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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시 25:1-22
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시 25:1-22 / [허물을 용서하소서; ㄱ) 다윗의 시] (알렙) 여호와여, 주께 이 마음 이 정성 다 쏟아부어 우러릅니다. (ㄱ. 히브리어 성서(마소라 본문)에 따르면 이 시는 각 절이 히브리어 자음순으로 시작된다) 2) 나의 하나님, (베트) 이렇게 주님을 굳게 믿사오니 부끄러움 당하지 않게 해주셔요. 원수들 좋아라 하지 않게 해주셔요. 3) (기멜) 주님을 바라고 또 바라는 이들 부끄러움 당하지 아니하나 주님을 배반하고 거스르는 자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없게 해주셔요. 4) (달렛) 여호와여, 주님의 길 알려 주소서. 주께서 가시는 길 가르쳐 주소서. 5) (헤) 진실하신 주님의 길 좇아 이 몸 따라가게 알려 주소서. 주님은 이 몸을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와우) 하루종일 온종일 주님만을 바라고 또 바라나이다. 6) (자인) 여호와여, 이 몸 바라보시면 가슴아파 측은하여 애타게 솟아오르는 주님의 정 잊지는 않으셨지요. 오래도록 한결같이 따뜻하게 잘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잊지는 않으셨지요. 7) (헤트) 젊은날 이것이 저지른 잘못과 허물 주님이여, 잊어 주셔요 한결같이 따뜻하게 잘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로 이것을 어루만져 주셔요. 여호와여. 8) (테트) 바르시고 어지신 여호와 주님이시니 죄짓고 사는 것들은 그 길로 그냥 가게 하시고 9) (요드) 주님의 정의 따라 고난당하며 살아가는 이, 이끌어 주시네. 고난당하며 살아가는 이, 주님의 길로 인도하시네. 10) (카프) 주님과 맺은 언약 잘 따르며 주님의 하신 말씀 잘 지키는 이에게 여호와 주님의 길은 한결같이 따뜻하게 잘해 주시는 사랑, 그리고 진실이어라. 11) (라메드) 여호와여, 주님의 이름을 모르는 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하오니 이것의 허물은 없애 주소서. 너무나 너무나도 무겁습니다. 12) (멤) 여호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이에게 그분은 가야 할 길 알려 주시리라. 13) (눈) 이 세상 행복하게 살게 하시며 그 후손도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하시리라. 14) (싸멕) 여호와 주님을 모시며 사는 이들 다정스레 대해 주시고 주님과 맺은 언약을 알려 주시리라. 15) (아인) 내 두 눈이 애타도록 여호와를 바라봄은 주님만이 올무에 걸려 든 이 두 발 자유롭게 하심이라. 16) (페) 이 몸 돌아보소서. 어여삐 보아주소서. 어디 하나 기댈 데 없이 외로운 이 몸, 무엇하나 가진 것 없어 서러운 이 몸, 17) (차데) 이렇듯 마음속에 번민이 많고 이렇듯 괴로움에 휩싸여 있으니 이 몸을 건져 주소서. 18) 이 괴로움과 이 고통을 보시고 내 모든 허물을 용서하소서. 19) (레쉬) 보소서, 내 원수들이 저리도 많습니다. 나를 미워하며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어떻게든 고꾸라뜨리려 벼릅니다. 20) (쉰) 이 몸을 지켜 주소서. 이 몸을 건져 주소서.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 (타우) 이 몸 주님을 바라고 애타게 그리워하오니 바르고 온전하게 살게 하소서. 22)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 이스라엘을 구해 주소서.
이 시에서 다윗의 고된 인생이 축소판처럼 그려집니다. 다윗은 여기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를 우러러보나이다(1-7) 다윗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기도합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는 문자적으로 나의 영혼을 주께로 들어 올린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영혼이 시련 속에서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그는 기도 중에 승리를 확신하고, 주의 도, 주의 길, 주의 진리를 알기를 소원합니다. 그는 어떤 시련 속에서도 주님의 길로만 가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길만이 승리로 향하는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기도 중에 자신의 죄가 생각날 때 여호와의 긍휼과 인자와 선하심을 의지합니다.
여호와의 모든 길(8-14) 하나님과의 언약에 근거하여 기도가 더 깊어집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모든 길은...인자와 진리로다”라고 선언합니다(10). 인자는 한없는 사랑, 진리는 약속을 이루시는 성실하심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를 의지하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합니다(11). 죄인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게 죄를 고백하면, 그는 하나님의 인자를 체험할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자기 이름,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 죄보다 더 큽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진리에 의지하여 경외하는 자가 복을 받을 것을 확신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은 하나님과의 비밀스러운 교제를 의미하며, 이는 오늘날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 누리는 성령의 일들을 암시합니다(고전 2:14).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15-22) 그물에 걸린 새처럼, 발이 그물에 걸린 상태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라보는 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시 91:3).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외롭고 괴로우며. 근심이 많고, 곤고와 환난 중에 있고, 많은 원수들의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항상 여호와를 바라본 것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문제, 대적들보다 크신 분이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의 표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믿고 보호를 간구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환난에서 속량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적용: 성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도움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기도하고 있습니까?
인간의 모든 성질 중에서 질투는 가장 추한 것이고, 허영심은 가장 위태로운 것입니다. 마음속의 이 두 마리의 뱀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입니다. 하기는 그것을 쫓아낸 후의 장소를 인간 경멸과 교만이라는 또 다른 두 마리의 뱀이 차지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질투와 허영심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도록 이 점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께 대한 확신
시 25장 / 메튜 헨리 주석
시편 25:1-7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하나님께로 향한 열망과 의지에 대한 고백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흔히 그의 시편들을 이러한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자신을 이러한 고백이 이루어지도록 스스로 몰두하기 위한 것이었다.
Ⅰ. 그는 하나님께로 향한 그의 열망을 고백하고 있다."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1절). 앞의 시편에서,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는"(4절) 것을 선한 사람의 성품으로 보았다. 그리고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도록" 문들은 머리를 들도록 요청되었다(7절). 이러한 성품, 이러한 요청에 대해 다윗은 여기에서 "주여 나의 영혼이 허탄한 것을 우러러보지 않고, 주를 우러러보나이다"하고 대답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은 주를 우러러보아야 한다.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주목해야 하고 우리의 영혼은 몰두되어야 한다. sursum corda- 즉 너의 마음을 위해 둠으로써 라는 표현은 옛날에는 예배에 대한 권유로써 사용되었다. 세상과 세상것에 대한 거룩한 경멸과 함께, 확고한 생각과 적극적인 믿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앞에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을 우리 행복의 근원이신 그에게 두도록 하자.
Ⅱ. 그는 그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으며, 또한 그 의지로 인한 혜택과 위로를 간청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나이다"(2절) 그의 양심은 그가 그 자신이나 어떤 피조물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나 그의 능력이나 약속을 미덥지 않게 여긴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자기 믿음을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는 마음 편하고 매우 만족스러우며, 재앙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탄원하는 하나님은 자기에게 의지함으로써 자기를 영예롭게 하는 자들을 돕는 것을 영예로 여기신다. 사람들이 신뢰하고 있는 것은 그 결과가 증명하듯이 그들에게 기쁜 것이 되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다윗은 여기에서 믿음의 지시 하에 진심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간구하고 있다.
1. 수치가 그의 몫이 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 "주께 대한 나의 신뢰를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내가 어떤 강한 두려움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결국에 가서 주를 의지한 것을 실망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주여, 내가 주께 맡긴 것을 지켜 주옵소서." 우리의 하나님을 지주로서 의지한다면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안에서 개가를 부른다면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가 두려움으로 위축되거나 결국에 가서 소망이 약해지는 때에도 우리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2. 수치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몫이 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 모든 성도들은 적당하고 귀중한 믿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결국에도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교제는 서로를 위한 기도에 의해서라도 유지되어야 한다.
더구나 참된 성도들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간구할 것이다. 믿음의 봉사로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이 소망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아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3. 수치가 범죄자의 몫이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무고히 또는 (단어 그대로) "헛되이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1) 그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범죄한다. 그들은 아무런 까닭없이, 즉 하나님 안에 있는 불의나 그가 그들을 서운하게 하신 것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과 그들의 서운하게 하신 것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에 그리고(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다윗과 그의 정부에 반항한다. 사람이 죄에 쉽게 유혹될수록 그것에 의한 타락은 더욱 심하다. 죄를 위해 죄를 범하는 자들이 가장 악한 범죄자들이다.
(2)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의 행위가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헛된 것을 계획하는 그들은 곧 수치를 당할 것이다.
Ⅲ.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의무의 길을 지시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4,5절).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가르쳐 주시기를 거듭 간청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자였다. 그러나 아무리 총명하고 통찰력이 깊은 자라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고 또 그것을 열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항상 배워야 한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라.
1. 그는 무엇을 배우기를 바랐는가? "훌륭한 말이나 훌륭한 이론이 아니라 주의 도와 주의 길과 주의 진리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께서 나를 향해 걸으시는 길, 즉 모든 인자와 진리가 되는(10절) 길과 주께서 내가 당신께로 향해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길을 가르쳐주소서." 자기의 의무를 깨닫는 자들, 그리고 그들이 "행해야 할 선한 일을"아는 자들이(전 2:3)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도와 그의 진리는 똑같은 것이다. 즉 거룩한 율법은 모두 거룩한 진리위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규례의 길은 진리의 길이다(119:30). 그런데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2.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 대해 열망했던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의무에 대해 밝히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었다.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게 가르치소서." 미심쩍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시기를 진심으로 간구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그곳으로 향하게 해 주시고 그 속에서 그를 강하게 해 주시는 그것이었다. "나를 지도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가르치소서." 이것은 눈이 어두운 사람이 그의 길을 잘못 가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프고 연약하며 힘없는 자가 그의 길을 가도록 부축해 주고 중간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셔야만 천국의 길로 갈 수 있다.
3. 그가 탄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께 대한 그의 큰 기대.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목표로 택하고 그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그에게 담대히 나아가 그 목표로 이르는 길을 지시해 주시도록 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그는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실 것이다. 구원을 주시는 교훈을 주실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한 그의 꾸준한 봉사,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종이 그가 하루 종일 섬기는 주인에서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서 지시를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의무를 행하고자 하는 결심을 품고 그것을 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해 주시리라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Ⅳ.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에 호소하고 있다. 그 자신의 어떠한 공로도 내세우지 않고서 오직 거기에만 매달리고 있다(6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을 기억하옵소서. 그리고 그 긍휼을 위해 나를 지도하시고 가르쳐 주시옵소서.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1. "주는 항상 자비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긍휼을 보이시는 것이 주의 이름이며, 주의 본질과 특성입니다."
2. "긍휼에 관한 주의 뜻과 계획도 영원부터 있었습니다. 긍휼의 그릇은 만물이 있기 전에 영광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3.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특별히 나에 대해서 주님이 보여 주실 긍휼의 여러 사례들은 일찍이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셨사오니 지금도 가르치소서."
Ⅴ. 그는 그의 죄가 사함받기를 특별히 갈구하고 있다(7절). "내소시의 죄를 기억지 마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기억하시고(6절) 나를 변호하소서. 그리고 내 죄를 기억하시어 나를 꾸짖지는 마옵소서."
1. 여기에서 그는 암시적으로 죄를 자백하고 있다. 즉 그의 소시적의 죄를 열거하고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오랜 후에라도 회개하고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세월이 죄책을 사라지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사악한 쾌락을 슬퍼해야 하며 그들이 젊었을 때의 사악한 즐거움을 가슴 아파해야 한다. 그는 그의 죄를 더욱 무겁게 느끼면서 그것을 자기의 "허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죄이므로,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할수록 죄는 우리에게 더욱 엄청나게 악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2. 긍휼을 특별히 간구하고 있다.
(1) 그가 죄책에서 방면될 수 있도록 긍휼 간구하고 있다. "내 소시의 죄를 기억지 마소서. 내게 불리하게 그것을 기억하시거나, 그것으로 책망하시고 판단하시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죄를 사랑하실 때는 그 죄를"더 이상 기억지 아니하신다"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사면을 의미한다.
(2) 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용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영원히 기억하시고, 나를 구하시기 위해 알맞은 때 오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은총을 부어 주시는 것보다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할 필요가 없다. 그의 탄원은 "주의 인자 하심을 따라, 주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하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죄의 사함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유익을 위해 우리가 탄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며, 그의 인자하심이지 우리 자신의 공로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보잘 것 없음을 깨닫는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풍족함에 만족하는 자로써 항상 이러한 탄원에 의지해야 한다.
거룩한 선하심과 인자하심 (시편 25:8-14)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다윗의 기도와 혼합되어 있다. 많은 탄원들이 이 시편의 앞부분에 있었으며 우리는 뒷부분에서도 많은 탄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시편의 중간 부분에서 그는 약속들을 묵상하고 생동하는 믿음으로써 이 위안의 젖을 먹으며 흡족해 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말해 주고, 기도 속에 믿음과 소망을 갖도록 우리를 격려해 주는 기도의 가장 훌륭한 초석일 뿐만 아니라 기도에 대한 현재의 응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속에 따라 기도하기로 하자. 그러면 그 약속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약속이 이행될 것이므로 우리는 그 기도가 청종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 중간 부분에서 약간 돌연스럽게 끼어든 것 같고 7절 다음에 넣어야 할 것 같은 하나의 청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죄악을 사하소서"라는 말이다(11절). 죄의 사함을 구하는 기도는 결코 무례하지 않다. 우리는 모든 행동에는 죄가 섞여 있으므로 우리의 모든 예배 속에 이러한 기도를 섞어야 한다. 그는 이중의 탄원으로써 이 청원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전자의 것은 매우 타당하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왜냐하면 주께서 주의 영광을 위해, 약속을 위해, 주님 자신을 위해 허물을 도말하심으로써 주의 이름이 은혜롭고 인자하심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사 43:25)." 그러나 후자의 것은 매우 놀랍다.-"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사하소서. 죄악이 중대할수록 거룩한 긍휼은 그것을 용서하심으로 인해 더욱 찬미될 것입니다. " 큰 죄를 용서하는 것-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다(출 34:7). "그것이 중대하므로 무한하신 긍휼이 그것의 사함을 중재하지 않는 다면 나는 파멸할 것이며, 영원히 파멸할 것입니다. 그것은 중대합니다. 나는 그것을 그렇게 봅니다. "우리가 우리 죄의 극악함을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더 잘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무겁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이 구절 속에 나타난 위대하고 귀한 약속을 관찰하고 또 다음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자.
Ⅰ. 이 약속들은 누구에게 속에 있으며 누가 그 혜택을 기대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약속에 의한 어떤 유익을 바랄 수 있을까? 바랄 수 있다(8절). 하나님께서 그들이 비록 죄인들일 지라도 그들을 교훈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또 그것을 위해 죄인들을 가르치시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이 약속들은 비록 죄인이었고 빗나갔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확실한 약속이 된다.
