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부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새벽바람
독일 방송, 홀로코스트가 거짓 임을 폭로
역사적 진실규명 보도로 인해 전 독일이 충격에 빠지다
by Slad
"하버벡 여사는 종전 후에 그녀의 고향으로부터 인종적으로 제거되었다. 이는 다른 수백만명의 독일인이 함께 겪은 일이며 유태인이 그녀의 조국, 독일을 통치하면서 부터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심리조작과 공포를 조장해서 거대한 정신적 수용소를 만든 일이다."
“Ms Haverbeck was ethnically cleansed from her home at the end of the war along with millions of other Germans and has been victimised ever since by the Jews who run her country like a psychological gulag through mind-control and fear.”
유태대학살,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최대의 기만적 소동이다! ~ 홀로팍스~
출처 : endzog
2차대전 전후에 독일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는 역사가인 우르술라 하버벡 여사가 티비방송에서 도전적인 폭로 인터뷰를 한 내용이다. 그녀는 내놓고 현대 유럽사회주의 국가의 기본이념을 이루는 최악의 거짓을 폭로하고 부인했던 것이다.
그녀는 장년의 역사가로서, 현대 서방 정치정당 이념의 도덕적 근거에 의의를 제기하고, 또 학계와 연구계의 기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들이 종전 후에 유태대학살이라는 꾸며진 이야기를 어떻게 사회와 정치의 이념으로 바꾸었는 지를 지적했다. 독일 티비방송국은 영국 비비씨가 유태대학살을 보도한데 바로 이어 추종하는 방송을 돌렸던 것이다.
Source: endzog In one of the most amazing events to occur in occupied Germany since the second world war Historian Ursula Haverbeck made history in a defiant interview in which she openly trashed the very basis of the lie upon which all modern European social democratic states have been built. The elderly historian, brought into question the moral integrity of all Western political parties and academic institutions, exposing the official account of the second world war and the Holocaust for the lie it was on a television station which is the second largest in the world after Britain’s BBC.
독일 주요 티비 방송이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보도하자 사회적 대지진이 발생했다!
holohoax
방송은 메르켈 수상이 유태 마피아 소속이라고 내놓고 폭로했다!
수백만명의 독일인이 집의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다가, 방송에서 2차대전에 관한 진실을 보도하는 걸 보다 놀라자빠졌다. 방송은 자칫하면 아예 방송국 자체를 폐쇄당할만한 놀라운 보도를 냈는데, 독일이 유태대학살을 저질렀다는 역사적이고 또 현대 독일사회의 이념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 꾸며낸 거짓이라고 폭로했던 것이다. 이런 유태학살의 거짓이념은 독일 이전 수도 본에 자리잡은 유태인 집단이 꾸며낸 짓이라 했다. 그들은 본에서 초국적의 금권력을 형성하고서 이런 끔찍한 거짓을 만들어서 독일을 공포속에 통치할 계략을 꾸민 것이다.
Millions of surprised Germans sat on the edges of their sofas and gasped as for the first time in their lives the truth about the second world war was brought into their living rooms as the second largest broadcaster in the world took the risk of being shut down for the illegal offense of transmitting Holocaust denial by the criminal transnational Jewish financial occupation regime in Bonn.
우르술라 하버벡 여사의 역사적인 인터뷰, 영어자막
Ursula Haverbeck: The Panorama Interview, with English Subtitles
This 49' video was published by KZ Kladderadatsch on May 14, 2015:
https://www.youtube.com/watch?v=WPa_QeV9KDM
일어나라, 나의 국민이여, 말을 타며 기수를 잡아라! - 우르술라 하버벡
편집자 논평 Publisher's comments:
2015년에 우르술라 하버벡 여사는 역사적인 도전적 인터뷰를 내놨다. 그것은 우리시대에 독일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정치적 이념을 그녀가 전면부인하는 유태학살의 허구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독일 방송에서!
역대급 사회적지진이 발생한 순간이었다!
In 2015, Ursula Haverbeck made history in a defiant interview in which she threw down the gauntlet to the biggest taboo of our times. Revisionism . . . on German TV! A seismic event.
Interviewer: Robert Bongen. (이하는 우르술라 하버벡 여사 인터뷰 초록, 편집자)
-이하 길어서 생략, 원문보기는
http://blog.daum.net/petercskim
<참고 기사>
[펌] 한 독일인이 본 히틀러 시대
by 텐구아레스 posted Aug 24, 2013
제3제국에서의 삶, 그리고 당시와 현재의 정치적 상황
ReinholdLeidenfront.jpg
by Dipl. Ing. REINHOLD LEIDENFROST
(This speech appeared in the weekly newspaper, Der Schlesier, July 26-August 16th, 2002.)
http://www.thenewsturmer.com/OnlyGerman/Autobahn/Lifeinthe.htm
제가 히틀러 시대의 삶이 진정 어떠했는지를 여러분께 알려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대중매체는 의도적으로 그 시대에 대해 부정직합니다.
