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8일 성남 은행초등학교에서는 이색적인 교장 퇴임식이 열렸다. 전교조 출신 1호 교장인 이상선교장은 이날 44년 5개월간의 교직생활 동안 자신이 저지른 죄를 낱낱이 고백해 눈길을 끌었다.
그가 뒤늦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은 이유와 교직이 천직이라고 믿으며 남다른 교육행정을 펼쳐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외길 인생을 들어보았다.
아이들에게 교장선생님이라기보다 자상한 할아버지로 통했던 이상선씨 “참회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44년 5개월 동안 교사로 지내면서 잘못한 게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저지른 큰 죄는 세가지입니다. 바로 민주주의 교육 못한 죄, 통일교육 제대로 못한 죄,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몬 죄….”
“과거에 내가 잘못 가르쳤던 교육을 반성하고 참회하며 후배들에게 절대 그런 교육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별강론을 하게 되었지요.”
자신이 평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새 학기마다 강압적으로 아이들에게 1년 동안 지켜야 하는 규칙을 말하고 못 지키면 매가 몇 대라며 윽박질렀던 일, 아이들 앞에서 본때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매를 들었던 일, 쪽지 시험, 월말고사, 기말고사 등으로 점수 경쟁을 하도록 한 일, 반 평균이 내려간다고 성적이 낮은 아이는 시험 보는 날 오지 말라고 한 일, 북한은 원수라고 가르치며 반공 교육을 한 일 등 그가 고백한 죄들은 예전엔 당연하게 받았던 우리의 교육 내용들이었다.
“난로도 못 피울 정도로 어려웠던 겨울에는 등수대로 햇볕이 드는 곳에 아이들을 앉히고 그랬어요.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 앉히고…. 나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선생님들이 다 그랬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배웠거든요. 경쟁교육이라는 것이 말로는 선의의 경쟁이라고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고 못하는 아이고 모두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요. 이것은 친구를 친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만드는 교육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월요일마다 뙤약볕 아래서 오랜 시간 동안 알아듣지도 못하는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을 들어야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예전부터 내려온 관행들이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아직까지 뿌리 깊이 박혀 있어요.”
생계를 위해 선택한 교사의 길
전라남도 광주가 고향인 이상선씨(65)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탁월한 암기력으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우등생이었던 그.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담임선생님은 학비를 대줄 테니 시험에 응시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기 어렵다는 중학교 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선생님은 학비를 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선생님도 6학년 담임을 맡아 자신의 제자를 명문중학교에 입학시켰다는 명예를 얻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입학은 포기했지만 공부를 중단할 수는 없어서 동네 서당에 다녔습니다. 한문책을 베껴쓰면서 석달 정도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찾아오셨더라고요. 미안하셨던 모양이지요? 근처에 시골 중학교가 새로 생긴다면서 장학생으로 추천해주셨어요.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죠.”
중학교 공부를 마치고 대학 가기를 포기한 그는 광주사범학교에 합격, 졸업 후 교사가 되었다. 그 당시 교사의 길을 선택한 건 6형제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이교장이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를 대야 하는 절박한 생계문제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나온 내가 역사의 진실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교사 노릇을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광주사범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우리나라의 진실을 어떻게 배울 수 있었겠어요. 생각해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는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느라 33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지금의 아내와 선을 보고 일주일 만에 식을 올린 초고속 결혼이었다. (2편에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