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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10
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실질적인 왕으로 인정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며 언약궤를 다윗성에 모셨습니다(삼하 6).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1-2) 다윗은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선언하며 하나님 통치의 합법성을 노래합니다. 인간 왕들은 통치하기 위해 땅을 정복하지만, 하나님은 정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셔서 처음부터 땅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0:26). 하나님은 온갖 생명체들을 만들어 땅을 충만하게 하셨고, 특히 인간들을 만드셨기에 하나님의 통치는 당연합니다. 창조 삼일 째 물과 뭍이 분리된 것에 근거하여 다윗은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창 1:9-10).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3-6)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 성소입니다. 다윗은 만왕의 왕께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이 질문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창조주와의 관계정립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만왕의 왕께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은 도덕성입니다. 먼저 손이 의미하는 행실이 깨끗해야 하며, 깨끗한 행실은 청결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는 우상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자가 여호와의 복을 받는다고 노래합니다. 이런 조건을 완전히 갖춘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도 여호와를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4-16).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7-10) 이번 단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시는 장면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모실 때 춤을 추면서 “성문을 열라”고 외쳤을 것입니다(삼하 6:14-16).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성 주민들이 “이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마 21:10-11).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하여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사탄과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러 오신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만왕의 왕을 마음 문을 열어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시 24:1-10 / [성소에 들어서며; 다윗의 노래] 온 누리와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여호와의 것. 세상과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 모두 다 여호와 우리 주님의 것. 2) 주께서 바다 위에 그 터전 마련하시고 깊은 물 그 위에다 이 땅 세우시어 든든히 걱정 없이 굳혀 놓으셨도다. 3) 그 누가 여호와의 언덕에 오르리오? 그 누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서리오? 4) 깨끗한 손, 정결한 마음, 심지 굳어 덧없는 데 정신 쏟지 않는 이, 이웃에게 거짓 맹세하지 않는 이, 5) 이런 사람 여호와의 복을 누리고 아무런 잘못 없다 칭찬 듣는다. 6) 이런 사람 여호와 주님을 열심히 찾고 야곱의 하나님 얼굴 뵈오려 애태우지 않으랴.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고색 창연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스런 임금이 들어가신다. 8) 그렇다면 그 누가 영광스런 임금이시냐? 힘세고 용감한 여호와 아니시더냐? 싸움이라면 누구도 따라 잡지 못할 용사 여호와 아니시더냐?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고색 창연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스런 임금이 들어가신다. 10) 그렇다면 그 누가 영광스런 임금이시냐? 만군을 거느시고 계시는 여호와 그분이 영광스런 임금이 아니시더냐? (셀라)
적용: 당신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왕으로 모셨습니까?
어떤 목사가 큰 백화점 앞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백화점의 주인에게 말해야 할 것이 떠올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에게 양탄자와 침구에 관해서 말한 일은 많지만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은 아직 못했습니다. 시간을 좀 내실 수 있을까요?” 백화점 주인은 사무실로 목사를 안내했습니다. 목사는 성경책을 꺼내서 주인에게 가르치며 그에게 신앙인이 되도록 촉구했습니다. 얼마 후 그 주인의 눈에서 눈물이 두 뺨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올해로 70살이 됩니다. 저는 이 곳에서 출생했으며 지금까지 사업을 하며 수백 명의 목사들과 500여 교회 직원들과 거래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영혼에 관해서 말씀해 주신 유일한 분입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왕국
시편 24:1, 2 / 매튜 헨리 주석
Ⅰ.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 이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유권(1절). 우리는 오직 하늘만이, 그리고 저 윗세상에 있는 무수하고 찬란한 거주자들이 여호와의 것이고, 이 세상은 창조의 매우 작고 보잘 것 없는 부분이며 위에 있는 고귀한 보좌와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소홀히 여기시고 그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땅조차도, 이 아래 세상도 그의 것인 것이다. 비록 하늘에 그의 영광의 보좌를 마련해 놓으셨을지라도, 그의 나라는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벌레들까지도 그의 인자하심이나 다스림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셨을지라도 그는 계속 그 소유권을 보유하고 계셨다. 그는 단지 소작인이나 고용인으로서 그들에게 빌려 주신 것이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로다." 땅 내부에 있는 광물들, 재물들, 땅 소산물인 과실들, 숲속의 모든 짐승들과 수 많은 야산의 가축들, 우리의 땅과 집들, 사람의 기술과 노동에 의해 이 땅에서 만들어진 모든 생산물들이 다 그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은혜의 왕국에서는 단지 헛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들은 영혼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되고도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섭리의 왕국에는 그것들이 충만하다."땅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으로 충만하며 크고 넓은 바다도 또한 그러하다." 땅의 모든 부분과 지역이 여호와의 것이며 다 그의 누누 아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손은 어디로 가든지 그가 그의 아버지의 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그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우리의 몫으로 주어진 땅과 그 소산물들은 단지 우리에게 빌려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여호와의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온 세상을 대항한다 하더라도 그의 권리를 대항할 수는 없다. 우리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즉 바닷속을 지나 다니거나 그 밑에 숨겨져 있는 것들도 여호와의 것이며, 그는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를 알고 계신다.
2. 이 땅 위에 거처할 수 있는 곳(잠 8:31)-"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도 특별히 그의 것이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 영혼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모든 영혼이 나의 것이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는 우리 몸을 지으신 자이며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것이다. 우리의 혀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섬기도록 되어 있다. 또한 그를 알지 못하거나 그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그의 것이다. 이것은 비록 하나님이 그의 특별히 택하신 백성들의 예배와 봉사를 은혜롭고 기쁘게 용납 해 주시더라도(3-5-절) 그것은 그가 그것을 필요하다거나 그것에 의해 혜택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출 19:5; 시 50:12).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가 중재자로서 그의 소유로 주어진 땅의 끝 부분까지 갖고 있는 주권에 적용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그의 손에 모든 것을 주셨고, 모든 육체를 다스릴 권세를 주셨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들에 관한 그의 이야기 속에 이 성경 귀절을 거듭 두 번씩이나 인용하고 있다.(고전 10:26, 28). "만일 그것이 푸주간에서 파는 것이라면 그것을 먹되 묻지 말라. 이는 땅이 주의 것임이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훌륭한 피조물이며, 너희는 그것에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 말하거든 먹지 말라. 이는 땅이 주의 것이며 그것이외에도 땅에는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몫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좋은 이유의 하나이다."땅은 여호와의 것이로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것으로 자기가 뜻하시는 대로 행하실 수 없으며 그가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더 적게 주실 수 없겠는가?
Ⅱ. 이 소유권의 근거. 이 땅은 논쟁할 여지도 없는 권리에 의해 그의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건설하셨기"때문이다(2절). 그것은 그의 것이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가 그것을 만드시고 지으시고 그 기초를 세우셨으며, 사람이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물질은 그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무에서 만드셨기 때문이다. 형체도 그의 것이다. 영원한 계획과 그 마음의 생각대로 그것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는 손수,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그는 유일하고도 완전무결하며 절대적인 주인이시다. 따라서 그에 의하지 않고, 그의 허락이 없이는, 그리고 그의 아래 있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우리에게 땅의 어느 일부에 대한 권리도 줄 할 수 없다(89:11, 12 참조)
2. 그는 그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땅을 지으셨다. 땅은 전능함에 의한 피조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땅을 세우기에는 연약하고 불안정한(이렇게 생각하기 쉽다)터인 바다위에, 강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능력이 원한다면 그것은 이 땅의 무게를 지탱할 것이다. 태초에 땅을 덮고 있던 물이 땅을 사람 살기에 부적합하도록 만들고 있을 때, 그 물은 땅 속으로 들어가 마른 땅이 드러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그러므로 물은 땅의 터와도 같다(104:8, 9 참조).
3. 그는 땅을 항상 있게 하신다. 그는 그것을 건설하셨으며 그것을 고정시키셨다. 그러므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다(전 1:4). 그리고 그의 섭리는 창조를 지속시킨다(119:90). 물 위에 세워진 땅은 모든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믿을 수 없고 불확실한가를 생각케 해야 한다. 그 터는 모래일 뿐만 아니라 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위에 우리가 무엇을 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4:3
참된 스라엘 사람의 성품 (시편 24:3-6)
여기에서 시편 기자의 묵상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에서 갑자기 바다나 강에 그 터를 세우지 않은 저 세상의 고귀한 사실에서 미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물건들을 사람의 자손들에게 주셨으며 그것은 그의 섭리의 덕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득은 되지 않을 것이다.
Ⅰ. 그러므로 더 나은 것들에 대한 질문이 여기에 나와 있다(3절).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다. 우리가 땅의 소유를 많이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여기에 있는 것은 잠시뿐이며 우리는 곧 여기에서 띠나야 한다. 그러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군고?" 누가 후에 천국에 갈 것이며, 그 전조로서 누가 지금 거룩한 명령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것인가? 그 자신의 기질과 근원과 불멸성을 알고 있으며 깊이 생각하는 영혼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을 관찰했을 때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 어느 피조물 속에서도 사람에게 충족한 도움을 줄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혼은 하나님께로, 하늘로 향할 것을 생각하고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사귀기 위해 여호와께서 거하시고 그 자신을 나타내시는 그 거룩한 곳에, 그 성산에 오르려면, 그리고 그가 그의 백성들을 만나시며 그들을 거룩하고 행복하게 만드시는 그 행복하고 거룩한 곳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읍니까?" 이 물음은 15편 1절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 성소가 세워진 시온 산은 눈에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모두를 상징했다. 백성들이 그 거룩한 곳에 있는 궤를 섬길 때, 다윗은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은 거룩한 것들의 모형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에 의해 거룩한 것 자체에 대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Ⅱ. 이 물음에 대한 답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은혜와 영광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될 그의 고유한 백성들의 특성.
(1) 그들은 모든 잡다한 죄의 행위에서 그들 자신을 지키는 자들이다. 그들은 "손이 깨끗하며," 그것은 세상과 육의 더러움으로 얼룩지지 않았다. 의식상 정결치 못한 자는 그 누구도 성전의 산에 들어 올 수 없었는데, 이 산은 하나님과 친교를 갖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대화의 정결함을 의미하고 있다. 기도에 올려지는 손은 불의한 소득이나 사람을 더럽히고 거룩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 결백한 손이라야 한다.
(2) 그들은 그들의 양심을(즉 내면을)외적으로 드러낸 것과 같이 정말 선한 자들이다. 그들은 "마음이 청결하다." 우리가 믿음에 전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손이 사람 앞에서 깨끗한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우리의 마음에서도 사악함을 씻어 버리고 우리 마음 속에 은밀한 더러움을 -하나님의 눈 앞에 드러나 있는 것 이므로- 품고 있지 말아야 한다. 손은 죄의 행위로 더럽혀져 있는 자들이, 청결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자처럼 가장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진실되고 거짓이 없으며, 그것은 악한 자, 불결한 영을 지닌 자가 건드리지 못하도록 세심한 주의로 지켜지고, 믿음으로써 정결케 되며 하나님의 형상과 뜻을 따른다(마 5:8 참조).
(3) 그들은 마음을 이 세상의 것들 위에 두지 않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의 재물이나 사람들의 칭찬, 관능적인 즐거움에 지나치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며 이러한 것들을 소득으로 택하거나 추구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허탄하고 불확실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4)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정직하게 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과 사람들과의 계약에 있어서 거짓 맹세를 하지 않으며, 약속을 깨뜨리거나 계약을 위배하지 않고, 그릇된 서약을 하지도 않는다. 진리나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에 대한 의무를 존중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치 않다.
(5) 그들은 기도하는 백성들이다(6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로다." 어느 세대가 이러한 성품을 지닌, "대대에 주를 전할"(22:30) 남은 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이다.
[1] 그들은 하나님과 사귀고 하나님을 구한다. 즉 진지하게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은총을 얻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다. 그것을 그들 행복의 최고봉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용납되는 것을 그들 열망의 최고봉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가 올라가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산으로 오르는 길로 끝까지 우리 자신을 이끌어야 한다.
[2]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사귀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구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 오게 된 그들은 성도들의 교제에 들어가게 된다. 앞서간 성도들의 본을 따라(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야곱처럼(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게 된 야곱은 하나님을 구하여 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세대의 성도들과 사귀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의 은총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고 (계 3:9),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는 것을 기쁘게 여길 것이며(슥 8:23), 그들과 결합할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야곱의 이름으로 칭호" 할 것이다(사 44:5). 개종한 직후 바울은 "제자들과 사귀었다"(행 9:26). 그들은 (어떤 사람들의 풀이대로) 야곱에게서, 즉 그의 백성들의 모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것이다. 난외주에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이라 보충하여 그것을 쉽게 풀이하고 있다. 모든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인 것과 같이 기도에 열심인 모든 자들은 야곱의 영적 자손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헛되이 나를 찾으라" 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2. 하나님의 고유한 백성들의 특권(5절). 그들은 진정으로 영영히 행복하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축복 받을 것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복받을 것이다. 그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한 모든 결실과 선물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복을 명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그가 복주시는 자는 진정으로 복받는 것이 된다.
