6에는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라고 합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뿌리가 마르면 절대 나무는 자라지 못합니다.
뿌리가 없다거나 뿌리가 말랐다거나 뿌리가 썩었다면 나무나 잎이나 줄기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이 다음 날 지나가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로서 생명이 끝납니다.
중국에는 ‘모소’라는 대나무가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자라는 특이한 식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으면 5년 동안은 어린 싹밖에 볼 수 없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물을 주고 가꾸어도 고작 3센티밖에 자라지 않습니다. 5년이 지나면 모소 대나무는 기절할 정도로 빨리 자랍니다. 90일 만에 약 27미터나 자랍니다. 모소 대나무가 실제로 자란 건 언제입니까? 처음 5년입니까? 마지막 90일입니까? 90일 동안 자란 것 같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5년 동안 자란 것입니다. 나무는 보이지 않는 부분 즉 땅 밑의 뿌리 체계가 나무를 결정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라고 있습니다.
땅속에서 뿌리를 잘 내리면 보이는 부분이 자라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박으면 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믿음에서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뿌리를 박으면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굳게 서 있으면 미혹하는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는 찬송처럼 그리스도는 굳건한 반석입니다. 그 위에 뿌리를 내리면 든든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종말의 징조는 미혹하는 자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까지도 의심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안티 세력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를 그리스도에게 박고 있으면 이런 모든 미혹이 겁날 것이 없습니다.
호세아 14:5에는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뿌리가 박힌 삶은 견고합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릴 때 감사하는 삶을 영위합니다. 감사를 하되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페릿슈온테스’라는 말은 강물이 제방을 넘쳐흐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든든한 뿌리로 믿음에 굳게 설 때에 우리의 삶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업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에게 업히기를 원하시고, 당신에게 뿌리를 내리기를 원하십니다. 캘리포니아의 세코이아라는 큰 나무는 바람에도 뿌리가 얼기설기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다른 나무들이 다 쓰러져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선인장은 그 뿌리가 200미터까지 뻗어서 물을 찾아갑니다. 연못의 연꽃은 더러운 물에서 살지만 뿌리는 맑은 물이 흐르는 쪽으로 뻗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뿌리 때문에 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굳건히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뿌리를 내려 흔들리지 않게 합시다. 주님을 찾아 뿌리를 내립시다. 주님을 향해 멀리 뿌리가 뻗게 합시다. 이런 든든한 뿌리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결론
골프의 황제 잭 니클라우스는 ‘감사합니다’란 말 잘 하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감사를 잘 해서 손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스텐리 존스는 “교양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감사할 줄 아느냐 감사할 줄 모르느냐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이것은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감사가 넘치면 자신에게 유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넘치게 주십니다. 매일의 삶이 잔이 넘치는 삶입니다. 은혜에 보답하면서 감사를 넘치게 하십시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는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감사하므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으면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으면 감사가 넘칩니다.
이런 넘치는 감사로 풍성한 삶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름을 부으실 때
시 23:5 / 김남준목사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5).
빈 잔과 같던 시인의 영혼이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졌던 또 다른 이유는 주께서 기름으로 그의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등장하는 소위 삼직에 대한 기름 부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직임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셨습니다. 왕과 제사장, 선지자가 그들이었습니다. 먼저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아가서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들이 죄 사함을 얻게 하고,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왕은 선지자와 제사장의 섬김과 함께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라 전체를 통치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도록 부르신 일꾼이었습니다.
이 세 직분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만들기 위해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자연적인 능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 직분을 소명을 받은 사람들을 임직시키실 때,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셨는데 이 기름 부음은 단지 의식적인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의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세 번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긴 것은 첫 번째 기름 부으심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왕으로서 기름을 부었을 때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기름을 부으매 여호와의 성신이 그에게 크게 감동하여 임하였다고 가르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같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구약 시대의 성령의 경륜과 신약 시대의 성령의 경륜 사이의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구주로 믿고 거듭난 사람들마다 주님께서 그의 안에 성령이 내주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가운데, 충만한 성령의 내주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약 시대에 신자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경륜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사람 중심이기보다는 일 중심으로 성령이 역사하셨으니, 어떤 사람이 주님께 부름을 받아서 특별한 일에 봉사하게 될 때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그 성령이 그에게 임함으로써 예전에 없던 탁월한 지혜를 갖게 되거나, 순결한 마음이 되거나, 혹은 담대한 용기와 능력을 부여받아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그 일을 수종드는 데에 적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그 영을 거두시기도 했고 때로는 그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심각하게 파기하였다면 징벌로써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범죄 하였을 때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시지 말라고 간절히 매달릴 정도로 영적인 위기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한때 기름 부음을 받았던 선임자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성신을 거두시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였을 때 그는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시인은 예전에도 주님을 잘 믿는 신실한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충만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와 묘사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우주에까지 가득 찬 영광과 현존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이 다윗이 철학과 신학의 최고의 모델이 되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몰두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썩게 하고, 죽음과 같은 욕망과 죄 속에 얽매여 사는 이유는 이렇게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의 참 맛을 모르기 때문이지만, 시인은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자신뿐만 아니라 이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시고 우주와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당신을 가장 닮도록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격차를 가진 피조물 중 하나일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고, 탁월하게 잘 깨달아집니다. 반대로 이 성령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지루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그렇게 무료하고 싫증날지 모릅니다.
