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에서 왜군 정벌에 공을 세운 장수와 명군의 접반사로 활약한 관리들에게 지급된 훈공.
임진왜란(1592~1598년)이 끝난 뒤 전란의 과정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둘러싼 논의가 시작되었다. 1601년(선조 34) 녹훈(錄勳)에 관한 논의가 시작될 때에는 의주(義州)까지 선조를 호위하는 데 공을 세운 호종공신(扈從功臣)과 왜군 정벌에 공을 세운 정왜공신(征倭功臣)의 둘로 나누어 포상하기로 했으나, 1602년 음력 7월 이후에는 둘을 하나로 합쳐 녹훈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간관(諫官)들의 잇따른 건의로 다시 둘을 구분해 1604년 음력 6월 25일에 각각 호성공신(扈聖功臣)과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명칭을 바꾸고, 이몽학의 난 토벌에 공을 세운 5명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구분해 녹훈이 이루어졌다. 공신 녹권은 1604년 음력 10월 29일에 지급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궁궐에서 실시되었던 의식의 절차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선무공신은 왜군 정벌에 공을 세운 장수들과 명나라 군대에 군량 공급을 담당한 사신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호성공신, 청난공신과 마찬가지로 그 공에 따라 1등과 2등, 3등으로 나누어 녹훈했다. 그리고 1등에게는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2등에게는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3등에게는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는 봉호가 주어졌고, 모두 군(君)으로 봉해졌다.
모두 18인이 선무공신으로 봉해졌는데, 1등에는 임진왜란에서 육군과 해군을 이끈 이순신(李舜臣)ㆍ권율(權慄)ㆍ원균(元均) 3인의 장수가 선정되었다. 이들은 관작과 품계가 3단계 올랐으며, 상으로 병졸 10명, 노비 13명, 마부 7명, 전지 1백 50결, 은자 10냥, 말 1필을 받았다. 2등에는 신점(申點)ㆍ권응수(權應銖)ㆍ김시민(金時敏)ㆍ이정암(李廷馣)ㆍ이억기(李億祺) 5인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관작과 품계가 2단계 올랐으며, 상으로 병졸 6명, 노비 9명, 마부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말 1필을 받았다. 3등에는 정기원(鄭期遠)ㆍ권협(權悏)ㆍ유사원(柳思瑗)ㆍ고언백(高彦伯)ㆍ이광악(李光岳)ㆍ조경(趙儆)ㆍ권준(權俊)ㆍ이순신(李純信)ㆍ기효근(奇孝謹)ㆍ이운룡(李雲龍) 10인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관작과 품계가 1단계 올랐으며, 상으로 병졸 4명, 노비 7명, 마부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말 1필을 받았다.
그러나 공신의 선정을 둘러싸고 조정 안에서 당파 간의 대립이 벌어지면서 당시에도 선무공신의 선정이 지나치게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의 전공과도 무관하게 이루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초기에는 곽재우(郭再祐)ㆍ우치적(禹致績)ㆍ배흥립(裵興立)ㆍ박진(朴晉)ㆍ김응서(金應瑞)ㆍ정기룡(鄭起龍)ㆍ한명련(韓明璉)ㆍ안위(安衛)ㆍ이수일(李守一)ㆍ김태허(金太虛)ㆍ김응함(金應緘)ㆍ이시언(李時言) 등도 왜군 정벌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되었으나, 논의과정에서 이들은 녹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들 이외에도 의병을 이끌었던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ㆍ김천일(金千鎰)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 등이 모두 제외되었고, 일부 인물은 공이 없는데도 유력인사의 추천으로 공신에 포함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선무공신의 선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자 조정은 1605년 음력 4월 16일에 선무공신 책봉에서 빠진 9,060명을 선무공신과 마찬가지로 1등, 2등, 3등으로 구분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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