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유적보전과 고분에서 출토된 밤
남원학연구소
노상준
고분이란 오래된 무덤을 말한다. 그러나 고고학에서 말하는 고분은 오래된 무덤 중에도 특정한 시기, 일정한 형식을 갖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특히 고분이 신앙이나 미술사, 축조기술 등 해당시기의 가장 발전된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는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사람이 시신을 매장한 흔적은 약 7-8만 년 전인 중기 구석기시대부터 나타났다고 하며 청동기시대 이후에 형식이 다양해진다. 무덤 중에서 가장 간단한 형식은 시신을 땅위에 놓고 돌로 덮는 것이다. 이를 돌무지 무덤(적석묘)이라 하고 구덩이를 파고 흙으로 덮는 것을 구덩무덤(토장묘), 넓은 돌을 고여 세운 지석묘(고인돌), 석곽묘 등 이들 무덤에는 변천에 따라 지면에 둥글게 흙을 쌓게 되었는데 이를 봉토라고 한다. 무덤의 이름을 보면 천마총, 황남대총, 장군총이라고 해서 총(塚)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고, 반면에 송산리 고분군, 능산리 고분, 남원 월산리 고분, 건지리 고분, 두락리 고분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다 같은 무덤인데, 어느 것은 “총(塚)”이라고 하고, 어느 것은 “분(墳)”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분은 흙무덤으로 일정한 형식을 갖춘 유력자의 무덤을 말한다. 총은 문헌상으로 또는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살펴봤을 때 왕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주인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 붙인다. 만약 매장자의 신원이 확실하다면 왕릉(王陵)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고분의 발굴 유물 중에 시선을 끄는 것은 금은 장식물, 생활용구 등 이외에 매끄러운 고배칠기(高杯漆器)속에 담긴 밤이나 연꽃씨앗, 곡물 등을 볼 수 있다. 고분에서 선사시대의 밤을 본다는 것은 희귀하고 드문 일이다.
한 예로 2천 여 년 된 삼한시대 의창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가운중에는 세톨의 밤이 있었다. 삼한시대의 밤은 그 옛날부터 중국에 소문 나 있었던 것 같다. 중국의 정사(正史)인 위지(魏志)에 보면 마한(馬韓)에서 나는 밤은 그 크기가 배(梨)만하다 했다. 수서(隨書) 백제전(百濟傳)에도 거율(巨栗)이 있다고 했다. 한국의 밤은 크기로 소문 나 있었던 것 같다. 이외에 낙랑(樂浪)고분에서도 군밤이 들어있는 옻칠 상자가 출토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밤과 우리 고대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케 해 준다. 남원에서도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는 곳이 많다. 특히 세전리(細田里)의 선사주거지는 우리에게 초기철기시대에 남원지방 서남부의 섬진강을 끼고 살던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들을 제공하였고, 동북부의 월산리와 건지리의 고분들은 우리에게 백두대간 서편에도 가야문화가 분포해 있었음을 실증해 줌으로써 삼국시대에 이 지역이 동서문화의 만남의 장소였음을 알게 해 주었다. 서양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끝나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사생관은 죽음을 수용하고 다음 생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심오한 철학이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우리한국인은 사생이 연결됐다고 생각하여 죽어서도 살았을 때처럼 밥도 먹고, 논밭도 가꾸고, 말도 타고, 돈도 쓰고, 거울도 보고, 종도 부리라고 많은 부장품을 묻었던 것이다. 고대에는 먼 길 떠날 대 밤을 갖고 다니며 식량으로 삼았고, 전쟁을 할 때 군량(軍糧)도 밤이었다는 기록도 많다. 서양동화에 숲속의 요정들은 밤을 먹거리로 하고 밤으로 화장품을 만들어 어여뻐진다고 하였다. 우리 속담에도 귀신을 밤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밤은 고대인의 이동식품 곧 도시락이었다. 죽어서 먼 길 떠나는 망자(亡者)에게 밤도시락을 부장해 주는 발상은 그래서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유교식 제례에는 많은 음식을 차려 혼백을 영접하는 관습이 있고, 구약시대(율법시대)에도 천제때에 많은 제물을 차렸던 것 같다.
동방삭전(東方朔傳)에 보면 동방삭이 1년간 죽었다가 살아 돌아 온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저승에 가서 밤만 먹고 살았다고 말한 것도 밤이 저승에서 먹고 사는 식품이라는 고대인의 생각을 입증해 주고 있다. 무덤가에 두 그루의 밤나무를 심어 연리지(連理枝)가 되게 하는 무덤습속도 밤이 영생을 보장하는 생명의 과실이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제상에 차리는 음식에 밤이 불가결하다는 사실이나 또 신주(神主)는 반드시 밤나무로 깎아 만들었던 것도 그렇다. 아주 오래된 고분 중에 보존상태가 양호한 대부분의 목관(木棺)은 옻칠한 관이 많다.
지방화시대 지방에 잔재한 고대유적을 어떻게 가꾸고 보존하느냐는 지역발전과 절대적관계가 있다. 고령군에서는 대가야 박물관을 만들고 대가야왕릉 전시관을 만들어 관광과 유적보전에 심혈을 기울이어 가야문화의 중심권을 이루고 있으나 남원에서는 유적 발굴 후 보전처리가 잘못된 곳이 있다.
남원의 선사시대 취락지(聚落地) 송동면 세전리(細田里)선사 주거지는 1985년 3월부터 1986년까지 3차에 걸쳐 발굴되었는데 이 마을터는 원시 주민이 살았던 대규모 선사시대의 수혈식 집단 주거지로 16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집터는 원형과 타원형이 대부분이었으며 크기는 서로 다르다. 30㎡(약10평)내외였다. 이곳은 전라북도 지방에서는 처음 발견된 유일한 초기 철기시대 유적으로 기원전 2-3세기경부터 기원 후 2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위로는 청동기 시대 말엽부터 아래로 삼한의 마한 세력이 백제에 복속되기 전까지의 대규모 집단주거지이다. 청동기 말에서 초기 철기 시대의 생활규명과 마한의 부족국가인 성읍국가(城邑國家)와 백제 초기의 고룡군(古龍郡)의 소재지를 비롯한 한일(韓日)간의 문화교류를 밝히는데 귀중한 유적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가 주류를 이루는데 그 중 대형옹관(국립전주박물관 전시)은 우리나라 옹관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외에도 수정제곡옥, 유리제구옥, 돌로 만든 도끼(석부), 고기 잡는 어망주와 방추자, 세형동검, 돌화살촉, 돌창, 붉은 토기, 체 어구류(漁具類)와 수렵에 쓰인 도구 등이 대량 출토되어 이 시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어있는 선사유적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발굴 후 관리가 잘못된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발굴 후 현장보전과 관광 자원화를 위한 선사유적공원이나 전시관을 만들었으면 지역발전과 고대 유적 보전차원에서 대단히 좋았을 텐데, 그 곳을 덮고 개간농경지로 이용하고 있는 현실은 아쉽기만 하다.
남원문화원에서는 1999년 선사시대 낡은터 쌈지공원을 조성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조성한 것이 유일한 표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