도대체 우리의 참된 만족이 어디서 옵니까? 오늘도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은 이 세상의 물질의 부족 때문이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한 나라의 제왕들조차도 행복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만족이 발을 디디고 사는 세상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는 어마어마한 물 위를 떠다니지만, 그 배에 있는 사람들은 그 바닷물을 먹고 해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위로부터 내리는 물을 필요로 합니다. 그처럼 인간들도 진정한 만족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세상의 욕망에 자신의 육체를 우겨넣고 어떤 일시적인 행복감을 맛봄으로써 죄를 짓고,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입니까? 생수를 먹고 진정으로 해갈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한 사람들은 결코 구정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원하고 자신의 진정한 만족을 하나님께로부터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금욕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은혜의 생수,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탁월하고도 신령한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그는 스스로 그렇게 더럽고 구접스러운 세상의 욕망에 자기를 우겨넣을 마음을 접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충만하신 성령을 사람들에게 보내어주시고 싶어 하시고, 이미 성령의 그러한 내주하심 속에 있는 신자들이 융성한 죄를 버리고 이 충만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속에서 신령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를 단지 세상의 유형적인 물질과 환경 속에서만 찾는 사람들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것보다 더 탁월하고 놀라운 것은 주님의 물 붓듯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충만한 사랑과 성령의 임재 속에서 사는 것만큼 참된 행복이 인간에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나더러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한 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신 하나님의 참 아름다운 사랑을 성령의 임재 속에서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질그릇같이 연약했던 사람들이 사자와 같이 살았습니다. 연약한 성도였지만 그들은 맹수처럼 용감하게 어두운 세상을 살았고, 진리를 위해 외톨이가 되거나 참된 것을 위해서 핍박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 세상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성령의 탁월한 임재가 그들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서 영혼의 빈 잔이 가득 넘치는 기쁨 속에 살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속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우리의 가슴에 부어 우리를 주님의 자녀 되게 하셨는데, 세상의 염려와 근심 속에서 악과 가깝고 아름답고 참되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의 환경이나 어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위대한 사도는 담대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우리가 성령의 내주하심의 특권을 입었음에도 시인이 경험한 것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며, 충만한 성령의 신령한 임재 속에서 탁월한 기쁨 가운데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악한 의지에 굴복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범죄와 악한 생각과 마음의 분요함으로 근심시켜 드리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분을 근심시켜 드리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리면서 그 분으로 말미암는 참다운 만족이 자신 안에 성령의 임재로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것은 마치 피 묻은 칼을 들고 원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미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그 악한 의지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고집을 미워하십니다. 죄에 대한 사랑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시인도 한때는 범죄하고 주님의 마음의 못을 박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 구절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그러나 그는 결국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진솔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 사람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넘치게 하셨고, 처음 기름 부음을 베풀어 주셨을 때에 이 시인의 마음속에 차고 넘치던 그 거룩하고 신령한 환희를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뜨십시오. 여러분들의 진정한 소망은 이 썩어질 세상 나라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소명을 주셔서 살아가는 세상이고 여러분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양떼를 위하여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다그쳐서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렇게 자기를 주님의 진리 앞에 굴복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과, 그런 마음으로 하나의 집중된 심령으로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실 성령의 은혜 안에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언제 경험되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어린 아이와 같은 나의 마음속에 주님의 성령이 충만히 임재 하셨을 때, 주님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사랑할 때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께 목마른 사람들, 이 썩어질 세상에서 구접스러운 모든 욕망으로부터 몸부림치며 벗어나기를 원하고, 주님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도합시다. 더 많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처음 회심할 때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욕심이 가득 붙은 우리의 허위와 거짓을 벗어버리고 세상에 붙은 욕심들을 털어냅시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도록,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이러한 마음을 가득 부어주셔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마다 그 충만한 임재 속에서 주님을 뵙도록 영적인 은혜를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시 23:6 / 조용기목사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부모님 슬하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 대한 생각은 다 선한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 대해서 악한 생각하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에 대하여 나쁘게 생각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시고 자식에 대하여는 항상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인자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부모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지신 마음이 그 얼마나 선하시고 인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첫째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의 나환자촌에 가서 일생을 그들과 하나 되어 보낸 것을 알고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혹은 테레사 수녀가 캘커타의 가난하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 되어 그들 속에서 섬기고 평생을 살아간 것을 생각하고 감화 감동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수천 배가 넘는 은혜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쓰시고 세상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하늘에 계시면 편안하고 좋으실 텐데 우리의 죄와 질병, 저주와 죽음과 고통 속에 하나 되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시고 죄인 된 인간과 하나 되셔서 십자가에서 인간을 위하여 형벌을 자원해서 받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6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고
요한일서 4장 10절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형벌은 고대 파사에서 사용한 후 로마제국에 도입되어 4세기까지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사형방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형은 단순히 나무에 사람을 못 박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연구결과에 따르면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맨 마지막 단계이고 그 형벌은 심한 채찍질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당시 채찍의 끝에는 납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을 달아 놓았기 때문에 한번 맞으면 살 속에 박혀서 뼈가 들어날 정도였습니다. 고통이 극심해서 채찍에 맞다가 쇼크사로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손목과 발목에 약 20센티의 대못을 박는데 이때 죄수의 몸무게로 인해 살이 찢어집니다. 손발의 신경이 다 끊어지는 그런 끝없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몸이 늘어져 있어서 가슴근육이 당겨져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나중에는 산소부족으로 온몸 전체가 경련을 일으킵니다. 의사인 리히터(Richter)박사가 쓴 ‘십자가 처형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에 보면 십자가 처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나 육체적인 긴장은 모든 동작에 고통을 준다. 못이 박혀진 손 부분은 신경이 예민하고 몹시 아픔을 느끼기 쉬운 곳이었으므로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준다. 못의 상처와 채찍에 맞은 자국은 곧 염증을 일으키고 몸이 썩어 들어가는 괴저현상까지 일으켰다. 신체의 위치가 피의 순환을 방해하고 고통을 일으켰으며, 육체의 긴장은 죽음 자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은 최악의 고통이요, 그것은 순간순간 괴로움이 증가하는 긴 고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형벌은 즉시로 타는 듯한 갈증을 사형수에게 느끼게 해서 목말라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왜 우리 주님이 이런 고통을 당했습니까? 우리는 그냥 십자가 고통을 노래하고 평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통은 말로다 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영육 간에 고통이요, 괴로움이요, 치욕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 위하여 이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이런 예수님은 좋으신 하나님, 좋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틴 루터는 말하기를 ‘성경을 짜보라. 예수님의 피가 뚝뚝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고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이제는 우리들로 하여금 부활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과 인간이 하나 되게 하사 값없이 한없는 영화를 누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5절로 6절을 보세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세상에 벌레같은 우리들을 주님이 끌어안고 함께 일으키사 함께 승천시켜서 함께 보좌에 앉게 하셨으니 웬 말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웬 영화입니까? 