1. 즉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들에게(10절). 그의 계율을 자기들의 규율로, 그리고 그의 약속을 자기들의 분깃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또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았고 거기에 의지하고,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었으므로 거기에 따라 살아가는 그런 자들에게 확실한 약속이다. 비록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그들이 때로 계명을 어길지라도 잘못했을 때는 언제나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 그들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의해 꾸준히 신봉함으로써, 그들은 그 언약을 지키고 깨뜨리지 않는다.
2.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12절, 그리고 다시 14절), 그의 위엄을 경외하고 경외감을 갖고 그를 섬기며, 즐거이 그의 권위에 굴복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의 진노를 무서워하고 그를 거역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약속이다.
Ⅱ. 이러한 약속들은 무엇을 근거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의해 어떤 격려를 받아야 하는가? 여기에 모든 약속들을 비준하고 확증하는 두 가지 사항들이 있다.
1. 하나님의 성품의 완전함. 우리는 약속을 세우신 자의 성품으로써 그 약속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수 있으니, 이 는"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가 그의 말씀과 같이 훌륭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온유하시므로 우리를 속이실 수 없으며, 매우 진실되시므로 그의 약속을 깨뜨리실 수 없다. "약속하신 이는 신실하시며," 그것을 행하실 것이다. 그는 약속을 세우실 때 선하셨으므로 그것을 실행하실 때에도 의로우실 것이다.
2. 그가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이 그의 성품의 완전함과 부합됨. "여호와의 모든 길은(즉 그의 모든 약속과 섭리는)인자와 진리로다"(10절). 그것은 그 자신과 같이 선하고 정직하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언제나 그의 목적의 인자와 그의 약 속의 진리에 따라 다루신다.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언약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속에서 그의 긍휼이 나타나고 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선한 백성들이 아무리 환난으로 단련을 받든지 간에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와 진리"이고 그들의 여행이 끝날 때는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이 드러나리라는 것이 그들에게 말할 수 없이 풍만한 만족감을 준다.
Ⅲ. 이 약속들은 어떠한 것인가?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무의 길로 가르치시고 지시하실 것이다. 이것이 매우 강조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나를 지도하소서'(4,5절) 하는 다윗의 기도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알맞는 그 약속들 위에 대부분의 우리의 생각을 집중시키고, 믿음을 행하여야 한다.
(1) 그는 "그 도(道)로 죄인을 교훈하실"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인이므로 교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교훈 받기를 원할 때,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 화해하는 길과 양심에 참된 평화가 깃드는 길, 그리고 영생으로 이르는 길을 가르치실 것이다. 그는 그의 복음을 통해 이 도를 만인에게 알리시며 그의 성령을 통해 회개하고 그 길을 구하는 죄인들은 인도하시고 총명을 허락하신다. 마귀는 사람의 눈을 가리우고 그들을 지옥으로 이끄나 하나님은 사람의 눈을 밝히시고 그들 앞에 있는 것들을 참된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시어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2) "온유한 자를 지도하신다." 그들 스스로를 천하고 낮게 여기는 자들, 그들 스스로를 믿지 않고 교훈 받기를 원하며 거룩한 인도하심에 따르기를 정직하게 결심하는 자들, 이러한 온유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실 것이다. "여호와여, 당신의 종들이 듣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이러한 자들은 그는"공의로," 즉 기록된 말씀의 법으로 지도하신 것이다. 그는 죄와 의무에 관련되어 있는 실제적인 것으로써 그들을 지도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흠없는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사려깊게 그것을 행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사정에 맞게 처리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죄인들을 지혜와 온유와 동정을 품고 가르치실 것이며 그들이 지탱해 나갈 수 있도록 가르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그의 도를 삼으며, 그것을 배우기를 원한다. 그러한 자들은 그 가르침을 받고 그 도로 인도될 것이다.
(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가 택할 길을 가르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거나 선한 사람들이 택할 길을 가르치실 것이다. 그것은 모두 한 가지 길로 일치된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를 기쁘게 하는 것들을 택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올바른 길을 택한다면 그 선택을 지시하시는 그가 우리의 걸음을 지도하시고 그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가 지혜롭게 택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롭게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을 편하게 만드실 것이다. "저의 영혼은 편안히 거하고 선하심 속에 머무르리로다"(13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전념하고 스스로를 복종시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잘못을 범하지 않는 한 편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별케 된 자들, 더욱이 하나님의 평화에 의해 위로를 받는 자들은 편안히 거할 것이다. 심지어 몸이 아프고 고통 속에 누워 있을 때라도 영혼은 하나님 안에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에게로 돌아와 안식처인 그의 안에서 쉴 것이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나 은혜의 언약은 그 모든 불안을 진압시키고 우리를 편하게 하는 것이다.
3. 그는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이 세상에서 유익한 것을 충족하게 주실 것이다.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우리의 영혼에 대한 관심 다음의 것은 자손에 대한 관심이며,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후손들을 위해 복을 저장해 두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땅을 상속할 것이며 그것에 대한 권한과 그 즐거움을 가질 것이고, 그들의 자손들은 죽을 때의 그들의 기도로 인해 더 잘 지낼 것이다.
4.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와의 친밀한 교제를 허락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친밀한 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나이다"(14절). 그들은 그의 말씀을 깨닫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요 17:17). 진리를 사랑하여 받아들이고 그 능력을 체험하는 자들은 그 비밀을 가장 잘 깨닫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의 섭리의 의미를 더욱 잘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행하시는가를 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그는 아브라함을 그렇게 부르셨듯이, 그들을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부르신다. 그들은 은혜로운 영혼이 아버지와 맺은,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의 축복과 그 교제의 즐거움을 경험에 의해 안다. 그의 모든 성도들은 이러한 영광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탄원 (시편 25:15-22)
약속을 묵상함으로써 격려를 얻은 다윗은 여기에서 다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시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그를 향한 열망을 고백하면서 끝맺고 있다.
Ⅰ. 그는 그가 당하고 있는 환난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있다. 그는 발이 그물에 단단히 걸려 있었으므로 혼자의 힘으로는 그의 곤경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15절). 그는 "외롭고 괴로왔다"(16절). 괴로움을 당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외롭다. 그럴 때에 그들의 친구는 그들을 버리며 그들은 혼자 앉아서 잠잠케 된다(애 3:28). 다윗은 그 자신이 "외롭고 고독하다고"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의 종이나 군병들을 의지하지 않고 피조물로부터는 어떤 도움이나 구조도 바라지 않으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의 근심이 많아"(17절) 그는 더욱 거 우울하고 마음이 괴로와졌다.
무엇보다도 죄책감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그이 심령을 상하게 하고, 그의 외적인 고통을 더욱 무겁게 느끼게 해 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곤고와 환난" 가운데 있었다(18절). 그를 핍박하는 (그를 미워하는) 대적들은 많았고 사악했으며, 매우 야비했다. 그들은 그를 심히 미워했던 것이다(19절). 그리스도의 대적들과 그의 교회의 박해자들도 이러한 자들과 같았다.
Ⅱ. 그는 이러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했음을 나타내고 있다(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하나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신들을 위했고 항상 그들의 우상을 바라보았다(사 17:7, 8).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그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다(슥 9:1). 그에 대한 우리의 묵상은 달콤해야 하며, 그를 항상 우리 앞에 모셔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길에서 그를 인정해야 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의식 속에서뿐만 아니라 섭리 속에서도, 예배의 행위 속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은 환난 가운데서도 이것으로부터 위로를 얻었다. 그의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시리라는 것을, (어떤 사람들의 풀이대로)하나님께서 그를 마음의 타락에서,(또 어떤 사람들의 풀이대로) 그를 치려는 그의 대적들의 모략에서 구하시리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항상 눈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들은 오랫동안 발이 그물에 걸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그의 고백을 반복하고 있다(20절).-"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그리고 그에 대한 기대를 거듭 고백하고 있다(21절)-"내가 주를 바라보나이다" 이처럼 주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Ⅲ. 그는 하나님의 위안과 도움을 간절히 간구하고 있다.
1. 그 자신을 위해.
(1) 그가 어떻게 간구하고 있는가를 보라.
[1] 그 죄의 사면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다.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18절). 그것이 그의 가장 큰짐이었고, 또한 다른 고통들을 초래한 원인이었다. 그는 그의 소시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7절) 두드러지게 큰 어떤 죄악을(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아 문제로 지은 죄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용서해 주실 것을(11절) 간청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여, 내 모든 것을 사하소서. 모든 죄악을 제하소서"하고 기도하고 있다.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옵소서." 그의 환난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참작해 주시는 것 이상은 그가 요청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죄에 관해서는 완전한 용서 이상의 요청하고 있다.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우리가 환난에 처할 때는 언제든지 환난이 제거되는 것보다 죄를 용서받는 것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 또한 그의 비탄을 바로 잡기 위해서 간구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물러가신 것과 그의 죄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 죄책감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주여, 내게 돌이키소서"(16절)하고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아오신다면 누가 우리에게서 돌아서도 상관이 없다. 그의 상황은 고통스러웠고 그것에 관해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나를 곤란에서 끌어내소서. 내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길을 발견하시거나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의 대적들은 악의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에 관해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내 영혼을 지켜 그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소서. 혹은 그들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2) 이 탄원들을 강력히 청원하기 위해 네 가지 자신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자신과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고려해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
[1]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청하고 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룬 자들도 무한한 긍휼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지 않는다면 멸망할 것이다.
[2] 그의 재앙, 고통, 곤고와 환난, 특히 그의 마음의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거룩한 긍휼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3] 그의 대적들의 죄악을 탄원하고 있다. "여호와여,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살피시고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소서."
[4] 그 자신의 성실함을 탄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유죄임을 스스로 인정했고 하나님에 대해 죄를 범했음을 자인했으나 그는 그의 적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는 양심의 증거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를 심히 미워했을 때에도 그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그를 보호해"줄 수 있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그의 "성실과 정직"이 지속되는 것보다 더 오래 안전케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고, 그가 그것을 지속시키는 한 결코 자신의 안전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신실함은 최악의 사태에 있어서도 우리의 가장 훌륭한 보루가 될 것이다. 성실과 정직은 세상의 재물과 영화보다도 더 잘 사람을 보호해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천국을 마련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실을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하고 그 다음에 그가 그것을 보호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2.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22절). 다윗은 당시에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있다. 환난은 모든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몫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 전체 집단보다도 더 클 수 있겠는가? 다윗의 고통은 컸으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구해 주시기를 매우 간절히 간구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에도 하나님의 교회가 당한 환난을 잊지 않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은혜의 보좌로 가져갈 자신의 매우 많더라도 항상 공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선한 사람들은 교회가 환난과 위험 속에 있는 한 그 자신이 안전할지라도 위로를 얻지 못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드디어 다윗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을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들로부터 편안케 해 주시리라는 예언이다. 또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고(130:8) 환난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메시야가 합당한 때에 보내어진다는 예언이다. 이것은 또한 미래 상태의 행복을 언급하고 있다. 하늘에서, 하늘에서만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모든 환난에서 완전히 구속될 것이다.
환란에서 성도가 사는 길
시 25:1-22 / 유기성목사(선한목자교회)
어려움이 닥칠 때, 영적 자기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자살사이트에서 만나 죽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만나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눈 대화 때문입니다.‘살아보니까 별수 있냐. 어차피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잿빛 인생, 희망이 없잖아.’ ‘그래 살아서 뭐하냐. 일찍 죽자.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는 네가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이것이 마귀의 속삭임인 것을 모르기에 그러다가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 재정 위기, 실직, 실패, 실연 등 어려움을 당할 때,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영적으로도 시련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병을 생기면 병마도 역사합니다. 욥의 경우, 닥친 시련 뒤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울수록 정신차려야 합니다.
시편 25편은 큰 환란을 당한 다윗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내용이 뒤죽박죽입니다. 말에 논리가 없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이 더 친근감이 드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를 정리해 보면 다윗의 귀한 믿음이 드러납니다. 뚜렷하게 세 가지 내용으로 정리되는데, 환란을 당한 성도가 살 길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첫째는 환란 중에 더욱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절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15절 …내 눈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봅니다.
20절 …나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21절 …주님, 나는 주님만 기다립니다.
환란 중에 다윗은 더욱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한 절망에 빠진 적이 있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면 그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큰 소리로 탄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눈으로 보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는 하나님은 분명히 계신 것을 압니다. 이것이 환란을 이기는 길입니다. 욥도 그러했습니다. 욥기 1장 20-21절에 보면 욥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재앙을 거듭 당하면서도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환란을 당할 때, 성도가 사는 길입니다. 끝까지 주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째 환란 중에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7절 내가 젊은 시절에 지은 죄와 반역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11절 주님,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내가 저지른 큰 죄악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성도는 환란을 당하면 즉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군목 훈련받을 때, 구대장이 늘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눈동자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당시에는 뻥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목회하면서 그 말이 뻥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배 드릴 때, 교인들의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훈련소에 갓 입소한 훈련병이 얼마나 지휘자에게 집중하였겠습니까? 사방을 둘러보는 오합지졸이 아니었겠습니까? 앞에 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기면 여기저기서 수근수근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눈이 돌아가는 수준인 것입니다. 주님께 집중하는 훈련된 교회는“괜찮아, 괜찮아” “잘했어.”응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어떻겠습니까?“눈동자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24시간 예수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사람을 보고 뉴스를 보고 문제를 보며 사니 예수님께서 인도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던 다윗도 순간 세상을 바라보다가 시험에 빠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던 아브라함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주실 것과 큰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나 세월이 지나도 아들이 없자 양자를 들여 볼까 하기도 했고, 사라의 몸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후 13년 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월요일 새벽 2시‘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부흥이 오지만 시험도 같이 온다는 것입니다. 죄에 기웃거리는 태도를 단호히 버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는 환란 중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4절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고,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8절 주님은 선하시고 올바르셔서, 죄인들이 돌이키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성도가 환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환란을 당하고 나면 순종이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구원받은 삶입니다. 순종은 고민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James H. Taylor) 중국 선교사도 자신에 대하여 깊이 좌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에서 주님은 포도나무요 자신이 가지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에“나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내가 할 일은 찬양할 것 밖에 없음을 알았다.”그리고 그는 정말 평생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중동 어느 지방에 실수로 낙타가 웅덩이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낙타를 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때 마을에 있는 지혜로운 한 사람이 낙타를 건져낼 방법을 지시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덩이에 모여 삽을 가지고 땅을 파서 웅덩이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주인은 소리를 치며 낙타를 웅덩이에 파묻어 죽일 거냐며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흙을 퍼부었더니 놀랍게도 낙타 스스로가 웅덩이에 쌓인 흙을 밟고 나왔습니다.
