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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삶의 맛, 삶의 향기 - 삶의 렉시오 디비나>
좋은 술일수록 맛과 향기가 좋습니다.
술만 그런 게 아니라 삶도, 글도, 말도 좋을수록 맛과 향기가 좋습니다.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합니다.
성인들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해보면, 다 고유의 맛좋고 향기로운 삶, 관상적 삶이 었음을 담박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의 삶도 맛있고 향기로워 보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맛과 향기를 닮았습니다.
과연 하느님이 보실 때 내 삶의 맛과 향기는 어떨런지요.
몇 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1일 대축일 저녁식사 후 마신 술 맛이 좋고 향기로웠지만 저는 미쳐 몰랐고 옆자리의 마티아 수사님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술은 이렇게 코로 향기를 맡으면서 서서히 음미하며 마시는 것입니다.
단 번에 훌쩍 마시면 안 됩니다."
수사님은 서서히 향기를 맡고 맛을 음미하며 얼마 동안 시범을 보여줬고, 이어 저의 즉각적인 언급입니다.
"아, 바로 그것이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술과 같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서서히 맛보고 향기를 맡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너무나 확실히 깨달아 각인된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입니다.
술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삶에 두루 적용되어야 할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요, 이래야 비로소 관상적 삶, 영적 삶의 성취입니다.
'삶의 렉시오 디비나'가 참으로 심오합니다.
어제 수도원 묘지를 방문했을 때 한눈에 들어온 묘비마다의 생몰 연대였습니다.
90세 이상 사신 분이 거의 없고 그 생몰 연대가 다 달랐습니다.
한 평생 삶이 어떠했을까 잠시 상상으로 렉시오 디비나 했습니다.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 어떤 성인도 다 죽는다는 사실이 새삼 위로가 됩니다.
예외 없이 탄생 날짜가 있으면 임종 날짜가 있습니다.
평생 살 것처럼 죽음을 잊고 지내지만 실상 얼마 남지 않은 삶임을 깨닫습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으로 압축하면 내 인생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요.
죽음 있어 삶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알게 됩니다.
죽음을 통해 분명해지는 삶의 감격과 고마움, 기쁨입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눈'으로, 내 '삶의 문장'에 주어를 하느님으로 하여 내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하게 됩니다.
여기 수도원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늘 그 삶을 되새기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1950년, 그가 수도원 입회 전 6.25 사변시 흥남 철수 작전 때,
선장으로 있던 그의 배로 14,000명의 피난민을 구조한 마리너스 수사님(1914~2001)입니다.
수사님의 묘비 앞에 휘날리는 2개의 미국 성조기가 수사님의 영웅적 행위를 기리고 있습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에 와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마리너스 수사님을 새롭게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정부가 훈장을 주기 위해 그의 속명을 찾아 여기에 왔을 때야 비로소 그가 전쟁의 영웅인 것을 수도원 사람들이 알았어요.
그가 너무 말이 없었기에 우리는 신문을 통해 그의 활약상을 알 수 있었죠."
인터뷰 기사 중 죠엘 아빠스님의 답변입니다.
수사님은 옛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47년 수도여정 중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았으며,
휴가 때 역시 수도원에 머무르며 언제나 기도하고 자기의 소임을 다했다 합니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권 72-83쪽 참조).
얼마나 매력적인 숨겨진 겸손한 삶인지요!
한권의 '살아있는 성경' 처럼 깊고 아름다운 삶이기에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수사님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하게 됩니다.
이제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의 최고의 조연(물론 주인공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이심)인 동방박사들에 대한 본격적 렉시오 디비나로 네 측면에 걸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동방박사들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샘솟았던 하느님을, 진리를 찾는 불굴의 열정입니다.
구도자의 우선적 기본 조건이,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 바로 열정입니다.
주님은, 삶의 이정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진리를 찾는 백절불굴의 열정이, 갈망이 있을 때 눈이 열려 발견되는 선물이 주님이요 삶의 이정표입니다.
열정이 없어 눈이 열리지 않으면 눈 먼 맹인일뿐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과연 하느님만을 찾는 열정의 구도자들로 우리 수도승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귀감입니다.
