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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구로교당 =영산성지를 다녀왔습니다.
2012년 10월 6일부터 ~7일까지(1박 2일)= 영산성지에서 -(훈련)-공부하였다.
훈련에 참여한 인원은 28명이며 주임교무님 포함 29명이 참여하였습니다,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께서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과 구도의 과정을 거쳐 대각을 이룬 곳.
제법 성지인 이곳에는 대종사의 생가, 기도터인 삼밭재, 마당바위, 대각을 이룬 노루목,
영산선학대학,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이룬 정관평 방언답 등이 있다.
10월 6일 08시에 구로교당을 출발하여~12시에 영산성지에 도착합니다,
12시부터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 구내식당에서 점심 ~ 성진포 입정터 성지순례 ~ 15시에 결제식~
~ 주재강의 ~ 상시훈련 점검 회화시간을 마치고 ~ 저녁 공양~ 십상에 대하여 강의를 마치고
~ 교리 헌배 ~108배 ~ 심고 및 일기점검을 끝으로 1일훈련을 마무리 하고 ~ 별이 무수히 쏫아지는
성지에서 첫날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어 둘째날은 ~ 05 : 00 시에 기상하여 05 : 30분 교단 100년 성업 대정진기도를 올리고.
아침 요가와 ~ 청소 ~ 아침공양~ 노래 부르기 ~ 법훈편 경전 공부를 마치고 ~ 십상에 대하여
강연을 열심히 하였으며 ~ 훈훈한 해재식을 마치고 ~ 점심공양을 마치고 ~ 성지순례을 하였습니다,
이어서 ~ 노루목 대각터 ~ 대종사님 성탄지 ~ 구간도실~ 정관평전~ 관광버스로 이동 ~
백수면 해안도로 관광 ~ 서해안 고속도로따라 서울로 귀가하였습니다,
무사하게 마치게 된것에 법신불 사은님께 감사 기도드리며 참여한 모든 법우님
가정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아름다움 잘 운영하시길 간절히 염원드립니다,
대각전뒤 식당가와 성지 사무소 주변입니다
상사화도 피어있고 온갓 야생화가 우리 일행을 반깁니다,
성래원앞 정원입니다,
천상의 화원을 연출하고 있어요.,
잘 조성된 잔듸...
성래원 주변의 자연들,,,,
성래원 내부 스케치
성래원에서 연꽃차를 마시는데 식탁위에 올려진 대 자연입니다,
들국화인 모양인데 이름은 몰라요.
성래원 앞 정원에서 일원상의 석원을 배경으로
선진포 입정터 가는 길~ 도로변에 피어있는 갈대꽃들...
선진포 입정터에서 대종사님 생각에 한참을 두리번 기리며 ,,,
저 고목은 꼭 기도하는 모양을 하고 있어요.
대종사님 성지라 고목나무도 대종사님 훈증을 받은모양이지요,
선진포 입정터는 영산 출장소에서 산길로 와탄천을 따라 1Km쯤 가면
바위옆에 큰 정자나무가 서 있는 나루터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바로 대종사가 구도시절 영산에서 법성장에 가다가 반나절이나 입정 상태로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집도 없고 나룻배도 없이 비석 하나만 서있지만
옛날엔 입암동을 건너 법성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짐을 운반하는 큰 배가 드나드는 포구로 일제 때만 해도 일본인 지주들이 선자를 거두어들여
군산이나 목포로 운반할 때는 이곳을 이용하는 곳으로,
영광지방의 곡물과 특산물을 실어 나르는 포구로 주막과 창고가 4동이나 있는 상당히 큰 포구였으며,
이 곳 선진나루는 길룡리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옛날에는 길룡리에서 읍내로 나가려면 산길 소로를 타고 백두계재를 넘어
만곡에서 영광이나 백수로 가거나, 선진포를 건너 입정리를 돌아 법성으로 나가게 되었다.
더러는 4Km쯤 산길을 걸어 한시랑이로 가서 구수미나루를 건너 법성에 가기도 하나
대부분 선진 나루를 이용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백수에 속하나 길룡리 뿐만 아니라 장산리,
구수리 사람들은 물 건너 법성이 물자도 풍부하고 내왕하기도 편리하여 법성을 이용하였다.