나는 아이가 일곱인 한 튜링지아 농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난 히틀러 시대의 독일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나는 공인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튜링지아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습니다. 아버지가 열차사고로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장학금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장학금과 생활비를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시에 나같이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장학금으로 서부 독일에서 공부를 마쳤는데 그래도 생활비는 내가 벌었습니다. 학교를 나온 뒤 6년간의 사회생활을 거쳐 나는 서부 독일에 있는 한 큰 회사의 엔지니어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 내 회사를 차렸습니다. 기술 관련 회사였는데 우리가 만든 발명품들과 신기술들은 독일인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감지되고 있는 쇠락과 계속되는 실패는 전후 정치체제와 이에 종속된 정치인들 탓입니다. 전후의 서독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전쟁에 나갔다 살아 돌아온 젊은이들 말입니다. 이들과 함께 조국의 남자와 여자들이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이는 많지만 경험이 풍부한 기업가, 중간 관리자들 또한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 분들은 매일같이 미국과 영국의 폭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생산량을 증가시킨 분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동포애를 바탕으로 독일을 재건했습니다.
서독연방(Federal Republic of W. Germany)은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우리에게 제시된 임시적 형태의 국가였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제도권의 정치인들은, 색깔이 무엇이든, 이 위헌적인 한시적 체제를 항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어떤 정치인도 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습니다. 독일제국과 이의 정통성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단지 기능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독일 국민이 1933년에 선출한 지도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연합국은 황당무계한 뉴렘버그 전범재판이란 것을 만들어 그들을 모조리 처형했습니다!
전쟁은 독일민족공동체의 정신을 죽이지 못했다
여기 한 예가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Ruhr의 산업지역은 완전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그나마 남아있던 기계들을 다 뜯어갔습니다.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요. 아시겠지만 소련도 동부에서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노조가 영국이 1만 톤짜리 초대형 프레스 기계를 뜯어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 총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 프레스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컸던 프레스로 우리에게 경제적 우위를 부여했던 기계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노조의 지도자들이 진정한 독일인이었다는 겁니다. 이 기계를 빼앗기고 안빼앗기고에 수많은 일자리와 민족 보존의 문제가 걸려있었습니다. 이 파업투쟁 대회에는 Ruhr지역의 기업계 대표들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싸워서 이 기계를 지키자는 노조 지도자들의 열띤 연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한 기업가가 발언권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전쟁 동안 우리가 그 기계를 써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는가. 그러니 그 기계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았다.그냥 가져가라고 해라. 대신 우리가 힘과 지혜를 모아 새것을 만들자. 더 크고 나은 것으로!” 순간 대회장에 새로운 분위기가 찾아들었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한마음이 되어 “옳소, 그렇게 합시다! 옳소!”를 외쳤습니다. 그 기업가의 말이 노사를 떠나 독일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렇게 독일민족공동체 정신은 독일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에서 노동자와 사용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란 두개의 적에 맞서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역자:자본주의는 사유재산권에 기초한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에 기초한 금융자본의 지배, 억압,수탈을 의미함; 공산주의는 covert 유대인 제국주의)
결국 영국인들이 그 낡은 기계를 가져갔습니다. 아마 지금 영국 어디선가 녹슬고 있겠지요. 그리하여 당시 우리 젊은 기술자들은 그 기업가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가장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새 프레스 기계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 기계들은 서독에 번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영국, 미국 등의 전승국들을 앞지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당시 영국에선 그때까지 기계 가동을 기름으로 돌리는 벨트-트랜스미션에 의존하고 있었고 공장설비들도 모두 몇십년씩 낙후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우리 독일에선 이미 전기로 기계들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우리가 전후 영국을 앞지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영국 자동차 회사들이 결국 다 독일인들에게 인수된 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똑똑하고 효율적이니 자본주의 영국이 독일을 그리 미워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유대국제금융은 근면하고 용감한 독일인들을 쳐부수라고 전 세계를 2차대전에 몰아넣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에선 노동자와 사용자가 하나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원칙이 엄수되었습니다. 따라서 불순한 정치적 목표를 위해 양측을 이간질하려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들에선 정반대입니다.
저도 사업을 하면서 이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옳은 원칙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좋은 발명품이 있다 해도 노동자가 없으면 사장 혼자 어떻게 이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기술을 개발하고 현명한 사업적 결정들을 내려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용자 없이 노동자들이 어떻게 먹고 살겠습니까. 양자의 관계는 이렇게 명약관화한 것입니다.