우리 힘으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헤어나지 못하는 인생의 웅덩이가 있습니다. 그 때는 내 힘을 빼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수렁에 빠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 복음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구원받는 삶입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설교 부탁을 받고 낯선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길을 모르는 그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내자를 따라 나선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곳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안내자가 어이 없어 합니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목적지가 아닌 곳에 이미 와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그 날 설교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가 목적했던 곳에 갔더라면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입니다. 어거스틴을 반대하는 대적들이 이미 숲속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칼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내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여 그 길을 못 가게 하시고 어거스틴을 보호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환란 당한 성도가 살 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숙제가 있습니다. 환란을 당할 때, 어떻게 다윗 처럼 그렇게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24 시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6절에 보면 다윗은 이미 오랜 기간 하나님과 동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6절 “먼 옛날부터 변함 없이 베푸셨던, 주님의 긍휼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환란이 왔다고 누구나 다윗 처럼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이 생기면 평소 보다 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평소에 늘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환란 중에 주님을 찾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도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렇게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 무슨 환란이 닥칩니까?” 모르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온 우주에서 하나님과 마귀가 함께 역사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마귀를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마귀는 상대가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에서는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는 마귀의 역사가 득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온갖 고통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 조차도 육신의 죄에서 온전히 자유하지 못하여,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와하며 고백하였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어떤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14절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의논하시며, 그들에게서 주님의 언약이 진실함을 확인해 주신다.
주님은 누구와 의논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일을 주로 누구와 의논합니까? 친한 사람입니다. 평소에 주님과 친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17세기 로렌스 형제가 전쟁 후 삶의 회의를 느끼고 여생을 아름답고 보람 있게 살고자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자신에게 주방에서 밥하고 설거지 하는 일만 시키는데 몹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인생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나에게 기껏 맡기는 일이 설거지란 말인가!’그러나 곧 하찮은 일상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로렌스 형제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설거지하는 가운데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내 삶 어느 구석에라도 함께 가시는 하나님!’그러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대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수도원 원장과 주고받았는데, 바로‘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2004년 8월 4초등학교 4학년인 정희재라는 어린이가 지리산에서 사흘간 조난당했다가 살아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빠와 아빠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아빠 곁에 따라오지 않고, 이리저리 마음대로 기웃거리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어느 순간 주위에 아무도 없고 지난 온 길을 돌아보니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흘간 이 아이는 홀로 깊은 지리산에서 헤매며 다녔습니다.
그 때, 이 아이를 인도한 것은 평소에 아버지가 늘 하던 말씀이었습니다.
밤이 되어 무서울 때 “우리나라 산에는 맹수가 살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며 무서움을 견뎠다고 한다.
비가 내리자 “산에서 비를 맞고 잠들면 체온이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 침낭을 뒤집어 쓴 채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아빠가 말해준 대로 산에서 길을 잃어도 물소리 나는 쪽으로 가면 산다.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결국 살아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하면 길이 없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길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24 시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훈련해 가야 하겠습니다.
올해 실업인 선교회를 재창립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시업이 어려워 힘들어하는 실업인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길로 가도록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헌금하는 실업인 선교회가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사업하는 방법을 훈련하는 실업인 선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기독실업인들의 모임인 CBMC, 미국 경제공황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가정 세미나 등을 통하여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는 일을 제대로 하려고 합니다.
환란에서 성도가 살 길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과 친밀한 것입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시며 시험에 강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구원의 하나님
시 25:1-10 / 이삼규목사
본 시편의 저자는 표제에 나타난 대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생애 가운데 언제 이 시편을 썼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이 시편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본문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다윗은 어떤 인생의 전환점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왔는데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다윗은 자신의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말씀으로 자신의 길을 인도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본 시편의 특징은 히브리어 알파벳 답관체 형식으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본 시편에는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각 행(行)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편이 9개가 있습니다(9, 10, 25, 34, 37, 111, 112, 119, 149편). 일명 ‘알파벳 시’라고 부릅니다.
1. 주를 우러러 봄
1)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봅니다(1절).
시 25: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이 말은 다윗 자신이 믿음 없는 자들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않고 모든 마음과 뜻을 하나님을 향해서만 집중시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우러러 볼 것이다’로 직역되는 미래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주를 바라보는 다윗의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의 유혹에 이끌리지 말고 다윗처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진지하고 성실한 기도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기도의 가장 큰 방해 요소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로 도움 받을 줄 알고 두 마음을 품고 요동하는 것입니다.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다윗이 주를 우러러 보는 데는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윗은 우리 인생의 길을 가장 정확하게 잘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에 빠지는 것보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관계’를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2)내가 주를 의지합니다(2절).
시 25: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의지하였다’는 말은 1절의 ‘하나님을 우러러 보나이다’라는 말과 함께 다윗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행하는 성도들은 비록 원수보다 약한 것 같으나 결국은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히 연약하고 주위의 여건이 아무리 나쁠지라도 누구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하기만 하면 결코 부끄럽지 않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3)주를 바라봅니다(3절).
시 25:3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어떤 사람이 수치를 당하고 어떤 자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합니까?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만 주를 바라는 자라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는 ‘카와’라고 하는 데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 소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주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겠고 이유 없이 죄를 짓는 사람들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우리말 성경)
마귀는 우리들에게 지금은 너무 늦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아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자포자기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너무 늦은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지금 그것을 알고 바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항상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할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 49:23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2. 주의 길을 가르치소서
1)다윗이 알기 원했던 세 가지(4-5절).
시 25: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 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그것은 ‘주의 도’, ‘주의 길’, ‘주의 진리’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가리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하기를 매우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2)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토록 주를 기다리이다(5절).
“주는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루 종일 주만 바라봅니다.”(우리말 성경)
‘구원의 하나님’은 “예사 엘로힘”입니다. “예사”라는 말은 “구원, 구출, 구조, 안정, 번영”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종일 기다리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1)주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영원히 있었습니다(6절).
시 25: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긍휼하심, 인자하심, 선하심, 정직하심 등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성품은 ‘인자하심“(헤세드)입니다. 인자하심(헤세드)은 인간의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죄인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2)죄를 기억하지 마옵소서(7절)
시 25: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근거로 젊은 시절의 허물과 죄를 기억하지 마시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은 젊은 시절이 아닌 나이가 들어서 지은 시편으로 생각됩니다. 다윗의 젊은 시절 죄와 허물이 무엇이 있을까요? 대표적인 죄가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정을 통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충성스런 부하였던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서 죽게 한 죄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 저질렀던 이런 죄악과 허물을 기억하시 마시고 인자하심을 따라 기억하시되 선하심으로 해달라고 구하였습니다.
3)주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십니다(8절).
시 25: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정직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선하시고 정직한 도를 가지고 죄인들을 교훈하십니다.
4)온유한 자에게 정의로 지도하십니다(9절)
시 25:9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기서 온유한 자는 단순히 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 욕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런 온유한 사람이 결국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약삭빠르고 성격이 급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게 빨리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린 후에 결실을 기다리듯이 기다려야 열매를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래 참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것은 아무 것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인내할 수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도를 배워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 기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이 하나씩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5)여호와의 모든 길
시 25: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지 않으면 결국 세상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 겉으로 보기에는 비현실적인 것 같고 세상과 너무 동떨어진 것 같은데도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부족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무장되어서 능력 있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구원의 하나님을 종일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를 바라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주님만 의지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 25:1-10 / 김우영목사
시편 25편은 원수들의 핍박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던 다윗이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비탄시입니다. 고난을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며 죄를 자복하고 경건에 힘쓰는 다윗의 모습이 부각되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여기의 ‘우러러보나이다’는 원어로 ‘엣사’인데 ‘들어올리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을 때 더 나은 환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환경을 바꾸려고 하는 다윗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라는 다윗의 신앙고백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주를 의지하리라
하나님만 의지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은 죠지 뮬러(George muller)입니다. 죠지 뮬러는 알콜 중독에 도벽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심한 후 73년 2개월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어떤 경우도 실망하지 않았고 기도 응답 받을 때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5만 번 이상 기도응답을 받았습니다. 만 명 이상의 고아를 돌보았고 2백명의 선교사를 후원하였고 42개국을 다니며 3백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죠지 뮬러의 사상과 사역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마지막 부분에 죠지 뮬러의 호소를 인용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과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복한 길을 가지 않으렵니까? 이 길은 나처럼 여러분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짐을 내려놓고 곤고한 날에 그 분을 부르도록 초대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여, 이렇게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과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평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하늘 아버지가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여기의 ‘의지하였사오니’는 원어로 ‘바타흐티’인데 ‘신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은총을 확고하게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와 대적의 공격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승리의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부끄러움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부끄러움을 당한다면 하나님이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며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만 바라리라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젊은이들은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5년째 세계 1위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절망감 때문입니다. 특히 10대에서 30대의 청년들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왜 젊은 사람들이 고귀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입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사는데 세계 어느 나라보다 불평등이 심각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위 1%, 상위 10%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일에 대한 꿈을 잃어버리고 오늘을 즐기며 살자는 욜로(YOLO)족이 생겨나고, 그것마저도 없는 젊은이들은 자살하거나 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도 하늘나라에 대한 꿈과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엇을 귀하게 여기느냐는 것은 무엇을 바라느냐로 정해집니다. 땅만 바라며 과거만 끌어안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야 합니다. 그곳에 소망이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기의 ‘주를 바라는’은 원어로 ‘코웨카’인데 ‘주를 소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을 부각시켜 어려움 가운데도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아니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실족을 허락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다. 인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을 친히 해결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에게 온전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주를 우러러보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주를 기다리리라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유월절 절기마다 부르는 ‘아니 마민(Ani ma'amin)’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니 마민’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신다. 나는 믿는다오. 나는 믿는다오, 영원한 평화의 그날이 땅 위에 오리라고 나는 믿는다오. 나는 믿는다오. 그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더딜지라도 오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오.” 이 노래가 만들어진 곳은 놀랍게도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장 많이 죽인 공포의 아우슈비츠수용소입니다. 이 곡을 만들어 부른 사람들은 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붙잡고 힘겨운 순간을 견디어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절망의 순간을 맞이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해결하시고 역사하실 것을 기다리며 주를 우러러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여기의 ‘기다리나이다’는 원어로 ‘키우위티’인데 ‘주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주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다윗의 모습은 불의한 세상에서 갖추어야 할 신앙인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환난에 처하였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도 구원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구원자로 여기고 의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일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여 살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적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을 종일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구원자로 삼고 기다려야 합니다.
1861년 2월 11일 미국의 스프링필드에 비가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기차 정거장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키가 유달리 큰 사람이 기차의 맨뒷 칸에 서서 사람들에게 연설합니다. “나는 이곳을 떠납니다. 언제 돌아오게 될는지, 과연 돌아올 수 있는지 그것도 알지 못한 채 초대 대통령 워싱턴에게 맡겨졌던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을 앞에 놓고 갑니다. 그를 돌보아 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나는 성공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 있다면 실패할 리 없습니다. 나와 함께 계시고, 또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어디서나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일이 다 잘되어 가기를 믿는 마음으로 희망을 가집시다. 내가 여러분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듯 여러분의 기도 속에서 나를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라면서 작별을 고합니다.” 연설의 주인공은 40%밖에 되지 않는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믿음으로 험난한 대통령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들고 고통스럽습니까? 하나님을 우러러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도 주를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부디 흔들림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주를 우러러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실 소망을 바라며 주를 우러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며 오직 주를 우러러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 25:1-10 / 김광일목사
미국의 여류작가 델마 톰슨(Thelma Thompson Slayden)은 2차대전 중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육군장교와 결혼을 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모제이브 사막에 위치한 육군훈련소에 배속된 남편을 따라 사막근처 오두막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모래바람으로 가득찬 그곳의 삶은 외롭고 고독하기만 했습니다. 못마땅한 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섭씨 50도가 넘는 살인적 무더위에 이야기 상대라고는 고작 멕시코인과 인디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항상 모래바람이 불어와 음식물은 물론이고 호흡하는 공기도 모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절로 신세 한탄이 나와 부모에게 편지하였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당장 짐을 꾸려 집으로 가겠다며 이곳에 사느니 차라리 감옥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답장은 단 두 줄로 쓰인 간단한 내용이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두 사람이 조그만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고 다른 한 사람은 감옥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와 바퀴벌레를 세며 불평과 원망으로 살았다.” 그러나 두 줄의 글이 그녀를 감동시켰습니다. 그 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좋은 것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자신에게 밤하늘의 별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주변을 살피던 중 원주민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편물이나 도자기에 대해 흥미를 보이자 원주민들은 그것들을 마구 선물했습니다. 그녀는 선인장, 난초, 여호수아 나무의 기묘한 모양을 연구했고, 사막의 낙조를 바라보기도 하고, 백만 년 전 사막이 바다의 밑바닥이었을 무렵에 존재했을 법한 조개 껍질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변화시켰습니까? 사막은 변함이 없고 원주민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변한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습니다. 델마는 비참한 경험을 생애에서 가장 즐거운 모험으로 바꾸었고 새롭게 발전한 세계에 자극을 받고 감격한 나머지 그것을 소재로 ‘빛나는 성벽(Bright Ramparts)’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출판 사인회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막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너는 불행하다!’ ‘너는 외톨이다!’ ‘너는 희망이 없다!’라고 말하는 마귀의 소리가 들렸고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곳으로 너를 인도한 이는 바로 나 하나님이다. 이곳에서 너의 새 꿈을 꾸려무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저는 마귀의 소리에 귀를 막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면서 오늘의 이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막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변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감옥의 창을 통해 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주를 우러러보아야 합니다.