지금은 영광읍과 길룡리를 잊는 도로개설로 나루터 흔적만 남아 있다.
대종사는 20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망극의 슬픔 속에서도 의심은 더욱 큰 무게로 가슴을 누르니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하는 절망감 속에 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기면
모든 의식을 놓은 듯 정에 빠져들곤 하였다.
하루는 법성장에 간다고 선진포에 나가서 나룻배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정에 들어 버렸다.
한나절이 지나 장에 돌아오던 동리 사람들이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대종사를 보고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이곳이 바로 강변입정상을 나툰 곳이다.
이로부터 정에 드는 일이 더욱 많아졌으며 차츰 눕고 자는 일마저도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잊혀져 갔다.
선진포 입정터를 보면서 스스로 의심이 생기는데 대종사는 그 의심의 정도가 심할 때
여러 장소에서 입정에 드신다.
집에서 밥을 먹다가고 입정에 들고 서대원 선진의
{성지 순례기}에는 귀영바위 집터에서도 입정에 드셨다고 하는데
이곳 선진포만을 격상하여 십상의 일부로 넣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보여졌다 하더라도 그 당시 입정의 상태를 대각의 과정으로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을 것이요, 다만 측은의 마음이 더욱 더하였을 텐데 말이다.
또한 그처럼 중요한 입지의 곳이라면 기념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교중의 땅이 아니라 하지만 적지 않은 순례객들이 방문하는 곳인데 1m도 채 되지 않는 돌맹이에
대종사 입정의 시기도 교사적 위치도 없이 다만 [선진포 입정터]라는 문구만 있고 보니
아쉬움이 많이 든다.
우리 구로교당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사업을하여서 여기에 기념비하나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여 본다.
선진포 입정처 나루에서 뒤돌아본 옥녀봉.
영산원 옆에 피어있는 이름모를 아름다운 들꽃.
영산원은 원불교 최초의 교당이다.
원기 3년(1918) 12월 대종사님과 9인제자들이 방언공사를 하면서 창건하였으며 그 이름을 구간도실이라 하였다. 이집에서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를 이루었다.
원래 옥녀봉 아래 있던 것을 원기 8년(1923)에 이곳으로 옮겨지으면서 영산원으로 개청하고 교단창립기의 많은 선진들이 대종사님을 모시고 수도정진 하였다.
대종사님과 9인제자님의 기운이 서린곳입니다,
나도 대종사님 의 제자이니 기념한장 추억으로 찍어봅니다,
영모전 입니다,
-합장- "사바하"
대각전에서 정관평을 바라보며,,,
옥녀봉 아래 자리한 용무당
고종 5년(1868) 신무문 밖 북악산 기슭의 경복궁 후원지(지금의 청와대 위치) 중건된 건물로
1929년 일제가 헐어다 용산에 이건, 용광사라는 일본인 절로 이용하던 것을 해방 후 1946년
원불교가 인수하여 서울교당 생활관으로 사용해 오다 이 곳 영광으로 이건하게된 내력의 건물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평가 받는 건축물이라고
융문당 건물 -원불교 서울교당 대성전으로사용하다 해체되여 2007년 현 위치로 이전 복원된것
대각전.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 종교 건출물로써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영광 원불교 영산대각전.
영산성지 교조 탄생지이자 원불교가 탄생한 지역으로 영산대각전 이외에도 근대 자취를 전하는
부속 건축물 등이 있어 당시의 역사적 흔적을 엿 볼 수 있다,
유서깊은 대각전에서 대종사님을 뵈옵는 마음으로 열심히 배우고 몸으로 익혔습니다,
성래원에 피어난 백련과 함께...
아담한 기와집 안에 들어가니 기분이 절로 포근하며 안정이 됩니다,
연꽃 차 한잔하며 마냥 행복하게 자연으로 들어가봅니다,
창박으로 홍련이 예쁘게 자라며 멋진 차 한잔이였습니다,
창밖으로 연못에 홍련이 피어있고 멋진 연꽃 차를 마음속 나의 심향으로 피어나게 하였습니다,
법문을 잠시 읽으며 연꽃 차 내음 기분도 좋았습니다.