웬 축복입니까? 우리의 상상을 너무나 초월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러므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시켜서 함께 승천시킨 그 놀라운 은혜를 이룩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령을 보내사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말하고 우리 한국어로는 ‘보혜사’라고 기록했지만 보혜사라는 말은 ‘변호사’라는 말이고, 또한 유대인들은 어머니를 말할 때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을 종종 썼습니다. 어머니는 ‘파라클레토스’라고 썼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변호사가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같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오순절 날 이후로 지금까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를 돌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끊임없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처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러므로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고아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고아원은 없습니다. 성령이 ‘파라클레토스’ 즉, 우리 어머니와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디도서 2장 12절에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제자를 기르시는 선생님처럼 우리들을 늘 가르치고 길러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미술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의 성공 뒤에는 그의 선생 베르톨도가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 때 조각가 베르톨도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르톨도는 어린 미켈란젤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보고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자 베르톨도가 말했습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먼저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하여 쓸 것 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결정을 내려야 된다. 기술만 가지면 그냥 장인에 불과하다. 기술을 무엇 때문에 쓰겠는가. 목적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베르톨도가 처음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간 곳은 술집이었습니다. 그 술집 입구에는 아름다운 조각상이 서 있었습니다. 베르톨도는 미켈란젤로에게 “이 조각을 잘 보아 두거라.” 이렇게 말하고 다시 그를 데리고 성당을 갔습니다. 성당 입구에는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베르톨도는 미켈란젤로에게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아까 술집 입구에 있었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서 세워졌다. 너는 앞으로 네 기술로 재능을 위하여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겠느냐?” 그렇게 물었을 때 어린 미켈란젤로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대답처럼 평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재능을 사용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손꼽히는 미술계의 거장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선생은 제자가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가르침과 지도로써 제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도 우리가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늘 묻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너의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겠는가? 네 지혜, 네 총명, 네 모략, 네 재능, 네 지식, 네 건강, 네 가정, 네 부귀, 네 성공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겠는가?’ 성령은 우리 일생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은 위대한 선생으로써 우리 일생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지 내 쾌락을 위해서 세상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심을 가슴 깊숙이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도록 기쁘고 행복하고 용기가 나며 삶에 신바람이 납니다. 옛날에 우리 집 과수원에 개를 많이 길렀는데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시골로 내려가시면 개들이 따라갑니다. 그런데 이 개들이 우리 아버지, 어머님과 같이 가면 동리 개들 앞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꼬리를 하늘로 높이 들고 흔들며 갑니다. 그러면 모든 동리 개들이 다 움츠려 들어가고 사람들은 다 말하기를 “부잣집 개 내려 왔다. 부잣집 개 내려 왔다.”고 합니다. 개도 자기 주인과 같이 걸어갈 때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적당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좋으신 하나님을 모신 우리가 어떻게 우리 마음속에 저리도록 기쁘고 즐겁고 소망차고 신바람이 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는데요. 나쁜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가 막히게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우리가 어찌 마음이 긍정적이 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의 사상은 너무나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이 기가 죽고 좌절되고 낙심하고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무서운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 늘 꾸짖는 하나님, 벌주시는 하나님, 지옥 불에 넣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 속에 떨어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 짊어지시고 날 위하여 온갖 고통 다 당하시고 부활하사 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때까지 우리를 기르시기 위해서 어머니 같은 성령, 변호사 같은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가르치시고 이끄시고 돌보시는데 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입니까? 이 하나님을 우리가 잘못 알면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2. 역경과 고난에도 꿈을 잃지 않게 하심
둘째로, 좋으신 하나님 사상은 역경과 고난에도 꿈을 잃지 않게 하시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게 다가오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좋으신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므로 이겨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하고 꿈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 사상이 역경을 이기게 하는 사실은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일찍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자기가 꿈에 형들과 함께 밀 수확을 갔는데 열한명의 형의 단들이 자기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장차 모든 형제 중에 내가 으뜸이 되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번 또 꿈을 꾸었는데 하늘을 쳐다보니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를 향하여 절을 합니다. 해와 달은 아버지, 어머니고, 열한별은 형제들입니다. 자기 가정에 으뜸이 될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이 꿈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인박혔습니다. 항상 그 꿈속에 그는 살고 언제고 부모, 형제들을 자기가 리드하고 돌보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17살에 형들에게 배반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어서 종으로 팔려갔고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어서 10년이 넘도록 종살이에 온갖 고통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참소를 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서 3년 동안 감옥에서 썩었습니다. 기나긴 고생과 괴로움 속에서 요셉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배후에 좋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역경이 다가오고 거센 풍랑이 다가와도 배후에 좋은 하나님이 계시므로 하나님이 다스려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파도를 뛰어넘어 저 건너편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았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앙고백이 창세기 50장 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미국 동남부에는 땅콩의 생산지로 이름난 앨라배마 주가 있습니다. 그 주의 한 마을에 가면 기념탑이 있는데 목화를 갉아먹는 벌레들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그 비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대들은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또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을 일으켜 주었다. 목화 벌레들이여, 우리는 다시 한번 그대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세상에 살다보니 희한한 비문이 다 있습니다. 목화 벌레들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비를 세워서 그 비문에 그렇게 기록해 놓았었습니다. 본래 앨라배마 주는 목화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목화 재배 때가 되면 주변에 있는 많은 일꾼들이 앨라배마로 모이고 많은 흑인 노동자들이 가혹할 정도로 목화 농장에서 노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 어디선가 수많은 벌레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목화를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벌레들 때문에 그해 농사는 완전히 망쳐서 목화 수확이 없었습니다. 목화 때문에 몰려왔던 일꾼들도 뿔뿔이 다른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도 또 벌레들이 날아왔습니다. 목화를 모두 갉아먹는 바람에 손도 쓰지 못하고 농사를 망쳤습니다. 2년째 계속해서 흉작이 들자 주민들의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병들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민심도 흉흉해져서 살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때 그 앨라배마 주의 목사와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를 하다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서 로마서 8장 28절을 레마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셔서 2년째 계속하여 목화 벌레가 날아와서 목화를 다 갉아먹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수입이 없어 헐벗고 굶주리고 처자들이 굶어죽는 처지에 대한 것도 하나님이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현실적으로 눈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것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그들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 마음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목화농사만 지으면 벌레들이 와서 먹어버리기 때문에 목화 대신에 이 넓은 땅에 땅콩을 심자. 