민족의식, 사회공동체 의식이 있는 사용자와, 그에게 고용된 노동자는 엄연히 한 팀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노사가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일한 것과, 유대자본의 금본위제에서 탈피한 것이 제3제국 부흥의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랬기 때문에 독일이 베르사유 평화체제가 남긴 상처와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1차대전의 전승국들은 더 이상 독일을 약탈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있건 없건, 높건 낮건, 민족의식, 동포애, 애국심을 근간으로 국민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국가를 꾸려가야 한다는게 히틀러식 사회주의, 즉 복스게마인샤프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훌륭한 개념은 혐오의 대상이거나 누구도 거들떠 볼 생각을 안 합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겐 민족의식, 동포애와 같은 개념조차 없습니다. 이들은 서방 유대인 자본가들의 하수인입니다. 이들은 “더 많은 합병이 있어야 경제가 발전한다”는 식의 거짓말로 국민을 기만합니다.이제 독일인들의 일자리를 없애는 일도 이 정치인들이 섬기는 자본가들이 결정합니다. 그러니 이 허구적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사의 갈등은 만성화가 되었습니다. 독일의 노동자들이 다시 한 번 서방 자본가들의 축구공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와 글로벌리즘의 요체이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이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소위 “바이마르 민주공화국” 시절엔 실업자가 6,7백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뒤 2년 반 만에 이들의 대부분은 일자리를 되찾았고 5년 뒤 독일에선 실업자가 사라졌습니다. 히틀러의 적들은 오늘날 그가 오직 독일의 재무장을 통해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군수산업이 독일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오직 1939년에 이르러서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그 해 말입니다. 여기 수치가 있습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방위산업이 독일 GDP에서 차지했던 비중
1933/34 RM 1.9 billion(십억) = 4%
1934/35 RM 1.9 billion = 4%
1935/36 RM 4 billion = 7%
1936/37 RM 5.8 billion = 9%
1937/38 RM 8.2 billion = 11%
1938/39 RM 18.4 billion = 22%
위의 수치들은 전쟁을 일으킬 의도로 재무장을 해서 독일이 대공황에서 탈출했다는 연합국 사람들의 주장이 거짓말이거나 무지의 소산임을 입증해줍니다. “바이마르 민주공화국” 시절의 참담한 경제적 상황은 1차대전 패전과 함께 독일에 찾아들었습니다. 전쟁 말기 영국은 독일을 완전히 둘러싸고 해상을 봉쇄했었습니다. 우리를 굶겨 죽이려고 말입니다.
H.C. Peterson 교수는 “전쟁을 위한 프로파간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918년까지 763만 명의 독일인들이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한 영양실조와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약자나 여자, 아이들, 즉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Charles C. Tansill은 또 “전쟁으로 향하는 뒷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의 휴전협정 이후에도 해상봉쇄는 수개월간 계속되었다. 연합국 정부들은 수백만의 독일인들이 굶주리고 있었음에도 그 어떤 식량도 독일에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
이미 그때 그들은 독일민족을 죽여 없애기로 결정했다
영국 해군성 장관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총력을 다 해 독일의 여자와 아이들을 굶겨 죽이려 했다.”
그때 이미 영국의 비중 있는 정치인이 되어있었던 처칠은 런던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이 향후50년 내에 무역 강국으로 재부상 한다면 1차대전에서 우리는 헛 싸움을 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대한 증오심의 결정체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당시 돈 1천억 마르크 상당의 금 보유고를 승전국들에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이겼던 1871년 보불전쟁에서 우리가 프랑스에게 요구했던 것은 원래 우리 땅이었던 알사스 로렌과 50억 프랑뿐이었습니다.
독일이 말도 안 되는 이 “배상금”을 낼 돈이 없자 프랑스는 Ruhr와 라인란트를 강점하고 여기서 생산되는 석탄을 프랑스로 빼돌렸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몰상식한 액수의 배상금을 금으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의 금 보유고는 바닥이 났습니다. 그러니 마르크화가 뒷받침도 없이 공중에 붕 떠버린 것처럼 되었습니다.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습니다. 수많은 독일 사람들의 저축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버렸습니다. 그때 당시 빵 한 조각이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20억 마르크였습니다. 이 인플레이션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버터 1파운드가 2조 마르크였습니다. 한마디로 지폐가 돈이 아니라 그저 종이쪽지일 뿐이었습니다. 이 인플레이션은 1924년 신 지폐의 등장과 가치 조정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도 실업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적인 생필품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식량은 더 그랬습니다.
독일인들에게 “바이마르 민주공화국” 하면 떠오르는 것은 실업과 굶주림, 난방도 없이 지내야 하는 겨울, 그리고 절망뿐이었습니다. 살기가 힘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시 나라 전체에 퍼져 있었던 빈곤의 가장 큰 희생자는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이 모두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때 독일에 자그마치 32개 정당들이 난립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의 태생적 결함에도 책임이 있었던 거지요. 결국 비상수단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등신 같은 정치인들과는 달리 이런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해결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나는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남았나?