다같이 복음성가 ‘주만 바라볼지라’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시편 25편은 원수들의 핍박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던 다윗이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비탄시입니다. 고난을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며 죄를 자복하고 경건에 힘쓰는 다윗의 모습이 부각되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여기의 ‘우러러보나이다’는 원어로 ‘엣사’인데 ‘들어올리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을 때 더 나은 환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환경을 바꾸려고 하는 다윗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라는 다윗의 신앙고백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주를 의지하리라
하나님만 의지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은 죠지 뮬러(George muller)입니다. 죠지 뮬러는 알콜 중독에 도벽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심한 후 73년 2개월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어떤 경우도 실망하지 않았고 기도 응답 받을 때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5만 번 이상 기도응답을 받았습니다. 만 명 이상의 고아를 돌보았고 2백명의 선교사를 후원하였고 42개국을 다니며 3백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죠지 뮬러의 사상과 사역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마지막 부분에 죠지 뮬러의 호소를 인용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과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복한 길을 가지 않으렵니까? 이 길은 나처럼 여러분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짐을 내려놓고 곤고한 날에 그 분을 부르도록 초대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여, 이렇게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과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평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하늘 아버지가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여기의 ‘의지하였사오니’는 원어로 ‘바타흐티’인데 ‘신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은총을 확고하게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와 대적의 공격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승리의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부끄러움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부끄러움을 당한다면 하나님이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며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만 바라리라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젊은이들은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5년째 세계 1위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절망감 때문입니다. 특히 10대에서 30대의 청년들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왜 젊은 사람들이 고귀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입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사는데 세계 어느 나라보다 불평등이 심각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위 1%, 상위 10%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일에 대한 꿈을 잃어버리고 오늘을 즐기며 살자는 욜로(YOLO)족이 생겨나고, 그것마저도 없는 젊은이들은 자살하거나 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도 하늘나라에 대한 꿈과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엇을 귀하게 여기느냐는 것은 무엇을 바라느냐로 정해집니다. 땅만 바라며 과거만 끌어안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야 합니다. 그곳에 소망이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기의 ‘주를 바라는’은 원어로 ‘코웨카’인데 ‘주를 소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을 부각시켜 어려움 가운데도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아니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실족을 허락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다. 인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을 친히 해결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에게 온전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주를 우러러보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주를 기다리리라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유월절 절기마다 부르는 ‘아니 마민(Ani ma'amin)’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니 마민’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신다. 나는 믿는다오. 나는 믿는다오, 영원한 평화의 그날이 땅 위에 오리라고 나는 믿는다오. 나는 믿는다오. 그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더딜지라도 오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오.” 이 노래가 만들어진 곳은 놀랍게도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장 많이 죽인 공포의 아우슈비츠수용소입니다. 이 곡을 만들어 부른 사람들은 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붙잡고 힘겨운 순간을 견디어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절망의 순간을 맞이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해결하시고 역사하실 것을 기다리며 주를 우러러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여기의 ‘기다리나이다’는 원어로 ‘키우위티’인데 ‘주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주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다윗의 모습은 불의한 세상에서 갖추어야 할 신앙인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환난에 처하였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도 구원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구원자로 여기고 의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일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여 살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적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을 종일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구원자로 삼고 기다려야 합니다.
1861년 2월 11일 미국의 스프링필드에 비가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기차 정거장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키가 유달리 큰 사람이 기차의 맨뒷 칸에 서서 사람들에게 연설합니다. “나는 이곳을 떠납니다. 언제 돌아오게 될는지, 과연 돌아올 수 있는지 그것도 알지 못한 채 초대 대통령 워싱턴에게 맡겨졌던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을 앞에 놓고 갑니다. 그를 돌보아 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나는 성공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 있다면 실패할 리 없습니다. 나와 함께 계시고, 또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어디서나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일이 다 잘되어 가기를 믿는 마음으로 희망을 가집시다. 내가 여러분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듯 여러분의 기도 속에서 나를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라면서 작별을 고합니다.” 연설의 주인공은 40%밖에 되지 않는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믿음으로 험난한 대통령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들고 고통스럽습니까? 하나님을 우러러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도 주를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부디 흔들림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주를 우러러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실 소망을 바라며 주를 우러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며 오직 주를 우러러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눈이 항상 주를 앙망함은
시 25:14-15 / 창골산카페
- 아담아래 모든 인생들은 주를 떠나 죽어 마땅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주를 경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로 인하여 심판 받을 인생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여 그 아들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주의 사랑과 은혜를 알 때마다 자연스럽게 나타난 반응은 주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것은 주를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경외함이란 무엇일까요?
한량없이 베푸신 주의 사랑과 은혜로 인하여 나온 거룩한 두렵고 떨림을 말합니다
- 거룩한 두려움으로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보이시죠 곧 주가 친밀하게 만나 주십니다
우리가 주를 주로 인정하고 주만 높이고 살면 주께서 신임(信任)하여 주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친밀한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의 신임(信任)을 얻게 되면 주께서 주의 일을 맡기시죠
-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바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도록 만드시지요 그래서
주를 경외하는지를 시험하시고 주를 경외하면 더 주와 친밀한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주의 신임을 받는 단계에 이르면 주께서 주의 일을 맡기고 파송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신 자들을 훈련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는데 주께서 판단하는 기준은 주를 경외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 다윗은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예표하는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광야로 쫓기는 생활과 삶속에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다윗 스스로 나는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왜 내 삶에 어려움이 있을까라고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으로 부르심을 입었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훈련하는 과정이 필요하여 광야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 주를 경외하여 훈련이 통과되면 주의 친밀함 가운데 거하여 파송될 것을 안 다윗은 부르심과 다른 환경일지라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원망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부르신 주를 확신하면서 어려울수록 더 주를 인정하고 주를 신뢰하며 주를 기대하는 자리에 갔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광야 훈련을 통과하여 주의 신임을 얻으면 파송되지요 반드시 이런 훈련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다 훈련을 통과하여 부르심따라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를 경외하여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해 전심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광야 시험을 하신 것은 그 마음이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부르심 안에서 주를 주로 인정하고 항상 성령을 의식하며 주께 순종하고자 하는 중심을 보시기 위해 주의 부르심 받은 자들을 광야로 내보내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주를 경외하는지를 시험하시고자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지요. 아브라함은 다 이해되지 아니한 상황이지만 주의 말씀을 순종하여 주의 말씀따라 제단을 쌓고 불을 피우며 번제로 이삭을 드리기 위해 이삭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기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 주를 주로 인정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자로 행하므로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주와 친밀하게 된 순간입니다
- 창22:10~12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 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우리가 진실로 한 마음으로 주를 경외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주가 보이신 뜻을 보지 못하고, 변함없이 사랑하여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우리를 향한 주의 계획과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진실로 주를 사랑하고 경외하였으므로 목숨의 위협함속에서도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문이 열리게 됨을 보게 되었지요
- 창22: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아브라함이 부르심 받았을 때 주가 하신 말씀따라 주를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중심을 받으시고 주께서 반드시 약속의 말씀을 이루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신임장을 받는 모습입니다 주의 언약을 경외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도 항상 아버지를 경외하여 엎드려 아버지의 뜻을 보고 본대로 행하셨고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대로 말씀하셨습니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 항상 주를 경외할 수 있는 것은 내 눈이 주님께 고정되고 내 맘이 주께 가 있어야 합니다 곧 주를 앙망해야 하지요
항상 주를 경외하고 있으면 영혼을 매고 있는 그물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곧 죽을 고비를 만나나 죽지 아니하고 망할 고비를 만나나 망하지 아니하게 됩니다
- 다윗처럼 두려움속에 있었던 자는 없습니다 삼천명의 군대가 에워싸 자기를 죽이려고 찾을 때 이 두려움은 말로 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를 앙망했더니 발에 걸린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우리 눈이 여호와를 앙망해야 합니다 곧 주를 경외해야 하죠
우리 인생들의 모든 문제 해결은 내 눈이 항상 주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만 사랑하고 주만 따라가면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영혼의 소원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시 25:1) / 김남준목사
I. 본문해설
시편 25편은 다윗의 시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탄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를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안팎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짧은 25편 1절을 통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I. “여호와”-언약의 하나님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함에 대해 크게 세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 여호와, 주님’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주가 되시고 통치주, 주재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곧, 엘로힘이란 단어는 모든 신들 위에 ,모든 사물들 위해 뛰어난 능력을 가지신 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백성에게까지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본명이고 가장 거룩한 이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 자체를 부르지 않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모세 시대에 계시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시면서, 이 이름을 백성들에게 처음 계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성함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 관계를 기초로 하여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입니다. 이 시인은 안팎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고통을 받으면서 가정 먼저 생각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며, 자신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상기했습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불순종하고 주님을 배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완전하고 거룩하시며 진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와 맺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신앙은 이렇게 우리의 관점을 요동하는 자신에게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 한분만을 앙망하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시간 속에서 작정들을 실현해 가십니다. 우리 보기에는 우연한 사건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우리와 맺은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에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어려움에 처했을 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언약을 붙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연히 걸어가는 인생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이끌고 오신 발자취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깊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II. 신앙의 본질: 하나님을 우러름
시인은 언약의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A. “나의 영혼”
시인은 먼저 ‘나의 영혼’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표현은 시인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으로 주님을 찾을 때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자아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육체가 아닌 영혼 때문에 우리는 자아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통로입니다. 영혼은 히브리어로 ‘네피쉬’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영이 우리의 마음에 자각되어 영혼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감각을 통해 이 세상의 사물들을 느끼는 작용을 하는 처소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인간의 마음 깊은 근원적인 처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하나님과의 교통은 증진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합니다. 영혼의 상태가 맑고 건강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잘 깨달아지고,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도 아름답게 올려집니다. 그래서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의 가치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하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그 의무를 다하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불결한 영혼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정결하게 되고 성령을 통해 쇄신됩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깨끗한 영혼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 영혼으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B. “주를”
두 번째는 영혼으로 주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만유의 주재, 통치자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주님의 덕을 입어 창조되었고, 그분이 붙들고 계심으로 존재가 지탱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자신의 생명을 지탱하고 계시는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내려놓고 정욕에 가득 찬 옛 삶을 버려 버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고 영광을 돌려 자신도 만족을 누리며 사는 지복의 삶이 우리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인 삼으려고 할 때마다 그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 결과는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 자기를 버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은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C. “우러러 바라봄”
세 번째는 우러러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인간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필요를 채우시며 나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기억하며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배와 간절한 소망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고 행복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는 경배와 소망에서 미끄러질 때, 때로는 우리를 가난하게 하심으로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좋은 것이 그 분에게서 나기 때문에 의존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시련과 어려움이 올 때마다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병든 영혼을 고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고 삶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그 분께 두는 것,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IV. 결론: 영혼의 소원
시인이 안팎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고통에서 고요히 자신의 영혼으로 주를 우러러 앙망하면서 위로와 소망을 얻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이런 의존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서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르나이다
시편 25 / 이종철목사
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맞춘 노래이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알렙, 벧트, 깃멜 순으로 나가는데 총 22글자이다. 1절은 알렙으로 시작하고, 2절은 벧트로 시작하는 식으로 22절까지 이른다. 이 시는 원수, 죄악, 환난 등이 등장하는 탄식시이면서 이를 기도화한 개인기도시이다. 주어는 1인칭 ‘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시는 개인 기도만이 아니다. 시인이 당하고 있는 환난과 소망은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환난과 소망이기도 하다. 철저히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만 그의 탄식과 기도는 전 이스라엘의 탄식과 기도를 대변하고 있다. 이 점은 22절의 기도가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로 마치고 있다는 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시를 알파벳 순으로 배치하였다는 것은 이미 탄식을 승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슬픔을 극복하고 있다 할 것이다. 슬픔이나 탄식을 노래로 만드는 순간 더 이상 슬픔은 슬픔이 아니고 탄식은 탄식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고난 많은 민족도 없었다. 이런 이들을 위로했던 것은 이런 시편과 같은 노래들이었다. 그들은 시편을 부르며 스스로 마음을 위로하고 아픔을 달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편들 중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탄식과 기도, 하소연으로 끝나는 것이 많다. 시편 25편도 그렇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란에서 끌어내소서”(16,17) 이만큼 탄식하며 기도했으면 하나님의 응답이 와야 한다. 그래서 그 마지막을 ‘내가 주께 감사하오리니’ 하며 끝을 맺어야 한다. 그래야 시가 완성이 되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절인 22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아직도 응답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여전히 투쟁중이다. 그래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시편과 같은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투쟁 중에 필요한 것은 노래이다. 노래가 우리 심령에 쌓인 울분들을 녹인다. 노래를 부르며 우리는 고난의 한 배를 탄 동지임을 느낀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지친 어깨를 다독인다. 우리 신앙의 어머니들이 그랬다. 생활고로 남편의 학대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들은 주의 성전을 찾았다. 그곳에서 울며불며 신세한탄하며 주님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손뼉치며 한바탕 찬양을 부르고 나면 모든 답답했던 것들이 금새 사라지고 기쁨만이 가득하였다. 성전을 나올 때는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새 힘과 소망으로 충만하였다. 이것이 찬양의 힘이다. 이것이 시의 위대함이다.
1-3절에서 탄식의 주된 모티프는 ‘수치’이다. 인간은 수치심을 안고 살 수 없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후 가장 먼저 들어왔던 죄의 결과는 수치심이었다. 서로가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하여 무화과로 허물을 가리었다. 이처럼 인간 죄의식의 가장 밑바닥에는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수치심을 느낄 때 심할 경우 자살을 하기도 한다. 시인은 “내가 주를 의뢰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나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2-3, 20)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은 우리 머리를 들게 해주시는 분이시다(시3:3)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재를 뒤집어 쓸 정도로 겸비해야 하지만 사람 앞에서는 당당해야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원수를 꺾으시거나 상황을 변화시켜 우리 머리를 높이 들게 하신다. 즉각적인 응답이 오지 않을지라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구원의 확신을 주심으로 우리 마음이 굴복하지 않도록 만드신다.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면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수치심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는 더 악화 된 상황에 몰리고 만다. 결국 대인기피증에 걸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던지 심할 경우 자살에 이른다.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곤고한 처지에 몰리게 되면 누구든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생각하니 과거에 지었던 잘못과 죄악들이 떠올라 자기를 괴롭힌다. 자기 지은 죄 때문에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의 죄까지 떠올라 자기를 괴롭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7). 우리가 붙잡을 것은 주의 인자하심뿐이다. 주님은 우리 모든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던져버리시며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주님께 모든 죄를 고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그 은밀한 것들을 내어놓지 않는다는 데 있다. 스스로 해결하려다 괴로움만 더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11) 시인은 과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악을 고한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도 잊지 않고 들추어내지만 하나님은 아무리 중대한 죄라도 사하시고 덮으시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유다가 저질렀던 중대한 죄는 이것이 아니었다. 더 큰 죄는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인자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유다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양심만 바라보다 자살을 택했다. 결코 우리 양심은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베드로도 유다 못지않은 죄를 범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는 배교라 하여 엄청난 중죄에 해당했다. 베드로가 그런 중죄를 범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죄와 연약함을 안고 주님께 나아갔다. 베드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잘못은 죄를 저질렀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을 고백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죄를 저지른다. 이 모든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 앞으로 나아가는 자만이 양심의 질책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자유함을 받은 자는 이제 말씀 안에 굳건히 거함으로 양심의 책망을 받지 않는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4-5) 고난의 때에는 절망하여 방만한 인생을 살기 쉽다. 그러면 고난의 시간만 더 길어질 뿐이다. 시인의 위대함은 이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히려 주님의 교훈에 더 전념하였다는 점이다. 어려울 때는 기본기로 돌아가야 한다. 자기 생활을 정리하고 단순하게 만들 것,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집중할 것. 이 길만이 우리를 고난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게 하며 또 고난을 통해서 큰 유익을 얻게 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이처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을 보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12,1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첫째 그가 선택하고 가야 할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다는 것이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그 평생이 평안한 복을 누리게 된다. 그 복은 그 자손에게도 미쳐 땅을 차지하는 부요함의 복이 대대에 이르게 된다.