그래서 땅콩을 심기 시작하니 비옥한 땅에 땅콩이 얼마든지 잘되고 풍년이 들고 땅콩을 통해서 그들은 굉장히 생활이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업발달이 이루어져서 나일론실이 발견되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일론으로 짠 좋은 옷을 입기 시작하고 목화를 안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다른 주에서 목화밭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망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앨라배마 주에서는 목화 농사를 짓지 않고 땅콩 농사를 지어서 땅콩 부자들이 된 것입니다. 카터 대통령도 땅콩부자 아닙니까? 땅콩 심어서 부자 된 대표적인 분이 카터 대통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학섬유가 발견되어 사람들이 목화씨로 만든 무명보다는 질 좋고 값싼 나일론으로 만든 옷을 입기 시작하므로 목화 농장을 하던 다른 주의 사람들은 다 망했습니다만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목화 대신 땅콩을 심은 앨라배마 주 주민들은 부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나쁜 것을 좋게 해주셔서 결국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긍정적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름이 끼고 비가 쏟아져도 구름 저 위에 햇빛이 쨍쨍 비치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구름이 끼고 비가 온다고 해서 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해가 사라졌다고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통탄하고 울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아무리 인생에 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좌절과 절망이 다가와도 그 배후에 하나님의 좋은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조차도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좋게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 좋은 하나님을 확실히 마음속에 알면 결단코 우리의 생애 속에 꿈을 저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하나님 사상”이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눈에 보기에 악한 일이 생겨도 결국에는 좋게 된다. 왜냐?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하여 주시니 좋다. 따라 말씀하세요.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좋고, 그러니 다 좋은 것이다. 로마서 8장 28절에는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놀랍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역경과 고난이 다가올 때 좋으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고 악이 선으로 바뀔 것을 우리가 기대하고 꿈꾸고 굳게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나쁜 것만 바라보고 탄식하고 통탄하고 원망하고 부정적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언제나 나쁜 것 저 건너편에 있는 좋으신 하나님의 손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어떤 나쁜 것도 그 위에는 하나님의 손이 있어서 다스릴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순복음가족신문에 있는 동작대교구 최윤옥 성도님의 간증하신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2003년 4월 25일자입니다. 최윤옥 성도에게는 평소에 치질로 고생하던 완고한 친정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무리 전도해도 예수를 믿지 않았어요. 하루는 하혈이 심해서 급히 병원에 가서 검사한 결과 직장암 말기로 판정이 되었습니다. 큰 병원으로 옮겨서 정밀검사를 받았더니 이번에는 직장뿐 아니라 방광까지 암덩어리가 꽉 들어차서 달리 손쓸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큰 불행이 다가와서 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살다가 이런 불행이 다가올 수 있는가. 온 집안이 모두 다 우울하고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제 살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우리 최윤옥 성도께서 열심히 아버지와 집안 식구들에게 전도를 했으나 다 떨떠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구장, 구역식구들을 모시고 와서 합심기도를 하고 심방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흘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병원에 가서 조사를 하니 암투성이던 방광에서 암이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놀라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이런 것은 처음 보았다.’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감탄했습니다. 가족들과 구역식구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로 감사했었습니다. 이제 부친은 외과 병동으로 옮겨 직장암 치료만 받으면 되었습니다. 의사는 남아있는 직장암 덩어리가 너무 크고 또 여러 곳에 붙어 있어서 위험하니 5주후에 방사선 치료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모님은 통원치료를 하면서 매일 기도처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렸고 성도들도 5주간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2002년 12월 11일에 제게 찾아와서 제가 안수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방사선 치료를 3일 앞둔 어느 날 가족들이 한결같이 꿈을 꾸었는데요. 아버지는 꿈에 커다란 것이 몸에서 쑥 빠져 나가는 것을 꾸고, 어머니는 암덩어리를 비닐에 담아서 들고 나가는 꿈을 꾸었고, 최윤옥 성도는 꿈에서 네 아버지가 나았다는 음성을 듣고, 며느리 꿈에는 올케가 나타나서 ‘아버님이 나았으니 하나님께 감사예물 준비하세요’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온 집안 식구에게 하나님이 다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날 이후 부친은 일주일 동안 하루에 4,5번씩 검은 핏덩어리를 아래로 쏟아내더니 치질이 깨끗이 나았고 암세포도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제사를 다 없애 버리고 추도 예배로 대신하고 주님만 믿기로 가족 전체가 모여서 새로운 결심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검사해 보니 의사가 온몸에 퍼졌던 직장암세포가 거의 다 사리지고 없지만 암이 있던 자리를 떼어내는 것이 원칙이라고 해서 수술을 했습니다. 보통 4시간 걸리는 수술을 2시간 만에 쉽게 끝내고 다시 조직 검사한 결과 직장암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 기적으로 성도님의 친정아버지는 물론 일가친척 모두가 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암이라는 흉악한 악이 다가왔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이를 치료해 주셔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영광이 나타나서 아버지뿐 아니라 일가친척 모두가 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구원받는 기적이 일어났으니 악이 변하여 선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 속에 꿈을 버리면 안 됩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 될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좋으신 하나님이 희망이 되심
셋째로, 좋은 하나님을 우리가 모시고 좋은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 내일에 희망이 늘 있습니다.
절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절망보다 더 크신 하나님,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 죽음보다 크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요, 나의 하나님이요, 좋은 하나님이니까 희망이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대조동에 개척할 때 이 좋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정말 그때 대조동에 가면 참 처참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이 6.25동란에 온 나라가 다 초토화 되었지만 1958년도까지 나라는 회복되지 못하고 살길이 막연했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살러 왔다가 서울에서도 있을 곳이 없는 사람이 퇴출 되서 나온 것이 대조동, 불광동 산들이었습니다. 판자촌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너무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처참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천당도 지옥도 겁을 안냅니다. 보통 때에야 천당도 지옥도 생각하지 너무 어려우면 천당도 바라지 않고 지옥도 겁을 안냅니다. 뭐라고 말 하냐면 “지옥? 이미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무슨 지옥이 또 겁나냐?”라고 합니다. 그러니 말할 필요 없지요. 천당 이야기 하니까 “천당이 있기는 어디 있어. 하나님이 천당같이 좋은 곳 가지고 있으면 여기에 살 동안에 조금 주면 우리가 믿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살 동안에 조금도 안보여주는 천당을 죽고 난 다음에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냐고 따집니다.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환경적으로 봐서나 감각적으로 느끼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두다 절망인데 어디에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속에 주신 것이 희망의 메시지, 삼박자 축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삼중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을 햇빛같이 제 영혼 속에 비춰 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나가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며 생명을 빼앗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잘되면 이 땅에 살아있을 동안에 범사에도 잘되고 병도 고쳐 주어서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많은 사람이 나와서 예수를 믿고 병이 나았습니다. 폐병이 낫고, 암이 떨어지고 관절염, 신경통이 고침 받으니까 “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과연 좋은 하나님이구나” 그래서 회개하고 믿고 나오기 시작하고 주님의 은총을 받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실로 삼대재앙에서 삼중축복을 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삼대재앙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원래 에덴이 있던 곳에는 하나님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만든 처소였습니다. 에덴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저주도 없었고 죽음도 물론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 나와서 그 결과로 가져온 것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죽음의 재앙이요,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가난과 저주와 고통이 다가오는 재앙이요, 육체는 병들고 늙고 죽고 지옥에 떨어지는 재앙을 당했습니다. 