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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지경(無我之境)
정신이 한 곳에 흠뻑 빠져서 스스로를 잊어 버리고 있는 지경을 이르는 말이다.
無 : 없을 무(灬/8)
我 : 나 아(戈/3)
之 : 갈 지(丿/3)
境 : 지경 경(土/11)
(유의어)
몰아지경(沒我之境)
무아경(無我境)
무아몽(無我夢)
무아지경이란 말은 불교사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1.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어원
무아지경이란 불교에서 유래된 말로서 ‘정신이 한 곳에 통일되어 나(我)를 잊고 있는 경지’를 뜻합니다. 즉 무의식의 세계 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무아(無我)의 경지에 대한 가르침은 자기라고 하는 조그마한 껍질 즉, 가짜 자기의 탈을 과감히 벗어 버릴 적 때, 자성(自性)의 본질에 이르게 된다고 석가모니는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간이 자기만 알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극히 경계하고 자아(我)가 가진 삼독인 탐(貪; 욕심), 진(瞋; 성냄), 치(癡; 어리석음) 이 셋은 수행인을 해롭게 함이 가장 심하므로 3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속성을 과감히 뛰어 넘어서 참 깨달음인 열반의 경지에 가도록 불교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자아(自我)의 벽을 허물어 무아지경에 이르도록 힘쓰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무아지경은 자기를 잊음, 곧 무의식, 또는 그런 경지, 사사로운 마음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일체는 무상한 것이므로 자아(自我)의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2.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무아지경의 무아(無我)를 한자로 풀이하자면 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잡아함경 1권 10경에서는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고, 나의 아(我)가 아니고, 또한 나의 본체도 아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올바른 지혜로 바라봄이 좋다.
그리고 이어서 감각, 표상, 의지, 의식, 등 정신적인 요소에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경전의 설법을 통해서 무아설로서 자아를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무아지경이란 불교에서 유래된 말로서, 정신이 한 곳에 통일되어 나(我)를 잊고 있는 경지를 뜻합니다. 즉 무아는 자기를 잊음, 곧 무의식, 또는 그런 경지, 사사로운 마음이 없음, 불교에서 일체는 무상한 것이므로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무아경지에 빠진 것 같다'는 말은 이제부터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불교와 같이 무상이나 무아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상론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은 비기독교 사상입니다.
⏹ 무아지경(無我之境)
중국 청(淸)나라 말기의 대학자 왕국유(王國維) 선생의 설명이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은 사물로써 사물을 본다. 무엇이 나(我)고 무엇이 사물인지 알 수 없다.”
시문 비평집 인간사화(人間詞話)에 나온다. “유아지경(有我之境)은 내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 그래서 사물이 모두 내 색채로 물든다.”는 문장과 대비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무아(無我) 발언이 논란이다. 신조어(新詞) 정치에 새로운 어휘를 추가했다. ‘중국몽, 공급측개혁, 일대일로(一帶一路; 21세기 육,해상 신실크로드), 인류운명공동체’ 등의 계보를 잇는다.
지난 3월 22일 이탈리아를 방문한 시진핑 주석은 차세대 정치인 로베르토 피코 하원의장을 만났다.
피코 의장이 말했다. “호기심에 묻는다. 국가주석에 당선됐을 때 심정이 어땠나?”
시 주석은 “큰 나라의 책임은 무겁다. 업무도 막중하다. 나는 장차 내가 없다. 인민을 저버리지 않겠다(我將無我 不負人民)”고 대답했다.
이어 “무아(無我) 상태에서 중국의 발전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길 원한다”며 “나의 노력과 전 중국 13억 인민의 육력동심(勠力同心; 힘과 마음을 함께 합치다)으로 나라를 잘 건설하리라 믿었다. 자신 있다. 중국에 와서 근면하고 지혜로운 중국 인민을 보라.”
피코가 대답했다. “꼭 가겠다.”
3월 24일 자 인민일보에 실린 시 주석의 ‘무아지경’ 각오다. 반향은 컸다.
류츠쿠이(劉賜貴) 하이난(海南) 당서기는 이튿날 확대 학습 회의를 소집했다. “아장무아 불부인민(我將無我 不負人民) 정신으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자”가 주제였다.
공산당 신문망은 “공산당원이 말하는 무아(無我)는 종교가 말하는 희생보다 훨씬 높다. 무아(無我)란 단어의 새로운 해석이자 새로운 용법”이라고 치켜세웠다.
정치평론가 덩위원(鄧聿文)은 시 주석의 신조어 통치를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과 비유한다.