매일같이 실업자 대군이 도시를 빠져나가 시골로 향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릴 음식을 구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도시의 실업자들은 농장을 찾아다니며 먹을 것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그들은 추수된 감자밭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혹시 거둬가지 않은 감자가 한두 톨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말이죠. 일자리가 있는 노동자들도 겨울에 석탄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산림감시원에게 1마르크를 주고 “벌목허가증”이란 것을 받았습니다. 이 허가증이 있으면 숲속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거나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모아 땔감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 이랬기에 당시 나라 여기저기서 숲들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우리나라의 숲들이 항상 현재와 같았던 게 아닙니다. 손수레를 미는 사람들의 행렬이 숲으로 향하는 광경은 겨울이 다가오면 매일같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서방의 위선적인 유대인 지식인이나 뭘 모르는 언론인, 식자들은 바이마르 시대가 “독일 민주주의의 황금기”였다고 나불댑니다. 근데 그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황금기였다는 말입니까? 독일을 움켜쥐고 있었던 유대인 은행가들과 그들의 정상배 하수인들을 위한 황금기였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당시 굶어죽고 얼어 죽었던 수많은 독일 사람들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자 조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민들을 못살게 구는 공산당
튜링지아의 농민들은 거의 다 소작농이었습니다. 재산은 없고 빛만 가득한 농가들이 많았죠. 그럼에도 빨갱이들은 이들에게 콩알만한 땅이 있다하여 지주로 여기며 적대시했습니다. 우리 집도 이런 빨갱이들 무리에 여러 번 약탈을 당했습니다. 도둑놈 강도 주제에 이들은 아주 거만하고 무례했습니다. 우리의 상전이라도 되는 것 마냥 식탁에 음식을 차리라고 명령하는 놈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주면 집에 불을 지를 테니 있는 거 다 줘서 빨리 내보내자고.” 실제로 빨갱이들이 불을 질러 오갈데가 없어진 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는 매일같이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는 도저히 계속 살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얼마 뒤 히틀러가 돌격병대(S.A.)를 창설하자 빨갱이들이 농촌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러다가 1933년 1월30일 히틀러가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했습니다. 그가 넘겨받은 소위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독일은 완전 파산상태였습니다. 승전국들에 털릴 대로 털려 국고도 텅 비어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는 우리에게“빵과 일자리”를 약속했고 또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현재의 “독일 땅에 세워진 제2차 민주공화국”의 거짓말하는 정치인들과는 달리 말씀입니다. 우리는 히틀러가 이 정치인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독일의 경제발전을 위해 유대인 국제자본가들에 손을 벌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손을 벌린다는 것이 이들의 이자-노예 시스템에 빠지게 되는 것이란 걸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복스이코노미”는 자본주의 하에서 부채에 찌들게 된 현 시스템과 정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복스이코노미”를 실현하기 위해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인 발상들을 도입했습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방법들로 국가경제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이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물론 해외 자본가들은 이 모두에 심통이 잔뜩 나있었죠. 불행히도 이 “복스이코노미”란 것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들은 히틀러가 얼마나 독창적인 방법들로 경제를 일으켰는지 꼭 아셔야 합니다. 집권 후 히틀러 정부는 먼저 “겨울나기 기부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이 캠페인의 구호는 “그 누구도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을 것이다!”였습니다.
정부는 성금을 모아 도시와 산악지역의 빈민들을 구제했다
이 캠페인은 1등급의 사회운동이었고 또 크게 성공했습니다. 해당지역의 빈민들도 그냥 기부금과 구호품을 받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손재주를 살려 목각제품과 유리제품 등을 만들어 기부자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이것을 받은 기부자들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는 증표로 제품을 내보이며 자랑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부 캠페인에 참여했죠. 또 빈민들이 만든 제품이 우수해 정식으로 시장이 형성되는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집권 초 히틀러 정부는 수백만의 실업자들에게 빵과 일자리를 제공하고 동시에 독일의 도로망을 현대화하기 위해 세계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 건설에 나섰습니다. 오직 독일에서 나는 자재들만 사용해서 말입니다. 아스팔트는 기름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기름이 안 나오니 외국에서 수입해올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우리에겐 달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콘크리트 판들입니다. 다진 흙 위에 이 콘크리트 판들을 깐 겁니다. 아우토반 건설에 들어간 자재들은 모두 자급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토트 박사와 도프뮬러 박사와 같은 인재들이 큰 역할을 했죠.
아우토반에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게 된 독일 노동자들
volkswagen%204.jpg
독일 자동차업계에서 제시한 한 대당 가격은1350-1600 제국마르크였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대중보급형 자동차의 개발을 구상하게 됩니다. 그는 이 일을 포르쉐 박사에게 맡겼고 여기서 탄생하게 된 게 풍댕이차 폭스바겐입니다. 여러 가지 신기술이 들어간 차였지만 값은 세계에서 가장 저렴했죠. 당시 이 차의 가격은 995제국마르크였습니다. 할부로 구입할 수도 있었죠. 폭스바겐이란 이름은 히틀러가 직접 지은 것입니다. 2차대전에서의 패전도 히틀러가 지은 이 폭스바겐이란 이름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거리에서 폭스바겐을 볼 때마다 이 점을 생각해보십시오.
유대국제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독일은 자급이 가능한 재료들로 타이어를 만들었습니다. 석탄을 중합(polymerization)시켜 인조고무를 만들었죠. 메르세부르크에 있는 부나공장이 바로 이를 위해 세워진 공장입니다. 독일산 인조고무는 진짜 고무보다 더 강하고 질겼습니다.
차가 달릴려면 또 가솔린이 필요한데 달러가 없어 우리는 기름을 수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의적인 우리 독일인들이 만들어낸 게 석탄에서 추출해 만든 합성연료입니다. 역시 메르세부르크에 있는 류나공장이 이 작업을 담당했습니다. 남아공에선 아직까지 이 기술로 연료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화학자인 피슈너 박사와 트로피시 박사의 작품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은 또 옷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면화 역시 달러를 주고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품목이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가 대체 섬유의 연구개발을 지시해서 탄생한 게 전보다 실용성이 강화된 독일산 레이온 섬유입니다. 이 섬유를 생산했던 공장들은 아직까지 슈워르차, 튀링겐에 남아 있습니다. 독일산 양모를 섞어 만든 이 레이온은 입기에 아주 편한 옷감을 제공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강요된 2차대전에서 패한 뒤 미국은 전리품으로 이 독일산 레이온의 특허를 훔쳐갔습니다. 그 뒤로 미국은 달러를 받고 우리에게 레이온 의류를 팔았습니다.