성지 훈련원장님과 구로교당 주임교무님의 차 드시는 모습입니다, 맑은 아름다움입니다,
성래원 정원옆 백련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옆에서 잠시 추억한장 연꽃향에 날려봅니다.
대각전에서 정진하는 법우님들,
강연하는 법우님. 열심입니다, 과연 그 동안 교당에서 공부한 실력이 최고조로 발휘되는 아름다움 입니다,
정말 잘 했습니다,
노루목에서 바라본 옥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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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난 글 따온 것입니다,
-좌산은 장 협착증 수술을 받은 후 아직 몸이 쇠잔한 상태다. 산책길에 나선 교무들과 함께 소태산 생가에 들렀다. 일행 모두 간절한 기도가 끝난 뒤 소태산이 태어난 방 앞 툇마루에 앉았다. “이 자리가 바로 산태극·물태극의 중심점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자리가 태극을 이루는 곳은 아직 보지를 못했습니다. 한번 돌아 보시지요. ” 좌산 상사가 설명과 함께 앞장선다.
- 참으로 놀랍고도 희한한 일이다. 생가를 중심으로 물길이 에워싸고 있다. 교단의 상징인 일원상(一圓相)처럼 둥그렇지는 않으나 럭비공 모양의 타원형이다. 해좌(북에서 서로 30도) 사향(남에서 동으로 30도)이니 정남향에 가까운 볕 잘 드는 곳이다. 뒤쪽의 옥녀봉이 북현무가 되어 병풍치듯 늘어서 좌청룡으로 굽이친 다음 수파구(水破口)를 열어 놓았다. 소태산 대종사가 언답(堰沓) 공사로 방조제를 막기 전만 해도 생가 앞까지 바닷물이 들랑날랑 했다는 것이다.
생가는 삼간모옥으로 전형적인 초가집이다. 여기서는 구태여 동·서사택도 구분 지을 일이 아니다.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헤아려 보니 좌우가 140m, 남북이 70m 정도에 이르는 거대한 원이다. 조원오 교구장이 “이곳을 보기 위해 전국의 수많은 풍수지리사들이 다녀 갔다”고 귀띔한다. 마침 잘됐다 싶어 “여시아문으로 명풍수들한테 들은 대로만 전해 달라”고 했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석가모니의 제자 아난이 불경을 편찬하면서 모든 경전 앞에 붙인 말로 ‘나는 이와 같이 듣기만 했노라’는 의미로 자기 의견이 가미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측의 백호지역 환포가 한량없이 넉넉하여 여성 지위 향상과 재물 걱정은 당초부터 없었을 것 같다. 소태산의 남녀평등 사상이 여기서 태동했고 엿장사, 저축조합운동, 간척공사 등을 통한 자립 기반 마련의 인간적 도량이 생가의 지기 영향이었음을 부인한 지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집 앞 건너편(남주작)에는 노루가 엎드려 생가를 행해 절하고 있는 지형이다. 이곳이 바로 ‘노루목 대각터’로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 소태산이 입정(入定)에 든 후 크게 깨달은 장소다. 원불교에서 기리는 대각개교절이다. 스님이나 수도자가 도를 깨우침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수십년을 쉼없이 공부하여 모진 수행정진 끝에 득도하는 각(覺)의 세계다. 이른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경지다. 다른 하나는 시정(市井) 속에 몸을 낮추고 중생들과 동고동락하다 어느 날 갑자기 섬광 같은 혜안이 열려 홀연히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돈오돈수(頓悟頓修) 또는 활연대오(豁然大悟)라고도 한다. 불가에서는 신라 동시대의 고승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에 견주기도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의 길을 맨 처음부터 아홉 제자(송규 이재철 이순순 김기천 오창건 박세철 박동국 유건 김광선)들에게 훈교했다. 참선에만 치우쳐 경제생활이 소홀함이나 세상일에 기울어 신앙 생활이 나태함도 동시에 경계했다. 그는 스승 없이 20여 년간의 구도고행 끝에 크게 득도하고 나서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응보 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대각의 경지를 펴 보였다. 특히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당시의 개교표어는 100년 후 현재의 물질문명 위기를 예견한 것으로 많은 미래학자와 종교연구가들의 찬탄을 받고 있다.