덩은 최근 “중국몽은 공산당이 통치하는 붉은 제국이 세계적으로 굴기(崛起; 우뚝 섬)하고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중국 부흥”이라며 “인류운명공동체도 사기성이 있으며 아장무아(我將無我)도 예외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소설 속 빅 브러더는 신어(Newspeak)를 만들어 생각을 통제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과 같은 식이다. 베이징에서 접하는 공산당 매체의 글들이 갈수록 소설 '1984년'를 닮아간다.
⏹ 무아지경(無我之境)
시인의 감정적 생채가 비교적 은폐되어 있고 경물(景物) 속에 완전히 융화되어 있어 직접적으로 외부로 노출되지 않은 경계(境界)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왕국유(王國維)의 인간사화(人間詞話)에 나온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본다거나 찬 물결은 담담하게 일어나고, 하얀 새는 유유히 날개를 접는다는 시구에는 무아의 경계가 담겨 있다.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寒波澹澹起, 白鳥悠悠下, 無我之境也.
무아의 경계는 물상으로 물상을 관찰하기 때문에 무엇이 자아이고 무엇이 물상인지 알 수 없다.
無我之景, 以物觀物, 故不知何者爲我, 何者爲物.
무아의 경계를 사람은 오직 고요한 가운데에서만 얻을 수 있다.
無我之境, 人惟于靜中得之.
왕국유는 또 무아지경을 우미지경(優美之境)으로도 설명하였다.
무아지경은 작품 속에 주관적 감정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의 주관적 감정은 경물 가운데 숨어 있어 정경교융(情景交融)의 경계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경물은 정서를 어려움 없이 전달하며, 정서는 경물과 역동적으로 대칭되고, 의(意)과 경(境)이 오묘하게 합치되어 자아와 물상이 혼연일체가 된 상태, 즉 의와 경을 모두 잊었으니 경물과 자아가 한 몸을 이루고(意境兩忘, 物我一體), 의와 경이 융화되었다(意與境渾)는 말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술을 잡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산빛은 저녘되자 더욱 아름답고, 날던 새도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把酒東籬下, 悠然見南山, 山色日夕佳, 飛鳥相與還)”든가
도연명의 귀원전거(歸園田居)에 “가물가물 촌락은 먼데, 하늘하늘 마을의 연기. 개는 골목길 안에서 짖고, 닭은 뽕나무 위에서 운다(暖暖遠人村, 依依墟里烟, 狗吠深巷中, 鷄鳴桑樹上)”는 등의 시구에는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은 전혀 표출되어 있지 않지만 주변 경물의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시인의 감정이 남김없이 전달되고 있다.
무아지경 속에서 시인의 감정은 담박하게 승화되며 작품 속에서 표현된 사물과 자아의 관계는 화해적(和諧的)이다. 바깥의 사물과 시적 자아는 이해 관계로 충돌하지 않으며, 나와 사물은 일체를 이룬다.
그리하여 물상 가운데 완전히 녹아들어가 자신의 존재마저 망각한 채 바깥 사물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물상으로 물상을 관찰하기 때문에 무엇이 자아이고 무엇이 물상인지 알 수 없다(以物觀物, 故不知何者爲我, 何者爲物)”는 것이다.
무아지경 속에서 시인의 감정은 때로 한적(閑適)하고 고즈넉한 운치를 현현하는데, 이는 선명하고 강렬하게 외부 세계로 감정을 표출하는 시적 경계와는 전혀 다른 경우다. 때문에 경계는 항상 우미한 미적 범주를 띠게 되는 것이다.
왕국유가 이같은 주장을 내세운 바탕에는 칸트의 영향도 없진 않았지만, 이는 중국의 고대 시문학사의 실제와도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지금도 이 개념은 문학 연구에서 광범위하게 원용되고 있는 것이다.
(참조) 유아지경(有我之境)
⏹ 무아지경(無我之境)
참선이나 명상등 수련을 하면서 경험하는 사람도 있고, SEX를 할 때 절정의 순간에서 무아지경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해 보통 평범한 사람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기 힘든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는 말이야말로 세상을 밝게 만드는 생활의 비법이다. 말그대로 무아지경은 ‘자기를 잊는다’는 말이다. 생활 속에서 이 무아지경을 언제 체험하는 지 생각해 보자!
첫째는 한 눈에 반했을 때이다.
첫 눈에 반해서 아무 생각이 없을 때도 무아지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용운 선생의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멀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라는 시 구절처럼 사랑에 빠졌을 때도 무아지경이다.
둘째는 데이트를 할 때다.
