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2009년 9월 본 칼럼에서 한·일 역사 갈등과 관련된 미국 행정부의 수수방관적 행태를 비판한 바 있다. 미국 행정부와 싱크탱크의 동북아 전문가라는 인사들의 일본 편향 행태를 지적하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미래지향적인 동북아 정책을 촉구하는 취지의 칼럼이었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지원했던 민디 코틀러 ‘아시아폴리시포인트’ 대표를 만나고 온 직후였다. 코틀러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지일파 관료들과 싱크탱크의 동북아 전문가들이 위안부 결의안에 반대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분개했다. 거론된 싱크탱크의 동아시아 전문가들 중 한 사람은 현재 국무부의 요직을 맡고 있다. 그 즈음에 미국의 유력 일간지라는 뉴욕타임스(NYT)가 한국 관련 기사에서 동해 대신 ‘Sea of Japan(일본해)’으로 표기한 지도를 게재했다.
오바마 정부는 여전히 한·일 역사갈등에 관한 한, 오불관언(吾不關焉)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겉으로는 한·일 갈등의 당사자 해결 주의를 내걸지만, 오바마 대통령 입장에서 ‘린치핀’(요체)인 한국과 ‘코너스톤’(주춧돌)인 일본 사이에 공연히 끼어들기 싫다는 속내가 들여다보인다. 미국의 이런 입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미국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자세다. 일본의 일방적 도발로 한·일 역사 갈등이 돌출될 때마다 주미 한국 대사관은 백악관과 국무부를 찾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단호한 입장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이유에 대해 주미 대사관의 고위 관계자는 “효과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의 불개입 정책 때문에 한국 정부의 입장 전달 자체가 실익이 없다는 취지로 들렸다. 과연 그런가.
최근 일본은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역사 교과서 출판을 허가했다. 일본 외무성은 2011년 외교청서(우리나라 외교백서에 해당)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외교청서가 발간되면 일본 외무성은 각국 해외공관에 독도와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측 논리를 홍보하도록 지시한다. 이를 통해 일본은 집요하고도 지속적으로 자국의 입장을 ‘기정사실화’한다. 외교에서 자국의 입장을 상대국과 이해 관련국에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재확인하는 것은 설명과 확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자국 입장을 상대국과의 외교 기록에 반복적으로 남겨두는 것이야말로 자국 입장을 견지하고 국익을 지키는 기본적 외교 행위다.
한·일 역사 갈등 현안에서 미국은 핵심 이해 관련국이다. 미국을 향해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영유권 망동을 엄중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정식으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선례가 되어 향후 독도 사태가 더 악화돼도 미국에 이런 입장을 제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일본은 지금의 행태로 미뤄봤을 때, 한국 정부의 이런 어정쩡한 태도를 자국의 입장이 옳다는 기정사실화의 근거로 악용할 것이 확실하다.
미국 국무부 등 정부 기관의 모든 한반도 지도에는 동해가 ‘Sea of Japan’으로 표기돼 있다.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은 이를 근거로 일본해를 고집하고 있다. 국무부 홈페이지는 독도를 ‘일본해에 위치한 리앙크루 암석’으로 표기한다. 리앙크루는 19세기 중반 동해에 진출한 프랑스 포경선 이름으로 선원들은 해도에 나타나지 않은 독도를 리앙크루 암석으로 명명했다. 한·일 역사 갈등에는 오불관언이라는 미국이 정부 기관 홈페이지에는 독도를 분쟁지역화하려는 일본 편향적 표기를 고수하는 셈이다. 이런 사례들이 하나씩 쌓이면 억지 주장이 기정사실로 둔갑한다. 외교에서 자국 입장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웅변하는 사례이다. 지금은 미국 내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궤변이 먹히지 않을지라도 오랜 기간 그 주장이 반복되면 미국 정부나 미 국민들의 인식이 바뀔 수 있다. 미국 내에서 ‘Sea of Japan’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과정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