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
柳宗元(유종원)
郭橐駝,不知始何名。病僂集資,隆然伏行,有類橐駝者,故鄉人號之駝。駝聞之曰 甚善,名我固當。因舍其名,亦自謂“橐駝”雲。其鄉曰豐樂鄉,在長安西。駝業種樹,凡長安豪富人爲觀遊及賣果者,
皆爭迎取養,視駝所種樹,或移徙,無不活,且碩茂、早實以蕃。他植者雖窺伺效慕,莫能如也。
有問之,對曰 “橐駝非能使木壽且孳也,能順木之天以致其性焉爾。凡植木之性:其本欲舒,其培欲平,其土欲故,其築欲密。既然已,勿動勿慮,去不複顧。其蒔也若子,其置也若棄,則其天者全而其性得矣。故吾不害其長而已,非有能碩茂之也;不抑耗其實而已,非有能早而蕃之也。他植者則不然。根拳而土易,其培之也,若不過焉則不及。苟有能反是者,則又愛之太殷,憂之太勤,旦視而暮撫,已去而複顧。甚者爪其膚以驗其生枯,搖其本以觀其疏密,而木之性日以離矣。雖曰愛之,其實害之;雖曰憂之,其實仇之:故不我若也。吾又何能爲哉”
問者曰:“以子之道,移之官理,可乎?”駝曰:“我知種樹而已,理,非吾業也。然吾居鄉,見長人者好煩其令,若甚憐焉,而卒以禍。旦暮吏來呼曰:‘官命促爾耕,勖爾植,督爾獲;早繅而緒,早織而縷;字而幼孩,遂而雞豚。’鳴鼓而聚之,擊木而召之。吾小人綴饔飧以勞吏者,且不得暇,又何以蕃吾生而安吾性耶?故病且怠。若是,則與吾業者,其亦有類乎” 問者嘻曰:“不亦善夫!吾問養樹,得養人術。” 傳其事以爲官戒也。
郭橐駝(곽탁타)는 不知始何名(부지시하명)이라
곽탁타는 본명을 알 수 없다.
病僂(병루)하야 隆然伏行(융연복행)하야 有類橐駝者(유류탁타자)라
구루병(佝僂病)으로, 등이 솟아 숙이고 다녀 낙타와 비슷했다.
故(고)로 鄕人號之曰 駝(향인호지왈 타)라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낙타(駝)라고 불렀다.
駝聞之曰 甚善(타문지왈 심선)타 名我固當(명아고당)이로다
‘駝(타)’는 그 걸 듣고 ‘딱 좋네. 내게 꼭 맞는 이름이야.’라고 말했다.
捨其名(사기명)하고 亦自謂橐駝云(역자위탁타운)이라
제 이름을 버리고, 저 역시 ‘탁타’라고 불렀다.
其鄕曰豊樂(기향왈풍악)이니 鄕在長安西(향재장안서)라
그 마을 이름은 ‘豊樂(풍악)’이라고 하는데 ‘(長安)장안’의 서쪽에 있었다.
駝業種樹(타업종수)라
‘타’의 직업은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凡長安豪家富人(범장안호가부인)과 爲觀遊及賣果者(위관유급매과자)가 皆爭迎取養(개쟁영취양)이라
무릇 장안의 세도가, 부자들, (정원을) 감상하며 노는 이들 및 과실장사(과수원 경영자)들 모두가
다투어 그를 맞아 나무를 기르게 하려 했다.
視駝所種樹(시타소종수)면 或移徙(혹이사)라도 無不活(무불활)이오
‘타’가 심은 나무를 보면 어쩌다 옮겨 심어도 살지 못하는 게 없었고,
且碩茂(차석무)하고 蚤實以蕃(조실이번)이라
또 실하게 무성하고 잘 자람으로써 일찍 열매가 많이 열렸다.
他植者(타식자)가
다른 식목업자들이
雖窺伺傚慕(수규사효모)나 莫能如也(막능여야)러라
비록 몰래 엿보고 따라서 했지만 같게 할 수 없었다.
有問之(유문지)하니 對曰 橐駝非能使木壽且滋也(대왈 탁타비능사목수차자야)러라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길 "나 탁타가 나무를 오래 살게 하고 잘 우거지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以能順木之天(이능순목지천)하야 以致其性焉爾(이치기성언이)이라
나무의 천성을 잘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입니다.
凡植木之性(범식목지성)이 其本欲舒(기본욕서)하고 其培欲平(기배욕평)하고
무릇 나무의 본성은, 그 뿌리가 벋어 나아가기를 바라고, 그 북돋움은 고르기를 바라며,
其土欲故(기토욕고)하고 其築欲密(기축욕밀)이라
그 흙은 본래의 흙이기를 바라고, 흙을 다짐에는 빈틈이 없기(부리 주위를 꼭꼭 밟아줌)를 바랍니다.
旣然已(기연이)어든 勿動勿慮(물동물려)하고 去不復顧(거불복고)라
이미 그리고 나면 건드리거나, 걱정하지 말고, 떠나가 다시 돌아보지 않습니다.