데이트를 할 때 무슨 말을 하는 지 생각해 보라! ‘뭐 먹고 싶어? 어디 가고 싶어? 무슨 영화 볼까?’ 등등,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은 없어지고, 상대의 의도에 맞추려고 한다. 자기 의견이나 주장이 없이 상대에게만 맞추려고 하는 것이 무아지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셋째는 SEX를 할 때이다.
서로 사랑을 해서 데이트를 하다 보면 사랑을 나누게 된다. 제 정신을 갖고 멀뚱멀뚱하게 사랑을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다. 자기를 잊을 정도로 몰입을 해서 무아지경의 상태에 들어가 사랑을 하는 것이 진정한 SEX일 것이다. 문제는 평생 몇 십 년 동안 사랑을 하면서도 무아지경을 경험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넷째는 자식을 키울 때이다.
사랑을 해서 같이 살다 보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아기에게 대하는 부모의 행동을 행각해 보자. 무엇을 해도 예쁘고 귀엽다. 아기가 있는 자체가 즐겁고, 아기를 보는 자체가 즐겁다.
아기에게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그냥 사랑만 하는 것이 바로 무아지경이다.
아이가 좀더 자라면 ‘애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아이에 대한 욕심이 생기며 이 무아지경이 깨지고 만다. 그러면 아이의 단점이 서서히 보이고, 이웃 집 아이와 비교하면 점점 더 잔소리가 늘어간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명상이나 참선 기도등 수행을 할 때이다.
정적(靜的)인 명상만이 아니라 동적(動的)으로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할 때 몰입을 해도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에디슨이 연구를 할 때 시계를 끓는 물에 넣은 것도 무아지경의 상태인 것이다.
SEX를 하거나 명상을 할 때 무아지경에 들기는 어렵지만, 생활 속에서 나를 버리는 것은 쉽다. 상대의 아름다움만 보이고 내 주장 없이 상대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무아지경의 상태이다.
권태기에 접어든 부부생활도, 사이가 멀어진 부모자식과의 관계도, 이 무아지경의 상태로 돌아가면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참선을 하고 명상을 하면서, 나를 잊고 자연과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도 좋지만, 현실의 생활 속에서 내 욕심을 버리고 생활하는 것은 더욱 진정한 무아지경의 생활일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비우려고 하지 말고,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욕심을 버린 무아(無我)의 행동이었을까’ 생각을 하는 명상을 합시다.
⏹ 有我之境에서 無我之境으로
청나라 말기의 학자 왕국유는, “시에는 유아지경(有我之境)이 있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이 있다”고 말한다. 이 두 용어를 곧바로 번역하면 ‘내가 있는 정경’과 ‘내가 없는 정경’이다.
즉, 유아지경(有我之境)은 시에 시인의 감정이 배어 있는 정경이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은 시인의 감정이 안 보이는 정경이다.
왕국유의 이 말을 기준으로 중국의 시를 살펴보면, 중국의 옛 시는 크게 유아지경의 시에서 무아지경의 시로 유행이 바뀌었다.
물론 유아지경의 시와 무아지경의 시를 동시에 구사한 소식과 같은 시인도 있지만 대체로 중국의 옛 시는 유아지경에서 무아지경으로 넘어왔다.
구양수의 시 접련화(蝶戀花)는 왕국유의 기준으로 보면 유아지경의 시이다. “거센 비바람 몰아치는 삼월 저녁, 날이 저물어 문을 닫았으나, 봄을 붙잡을 수 없도다. 눈물어린 눈으로 꽃에게 물어도 꽃은 말이 없고, 어지러이 흩날리어 그네 너머로 날아가네.” 이라고 읊은 시어 속에 눈물을 흘리며 꽃을 바라보는 시인이 고스란히 보인다.
雨橫風狂三月暮,
門掩黃昏, 無計留春住.
淚眼問花花不語,
亂紅飛過鞦韆去.
금나라 시인 원호문이 읊은 '영정에서 작별하다'의 한 구절이다. “잔잔히 이는 물결(寒波澹澹起), 유유히 내리는 새(白鳥悠悠下).”
시인은 친구를 두고 떠나는 길이 아쉬워 강가에 말을 매고 함께 앉았다. 한 잔 술을 들고 얘기를 나누며 주변의 경치를 본다. 시인이 바라본 이 경치 속에 시인의 심경이 녹아 있다.
무심하게 시인의 눈에 들어온 정경. 이는 사실 시인이 자신의 심경과 같은 정경을 포착한 것이다. 이것이 무아지경의 시이다.