(2) 그들은 의롭고 성별케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이 얻게 될 거룩한 것들 속에 있는 영적 축복이며, 그들이 주리고 목말라 하는 바로 그 의(義)이기도 하다(마 5:6). 의는 축복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의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의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의의 댓가를,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실 의의 면류관"(딤후 4:8)을 얻을 것이다.
(3) 그들은 구원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주시는 곳에 틀림 없이 구원을 계획하신다. 천국에 합당하게 만들어진 안전하게 천국으로 보내질 것이고, 그 때에 그들은 그들이 구해 오던 것을 발견하게 되어 끝없는 만족을 누릴 것이다.
24:7
영광의 왕 (시편 24:7-10)
한번 언급되었던 것이 이 귀절 속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은 노래에서 흔히 사용되며 노래를 매우 아름답게 한다.
1. 영광의 왕을 위해 거듭 명령받고 있는 문들이 제시되어 있다. 문들은 그가 들어가실 수 있도록 넓게 열려져야 한다. 그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며 곧 들어갈 준비를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 이 강하신 왕에 대한 물음이 거듭 반복되어 있다. 그 왕의 이름으로 문들에게 명령되어지고 있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이것은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릴 때 "누구요? 하고 묻는 것이 통례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3. 그 명을 내리신 왕에 대한 만족감이 거듭 반복되어 있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 만군의 여호와시로다"(8,10절).
Ⅰ. 여기에 장엄한 입장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궤가 다윗이 그것을 위해 펴놓은 장막 안으로 또는 솔로몬이 세운 성전 안으로 엄숙하게 들어가는 것을 언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윗이 장막을 짓기 위해 재료들을 준비했을 때, 그것은 봉헌을 위해 시편을 준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지기들은 문들을 열도록 요청받고 있으며 그것은 휘장에 불과했던 성전의 문보다 훨씬 튼튼했기 때문에 "영원한 문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들은 "영광의 왕이 뉘시뇨?" 하고 묻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리고 궤를 짊어진 자들은 우리에게 제시된 이 말로 매우 합당하게 대답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그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 또는 표적이었기 때문이다(수 3:11). 또한 이것은 그 주제를 더욱 감동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시적인 수사로 볼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은 그의 말씀과 명령 속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환영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1. 만반의 준비와 함께 문들은 그를 향해 열려져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고 가장 높은 위치에 오시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의 머리가 600개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의 권위에 우리의 모든 머리를 숙이도록 하자.
2. 모든 경외심과 함께,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염두에 두고, 그에게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항상 그에 대한 경외감을 지녀야 한다.
Ⅱ.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보좌와 함께 있는 그 궤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1.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고 그가 거기에서 환영을 받은 사실에 적용시킬 수 있다. 그가 땅에서 사업을 마치셨을 때, 그는"하늘 구름을 타고 올라 가셨다."(단 7:13, 14). 그때에 천국 문이 그에게 열렸음에 틀림없다. 그 문은 생명 나무를 지키기 위해 우리에 대해서는 잠겨진 것으로 진정 "영원한 문"이라 부를 수 있는 문이다(창 3:24). 우리의 구속주는 그것이 닫혀 있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자기 피로 속죄를 이루시어 "성소에 들어갈" 권한을 얻으심으로써(히 9:12), 권위를 가지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입장을 요구하셨다. 그는 선구자로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어"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을 여셨던"것이다. 음부와 사망의 열쇠뿐만이 아니라 천국과 생명의 열쇠도 그의 손에 있음이 틀림 없다.
그의 장엄한 등장에 대해 천사들을 "영광의 왕이 뉘시뇨?"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사들이 새 예루살렘의 문들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계 21:12). 맏아들이 이끌리어 윗 세상에 들어오실 때 천사들이 그에게 경배하기로 되어 있었다(히 1:6). 따라서 그들은 여기에서 경이와 함께 "도살당한 양처럼" 저 세상에 나타나시는 그를 보고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사 63:1-3) 하고 묻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 그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와 그들의 대적들을 굴복시키기에 "강하고 능하며 싸움에 능하다"고 대답되어 있다.
2.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써, 그의 성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들어오시는 것에 적용시킬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임재하시는 것은 성소 안에 궤가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들을 성결케 한다. "볼지어다, 그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계 3:20). 손님이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이나, 자격이 겨루어진 후 올바른 주인에게 소유권이 넘겨지는 것과 같이. 마음의 문이 그에게 열려져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왕을 우리 영혼에 모셔들이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오시는 이여"하고 그를 반기는 것은 복음의 요청이며 요구이다. 이것을 올바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는 "영광의 왕이 뉘시뇨?" 하고 묻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우리가 믿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해야 하는 그와 사귀어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그는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모셔들이고 환대한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충족하게 해 주시는 "우리의 의의 여호와"구세주가 되실 것이다. 또한 그는 "강하고 능하시며""만군의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들어오시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해롭다. 그는 모욕을 갚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길을 감행하실 수 있으며 그의 금홀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자들을 쇠막대기로 조각이 나게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편을 노래함에 있어서 다음 시편의 첫 번째 말과 같이,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 기꺼이 대답하도록 하자.
마음을 활짝 열고 왕을 영접하라
시 24:1-10 / 유기성목사(선한목자교회)
우리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믿고 만 왕의 왕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엄청난 것입니다.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믿음을 가지고도 삶의 변화가 없는 교인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리적으로 믿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천지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왕되신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찬양입니다.
저는 이 시편 24편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다윗은 하나님이 창조주요 왕이심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라고 7절부터 시작되는 표현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적인 상상력이 아닙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뵙지 않은 사람은 쓸 수 없는 표현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기록도, 사도 바울이 회심할 때 기록도 분명히 왕이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시편 24편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찼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왕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부흥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알 수 없는 흥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리적으로만 하나님이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만 왕의 왕이라고 믿지 않고, 정말 왕이신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놀라운 삶을 살게 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오늘 본문을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올 때, 너무나 기뻐서 아이처럼 춤을 추며 불렀던 노래라고 해석합니다.
삼하 6:14 다윗은 모시로 만든 에봇만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
당시 다윗의 행동은 사람들의 눈에 비정상이었기에 아내 미갈이 비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1절의 다윗의 고백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 라는 고백이 단순히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려고 애를 쓴 사람이 아닙니다. 부귀를 탐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복을 엄청나게 많이 받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목동의 신분에서 왕이 된 것 말고도 말년에 하나님의 성전 건립을 위해 바친 재물의 양을 보면 어마어마했습니다. 역대상 29장에 보면 성전건축 헌금으로 금 3천달라트, 은 7천달란트를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만 따져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조원 가까운 돈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물을 인색한 마음이 없이 기꺼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1절의 고백처럼 다윗은 정말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다윗 처럼 믿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인생이 바로 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왕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3절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느냐?
4-6절에서 여러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손(행실)이 깨끗하고, 마음이 해맑고,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고, 주님을 찾으며,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사람.
이러한 세세한 언급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시 84:5-7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2012년 1년 만이라도 예수님을 마음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마음을 다 하라!” 그래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왕이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왕으로 모시면 어떤 마음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 시편 24편 7-10절에서 저는 노래를 듣습니다. 그 때 다윗의 심정을 찬양으로 다같이 한번 느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편으로 찬양을 만든 것이 있습니다.
■[문들아 고개 들어라]
문들아 머리 들어라 들릴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영광의 왕 들어 가시도록
영광의 왕 들어 가신다 영광의 왕 뉘시뇨 강하고 능하신 주로다
전쟁에 능하신 주시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왕께 만세 왕께 만세 당신은 영광의 왕이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여러분, 어떠십니까? 시편 24편은 글로 읽고 머리로 이해할 성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슴으로 읽고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감동이 있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성령님이 계시다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춤을 추지 않았어도 마음 안에 무엇인가 뛰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더 하소서! 다윗 같게 하소서!”
주님은 우리가 진정 원하면 우리에게 다윗 처럼 이사야 처럼 스데반 처럼 사도 바울 처럼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왕이신 하나님을 모시기 원하십니까? 마음을 활짝 열고 왕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유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하시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을 랍비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랍비가 아이에게 질문을 합니다.“얘야,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 네가 나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말을 해 준다면 동전 한 개를 주겠어.” 이 랍비는 아이가 설마 이처럼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제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해주시면 저는 선생님께 동전을 두 개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안 계신가를 말해줄 수 있습니까?” 아이의 깨끗한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장소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는데, 죄 많은 어른의 마음은 하나님을 찾기 어렵다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왜 좁디 좁은 우리 마음에는 못 들어오셔서 안타까와하시는 것입니까? 천군 천마를 동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놀라운 신비인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임하지 못하시는 영역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 만큼은 우리가 하나님께 열어드려야 들어오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마음만큼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딸도 어느 정도 크면 방문에 <노크하고 들어오세요> 하고 붙여 놓지 않습니까?
안타깝게도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마귀를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타락한 이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으나,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마음에 왕으로 영접하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예수님은 마음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서 오직 인간 세상만 하나님께서 당분간 왕노릇하시는 것을 보류하고 계신 영역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인간의 마음만이 하나님이 임의로 다스리지 못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만왕의 왕이 들어가시는데 누가 문을 닫아 놓겠습니까? 왕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왕이 없이 사는 것이 자유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죄와 육신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으면 그 헌신을 마귀에게 바치게 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왕이어야 우리가 죄와 육신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문을 열어도 그저 문을 여는 정도가 아닙니다. 왕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사위나 며느리가 와도 목사님이 심방 와도 문을 활짝 여는데 왕이신 주님이 오시는데 당연히 문을 활짝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찬양만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찬양 속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염려나 두려움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슬픔이나 낙심과 절망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림자도 없습니다. 담대함과 기쁨과 확신이 넘칩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왕으로 믿는 성도의 삶의 분위기입니다.
큰빛교회 부흥회, 한 집사님, 늘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는데, 이번에 자신의 잔이 이미 넘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눈물로 고백하였습니다. 재정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형편인데, 가만히 살펴 보니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도 많더랍니다. 예수님 한 분 만으로도 이미 넘치고도 넘치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주님은 나의 최고봉] 7/4 짜증내지 말라
짜증(신경질, 분노, 불평)이라는 것은 정신적 또는 영적으로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압니다. “주 안에서 평안하기 바랍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주 안에서 참고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혼란과 역경 속에서 참으로 주 안에서 안식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얻는 것은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 평안은 오직 예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짜증을 내며 신경질을 내는 것은 언제나 죄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걱정하기도 하고 짜증나게 마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 지를 말해줍니다. 짜증은 바로“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걱정하거나 짜증내신 적이 없으셨습나다. 그 이유는 그 분이 이 땅에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짜증(걱정, 신경질, 염려 등)을 낸다면 이는 악한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기에도 벅찰 것이라는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까? 모든 어리석은 생각은 다 접고 전능자의 그늘에 머무십시오. 그리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십시오.“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으며 짜증내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와 신경질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기에 발생되는 문제들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왕이 되시면 온 세상의 하나님이 왕되심이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죄와 육신의 종노릇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제 마음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축원합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시 24:1-10 / 이삼규목사(낙양교회)
시편 22편은 고난의 주님, 23편은 부활의 주님, 24편은 재림의 주님에 대한 노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본 시편이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의 기쁨과 영광을 노래한 시라고 생각합니다(삼상 6:12-19). 그런데 시편의 내용으로 보면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여 성소로 행진하는 장면을 연상하고 쓰여졌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문에 다가갔을 때 레위인 문지기들이 그들을 맞이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 것은 예배자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규정된 기준들-완전한 의-로 대답해 주는 것은 문지기의 몫이었습니다. 이 경우 예배자들은 자신들이 들어갈 자격을 갖추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여호와의 은총을 구하고 있다고만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여호와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 원했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 제물을 가져와야 했음을 시사 합니다. 이 시편은 사람들이 격려하는 반복구 형태로 표현된 여호와의 위대하심에 환호를 외치며 성소로 들어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1.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1-2절)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너무도 작은 나라의 신(神)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세상 여러 나라들 중 가장 작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작은 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세상과 온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믿습니까?
학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 주인이 되셨을까요?
시 24: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창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실제로 지구 표면의 바다 면적은 육지의 세 배나 된다고 합니다.
땅을 바다나 강 위에 세우셨으니까 일단은 바닷물이나 강물이 밀려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언젠가는 다시 육지가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물에서 육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육지를 지탱할 힘이 없어지면 육지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붙드신 손을 놓아버리면 땅은 한순간에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죄에 빠진 이 세상은 더욱더 안전하지 못합니다. 마치 세월호가 순식간에 침몰하는 것처럼 침몰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당장 침몰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편하게 먹고 살 수 있지만 결국 어느 한 순간에 배가 침몰하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바다에 빠져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은 진짜 행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죽기 전에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2. 하나님께 나아갈 자의 자격(3-6절)
1)예배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의 기준들을 충족해야 합니다.
레위인들은 성문을 지키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아무나 성문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성소에 오는 사람들이 거룩함의 요구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지 적절한 제물을 가졌는지 확인하는 일을 했습니다.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여기에서 여호와의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장소를 상징합니다(요 4:19-24).
2)행동과 생각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들어가고 복을 받을 것입니다.
