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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잎에 싸준 점심, ---- 청전 스님
요 며칠전 여동생이 유럽 여행을 간다고 했다.
시골 집에 감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단감을 따서 서울 여동생에게 보내면서 잘 있냐고 물었더니 하는 말이다.
곰곰히 생각컨데 요즘 변변히 살면서 해외 여행 못 가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나는 아직 일본 외에는 가본 곳이 없다.
그 흔하디 흔한 중국여행도 못가보았으니...
헌데 사는게 다 여행 아닌가?
어짜피 육신은 놓고 갈 마음 하나 붙들고 사는 것인데...
주변에 해외여행을 다녀온다고 호들감을 떠는 모양새가 별로이더라.
아침에 종이 박스를 주워서 용돈이라도 벌어 볼 양으로, 또는 구부정한 허리를 굽히고 종이 박스를 죽고 있는 나이든 할머니를 볼 양이면 우리도 저리 살 날이 멀지 않았다...
어짜피 육신은 이땅에 묻고 갈 뿐인데...
여기 평생을 여행하며 사는 순례스님의 일상중 한편을 보자.
어짜피 일생이란 순례하는 여행 아닌가?
해외이든 내 나라이든 그림에 나온 모양새를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이다.
산이있고, 물이있고, 들이있고,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사람이끼어 살고...
그러다가 죽고, 태어나고, 살다가, 잘보고 잘먹고 잘 쉬었다가, 잘 놀고 어느날 그렇게 이별하면서 떠나가는게 삶이다.
연한 호박잎에 된장에 비벼먹는 싸준 점심한번 먹어보고 싶다.
합장하고 고개숙이는 것이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2012. 10. 15
▲ 히말라야 트레킹중 계곡 급류 외나무나리를 건너는 청전 스님 사진 조현
꼭 23년 전 1989년 9월 중순에 벌어진 필자의 산행 중 벌어진 사건이다. 아직 우기가 끝나지 않은 히말라야 산중 농가에서 생긴 일이 새록새록 세월이 갈수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인도 땅 힌두교 정서에 낫선 사람이 자기 집안에 들어오면 일단 하늘에서 신이 내려오신 걸로 보고 극진한 예우로 끼니와 잠자리를 제공하여 왔다. 이젠 도시화로 발전되면서 농촌이나 산중에서만 이런 종교적인 정서가 남아있지 도시에서는 어디! 우선 이방인에 대한 의심과 경계로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게 변하였다. 한국 땅 도시안의 모든 주택마다에 굳게 잠긴 것처럼 말이다.
필자의 어렸을 적(필자는 육이오가 끝나는 무렵에 태어났다.) 힘들었던 시절을 제 연배의 나이 사람들은 오륙 십년대의 가난을 알 것이다. 대문 안에 밥 얻어먹으러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부모님들의 배려와 관심을 많이도 보아왔고 다 기억 한다. 남자 분이 오면 마루에 밥을 차려줬고, 여자 분이 오면 부엌의 부뚜막에 밥을 차려줬다. 그때마다에 아버님의 가끔 한마디란 “밥 안칠 때 보리라도 더 놓아 오는 이들 그냥 가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처음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아가면서 공부보다는 히말라야의 장엄에 매료되어 간 것 같다. 천성적으로 산을 좋아하던 필자의 당연한 업력이리라. 눈만 뜨면 이 설산 뒤쪽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마을이 있을까, 등등의 꿈의 나래를 펴가곤 했다.
▲ 히말라야 설산 등산중 쉬고 있는 청전 스님 사진 조현
특히 겨울 되면 펼쳐지는 하얀 설산에 그냥 처다만 봐도 흥분이 되어갔고, 어쩌다 끽끽대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면 어렸을 적 자라오던 고향생각에 푹 빠져들기도 했다. 그 때 도반스님께 쓴 편지글이 생각나기도 하다. 즉, “혜초 스님은 천축엔 나르는 기러기 없어 내 고향 계림 땅에 소식 전하지 못함을 서러워하노라.” 했지요. 그게 아니군요. “혜초는 관찰력이 없어 천축에 기러기 날지 않는다고 소식 전하지 못했지만 살아보니 창공에 기러기 훨훨 날아감에 이런 편지 날려 보낸다오.” 라고 써 보낸 글이 생각나기도 한다.
드디어 그 해 가을 입구 아직 우기가 끝나지 않은 9월. 호기심에 끄달려 먹 꺼리 싸들고 무조건 산을 올라 부쳤다. 삼일정도 오르면 4.643메타의 산꼭대기 문 피크(Moon Peak)에 닿을 수 있다. 너무 조급하게 올라 부쳤는지 그 험하고 높은 산꼭대기에 단 하루 반 만에 오를 수가 있었다.