깊고 깊은 산간 촌락을 ‘벽촌’이라 하는데 영광군의 영촌마을은 벽촌 중에서도 벽촌이다. 소태산과 그의 제자들이 지게와 가래, 삽으로 막아 놓은 방조제는 일월한문(日月挾 門)이 되어 뜰 밖을 감싸안고 있다. 마을의 빈곤 해결을 위해 1918년부터 1년간 갯벌을 막아 2만9000여 평의 농지로 만든 간척답이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그 후 정관평(간척한 들녘 이름)은 정산 종법사에 의해 2차 공사(1955)가 이루어져 2만8000여 평을 보태게 된다.
이런 자생 민족종교를 일제강점하 관리들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소태산은 항상 사찰 대상이었고 그가 머무는 익산성지에 감시초소까지 주재시켰다. 조선총독부의 원불교 탄압과 방해공작은 교단의 존폐 위기로까지 몰렸고 1943년 해방을 2년여 앞두고 대종사가 열반하자 억지로 화장토록 했다. 그의 법력과 민심 동요를 두려워한 일인들의 농간이었다. 그의 유해는 익산성지 교단 총부 내 성탑에 봉안돼 있다. 원불교는 현재 700여개 교당에 140만명이 넘는 교도가 일원상(○) 법신불을 받들고 있다. 일찍이 교육사업에 앞장서 원광대학교와 영산선학대학교를 설립한 후 일반 인재와 교단 교역자를 양성해 내고 있다. 장애인복지사업 무료 구순열(언청이)수술 등을 통해 그늘진 사회 구석구석을 보살핀다. 삼소회(三笑會·불교 비구니, 가톨릭 수녀, 원불교 정녀 모임)를 통한 종교 간 만남과 화합에도 앞장서고 있다.
세계 각국에는 나라마다의 전통종교나 자국 종교가 있다. 중국의 도교, 영국의 성공회, 일본의 신도나 천리교가 이에 속한다. ‘남묘호렌케교(나무묘법연화경의 일본어 발음)’로 알려진 일련정종(日蓮正宗)은 니치롄(1222∼1282) 승려가 기성 불교의 바탕 위에 독자적으로 깨우친 일본식 불교 종단이다. 우리나라에도 조정의 기강이 바로 안 서고 삼정(전정·군정·환곡)이 혼란스럽던 조선 말기에 3대 민족종교가 태동하게 되니 수운 최제우(1824∼1864)에 의한 천도교, 증산 강일순(1871∼1909)에 의한 증산교, 소태산 박중빈(1891∼1943)에 의한 원불교다. 세 종교 모두 희망 없는 세기말적 현상에 민족의 자존과 구세제민(救世濟民)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각 종교 창시자나 민족의 선각자 생가를 답사할 때마다 풍수학인들 사이에 형성되는 공감대가 있다. 풍수적 시각으로 접근해서가 아니고 산태수국(山態水局)이 여느 곳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영산성지의 옥녀봉도 아름다운 선녀가 머리를 따고 성자를 기다리는 산세라는 것이다.
좌산 상사는 “영산성지 일대가 세계인을 위해 개방될 날이 머지않았다”면서 “미운 사람한테도 예쁜 곳이 있고 예쁜 사람한테도 미운 곳이 있는 법이니 고루고루 사랑하자”고 당부한다. 경산 종법사는 미리 배포한 경축사를 통해 “이 사바세계는 무명업장의 어둠 속에서 치성하는 욕심으로 불타고 있다”면서 “나 혼자만 낙원 생활을 누릴 것이 아니라 나의 주변에도 따뜻한 법등을 두루 밝히자”고 강조했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대종사님 탄생하신 성탄지입니다, 세계 최고의 명당터에서 기념촬영합니다,
7. 혈인법인상 (血印法認相 인류 구원의 혈인이적을 나투시다) 구수산 아홉봉에 촛불기도 연꽃이여 ! 단도 품고 사무여한 백지 혈인 나누었네. 법계의 인증이어라 억조창생 춤을추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교단 경제적 기초로 방언공사(防堰工事)를 마치시자 9인제자들에게 인류 구원의 공도정신(公道精神)을 심어주기위하여 원기4년(1919)4월부터(음3월16일) 8월21일(음7월26일)까지 각기 기도봉을 정하여 진리앞에 기도를 올리게하였다.