또 있다. 무아지경의 가장 대표적인 시 바로 도연명의 음주(飮酒)이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사람 사는 곳에 초가를 엮었지만, 수레나 말이 시끄럽게 하지 않는다.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멀어지면 땅은 절로 외지는 법.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한가롭게 남산을 바라본다.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산 기운은 저녁 무렵 아름다운데, 날으는 새들 서로 더불어 돌아온다.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이 중에 참된 뜻이 있거늘, 분별하려 하다 이미 말을 잊었다.
굴원 이후 대부분의 시들은 인생의 무상함이나 삶의 고단함, 사회적 좌절 등을 그렸고, 이별의 슬픔, 사랑의 갈망, 소외의 시름 등 감정을 표출한 유아지경의 시를 써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가 있었던 것이다.
강엄이나 사공도, 원호문의 시 같은 것은 잔잔하기 그지없다. 감정의 물결이 잦아든 것이다. 잦아들어 마치 무미한 것처럼 보인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담백해서 시인에게 감정이 없는 듯하다.
사실 가만히 보면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정경 속에 녹아 버린 것이다. 이는 아마 시인 자신의 내적 조화로움에서 출발하는 시선일 것이다. 이런 노래는 왕국유의 말대로 ‘무아지경’이라는 시적 경지를 열어 보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를 이르는 말을 무원고립(無援孤立),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무궁무진(無窮無盡),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능(無所不能), 못 할 일이 없음 또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엇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불통지(無不通知),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기를 일컫는 말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버지도 임금도 없다는 뜻으로 어버이도 임금도 모르는 난신적자 곧 행동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부무군(無父無君),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러움을 일컫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자기에게 관계가 있건 없건 무슨 일이고 함부로 나서서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불간섭(無不干涉),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몹시 고집을 부려 어찌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가내하(無可奈何),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용지물(無用之物) 등에 쓰인다.
▶️ 我(나 아)는 ❶회의문자로 手(수)와 창 과(戈; 창, 무기)部를 합(合)한 글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옛 모양은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武器)인 듯하다. 나중에 발음(發音)이 같으므로 나, 자기의 뜻으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我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我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저팔계가 가지고 다니던 삼지창과도 같다. 我자는 이렇게 삼지창을 그린 것이지만 일찍이 '나'를 뜻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은상(殷商) 시기에도 我자를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본래의 의미는 일찌감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我자가 왜 '나'를 뜻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서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에서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에는 余(나 여)나 吾(나 오), 朕(나 짐)자처럼 본래는 '나'와는 관계없던 글자들이 시기에 따라 자신을 뜻하는 글자로 쓰였었기 때문에 我자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我(아)는 ①나 ②우리 ③외고집(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 ④나의 ⑤아집을 부리다 ⑥굶주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 오(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저 피(彼)이다. 용례로는 소아에 집착함을 아집(我執), 나의 뜻을 아의(我意), 우리 나라를 아국(我國), 우리 여러 사람이나 우리들을 아등(我等), 우리 나라를 아방(我邦), 자기 의견에만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아견(我見), 우리 편 군대나 운동 경기 등에서 우리 편을 아군(我軍),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번뇌를 아만(我慢), 나에게 애착하는 번뇌를 아애(我愛), 자기의 이익을 아리(我利), 참 나가 있는 것으로 아는 잘못된 생각을 아상(我想),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아욕(我慾),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자아(自我), 육체적인 나를 소아(小我), 남과 구별된 개인로서의 자아를 개아(個我), 저편과 우리편 또는 남과 자기를 피아(彼我), 스스로를 잊고 있음을 몰아(沒我), 어떤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 자신을 잊음을 망아(忘我), 바깥 사물과 나를 물아(物我), 나 밖의 모든 것을 비아(非我),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아를 실아(實我),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오직 내가 제일이라는 