이 삼대재앙을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짊어지고 벗으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벗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여 영적죽음에서 인간이 해방될 수 있으며 저주와 가난과 낭패와 실망과 배고픔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질병과 죽음에서 놓여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시고 몸 찢고 피 흘려 극심한 고통에서 이 모든 죄가를 청산하고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고난과 장사지내심과 부활을 통하여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가져온 삼대재앙을 벗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고 환경적으로 저주받고 육체의 죽음과 지옥의 노예였으나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을 통하여 우리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은총을 얻어 삼중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안락은 하늘에 있고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는 오직 불안과 고뇌와 탄식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고 미국의 사상가요, 문학가인 헨리 데이빗 쏘로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요한 절망 속에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했고 영국의 성직자 토마스 풀러 역시 ‘사람은 비명과 함께 울면서 태어나고 고통과 함께 살다가 결국에는 절망하여 죽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땅에서 인간은 영적 죽음과 환경적인 저주와 육체적인 죽음의 삼대재앙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은 예수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오면 용서와 의와 영광과 영생이 있고 예수님 안에서 저주에서 해방을 얻어 축복이 약속되고 예수님 안에서 치료되고 부활을 얻고 영생 천국을 얻는 축복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좋은 하나님 아닙니까? 예수님의 삼중축복을 받으면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했고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을 제가 불광동에 낭패와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하니까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빛이 생기고 얼굴에 웃음이 생기고 마음에 희망을 갖게 되고 그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게 되고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이 응답하게 되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지난 9월 15일 순복음가족신문에 난 이레전자 우리 정문식 집사님의 간증을 읽고 마음에 큰 감동을 입었습니다. 정문식 집사님은 이레전자를 일으켜 세우셔서 중소기업으로 정부에 표창까지 받은 자랑스러운 우리 교회 성도입니다. 정문식 집사님은 10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13살 어린 나이부터 청계천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가난과 굶주림이 싫었기 때문에 CEO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장이 될 꿈을 키웠습니다. 학업과 공장일을 병행하며 돈도 벌고 고등학교도 야간을 졸업했지만 쉽게 공장생활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1990년 퇴직금 50만원으로 중고압착기를 구입해서 아파트 지하실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예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름도 ‘이레전자’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업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힘이 들어 한강변에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야예배에 나온 성도들을 보고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외면할지라도 좋으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를 지켜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럽고 자살하고 싶지만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의 좋으신 손길이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후 집사님은 좋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함께 꿈을 가지고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꿈을 져버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로부터 15년 후 50만원으로 시작했던 사업이 무려 매출액 1,400억원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정문식 집사님은 회사의 규모가 처음 시작할 때 보다 많이 커졌다는 꿈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지금 자신이 받은 축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직원들을 위한 사내대학을 운영하며 장학사업도 꾸준히 전개하고 계십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도 항상 교회 와서 교회학교 애들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정문식 집사님이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더라면 좌절하고 낙심했을 것입니다. 내 앞길 캄캄하고 환경이 아무리 어두워도 좋은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시므로 결국에는 좋게 된다는 것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늘 그를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결 론>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저는 한평생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전하며 살아왔습니다. 47년간 목회를 했으니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 많은 좌절도 느낄 때가 있었고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고난의 폭풍에 휘말리고 외로울 때도 언제나 배후에 계신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꿈과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저 건너편에 좋은 하나님이 계신다. 아무리 먹장구름이 끼어도 저 건너편에 좋으신 하나님이 계신다. 결과에 가면 좋게 된다. 하나님이 끝에 가서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운명을 환경을 바라보고 좌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한번도 저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셨습니다. 성경말씀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불러서 예수를 믿게 하시고 구원을 받으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주신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좋고 선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습니다. 이 좋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이 좋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항상 눈에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그 건너편에 계신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해 주시는 좋은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이 꿈을 갖고 희망을 펼치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벌레 같은 우리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우리와 하나 되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우리 과거의 잘못된 인생을 다 청산해 주시고 부활하사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시니 우리 하나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좋은 하나님이요, 영원히 좋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안에서 꿈을 버릴 수가 없고 이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마음속에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은 지금보다 얼마나 영광스러울 것을 꿈꾸고 희망가지고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시 23:6 / 이동원목사
지금까지 살아오신 인생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실 인생 즉 평생이 어떤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가장 많은 분들은 "행복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또 적지 않은 분들은 틀림없이 "건강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고 하실 것입니다. 로맨틱한 분이라면 "사랑에 빠져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고 대답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질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라면 "그저 돈 고생 안하는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유난히 권력 지향적인 사고를 지니신 분이라면 "내 이름 석자를 남기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고 대답하실지 모릅니다. 좀 더 의식이 있어 나름대로의 분명한 어떤 가치관을 붙들고 사시는 분이라면 "가치있는 평생 혹은 보람있는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고 하실 것입니다. 좀 더 신앙적인 분들이라면 아마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의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나를 따라오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들을 잠시 후에 함께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은 통속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오늘의 언어로 바꿀수 있다면 저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평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고 그의 인도를 경험하는 삶이 결코 고난이 면제된 인생은 아니지만 그분의 도우심으로 충분히 행복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마지막에 시편기자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내 인생도 그분의 도우심으로 행복할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인생이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평생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평생"-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1. 우리의 과거를 감사할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시편기자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할 때 그는 지금 자신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정녕"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할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과거의 경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과거에서 그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었고, 또는 원수들의 치열한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마침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백자체가 감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인 혹은 미래 지향적인 인생을 살다 보면 이미 누릴수 있었던 과거의 은혜를 망각하기 쉽습니다. 랍비 해롤드 쿠스너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랍비가 길을 가다가 길을 뛰어 가고 있는 교인을 만났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뭐가 그리 급해서 어디로 그렇게 가고 계십니까?"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가"보면 모르시나요? 저는 지금 성공을 좇아가고 있고 번영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랍비는 다시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성공과 번영이 앞에만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지요.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성공과 번영을 들고 당신 뒤에서 오시고 있다면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그제서야 그는 "그렇다면 당연히 뛰던 것을 정지하고 뒤를 보아야 하겠지요"했다고 합니다.