시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서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행위로 범죄하지 않음을 말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이것은 내부적 마음과 뜻이 옳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한편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라는 것은 말에 있어서 거짓된 점이 없어야 할 것을 특별히 언급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손, 마음, 입 등 세 가지 면에서 정결해야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런데 왜 다윗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냐고 질문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시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성을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그리고 다윗 자신도 법궤를 옮기려고 하다가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를 잡았던 사람이 즉사해버렸습니다. 그러나 감히 어는 인간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인도해 주셔야만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하실 때 아무도 그 산에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불과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려 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내려 오셔도 안 되고 오직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덮어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죄인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얻을 축복은 무엇입니까?
시 24: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복’과 ‘의’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여호와께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복’(베라카)이라는 것은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의미는 선물, 여호와에게서 오는 풍성함 혹은 관대함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둘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복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민 6: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 6: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한걸음 더 나가 ‘의를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기본적으로는 율법, 곧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 45:25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누구를 찾는 족속이라고 하였습니까?
시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이것은 겉꾸미는 자들과는 달리 행동으로 여호와의 산에 오르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시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우리는 외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3. 영광의 왕의 입성(7-10절)
1)영광의 왕이 누구십니까?
시 24: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① 영광의 왕은 우주의 창조자이십니다(1-2절)
예수님은 영원한 말씀으로 계실 때, 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요1:3, 골 1:16, 히 1:2).
② 영광의 왕은 인류의 최고 심판장십니다(4절)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께 심판의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인류 최대 최후의 백보좌 심판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③ 영광의 왕은 강하고 능하시며,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8절).
모든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마귀의 전쟁에서 승리함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영광의 왕을 모신 자는 강한 자가 될 수 있고,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의 왕을 모셔야 합니다.
2)영광의 왕을 모시려면?
① 문을 열어야 합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시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② 문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도록 우리는 마음의 문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왕을 모시기 방해되는 문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우리가 영광의 왕을 모시려는 ‘편견의 문’, ‘부패의 문’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빈 마음에 주님이 좌정하시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③ 감격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성전으로 들어올 때, 기뻐 찬송하였습니다. 다윗은 법궤가 시온산에 들어올 때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이 거하실 성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혼 깊은 곳에 모셔야 합니다. 그때 기쁨으로 감격하는 마음으로 모셔야 합니다.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행 16: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영광의 왕을 잘 모시면 복을 받습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축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로부터 세상에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게 됩니다.
만유의 주 만왕의 왕, 하나님
시 24:1-10 / 곽창대목사
지난 주일에 살펴본 시편 23편 마지막 절(6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을 확신하면서 시를 마무리했습니다. 여호와의 집은 적어도 세 가지의 뜻을 함의합니다.
1) 여호와의 집은 성도가 죽은 후에 들어가게 될 천국을 뜻합니다. 다윗은 곧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영원히 살 것을 확신했는데 그 여호와의 집이 천국입니다. 우리도 곧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삼위 하나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앞서간 성도들과 함께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집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에 성도를 데리고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을 뜻합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거기서 성도는 삼위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며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3) 여호와의 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예배하는 성소를 뜻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여호와의 집을 “여호와의 산”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산은 시온의 언덕에 건설된 예루살렘을 뜻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거룩한 곳” 즉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나중에 솔로몬 때에 그곳에 성전이 건립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배의 장소가 세계 도처로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곳마다 성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전이 성소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기에 성도의 심령이 성소입니다.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기에 교회가 성소요 성전입니다.
이처럼 세 가지의 뜻을 함의하고 있는 “여호와의 집”의 개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말해서 지금 여기서 성소 혹은 성전과 무관한 자가 미래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여기서 천국의 백성이 되어야 나중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선배들은 “통상적으로 보이는 교회의 회원이 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회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즉 지역교회의 분명한 지체로 활동해야 천국의 백성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로 모여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는 성도라야 천국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예식인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자라야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24편은 “하나님의 집인 성소에 들어가 예배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는 시편입니다. 세 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2절 / 3-6절 / 7-10절
첫째 연 (1-2절)
1절: 이 시를 쓴 다윗은 만유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 창조주 하나님: 만유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 최고의 통치자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없이 만유의 존재와 인간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2절: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땅을 건설하셨다는 뜻입니다.
- 질서의 하나님: 바다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땅의 경계선을 정하셨습니다.
- 조화의 하나님: 땅에 강들을 흐르게 하셔서 사람 살기에 적합한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선물로 주신 만물이 선하고 좋기에 만물을 잘 관리하고 즐기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장에 내다파는 육고기들을 그 출처를 묻지 말고 얼마든지 사서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상 신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고기일지라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자유롭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25-26)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교우 여러분,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선물로 주셨으므로 우리가 그 선물을 정당하게 누리고 즐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둘째 연 (3-6절)
둘째 연은 여호와의 집에 오를 자가 누구인지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유의 창조주요 온 세계의 통치자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예배하는 한 장소를 택하여 거기서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그 예배의 장소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여호와의 산”인 예루살렘입니다. 그 예루살렘에 언약궤가 안치된 곳을 성소(“거룩한 곳”)로 인정하셨고 그 성소에서 예배하는 백성들을 만나 교제하시고 예배하는 그들에게 하늘과 땅의 복을 하사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이 생깁니다. 1-2절에서 하나님께서 만유를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만유를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는데 “왜 한 백성 이스라엘만 선택하셨는가, 더구나 한 곳 예루살렘만 성소로 인정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생들에게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역사 가운데 선명하게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지 않으셨다면 타락한 인생들 모두가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형상으로 만들어 섬길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인류의 역사는 우상숭배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롬 1:20-23)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래서 만유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한 백성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장소도 한 곳 예루살렘을 중앙 성소로 선택하여 거기에서만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율법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바른 예배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포하신 율법 가운데 핵심이 되는 도덕법을 강조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 만유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어떤 자가 되어야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1) 깨끗한 손: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즉 거룩한 삶,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뜻합니다.
2) 청결한 마음과 뜻: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마음중심에 두는 것을 뜻합니다. 뜻을 허탄한 데 두는 것은 우상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허탄한 데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3) 진실한 말: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오히려 이웃을 바르게 세우고 격려하는 말을 지혜롭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들으신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말하면 우리의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웃에게 덕을 끼칩니다.
요악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합당한 생각과 말과 행실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라야 참된 예배자입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다 바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되는 본분입니다.
5절은 이런 자가 복 있는 자임을 선언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자가 어떤 복을 받을 것인지 말씀합니다. 대표적으로 세 곳만 들겠습니다.
(시 15:1-5) 『[1] [다윗의 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사 33:14-16) 『[14]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15]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16]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절은 그런 자가 복을 받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 구약시대 예루살렘에서의 예배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 안에서의 예배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른 예배가 복음(진리)의 핵심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예배로 완성되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그림자 역할을 했던 구약의 예배가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예배로 대체되었음을 밝히셨습니다.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의 심령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심으로써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참되게 예배하는 성도와 교회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하늘과 땅의 신령한 복을 부어주십니다.
6절 마지막의 “셀라”는 이제 음을 높여 부르라는 뜻으로 이어지는 구절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연 (7-10절)
여기서 다윗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귀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민 10:35-36) 『[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왕으로 옹립되었을 때 가장 먼저 심혈을 기울여 착수한 일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삼하 6:12-15)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이 때의 감격을 다윗은 저주 회상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다윗이 그 동안 치렀던 숱한 전쟁에서의 승리가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 때문이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24편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백성들에게 주지시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 7절: 언약궤를 운반하는 제사장들의 외침
* 8절 상반절: 성소 문지기들의 질문,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 8절 하반절: 언약궤를 운반하는 제사장들의 응답
* 9절: 언약궤를 운반하는 제사장들의 반복된 외침
* 10절 상반절: 성소 문지기들의 반복된 질문,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 10절 하반절: 언약궤를 운반하는 제사장들의 반복된 응답
“전쟁에서 승리하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성소로 돌아와 좌정하시니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세세무궁토록 돌릴지어다.”라는 뜻입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우리의 왕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하신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만군의 하나님, 승리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전심으로 예배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합당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를 의와 진리와 평강의 길로 인도하소서!”
10절 마지막의 셀라: 보편적인 규칙, 아멘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의 역사 가운데 오셔서 만유의 주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심을 명백하게 드러내셨다고 선언합니다.
<성령님이 강림하신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바울의 해설>
(골 1:13-20)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빌 2:6-11)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도 요한의 묵시>
(계 19:11-16)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22:12-14)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며 만왕의 왕이심을 줄기차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환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통치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늘과 땅의 신령한 복을 지금 여기서 누리고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완성된 천국에 들어가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새롭게 된 만물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으뜸가는 사명은 언제 어디서든지 진리의 근원이신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 전심전력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할 때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며 세상을 선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됩니다. 금주 한주간도 우리의 삶의 현상에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찬송 6, 10, 9장
요약
여호와의 집은 성도가 죽은 후에 들어갈 천국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에 성도를 데리고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을 뜻합니다. 그곳이 바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거기서 성도는 삼위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며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예배하는 성소를 뜻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곳마다 성소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성도의 심령과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성소요 성전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성소 혹은 성전과 무관한 자가 미래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선배들은 “통상적으로 보이는 교회의 회원이 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 천국의 회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예식인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자가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성도입니다.
시편 24편은 “하나님의 집인 성소에 들어가 예배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는 시편입니다.
첫째 연에서 다윗은 만유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1~2절). 이 세상에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 없이 만유의 존재와 인간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만물을 잘 관리하고 즐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장에서 파는 육고기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들을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자유롭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0:25~26). 이처럼 하나님께서 만물을 선물로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선물을 정당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둘째 연은 여호와의 집에 오를 자가 누구인지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합니다(3~6절).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생들에게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역사 가운데 드러내시기 위하여 한 백성 이스라엘만을 택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으셨다면 타락한 인생들 모두가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형상으로 만들어 섬길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롬 1:20~23). 그래서 “여호와의 산”인 예루살렘을 택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거기서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언약궤가 안치된 곳인 성소에서 예배하는 백성들을 만나 교제하시며 하늘과 땅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바른 예배인지 말씀하셨습니다. 4절에서 다윗은 어떤 사람이 바른 예배자인지 알려줍니다. 먼저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살며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어 다른 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합당한 생각과 말과 행실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다 바쳐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5절; 시 15:1~5; 사 33:14~16; 마 6:33). 이런 자가 복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이기 때문입니다(6절).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 구약시대 예루살렘에서의 예배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 안에서의 예배로 완성되었습니다(요 4:21~24).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의 심령과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성령님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예배하는 성도와 교회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하늘과 땅의 신령한 복을 부어주십니다.
셋째 연에서 다윗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귀환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7~10절; 민 10:35~36).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왕으로 옹립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왔습니다(삼하 6:12~15). 다윗은 이때의 감격을 회상하며 그 동안 치렀던 숱한 전쟁에서의 승리가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 때문이었음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백성들에게 주지시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역사 가운데 오셔서 만유의 주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심을 명백하게 드러내셨다고 선언합니다(행 2:36; 골 1:13~20; 빌 2:6~11; 계 19:11~16, 22:12~14). 바로 이 예수님을 우리는 믿고 환영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늘과 땅의 신령한 복을 지금 여기서 누리고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완성된 천국에 들어가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새롭게 된 만물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제일 으뜸가는 사명은 언제 어디서든지 진리의 근원이신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 전심전력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할 때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며 세상을 선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상에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한 곳에 설 자
시 24:1-10 / 지성래목사(예수사랑교회)
사무엘하 5장에는 왕이 된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하여 이기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니 마치도 물을 흩어 버리듯이 블레셋을 이기게 하셨다. 이기고 또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삼하5:24)고 하셨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르비임 골짜기에 가득한 블레셋의 군대를 정면공격하지 말고 뽕나무 수풀 맞은 편에서 기습공격을 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뽕나무 수풀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날 때에 공격하라”고 명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쟁을 수행하였고 블레셋을 넉넉히 물리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범사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형통해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말씀은 순리적이다. 상식적이다. 세상을 역리로 살고 세상을 공의와 진리의 상식에서 벗어나게 살아가는데 잘되는 경우가 있나. 그건 당장은 몰라도 잘 되어 가는 것 처럼 보이는 것 뿐이지 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불의한 자는 비 온 후에 풀 베임을 당하듯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전쟁에 이긴 다윗은 뽑아낸 군사 삼만 명을 모으고 하나님의 법궤를 되찾아 오게 되었다. 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를 몰았다. 얼마나 기쁘던지 왕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들은 잣나무 악기를 총동원하였다.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앙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우렁차게 연주하였다.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던 중에 소들이 뛰었다. 이 일을 맡았던 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법궤를 붙들었는데 그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 법궤가 흔들리니 만지거나 붙잡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은“성물은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법궤를 이동할 때에 궤 양편의 네 고리에 두 개의 채를 꿰어 어깨에 메어 옮기라고 하셨다. 그런데 수레에 실어 옮겼으니 처음부터 이동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두려운 마음에 휩싸인 다윗 왕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법궤를 보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석 달 동안 여호와께서 오벳에돔의 온 집에 복을 내리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오벳에돔의 집에 내리신 그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이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고 지낸 석 달 동안 하나님이 내려 주신 복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문을 전해 들은 왕 다윗은 직접 나서서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시어 오기로 하였다. 역대상 15장에 보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그리고 레위 사람 여섯 명을 포함한 여덟 사람이 이 일을 전담하였다. 저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여섯 걸음을 갔는데 다윗은 감격하여 제사장들을 앞세우고 소와 살진 송아지를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다윗은 앞장서서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온 백성이 뒤따르며 즐겁게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기뻐하였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 크게 기뻐하며 춤을 추던왕 다윗을 업신여긴 다윗의 아내 미갈은 죽을 때까지 복을 받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일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시편 24편은 그 날의 그 감격과 기쁨을 고백한 다윗의 고백이다. “메시아 예언시”로 구분하는 내용이 시편 24편이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2절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3-6절은 “여호와의 법궤를 대하는 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7-10절은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어 들일 수 있도록 성소의 문을 활짝 열라는 선포이며 명령이며 찬양이다. 마치 왕이 왕궁에 입성하기 위하여 성문을 활짝 열라는 명령과도 같은 장면이다. 이는 성문을 열 듯이 성막의 문을 활짝 열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여호와의 임재를 환영하고 영접하라는 선포이기도 하다.