其蒔也若子(기시야약자)하고 其置也若棄(기치야약기)면
묘목을 심을 때는 자식처럼 돌보고 심은 뒤 내버려두면
則其天者全而其性得矣(즉기천자전이기성득의)라
곧 천성이 온전해져, 그 본성을 얻게(찾게) 됩니다.
故(고)로 吾不害其長而已(오불해기장이이)요 非有能碩而茂之也(비유능석이무지야)라
그러므로 나는 나무가 자라는 걸 방해하지 않을 따름이지, 크고 무성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不抑耗其實而已(불억모기실이이)오 非有能蚤而蕃之也(비유능조이번지야)라
열매가 열리길 억누르거나 축나지 않게 할 뿐, 열매를 일찍 많이 열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他植者則不然(타식자즉불연)하니 根拳而土易(근권이토역)하고
다른 식목업자들은 그러질 않아, 뿌리를 구부리고 흙을 바꾸며,
其培之若不過焉(기배지약불과언)이면 則不及焉(즉불급언)이오
그것을 북돋는데 지나치거나 모자랍니다.
苟有能反是者(구유능반시자)인댄 則又愛之太恩(즉우애지태은)하고
또한 이와 반대로 하는 이도 있으니, 바로 사랑이 은혜로 넘치고,
憂之太勤(우지태근)하야 旦視而暮撫(단시이모무)하며 已去而復顧(이거이복고)라
걱정으로 지나치게 부지런합니다. 아침에 보고 저녁에 어루만지며 이미 간 뒤에 다시 와서 돌보지요.
甚者(심자)는 爪其膚(조기부)하야 以驗其生枯(이험기생고)하며
심한 이는 그 껍질을 긁어서 그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시험해 보고,
搖其本(요기본)하야 以觀其疎密(이관기소밀)하니 而木之性(이목지성)이 日以離矣(일이리의)라
그 뿌리를 흔들어서 성긴지 빽빽한지를 살피니, 나무의 본성이 날이 갈수록 떠납니다.
雖曰愛之(수왈애지)나 其實害之(기실애지)요 雖曰憂之(수왈우지)나 其實讐之(기실수지)라
비록 그것을 사랑한다지만 실은 그 걸 해치는 거며, 비록 그것을 걱정한다지만 사실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故(고)로 不我若也(불아약야)라 吾又何能爲矣哉(오우하능위의재)리오
그러기에 나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또 어떤 걸 할 수 있겠습니까?"
聞者(문자)왈 以子之道(이자지도)로 移之官理可乎(이지관리가호)아
질문했던 사람이 "그대의 도리로써 관청의 일로 옮겨보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했다.
駝曰(타왈) 我知種樹而已(아지종수이이)요 理非吾業也(이비오업야)라
‘타’가 말하였다. "나는 나무 심는 걸 알 뿐이지, 다스리는 건(理)내 본업이 아닙니다.
<註> 唐 3代 高宗의 이름이 ‘李 治(在位 649~683)’임으로 ‘治’를 피하고 ‘理’로 표현했음.
然吾居鄕(연오거향)하야 見長人者好煩其令(견장인자호번기령)하야
그런데 우리 마을의 관장(官長)님은 명령을 번거롭게 하기를 좋아합니다.
若甚憐焉(약심련언)이로되 而卒以禍(이졸이화)라
(백성을) 심히 사랑하는 것 같아도, 마침내 화를 입힙니다.
旦暮吏來而呼曰官命促爾耕(단모사래이호왈관명촉이경)하며 勖爾植(욱이식)하며 督爾穫(독이확)하며
아침저녁으로 관리가 와서 ‘관청의 명령이니 빨리 밭갈이를 하라, 너희들의 모종심기에 힘쓰라, 너희들의 수확을 살피라’ 소리 지릅니다.
蚤繰而緖(조소이서)하며 蚤織而縷(조직이루)하며 字而幼孩(자이유해)하며 遂而鷄豚(수이계돈)이라 하야
빨리 누에고치에서 실을 잣고, 빨리 실로 옷감을 짜라. 너희 자식을 잘 키우고, 너희 닭과 돼지를 잘 길러라!'
鳴鼓而聚之(명고이취지)하고 擊木而召之(격목이소지)라
북을 울려 백성들을 모으고, 딱딱이를 두드려 그들을 소집합니다.
吾小人(오소인)은 具饔飱以勞吏者(구옹손이노리자)라도 且不得暇(차부득가)어늘
우리 소인들은 조석 음식을 갖추어 관리들을 위로하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又何以蕃吾生而安吾性(우하이반오생이안오성)야아
또 어찌 우리들의 삶을 번성케 하고, 우리들의 성정을 편하게 하겠습니까?
故(고)로 病且怠(병차태)하니 若是則與吾業者(약시즉여오업자)로 其亦有類乎(기역유류호)아?
그런고로 병들고 게을러짐이 이와 같으니 내 직업과 또한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요?"
問者喜曰 不亦善夫(문자희왈 불역선부)아
묻는 이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 아니 훌륭하지 않은가요?
吾問養樹(오문양수)하다가 得養人術(득양인술)이로다
나는 나무 기르기를 물었다가 사람 키우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傳其事(전기사)하야 以爲官戒也(이위관계야)하노라
그 일을 전하여서 관의 경계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柳宗元(773-819)
자(子)는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 ·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
[출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