둘째, 삶의 이정표입니다.
진리를 찾는 열정에 눈이 열린 동방박사들에 은혜로이 계시 된 주님의 별, 삶의 이정표였습니다.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 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암흑의 동토(凍土)에 살고 있는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며, 우리의 내면을 환히 밝혀줍니다.
바로 동방박사들처럼 눈이 열릴 때 계시되는 주님의 영광이요 주님의 별, 이정표임을 깨닫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그 멀리 떨어져 있던, 진리를 찾는 열망에 깨어 눈이 열렸던 동방의 현자들에게만 계시된 영광의 별, 주님의 별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오로의 고백처럼 계시를 통해 신비를 깨달아 안 이방의 동방박사들입니다.
지척에 있었지만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그 박학의 종교인들, 신학자들 아무도 발견치 못한 주님의 별, 삶의 이정표였습니다.
셋째로 도반들입니다.
혼자가 아닌 셋의 도반들이 함께 했기에 성공적인 순례 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진리의 도반, 사랑의 도반입니다.
혼자라면 십중팔구 도중 하차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별, 진리의 별, 희망의 별, 삶의 이정표 따라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한 동방박사들의 최종 봉헌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탄생한 아기 예수님과 구도자 동방박사들 간의 아름답고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동방박사들과 함께 믿음과 희망, 사랑의 세 보물 모두를 주님께 봉헌하며
이 거룩한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시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진정 최고의 도반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영안으로 볼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마지막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동방박사들의 성공적 순례 여정을 가능케 했던 수훈 갑의 최고의 도반은 바로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주님보다 더 가깝고 더 좋은 도반은 세상에 없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은 동방박사들과 함께 하셨고,
또 제 산티야고 순례는 물론 지금 뉴튼수도원의 내적 순례 여정에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찾는 순례 여정에 항구할 때 내 삶 역시 '맛있고 향기로운 관상적 삶'에 '살아있는 성경'이 됩니다.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내 고유의 아름다운 '삶의 성경'을 쓰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어렸을 때에는 산타클로스가 누구이며 어디에 사는지가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만화 영화를 보면 눈이 펄펄 내리는 추운 북극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하지만 언젠가 핀란드에 산타클로스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산타클로스는 핀란드에 사는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 버린 지금은 그 역시 아니었음을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가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중국이요!”
그 이유를 물으면, 글쎄 받은 선물들이 모두 중국산(made in china)이라고 하네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중국에 살기 때문에 모든 선물의 생산지가 중국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선물의 생산지가 중국이라는 표시가 거짓일까요?
따라서 산타클로스는 중국에서 산다고 확신 지을 수 있을까요?
위의 이야기가 비약적인 비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리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진리일 수도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눈에 본 모든 것만이 진리라고, 자신이 직접 듣고 체험한 것만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자신의 몸으로 체험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 때는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밝은 태양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태양이 어디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공기를 직접 볼 수도 또 소리도 듣지는 못하지만, 공기가 있음은 분명히 압니다.
왜냐하면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을 때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물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지어내신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주님을 느끼고 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도 아닌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알아 뵐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단순히 별의 움직임에 따라? 아닙니다.
그들이 보이는 진리를 쫓은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진리를 쫓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만나겠다는 강렬한 소망이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만을 중시하는 눈에 보이는 진리만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직접 볼 수 없듯이, 세상 안에 계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만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열린 마음이 그토록 소망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동방 박사>
마태오복음에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간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만 있고, 목자들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루카복음에는 목자들의 이야기만 있고,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두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이고 차이점이 많은데,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는 상황 자체는 많이 비슷합니다.
목자들은 주님의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보러 갔습니다(루카 2,15).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께 경배하러 갔습니다(마태 2,2).
동방 박사들이 본 '별'은 목자들이 본 '주님의 천사'와 같은 천사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의 별이 실제로 동방 박사들을 인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천사가 별처럼 나타난 것인지, 천사를 별이라고 표현한 것인지...?)
목자들이 본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루카 2,16).
동방 박사들이 본 아기 예수님은 어떤 '집'에 계셨습니다(마태 2,11).