자! 그러면 과연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이며 과연 누가 거룩한 곳에 설 자인가. 3절에서 말씀하는 ‘여호와의 산’이란 예루살렘 성이 있는 곳을 말한다. ‘거룩한 곳’이란 여호와의 성막에 여호와의 궤를 모셔 들일 곳을 말한다. 사실 ‘거룩한 곳’이란 예루살렘과 같이 지정된 장소라기 보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일컫는다.
그러면 과연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일까.
몸과 마음이 청결한 자.
다윗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여야 한다고 하였다. 코로나19바리러스에 대한 두려움은 각 사람이 손을 늘 깨끗하게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결과 독감환자도 줄고 감기 환자도 줄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손이 깨끗하다는 말은 행실이 깨끗한 자를 말씀한다.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다. 이 세상에 거룩한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시편 14편 1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편지하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그리고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다. 시편 14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그 마음이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며,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청결할 뿐만 아니라 그 행실이 깨끗한 자를 찾고 계시다. 욥기 17장 9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종교 개혁가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서 전해지는 그의 수도 생활의 일화이다. 그가 수도사 생활을 하던 수도원에서 여러 날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 제목은 한결 같았다.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나의 마음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틴 루터는 수 십 번, 수 백 번 같은 내용의 기도를 계속하여 반복하였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마틴 루터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놓고 손을 씻는데 실성한 사람처럼 손을 씻고 또 씻고 계속하여 손 씻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료 수도사가 마틴 루터에게 물었다. “아니 자네는 왜 그렇게 손을 씻고 또 씻는가”그 때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던 마틴 루터는“이보게 아무리 깨끗이 씻으려고 하여도 내 마음을 깨끗이 씻을 수가 없구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청결한 마음과 행실을 지켜 살기를 원했던 젊은 수도사 마틴 루터였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통하여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의 불을 지피도록 하셨다. 그 때의 마틴 루터의 나이는 34살이었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의 팔복 설교에서 교훈해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씀은 세상 탐심을 떠난 ‘거룩한 가난’, 청빈(淸貧)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물욕에 끝이 없는 탐욕을 부리는 중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불의와 거짓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명예에 먹칠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며 양심이 마비된 채 살아가는 세상의 수 많은 권세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성도는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의 마음 가짐을 굳게 지켜 나가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대로 그래야 그 의로 배부르고 그 의로 목마름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하지만 강화도 성공회 예배당 입구에 들어서면 돌비에 새겨 놓은 修己洗心 去惡作善(수기세심 거악작선)이란 한자어를 대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교훈인가. 구한말 선교 초기에 기독교의 복음을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한 교훈을 접하게 된다.
그렇지 않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하나.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씻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마치도 오늘 시편 24편 4절의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나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는 말씀을 축약한 교훈이라 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그 말과 행실에 덕을 세우므로 하나님 앞에서 다윗처럼 “내 마음에 드는 자”라는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는 자.
거룩한 곳에 설 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는 자”라고 하였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고”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과거나 오늘 날이나 사람의 마음을 허탄하게 하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돈, 재산, 명예, 인기, 권력, 힘, 외모, 젊음, 학식, 학력, 학위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잘못하면 다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아들딸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너무 잘 나서 남들보다 실력과 능력이 뛰어난 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우상에 사로잡히는 그 것이 허탄한데 마음을 두는 것이다.
요즘 출애굽기를 새벽마다 대하는데 왜 모세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두 돌판을 던져 깨트리게 되었나. 산 꼭대기에서 이미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 알고 있었다. 모세가 산 아래 내려와서 보니 시내산 아래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앞장 세우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제사하며 먹고 마시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모세는 두 손에 들고 있던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던져 깨트린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은 다시 두 돌판을 모세더러 다듬어 만들어 가지고 산에 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그 두 돌판에 십계명의 말씀을 기록해 주셨다.
그 우상 숭배의 현장을 보신 하나님은 모세만 남겨 두고 모두 다 진멸해 버리시겠다고 크게 노하셨다. 그때에 모세가 중보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생각을 바꾸셔서 저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지난주 내내 날마다 조금씩 묵상한 출애굽기의 내용에 보면 하나님은 성막 건설을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을 쓰고도 남도록 가져다가 넘쳐나게 쌓았다. 그만 가져오라고 할 정도였다. 우상 숭배에서 벗어난 증거란 그런 것이다.
탐심에 붙잡히고 우상 숭배에 사로 잡히며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일이 인색해진다. 그러나 우상 숭배를 회개하고 탐심을 버리기 시작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생활이 가장 기쁘고 즐겁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런 것을 기독교에서는 “ 은혜 받았다. 은혜가 들어갔다. 은혜를 안다. 성령 충만하다”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나. 사도행전 1-4장의 성령 받은 백성들은 가진 것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쌓아 두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의 필요를 충분히 채우며 더불어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밭을 팔아 바친 바나바였다.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 앞에 응답하며 거룩한 곳에 서는 자의 마음 가짐으로 다윗 왕과 같은 마음을 가지면 예배의 시간마다 기쁘고 예배의 시간마다 춤을 추고 싶어진다. 다윗은 그런 인물이었다. 다윗의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 섬김은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하나님은 다윗에 대하여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고 하셨다. 그렇지 않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일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여행도 가도,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업도 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공언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인물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하시려는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혜를 회복하는 주인공이 되자. 은혜를 받는 매 순간으로 자신을 지켜 가자.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
하나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를 찾으신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 마음 속에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행세하며 온갖 세상 불의를 짝하고 탐욕에 가득차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그를 거룩하게 여기실 리가 없다. 불신앙과 불의의 결과는 패망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디도서 1장 16절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하였다.
겉으로는 의로운 척, 선한 척, 착한 척, 양심적인 척, 하나님을 잘 믿는 척하면서 그 마음 속으로는 온갖 추하고 악하고 더러운 생각에 사로 잡혀서 파리가 썩은 생선 위에 날아 앉듯이 살아가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하나님의 거룩 한 곳에 설 자는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세상의 불의와 거짓을 멀리해야 한다. 입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는 자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이다. 레위기 19장 12절에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성도라면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불의와 거짓이 가득하고 불의하고 거짓되게 사는 자들이 득세하는 것 같은 세상에서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진리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의 승리를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각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리할 때에 5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게”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 여호와의 문에 들어갈 자가 누구인가. 다윗은“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도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법궤를 되찾아 오는 것이 영광스럽듯이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는 것이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고 사망을 이긴 부활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 중의 복이다. 강하고 능하신 영광의 왕을 따라서 영원한 나라에 승리하는 백성으로 입성하는 영광을 누리는 주인공이 다 될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영원한 문
시편 24:1-10 / 창골산카페
시편 20편부터 24편까지 연결된 시편은 아니지만 차례대로 살펴보는 중에 내용적인 연결점이 있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20편은 왕의 승리 기원, 21편은 왕의 승리 선포, 22편은 십자가로 왕의 승리, 23장은 십자가로 승리한 분이 선한 목자가 되어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 양들을 인도하여 어디로 데리고 가십니까? 지난주에 본 23:6절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선한 목자가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그 인자하심으로 양들을 인도하여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그 여호와의 집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십니까? 자신 있게 대답을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바로는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알 때가 있습니다. 다치거나 병들거나 늙어서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님을 조금은 압니다. 그럴 때에 자기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고 몸신 프로를 보면서 더욱 내 몸을 챙기려고 합니다. 어제 외숙모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화장이 아니라 매장이었기에 취토(取土)를 합니다. 저는 그 유례가 무언지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성경으로 해석을 하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확인하는 좋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취토하고 내려와서는 이동 식당차에서 나오는 소고기 국이 뜨끈하고 맛있었습니다. 취토하는 그 잠깐의 순간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지만 돌아서면 내 몸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본문 3~6절입니다. “봉독”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입니까?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의 문자대로라면 저는 여호와 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거룩한 곳에 설자는 이러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자가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는다고 합니다. 이들이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며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라면 손과 마음이 다 깨끗하여야 합니다.
시편 15:1~5절입니다. “봉독” 앞에서 본 내용이라 그때 설교의 결론만 봅니다. “주의 장막에 거할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들 위에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합니다. 이 말씀을 은혜로 믿게 된 자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눈물과 애통과 곡하는 것도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함을 압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의 복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겁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님을 대면하여 보고 살 그날을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의 해석과 같은 골로새서 1:13~17절을 봅니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인데 그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 있는 우리를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옮겨지게 된 이유는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여호와 하나님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신비입니다.
본문 3~6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거룩한 곳에 서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을 사람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 산다고 하면서 그 중에서도 거룩한 성전의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십자가의 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성전을 삼으십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1장에서 본 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나라에 들여놓으신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왕으로 들어가셔서 죽으심으로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
본문 7~10절입니다.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세상에 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들은 다 보이는 문이기에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문은 어디에 있으며 누구에게 열립니까?
창세기 28:10~19절입니다.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1)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의 이름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으로 사기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중에서 이미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지만 그의 삶은 이름대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다가 형이 죽이려고 하자 도망가는 신세입니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외삼촌의 집으로 가는 중에 길에서 노숙합니다. 그때 꿈속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아무른 책망도 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버지 이삭과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신다고 하시면서 하늘과 땅이 연결된 사닥다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깨어나서 이곳이 하늘의 문이라고 하며 또 하나님의 집이라고 벧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6절에서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말씀은 놀라운 표현입니다. 그러면 사닥다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하늘의 문이 어떻게 열리는지 계속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0~51절입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야곱이 본 그 사닥다리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영원한 문을 봅니다.
요한복음 12:12~16절입니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ㄱ)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예수님께서 스가랴서의 예언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영광의 왕이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 성문이 열려야 합니다. 군중들과 어린이들이 환호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성전 파괴자로 몰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런 일에 왕을 맞이한다고 호산나 외친 자들도 며칠 만에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함께 소리 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뜻을 사도들도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 나서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영원한 하늘의 문을 영광이 왕이 여신 것을 증거 하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누가복음 23:39~43절입니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한 강도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데 그 낙원의 문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여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며 양의 문이 되십니다.
마가복음 15:38~39절입니다.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기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돌아가십니다. 그 순간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됩니다. 이때 예수님을 처형하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사람에게도 하늘이 문이 열린 겁니다. 그러므로 방금 본 강도나 야곱이 다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늘이 문에 열리고 그 영원한 문을 왕의 죽으심으로 여신 겁니다.
히브리서 10:19~20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집니다.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합니다. 그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어짐으로 하늘로 가는 영원한 영광의 문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여셨습니다. 그 문을 여실뿐만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묵시적으로는 이미 하늘에 앉혀 놓았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받은 사도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에베소서 2:5~6절입니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하나님의 강력한 일하심인데 그 일에 자기 백성을 참여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이 놀라운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고 오는 세대에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런 내용을 십자가 지신 영광의 왕이 영원한 문을 열어 놓으시고 이미 묵시적으로 이루어 놓으셨기에 이런 말씀을 성경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7~10절을 다시 봅니다.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이 말씀을 문자대로 보면 힘 있는 왕이 와서 우리를 반대하는 적들을 다 물리치는 내용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실 때에 영광의 왕을 맞이하는 모습으로 맞이하였지만 오히려 그 사건과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며칠 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하여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았을 때에 이 찬송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짐을 밝히 보게 됩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이 십자가로 그 영원한 영광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신 분이 영원한 왕으로 하늘의 영원한 영광의 문을 여셨습니다. 이 문이 열린 자들은 세상의 문이 열리지 않아도 별로 답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영광의 문에 들어선 자들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찬송하며 따라 갑니다.
예배다운 예배
시편 24:1-10
시편 24편은 잃어버린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그 순간을 기념하여 악기에 맞춰 부른 찬양 시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들로부터 승리를 거둔 후 성전 문으로 입성하는 영광의 왕을 축하하는 찬양의 시입니다. 그 이후에도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오프닝 시로 낭독했습니다.
