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서원 경내의 향나무, 공자가 수식한 회(檜)나무에 빗대 모당이 대구 사람의 거두임을 상징하려는 의도로 심은 것 같다.
모당 선생 유허비
대구사림의 영수 손처눌 선생과 청호서원 향나무
수성구 황금동(黃金洞)의 원래 이름은 황청동(黃靑洞)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가서 산다는 황천(黃泉)과 발음이 비슷하다 하여 1977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황금동 신천지하이츠 동쪽의 청호로를 건너 신천지타운 부근은 아직도 전원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그곳 근접한 거리에 서원이 2개나 있다. 하나는 덕산서원으로 세종, 문종, 단종을 보필하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낙향한 이조판서 남은(南隱) 서섭(徐涉)과 그의 아들 서감원(徐坎元)을 기리기 위해 1926년에 건립된 덕산서원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중기 대구지역에 성리학을 중흥시킨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을 기리기 위해 1694년(숙종 20)에 건립한 청호서원이다. 이후 1755년(영조 31) 제자 사월당(沙月堂) 유시번(柳時蕃)을 1775년(영조 51)에는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을 종향(從享)하고 아울러 6대조로 세종 때 집현전 한림학사를 지낸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를 최존위(最尊位)로 봉안하고 있다.
모당은 아버지 선무랑(宣務郞) 수(遂)와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에서 1553년(명종 8)에 태어났다. 14세 때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의 제자가 되었다. 17세에 부인 광주 이씨를 맞았으니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의 딸이다. 1571년(선조 4) 장인 장례식장에서 문상 온 한강 정구를 처음 만났다. 이후 정사철, 곽재겸, 정광천, 김우옹, 장현광, 서사원, 이주 등 원근의 선비와 팔공산, 최정산을 다니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학문을 연마했다. 임란이 발발하자 낙재 서사원, 태암 이주 등과 임하 정사철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모당은 수성 소모장(召募將)이 되었다. 그 후 임하가 몸이 불편해서 물러나자 낙재가 뒤를 이었다.
모당은 팔조령에 의병을 매복시켜 많은 전과를 올려 대구부 남쪽을 지켰다. 9월 낙재가 상을 당하자 모당이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1593년(선조 26) 모당 역시 아버지, 다음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진중(陣中)에 있을 수 없었다. 정유재란 시에는 달성으로 숨어든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에 방백 한준겸이 공적을 조정에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한사코 사양했다.
1599년(선조 32) 전란으로 파괴된 향교를 달성(현, 달성 토성)으로 옮겨 짓는 일에 앞장섰으며 인근 농민들이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황청지(黃靑池)를 축조하여 고통을 덜어 주었다. 전란 중 돌아가신 부모님께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묘소 아래 집을 짓고 영모당(永慕堂)이라고 했다. 아호 모당(慕堂)은 여기서 비롯된다. 임란의 상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영모당 옆에 산택재와 풍뢰헌을 새로 지었다. 이듬해 충주 목사로 있던 한강이 휴가차 내려오자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여러 선비와 임란으로 폐허가 된 연경서원(硏經書院) 재건에 힘썼다.
1604년(선조 37) 승병대장 사명당이 강화사(講和使)로 일본으로 가는 길에 들리자, 장도를 기원하는 전별시를 지어주었다. 이듬해 선사재에서 70여 명의 유림과 한강을 모시고 선유(船遊)했다.
1609년(광해군 1) 광해군이 왕자로 있을 때 만든 태실을 왕이 된 후 정식 태실로 격을 높이는 작업을 추진하기 위해 대구에 내려온 태실 상사(上使) 오봉 이호민, 부상사 선원 김상용과 연경서원에서 강회를 열었다. 1611년(광해군 3) 망우당 곽재우가 찾아오고, 월곡 우배선(禹拜善)이 아들 달해(達海)를 데리고 와서 가르침을 청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고을 사람들이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그가 항복함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역시 고을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이때 모당은 75세로 나이가 많다고 사양했으나 호소사 우복 정경세가 극구 추천해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이 역시 실행되지 못했다. 모당은 탄식하며 “비록 평안은 얻었다 하나 맹약이 부끄럽다” 하였다. 1634년(인조 12) 돌아가시니 향년 82세였다. 저서로 『모당선생문집』이 있고 대구의 청호서원과 밀양의 혜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모당은 대구에 퇴계학을 전수한 1세대 계동 전경창과 한강 정구 밑에서 수업하고 두 분이 돌아가시자 낙재 서사원과 함께 대구 사림을 이끌었다. 그러나, 낙재(樂齋)마저 운명하자 혼자 20여 년간 대구 유림을 이끌었다. 『영모당통강제자록』에 의하면 모두 202명이나 된다. 임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 3란 의병장으로 국난 극복과 교육자로 대구 문풍 진작에 크게 이바지했다.
매화를 좋아해 시를 남겼으나 매화는 보이지 않고 향나무만 우뚝 서 있다. 공자가 심은 회(檜)나무에 빗대 모당이야말로 유학자의 표상(表象)이라고 말하려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