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구장에서 감독실 의자에 앉아 이제부터 시작될 게임을 생각한다. 호텔 숙소에 있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기 때문에 발걸음은 자연히 구장으로 향한다. 특히 플레이오프에 들어가면, 앉지도 서지도 못한다.’
조 토레(69) LA 다저스 감독이 뉴욕 양키스 시절에 토로한 말이다. ‘성적은 감독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감독은 승리의 철학을 지녀야 하고, 선수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사심 없이 적재적소에 기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겨야 한다.
약육강식의 감독사회, 2009년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를 마치고 일부 구단 감독이 바뀌는 것을 연례행사처럼 지켜본다. 1982년 이 땅에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래 야구 판에서 명멸한 한국인 감독(대행 포함)은 모두 52명이었다. 초창기 ‘해태 신화’를 일궈낸 김응룡 감독(현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 물러난 이후 장기간 구축돼 있던 김성근(66·SK 와이번스)-김인식(62·전 한화 이글스) 양대 산맥의 한 축이 그만 허물어졌다. 김인식 감독의 퇴진으로 이젠 김성근 감독만 남아 외롭게 버티는 형국이 됐다.
한대화 한화 감독(좌)과 박종훈 LG 감독. ⓒ OSEN. |
9월 말께 최하위로 성적이 곤두박질친 한화가 먼저 한대화(49) 삼성 수석 코치를 김인식 감독의 후임으로 임명했고, 7위 LG 트윈스도 박종훈(50) 두산 2군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발탁했다. 항간에선 박종훈, 한대화의 감독 등장을 두고 ‘중서부라인은 OB 출신들이 장악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두산 베어스의 김경문(51), KIA 타이거즈의 조범현(49) 감독과 더불어 중서부 지역 4개 구단 지도자들이 OB에서 처음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던 점을 빗대서 나온 말이다. 게다가 김성근 감독마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 코치를 거쳐 1984년부터 1988년까지 OB 지휘봉을 잡은 바 있어 무려 5개 구단 지도자가 OB 출신 일색이다.
조범현과 김경문 감독은 프로 원년인 1982년, 박종훈 한대화 감독은 그 이듬해인 1983년에 나란히 OB 유니폼을 입고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단순히 OB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들을 한 묶음으로 보는 것은 물론 얼토당토않다. 다만 이런 저런 인연으로 얽혀 있는 이들이 앞으로 그라운드에서 어떻게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려갈지 지켜보는 것도 자못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대화 감독이 김성근 감독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1985년 시즌 후 해태의 양승호 황기선과 2:1로 트레이드 대상이 됐으나 거부 파동을 일으켰다가 결국 해태 유니폼을 입고 ‘해결사’로 거듭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박종훈 LG 감독이나 한대화 한화 감독은 선수 시절 아픔을 딛고 야구 선수라면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인 프로야구 감독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박종훈 감독은 1983년 한국 프로야구 첫 신인왕의 영예를 안고 있다. 박 감독은 당시 알렉스 헤일리 원작 소설 <뿌리>의 주인공 쿤타 킨테의 영화 속 인물과 닮았다고 해서 ‘쿤타 킨테’라는 애칭을 들었다. 1983년에 이어 1984년(.306·타격 6위)에도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팬들의 굄을 받았던 박종훈은 1985년에 들어 절정의 타격감을 과시하면서 타격의 달인 소리를 들었던 장효조(당시 삼성)를 제치고 타격왕을 눈앞에 두었다가 빈볼로 인해 쓰라린 좌절을 맛보았다. 박종훈은 1985년 시즌 중반까지 3할8~9푼의 고타율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빈볼 한 개로 인해 내리막길을 걸어 끝내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한대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은 3점 홈런이다. 1982년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렸던 제 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결정전에서 한대화는 결승 3점 홈런을 날려 한국이 일본에 역전승을 거두고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김재박의 그 유명한 ‘개구리 번트’로 2-2 동점을 이룬 8회 2사 1, 2루에서 한대화가 타석에 등장, 일본의 구원투수 세키네를 상대로 볼카운트 2-3에서 제 6구째를 힘껏 두들겨 왼쪽 폴대를 때리는 장쾌한 아치를 그려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한대화는 3점 홈런과 유난히 인연이 많았다. 1983년 4월 2일 원년 우승팀인 OB와 MBC 청룡이 잠실구장에서 개막전을 가졌다. 한대화는 2번 타순에 배치됐다. 1번은 박종훈이었다. OB는 장호연이 선발투수로 등판, MBC 타자들을 산발 6안타로 묶었고, 한대화는 4회 초 MBC 구원투수 유종겸을 두들겨 승부를 확인하는 3점 홈런을 날렸다.
트레이드 거부 파동에서 보았듯이 한대화는 고향 팀인 빙그레(한화 전신) 이적을 갈망했다. 우여곡절 끝에 해태 유니폼을 입은 후 간염과 척추분리증 등 숱한 역경을 딛고 한국 최고의 해결사로 우뚝 섰던 그는 머나먼 길을 휘돌아 23년 만에 고향으로 금의환향, 그라운드 조역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지휘자로 거듭났다.
박종훈과 한대화는 이제 동병상련의 처지가 됐다. 둘 다 하위로 내려앉은 팀을 재정비하고 추슬러 옛 영화를 재현해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 것이다. 둘의 지도자 가세로 이제 프로야구판은 선동렬(46) 삼성 감독과 더불어 프로야구 1세대 스타들 출신들이 대세를 이루게 됐다.
베이스볼 클래식 통권 5호 | 글. 홍윤표 OSEN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