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 게시판에 '참나'에 관한 토론이 많군요. 사실 그 부분에 관하여 저도 궁금하여 예전에 '화엄사 종곡스님의 화엄선원'이라는 온라인 카페에다 종곡스님에게 질문을 드린 적이 있는데, 종곡스님께서는 친절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아래에 '화엄사 종곡스님의 화엄선원'에서 종곡스님께 제가 드린 질문과 저의 질문에 대한 종곡스님의 답변을 올립니다. 읽어 보시고 판단은 각자가 하시기 바랍니다.
스님께 질문드립니다.
그 찌든 무더위도 한 풀이 꺾이며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환절기에도 스님께서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평소 궁금한 점이 있어서 스님께 질문 드립니다.
깨달은 상태에서는 지각, 즉 앎만이 남는다고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색, 수, 상, 행, 식이 없는데 무엇을 근거해서 지각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우리 몸을 근거로 해서 일체의 현상이 나타나는데, 일체현상의 근거가 되는 이 곡두의 몸이 본래상태에서는 없는데 지각(앎)은 존재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본래면목상태에서도 앎은 있다면 한 덩어리로서의 이 우주(텅 빔의 상태)가 소위 지각(앎)을 한다는 결론이 되지 않습니까? 텅 빈 상태에서 뭔가를 지각할 수 있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스님의 고견을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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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중국 선사들의 책”이나 “대승불교 경전”을 보신 스님들이 많이 하는 실수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초기경전을 보신 스님들에겐 이런 실수 들이 없습니다. 그만큼 대승경전이나 중국선사들의 말씀 속에 “진여”나 “본성” 같은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진여나 본성은 순수무구해서 주위의 도움 없이도 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색,수,상,행,식이나 12연기 또는 18계의 도움 없이, 본성 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생각이라는 것은 마치 부싯돌을 부딛혀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인과 연이 결합하는 순간, 환처럼 일어났다가 꿈처럼 사라지는 것이라 그 실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가르침은 연기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순수무구한 어떤 “진여 같은 깨끗한 곳”이 있어서 그곳을 바탕으로 해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 중에서 “깨달은 상태에서는 지각, 즉 앎만이 남는다고 많이 들었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앎”이라는 것이 오온 과 12처를 떠나 홀로 “아뜨만”처럼 그렇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앎의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본래면목” 상태에서도 “앎”은 있다면 한 덩어리로서의 이 우주(텅 빔의 상태)가 소위 지각(앎)을 한다는 결론이 되지 않습니까? 텅 빈 상태에서 뭔가를 지각할 수 있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본래면목”을 말할 때, 번뇌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진여나, 불성, 본성, 참나, 같은 것이 항상 존재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을 “본래면목을 깨달았다!” 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에서 생긴 것이 본래면목을 깨달았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큰 모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본래면목이라는 단어 속에는, 마치 바깥의 오온의 움직임에 항상 원인이될 뿐만 아니라 만약 본래면목이 없으면 오온은 절대 작동될 수 없는 것처럼 표현되고, 이 속에는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신과 같은 영성스러움이 있는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또 (사람이라면 항상 머리 속에 저장되어있는 기억정보의 도움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생각을 합니다만,) 그런데 본래면목은 그런 기억정보의 움직임에 항상 본래면목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보고 듣는 기억들도 작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본래면목이 신과 같은 모든 것의 근본이되고 제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이런 논리들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선사들이 말씀하신 본래면목의 의미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들은 힌두교의 “아뜨만”의 의미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수행자라면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힌두교식의 이해가 아니라 불교식의 이해로 바꿔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꿔서 사용한다면, 이렇게 전환시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즉, 번뇌의 치열함 속에서도 “순수한 진여”는 그것에 물들지 않고 항상 여여하기 때문에 미움과 원망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아는 지혜로운 자는 번뇌 속에서도 아무 일 없이 여여하고 편안하다 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윗글에서 사용된 “진여의 의미”는 순수한 앎 자체가 홀로 고고하게 존재한다는 뜻의 “진여가 아니라”, “번뇌즉 보리”라는 의미로써, 치열한 번뇌 속에서 본래면목이라는 우리의 “뛰어난 지혜”가 그것들에 끌려가지 않고 중심을 잡아주고, 내 마음 안정시켜 준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래면목을 순수무구한 진여라는 “독립된 아뜨만”의 의미가 아니라 “지혜의 깨달음”이라는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지혜란 아뜨만 같이 순수무구한 제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중생의 뛰어난 사리 분별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뛰어난 판단력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뜻을 깊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즉 지혜는 뛰어난 판단력이며 분별력입니다. 수많은 개념들을 치열하게 분별하고 분석하여 잘못된 판단에 떨어지지 않게 바로 잡아주는 순수한 이성적 판단력입니다.
이 판단력이 무뎌지면, 사람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존재하지도 않는 수많은 허깨비들에 속아서 집착과 오해로 뭉친 귀신같은 인간이 되어 허상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 없는데도 죽음이 있다고 발광을 하고, 미움과 원망이 없는데도 미움과 원망이 있다고 미쳐 날뜁니다.
이런 잘못된 판단과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바로 본래면목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본래면목이라 하는 것이지 결코 순수무구한 제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같은 그런 “아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셨는데, 이 지혜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것을 잘 못 사용하면 수많은 오해를 부릅니다. 부처님 이후의 선지식들이 지헤를 설명할 때 그런 오해의 소지를 발생시켰습니다.
마치 순수 절대적인 신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이 오해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래면목”, “본성”, “참나”, “진여”, ... 등등의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을 지혜라는 말로 바꿔 이해해야 올바르고, 또 지혜란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이라는 점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또 이것들을 순수함이니, 절대적이니, 온우주와 하나니, 등등의 용어로도 사용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하자면, “온 우주와 하나가 됐다“, 라는 의미는 나라는 가짜가 진정으로 사라졌을 때, 우리의 마음은 잠시 우주와 하나되는 이와 같은 텅 빔 현상에 잠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영원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즉 눈앞의 현상세계가 잠시 사라지니까 그 휴유증으로 텅 빔 현상이 잠깐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수행자들은 지혜가 부족하여 이것을 보고 (환장?과격한 표현)을 하여 길길이 날뛰고 뭔가 대단한 것을 체험한냥 (설치니까??과격한 표현) 이런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들은 전부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린다면, 본래면목이란! “바른 판단력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바른 판단력과 분석력입니다”
내 마음속에 (번뇌가 날뛸 때) 항상 날카로운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어서, 그 환영들에게 속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그러한 지혜를 본래면목이라고 하고, 또 그러한 본래면목이 항상 여여하게 작동하고 있을 때, 그것을 본래면목(지혜)을 항상 놓치지 않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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