본문 1-2절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말씀하는데 하나님은 창조자라고 말씀합니다. “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만물이 다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편 24편뿐 아니라 많은 시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가 연상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마땅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창조주를 높여 드리는 일입니다. 창조주는 예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피조물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앞서는 행위는 예배입니다. 시편 100편 3절에서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틀림없이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섬길 대상을 분명히 알고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섬길 대상을 잘 모르면 그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미신적인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그냥 교회를 다닌다면 미신입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섬기며 삽니다. 무신론자도 신이 없음을 믿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종교입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예배의 대상이 바뀌는 일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길 때가 많았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에서 모세의 형 아론이 백성들과 함께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며 섬겼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신앙입니까? 특별히 오늘날은 우상이 우글거리는 시대입니다. 거짓된 신들에게 절을 하도록 부추기는 문화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예배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창조주이십니다. 7절, 8절, 9절에서도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영광의 왕,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왕으로 소개합니다.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승리를 가져오게 하십니다.
그러면 예배자가 누구입니까? 3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하는데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아무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거룩한 곳입니다. 감히 아무나 설 수 없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배를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렸다고 드려진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예배가 성립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배를 드렸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예배에서는 우리의 만족이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족하든 불쾌하든 그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예배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자 할 때 관심은 예배자에게 있습니다. 예배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가 무슨 재물을 바쳤던 소용이 없습니다. 인류 최초에 일어났던 아벨과 가인의 제사를 통해 받은 교훈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받고 거부하신 것은 재물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재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에 있습니다. 오늘로 치면 헌금을 얼마를 가져 왔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에게 초점을 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물을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기만족에 빠졌었습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예배자가 잘못되어 있으면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나는 참된 예배자인가?”입니다.
본문에는 예배자의 자격이 나옵니다. 본문 4절에서는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예배자의 마음의 상태와 외적인 행동,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까지 확인하게 합니다. 예배자는 자신을 거룩히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예배자의 필수는 정결함입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힘은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 영적인 교류가 오고가는 예배는 외적인 어떤 형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 거리끼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항상 가깝게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다가도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과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플로이드 맥클랑(Floyd McClung)은 이렇게 묘사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모든 영적인 느낌이 다 사라졌다. 기도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마귀를 꾸짖고 대적도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적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죄의 문제로 인하여 가로막혀 있을 때입니다.
예배자에게 장애물은 마음속에 숨어있는 은밀한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까지도 지으신 분이시기에 속속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문제가 있는 부부는 남편이 집에 들어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심하면 집에 들어와 자는지도 관심이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가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아픈지, 힘들어 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대화를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부부는 다릅니다. 서로에게 민감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서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친밀한 관계에 있을수록 하나님과의 사이에 민감함이 있습니다. 작은 죄의 문제라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걸림이 됩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그대로 두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시편 17편 3절에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이룬 엄청난 업적이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민감성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거장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죄의 문제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느끼고 살아갔습니다. 영적인 깨어있음을 통하여 영적인 민감성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늘 느끼며 살아갔습니다. 거짓말을 한 번 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걸림돌이 생깁니다. 그냥 사람 앞에서 거짓말 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악감을 가지고 있는 순간, 내 마음에 무엇인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끼며 하나님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작은 죄라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을 보내 보십시오. 욕심에 이끌려 있는 내 마음이 그대로 있는 상태 속에서 과연 예배가 되는지 한 번 보십시오. 작은 죄라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을 보내 보십시오. 형식적인 예배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예배는 안 됩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게 만듭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수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뭘까요? 본문 5-6절에서는 “5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어야 합니다. 누가 이런 은혜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에서 “찾는다”는 표현은 원문적으로 매우 간절함을 가지고 찾는 것을 말합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니라 간절하게 찾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합니다. 갑자기 왜 야곱의 이름이 나올까요? 야곱의 인생은 실패로 뒤범벅되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의 늪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고 죄를 지으면 도망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실수와 실패로 점철되었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품어주시고 다시 그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예배의 한가운데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올 자격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은 어떤 죄도 덮을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예배가 시작됩니다. 7-8절과 9-10절은 반복입니다. 7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에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라고 합니다. 성전에 큰 문이 닫혀져 있는데 왕이 들어가면 문이 활짝 열려야 했습니다. 왕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배자들이 법궤를 들고 성전에 올라갈 때 작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바깥에서 합창단들이 소리를 지르며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라고 찬양하면 성전 안쪽에 기다리고 있던 합창단이 응답합니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그러면 바깥에 있던 합창단이 화답합니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문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왕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니 문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문들이 있는데 모든 문들을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메시지는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책망받은 여러 교회가 있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책망이 가장 심한 책망이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를 향한 주님의 준엄한 심판은 “토하여 내치리라”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여 부족한 게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뭡니까?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결정적인 문제는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라고 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예배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활동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없는 예배를 드렸지만 주님이 그 예배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없는 예배, 주님에게 관심도 없는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만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에 대해 마음이 완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예배를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없는 봉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마음의 중심에 모셔 들이는 예배자의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요즘은 아파트 벨을 누르면 그냥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렌즈 구멍으로 먼저 확인하거나 웬만하면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살짝 열어준다 해도 줄이 걸려 있습니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큽니다. 왕을 맞으려면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머리를 들라”는 말은 문을 끝까지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활짝 열리지 않은 채 예배를 드리면 예배를 드린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의 마음에 민감하게 반응하십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마음이 열려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오셨습니까? 마음이 정말 열려 있습니까? 정말 주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이기 위해서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맞이해야 합니까? 영광의 왕이십니다. 절대 지존이신 하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영광의 왕, 절대 지존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냥 맞이할 수 없습니다. 왕 중의 왕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미리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문을 활짝 여는 것입니까? 갈급한 마음, 주님에 대한 굶주림, 가난한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열린 마음은 “지금 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필요합니다!”라는 가난해진 마음입니다. 시편 73편 25절에서 시인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다른 것이 자리 잡고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이 찾아오실만한 환경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푹 젖어 살다가 주일에 오면 마음의 문이 바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는 게 아닙니다. 일주일동안 뜨겁게 영적인 삶을 살았던 분은 예배에 오면 불이 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부딪히고, 치이다 보면 영적으로 깡마른 상태가 되고 그렇게 주일날 와서 앉으면 바로 불이 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너무 중요합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는 문은 녹슬어서 열리지도 않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기 전 마음의 준비가 중요합니다. 예배에 앉았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예배를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심방을 가 봐도 심방 받을 준비를 한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배에서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요? 영광의 왕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왕은 전쟁에 능하신 왕, 승리를 가져다주는 왕이십니다. 영원한 왕이신 이 왕을 만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번에 호주 오픈에 한국 선수가 4강에 진출한 것으로도 온 언론이 칭송을 하는 것을 봅니다. 세상은 칭송할 것에 목이 말라 있습니다. 사인을 받으려고 하고 그와 연관된 것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과 비교가 안 됩니다.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홀로 칭송을 받기 합당하신 분입니다. 최고의 지존을 만나고 난 다음에 오는 만족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다 일어난다고 해도 왕을 알현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만남보다 더 강력한 체험은 없습니다. 예배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는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라고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 것입니다. 복 중의 복은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주어진 특권은 예배입니다. 예배보다 더 큰 선물은 없고, 더 큰 특권은 없습니다. 예배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세상의 어디에서도 가질 수 없는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압도를 당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경이로운 황홀함과 장엄함,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모세는 가시떨기의 불꽃 가운데 임하신 여호와의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광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그는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명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생 최고의 갈망은 하나였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8절의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로 모세의 최고의 갈망은 하나님의 어떤 축복도 어떤 은혜도 아닌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영광을 한 번 살짝 보기만 해도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영광 안에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생애에 수없는 고난이 있었지만 고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차 내게 나타날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이라는 단어에 “무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보다 더 큰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배의 특권은 영광의 왕을 만나는 겁니다.
모세의 갈망이 너무도 강해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집니다. 하나님은 특이한 방식으로 당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살짝 보여주십니다. “내가 내 등을 보이리니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살짝 눈을 가리고 보여주셨음에도 모세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를 당합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은 광채로 사람들이 볼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났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가장 축복된 경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을 통하여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눈으로 본 것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영광입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의 영광에 비교하면 태양빛 앞의 반딧불만큼도 아닙니다. 바울은 그 영광의 무게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한 번이라도 보면 다른 모든 것을 다 삼켜 버립니다. 모든 것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력합니다. 우리가 이전에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때 놀랍니다. 경이롭다고 표현합니다. 그때 우리는 감격합니다. 너무 좋아서 거기에 빠져들고 빠져들다 보면 다른 게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게 영광의 충격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너무 좋아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로 그 영광에 압도를 당합니다.
신자는 예배 속에서 그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끝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입맛에 맞는 예배가 아닌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예배를 드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기 위해서 승부를 거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배에 모든 것을 생명처럼 붙들고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신앙과 삶은 예배에서 결정됩니다. 교회는 예배 드리는 곳입니다. 예배가 예배답게 드려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참된 예배가 드려지고 그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부흥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부흥이 아닙니다.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에 승부를 걸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배에 승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인생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지만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면 승리합니다. 어떤 고난도 이겨 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의 축복은 예배입니다. 보물 중의 보물이고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내 죄의 문제를 다 청산하고 거룩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그 임재에 압도를 당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능히 이기고도 남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예배 안에 나타나는 영광을 본 자들이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한 해 동안 예배에 성공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주인인가
시 24:1-10 / 정진경목사
역사의 주인은 누구이며 우주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런 질문을 가끔 듣는데 이에 대해 역사는 다양한 대답을 합니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땅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땅을 만물의 어머니라 했고, 그후 시간이 흐른 후에는 많은 사람들은 가시적인 이 세상을 악마가 지배한다고 믿어 이를 따르는 조로아스터교나 희랍철학등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 이 영혼이 땅에 속한 육체를 잠시 빌어서 그 모습을 나타낸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이원론적인 사상을 배격하고 우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시편 24장 1절을 읽어보면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호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을 건설하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기독교 안에 성경이 배척하는 이원론적인 이교 사상 즉 교회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거룩한 곳이고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곳이라는, 그래서 세상과 교회를 대립관계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잘못된 사고 때문에 인류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카인이 아벨을 죽인 후 부터 오늘 까지 빼앗고 뺏기는 투쟁은 계속되어오고 있습니다.
예전 동독을 방문했을 때 동독 베를린 대학 벽에 새겨진 칼 막스의 “철학은 역사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그리고 세계를 개조한다.”는 유물사관은 지난 세기 동안 세계 영토의 거의 삼분의 일을 개조하는데 성공하는 듯 했으나 그 잘못된 유물 주의와 잘못된 인간 분석과 잘못된 역사관이 공산주의의 막을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피조성을 무시하고 우주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않혀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 위에 사는 짤막한 시간에 인간들이 싸우고 감투싸움을 하고 사회내지는 심지어 교회까지도 이런 일이 만연하는 것은 왜 그렇까요? 그것은 자기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내것으로 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이세상에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의 것이기 이전에 창조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 말씀의 교훈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이땅의 것은 모두 하나님 것이니 우리는 아무책임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것을 위임 받은 청지기는 자신의 소유를 다루는 것보다 더 훨씬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내가 주인이라고 나서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고통이 생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몸 나의 시간, 내 생명도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인 의식을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이 몸이 누구의 것인가? 바울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우리 몸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 이유는 우리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은 청지기 정신으로 직장이든지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건강할 때에, 재물이 있을 때에, 내가 할 수 있을 때에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청지기, 섬기는 사람이므로 싸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비판 부정하지 말고 열심으로 전도해서 많은 사람들을 주의 앞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모든 주인은 하나님이시니 내게 맡겼을 뿐인데 주인 뜻대로 쓰시다가 주님 부르실 때 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왕을 영접하라
시 24:1-10 / 오정호목사
시편22편이 눈물과 비탄의 시라면, 시편23편은 평화와 화목의 시이며, 시편24편은 승리를 노래한 시입니다.
시편 24편은 세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다스리는 영역이 전 우주적인 것<1,2절>, 둘째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 해야함<3,4절>, 셋째는 마음을 열고 왕을 영접하라<7-10절>는 내용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1.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해야 합니다.(1,2절)
현대인의 모순 가운데 하나는 땅만 쳐다보고 살고, 생활에 급급하다 보니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아무리 삶이 급급해도 하나님의 창조 작품 속에 나를 넣어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느낄 수 있다면 훨씬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분주한 삶으로 인해 주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세속화되어 영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주님이 주신 평화가 깨지고, 은혜가 없는 것처럼 사는 이유는 안목이 좁아 하나님이 만든 솜씨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공간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공간은 한 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주공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집으로 삼으셔서 내 안에 거하십니다.
주님은 “세우시고, 건설하시는 분”<2절>으로 우주만물을 건설하시고 다스리신다면 내 인생쯤이야 맡기면 능히 책임지시고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에 우리 마음을 모으면 우리 삶을 좀 더 질서 있게, 좀더 진지하게, 좀더 가치있게 살 수 있습니다.
다윗으로 시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가 우리 인격과 삶에 체험될 때 우리도 이 시대에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격과 삶의 폭을 좀 더 넓혀서 나를 후대하셨고 나의 미래를 아시고 지금도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담아 드린다면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시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리게 하실 것입니다.
2.하나님의 통치를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합니다.<3-6절>
3절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 누군고”라고 했는데, 히브리 사람들에게 산은 단순하게 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주신 신비한 장소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호렙산, 십계명을 받은 산은 시내산,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올라가신 산은 변화산과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주님이 나를 택하셨는데, 주님의 거룩한 산에 나아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능력있게 살고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즘 우리 스스로의 영성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대답으로 “손이 깨끗하며”라 했는데, ‘손’은 활동의 대명사로 외부적인 활동을 의미합니다. 내적으로는 “마음이 청결”합니다. 이는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날마다 주님의 보혈에 담궈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뜻을 허탄한데 곧 열매없는 곳에 두지 않습니다.