저쪽 건너편에 다시 이어지는 히말라야 산 주령 하얀 피르판잘 산맥이 환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앞쪽엔 이곳에서 가장 높다는 5.660메타의 인도 판 한 성산이라고 검은 산이 커다란 자태를 들어낸다. 정말 멋졌다. 문제는 이게 탈이었다.
천성이 늘 옛길을 밟지 않는다는 산행 수칙 일호에 준비도 없이 그냥 반대편으로 내려 부쳐버린 것이 화근으로 되었으니, 쉽게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면 오늘 중으로 뭔가의 인가가 나올 거라는 단순한 판단이었다. 되돌아 내려 갈 때를 대비한 먹 꺼리가 전체였고, 올라 올 때 짐 된다고 텐트도 챙기지 않고 침낭과 메트리스만 들고 온 주제에 그 무모한 산행을 너무 쉽게 판단한 것이다.
비탈길을 내려가 만난 계곡 가에 나타난 하산길이 우기 동안 심한 풀로 우거져 있어 실 같은 길을 애써 놓치지 않고 내려부쳐야만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그대로 개울 따라 쪼로로 나 있어야 할 길이 큰 너덜바위와 함께 갑자기 뚝 끊긴 것이다. 몇 번이고 되돌아 다른 샛길이 있나하고 긴장하며 살펴봐도 이 길 외에는 없었다. 왜 길이 여기서 끝났지? 불안했다.
일생 수많은 산길을 헤매던 경험으로 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뒤로 올라가 고개 넘어 다람쌀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지금까지 온 길이 얼마며 결정적으로 먹을 게 다 바닥난 것이다. 또 설상가상이라고 날이 어두워지며 비까지 내린다. 큰 일 이 벌어진 것이다.
어렵게 큰 바위 밑에 비를 피할 수 있는 몸 하나 누울 곳을 찾았지만 희망이 없어져 버린 꼴로 날을 새기로 했다. 칠흑이 된 밤에서 그냥 눈만 말똥말똥,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밤을 새었다. 그래도 잠깐씩 선잠을 자기는 했다.
▲ 다람살라의 거처 베란다에서 찍은 설산 사진 청전 스님
▲ 다람살라의 거처 베란다에서 찍은 설산 사진 청전 스님
이튿날 다시 길을 찾고자 정밀 탐색전을 폈으나 결과는 똑 같다. 이럴 수가. 어쩌지? 비까지 멈출 줄을 모르니 더욱 난감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 이후 먹은 게 하나도 없는데 배가 그리 고프다는 느낌은 적었는데 너무 긴장해서였을 것이다. 어떤 방법이 없다. 지쳤고 불안하다. 뒤돌아서 온 길을 쫄쫄 굶고 사흘을 걸어 다시 다람쌀라로 생각은 아예 엄두도 안 난다. 막연히 그날을 헛되이 보내고 어제 잠자리로 또 하루를 보내려니 별의 별 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
이튿날도 희망이랄 게 없는데 혹시나 누가 지나가지나 않나하는 엉뚱한 생각이다. 정말 이 비 내리는 우기 철에 어느 미친놈이 이 깊은 산길을 오간단 말인가. 그러다가 환청인 듯 멀리서 개 짖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둔덕에 내 모습을 드러나게 오르니, 맙소사 아래쪽에 두 사람이 나를 쳐다보지 않는가. 개는 더욱 짖어댄다. 두말없이 그리로 뛰어갔고 우선 먹을 것을 구한다는 몸짓으로 배를 가리키니 커다란 짜빠띠 두 장을 건네준다. 합장과 함께 고맙다는 뜻을 표현하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향하며 “옴 시바”를 외친다. 자기네들 힌두교 최고신의 섭리이니 시바 신께 감사하라는 의미일 게다.
막말로 짜빠띠 한 장을 날래 먹어치웠고 나머지 한 개를 주머니에 넣으니 그것까지 다 먹으라는 눈짓이다. 체면이고 뭐고 그 자리에서 우적우적 먹어 치니 좀 걸어 부칠 힘과 용기가 났다. 후에 알고니 인도 고산에서 이때를 맞추어 희귀 약초를 채취하는 사람이었고 지금 하산중인 것이었다.