다윗의 기도
시 25:1-10 / 지성래목사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왕국 시대에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과 전쟁이 끊임이 없었다. 이는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 국가와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셨다.
사무엘 하 8장에 보면 다윗은 왕이 된 후에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또한 모압의 군대도 쳐부수었다. 소바 왕 하닷에셀을 지원하려고 왔던 다메섹의 시리아 군대 22,000명도 섬멸하였다. 다윗은 시리아의 다메섹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그들 나라로부터 정기적으로 조공을 받았다. 다윗은 소바 왕 하닷에셀의 신하들이 들고 다니던 금 방패를 모조리 빼앗았고 많은 양의 청동을 빼앗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 사무엘 하 8장을 읽다 보면 6절 끝에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말씀을 접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다윗이 전쟁에 능하고, 다윗의 전략이 뛰어나고, 다윗의 군대가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왕으로 있을 그 당시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변 나라들을 이기게 해 주신 것이다.
그런 다윗이었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 한편에서는 항상 떠나지 않는 불안이 있었다. 오늘 시편 25편을 다 읽지는 않았다. 그러나 16절 이하의 말씀을 먼저 보면 그의 마음에는 외로움과 괴로움이 있었다. 그의 마음에 근심이 많았다. 그의 마음 속은 곤고했고 주변에는 환난이 끊임이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지내야만 했다. 16절에 보면 “주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17절에서는 “나를 고난에서 끌어 내소서.” 18절에서는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20절에서는 “나를 구원하소서.”마지막 절인 22절에서는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라고 말이다.
비탄시(悲歎詩)로 구분되는 이 시편 25편은 다윗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쓴 시편인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다윗이 왕으로 있던 그 어느 때에 고백한 기도이며 간구임이 분명하다.
1절로 돌아가 보자.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다윗이 고백하는 표현인 ‘나의 영혼’이란 그 ‘영혼’은 ‘네페쉬’라고 하는데 이는 생명(生命)을 말한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천국과 영원을 믿지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오늘, 지금 내 목숨이 붙어 있고 내 생명이 보존되어 있는 그 여건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드리는 것이다.“우러러 본다”는 것은 “고개를 쳐들고 위를 바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새벽마다 사순절 새벽 기도회로 모인다. 어제 토요일 새벽에는 본당이 가득하게 모여서 기도하였다. 지난해 2월 이후로 일 년 만에 본당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어른과 아이 함께 모여 기도한 시간이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새벽에 빈 예배당에서 눈을 뜨고 높이 달린 십자가를 바라 보며 기도할 때가 있다. 눈을 감고 기도할 수도 있지만 캄캄한 예배당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높게 매어 달린 십자가를 쳐도 보며, 바라다 보며 기도할 때가 있다. 물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신 주님이 아니시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 무덤 속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난 당하신 예수님, 영문 밖으로 끌려 나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찬양한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 하늘도 산과 들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빛을 잃고 캄캄하게 되었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도 끝 없도다 오 주님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조용기 작사 김성혜 작곡의 “얼마나 아프셨나”라는 614장 찬송의 일부이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외롭고 괴로울 때가 없지 않았다. 다윗은 전쟁마다 싸워 이기는 강성한 나라의 임금이었지만 그의 마음에 근심이 많았다. 다윗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왕이었지만 그의 마음에 쌓이는 곤고와 그의 주변에 끊임이 없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다윗은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심령의 고통과 나라 안팎으로 끊임 없이 계속되는 환난의 원인을 자기의 깊은 내면에 있는 죄의 문제에서 대답을 찾고 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8번째 아들, 막내로 태어나 자라던 어린 시절부터 기도하는 법을 알았다. 다윗은 어려서도 기도했고 소년기에도 기도하였다. “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 간다”고 소리치며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무서워하지 않고 물매 용 돌맹이 다섯 개를 들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던 소년 다윗에게 이미 그런 믿음과 그런 기도 생활의 충만함이 있었다.
다윗의 하나님 신앙은 결코 막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2절에서도 보면 이렇게 고배하고 있지 않나.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습니다.”
1절에서는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봅니다.”
3절과 21절에서는 “주를 바랍니다.”, “내가 주를 바랍니다.”
5절 끝에서는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립니다.”
15절에서는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봅니다.”라고 말한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늘 가득하였다.
다윗의 그 많은 시편의 구석 구석을 보면 다윗은 참으로 깊고 넓고 높고 끊임이 없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오늘 읽은 본문의 분량에 담긴 기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길 원한다.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2, 3, 20)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전쟁이란 것이 이겼을 때에 전쟁이지 지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전쟁이란 것은 이겨도 불안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맞은 자는 다리 뻣고 자도 때린 자는 움크리고 잔다”는 속담이 있다. 다윗은 그가 임금으로 있던 당시에 수 많은 전쟁에서 이기고 또 이겼다. 아니, 이겼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기게 해 주셨다. 어떻게 알수 있나. 사무엘 하 5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의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라고 하였다.
다윗은 삽십살에 왕위에 올랐다. 나라가 안정되었다. 주변 나라들 중에서 다윗의 이스라엘을 이기는 나라가 없었다. 왕궁도 잘 지었다. 사울 왕 때에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도 다시 찾아 왔다. 그러나 다윗 당시에도 하나님의 법궤는 성막 안에 모셔져 있었다. 다윗 당시의 하나님의 집은 대리석으로 짓고 백향목을 지은 성전이 아니었다. 그래서 늘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집을 잘 지어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어느 날 나단 선지자를 만나서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의 자손들을 크게 축복하시겠다고 하셨다. 다음 날 나단 선지자는 이 내용을 그대로 다윗 왕에게 전달하였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내용을 선지자 나단에게서 전해 들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 들어가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사무엘 하 7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윗은 감사해하고 감격해 하며 기도하였다. “하나님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 7:26, 29)
그런 다윗이 지금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 나의 원수들 앞에서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해 주십시오.”2절과 3절에서 같은 내용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한다” 3절에 보면 다윗에게는 이와 같은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20절에 보니까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사람이 어떤 경우에 부끄러운 일을 겪게 되고 수치를 당하게 되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부르심을 망각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에 붙잡히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되는 법이다. 다윗은 기도하는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 날 때에 전쟁 중에 부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취하였다. 부하 우리아 장군을 전쟁 일선에 배치해서 죽임 당하게 하였다.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이는 다윗의 생애에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끝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 연약한 다윗을 하나님이 붙들어 쓰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매 순간 드리고 또 드려야 하는 기도이다. 왕이라도 거짓되면 부끄러워지고, 죄악을 범하면 부끄러워지는 법이다. 잠언 22장 1절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잠언 24장 1절에는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도 하지 말지어다”라고 교훈하였다.
사람이 언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나. 진실해야 하는데 거짓되면, 의로워야 하는데 불의한 편에 서면, 선으로 악을 이기지 못하면 언제라도 부끄러워지고 만다. 이는 왕이든 평민이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과 이웃에게 대하여 진실하고 성실하고 거룩한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교훈하소서
여기서 접하는 도, 길, 진리는 다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각기 달리 표현 한 것 뿐이다. 땅에도 길이 있고 바다에도 길이 있고 하늘에도 길이 있다. 자동차는 차도로, 기차는 철로 위를 달려야 한다. 방향도 지켜야 하고 속도로 지켜야 한다. 자동차는 차도로 사람은 인도로 다녀야 한다. 배가 넓은 바다라고 해서 아무데로나 다니지 않는다. 하늘에 비행기도 아무 하늘로나 날아가며 격추되고 만다. 바다와 하늘에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 국제법이 허용한 뱃길과 항공로가 있다. 산 짐승도 즐겨 다니는 길이 있다.
사람이 사람다운 길에서 벗어나면 탈선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길에서 벗어나서 탈선한 인생은 죄를 범하고 타락하게 되고 만다. 요즘과 같은 세상에는 오프라인 언 라인 다 마찬가지이다. 북한의 해커들이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 기술을 탈취하기 위해 미국 제약사인 화이자를 해킹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국제적으로 부끄러운 사건이다. 뭐 이런 예는 국가간에, 지도자들 간에, 기업 간에, 개인 간에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넘어 질까 조심하며 살아가야 한다. “나의 하나님이야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이 기도를 끊임 없이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교훈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소서.
우리는 대개 하나님이 나의 그 무엇을 잊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6절과 7절에 보면 두 가지 내용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소서”
“여호와여 영원하신 주의 긍휼과 인자로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소서”
“주의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소서”
이런 기도의 내용들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솔직하고 진솔한 기도의 사람이었나를 알게 해주는 기도의 내용들이다. 다윗은 자신이 그 동안 살아 온 자신의 지난 날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으니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와 자비와 사랑과 선하심을 따라 자신의 지내온 날들의 죄와 악을 용서해 주시고 잊어 버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우리는 다윗의 시편 51편을 기억한다. 거기 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와 은혜와 많은 긍휼을 따라서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고 간구하고 있다. 시편 51편 2절에 보니까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7절에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9절에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고 간구 하고 있다.
그런 다윗이 시편 25편에서 드리는 기도는 무엇인가.
뭘 기억해 달라는 것인가. 11절에 보면 그 대답이 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이것이 무슨 기도인가. 주의 이름의 권세로 내 모든 죄악을 사해 주시고 이제는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기억해 달라는 간구이다. 주의 긍휼과 인자와 자비와 선하심을 따라 죄 사함 받고 거듭나고 새 사람이 된 하나님의 사랑 받을 만한 아들딸의 모습으로 기억해 달라는 기도인 것이다.
맞다. 사순절은 그런 묵상과 그런 기도의 은혜를 깨달아 가는 기간이다. 15절에 보니까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는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면 그 발을 죄와 악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런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15절의“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이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밤낮 없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 보는 삶을 지속적으로 계속해 나가야만 한다.
나의 장모(丈母)는 92세신데 이번 4월경에 신구약을 일곱 번째 쓰게 되신다고 한다. 다섯 자녀 뿐만 아니라 일곱 손자녀까지 한 권씩 유산처럼 선물로 주시려면 아직도 다섯 권은 더 쓰셔야 할 것이다. 손마디가 관절염으로 다 휘도록 새벽부터 기도하고 성경 쓰고 300구절 이상이 성경을 줄줄 외우신다. 복되다. 6. 25 전쟁 중에 피난 오셔서 맨 손으로 신학교 공부하고 1. 4후퇴 때 혈혈 단신 피난 와서 목사가 된 남편 만나 그의 아내 되어 목사 사위, 선교사 사위 맞고 후손들이 나라 안팎에서 하나님 잘 믿는 가정 이루었으니 그게 복이지 않나. 꼭 왕이어야 복인가. 꼭 왕비여야 복인가. 꼭 좌의정 우의정이어야만 하고 꼭 별을 달아야 하고 꼭 정상에만 서야 하고 꼭 거부여야 만 하나. 다윗은 왕이었기 때문에 기도한 것인가. 아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시골 목동 시절부터 그 싹이 달랐다. 다윗은 평생 기도의 사람이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늘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다.
베드로전서 2장 9-10절에 보면 분명히 말씀하셨다.
주를 믿는 우리는 주 안에서,
택함 받은 족속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다.
거룩한 나라이다.
여호와의 소유가 된 백성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두운 데서 불러 내셨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한 없는 긍휼을 얻은 자 되게 하셨다.
미래를 위한 가르침
시 25:1-12 / 안양준목사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내일의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회는 어떻게 바뀌어 갈 것인가? 걱정과 근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학자들이 미래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서점에서도 미래에 대한 서적이 많이 출판되고 잘 팔리는 책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앨빈 토플러라는 사람이 제3의 물결; 권력의 이동이라는 책을 통하여 현시대는 일찍이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겪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인류는 미래 쇼크에 당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빠른 에레베이터를 타면 방향감각을 잃고 어지러움을 경험하듯이 빠른 변화의 시대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면 방향감각을 잃고 충격을 받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하여 사회학자들만의 고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서울에서 교육목회라는 세미나가 있어서 참석했습니다. 거기서 첫번 강의로 은준관 박사님에 대하여 강의를 듣는 중 이와 같은 기독교인들의 고민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1985년도 미국에서 기독교 학자들이 모여서 미국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의논을 하였습니다. 미국교회는 1940년부터 60년대까지 2억의 인구 중 25%가 개신교인이 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60년대서 70년대로 들어 서면서 10년마다(100만명씩 교회를 떠나갔다고 합니다. 더 좋은 시설, 더 훌륭한 수양관, 더 풍부한 물자들이 있는데도 교회는 감소를 거듭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국내에 있는 교회 중에 부흥하고 있는 교회를 찾아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지역에 특징이 있는 교회를 발견했고 그 교회를 사례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미국 덴버시에는 2차 대전이 발생하자 서부에 있던 일본인들을 강제로 황야와 같은 덴버로 이주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이를 악물고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살았는데 그들을 위하여 4개의 일본인 교회가 세워 졌습니다.
그 중에서 3개 교회는 사라지고 오직 한 교회 만이 남아 있는데 교인의 구성이 1세 교인이 60명, 1세 반에서 2세 교인이 500명 이 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후세들이 교회를 지키고 남아 있었을까? 조사한 결과 그 교회의 목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마음껏 놀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떠한 자리에서도 선생님들과 교육을 최우선으로 여겨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3교회는 한풀이 신앙만 간직하고, 모이면 울며불며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서, 자기들의 신앙을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교회를 이끌어 갔다고 합니다.
결국 미래를 대비한 교회는 계속 하나님의 구속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으나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교회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제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앞으로 50년 후에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 누가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입니까? 성경은 인생이 강건하면 70이요 80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나이에 50살을 더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와 여러분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없는 이 자리에 누가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또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에 얼마나 출석하고 있습니까? 우리 유, 초, 소년부를 합해야 약 20명 정도입니다. 나머지 어린이들은 신앙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그들이 나중에 교회를 지키며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미래를 대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후에는 우리교회라는 이름은 과거에 있었던 교회, 추억의 한 부분에 있는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합니까?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ꡒ세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ꡓ 여러분들은 모두가 버릇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버릇은 어려서 형성되어 오늘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역으로 좋은 버릇을 심어 주면 그것은 여든살이 되어도 바꾸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어려서 마땅히 행해야 할 신앙의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 신앙의 교육은 영원히 그들의 가슴에 살아서 우리가 죽어 없어도 그들이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명심보감에도 ; 자손에게 황금이 가득 찬 상자를 물려준다 해도 자손에게 경전 하나를 가르침만 못하고, 자식에게 천금을 물려준다 해도 한가지 재주를 가르침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금상자 보다 경전 하나를 가르치는 것이 더 더욱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천금보다 교육을 통한 삶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백번 낫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귀한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되어져 갑니다. 신앙은 차선이고 황금이 우선이요, 신앙의 삶은 뒤고 천금을 위한 수단과 목적이 최우선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 새겨 보아 더 중요한 일들을 가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지은 시편으로 기도의 시입니다. 다윗이 삶을 살면서 여러 가지 원수도 만나고, 어렵기도 하며, 힘든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나를 가르쳐 주십시요;라고 기도합니다. 말씀 중 특히 4~6절까지의 3절의 말씀중 가르침, 교훈이라는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간절한 교육이 그에게 꼭 필요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없이는 안되겠기에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가르쳐주시고, 교훈하시며, 지도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낀 것이지만 세상이 가면 갈수록 더욱 악해지면 악해졌지 나은 세상은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윗의 시대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좋은 세상은 아닐 것입니다. 더욱 험하여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회요, 더욱 무고히 속이는 자들이 난무하고, 빠른 변화의 속에서 갈길을 모르고 방황하는 세대입니다.