오늘 시23:6의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좇아오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나를 따르리니"라고 우리 성경에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에는 좀더 강력한 단어로 나를 "좇아오다"(radaph=pursue)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이 줄곧 나를 좇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돌아보며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들을 헤아려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는 성숙한 성인의 특성으로"인생의 장에 베풀어지는 축복들에 대하여 놀라움과 기쁨, 감격으로 날마다 새롭게 감사할줄 아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사를 습관화할줄 알아야 합니다. 랍비 쿠스너(Kushner)는 감사를 생활화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수표를 쓸때마다 수표 구석에 "Thank-you"라고 쓴답니다. 전기요금 전화요금 청구서를 지불할 때마다 "감사합니다"고 쓴답니다. 심지어 세금을 낼 때마다 "감사합니다."고 쓴답니다. G.K.체스터튼(Chesterton)경은 "성탄절 어린이들이 양말을 걸어놓고 그 양말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넣어주신 것을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신는 양말에 튼튼한 두 다리를 넣어 주신 것을 인하여 우리는 얼마나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하심의 반대는 악함입니다.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악한 일들이 벌어집니까? 다윗도 이런 악함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사울왕의 질투와 시기, 신하들의 배신 심지어는 아들의 배신 그러나 이 모든 악함을 하나님께서 선함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선하심(tov)은 상대방을 유익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자하심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언약을 지키시는 성실하시고 자비하신 사랑"(covenant-keeping faithful and merciful love)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끊임없이 인간들의 불성실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성실함으로 우리를 버리지도 않으시고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께 불성실할 때라도 그는 우리를 용서하시며 기다려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약속한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인자하심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2. 우리의 현재를 만족할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편 23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문인 6절에 오기까지는 대부분의 시제가 현재 시제로 표기됩니다. 본문 6절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할 때에 영어 성경으로 읽으시면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shall) follow me"로 미래 조동사가 사용됩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일관성있게 현재 시제가 사용됩니다. 목자의 인도를 지금 받으며 행복해 하는 만족함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지금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He makes me)-지금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He restores--)--지금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He leads me--)--지금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My cup overflows)--지금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미 지적한바 있습니다만 현대인의 삶이 지나치게 결과 중심 혹은 목표 지향적이 되면서 현대인들은 오늘이라는 이 순간의 행복 곧 과정의 행복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그분 때문에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랍비 쿠스너는 자기가 관여한 학교에서 한번은 학교 교사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눈이 오는 날 아이들이 창 밖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거든 제발 야단치지 말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즐기게 해주라고 했답니다. 켄 가이어가 쓴 "묵상하는 삶" 22-23p에 보면 멕시코 시티의 "양파파는 노인"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멕시코 시티 시장 한구석에서 '포타라모'라는 이름을 가진 인디언 노인이 양파 스무줄을 걸어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시카고에 온 미국인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고 합니다. 양파 한줄에 얼마나 되느냐고. 10센트라고 대답합니다. 두줄에는? 20센트라고. 세 줄에는? 30센트라고. "깍아 주시는 것이 없으시군요. 그러면 스무줄을 다 살터이니 얼마에 파시겠습니까?"하자, 그 노인은 "그렇게 팔수는 없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미국인은 다시 "아니 왜 못 파십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하자 그는 이런 잊을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양파를 팔뿐 아니라 내 인생을 살기 위해서 여기 나온 것입니다. 난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여기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하고--사람들과 인사를 건네는 것을 사랑하고 친구들을 사랑하고 농작물 이야기하는 것을 사랑한답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한꺼번에 몽땅 팔면 나는 내 인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노인이야말로 현재의 행복을 아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오늘이 즐겁고 현재가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평생-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3. 우리의 미래를 확신할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편의상 인생의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결코 분리될수 없는 것들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미래를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미래 설계를 위해 우리의 살아온 과거를 잘 학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역사는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하나님의 행적인 것입니다. 지금 시편기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행적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자기 인생에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좇아 온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앞으로도 나를 인도해 갈것임을 확신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는 '정녕"이라는 강조 부사를 사용합니다. 자신의 미래에 함께 하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신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시106:1을 읽어보십시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러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며 살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시편은 우리가 그것을 위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 사랑을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드리시면 됩니다. 누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누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한 평생을 마무리하며 이 고백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리고 사람들은 당신의 인생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안에 있었던 당신을 또한 선하고 인자하셨던 사람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톤의 전기작가가 그의 일생을 취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가서 리빙스톤이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 동일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리빙스톤이 여기서는 무슨 일을 했느냐고. 여기서는 무슨 설교를 했느냐고. 그런데 이 작가가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이 이런 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를 이제는 잘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선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부유한 포도원 주인이 자기가 고용한 일군중 한 사람이 값비싼 포도주 통을 엎질러서 포도주를 다 쏟은 것을 알고 그를 법정에 고발합니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법은 당신편에 있소. 당신의 일군은 마땅히 당신에게 손해 배상을 해야 하오. 그러나 당신은 부자이고 일군은 가난하지 않소. 듣기에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이라고 들었소. 그래서 오늘 나는 당신에게 법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헤세드(Hesed)에 따라 행동하기를 판결하는 바이오. 헤세드의 원리에 따라 고소를 취하하고 당신의 일군에게 임금을 지불하여 주시면 좋겠소. 당신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손해를 보지만 영적으로는 더 부요해 지실 것이오. 그래서 당신이 일군을 용서한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헤세드로 인해 세상이 더욱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해주시면 좋겠소"(해롤드 쿠스너, The Lord is my shepherd, p.160-161) 그는 재판관의 권고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이 시편 23:6을 부끄럼없이 고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시 23:6 / 김남준목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Ⅰ. 본문해설
하나님은 시인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셨으며 죽은 자와 방불하였던 그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다.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하셨으며 원수의 목전에서 화려한 식탁을 베풀어 주셨다. 또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면서 시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쳐 주셨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시인은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결단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
Ⅱ.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
시인은 그 모든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자기를 따르리라는 확신이었다. “따르리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다프’인데, ‘추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굳센 의지로 끝까지 쫓아가서 잡는 동작을 의미한다. 시인이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깨달은 사실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자신을 추적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란 무엇일까?
A. 선하심
우선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호의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선한 분이시라면 왜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그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이 세상이 악하기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이 세상은 선하고 평화로워야 한다는 종교성을 띤 명제가 깔려 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데에서 온다. 하나님은 선이시므로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불행지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을 깨닫게 하여 당신께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다.
B. 인자하심
다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으로 인해서 가치 없는 인간을 향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혜택을 받는 것이 바로 이 헤세드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께 피하면 주님은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
Ⅲ. 여호와의 집에서 살다
A. 여호와의 집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추격하기에 시인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다짐한다. 다윗이 살던 시대는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이기 때문에 본문의 “여호와의 집”은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동식 성전인 성막을 가리킨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받은 계시대로 이동식 성전인 성막을 짓게 된다. 이스라엘이 광야 어디로 이동하든지 그 성막 주위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진을 쳤는데 그렇게 사람이 많았어도 성막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거기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뵈올 수 있었다. 이러한 이동식 성전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한 곳에 머물면서 성소의 중앙화가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성전 중심의 신앙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가적인 큰일에서부터 개인적인 일들까지 그 모든 것들을 들고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토해 놓았던 것이다. 인생에서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을 만났을 때, 영광스러운 일이나 수치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국가적인 위기나 재난을 만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집을 찾았던 것이다.