허탄한 것에 대해 요한일서1:15-17절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영성과 믿음의 순전성은 위기를 당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새로남교회는 위기를 만나면 더 강한 교회, 주님께서 세워주신 자리를 묵묵히 지켜가는 무게있고 알맹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이 사람들”에 대해 주님은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는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3. 하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7-10>
다윗은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요한복음14:21의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이 당시 배경은 법궤가 몇 달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동안에 그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 때 다윗은 ‘법궤가 어떻게 오벧에돔의 개인 집에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으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이 되기 이전에 여부스 족속이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요새화 시켜 다윗과 그 선조들이 함락시키지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에 의해 함락되고 이름을 예루살렘이라 했는데, 이름만 예루살렘이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에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요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며 외친 말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입니다.
만왕의 왕이 들어가시는 데 누가 문을 닫아 놓겠습니까? 주님의 위엄과 권능 앞에 설 자가 없기에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는 자는 망가지고 주님을 대적하는 자는 깨어집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을 내 인생의 구주와 주인으로 모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문을 연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나를 다스릴 수 있도록 아직도 문빗장이 채워져 있는 부분들을 벗겨 활짝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평생동안 매일의 삶에서 그 은혜에 대해 문을 열어가야 합니다.
“영원한 문”은 옛날부터 열린 적이 없는 문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살아있고 너무 강해 자신을 주님 앞에 내어 보인 적이 없는 문입니다.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준비하는 것들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닫혀진 내 마음의 문빗장을 여는 것입니다.
교회나 형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는 교회와 형제에 대해 문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문빗장을 열고 들어가면 이방성읍인 여부스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예루살렘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은 문을 여는 자에게 들어가셔서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바울 처럼 죄인중의 괴수인 핍박자가 변하여 사도중의 사도가 되며, 존 뉴톤 처럼 노예상인이 변하여 목사가 되며, 헬렌 켈러 처럼 3중고를 극복하고 인생의 진정한 승리를 경험하며, 다윗처럼 목동이 변하여 한 시대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각자 마음을 열어 주님을 영접합시다. 말씀의 다스림을 받읍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놀랍게 변화시키고 사용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저희 삶을 내어 드리는 믿음의 안목이 있게 하소서!
삶의 문을 활짝 열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복을 받고 의를 얻을 사람
시 24:1-5 / 이규왕목사
오늘 우리는 사면초가라는 말을 그대로 실감할 만큼 나라와 민족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오늘이 아니라 미래가 오늘보다 더 못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입니다.
요즘 시중에 ‘10년 후 한국’이라는 책이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의 위기,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으며, 추락의 7가지 원인을 지적하고 있는데 매우 공감이 가는 말들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치가나 우리 국민들이 자기 철학이 부재한 반면 이미 세계 역사의 실험장에서 실패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일까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 올바르게 살므로 민족과 개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과 교회는 결코 이대로 주저앉거나 무너져 내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민족과 교회를 통해서 세계 속에서 해야 할 사명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져야 합니다.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야 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고, 좋은 믿음을 가져야만 하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 가운데 행복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좋은 믿음을 갖는 일입니다. 다른 조건들은 서로가 큰 차이가 없고 또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변수가 있지만 좋은 믿음은 다른 조건이 좀 불리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능히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행복의 절대 요소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과 지나간 역사 속에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원리가 적중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가고 오는 역사 속에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다윗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의를 얻을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말씀으로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주목해야할 말씀입니다.
1. 다 여호와의 것-하나님의 주재권
오늘 우리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나, 아니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친히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인류의 역사와 민족의 흥망성쇠와 개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와 같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 어느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 중에서도 ‘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성 있게 성경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서 누구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많이 받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오늘 시편 기자 다윗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흔히 사람들이 축복의 대명사로 여기는 부귀권세는 물론 영적인 면에 있어서 다윗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도 별로 많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과의 두드러진 차이 중에 하나는 한국 사람은 좀 돈이 있으면 큰 집. 큰 차, 사치한 생활을 통해서 겉으로 반드시 드러내지만, 중국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평범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어서 알부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현지 안내원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와 같은 사람을 찾는다면 솔로몬은 부귀권세를 드러내는 일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면, 다윗은 누구보다 많은 부귀를 하나님께 드린 알부자였습니다.
다윗의 평소 생활을 보면 부귀권세를 탐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목동의 신분에서 왕이 된 것 말고도 말년에 하나님의 성전 건립을 위해 바친 재물의 양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부자였었는가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대상 29:3)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대상 29:4)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대상 29:5) 금, 은그릇을 만들며 공장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금 한 돈의 무게가 3.75g 이며 요즘 소매 시세가 66,700원이라면 여기서 '금 3천 달란트는 약 102,000g 인데 모두 얼마일까요? 다윗은 하나님께 금만 드린 것이 아니라 은을 드린 것이 7천 달란트 약 242,000g 이라고 하였는데 그 값은 또 얼마나 될 까요?
다윗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 다투어 드린 금이 오천 달란트라면 다윗이 드린 금은 온 국민이 드린 금의 3/5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는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물을 인색한 마음이 없이 기꺼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재산의 액수와 상관없이 믿음과 비례하는 것이라면 오늘 성경에 시편 기자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시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것은 자신이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면서도 자기가 최고이고, 주인이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그 중에 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많은 것을 드리고서도 교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믿음이 바로 시편기자처럼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과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주재권의 회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주인인체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청지기의 삶을 사느냐 아니면 주님의 것을 마치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나만을 위해 사는 횡령죄를 범하며 사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대상 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2. 성산에 오를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그것을 다스리시는 대 주재가 되심을 믿는 사람의 한 가지 특징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죄악된 세상과 비교한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영광스런 하늘나라에만 계셔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땅위에서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지상에 임하셨습니다. 그 곳이 바로 시내산입니다.
(출 19: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그 때 하나님은 제사장들은 몸을 성결케 하고 시내 산 사면을 거룩하게 하여 백성이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시내 산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임재하여 그 백성들과 함께하시기 위해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성막의 중심이 되는 것이 법궤이며 그 안에는 십계명 돌비를 담고 그 법궤를 덮는 뚜껑인 속죄소를 만들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 위에 친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모세는 거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출 30:6)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민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뵙기 위해 하늘나라나 시내 산에 올라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성막에 임재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밤낮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낮에는 구름 기둥이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과 제사는 중심적이며 필수적인 것으로 오늘 시편 기자가 바로 그러한 정서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좀 더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형식화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1) 사울 왕은 이 점을 간과한 채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도리어 버림을 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삼상 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2) 다윗 왕은 이 점을 깨닫고 하나님께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드림으로 기쁘시게 하여 복을 받고 의를 얻는 왕이 되었습니다.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서 여호와 산에 오른 다는 말씀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것을 뜻한다면 나머지는 예배자의 바른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하거나 부요하거나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정말 창조주 되심과 만물의 대주재가 되심을 믿고 인정하는 사람과 정반대로 자기가 주인인줄 착각하며 사는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 자세입니다.
가) 몸과 마음이 청결한 자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죄가 없는 의로운 자를 뜻한다면 과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만물보다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자는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청결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먼저 죄악으로 더러워진 손과 마음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거룩케 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나) 허황된 것을 버리는 자
세상에서 가장 허황된 것은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과 더불어 헛된 욕심과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여져서 우리의 삶 속에 확실한 승리를 보장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 약속에 신실한 자
하나님은 중심에 진실한 자를 원하십니다(시 51:6). 그러므로 참 예배 자는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이 같은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편 기자에게서 우리는 예배자에게 있어서 제물보다 올바른 마음의 자세가 더 우선되어야 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같은 자세로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대주재가 되심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윗처럼 하나님께 많은 것을 헌금하는 사람이라고만 규정한다면 기독교는 부르주아의 종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은 만물의 대 주재되심을 믿었을 때 그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지는 물질을 많이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전 인격을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모르는 체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그에게 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이 지속되게 하시고, 그 복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의를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24:5)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3. 지상 최대의 기쁨-하나님께 영광 돌림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마치 곡식이 자라서 결실하는 것처럼 시편 기자의 신앙이 점진적으로 성숙해져 마침내 결실되어가는 과정을 보아왔습니다. 그가 먼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주재권의 회복과 더불어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 따랐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뜻 없이 지으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작은 미물도 다 쓸데가 있어서 지으셨다면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인 나를 창조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셔서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오게 하신 것도 분명히 뜻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것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요, 나 자신에게도 행복이요 기쁨이라는 것을 시편 기자를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될 때 일평생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바른 삶을 살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삶의 일관된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의 일관된 목표가 무엇일까요? 돈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여 부귀권세를 한 손에 움켜쥐고 나 보라는 듯이 사는 것이었나요? 그렇다면 목동 다윗이 왕이 되어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모든 목표가 다 이루어졌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일관된 목표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목동이든지 왕이든지, 가난하든지 부요하든지 어떤 처지에서도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성공이요, 승리요, 축복이요, 행복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성공의 정상에 오른 시점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삼하 5:25)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이처럼 다윗이 왕이 되어 나라가 안정된 후 제일 먼저 서둘러 한 일이 무엇인가를 보면 그의 일관된 목표가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인 시온 산성을 정복하여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도읍을 정한 후 제일 먼저 계획한 일은 그의 왕궁을 건축하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 예루살렘이 군사나 경제나 행정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다윗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나라가 안팎으로 견고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것도 그의 일관된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많은 성경학자들의 견해를 빌리면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다가 첫 번째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하여 성공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 기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이처럼 춤을 추며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삼하 6: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삼하 6: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오늘 성경은 다윗이 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고, 영토를 확장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일도 중대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지상 최대의 과업으로 삼았음을 여실히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시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 24: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 24: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다윗 성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광의 왕이시오 영원하신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 성으로 들어가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들이 활짝 열어 제치고 그 영광의 왕의 입성을 환영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신앙이 다 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성막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자기의 성안으로 모시기를 원하였으니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에 불타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높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을 영광의 왕이요 영원하신 왕이신 하나님께 모든 승리의 영광을 돌리며 높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은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든 피조물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목적으로 창조되고 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의 뜻은 우리의 관심과 일생의 사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는 세상의 군왕들, 교만한 부자,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패역한 우상 숭배자, 이 모두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보다 부귀권세가 더 많고, 높은 사람이 아니라 패역한 세상에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누가 과연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또 의를 얻은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시 24:5)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여호와를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함으로, 여호와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해도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 위기 상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아들을 낳고서도 도리어 슬퍼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 농촌은 지금 풍년이 들었어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농부들이 근심이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그것은 쌀 소비량 감소, WTO 농산물시장개방, 뉴라운드 출범에 따른 정부추곡수매물량 매년 4% 감소 등 장기적으로 불투명한 농업 전망과 농민의 불안 심리 때문입니다.
조선업계는 앞으로 몇 년간의 일감을 미리 싼 가격으로 수주해 놓았기 때문에 쉴 사이 없이 계속 일은 하지만 그 때보다 원자재와 유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급상승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이 없고 답답하여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 민족과 개개인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과거 6.25 사변의 잿더미에서 오늘이 있도록 축복해주신 역사의 주권자요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며 개개인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로 이 민족이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을 앞당기는 길이 바로 전도이며, 그 일을 위해 교회가 새생명 3.1 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 사람을 찾아가서 경험담을 듣고 노하우를 배울 때 시행착오를 줄이고 성공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해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오늘 말씀을 되새김질 하고 일상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며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복을 받게 하시고 의를 얻게 하실 것입니다.
1) 우리의 소유 중에 그 무엇 하나 내 것이 하나도 없고 다 대주재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최상의 목적을 삼고 살아가기로 일관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여야 합니다.
2)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이므로 예배자는 그 마음이 청결하고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돈을 구하고 명예를 구하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의 삶을 살며, 주일 하루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하나님을 내 마음의 성전에 모시고 언행심사(言行心事),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메마름이나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구원의 하나님의 의를 얻는 오늘 말씀의 축복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
시 24:1-6 / 피종진목사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는 저주와 멸망을 받는 대상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창 1:27,28).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에덴동산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자가 여호와께 복을 받을 자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여호와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시 24:3) 여기에서 ‘여호와의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이고,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 예배하는 자가 복을 받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4)
①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즉 선하고 깨끗한 행실로 예배해야 합니다.
②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마음에 악하고 더러운 생각과 죄의 요소가 없고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만을 좇으며 예배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8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③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아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권력, 쾌락 등에 그 뜻과 목적을 두고 그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④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은 여전히 불신앙과 불의한 요소들로 가득차있고, 자신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고 가증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창세기 32:24~28에 보면 야곱이 얼마나 축복을 사모했는지 밤새도록 천사를 붙잡고 날이 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천사가 이제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했을 때 야곱이 천사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붙잡고 축복을 호소하자 그의 이름을 묻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에 중언부언하거나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는 이러한 기도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야곱은 환도뼈를 다쳐 매우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날이 샐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에게 매달려 자신을 축복해달라고 간구했을 때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소원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포기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충성을 다하는 자입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28:20) ‘충성된 자’는 재물을 모으고자 하는 데 있어서도 성실하게 일하며 정당한 방법으로 얻으려 하는 자를 가리키고,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정당치 않은 방법으로 남보다 더 많은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충성하지 않고 요행만 바라는 자는 복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기만 바라면 안됩니다. 충성하는 자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충성(忠誠)이란 말은 한자어로 풀이해보면 마음 중심을 다해서 말한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극치가 충성입니다.
