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31기로 보병대위 때 헌병병과로 전과, 헌병학교 수료(1년과정)후 헌병 대위가 됐다.
그 후 각지의 헌병분대장을 거쳐 1943년 8월 경성헌병대장(헌병 대좌)으로 부임, 약 1년간 조선에 근무하면서 당시 조선 사정과 자기의 소감을 회고록에 썼는데 그 내용을 소개한다.
먼저, 조선인 징병문제.
오오다니대좌는 조선인 징병제를 비난했다.
조선인 장정은 그 우수한 체격에도 불구, 전반적으로 일본어 습득력과 지적 수준이 낮아 군 복무에 적합치 않으므로 징병제는 시기상조이며 민심의 반감만 사므로 잘못된 정책이라 했다.
오히려 정착되고 있는 지원병제도를 활용(인원의 증원 등)하는 것이 훨씬 유효하다는 것이다.
두번 째 창씨개명문제
조선총독부의 총독을 포함, 고위층들은 일부 친일세력들의 아부에 넘어 가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
당시 호적법상 조선인들은 근본적으로 일본식 성명을 쓸 수 없어 호적등본만 보면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즉시 파악되므로 취업, 군복무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민족차별을 당하므로 일본식 창씨개명을 허용하도록 일부 조선의 지도층이 총독부에 청원했다는 것이다.
이를 조선인 전체의 민의로 착각한 총독부는 큰 맘 먹고 본국의 일본정부를 설득, 창씨개명을 단행, 결과적으로 오늘 날까지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일부 친일 조선인들의 농간에 넘어 갔다는 게 이야기의 골자였다.
오오다니의 주장은 억지일 수도 있으나 창씨개명을 청원한 당시 조선인 지도층과 조선총독부의 태도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일설에 의하면 총독부 실무층은 맹렬히 반대했다 한다. 이름으로 봐서 일본인과 조선인 구분이 안되므로 질서가 무너지고 치안이 문란해 진다는 것이다)
참고로 오오다니는 경성(서울)헌병대장을 거쳐 도꾜 헌병대장, 동부헌병대 사령관,중국(중부일본; 차이나의 중국이 아님)헌병대 사령관으로 패전을 맞았다. 최종 계급은 소장.
패전 후 전범으로 기소돼 징역(중노동) 10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1956년 가석방되어 집필활동을 하다 1976년에 죽었다.
저서에 '소화헌병사', '헌병'이 있다.
요즈음 지역차별을 없앤다고 전라도, 경상도 등 본적지 기재를 안 하기로 한다고 한다.
조선 총독부식 지역감정(차별) 해결방안 ?
첫댓글 정보 감사합니다. 쇼와헌병사...... 책값이 무려 7350엔 이군요.........
코스모님은 어디서 이런 자료를 구하시는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잠깐, 10년 선고로 1956년 석방이면 그건 가석방이 아니지 않나요?
오다니는 1946년4월에 전범으로 지정되어 ,1949년3월에 체포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