B. 신자의 어머니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교회 속에서 가장 충만하게 누려진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바라보면서 일평생 살겠노라고 다짐하였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부 키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 c190-258)는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은 것은 개인적인 사건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몸에 접붙여진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의 지평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는 교회와 접붙여지셔 일생을 교회의 한 지체로서 기쁨과 서러움을 교회와 함께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Ⅳ. 맺는 말
인생은 바람같이 지나간다. 지나온 날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남아 있는 날들도 속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생을 잘 살길 바란다.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길 바란다. 그리스도를 위해 남은 고난을 자신 안에 채우며 사는 성도들이 되길 빈다.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
시 23:6 / 김남준목사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6).
시편 23편의 1절이 하나님께서 시인의 목자가 되시는 것에 대한 총론적 선언이라면, 2절부터 5절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목자이신지 이유를 밝히고 있고, 마지막 6절은 그렇게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모신 시인이 미래에 대해서 갖는 확신과 결단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두 가지 때문에 미래의 어떠한 불안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선하심’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토브’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함께 거의 모든 날 동안 빠짐없이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의 ‘좋았더라’와 같습니다. 즉 이 말은 선함이 변하기 쉬운 인간 심리에 기인한 판단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드러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하나님께는 세계를 이렇게 만드시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가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모두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계획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완전히 합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것이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쁘다든지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준다든지 하는 인간 편에서의 판단이 아닌 것입니다. 그 판단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완전한 조화와 질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는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영적인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보이는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서 펼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한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천지 창조의 목적이고, 이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당신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은 바로 이 온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에 이바지 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보람, 기쁨은 하나님이 온 세계를 창조하신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이 그 목적과 부합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선한 사람, 선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볼 때 사실, 신앙에서 느끼는 대부분의 갈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선’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중심으로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면서 이런 저런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악’입니다. 그 악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의 행복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고 자기를 섬겨야지만 좋은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모든 세계에서, 그 사람들의 선과 악을 모두 사용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여기에 나오는 ‘합력하다’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순 에르고’라는 단어인데 ‘순’이라는 단어는 ‘함께’라는 뜻이고 ‘에르고’라는 단어는 일하다는 뜻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선’ 역시 이런 관점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복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긴 여름 장마가 계속 되면, 온 집안에 곰팡이가 피고, 아침에 눈을 뜨면 날이 밝았는지 아직 어두웠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침침한 날들이 계속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장마가 끝나고 아침에 맑게 갠 하늘에 찬란한 햇빛이 얼굴을 내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에게 안질이 있다면 햇살이 비칠 때 다른 사람은 좋은 아침이라고 감탄해도 그의 눈은 따갑고 고통스러워서 눈에 안대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하고,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않고, 고집대로 살 때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모가 자녀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자녀들이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을 때 그 아이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이고, 아이를 꾸중하거나 매를 들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그 아이를 향해 선하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자식을 사랑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부모라면 어찌하든지 내버려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바로 이‘내버려 두심’입니다. 하나님의 큰 진노의 표현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한 처방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고통을 받을 때 ‘회개’를 통해서 영혼과 마음의 궁극인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 우리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받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결국 시인이 말하는 선은, 더 더욱 미래에 대한 자기만족이나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증하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은혜의 본질은 말씀을 통해 깨뜨려져 자기를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인생의 자라에서 도망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눈에 보기에 좋은 것들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눈에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나를 둘러싼 환경을 깨뜨리기 전에 나를 깨뜨려 주시옵소서. 나의 아집과 교만과 사랑의 집착을 무너뜨려 주시옵소서. 나를 당신의 진리로 정결케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며 살겠습니다…….’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잘 모르지만 그분은 아시며, 나는 또 안다고 할지라도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있다는 믿음으로 살면서 자기를 주님께 복종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식으면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왠지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가장 선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져 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몸부림이자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뿌리입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자기를 의지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 책망을 받았던 주요한 제목이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을 섬긴 것은 우상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우상을 통해서 자기를 섬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사랑이 우상숭배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값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졸렬한 방식으로 복음을 재해석하면서 자신의 엉터리 신앙생활을 정당화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의 무지는 이기적인 자기 욕망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껍질로 덮은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이런 삶에 박수를 치는 사단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잘못 심겨진 것들이 무너지고 뽑혀지지 않으면 올바르게 좋은 것들이 심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참된 의미를 알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섭리는 감춰진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비록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많은 고난을 겪었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선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주신 그 위대한 꿈, 해와 달과 열한 별이 그에게 절하는 그 꿈을 하나님께서 이뤄주실 것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마치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위대한 계획 속에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자기를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용서를 빌었던 형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대들은 나를 종으로 판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마로 인생을 향해 어떤 악을 행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께 불만족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할까요?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셨는지 자기 아들까지도 내어주셨는데,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선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또 다른 선을 찾아 그 안에서 행복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선하시면 선할수록 그렇게 악을 품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며, 항상 당신의 선한 빛을 우리 인간에게 환하게 비추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살 때에 그 선한 하나님의 햇빛은 인간에게 고통으로 나타나 징계를 가져옵니다. 반대로 한 인간이 핍박 속에서도 진실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쓴다면 선하신 그 햇빛은 고난 속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다는 확신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자기도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도록 신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비추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자신의 고백을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는 바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을 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때로는 결핍의 빈들을 지나기도 했고, 때로는 폭풍과 같은 바다를 건너기도 했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두려움 속에 걷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생의 역경을 헤치면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선하신 분이시고, 마치 양떼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처럼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악하고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요, 하나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 좋은 일들이 있었고 행복한 일들이 있었다면 우리의 악을 능가 하셔서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마음을 찢고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가면 그분의 마음에 우리가 박았던 수많은 못 자국들이 아직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한 번도 미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로 인하여 욕을 당하신 적이 없는 것처럼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그 한없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서 우리 같이 죄인 중의 괴수인 사람에게까지 미치고 그 손길은 우리를 치료하여 우리의 눈의 안질을 낫게 해 주셔서 진리의 찬란한 빛이 이제는 따갑지 않고 아름다운 빛이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의 입맛을 변하게 하여 이제 주님의 선하심이 쓰디쓰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의 속한 것들이 우리에게 쓰게 느껴지도록 변화시켜 줍니다. 수많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릇된 행복을 좇는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자기가 삶의 주인 된 삶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해 지려고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6 / 조용기목사
한평생을 함께 살아온 부부라도 상대를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가장 위대성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 가운데 사시면서 사람과 대화하고 교통하면서 영광을 나타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어떤 종교보다 위대한 점인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넘치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시편 23편 6절에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목자이십니다.