유아(唯我), 남이 자기를 따름을 응아(應我), 다른 사람과 자기를 인아(人我),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함 또는 억지로 자기에게 이롭도록 꾀함을 이르는 말을 아전인수(我田引水),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책망을 들을 사람이 도리어 큰소리를 침을 이르는 말을 아가사창(我歌査唱),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뜻으로 후손이나 남을 걱정할 여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아궁불열(我躬不閱),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의 공평함을 이르는 말을 아심여칭(我心如秤), 자기네 편의 무위가 드날림을 이르는 말을 아무유양(我武維揚), 이 세상에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말 또는 자기만 잘 났다고 자부하는 독선적인 태도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유아독존(唯我獨尊), 바깥 사물과 나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한 몸으로 이루어진 그것을 일컫는 말을 물아일체(物我一體), 어떤 생각이나 사물에 열중하여 자기자신을 잊어버리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망아지경(忘我之境), 본디 내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뜻밖으로 얻었던 물건은 잃어 버려도 서운할 것이 없다는 말을 본비아물(本非我物), 자기가 어떤 것에 끌려 취하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을 자아도취(自我陶醉), 잘못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말을 곡재아의(曲在我矣), 옛일에 구애됨이 없이 모범이 될 만한 일을 자기부터 처음으로 만들어 냄을 이르는 말을 자아작고(自我作古), 어떤 사물에 열중하여 자기를 잊고 다른 사물을 돌아보지 않거나 한 가지에 열중하여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림을 일컫는 말을 무아몽중(無我夢中), 자기 때문에 남에게 해가 미치게 됨을 탄식함을 일컫는 말을 유아지탄(由我之歎), 인신人身에는 항상 정하여져 있는 주제자 즉 아我가 없다는 말을 인아무상(人我無想),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흠뻑 취함을 이르는 말을 무아도취(無我陶醉),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일컫는 말을 자아주의(自我主義), 남 잡이가 제 잡이로 남을 해하려 하다가 도리어 자기가 해를 입는 다는 뜻의 속담을 착타착아(捉他捉我), 상대방인 저쪽은 그르고 나는 올바름을 일컫는 말을 피곡아직(彼曲我直),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하는 비판을 일컫는 말을 자아비판(自我批判)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境(지경 경)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竟(경)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어진사람인발(儿; 사람의 다리 모양)部는 그 위쪽에 붙는 글자의 작용을 나타낸다. 竟(경)은 音(음)의 작용, 악곡(樂曲)의 끝, 일의 끝, 지경(地境) 등, 본디 땅을 구분 짓는다는 뜻으로 疆(강)이란 글자가 있었으나 나중에 속자(俗字)로서 境(경)자가 생겨 지경(地境), 경계(境界)란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境자는 ‘지경’이나 ‘경계’, ‘경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境자는 土(흙 토)자와 竟(다할 경)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竟자는 일이 마무리됐다는 의미에서 ‘다하다’나 ‘끝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끝나다’라는 뜻을 가진 竟자에 土자를 결합한 境자는 ‘영토의 끝자락’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지금의 境자는 주로 어떠한 상황의 한계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래서 境(경)은 (1)지경(地境) (2)일정한 장소(지역) (3)마음이 놓여 있는 상태 등의 뜻으로 ①지경(地境: 땅의 가장자리, 경계) ②경계(境界), 국경(國境) ③경우(境遇) ④상태(狀態) ⑤곳, 장소(場所) ⑥처지(處地)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인간 세(世), 대신할 대(代), 지경 은(垠), 지경 해(垓), 지경 역(域), 지경 계(堺), 지경 계(界), 지경 강(畺), 지경 강(疆)이다. 용례로는 놓여 있는 조건이나 놓이게 되는 형편 또는 사정을 경우(境遇), 일이나 물건이 어떤 표준 아래 맞닿은 자리를 경계(境界), 경계가 되는 땅이나 자기의 특성이나 체계로 이루어진 분야를 경지(境地), 경계가 되는 구역을 경역(境域), 일정한 지역의 안을 경내(境內), 어떤 경계의 밖을 경외(境外), 자기 자신이 처하여 있는 환경과 생애를 경애(境涯), 국경 또는 경계의 지점을 경상(境上), 땅의 경계 또는 어떠한 처지나 형편을 지경(地境), 어렵고 딱한 형편이나 처지를 곤경(困境), 마음의 상태를 심경(心境),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를 국경(國境), 본바탕을 제일 잘 나타낸 참다운 지경을 진경(眞境), 멀리 떨어져 있는 땅을 절경(絶境),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의 땅을 변경(邊境),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불행한 경우나 환경을 역경(逆境), 생활이 곤궁한 지경을 궁경(窮境), 살아 나가기가 몹시 어려운 지경을 군경(窘境), 지경 안의 전부를 합경(闔境), 속진을 멀리 떠난 경치 좋고 조용한 곳을 영경(靈境), 심오하고 조용한 곳을 유경(幽境), 인접한 땅의 경계를 인경(隣境), 가면 갈수록 경치가 더해진다는 뜻으로 일이 점점 더 재미있는 지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점입가경(漸入佳境), 어떤 생각이나 사물에 열중하여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경지를 망아지경(忘我之境), 굶주리는 상태에 이른 지경을 기아지경(飢餓之境),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지역을 무인지경(無人之境)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