이러한 세대를 사는 우리들, 아니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의 기도처럼 그 어느 때보다 가르침과 교훈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도 마 28:20에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부탁 하셨습니다. 네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신 6:7 ;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는 말씀처럼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잠시도 쉬거나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습니다. 신 11:19에 그것을 너희 자녀에게 가르치며 그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났을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무엇보다도 교육의 우선 순위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은 교회의 부흥의 장입니다. 그런데 이 부흥의 열쇠가 2장 42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행동하였기에 믿는 자의 수가 더해 갔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5절에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주의 말씀을 가르침에ꡓ 결국 이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이 아닌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먼저 들었고,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 선교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미래의 교회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분명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교육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부지런히 주의 도를, 주의 진리를, 주의 길을 가르칩시다. 가장 우선 순위로 교육을 시킵시다. 그래서 겔 44:23의 말씀처럼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라;는 말씀을 따라서 어려서 우리의 교육으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가정에서 교사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교회의 미래가 여러분의 손에 달렸다는 막중한 사명감으로 가르침에 전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교육은 교사 혼자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교회와 성도와 교사의 삼박자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먼저 교회는 교육의 환경과 조건을 잘 마련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산이 부족하여, 교실이 없어서, 자료가 부족하여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들을 독려하여 교회로 보내주며, 말씀을 배운 것을 바로 실천하도록 집에서 반복적으로 훈련 시켜야 합니다. 아울러 교회학교 교사와 자주 연락을 취하여 자녀의 상태를 파악하며 교사를 위하여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임감 있게 훈련시켜야 합니다. 눈물의 기도와 말씀준비, 자료준비, 학생들과 친분관계를 잘 맺어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일의 주님의 뜻이 멈추지 않고 진행되어져 교회의 사명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시 25:1-22 / 김태환목사
오늘 요절 말씀은 12절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을 가르쳐 주신다고 합니다. 개역성경에는 그 택할 길을 저에게게 가르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는 같은 말씀이지만 점 뉘앙스가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를 위해 선택한 길 안에서 그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NLT 성경에는 같은 말씀이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꼭 선택해야 할 길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린 아이 때부터 나이 많아 늙을 때까지, 크고 작은 결정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정 하나 하나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렇게 결정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결정하면 저렇게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 때 누군가 옆에서 충고를 해 주거나 도와 준다면, 정말 우리 인생 길이 걷기가 쉬울 것입니다. 문제는 잘못된 충고를 받거나 조언을 받는 것입니다.
길을 물어 볼 때도 그렇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텐데,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가르쳐 주면 얼마나 고생합니까? 제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아서 누구에게 길을 물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여긴 길이 복잡하니까 자기가 거기까지 함께 가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같이 갔습니다.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그 사람이 목적지까지 저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정말 인생 길에서 그런 사람만 만난다면 어려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려운 결정의 순간마다 옆에서 분명한 말씀을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지난 번에 읽었던 이사야 30:21 말씀도 그렇습니다. “너희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잘못된 길로 가려 하면 뒤에서 ‘이 길이 옳은 길이니 이 길로 가거라’ 하는 소리가 너희 귀에 들릴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했지만, 그래서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는 운명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렇게 바른 길을 알려 주실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냐 못 듣느냐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요절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며 따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그에게 가장 좋은 길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며 따르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바른 길(개역 성경에는 정로(正路)로 나와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따라 삽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삽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판단을 전적으로 옳다고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욥의 말처럼(욥기 42:5) 이제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제 오늘 읽은 시편 25편에 “하나님께 자신을 인도하여 달라고 다윗이 쓴 기도, 다윗이 쓴 시”라고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한 절 한 절 속에 하나님의 인도를 간구하는 다윗의 간절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누구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까닭 없이 함부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길을 보여 주시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소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이 시편을 책상 머리에서 쓰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 자신의 인생의 고백이었습니다. 7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지었던 죄들과 주님께 반항했던 잘못들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기억해 주시기 원합니다. 오 주님, 주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한 때 다윗이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때를 “내가 어렸을 때”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미성숙한 때입니다. 생각에도, 판단에도 실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기 힘든 때입니다.
아마도 다윗이 우리아와 밧세바 일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은 정말 다윗의 생에서 지울 수 없는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다윗이 어렸을 때입니다. 이제는 신앙적으로 그 때보다 많이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렸을 때와 같지 않습니다. 전에는 자기의 판단을 따랐지만 이제는 자기의 판단을 전적으로 옳다고 믿지 않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자기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왔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묵상 하면서 다윗의 생애가 정말 그런가 하고 그의 생애를 죽 훓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진 에드워드가 쓴 다윗에 대한 탁월한 책 “세 왕 이야기(Tale of Three Kings)”를 읽었던 감동이 살아 났습니다. 사울과 다윗과 압살롬에 대한 아주 얇은 책인데, 한 번 꼭 읽어 보십시오. 그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제 마음에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다윗이 저질렀던 밧세바와의 불륜은 정말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이제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크게 성장한 다윗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용서의 강물이 흘러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옮겨온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4-5절 말씀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길을 보여 주시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소서. 주의 진리를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소서.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종일토록 주님을 믿고 바라봅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은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면 뭘 합니까? 그 길을 보여 주어도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고 기도하면서도 막상 그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윗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주의 길을 보여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 놓고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자기 판단을 앞세우는 일을 다윗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정말 그렇지 않았거든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윗은 하나님을 정말 인격적으로 경험했던 사람이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주님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다윗의 고백 속에서 그런 생각을 더욱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께 정말 인생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그의 삶을 지키는 보루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그는 수많은 삶의 유혹들을 이겨냈으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그는 용서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순절이 여러분 개인 개인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살아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바른 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밤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별이 빛나는 것처럼, 이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바른 길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련의 때엔
시 25:1-7 / 김태환목사
고린도후서 11:23-28
이 말씀은 누구의 말인지 아십니까? 우리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는 사도인 바울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한마디로 고난 받은 삶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바울의 생애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생애였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4:22) 또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비 그리스도인들이나 모두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는 힘들어 합니다. 영적으로 침체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왜 이런 어려운 일이 닥치는가 하면서 회의에 빠집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 받고 어려운 문제 없이 걱정 없이 산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의 생애는 어떻습니까? 오늘 읽은 시편 25편 말씀은 어려움에 처한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까?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2절)”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다윗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숨겼다고 나중에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부정한 일에 개입되고, 옳은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그러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마태복음 27:41-42).”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고개를 흔들며 지나갔습니다(마태복음 27:39, 마가복음 15:29).
크리스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이 있으면 당신은 왜 이렇게 못하는데? 하나님이 있으면 왜 당신은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이지?”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다윗이 어떤 부끄러움을 당했는지 그 내용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 크게 부끄러움을 당한 것은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2절 끝에는 “원수들이 내 앞에서 으스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까닭없이 함부로 배신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원수들로부터 하나님을 배신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도 당하고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개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가 아니고서는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 없다. 심지어 너희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라. 너희는 참새 여러 마리보다 훨씬 더 귀하다.” (마태복음 10:29-31)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베드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면서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베드로전서 5:7)”라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8:34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또 로마서 8:38 정말 위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39에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의 말씀들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이렇게 엄청난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장차 먼 훗날에 이루어지는 그런 약속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지켜지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신실하게 믿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이 약속은 이미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려움과 시련과 고난이 따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 어려움을 충분히 이겨나가도록, 충분히 고난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셔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때에 시험을 견디고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is faithful. He will not allow the temptation to be more than you can stand.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show you a way out so that you can endure.”
이 말씀을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할 때도,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도, 우리가 낙심할 때도, 우리가 빠져 나갈 수 있는 “a way out”을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그 길만 우리가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참 신나는 말씀 아닙니까? 미로 찾기 놀이를 해 보셨습니까? 이리 가면 막혀서 더 못 갑니다. 저리 가면 잘 뚫려 있는 것 같은데 또 조금 가다가 길이 막힙니다. 그러면 또 다른 길로 돌아가면…….나가는 길이 당장에 보이지 않아서 고생은 좀 하지만 결국은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게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 길이 보이지 않아서 좀 힘들기도 하고, 고생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그 길을 찾게 됩니다. 이런 사실만 알아도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내 삶이 사방이 꽉 막힌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길만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시편 25편 말씀으로 돌아가서 부끄러움 당하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있는 다윗이 하나님께 어떻게, 뭐라고 기도하는지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길을 보여 주시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소서. 진리를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소서.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종일토록 주님을 믿고 바라봅니다.” (4-5절) 예. 참 아름답고 귀한 말씀이네요. “Show me your ways, O LORD, teach me your paths; guide me in your truth and teach me, for you are God my Savior, and my hope is in you all day long.” 그러므로, 여러분도 앞이 깜깜하고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면 보여 주십니까? 예. 반드시 보여 주십니다. 다윗의 기도 속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God of salvation)”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의 자녀들이 절망 속에서, 문제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길을 찾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길을 보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종일 소망을 두고 그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응답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개인적인 계시를 통해서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성경공부를 통해서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좋은 신앙의 친구들을 통해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응답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이 때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예로부터 한결같으신 주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잊지 마소서. 내가 어렸을 때 지었던 죄들과 주님께 반항했던 잘못들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기억해 주시기 원합니다. 오 주님, 주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문득 자기 자신을 바라 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지은 죄가 생각납니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항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사랑으로 저를 기억해 주세요 주님은 좋으신 분입니다(Remember me in the light of your unfailing love, for you are merciful).”
어저께 아침에 기도의 결과 열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 중 다섯 번째가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하나님 앞에 간구하던 다윗이 갑자기 중고등부 때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unfailing love”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어려운 때에, 시련의 때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하고,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길을 찾기를 원하는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먼저 여러분의 간구를 드리기 전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자복하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여러분의 문제를 내려 놓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면서 기도하십시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시 25:8-10 / 이성희목사
두 주일 전 서울에서는 세계한인입양인대회라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해외로 입양된 입양아들 가운데 15개국에서 430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이번에 참석한 입양인 가운데 몇몇 성공사례가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미국에 입양된 스티븐 모리슨씨는 미국 우주항공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습니다. 그의 한국명은 최석춘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미국의 어느 가정에 입양되었고 훌륭하게 잘 자라서 성공한 입양아가 되었습니다. 그를 입양한 미국인 아버지도 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미국 어느 대학교의 부총장인데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에 그랬답니다. “내 생애 가장 위대한 결정은 하나님을 만난 것, 네 엄마를 만난 것, 그리고 널 입양한 것이란다.” 저는 이 신문을 읽으면서 큰 충격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말 눈물이 핑 돌고, 코끝이 찡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순간순간 결정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결정이 위대한 결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미 위대한 결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보면 내 생애 가장 다행한 일은 길을 아는 것, 진리를 만난 것,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까지는 ‘다락방 강화’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강화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의 산상보훈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산상보훈과 다락방 강화는 각각 3장씩입니다. 산상보훈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그리고 다락방 강화는 말기에 주신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은 그 말씀의 대상이 일반 무리들이었지만 다락방 강화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장소는 북방 갈릴리지방이었지만 다락방 강화는 남방 유다지방입니다. 산상보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말씀하지만 다락방 강화는 구원의 약속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위로와 애처로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곧 잡히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남겨두고 홀로 가는 스승의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다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는 날 친구들이 감옥에 찾아와 위로하였답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최후의 말을 던집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살러가고, 나는 죽으로 갑니다. 그러나 우리 둘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지는 오직 신만이 아십니다”. 철학자로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이상의 말씀으로 위로를 주십니다.
메시야가 주시는 그 이상의 중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가는 곳을 인도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비밀을 공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화에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 때 의심 많은 도마가 나서서 말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의심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알 리가 없지요. 도마는 목적지도, 길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목적지로 인도하는 길되심을 증거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증거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다”고 하십니다. 도로 표지판은 참 유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로 표지판이 아니라 도로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바로 그 길, “the way”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말에 “말씀”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는 “로고스”입니다. 이 단어는 오래 전에는 “도”(道)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은 “태초에 길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는 혼돈과 공허밖에 없었습니다. 혼돈과 공허이지만 그 가운데 길이 있었습니다.
여러 친구들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긴 직업이 무엇일까 하고 서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외과의사가 제일 먼저 생긴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든 것을 보면 의사가 최초의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친구는 설계사가 최초의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설계를 하였기에 설계사가 최초의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친구는 철학자가 최초의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공허의 개념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분명히 철학자가 만든 개념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다른 친구는 정치가가 최초의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혼돈하다고 했는데 혼돈은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정치가가 만들었습니다. 얘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길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지어지기 전에 이미 길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토목기사가 최초의 직업일까요? 예수님은 길 그 자체입니다.
공자는 “조문도 석사가야(朝聞道 夕死可也)”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행복의 길은 선행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길이 아니라 길을 들으려고 하였고, 길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길 자체이십니다. 세례요한은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기 위하여 온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도 길이 아니라 길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길 가운데 바른 길을 택하고 제대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길 가운데 한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어떤 청년이 군대에 갔다가 제대를 했어요. 군대에서 어디 근무했느냐고 물어보니 전차부대에서 근무했답니다. 어떤 부대냐고 물어보니 전차부대는 버스 전용차선 감시부대랍니다. 예수님은 전용차선입니다. 예수님 외에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유일차선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옛말에는 지혜로운 말이 많습니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고 합니다.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말은 다 조상의 슬기가 담겨 있습니다. 흔히 요즘에는 ‘오프로드’(off-road)라는 레저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길을 벗어나서 가는 것입니다. 길을 벗어나는 재미는 차를 타고 험한 길을 가는 레저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평생에 예수님을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길은 불과 구름 기둥이 길잡이였습니다. 길이 없는 곳이지만 불과 구름은 길을 만드는 길잡이였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위해 즉시에 만들어주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면 모든 곳은 길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모든 곳이 길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길은 예수님이 유일한 길입니다. 진리를 따라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은 진리의 길이며 이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천상병시인을 아시지요? 오래 전에 우리 교회에 나오신 분입니다. 그 분의 시 가운데 “귀천”이란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그분의 시 가운데 “바람에도 길이 있다”는 시가 있습니다. ‘바람에도 길이 있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 간다. 바람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 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사실은 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이 그 배후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지역을 정복하여 그 곳 사람들에게 헬라어라는 공용어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 뒤에 탁월한 도로망을 건설했습니다. 이 모든 인간의 작업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래 전 대만에 가서도 선교사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었기에 참 감사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큰 중국 대륙이 언어가 통일되었고, 구석구석까지 길을 닦아서 도로망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선교에 가장 필수적인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 도로망으로 길이신 주님은 지금도 힘차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통하여 진리를 만납니다.