독일 철강업계는 부족한 철광석을 어떻게 확보했나?
달러가 없어 질 좋은 스웨덴산 철광석을 사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스웨덴산 철광석의 함철량은 81-85%였습니다. 그래서 또 고안된 게 “크룹-렌 과정”이란 기술입니다. 이 기술 덕분에 독일 철강업계는 함철량이 23-26% 밖에 안되는 국산 철광석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뭐든 자급자족 형태로 문제들을 척척 해결해 나가다보니 영국과 미국의 유대인 금융가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죠. 그러니 저들이 ‘독일을 이대로 가만 놔두면 안되겠다’, 또 ‘독일도 독일이지만 다른 나라들이 독일의 본을 따른다면 어찌 되겠는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겝니다.
히틀러는 또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주택과 아파트들을 건축했습니다. 노동자 가족들은 정부로부터 10년 만기로 넉넉한 융자금을 받아 널찍한 아파트나 주택에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신혼부부가 애 하나를 낳으면 융자금의 25프로가 탕감되었습니다. 그러니 애를 넷 낳으면 갚을 돈이 없어지는 것이었죠. 이에 대한 히틀러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출산을 장려하여 더 많은 인구가 경제에 유입되게 하는 것이 융자금 회수보다 국민소득과 세수 증대에 더 큰 기여를 할 것이다.’ 히틀러가 지은 집들은 생활의 질과 위생적인 환경을 고려해 잘 만들어진 집들이었습니다. 출범 후 1933년 말까지 히틀러 정부는 이런 집을 202,119채 신축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4년 동안 모두 1,458,128채의 집들이 지어졌습니다.
또 히틀러 정부는 노동자에게 부과되는 월세가 26제국마르크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당시 노동자 평균소득의 8분의1정도 수준이었습니다. 전문직 종사자들에 대해선 45제국마르크라는 상한선이 설정되었죠. 그러니 지금의 월세 수준이 어떤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히틀러의 독일에서 금융위기와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모두가 히틀러의 탁월한 영도력 아래 근면하고 창의적인 우리 독일민족이 이루어낸 업적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과를 거두다보니 자연히 자신감도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유대인 자본가들로부터 자유로운, 말 그대로 자주독립 국가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히틀러 밑에서 이런 나라였다는 점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나는 농촌 출신입니다. 그러니 히틀러가 농촌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920년대의 大인플레이션으로 농가들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때 당시 독일 내부와 외부의 유대인 투기꾼들이 몰려들어 엄청난 이득을 챙겼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 독일에 가면 고작 몇 달러로 농장이나 공장 하나를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독일에 몰려왔습니다. 또 이때 당시 은행 빛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농장을 빼앗겼습니다.
DeutschesM%C3%A4del.jpg
당시 농민은 독일에서 가장 저소득층이었는데 히틀러는 이들을 위해 집도 많이 지어주었습니다. 1933년 한 해에만17,611채가, 그리고 그 후 3년 동안 모두 91,000채의 농민주택이 신축되었습니다. 이렇게 히틀러가 취한 다 방면의 조치들로 독일 농민들의 경제상황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국제무역
집권 후 히틀러가 금본위제를 폐지했기 때문에 독일은 물물교환 체제로 다른 나라들과 무역을 진행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영국식 금융체제로부터 자유로웠던 국가들은 이와 같은 거래방식에 기꺼이 응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물물교환 방식으로 스페인, 포르투갈과 같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같은 남미 국가들에 기계를 수출했고 철광석, 커피, 열대과일 등을 교역국들로부터 수입했습니다. 우리가 공정성을 철저히 유지했기에 이들과의 무역에선 그 어떤 잡음이나 마찰도 없었습니다. 이들 나라들은 아직까지 독일의 좋은 친구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수출한 상품들은 달러로 환산되지 않았기에 뉴욕 월가의 투기꾼들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니 이런 식의 달러를 쓰지 않는 무역 방법은 영국과 미국의 유대금융세력에겐 눈에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로선 어떻게든 독일을 파괴해야 했습니다.
독일에 대한 최초의 선전포고는 히틀러가 집권하고 3주 후에 유대인세계의회에 의해 행해졌습니다. 이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1933년 3월24일자 런던 데일리익스프레스에 의해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다음은 이 기사의 일부입니다: “전 세계1400만 유대인은 동포를 핍박하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세계 유대인은 중세시대와 같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은행가든, 상점주든, 행상꾼이든 모든 유대인이 생업을 중단하고 히틀러의 독일에 맞선 聖戰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세계 유대인은 독일에 사는 그들의 동포들이 걱정돼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 게 아니었습니다. 히틀러가 금 대신 오로지 독일국민의 생산성에 의해 뒷받침되는 통화체제를 도입하자 유대인 은행가 하이에나들은 독일의 경제를 더 이상 수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세계의회의 선전포고 이틀 후 독일의 시온주의연합은 미국의 유대인 사회 지도자들에게 이런 텔레그램을 보냈습니다. “反독일 흑색선전을 목적으로 독일 내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을 왜곡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라. 우리는 유대인이 그들이 거주하는 국가 외의 그 어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시도에도 반대한다. 당신들의 반독일 프로파간다는 오직 독일 내 유대인들의 민권과 경제적 위치를 위협할 뿐이다.”