예수님이 어떤 '집'에 있는 외양간의 구유에 누워 계셨던 것인지,
아니면 마리아와 요셉이 외양간에서 예수님을 낳은 뒤에 방을 구해서 옮겨 간 것인지,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목자들은 동방 박사들처럼 귀한 예물을 드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천사에게서 들은 말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해 주었습니다(루카 2,17).
이것은 예물을 드린 것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목자들이 전해 준 말은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증언과 같기 때문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태 2,11).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예물 자체보다 동방 박사들이 그 예물들을 드린 이유가 더 중요했을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께 경배하러 온 사람들이었고(마태 2,2),
그래서 그분이 "메시아이시며 왕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그분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루카복음서 저자는 목자들의 이야기 다음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봉헌한 이야기와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을 기록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 다음에 헤로데가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한 이야기와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루카복음서 저자는 시메온이 마리아에게
"이 아기는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될 것이고, 당신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기록했습니다(루카 2,35).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마태 2,18).
루카복음서 저자가 기록한 시메온의 예언도 어머니의 고통을 말하고 있고,
마태오복음서 저자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예언도 어머니의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의 수난 때문에 겪게 될 어머니의 고통을 예언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예수님의 수난을 예언한 것입니다.
지금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이 같은 인물일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직후에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는 점 때문에 두 이야기를 비교해 본 것입니다.
아마도 목자들이 먼저 방문하고, 동방 박사들은 나중에 방문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낳을 때에는 무척 외롭고 힘들었겠지만,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의 방문 덕분에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가난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었던 목자들은 예수님 덕분에 큰 기쁨과 용기를 얻었고,
구원의 진리를 찾아서 방황하던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 덕분에 확신과 기쁨에 가득 차서 남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목자들의 이야기나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는 겉으로만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 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대축일의 명칭이 "동방 박사들의 방문 대축일"이 아니라, "주님 공현 대축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일을 경축하는 대축일이라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 덕분에 예루살렘의 헤로데 임금과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동방 박사들과 함께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그렇다 치고, 사제들과 학자들은 왜 그랬을까?
같이 가서 확인해 볼 생각도 안 한 것일까?
만일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셨다고 해도 같은 상황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만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만나게 되지만,
그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그래서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지 말라고 그들을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 않아서 못 만나는 것입니다.
박사들의 고향인 '동방'이 페르시아인지,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곳이 이스라엘에서 먼 곳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박사들의 '동방에서 베들레헴까지의 여행'은 '좁은 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연상시킵니다(마태 7,13-14).
그들은 참 생명을 얻으려고 좁은 문을 향해서 아주 멀고 험한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원, 영원한 생명, 참 신앙의 진리를 찾아서 얻으려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사람은,
또 아무리 멀고 힘든 길이라고 해도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한 사람의 동방 박사가 됩니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마태 7,7)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그리스도를 품은 별>
며칠 전 주교님의 교구청 사목방문이 있었습니다.
각자 하고 있는 일들을 발표하는데, 교도소 사목을 담당하는 사제가
현재 교도소 수감자 중 가톨릭 신자 비율이 5%도 안 되는 소수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은 거의 없고
많은 수가 교도소 안에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10% 정도가 가톨릭 신자라고 하는데
그만큼 가톨릭 신자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대형 종교에서는 모두 사랑과 자비와 용서 등을 가르치며 이웃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왜 가톨릭 신자들이 유독 다른 종교의 사람들보다 범죄율이 낮고 또 이웃을 위한 봉사나 자선의 양도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화감독 스티븐 앨런 스필버그는 흥행의 마법사, 천재적 감독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E.T., 쥬라기 공원, 쉰들러 리스트 등 세계인의 사랑받는 영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스필버그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표창장 한 번 받지 못한 학생이었답니다.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대학 시절에도 평균 C 학점을 받았답니다.
그에게는 부모의 이혼과 유대인이라는 열등감과 상처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습니다.
잦은 이사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의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면 혼자 공상에 빠지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습니다.
이런 그였지만 그를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성공시킨 원동력은 어머니 레아 아들러였답니다.