1. 선하시고 인자하신 목자 하나님
누가복음 10장 30절로 37절에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옵니다.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제사장이여 나를 도와달라’고 말했으나 제사장은 그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꾸짖고 그냥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법을 가르치고 시행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법을 어긴 자를 정죄하고 벌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율법의 눈으로 보고 부주의함을 꾸짖고 정죄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에게도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잠시 와서 그를 보고 종교의식을 집행하고는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성수를 뿌리고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고 종교적인 의식을 베풀어도 그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그리로 오게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로 34절에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율법의 안경을 쓰고 보면 허물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자비와 긍휼의 안경을 끼고 보면 모든 허물을 덮게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율법의 안경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비와 긍휼로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지금 당장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것입니다. 바로 이 사마리아인은 선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선한 분이라고 스스로 고백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로 11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주님은 우리를 돕고 치료하고 살리기 위해서 오셨지 우리의 결점을 지적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며 종교나 의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한없으신 선하심과 인자하신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2. 십자가 상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며 우리를 위해서 고생하신 것을 바라보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죄인들의 죄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맑은 눈으로 우리 죄를 들여다 보시면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대낮같이 드러날 터이니 정죄감을 느끼고 심판을 당하고 우리는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눈으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용서를 바라보지 심판과 정죄를 바라보지 않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7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비와 긍휼의 눈으로 보시기 때문에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내시고 살리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사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양은 연약할 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달리 길을 잃으면 다시 되돌아오는 귀소본능이 없기때문에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장 6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도 하나님을 떠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 스스로 찾아오지를 못합니다. 양은 목자가 찾아서 데리고 와야 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길 잃어버린 우리들을 찾아서 죄악에서 건져내 주셔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우리 죄를 사하시고 죄악에 빠진 우리를 친히 찾아오셔서 건져내어 집으로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선하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과 마귀의 종이 되어 세상과 마귀가 시키는 대로 부정부패 속에 살아왔습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놀라운 해방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해방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서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서 죄의 종노릇 하는데 강한 자, 우리 주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밧줄을 끊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해방을 주었으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은총을 받았는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과 성령을 주셔서 거룩하게 살게 해주십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하게 살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극도록 부패해져서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주셔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거룩한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므로 이제는 더러운 것을 피하고 거룩함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도 주시고 소원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속에 계시겠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영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거룩한 영이 우리 속에 오시면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하신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마귀에게 눌려 병들고 고통당하는 심신을 치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 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복음과 함께 병을 고치고 약한 자를 치료해 준 주님은 좋으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자비하심과 선하심이 넘치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세상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선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복을 주시지 화를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때문에 가난해졌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풍찬노숙을 하셨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에 주님은 이런 고생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랑의 주님이 아니십니까? 자비와 긍휼과 선하신 주님이 아니십니까?
나아가 선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천국을 주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로 13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세에는 처처에 온역과 지진과 기근이 있으리라고 했는데 요즘 ‘사스(SARS)’를 보십시오. 병원균도 찾지 못하는 괴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세의 병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마지막을 향해서 달음질 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심판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이새하늘과 새땅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5절로 17절에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서 주님이 친히 목자가 되어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수를 마시게 하시고 우리 스스로의 눈에 눈물을 다 씻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목자이신 것입니다.
3.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하심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 죽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항상 인간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다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만에 죽음을 다 청산해 버리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에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안믿는 사람은 죽음에 빚을 졌기 때문에 죽음의 빚쟁이에게 끌려서 사망으로 들어가지만 우리는 죽음의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빚을 청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오더라도 우리는 죽음을 능가하고 영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지상 이스라엘 국가와 장차 지상에 이룩할 천년왕국에 관하여 주로 말씀하시고 사후 영혼에 관해서나 천국에 관해서는 거의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후 영혼의 문제와 천상 천국에 관한 계시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하여서 분명히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불멸과 천국에 관해서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시험, 환난, 핍박이 다가와도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못 죽인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도 죽이고 영혼도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분명히 영혼은 몸을 떠났어도 영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로 17절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같이 예수 안에서 사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먼저 잠자는 자들도 주님과 함께 있다가 주님 오시는 날에 함께 데리고 와서 부활의 몸을 얻을 것이고 우리는 이땅에서 주님께서 강림하심을 맞이하게 되면 부활의 몸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죽음이란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데리러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목자가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목자가 와서 우리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가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로 21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믿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믿는 자는 이긴 자인 것입니다. 이긴 자는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도 늘 영혼불멸과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막집이란 천막집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날라가고 찢어지고 없어지는 장막집입니다.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10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약하고 추하고 더러운 몸으로 영원히 살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절로 5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 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여러분과 나의 미래의 신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성경은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겠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추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을, 육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우리가 주님 앞에 환호성을 부르면서 얼싸안고 기뻐 뛰며 춤출 날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 선생은 삼층천에 갔다와서 이 사실을 보고 난 다음에는 늘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리고 했으나 바울 선생은 늘 천국 천성을 바라보고 그곳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로 23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주의 사업 때문에 할 수 없이 머물러 있지만 차라리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기록한 천국의 모습은 더 아름답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로 7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도 이기는 자가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주님이 예비한 이 영광스러운 곳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못 가봤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신문기자가 상황을 보고하듯이 우리에게 보고해 놓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로 5절에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의 초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음에 희망과 꿈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모든 삶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이번달보다 영원한 미래는 현재보다 영원히 좋아질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결론은 우리가 평생토록 선하심과 인자하신 목자 예수님과 함께 살다가 죽음이 오면 저 건너편에 예비된 아버지의 집 천국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편)
이것이 우리들이 오늘날 살아가는 형편입니다. 우리들은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잃어버린 우리를 찾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서 피값으로 마귀와 죄악의 소굴에 빠진 우리를 건져내고 찾아 주셨고 이 땅에서 성령을 보내사 같이 하여 주셨고 육신의 장막집을 떠날 때는 우리를 데리고 아버지 집에 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우리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이 목자께서 오늘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고 함께 계시므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 품에 안겨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