이런 독일 유대인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국제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들은 독일에 대한 비방, 거짓말 공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험악해져갔습니다. 소위 ‘중립국’이라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7년 10월 5일 시카고 연설에서 독일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무역봉쇄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위선적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이 전쟁에 관련되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 하에서도 나는 평화노선을 견지할 것입니다. 미국은 전쟁을 증오합니다. 미국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駐美 폴란드 대사였던 제르지 포톡키는 駐佛 미국 대사 윌리엄 뷸릿과의 1938년 11월 21일 회견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뷸릿이 얘기하길, “독일과의 전쟁에 6년이 소요될 것이며 루즈벨트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을 참전시킬 것이다.” 또 포톡키 대사는 뷸릿이 독일에 대해 극도의 감정과 증오심을 드러냈다고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포레스탈 미국 해군성 장관은 1945년 12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조 케네디와 골프를 쳤다... 케네디의 시각은 독일이 소련과의 일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으나, 만약 1939년 여름 폴란드 문제와 관련하여 루즈벨트와 뷸릿의 재촉만 아니었다면 영국이 독일과 개전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워싱턴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간섭과 압력만 아니었다면 프랑스나 영국이 폴란드의 국경문제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얘기였다...그에 따르면 체임벌린은 미국과 국제유대인이 영국을 독일과의 전쟁에 몰아넣었다는 심정을 피력했다고 한다.”
1938년 유대인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를바없는 행위를 여러 차례 되풀이 했습니다. 미국의 언론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유대인은 미국인들에게 독일 상품을 보이콧하라고 선동했습니다. 또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이 독일 상선들에 폭탄을 장치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운동 지도자 빌헬름 구스틀로프와 파리주재 독일 외교관 폰 라쓰가 유대인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독일에 대한 이러한 적대적 행위들은 결국 독일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상점들에 대한 보복적 차원의 보이콧으로 이어졌습니다. 먼저 선전포고를 한쪽도 유대인이었고 결국 연합국들을 독일과의 전쟁으로 몰아넣은 자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유대인을 적국의 시민으로 간주하여 전시에 이들을 통제, 감시 할 수 있도록 게토나 수용소에 구금시켰던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독일 유대인의 안위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반독일 흑색선전을 중단해달라는 여러 차례에 걸친 호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의 유대인들은 총통과 제3제국에 대해 끊임없이 비방과 중상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있어 그들은 지극히 추잡한 묘사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그들은 독일이 1945년 5월8일 무조건 항복했을 때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독일인은 그 후로 그들의 손아귀 안에 머물러왔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후대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정치인들과 매스미디어가 이들에게 진실을 얘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940년 7월 19일 제국의회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영국과 친구가 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데 대해 나는 아직도 매우 슬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영국이 친구가 되었더라면 두 나라 국민들에겐 큰 축복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히틀러는 특별열차를 타고 자주 베를린과 뮌헨을 오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열차가 보일 때마다 들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일을 멈추고 손을 흔들거나 독일식 경례를 했습니다. 히틀러는 우리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내 아버지는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6개월에 한 번씩 재무부가 임명한 세리에게 토지세를 냈습니다. 그 세리의 집이 우리 집에서 150미터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세금을 내러 갈 때마다 당신이 소유했던 가장 좋은 양복을 입고 가셨습니다. 그에게 조국에 세금을 내는 일은 명예롭고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이런 태도와 요즘 정치인들이 그들의 세금 문제와 관련하여 보이는 추태들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히틀러는 폭력이 아니라 민주적 선거에 의해 집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일국민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바이마르 시대에 경찰들이 썼던 고무곤봉도 그가 없앴습니다. 그 혼란스러웠던 시절 사정없이 시위자들을 두들겨 팼던 그 곤봉 말입니다. 정부는 국민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꼈고 국민은 정부를 신뢰했습니다. 어느 쪽이 다른 한쪽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일 국민들의 총기소유도 자유로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제는 불법입니다. 그때는 범죄율도 극히 낮았습니다. 마약 문제와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고요.
히틀러 시절, 노동자들은 유람선을 타고 해외여행을 즐겼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푼돈으로 “빌헬름 구스틀로프”, “로버트 레이”, “캡 아르코나”와 같은 대형 유람선을 타고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 배들은 모두 최신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유람선들의 입항을 금지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독일 노동자들이 누리게 된 혜택을 영국 노동자들이 못보게 하려 말이죠. 그래서 이 유람선들의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 그리고 스페인 연안도시들과 섬들이었습니다.