레아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들을 무시하거나 야단치지도 않았고, 아들 대신 동네 친구들을 징벌하러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들의 우월성을 발견하고 저렴한 무비카메라를 선물해 주었고 스티븐은 독학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괴롭힘을 많이 당해 결석을 자주 하였지만 그는 집에서 영화에 대한 공상을 하고 영화를 찍으러 밖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영화는 혼자 찍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에 흥미 있는 친구들을 모아 영화 제작에 동참시켰습니다.
어머니는 스티븐이 친구들과 어울려서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스티븐의 어머니는 매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아는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아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알아보고 아들에 대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레아의 어머니 즉 스티븐의 외할머니는 딸 레아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말을 잘 새겨둬라.
이 아이는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칠 아이다.”
레아는 아들을 볼 때 마다 어머니의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기대를 하였으며 결국 그 기대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기대에 맞게 행동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향을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과 기대를 스스로 실행함으로써 그 예언을 성취시키는 경향입니다.
[출처: 햇볕 같은 이야기, 김필곤, 기대의 힘]
그런데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을 충족시켜 주려는 마음이 들까요?
아닙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기대만이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개들을 봅시다.
개들이 누구나에게 그렇게 친절합니까, 아니면 밥을 주는 주인에게만 잘 보이려고 꼬리를 흔듭니까?
자신에게 음식을 주는 주인에게 고맙기 때문에 주인에게 잘 하려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음식을 해 주는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당신 뜻과 함께 당신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내어주시며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되어 그분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도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성체성사를 간직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이
그만큼 그리스도의 삶과 가깝게 변화되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객관적인 자료로도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2. 10. 28일자 1188호에 ‘가톨릭 신자들 나눔 활동 으뜸!’이라는 제목으로 기분 좋은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종교인·비종교인을 통틀어 기부와 자원봉사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름다운재단(이사장 예종석)이 1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제12회 국제 기부문화 심포지엄에서
강철희(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는 '누가 이웃을 돌보는가?' 발표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기부 참여율은 68%(2011년)로, 개신교(61%)ㆍ불교(60%) 신자보다 높다’고 밝혔다.
강 교수에 따르면, 1인당 기부금액 또한 천주교 신자는 37만 1100원으로, 개신교(21만 3400원)와 불교(10만 6000원)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또 천주교 신자의 자원봉사 참여율은 49%로, 기독교(34%)·불교(27%) 신자보다 높았다.
자원봉사 시간 역시 천주교 신자들은 36.5시간으로, 타 종교 신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객관적 현실이 이런데도 사회 사람들은 천주교보다 개신교가 더 많은 자선과 봉사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2013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 교회의 사회 봉사활동이 전체 종교기관 중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인다고 하여 현실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개신교가 한 조사에서도 개신교인들을 빼놓고 비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로마 가톨릭(47.0%), 불교(38.0%) 순이었고, 개신교는 12.5%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종교들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 어디서나 우리는 가톨릭 신자라는 이름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 종파에서 아무리 선교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선교의 방법은 바로 우리들의 참 그리스도를 믿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분이 어떤 분임을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고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보고 그 보이지 않는 부모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본적 삶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 하는 모든 선교는
단기적인 성과를 낸다고 하더라도 거시적이고 장기적으로는 신자 수가 줄어듦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증거하는 가장 완전한 방식이
그분의 가르침과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대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동방박사들이 보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바로 그 별이 지금도 떠 있는데 그 별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밝은 별이 되기 위해 우리가 더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더 먹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먹으면 그 먹는 것이 바로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을 먹으면 어머니의 기대대로 살게 되어 어머니를 내 안에 품게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말씀과 성체를 통해 그만큼 그 분을 더 먹으면 그분이 우리 삶을 통해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먹는 것이 각자를 만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씀과 성체를 통해 먹고 자신도 모르게 그분의 기대대라 살며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장미란 선수가 역도를 들어 올리며 금메달을 확정짓는 순간 우리 모두는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장미란 선수가 고생을 했는지를 봅니다.