민수기 14:24에 보면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열 두 정탐꾼 중에 열 정탐꾼은 불신앙적인 보고를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게 했지만,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정탐꾼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인 줄 믿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의 말을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0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안겨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십일조를 드리는 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0~12) 십일조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눈에 보이지만 믿음이 없이는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에 어려서부터 십일조생활을 잘한 아이들이 청년으로 성장하여 축복을 받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생활을 하면 질병으로 고통당하지 않도록 건강하게 해주시고, 재산을 악한 자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해주시며, 최후까지 성공을 지켜주시고, 세계적인 인물이 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성일을 지키는 자입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사 56:2)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거룩히 하시고 복 주신 날입니다(창 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는 여호와께 복을 받게 됩니다. 출애굽기 20:8~11에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확고히 인식케 되고,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은혜를 세세토록 찬양하게 되며,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여섯째, 교회를 평안하게 하는 자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 122:6)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평안하게 하는 자는 기쁨과 형통과 승리의 복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응답을 받기까지 생명을 걸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성일을 거룩히 지키고, 교회를 평안하게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풍족하게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 깨끗한 사람의 복
시 24:1-6 / 박병욱목사
신약, 마태복음 23:25-28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욕망과 현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전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부유하게 되고, 성공하고, 건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삼박자 축복’이라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의 결말을 구원과 성공과 건강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 잘 믿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하면서 예수 잘 믿고 성실하게 살고 깨끗하게 살아가면 당연히 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날마다 모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하는 잔소리 같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하곤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일부러 병에 걸리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물질과 건강의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구원과 신앙이 직접적으로 부와 성공과 건강으로 연결이 된다면,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병에 걸린 사람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소식은 복음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선포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훨씬 다양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인생의 몇 가지 기준으로는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복이라고 하셨는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팔복 설교 중 6번째 설교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였으며 한국말로도 번역이 되어 소개되는 책으로서 로리 베스 존스 라는 사람이 지은 “최고경영자 예수”(Jesus CEO)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성경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감동적인 내용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저자가 전망 있는 기업을 논의하기 위해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그 모임에 참여한 각각의 개발업자들은 모두 대단한 사업 경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그 모임의 주관자 되는 사람이 일어나서는 전망이 밝은 이 모임에서 자신의 중요한 실패 사례 중 하나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오직 투자자들을 위해서 돈을 벌겠다는 열망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여론 흐름에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세부 사항들을 간과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이제 나는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모든 사실들을 파악하기 위해 더욱 신중해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사람도 역시 천재적인 실력가이면서도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실수를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그는 단단한 바위들이 땅 밑에 깔린 줄도 모르고 거대한 땅을 개발하겠다고 구입한 적이 있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모임에서 가장 젊은 회원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저는 모두다 아시다시피 많은 성공사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모임의 리더가 부드럽게 그 젊은이를 타일렀습니다. “자, 찰리. 자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털어놓게나. 만약에 자네가 실패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자네는 이 모임의 회원이 될 수 없다네.”
나이가 든 회원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사람의 일에 실패가 없을 수 없습니다. 전체적 실패건 부분적 실패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의 앞에는 더욱 큰 실패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가 되려면 자기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됩니다. 큰 업적을 이루고 싶은 욕망, 성공하고 싶은 욕망, 인정 받겠다는 욕망,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욕망이 사람을 망치게 합니다. 사람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되 욕망의 노예가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면 일을 망칩니다. 베스트 셀러 저자의 히트한 작품 다음의 작품, 히트한 영화의 속편 등등 욕망에 사로 잡혀서 제작한 작품들 중에서 성공한 것이 드뭅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 입니다. 스포츠에는 승부가 있지만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면 큰 패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프로 야구의 홈런 왕도 홈런에 집착하면 안타도 못 칩니다. 그러나 취미로 야구를 하는 사람도 마음을 비우고 야구 자체에 몰입하면 야구공이 수박만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홈런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에 눈이 어두우면 현실을 잘못 봅니다. 욕망에 눈이 어두우면 자신을 잘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합니다. 사업의 실패가 바로 나의 욕망의 절제 못함에 있습니다. 어디 사업뿐입니까? 입시도 가정도 친구 관계도 더 나아가서 삶의 모든 일이 잘못된 욕망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음먹기 예술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만사가 마음 먹기에 달렸으므로 마음을 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현실도 마음 먹기에 따라서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파악한 현실이 참 현실이 아닐 수도 있고, 내가 진리라고 파악한 것이 진리가 아닌 비진리 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마음먹기 예술’입니다.
우리는 지나친 욕망이 없어야 현실을 제대로 봅니다. 욕망이 없는 마음은 내가 발견한 현실이 나에게 유익한 현실인가, 내가 피해야 할 현실인가, 내가 도전해서 극복해야 할 현실인가를 알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바라보는 현실은 어떤 현실입니까? 내가 내 인생을 걸고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의미있는 현실이 보입니까? 의미있다고 함은 반드시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이 있고 범죄가 있고 온갖 부정적인 것이 있어도 내가 책임을 가지고 뛰어들 수 있는 현실을 말합니다. 나의 이익과 손해와 관계없이, 나의 성공과 실패와 관계없이, 그 안에서 내 인생을 걸고 해 볼만한 일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런 현실을 발견하신 분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다음과 같은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만, 여러분이 발견한 현실이 ‘누가 나에게 해를 끼치나, 누가 내 잘못을 사람들에게 알리나’ 하는데 관심을 갖게 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살아가는 현실이 타인의 하찮은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았느니 모욕을 받았느니 하며 잠을 못이루는 현실입니까? 아니면 이웃에게 받은 작은 피해라도 꼭 복수를 하고야 말며, 자신 만이 세상에서 최고로 의로운 줄 알고 살아가는 현실은 아닙니까? 만약 이런 현실을 살아 간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것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지나치게 편협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광야로 들어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은 첫번째 시험은 돌덩이로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귀에 대고 말합니다. “사람은 육체적 생존이 중요해. 배고픈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들어봐. 저들의 배를 채워줘.” 예수님은 마귀의 이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은 경제적 욕망에서 자유케 되신 것입니다. 두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서 기적을 보여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말합니다. “종교적 기적에 목말라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라.” 예수님은 역시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욕망으로부터 자유하신 것이었습니다. 세번째 시험은 천하의 모든 영광을 줄 터이니 엎드려서 절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말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권력이 있어야 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를 실현하려고 해도 정치적 수단이 있어야 하지.” 그러나 예수님은 역시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욕망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욕망과 현실의 관계를 광학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하셨습니다. 렌즈가 더러우면 빛이 제대로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눈이 깨끗하지 않으면 외부 세계의 형상이 우리에게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눈이 깨끗하지 않으면 빛인 예수님이 우리의 속을 비출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우리의 속에 들어 오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청결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사람의 대표적인 욕심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런 것들에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마음과 신앙
그러면 ‘깨끗한 마음’의 신앙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음은 단순히 감정이나 감각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영적인 실존의 중심입니다. 마음은 인간이 무엇이며, 그가 무엇을 생각하며,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 그가 무엇을 느끼는가 하는 총체입니다. 마음은 오성과 이성의 자리이며, 의지의 방향을 결정짓는 장소이며 감정과 감각과 정열의 자리입니다. 마음은 내적인 힘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을 어디에 두는가 하는 질문과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열망하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질문은 그 사람의 전체적 삶이 어디를 향해서 있는가 하는 질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대한 질문은 곧 바로 구원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마음의 문제는 곧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문제는 인간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마음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향하여 가지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만을 향해서도, 세상의 어떤 것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첫째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그의 의지와 계획과 생각과 느낌이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청결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카타로스’ (καθαροs)인데, 비혼합, 비화합, 비합금의 의미가 있습니다 (시24:4, 51:1 딤전1:5, 벧전1:22).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두 가지 마음이 혼합되어 있지 안고 한 가지 마음만이 있다는 뜻입니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호10:2).
둘째로 깨끗한 마음이란 어린아이의 단순한 마음입니다.
유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하시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을 랍비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랍비가 아이에게 질문을 합니다. “얘야,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 네가 나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말을 해 준다면 동전 한 개를 주겠어.” 이 랍비는 아이가 설마 이처럼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제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시면 저는 선생님께 동전을 두 개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안 계신가를 말해줄 수 있습니까?” 이 아이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어디에건 다 계십니다. 아이의 깨끗한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장소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죄 많은 어른의 마음은 하나님을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
셋째로 깨끗한 마음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깨닫는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깨닫고 그대로 닮아 그의 뜻에 맞게 살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마음이 깨끗함은 모든 덕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넷째로 깨끗한 마음은 정확한 현실을 보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현실의 심층을 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현실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죄악된 인간의 현실과 그 죄악으로 인하여 구제 불능인 인간의 상태를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 구속적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구원의 기쁨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복이 아닙니까?
다섯째로 깨끗한 마음은 예수님만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은 죄악으로 더럽히지 않고 자신의 선으로 치장한 마음이 아닙니다. 깨끗한 마음은 인간의 양심이 아니라 예수의 뜻에 지배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자신의 양심에 떳떳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변하기 쉬운 인간의 양심이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선과 악을 단념하고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고 죄를 실토하며 예수만을 의지하는 자, 곧 그의 마음은 예수의 말씀으로 깨끗해진 것입니다. 이 마음은 앞서 가는 예수만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그의 마음은 때묻히는 모든 생각에서 자유로우므로 자신의 소원이나 의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과 현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눈을 맑게 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떡을 나누고 말씀을 나눌 때 우리 눈은 맑아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수난과 부활을 예언하셨지만, 제자들 중에 단 한 명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언을 생각해내고 ‘아, 바로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강조해서 예언하신 말이구나’ 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 말씀을 떠올린 제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제자 한 명을 빼놓고는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요한조차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 후에도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부활의 소식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무엇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혼의 눈은 소경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자신들의 메시야관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자 그들의 욕망은 철저한 좌절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셨습니다.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까,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제자들의 대화가 절망적인 대화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3년 동안을 예수님을 메시야 인줄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다녔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 갔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다시 돌아가서 물고기나 잡을 것인가? 그래도 예수 선생님은 참 좋은 선생님이었어. 우리들을 끔찍히도 사랑했었지. 그런데 그 분은 너무나 무력했어’ 하며 제자들은 참담한 마음을 서로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 화제 속에 끼어 들려고 하니 난감하고 슬플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과 떡을 나누고 성경 말씀을 나눌 때 이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풀어서 들을 때에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좌절되고 모든 것을 포기한 곳에서 참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내 뜻이 좌절되고, 내 뜻이 좌절된 그 빈 마음의 자리에서, 모든 야망이 좌절된 자리에서, 예수님과 떡을 떼는 일치가 있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받을 때에 눈이 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곳에서 하나님은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서야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임재와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보혈의 능력
둘째로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할 때 마음이 깨끗해 집니다.
제가 살았던 독일은 한국보다 오래된 가옥들이 많습니다. 오래된 가옥의 굴뚝을 청소해 주어야 하니까 아직도 굴뚝 청소부들이 길에서 가끔 눈에 뜁니다. 굴뚝 청소부들의 복장은 모자에서 신발까지 까만 색깔입니다. 그들이 타는 자전거도 전부 까만 색깔이라서 반짝이는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손과 얼굴과 귀와 콧구멍까지 검뎅이가 묻어서 까맣게 되어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굴뚝 청소부를 봅니다. 우리 인간이 굴뚝청소부와 같습니다. 인간의 죄악은 검뎅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검뎅이 묻은 손으로 아무리 자기를 깨끗하게 하려고 해도 점점 더 더러워 지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제아무리 자기 힘으로 선해지려고 해도 점점 더 죄악의 구덩이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깨끗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가 고마워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새 생명을 누리겠다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다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의식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찬을 할 때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신비요 비밀입니다. 바로 그 곳, 십자가 앞에 서 있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오직 자기 마음을 완전히 예수에게 맡기고 그가 홀로 마음을 지배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 날 때, 우리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새 사람은 곧 새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십자가는 정결케 되는 곳이요 새롭게 되는 곳입니다. 새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새롭게 보며,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새로운 자기’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나 하나만이 새로워 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새롭게 되며, 온 우주가 개벽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은 온 우주 속에서,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의 죄를 다 씻을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현실을 잘못 보게 하며 악을 저지르게 합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은 집착을 하게 됩니다. 집착하는 사람은 두려움의 노예가 됩니다. 소유에 집착을 하는 사람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됩니다. 성공에 대해서 집착을 하는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니다.