그때 이 두 분을 못 만났더라면? 아예 상상하기도 싫다. 분명할 일이란 실신하여 그 자리에서 죽는 일 외에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이젠 이 분들만 따라가면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왜 길이 이 자리에서 끊어져 없어진걸 알게 되었다. 바로 이 큰 너덜바위가 작년에 생긴 산사태였고 공교롭게도 거기서부터 위로 쳐 올라가는 길인데 돌무더기가 길을 삼켜버린 것이다. 무려 그 너덜 바위를 근 반시간이나 오르니 다시 환한 길이 옆으로 나있는 것이다. 초행자로써 어찌 이 길을 찾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큰 약초 부대를 지고 걷는 속도가 얼마 빠른지 필자도 산행 속도엔 이가 났다고 자부하는데도 늘 뒤지기에 몇 번이나, “한지! 아람쎄, 아람쎄”(어르신들! 천천히, 천천히)를 외쳐야만 했다. 한나절이 넘게 뒤를 따라가다 보니 드디어 제법 큰 길이 두 개로 나뉘는 길목에서 자기들은 아랫길로 가야하고, 그대로 가면 곧 마을이 나온다는 설명을 애써 알아들었다.
쿠아르시. 해발 2.650메타의 히말라야 전통 산간 마을, 우리나라 강원도에서나 보는 너와집과 어찌 이리도 닮았단 말인가. 내 일생에 어찌 이 마을 이름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발 길 닿는 대로 한 집에 들어서니 주인장과 그의 아내 그리고 꼬맹이 서넛이 이국인을 난생 첨보는 표정으로 마른자리로 맞아준다. 얼마 후에 큰 아이 시켜 따뜻한 물 대야를 놔주며 씻으라는 시늉에 얼떨결에 “단네왓”(고마워요)을 연발하며 얼굴과 발까지 씻었다. 그리곤 때 지난 끼니를 챙겨준다. 놋쇠 쟁반에 밥과 야채 버물림과 노오란 콩죽(달)이다. 맛있게 먹었다. 이미 어둠이 깔린다.
▲ 다람살라 인근 산 트리운드의 봉우리 문픽 사진 청전 스님
잠자리는 뭘 잔뜩 꺼낸 후에 따로 방바닥에 정갈한 쇼올을 깔아준다. 이튿날은 늦잠까지 잤으니 무안했다. 인도인이라면 집집마다에 있는 힌두교식 신단에 백 루삐(당시 5000원 정도였고 최 고액권이었다.)를 올리니 도로 가져다준다. 무언가를 드리려 해도 한사코 거절이다. 차고 있던 합장 염주를 아낙께 드리니 그건 받아준다.
짐을 챙겨 나오며 고맙다는 간곡한 표현을 알아듣는지 환한 웃음과 함께 조금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양념 개어 바른 두툼한 짜빠티 두 장을 호박잎에 싸주며 오이 두 개를 따로 준다. 가슴이 뭉클하다. 어렸을 적 시골집에서 많이 보아왔던 추억이 그대로 떠오른다. 필자가 어렸을 당시엔 요새의 흔해빠진 포장지가 없었기에 뭘 싸 줄때 호박잎이나 헌 종이를 사용했었다.
이후 산 고개 넘어 쿠아르시 마을을 거쳐 갈 땐 늘 그 집이다. 이젠 세월이 흘러 그곳까지 전기도 들어갔고, 아이들은 다 커서 분가했는지 안보이다. 한번은 아는 스님과 함께 늦가을 산행에 그 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흙 난로 있는 방을 비워주고 나뭇가지와 손도끼를 주어 저녁 내내 불 지펴가며 이 얘기 저 얘기로 길어졌다.
그 스님이 “헌데 이렇게 하루 자고 가면 얼마나 주어야 하죠?” 하고 묻는다. 유럽에서 오래 살다 온 탓의 질문이랄까. “주인장이 주어도 안 받지요, 나와 인연이 벌써 몇 년인데.............” 이튿날 맨드라미 꿀이라며 벌집 채 손수 손으로 짜주어 한 병씩 챙겨오기도 했다. 이것만큼은 따로 삼 백 루삐를 드렸다. 일 년 농사를 그냥 거저 받아 올 수는 없으니까. 산중 마을 그 넓은 밭마다에 유독 맨드라미가 지천이다. 맨드라미 씨는 인도 음식에 고급 향신료와 조미료로 쓰며, 또한 인도 전통 의학인 아유로베딕의 귀한 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지금도 이런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드리울 때면 고개 넘어 쿠아르시 마을에 또 가고도 싶지만 이제 필자도 무릎이 시어오면서 그 산길을 가기가 쉽지 않다. 들어오는 이방인에게 신이 온 것으로 맞이하는 소박한 인도만의 종교적인 전통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얼추 세월이 지났지만 산행 길에 받은 호의와 배려는 끝내 잊을 수 없는 필자의 히말라야 설산 나그네 인생길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2012년 10월 우기 끝난 히말라야 가을 하늘 아래에서, 비구 청전 두 손 모음.
2012. 10. 17 서영남
"우리는 환대의 집이 필요하다
나눔 나눔 나눔
2012. 10. 08 서영남
내가 아직 행복하지않다면
▲ 소백산 산위의마을 미사 사진 조현
▲ 청년들, 한겨레 자료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