김연아 선수도 그렇고 모든 위대한 일을 이루어놓은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순간이 짧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 짧은 순간에도 우리를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주는 동방의 별이라는 사실을 잊지말고
그 빛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해를 품은 달처럼 그리스도를 먹고 품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구원의 별빛을 찾아가는 영혼의 갈증>
주님 공현 축일은 하느님의 신비가 온 세상 모든 백성에게 알려진 것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날이며,
동시에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를 보다 깊이 묵상하고 그 신앙을 장엄하게 고백하는 날이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2,2)
베들레헴 작은 고을에 나신 유다인의 왕을 찾아 멀고도 험한 길을 걸었다.
그들은 우리의 인생길과도 같은 베들레헴을 향한 여정에서
‘별을 쳐다보면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찾아 나섰고, 그 별에 담긴 메시지를 알아보았다.
박사들은 사실 영혼의 갈증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의 표상이다.
따라서 참으로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동방박사들로부터 그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목자들과 이방인들에게 먼저 드러내 보이시어 그들을 ‘구원의 잔치’에로 초대하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빛, 행복의 빛, 희망의 빛이 이 세상을 비추고 있다.
오늘 동방박사들이 따라갔던 별빛이 우리 모두에게도 비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일어나 비추어라!’(60,1) 하고 외친다.
세상의 빛으로 어둠을 비추는 햇살로 오신 주님을 맞아들이는 올바른 태도는
‘세상의 빛’(마태 5,14)이 되어 사는 것이다.
우리네 삶을 환히 밝혀주는 변함없는 빛을 바라보며
우리 각자가 ‘세상의 빛’이 됨으로써 공현이 되어야 한다.
빛으로 사는 길을 오늘 복음은 말해 준다.
동방 박사들은 ‘별을 쳐다보고’ 거기서 하느님의 뜻을 읽었으며, 별의 인도에 자신들을 맡겼다.
우리는 멈추어 생각할 틈도 없이 너무도 바삐 살아간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가 많다.
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일들, 그리고 세상 재물에 속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어리석게 거기에 매달리곤 한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볼 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본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중심을 잡을 줄 알았고,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보며 걸으면서도 넘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길이다.
동방박사들은 보이지 않는 ‘메시아의 탄생’에 희망을 두고 ‘멀고도 험한’ 길을 걸었다.
그들은 중요한 것을 위해 모두를 버리고 멀고도 험한 길을 걸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삶의 모든 여정을 하느님의 손길에 맡길 줄 알았고,
하느님께로부터 삶의 희망과 어둠을 통과할 수 있는 빛이 옴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사들은 멀리에서 와서 구세주께 경배를 드렸다.
우리의 삶의 태도는 어떤가?
상황과 기분에 따라 변덕을 부리지는 않는가?
예수님 없이 나의 삶은 의미가 없고,
그분을 떠나서는 죽음과 죄와 어둠 밖에는 없음을 깊이 깨닫도록 하자.
기도와 성사,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평범한 일상사를 통하여
‘아주 가까이에서’ 빛을 비추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동방박사들은 말구유에서 구세주와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며 “땅에 엎드려”(2,11) 주먹만한 아기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과, 그분의 신성(神性)에 대한 경배의 표시인 유향, 그분의 죽음에 대한 고백인 몰약을 선물로 바치며 경배드렸다(2,11).
아기 예수에게는 그 어떠한 화려함이나 권위도 없었으며, 작은 몸짓과 거룩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유다가 거부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받아들인 마구간의 탄생,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역설적인 진리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 사랑의 역설을 동방박사들은 알아차렸고, 크게 실망했지만 실망 속의 더 큰 희망을 체험했다.
또한 겸손했기에 놀라운 강생의 신비를 알아차리고 경배를 드릴 수 있었다.
우리는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는가?
미소한 사건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과 섭리를 알아보는가?
실낱같은 희망의 표지를 보며, 절망과 어둠의 순간에도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가?
동방박사들은 아기에게 경배드린 다음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2,12)
그들은 헤로데의 악의 앞에서도 ‘하느님 뜻에 순종함으로써’ 아기 예수를 찬미하였다.
그렇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는 유창한 언변이나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의 찬미가 빠진 신앙생활은 얼어붙은 수도꼭지요, 구멍난 냄비와 같다.