예수님이신 그 길을 따라가면 진리를 만납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리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빌리도와 진리에 대하여 변론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8:37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내느니라”. 예수님의 진리에 대한 증거는 자신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때 빌라도가 묻습니다(요 18:38). “진리가 무엇이냐?” 빌리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빌라도가 진리를 모르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어떠한 개념이나 원칙이 아니라 한분의 인격체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아는 핵심과제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이것도 알고, 예수님을 모르면 이것도 모를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가 신이고 신이 진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참 지혜는 진리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합니다.
불교의 대의는 석가가 법을 깨달음으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는 법 그 자체는 아닙니다. 법을 깨달을 때 인간인 석가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깨달아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힌두교의 사원인데 웅장하고 신비한 곳입니다. 어떻게 그 당시에 이런 조각이 가능할까 하는 신비감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앙코르톰이나 앙코르왓에 가보면 뱀의 조각이 많습니다. 그들은 뱀을 신의 화살 혹은 무지개라고 생각했습니다. 뱀은 세상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도구로 여겼습니다. 앙코르톰의 입구에는 54신이 뱀을 잡고 있는 조각이 있습니다. 양쪽에 54신이 있으므로 합이 108신입니다. 108은 불교적 숫자이지요. 힌두 사원인 앙코르왓도 불교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어디에 가나 뱀 조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뱀이 하늘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뱀을 ‘나가’라고 합니다. 사실은 뱀이 길이 아니라 뱀이 나가야 길이 생기고, 진리를 만납니다. 뱀이 ‘나가’인데 나가지 않고 사원마다 틀고 앉았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길도 모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가장 추구하기 힘든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진리와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추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진리를 쉽게 합니다. 요한복음 8: 31-32에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진리는 자유케 하는 영입니다. 정말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리가 불편케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리가 번민케 하고 있습니까? 진리 때문에 불안하고 진리 때문에 불편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 성경의 말씀을 이렇게 패러디 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어색케 하리라”. 진리는 모르는 사람이나 역행하는 사람에게는 참 어색하고 불편하고 귀찮은 것입니다.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습니다. “모든 개미는 개밋둑을 쌓을 줄 알고, 모든 벌은 벌집을 만들 줄 안다. 그놈들은 우리 식이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그것을 체득한다. 오직 인간만이 사는 법을 모른다”. 어쩌면 인간만 진리를 모릅니다. 모든 생물은 자연법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대로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찬양이 됩니다. 물론 본능적이고 본체적인 영광이지만 영광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법도 알고, 진리도 알고 영광도 돌립니다.
마틴 루터는 ‘돈은 강하다. 왕은 더 강하다. 여자는 좀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가장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찬송에는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하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진리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이다”고 하십니다. 그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습니다. 요즘에는 생명 연장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생명 복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생명공학도 많이 발달하여 이제는 산업적으로 활용되어 생명 산업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생명을 생성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 자체이기에 생명을 치료하시고 연장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고 생명을 친히 부여하십니다. 생명 자체이시기에 스스로 얻고, 스스로 버리기도 하십니다. 요한복음 10:15에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0:18에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 있는 것 아니라 내 스스로 버리노라 나 버릴 권세 있고 다시 얻을 권세 있으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에 마음대로 얻고 버릴 수 있습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귀한 것입니다. 희대의 살인마라고 하는 유영철은 10개월 동안 21명이나 살해하고도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잡히지 않았으면 100명은 죽이려고 했다고 진술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네 사람의 인육도 먹었다고 했답니다. 그는 살인을 자신의 유희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자기 불만 해소의 도구로 살인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자기가 볼 때 다른 사람의 목숨은 파리 목숨같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누구에게나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25에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6:26에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십니다. 가장 귀한 것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 귀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로마의 한 원로가 자신의 집에 황제를 초대하였습니다. 온 집의 노예들이 바삐 황제를 맞을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한 노예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그 집의 가보로 내려오는 도자기를 건드려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이 원로는 자신의 신하에게 명하여 당장 그 노예를 연못에 집어넣으라고 합니다. 그 연못에는 악어가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떨고 있는 노예가 불쌍하여 황제는 원로에게 그 노예를 한번 용서해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로는 그것이 그 집의 엄격한 가율이기에 어쩔 수 없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노예들을 부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집의 또 다른 가보를 일부러 떨어트려 깨트렸습니다. 그리고 원로에게 그렇다면 나부터 연못에 넣으리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가율이지만 황제를 연못에 넣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원로는 노예를 용서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찮은 노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황제가 스스로 생명을 담보로 준 것입니다. 생명의 부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명을 버리심으로 참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빌레몬서라는 신약의 책은 오네시모라는 종이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했다가 바울을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되고 다시 자신의 주인에게 돌아갈 때에 바울이 주인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선처를 부탁하는 편지입니다. 당시에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돈을 훔쳤다는 것은 죽어야 마땅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바울도 빌레몬도 죽을 목숨을 용서하였습니다. 새로 생명을 얻은 오네시모가 복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그 다음부터 주인을 위하여 생명을 버려 충성했을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도 그런 생명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16:4에는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하여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만나고,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런 생명을 바치는 마음도 얼마든지 기꺼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생명의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얼마 전 신문에 화제가 된 소년이 있습니다. 이 소년은 길을 잃었다가 홀로 찾아온 초등학교 4학년인 정희재라는 어린이입니다. 이 아이는 아빠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아빠와 떨어져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침착하게 사흘 만에 길을 찾아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혼자서 이틀 밤을 지내고 비를 맞으면서도 아빠가 평소에 얘기해준 산에 대한 얘기를 침착하게 되새기며 돌아온 것입니다. 이 아이는 아빠가 해준 대로 길을 잃자 개울을 따라내려 갔습니다. 개울을 따라가면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깊은 산에서 길을 잃어도 물소리 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침착한 자세가 그를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길을 잃었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입니다. 유일한 진리입니다. 유일한 생명입니다. 길을 찾으면 진리가 보입니다. 진리를 발견하면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따로따로 찾고 얻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셋을 한분으로 말미암아 함께 찾고 얻습니다. 한분을 통해 셋을 동시에 얻은 것이 다행입니다. 주님을 통해 바른 길로, 진리로, 생명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꼭 붙잡고 우리의 길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하는 삶의 5대 축복
시편 25:11-22 / 이한규목사
<회개는 복된 삶의 시발점 >
지난주일 저녁에 중학교 때 의형제를 맺은 친구 4명을 만났습니다. 그때 서울 옥인동의 옛 집터를 가보자 거기는 길로 변해있었고 집 근처에 있던 옛날의 럭키 사장 집은 GS 리더십센터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맹아학교와 농아학교를 지나 청운초등학교로 가던 길을 걸으면서 50대 중반의 친구들이 어린이처럼 좋아했습니다.
옛 추억을 조금 더 느끼고 싶어서 다시 아내와 함께 화요일 오후에 인왕산에 갔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아버님을 따라 매일 갔던 인왕산을 약 45년 만에 다시 찾은 것입니다. 중학교 때는 내수동에 있는 보인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아내도 내수동에 살았기에 오고가면서 봤을지 모릅니다. 아내가 살던 집터는 땅을 깎아 도로로 만들어서 현재 도로에서 공중 10미터쯤 위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옛날을 회상하며 기분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옛날을 회상하며 좋은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하고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반면에 옛날을 회상하고 한 맺힌 회한을 가지면 더 삶이 쓸쓸해집니다. 그래서 회상이 회한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과거의 한 맺힌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의 한 과정으로 여기면 됩니다. 그 한 맺힌 일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까? 과거의 좋은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던 때의 기억, 예수님을 따르면 체험했던 수많은 아름다운 기억,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고 변화산에서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 등에 대한 기억은 그의 삶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의 기억, 멀리서 바라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 대한 기억, 그리고 디베랴 바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기억들도 삶이 힘들 때마다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좋은 일에 대한 회상은 큰 힘과 위로와 행복을 줍니다. 그런데 그런 ‘회상’보다 더욱 힘과 위로와 행복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죄악된 삶을 버리고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결단하는 ‘회개’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달이 한 해를 되돌아보게 하는 마지막 달인 12월인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또한 예수님이 오신 날이 1년 중 가장 밤이 깊은 동지 어간인 것도 얼마나 좋습니까? 어둠이 깊으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뉘었습니다. 개인의 이력도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과 영접한 후로 나뉩니다. 성탄도 성탄 전과 성탄 후가 나뉘는 삶이 되게 해서 성탄절은 새로운 삶을 다짐하고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날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로운 출발은 과거를 잘 승화시킬 때 이뤄집니다. 그처럼 과거를 잘 승화시키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상을 ‘회한’이 아닌 ‘회개’로 승화시키고 새롭게 희망의 나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찬란한 꿈과 비전을 품고 달려 나가는 삶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대림절은 지난 1년을 회상하고 회개함으로 새로운 1년을 준비하는 절기로 삼아야 합니다. 복된 삶의 시발점에는 항상 ‘회개’가 있습니다.
< 회개하는 삶의 5대 축복 >
다윗이 어떻게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까? 회개의 중요성을 알고 회개하는 삶에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에는 회개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본문 11절에서도 다윗은 회개의 중요성을 알고 선하신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큰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회개하면 어떤 축복이 따릅니까?
1. 선택의 축복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회개의 보다 큰 의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회복’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경외할 때 생기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는 택할 길을 가르침 받는 축복입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최고의 선택’은 ‘최고의 하나님 경외’를 통해 주어집니다. 결국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 축복과 성공의 근본입니다. 살면서 어느 길이 옳은지,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어떤 직장을 가지고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에 관한 선택의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답은 ‘좋은 상담’에 있지 않고 ‘하나님 경외하는 삶의 회복, 즉 회개하는 삶’에 있습니다.
상담 중에 가장 많은 상담은 선택 문제에 대한 상담입니다. 상담하러 와서 한참 사연을 말하고 선택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지만 사실상 ‘남의 조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결단’입니다. 대개 보면 상담을 받으러 온 자신이 문제의 해답을 이미 알 때가 많습니다. 그 해답을 남을 통해 확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해답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문제나 배우자 문제도 거의 상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아는 해답대로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결단 대신 다른 하위의 해답과 방법을 찾으니까 상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택할 때는 사랑과 용서와 나눔을 실천하는 길을 기초로 삼아야 하기에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기초가 굳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하게 되고 그때 하나님은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2. 평안의 축복
하나님을 경외하면 평안이 주어지고 자녀의 지경이 넓혀지는 축복도 얻습니다(13절). 즉 하나님께 인생의 운전대를 온전히 맡기면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얻게 되고 하나님은 그 삶과 가정을 최선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차에서 편히 잘 자는 사람은 대개 운전자를 믿고 자신을 잘 맡기는 사람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사고가 나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 하나님이 죽게 하시면 죽고 살게 하시면 사는 것이지.”라고 생각하고 맡기면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저는 결혼 초 아내에게 직접 운전연수를 시켜주었습니다. 아내의 운전연수는 남편이 보통 안 시켜줍니다. 조금 운전할 줄 안다고 아내를 야단치면서 부부싸움으로 발전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인천 대공원에서 큰소리 한번 없이 운전연수를 잘 시켜주었습니다. 저의 인격과 덕성이 탁월해서가 아닙니다. “차를 들이박아도 괜찮다. 사고 나서 죽어도 괜찮다.”라고 하면서 어떤 상황도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운전자가 난폭하게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동승자는 운전자에게 맡기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직접 운전하는 사람과 옆에 앉은 사람은 보는 각도가 다르고 체감 속도 및 체감 제동 거리가 달라서 더 위험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감안하지 않고 옆에서 자꾸 불안해하면 운전자도 짜증나고 은근히 자기를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배신감도 듭니다. 그래서 차 동승자의 제일 임무 중의 하나가 운전자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성도의 제일 임무도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깊은 평안이 임합니다. 믿음은 평안과 비례합니다. 더 나아가 편안한 잠과도 비례합니다. 잠을 잘 못자는 것은 조금 더 믿음을 훈련하라는 싸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망하면 망하리라! 하나님 안에서 될 대로 되라.”하고 나가면 죽거나 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가장 멋진 작품 인생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3. 교제의 축복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이뤄지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14절). 살다보면 가끔 큰 두려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두려움 자체와 싸우기보다 두려움보다 더 크고 강력한 분인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입니다.
작은 두려움들은 사람이 함께 해주면 대개 해결됩니다. 어둡고 한적한 장소에 혼자 있으면 두렵지만 그때 부모나 친구나 동행자가 있으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큰 두려움은 사람이 함께 해도 해결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만 해결됩니다. 결국 두려움을 이기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길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려면 특히 자기 사정을 기도로 아뢰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자녀가 자기 사정을 터놓고 아뢸 때 부모와 더 친밀해집니다. 자녀가 문제를 혼자 처리하려는 것은 한편으로는 대견한 일이지만 모든 문제를 다 혼자 처리하려는 것은 대견함을 넘어 부모에게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말했다가 더 어려워질 때도 많기에 사람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지 않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만은 자기 고민을 잘 아뢰고 하나님께는 더욱 잘 아뢰어야 합니다. 기도응답을 꼭 얻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아뢰기보다 기도응답과 상관없이 아뢰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이뤄집니다. 그 친밀한 교제가 문제해결과 축복의 최대 원천이 됩니다. 성도의 문제는 ‘문제’라기보다는 ‘기도제목’입니다. 문제해결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저 자기 사정을 아뢰며 친밀함을 쌓아 가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4. 자유의 축복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이 구절을 보면 ‘회개하는 것’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눈으로 항상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이 거의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회개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각종 얽매임과 집착에서 자유한 은혜를 얻게 하실 것이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렇게 믿음 안에서 자유하면 시시한 것 가지고 싸우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 지위, 학벌, 명예, 재산 등을 배설물로 여기고 자유한 영혼이 되었습니다(빌 3:8). 살면서 높은 지위나 물질이나 명예도 정당하게 추구하되 그것들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과 성도다운 삶이 훼손되면 그것들을 깨끗이 포기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그래! 당신이 가져!”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자유합니까? 무엇을 잃었다고 울지 말고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하십시오. 과거에 집착했던 것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까지 믿음이 커지고 은혜를 받아야 자유와 행복을 잃지 않습니다.