9인제자의 인류구원과 창생제도를 위한 사심(私心) 없는 기도정신은 사무여한(死無餘恨) 의 증서로써 결의를하니 이는 곧 백지혈인(白指血印)의 이적으로 증명되어 법계인증을 얻게되었다. 이 사무여한 정신은 원불교 창립정신이며 원불교 교역자(敎役者) 의 기본 정신이다.
구간도실, 九間道室 上樑法語(구간도실 상량법어)
유월추모의 달을 보내고 대종사님께서 우리 회상 최초의 건물을 건축하실 때 어떤 심정으로 상량문을 지으셨을까를 음미해봅니다. 법문을 음미하면 할수록 깨달음이 가까워지고 스승님의 심정에 합일할 수 있습니다.
梭圓機日月 (사원기일월)
한 두렷한 진리님이 일월로 북질하여 만물을 화육하고, 원만구족하여 천만가지로 작용하는 진리불을 깨닫고 느껴봅시다. 천지의 四時 변화를 보고 음양상승의 변화를 연마합시다. 인간만사를 보고 들으며 인과가 소소영령함을 알아봅시다.
織春秋法呂 (직춘추법려)
제불제성은 진리를 활용하여 제생의세의 교법을 짜서 생령을 구원하시네, 일원교법이 진리를 온통 닮아가게 하는 원만구족한 교법임을 알고 확신합니다. 일원교법이 나를 구하고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구원하는 교법임을 확인합시다. 일원교법이 유불선 삼교의 교리를 일원화한 교법임을 증명합시다.
松收萬木餘春立(송수만목여춘립) 한그루 큰 소나무는 수 만가지 나무들의 봄기운을 거두어 우뚝 서 있고, 대종사님께서 건설하신 이 교단이 세계적 주교가 될 것을 확신합시다. 심신을 다 바쳐서 이 교단을 세계적 교단으로 가꿔 갑시다. 교단과 스승님께 일체생령이 다 귀의하여 제도 받도록 합시다.
溪合千峰細雨鳴 (계합천봉세우명)
시냇물은 일천봉우리에 내리는 작은 빗방울 모아 큰소리로 흐르도다. 우리가 운영하는 교당과 기관이 상하좌우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합력하여 크게 발전하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종교, 모든 선의 집단과 함께 연대하여 정신개벽의 대 역사를 이루는 양양한 교단으로 만들어 갑시다. 우리 회상에 모든 중생들이 동참하여 자기 기국대로 봉사 하도록 합시다.
원기93년 7월
종 법 사
백수면 해안도로를 관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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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평 도로옆에 피어있는 해당화입니다,
구간도실 앞 공원에서 단체촬영 한장 추억으로~~~!
서울에 6시 3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안전하게 대종사님 법문공부 마음속에 담아갑니다, 법우님 정말 물심양면으로 도움함께 느끼며 멋진 1박 2일이였습니다, 그리고 훈련에 모든 도움주신 주임교무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합장- "사바하" ---준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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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준산님 사진도 글도 구로교당의 역사로 저장하기에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
고맙습니다, 준산님 .
주임교무님 고생 많았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법우님 ~마음에 드는 사진 있으면 -마우스 오른쪽 크릭 -다른이름으로 사진 저장- 이나 복사해서 저장하시면 됩니다,
회장님 영산 성지를 다시생각 하게하네요. 잘봐습니다
감사또감사합니다...
잘 봐 주세서 감사드립니다,-늘 건강하시고 맑고 "禪" 이어가시길 염원드립니다, -합장- "사바하"
위 사진에서 이번 주 한울안 신문에 나올 사진 추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내용은 저도 저장을 했습니다, 원본으로 올려주셔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