히틀러 시절 우리는 삶의 질이 새로운 차원에 진입했음을 확연하게 느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앞날이 캄캄했는데 히틀러가 집권하자 새 지평이 열린 겁니다. 그래서 당시 다른 나라들에서도 독일을 배우자고 난리가 났었죠. 많은 이들이 그들의 자녀를 독일에 유학 보냈고 또 “복스이코노미”와 독일의 기술을 배우자고 많은 외국인들이 독일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유대인의 금 없이도 국민의 의지와 두뇌, 그리고 근면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과시했습니다. 독일 모델은 지구상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획기적인 경제발전 시스템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해외의 유대인 자본가 적들은 히틀러식 체제를 자신들이 운영하는 미-영 국제금융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죠. 생각해 보세요. 2차대전후 얼마나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유대-미국-영국 국제금융의 이자-노예 시스템에 의해 수탈을 당해 경제가 파탄났습니까?
"종속적인 관계는 필연적으로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킵니다. 예를 들어 2001년부터 2007년 상반기까지 해외 투자자들이 우리나라에 투자한 돈은 1896억 달러인데, 투자 수익은 3309억 달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투자자들이 해외에 투자한 돈은 2662억 달러인데, 투자 수익은 507역 달러였지요. 이것을 산술적으로 비교해보면 약 2800억 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간 겁니다. 바로 이 때문에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외국인 투자자들 수중으로 흘러 들어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국부가 끊임없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국내의 분배구조가 악화됩니다. 수출 중심의 대기업과 관련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을 버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더 어려워지는 거죠. 이것이 바로 빈부 양극화의 원인이에요." - 처음 만나는 진보(2010), 198쪽
독일은 약탈자들이 손댈 수 없는 나라였다
Boers.jpg
세계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렇게 자랑합니다, “우리에겐 금(金)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다!” (편: 이들은 금으로 번영이 아니라 빈곤을 창조한다!)
이렇게 히틀러와 그의 능력 있는 동지들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존의 국제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新정치-경제 체제를 창조해낸 겁니다. 우리가 성공을 거듭하자 세계 금값이 떨어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금값 하락은 이 국제자본가들에겐 재앙을 의미했죠. 그래서 이들은 전쟁을 일으켜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구현된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박멸하려 했던 겁니다.
그리하여 1939년 유대국제자본 치하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보호를 빌미로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미국도 아마 당시 국내의 강한 반전여론만 아니었다면 이때 같이 참전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독일에 강요된 2차대전에서 5천5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독일인은 1천1백만이 죽었습니다. 이 중에 수백만이 여자와 아이들이었어요.
연합국을 지배한 유대인 자본가들은 이 전쟁으로 독일민족의 씨를 말리려 했습니다. 경제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으려 했죠. 그 자들이 하늘에서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폭탄을 쏟아 부었습니까. 이 전쟁은 연합국 최정상에 있었던 유대인 자본가들과 이들의 정치적 하수인들이 그들의 국민을 속여가면서까지 일으킨 엄청난 살육극이었습니다. 그들의 세계권력과 금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요즘과 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진실은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진실을 알려는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가 왜 2차대전이 일어났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소위 “냉전” 체제로 독일민족은 잠시 동안 절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독일의 소위 “국민의 대변자”라는 의회 정치인들이 다문화주의로 독일민족의 해체를 꾀하고 있습니다. 왜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이 국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제3세계 이민을 받아들여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도 모르게 만드는 것입니까. 나라의 정체성이 걸린 중대한 문제인데 이에 대해 국민은 왜 한 마디도 할 수 없습니까. 제도권 미디어에선 이 문제에 대해 아예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2차대전의 진상을 은폐하는데는 온갖 수단이 동원됩니다. 히틀러와 그 살기 좋았던 제3제국에 대한 거짓말과 모략, 날조가 판을 칩니다. 히틀러가 살인마요 범죄자였다는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광기에 찬 히틀러가 독일국민을 홀려 불쌍한 유대인을 말살하고 전 세계를 정복하려 했는데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과 동구의 소비에트 민주주가 힘을 합쳐 자유를 수호하고 인류를 구원했다.” 한마디로 웃기는 얘깁니다. 참으로 수치심도 없고 뻔뻔한 자들이나 할 수 있는 거짓말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독일 정치인들이나 유대인 소유 대중매체들은 이런 거짓말로 독일의 젊은 세대를 기만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독일 애국자가 진실을 알리면 잡아서 감옥에 처넣습니다. 독일헌법 5조에 의해 발언, 표현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독일연방공화국의 빛이 2조3천억 마르크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물적인 금액입니다. 공식통계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실업자가 5백70만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50만 정도 더 많을 것입니다. 정부가 이런 태산 같은 빛 더미에 앉아 있으니 히틀러 시대의 대규모 일자리 창출 사업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지요. 재정적으로 봤을 때 독일연방은 끝장난 상태입니다. 히틀러 치하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날 우리 독일이 경제적으로 퇴보하고, 또 문화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은 전쟁에서 이긴 유대인들이 그들의 자본주의, 또는 허구적 민주주의 체제를 독일민족에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독일의 전통적 가치관들에는 접근도 못하게 하여 위대한 문화적 유산을 간직한 우리 민족을 파괴하는 게 저들의 목표입니다. 반역은 극형으로 다스리는 게 정상입니다. 국민의 의사와는 반대로 독일을 다문화사회로 만들려는 정치인들은 다 사형감입니다. 왜 국민에게 제3세계 이민이나 다문화사회와 같은 중대한 이슈에 찬반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입니까?