어느 날, A 교회에서 섬기던 한 부목사가 원치 않는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보다 설교를 잘한다는 교인들의 입방아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새로 교회를 개척했는데 A 교회에서 교인 몇 명이 따라왔습니다. 그러자 A 교회의 담임목사가 열을 올리며 엄청나게 욕했습니다. 그것은 자유한 모습이 아닙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그런 일들로 너무 열을 받으면 교회가 아무리 커도 그는 불행한 인생이고 실패한 인생입니다.
반면에 다른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는 부목사들이 교회를 잘 섬기다가 개척하면 최소한의 개척멤버라도 같이 따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개척하는데 수고한다고 상당한 지원금도 줍니다. 더 나아가서 따라가는 교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해줍니다. “여러분! 앞으로 목사님 모시고 교회를 잘 섬기세요.” 얼마나 자유하고 행복한 목사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얻어야 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5. 기도의 축복
본문 16-2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먼저 그는 외롭고 괴로운 자신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16절), 죄로 인해 생긴 자신의 근심과 고난과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합니다(17-18절). 또한 자신을 많은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신을 성실하고 정직한 손길로 보호해달라고 기도합니다(19-21절).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까지 합니다(22절). 다윗은 자기 죄가 국가적인 위기도 초래했다는 무한책임의식을 가졌습니다. 한 사람의 죄가 국가적인 위기도 초래하지만 한 사람의 회개가 국가적인 위기 극복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본문 16-22절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는 간단히 말하면 ‘은혜를 구하는 겸손하고 책임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기도의 능력을 체감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 있는 기도가 되려면 남 탓을 하지 않고 남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까지 기도의 폭을 넓히는 책임적인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고통 중에 가져야 할 가장 복된 자세 중의 하나는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나거나 상처 받는 말을 듣거든 분노하는 대신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한 번 더 살피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어디든지 발전이 없는 이유는 자기 잘못을 성찰할 줄 아는 인물의 부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을 인정해주십니다. 참된 믿음도 자기 죄를 인정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일이 안된다고 분노하지만 말고 그때 자기 죄를 성찰하며 가슴을 치십시오. 특히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면 하나님은 그의 앞날을 복되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 피해의식을 잘 극복하십시오 >
1978년 제가 살던 옥인동 집이 도로정비를 위해 수용될 때 당시 시세가 평당 120만원 정도였는데 평당 24만 원의 보상이 나왔습니다. 그 보상비로 갈 곳이 없어서 당시에 서울 가장 끝에 있던 명일동의 연립주택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때 제기 살던 동네에서는 럭키 사장 집으로 길을 내려고 우리 집이 도로로 수용되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있는 사람’을 씹는 안주로 삼아 공분을 일으키려는 사람에 의해 왜곡된 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니까 왜곡된 소문을 퍼뜨려 정치적 목적달성에 활용하려는 사람도 참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떻게 그 상황을 소화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있는 사람’에 대해 잠깐 분노가 생겼지만 얼마 후 냉철함을 되찾고 인생을 피해의식에 젖어 살면 안 되겠다고 자각했습니다.
살다 보면 피해를 줄 수도 있고 피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피해를 당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를 만성적인 피해의식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자신만은 앞으로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힘쓰겠다고 결단하고 나눔의 비전을 키우는 원료로 삼는 것입니다. 피해가 피해의식으로 발전하지 않게 하는데 신앙심처럼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피해를 잘 소화시키면 하나님의 넘치는 보상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의 가정이 적은 보상금을 받고 명일동으로 밀려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믿음도 커지면서 피해를 피해의식으로 발전시키지 않게 하는 능력도 커졌습니다. 그때부터 ‘없는 사람’은 물론 ‘있는 사람’도 이웃으로 보는 눈이 생겼고 없는 사람의 아픔도 보였지만 있는 사람의 아픔도 보이게 되었습니다. 즉 사람은 다 차별과 편견 없이 품어야 할 이웃들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그때 은혜를 받으면서 ‘없는 것’은 선에 가깝고 ‘있는 것’은 악에 가깝다고 여기는 편견을 극복하는 능력도 커졌습니다. 대기업 회장의 딸이 비행기 안에서 횡포를 부려 큰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반면에 대기업 회장의 딸이 안 가도 되는 군대에 자원해서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결국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각 사람의 ‘사람됨의 문제’이고 ‘고귀한 책임감의 문제’입니다.
피해의식으로 인한 편향된 사고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안목이 언제 생깁니까? 믿음이 커지고 말씀으로 은혜를 받을 때 생깁니다. 아무리 아픈 기억과 상처도 예수님의 빛이 그 삶에 임하면 그 아픔과 상처를 통해 새 살이 돋고 더 큰 창조적인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빛이 비치면 지옥과 같은 곳도 천국처럼 변합니다. 살면서 당하는 수치와 피해와 상처는 하나님의 보좌로 인도하는 웜홀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당한 피해를 피해의식으로 발전시키지 말고 오히려 평화와 나눔을 향한 거룩한 도전과 결단으로 승화시키십시오.
또한 피해의식은 불평을 통해 체질화될 때가 많기에 불평이 입에서 나올 것 같으면 금방 침묵 모드 및 기도 모드로 들어가는 훈련을 힘써 하십시오. 네 탓으로 돌리는 마음보다 네 덕으로 돌리는 마음을 키우고 미운 일을 깨끗이 잊고 미운 사람을 깨끗이 용서하는 훈련도 잘하십시오. 그래서 눈빛이 예수님의 눈빛이 되게 하십시오. 그런 놀라운 삶의 변화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기초적인 시발점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예수님과 친밀해지면 오물 냄새가 나는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백합화 냄새를 풍기며 살 수 있습니다. 피해를 당하고 상처를 입어도 그때 자기를 성찰하며 회개하고 더욱 예수님을 붙잡고 살면 됩니다.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절기인 대림절은 자기성찰을 통해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새롭게 주님의 뜻과 꿈과 비전을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는 절기로 삼아야 합니다. 항상 다윗처럼 회개하는 삶에 탁월해서 선택의 축복, 평안의 축복, 교제의 축복, 자유의 축복, 그리고 기도를 축복을 얻어 누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친한 친구 되기
시 25:14 / 김형준목사
성인 5명중에 한명이 관람했을 만큼 흥행에 성공했던 ‘친구’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관객의 타깃 층을 보면 30대 이상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연령층의 한계와,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부산이라는 제한된 지역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의 갈증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평합니다.
현대인은 시장개방, 구조조정, 민영화, 탈규제 등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부도, 배신, 소득감소, 파산, 가정불화, 가출, 이혼, 자살 등 우울한 현실을 접하고 살아갑니다.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며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믿음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부모도 자녀도 부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자기 김밥을 먹었다고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자식이 있는가 하면, 사는 것이 어렵다고 자녀와 동반자살을 하는 부모도 있으며, 봉급 때문에 부부가 서로를 죽고 죽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끼리끼리 울타리를 치고 서로 보호받으려는 현대인의 본능으로부터 진정 믿을 수 있는 것은 친구의 의리 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담게 된 것입니다. 거꾸로 영화의 이런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얼마나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하며 동시에 변함없이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평생 사람과 맺는 관계로 삶을 지속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관계를 통해 우리 삶은 시작되었고, 관계로 인해 인생의 방향이 설정되기도 합니다. 그 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선택할 수 없는 관계도 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부모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우리 존재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잘못 맺은 관계는 일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게 할 만큼 부모-자식간 관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인간은 그렇게도 갈망하던 충분한 신뢰와 안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획과 예정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맺고 있을 경우에는 당연히 삶의 이유와 의미 그리고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꿈과 계획을 이뤄 성공했다 하더라도 성공이 존재목적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자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 때문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요 15:15 말씀은 놀라운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여기서 친구란 막연히 가까운 관계가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깊은 부분까지 나누는 아주 밀접한 관계의 친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단절된 관계를 아주 밀접한 친구 관계로 회복하시고자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4:14에서 하나님을 “그분은 너희와의 관계에 대해 열정을 가진 하나님이시다(NLT)”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친구 삼으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은, 이제 성령으로 날마다 동행하시며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그러한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며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고 그 가운데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행동을 바꾸는 것 보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데, 보통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한다 할 때 하나님을 느끼려 합니다. 뭔가 보고, 느끼고,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를 체험하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하는 모습과 방법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을 주고 있는 말씀이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만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일 앞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라는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함께 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누릴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가득한 이 땅에서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되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죄로 인해 사망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미래와 희망이 없는 존재였는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새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고난과 아픔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구속 받은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기뻐할 수 있도록 예비해 두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기뻐할 이유를 이미 허락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자주 자주 기쁨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초점이 없는 것과 부족한 것에 늘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보다는 없는 것에 대한 불안함, 불안함을 없애기 위한 초조함 때문에 더욱 힘든 것은 아닌지요. 가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무엇이든 바꿀 기회를 30초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현재대로 있겠다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부족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삶의 부족한 것을 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찾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이미 허락하신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응답하는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도 끊임없이 기도해야함을 말합니다. 여기서 기도하라는 명령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할 때 쓰는 단어와는 달리,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뜻에 초점을 맞추고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뜻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정도로 졸라서 무언가 얻어내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변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제게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왜 허락하셨는지, 제가 어떻게 풀어 가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관점을 제게 주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의 마음을 따라 일을 해결하고 사람을 대할 때 복된 결과를 얻을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특징인줄 알면서도 기도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성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중심의 얘기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거슬러 기도하던 중에 나 중심적인 생각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로 갖추어지는 과정은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시작하기위한 오프닝 세레머니로서도 또한 엔딩 세레머니로서도 아닌 일의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뜻을 살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입니다.
마지막으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모든 환경에서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범사에 이미 감사가 충만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을 기억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로렌스 형제作)’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17세기 로렌스 형제가 전쟁 후 삶에 회의를 느끼고 들어간 수도원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여생을 아름답고 보람 있게 살고자 들어간 수도원에서 정작 자신에게 주방에서 밥하고 설거지하는 일만 시키는데 몹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인생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나에게 기껏 맡기는 일이 설거지란 말인가!’ 그러나 곧 하찮은 일상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로렌스 형제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설거지 하는 가운데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내 삶 어느 구석에라도 함께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대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수도원 원장과 주고받았는데, 바로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책에서 로렌스 형제는 숨기도(Breath Prayer)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호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등 짧은 문장이나 성경구절을 가슴에 품고 숨쉬고 내쉴 때 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숨기도처럼 쉬지 않고 기도할 때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임재하심 앞에 바르게 반응하며 주님과 가까워 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인식하는 방법에는 이 밖에도 많습니다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잊기 쉬운 순간에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준비해두었다가 문득 다시 깨닫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메노나이트나 경건주의와 같은 영성을 추구하는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만, 회의를 하다가 중요한 안건이 나오거나 토의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중간에 한 사람이 종을 ‘땡’ 하고 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든 생각과 논쟁을 중단하고 10~15분간 깊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우리가 나아갑니다.’라고 하나님께 여쭌 후 다시 논의합니다. 그러다 또 심각한 논쟁에 빠지면 다시 한 사람이 종을 치고 다시 기도의 자리에 함께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해보면 어떨까, 분열되고 과열된 논쟁 분위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러분도 구역과 부서에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분쟁과 과열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모든 논의가 하나로 조정되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중요한 약속을 하면 핸드폰에 알람 장치를 해서 잊지 않도록 주의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알람으로 자신을 일깨우고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함을 일깨워 줄 다양한 방법을 개발한다면 임재하심에 합당한 반응과 응답을 드리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으며,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구로 여기시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묵상할 때 이행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알려주십니다. 사무엘상 3장 21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한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은 묵상이 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고 싶어 하시고, 가까이 두시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에게 언약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욥은 일용할 양식보다 말씀을 더 소중히 여겼다고 고백했으며, 다윗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 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묵상에 대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편 1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즐거워하는 자로다”
복 있는 인생이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의 삶을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첫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인이란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표준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있다면 자신의 욕망뿐으로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인생의 기준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을 받는 우리로서는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는데 능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것, 부서지지 않는 것, 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전제조건이 인정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인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죄에 해당하는 원어 ‘하마르티아’란 ‘표적에 맞지 않고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목적을 좇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준이 없는 사람(악인)은 인생의 목표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죄인)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상을 전제로 하는 생각과 마음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묵상’이란 단어를 동양적인 의미로 생각해서 가만히 침묵 속에 잠잠히 잠기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힘을 다해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즉, 말씀대로 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 묵상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을 보면 하루 동안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람과 교제하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제하는 사람의 영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주는 요소는 무엇이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사람과 가까이 만나고 있다면, 이러한 만남과 대화를 경계하십시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비신앙적인 생각에 젖어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세상 사람을 다 만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만남에는 한계가 있고 정해진 만남의 범위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일깨워주는 친구가 있다면 참으로 유익될 것입니다. 대화 중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둔 사람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살사이트에서 만나 죽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만나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눈 대화 때문입니다. ‘살아보니까 별수 있냐. 어차피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잿빛 인생 희망이 없잖아.’ ‘살아서 뭐하냐. 일찍 죽자.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는 네가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철학과 이성, 논리와 설득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지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장 솔깃할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허무로 인도합니다. 그 결과가 허무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귀한 인생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좋은 친구, 영성을 깨워줄 친구와의 만남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그런데 보다 더 본질적인 만남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입니다. 말씀과 깊게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기 바랍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삶의 지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은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행동이야 어찌됐든 십자가상의 강도도 구원 받았던 것을 보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사명자의 삶은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민족을 치유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일찍이 부르셔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세우시고,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도전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시대가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는 시대는 아닙니다. 어쩌면 총선 이후 더 큰 혼란이 우리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지 모릅니다. 거세게 흘러들어오는 쾌락과 향락의 문화가 우리를 병들게 할지도 모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뜻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쓰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대세 속에 자신들을 맡기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왕이 내리는 상의 진미를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고집해야합니다. 그럴 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통해 하나님 역사를 다시금 이루어 가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희망이요 꿈이 되기를 원한다면 말씀 앞에 자신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삶 속에 지금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행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점검해 보십시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임재하심 속에 교제하며 살아갈 때 여러분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직접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나가는 순간 다 잊어버리지 마시고 하루에 한번쯤 오늘 들었던 본문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서 생명력이 있고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 심령과 골수까지 쪼갭니다.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인생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발 위에 등불이 되어 실족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앞에 선택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선택 하는 대로 삶의 방향은 좌우될 것입니다. 그 앞에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말씀을 늘 묵상함으로 주님의 좋은 친구 되시기를, 더불어 삶의 놀라운 역동성과 창조성을 체험하며 시대의 어둠을 밝혀 나가는 동안의 귀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