유다 하늘의 별빛은 오늘 나의 삶이 되어 세상을 비추어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에는 별빛을 외면하는 이도 있고,
별빛을 보고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으며,
그 의미를 알고서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별빛을 보고 그 의미를 깨달아 스스로가 빛이 되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뇌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쳐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주님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에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 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 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을 알아 뵙고 진정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기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인데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립니다.
먼저 주면 잃을 것이 없는데 주지 않으려 하니까 결국은 누가 빼앗지 않아도 빼앗긴 기분입니다.
‘기쁨을 나누면 시기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헤로데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헤로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놀란 것은 저 소리를 들은 헤로데가 어찌 나올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기 말고 다른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기원전 47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던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인 미리암도 죽이고, 장모 알렉산드라도, 장남 안티파테르도 다 죽였습니다.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10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들 중에도 왕권을 탐낸다 싶으면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충분한데도 근심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 (야고 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야고 4,2).라고 말합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욕심은 그나마 지금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버림으로써 풍성함과 자유로움을 누리게 됩니다.
술에 만취한 베드로가 한참 비틀비틀 걷다가 전봇대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더니 전봇대를 잡고 서너 바퀴 빙빙 맴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전봇대에 기대어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습니다.
“큰일 났군,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렸어!”
살다 보면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심이 그 길을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헤로데는 천년만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것을 움켜잡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동방의 이방인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서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목적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 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불렀습니다)은
믿음이 있었기에 먼 길을 마다 않고 주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랍니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입니다.
주님, 이것을 해 주시면 제가 이것을 꼭 하겠습니다. 이것은 뇌물이지요.
우리가 봉헌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먼저 감사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어찌 되었든 동방 박사들은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첫 번째 예물은 황금입니다.
황금은 가장 귀한 것이었습니다.
왕권을 말합니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시고 저는 종입니다.’
두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봉헌예물을 준비하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썩지 않는 새 생명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황금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 성화의 모습으로 유향을,
또한 불사불멸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삶을 몰약의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에 하나는 선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빛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은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주님을 증언할 의무가 있습니다.
영생에로 인도된 기쁨은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전교는 우리의 소명이고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고 기쁨도 커집니다.
그러므로 예비자를 인도하시고 인도된 사람이 꼭 영세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열매 맺는 기쁨을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한 명을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게 위해서는 우리가 이 지역사회에서 더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은 앞서는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빛나게 하는 가운데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각자가 지향하고 봉헌하는 예비자를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한 왕의 부탁보다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내 계획,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 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에게 매이거나 세상 것에 묶여 천상을 놓치는 일은 결코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60,2).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인간 삶의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들은 국경도 민족도 인종도 문화도 모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선과 악이 있을 뿐이다.
사랑, 생명, 평화, 정의, 용서, 나눔은 동서고금의 선이며,
전쟁, 폭력, 죽음, 기아, 질병, 미움, 탐욕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악이라는 것이 불변의 진리다.
깨달음의 경지도, 성현의 가르침도 그렇고, 정치의 간섭을 받기 이전의 적십자사와 국경 없는 의사회의 자원봉사도 또한 그렇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출신과 지위, 빈부의 계급이, 정치를 구분하는 경계가 없고 다만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동방 박사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상의 본보기이다.
당시 근동 지역의 최고 문명국 페르시아의 상류층 지식인들임에도,
보잘것없는 변방 민족 유다인 가운데서, 그것도 마구간 구유에 누인 초라한 아기 모습에서
인류의 구세주가 될 분을 발견한 영적인 눈을 가진 분들이다.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그 힘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 어떤 가치들도 진리보다 크지 않게 여기는 태도,
가장 완전한 것을 보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도를 꼭 만나야 했던 시메온이나 안나처럼(루카 2,25-38 참조)
동방 박사들 또한 ‘진리의 현존’을 생애 단 한 번만이라도 목격하기를 소망했던 분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불확실한 이유는 단순하다.
사회적 부와 지위와 성공을 얻으면서 종교적 구원도 함께 얻어 누리려는 가치의 충돌 때문이다.
진실한 가치들은 국경이 없고 진리는 진리로 통하듯이,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삶도 오직 한 길뿐이다.
진리가 아니라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
그 진리를 깨우치려거든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의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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