지금 “민주주의” 독일연방에서 제일 중요한 이슈들에 대한 국민들의 발언권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법원이나 언론은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실제 권력자들의 허수아비들일 따름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존 스윈턴이 1914년 언론인들의 한 모임에서 이렇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무슨 자유언론인가? 우리는 자본가들의 시녀일 뿐이다!”
2차대전은 국가사회주의의 성공과 번영을 방치할 수 없었던 유대인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치적 허수아비들이 독일에 강요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엄청난 수적, 물자적 열세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고리대금업에 기초한 기생적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전쟁을 일으켜야 지탱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생산적 노동에 기초하는 국가사회주의는 훨씬 더 나은 체제입니다. 그때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간 일이 있는데 그 때 만난 한 흑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히틀러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2189544775_8a5c258483.jpg
출처 - http://blog.chosun.com/nagaduju/7104300
로이드 조지 前 영국수상
"나는 막 독일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와 같이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한 것을 모든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동안 먼거리에서 언론의 망원경을 통해서, 그리고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얘기를 접하여 만들어진 인상보다는 좀더 정확한 것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그 유명한 독일의 지도자를 만났으며 또한 그가 이끌어낸 대변화를 목격했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 물론 그의 방법은 당연히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그것은 아니다 - 독일국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서로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 그리고 그들 모두의 사회적, 경제적 전망에 있어 그는 실로 경이로운 변화를 이룩해냈다는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4년만에 그들의 운동이 새로운 독일을 만들어냈다는 그의 주장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내가 보고 돌아온 독일은 망가지고 실의에 빠진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감에 잠겨있었던 세계대전 후 10년 동안의 독일이 아니었다. 오늘의 독일은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으며, 국경밖에 있는 그 어떤 세력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결의로 충만해 있다. 오늘 독일에는 전쟁이 끝난 이후 처음으로 국민들 사이에 안정감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전보다 쾌활해졌고 독일 전역을 통해 이러한 명랑한 기운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오늘의 독일은 이전보다 행복해진 독일이다. 나는 모든 곳에서 이러한 모습을 목격했으며 방문 중에 만났던 독일을 잘 아는 영국인들 또한 이러한 변화에 대해 감탄을 표시했다.
한 남자가 이 기적을 일으켰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흡인력,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초지일관하는 자세, 강철같은 의지, 그리고 담대한 마음을 지닌 그는 타고난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단지 직함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로부터 국가의 안보를 확립했다. 그는 또한 항상 독일국민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굶주림의 공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실로 굶주림은 지난 전쟁의 마지막 해와 평화의 첫 번째 해 독일국민의 심신에 각인된 고통이었다. 그 어두웠던 시절 7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비극이 남긴 영향은 당시에 태어났던 사람들의 체형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히틀러는 그와 같은 절망과 빈곤, 그리고 오욕으로부터 그의 조국을 구해냈고 오늘날의 독일국민은 그에게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국민들 사이에서, 특히 독일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가 누리는 인기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나이든 세대는 그를 신뢰하고 젊은 세대는 그를 숭배한다. 이는 단지 인기있는 정치인에 대한 호감의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굴욕과 절망으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민족적인 영웅에 대한 숭배이다. 어떤 형태로든 히틀러 총통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 있을 때 나는 나치당의 고위인사들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히틀러 그 자신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은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군주국가의 국왕처럼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사실 그는 국왕 이상이다. 그는 모든 억압자들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독일의 조지 워싱턴이다. 히틀러가 독일인의 가슴과 영혼 속에 어떻게 군림하는지를 실제로 보고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나의 기술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모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뛰어난 민족은 단지 히틀러가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욱 많이 희생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더욱 굳은 결의로 싸울 것이다. 이러한 핵심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일이 지닌 현재의 잠재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 The Daily Express, November 17, 1936
Sir Hartley Shawcross - 영국 법무장관 (前 뉘른베르크 재판 연합국 검사)
“한걸음, 한걸음씩, 나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목표가 대단히 음험하고 치명적인 것이란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는 소련군의 검사들과 함께 나치의 침략행위와 만행을 처벌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히틀러와 독일국민이 전쟁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던 것은 우리 영국이었습니다. 소위 ‘힘의 균형’이라는 우리의 외교원칙과, 특히 루즈벨트를 감싸고 있었던 "미국인들"의 영향력 하에서 독일을 파괴할 목적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전쟁에 개입하지 말라는 히틀러의 탄원도 무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히틀러가 옳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우정과 협력을 제시했던 히틀러를 무너뜨린 1945년 이후로 우리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과 맞서고 있습니다. 호전적인 공산세력의 침략행위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 나는 히틀러를 침략자로 규탄했던 내 자신에 대해 수치심과 모욕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 Speech at Stourbridge; Associated Press, March 16, 1984
퍼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