깨끗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노력의 대가로 얻은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 사항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0, 11) 이 기도가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시 24:4-6 / 김광일목사(벧엘교회)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작품 ‘성 프란치스코’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프란치스코의 동료 수사 레오가 질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형제, 당신은 다른 형제들에겐 쉽고 평탄한 길을 선택해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당신은 왜 고통스러운 오르막길을 택했습니까? 왜 하필이면 추위와 비와 눈 속으로 갑니까?” 그때 프란치스코는 대답했습니다. “레오 형제, 하나님은 항상 추위와 비와 눈 속에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 속 태우지 마세요. 평지에서는 부유한 영주들과 아름답고 매력적인 귀부인들을 만날 수 있고, 그 세계의 주인인 죽음과 당신의 육신인 가엾은 늙은 당나귀를 만날 수 있어요. 레오 형제, 그렇지만 진정한 형제는 산을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등산 중에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등산, 곧 오름의 길을 걷는 것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며 연약한 나와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병욱(安秉煜) 교수는 산에 오르기를 좋아 했습니다. ‘산의 철학’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이 우울해질 때는 산으로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륙색을 짊어지고 조용한 산길을 친구와 같이 걸어가노라면 인생의 우울이 어느 새 안개처럼 사리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삶에 지치고 생에 권태를 느꼈을 때에 산에 오르는 것이 좋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정상을 향해 오를 때 생의 용기를 느끼고 건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이 피곤하고 인생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 산의 정기가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 시인은 본 시를 통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이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구절은 시편 15편 1절에도 나타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두 곳에서 함께 노래하고 있는 여호와의 산은 성전이 자리 잡고 있는 시온 산이며 그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을 뜻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산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기록된 여호와의 산에 올랐습니다. 그 곳에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그는 하나님을 만나 뵙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최초로 여호와의 산에 오른 산행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거룩한 등반자입니다. 또한 주의 성산에 머무는 경건한 산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산에는 아무나 오르지 못합니다. 시편기자는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그렇다면 과연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
첫째로 손이 깨끗한 자
미국 정치가 대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려서 학교에 다니던 때 하루는 교칙을 어기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를 불러 세워놓고 벌을 주는데, 손바닥을 때리는 것이 보통 흔하게 쓰이던 체형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손이 형편없이 더러웠습니다. 그것 때문에 야단을 더 맞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책상으로 불려가는 도중에 오른 손바닥에 침을 발라 양복바지에다 문질러서 닦았습니다. “손 내놔라!" 선생님이 호령하였습니다. 대니엘은 침을 칠해서 좀 닦은 오른 손을 내놓았습니다. 그 손을 보자 선생님은 즉시 말했습니다. “대니엘, 이 교실에서 이 손보다 더러운 손을 찾으면, 이번만은 너를 용서해주마” 그러자 즉각적으로 등 뒤에 숨겼던 왼손을 내 보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여기 있습니다” 그 손을 보자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습니다. “그만하면 됐다. 이번만은 용서해 두지. 네 자리에 가서 앉아도 좋다.”
본문 4절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의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행실이 올바른 자를 가리킵니다. 손은 사람의 백 가지 행실을 나타냅니다. 손의 정결과 부정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의 깨끗함과 더러움에 이어집니다. 인류는 깨끗지 못한 더러운 손 때문에 비극을 맛보고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담의 손은 범죄한 손입니다. 그 손으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손도 부정했습니다. 그 손으로 아벨을 쳐 죽였기 때문입니다. 아간은 그 손으로 도적질을 했고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약탈했으며 가룟유다는 그 손으로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습니다.
이 시대에도 손이 깨끗한 자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회에 행실이 바른 자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테러와 살인, 성폭행과 가정파괴, 백주강도와 환경파괴, 어디서나 부정한 손들이 저지른 상처들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구약의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으로 피흘린 손을 가졌다하여 성전을 짓는 데 실격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손이 깨끗한 지의 여부는 인생의 흥망과 상관관계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 손에 흠과 티가 없는 자라야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복이 있습니다.
둘째로 마음이 청결한 자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의 작품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집을 짓고 사십니다. 서재, 주방, 거실, 작업실, 오락실, 침실이 잘 갖추어진 집입니다. 저자는 주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봅니다. 서재에 들어가 보니 성경책이 있어야 할 서재엔 세상의 온갖 책들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주방엔 돈, 학위, 직업, 명성 등의 부끄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왔을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와 매일 거실에서 교제를 하자” 하지만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회사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 가며, 내가 좋아 하는 취미 생활을 하고 자신의 일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작업을 하는 작업장은 썰렁하기만 합니다. 주님의 도움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방식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뭐든 금방 포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집에 있는 오락실에는 주님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보이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것들이 많고, 주님과 함께하면 세상 것들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술, 담배, 도박 외에도 주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들에 해당하는 개인적인 것들이 그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네 곁에 있으면 재미있는 것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온 것은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임을 기억하거라” 주님과 모든 방을 돌아본 후 최종적으로 침실로 향합니다. 침실엔 비밀스럽게 여기는 은밀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性)입니다. 이렇듯 주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마음속에 계시는 이상,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로 바꾸어 주십니다. 방 귀퉁이에 있는 벽장에 몰래 담아뒀던 부끄러운 과거와 잘못들도 주님께서 깨끗이 청소해 주십니다. 마지막으론 내 마음속 그리스도의 집을 주님의 이름으로 명의 이전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집을 관리할 자신이 없기에 열쇠를 드리며 간청합니다. “주님, 당신은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하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명의 이전이 되고 나서야 저자는 진정한 평화가 영혼에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삶은 모든 것의 주권을 그리스도에게 넘겨드리는 모습을 말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의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동기의 순수성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존재입니다. 격식을 갖추어 예배를 드리면서도 오래 믿은 자라는 체면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선량하고 부드럽게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사악하고 날카로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거룩한 모양을 하면서 은밀한 곳에서 죄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겉으로 순종하는 것 같은데 마음으로는 이미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순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체면이나 위치 때문에 마지못해 순종하는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산상설교의 첫 머리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 이전에 마음의 청결을 크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세상에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됩니다. 세상을 바르게 살며 하나님의 나라로 말미암아 즐거워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세상의 권력 앞에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물질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온갖 부정한 옥심의 유혹을 물리 칠 수 있습니다. 부디 마음을 청결히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르는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
프랑스의 작가 빅톨 유고(Victor Hugo)는 젊은 날에 탕자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파리 세느강에 한 어린 소년의 시체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을 막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사랑하는 딸의 시체였습니다. 이때 유고는 “내가 다시는 세상열락을 즐기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합니다. 심기일전한 그는 사회복지사업으로 딸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했습니다. 교육부장관이 되었을 때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3색 국기를 창안했고, 노년에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어린 딸과의 약속을 지킴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약속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 신실을 다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맹세와 약속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거짓맹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는 불성실한 태도를 갖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뜻을 허탄한 데 두고 거짓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기가 한 말과 맹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섬기겠노라 맹세하고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까? 열심히 봉사하겠노라 약속하고 도무지 나타나지도 않는 것은 아닙니까? 무릇 거짓말은 사탄의 것입니다. 죽음을 부르는 재앙입니다. 오직 이익만을 위해 거짓말을 내뱉으며 거짓 맹세를 일삼는 사람은 여호와의 산에 결코 오를 수 없습니다.
1598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에 의해 프랑스에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유명한 루블(Louvre)에서의 예배는 바로 본 시편의 말씀으로 개회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로다.” 구원받은 백성이면서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로 살아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판가름 날 것인데 그렇게 마구잡이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세상은 거짓과 진리가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로 살아가시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등산가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산에 올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사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험한 산에는 아무나 떼 지어 몰려가는 곳이 아닙니다. 히말라야 산맥(Himalaya)에는 해발 8천m가 넘은 봉우리가 14개나 있습니다. 그 중 알려진 것의 하나가 ‘애나푸르나’입니다. 이 산의 정상에 올랐던 모리스 에르조그(Maurice Herzog)는 동상에 걸려 열 손가락 모두와 발 가락 몇 개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그 산이야말로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쳐 올라갈만한 보물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누구입니까? 성산에 오르기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는 산악인들처럼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우선 손을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 맹세하지 말고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육신과 정신과 영혼이 깨끗한 자가 되어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입니까
시 24:3-6 / 최응희목사(안디옥교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여호와의 산’과 ‘그의 거룩한 곳’은 같은 의미의 동의어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성전을 뜻하는 말이고, 오늘 우리에게는 예배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배의 자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것이요,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배자의 자격에 대해서 네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손이 깨끗하며
둘째, 마음이 청결하며
셋째,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넷째,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행실이 바르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영혼이 맑은 것을 말합니다.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는 것은 그 중심이 세속적인 데 있지 않고 말씀에 삶의 중심이 있는 것입니다. 거짓 맹세하지 않는 것은 진실됨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서라는 말씀입니다. 행실을 고치는 마음,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간절함,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는 믿음, 거짓됨을 버리고 진심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태도, 그것을 말씀합니다. 늘 말씀 드렸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온전하지 못했어도 예배는 온전히 드리라. 세상에서는 세상처럼 살았다 해도 적어도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회복하라.’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을 살았다 해도 마음 아피 회개하는 마음, 진실된 믿음의 모습으로 돌아서는 것이 바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에서도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비방하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교회에서 교만하고, 허세를 부리는 것은 얼마나 우습고 격이 맞지 않는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산, 그 거룩한 곳은 오히려 그런 마음을 떨쳐버리는 곳이 아닙니까. 손을 깨끗하게 하려고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고 거룩한 곳에 오는 것입니다. 허탄한데 마음 빼앗겼던 것을 고치려고 하나님 앞에 오는 것입니다. 진실된 삶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더러워진 손과 어두워진 영과 추한 생각과 헛된 마음들을 씻는 곳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여호와의 산, 그 거룩한 곳에 오를 자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중심은 예배입니다.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단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믿음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예배드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일런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예배만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요, 하나님을 모시는 행위요,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1-23
어디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장소가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어디서 은혜를 받을까를 생각하고, 무슨 설교를 누구에게 들을까를 생각하지만 진정한 예배는 ‘어디서’가 아니고 ‘어떻게’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영혼으로 예배하고 말씀중심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몸은 예배당에 와 있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다면, 그건 ‘예배의식에 참석’한 거지, ‘예배’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의식에 참석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자를 찾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도덕적인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실수 없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죄 가운데 빠졌었어도, 비록 온전치 못했어도, 비록 말씀대로 살지 못했어도, 비록 부끄러운 모습이라 하여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고, 어루만지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인쳐주십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1.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초대의 자리에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사람들의 자리나 사람을 위한 모임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재하신 자리요, 하나님께 드리는 모임입니다. 예배는 설교 듣는 시간이 아닙니다. 설교가 예배가 아닙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요한 시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설교가 곧 예배는 아닙니다. 설교 들으려 교회에 와서는 안됩니다. 예배드리러 와야 합니다. 예배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입니다. 영혼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는다면 찬양은 노래자랑에 불과한 것이요, 기도는 심리적 위로를 얻기 위한 것이요, 설교는 연설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곧 성령의 임재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찬양,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으며 드리는 예배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2. 참회와 고백을 담은 예배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세상의 가치관에 묻히고, 세상 사람들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이제 그런 욕심 사납던 삶의 찌꺼기들을 씻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바삐 사느라 잊었던 나의 신분을 회복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세상에 물들고, 사람들 속에 상처받은 영혼을 씻고 닦아서 다시 맑은 심령을 회복하는 시간--그것이 예배입니다. 때로는 십자가 앞에 무릎꿇는 믿음으로 그 앞에서 가슴을 두드리고, 은혜 속에서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는 그 크신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도 흘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사실 우리 속에는 이기심과 교만과 탐욕과 거짓과 죄된 생각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앞에 더럽고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어디에서 이 죄의 짐을 내려놓고, 어디에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어디에서 눈물을 흘려 영혼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그래야 합니다. 예배에서 그래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지, 예배를 잘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에서 그 굳은 심령을 푸시기 바랍니다. 예배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가장 낮은 자의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상처받고 낙심한 마음, 더럽혀지고 이지러진 심령을 예배에서 고침을 받고, 거듭나고, 축복 받고,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참회와 고백이 있는 예배, 그런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3. 믿음으로 말씀을 듣는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만남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만남은 아주 철학적인 말입니다. 그냥 오늘 교우들이 한 자리에 앉았다가 간다고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다가 동네 사람과 긴 시간 얘기를 나누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만남은 인격적인 교류와 감동이 있을 때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함께 살아도 한번도 못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굴을 못봐서가 아닙니다. 성격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교류와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얼굴로는 한 번도 못 본 사람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먼 거리가 있는 사람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건, 이야기를 통해서 건, 인격적인 교류가 있을 때 만남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런 만남보다 더 깊고 실제적이고 영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이야기만 들어도 감동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애를 걸기도 합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과 나의 인격이 만나고, 그 만남 속에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은 또한 생명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바로 그런 만남의 장소입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말씀에서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겠습니까?
이렇게 말씀이 주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되려고 하면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감동 받으려는 열린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듣는 것입니다.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들으십시오. 저기 그때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지금 나에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여십시오. 영의 귀를 열어 영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4. 헌신의 결단이 있는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성령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심령 속에 결단의 씨앗을 심고 헌신으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실 때, 그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예배의 최종 목적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성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 열매가 있는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여호와께 복을 받을 사람이요, 진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도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예배가 영광중에 올려지고, 더 크고 풍성한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