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다 간 것 같다.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입추도 말복도 지났으니 가을이 오긴 왔다. 조석으로 날씨도 서늘하고 구름 많은 오늘은 낮에도 더운 줄 모른다. 해도 짧아졌다. 새벽 네 시만 되어도 훤하던 날이 새벽 다섯 시 반이 되어야 어둠이 걷힌다. 남편은 다섯 시에 감산에 노린재 방제를 가고, 나는 늘어지게 한숨 더 자려다가 아버님 전화에 일어났다. 이제 전화벨이 울려도 그러려니 한다. 병원에 가야겠단다. 주기적으로 맞는 영양제가 효과가 있을까. 시댁에 가면 여전히 풍성하다. 노인이 돌아가시면 내 짐을 덜 수 있어 편안할까. 또 다른 짐이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내 업이라면 그렇다. 하나가 꺼지면 또 하나가 불거져 나오는 것이 인생 같다.
김천에서 손님이 왔다. 그제야 남편이 말했다. 어떤 사이트를 들락날락 하는데 중고 모기나 파리를 방제하는 소독 기계를 구한다는 글이 올라왔더란다. 남편이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필요하면 와서 가져가라고 했단다. 우리 집에는 옛날 염소 키울 때 염소 막에 쓰려고 샀던 방제 소독기가 있다. 두어 번 정도 쓴 후 창고에 넣어 놨던 것이라 새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사용을 하지 않았으니 기름칠도 하고, 먼지도 털어 정비를 한 후면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새 것을 구입하려면 몇 십 만 원이 든다. 오래 전에 구입할 때도 칠십 만 원쯤 준 걸로 기억한다. 그 사람은 방제 소독기를 공짜로 준다는 말에 먼 길을 왔다. 비타 500 한 박스를 들고 온 중년이다.
그 사람이 남편과 같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사짓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직장에 다닌단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시골집에서 사냥개를 키우는데 모기와 진드기 같은 물것이 많아 개 우리에 소독을 해 주려고 소독기를 구한 것이란다. 시골 동네는 저녁마다 면직원이 트럭에 소독기를 싣고 다니며 소독약을 뿌린다. '뿌와앙' 소리에 동네가 시끄럽다. 하얀 연기가 온 동네를 감싸지만 잠깐이다. 모기나 파리 박멸은 꿈도 못 꾼다. 자연에서 사는 것들을 박멸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사람은 방제 소독기를 가지고 떠났다.
"비타 500 한 박스에 칠 십 만 원짜리가 날아갔네."
"농사꾼인 줄 알고 준다고 했는데. 농사도 안 짓는 사람이잖아."
남편도 섭섭한 모양이다. 이럴 때는 남편을 다독거려 주는 것이 내 특기다.
"잘했어. 써다 안하고 창고에 모셔놨던 건데. 저 사람이 가지고 가서 요긴하게 쓰면 고마운 거지."
"그렇지?"
"당신 복 지었네."
처음 그 소독기를 구입할 때는 염소들 때문이었다. 여름철에는 사람도 모기나 파리 같은 곤충 때문에 힘들다. 여름 한 철 염소 막 방제를 위해 샀지만 두 번 정도 치고 접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소독약을 치기 시작하면 간작은 염소들이 요동을 쳤다. '뿌아앙 웅웅웅' 소리에 염소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계속 치면 적응을 했겠지만 임신한 염소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나는 소독약 냄새 자체가 싫었다. 약을 쳐 봤자 방목하는 염소라 바람 한 번 휙 지나가면 약 기운은 사라진다. 남편은 주기적으로 약을 쳐 줄 생각으로 구입했겠지만 주기적인 소독이 쉽지 않았다. 염소를 방목하면 여름철에는 염소막이 빌 때가 많다. 산에서 자고, 산에서 새끼 낳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한 소독기 두어 번 울리고 나니 가을이 와버렸지 싶다. 다음 해를 위해 창고에 넣었는데 두 번 다시 창고에서 꺼내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해 가을이었다. 해마다 염소들은 봄과 가을에 집중적으로 새끼를 낳는다. 300두가 넘었던 염소들이라 새끼를 낳기 시작하면 밤낮이 없었다. 여름 한 철 먹을거리가 풍부한 산에서 살며 새끼를 낳아 걸리고 내려오기도 하고, 염소 막에 낳기도 하는데 비슷한 크기의 새끼들이 칠팔십 마리가 되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산에 살던 염소들도 집을 찾아 새끼를 데리고 내려온다.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수놈 대장이 앞장서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 들어온다. 숫염소를 길들이는 이유다. 염소 막에 소금을 놓아주는 것도 염소를 염소 막에 들어오게 유인하는 방법 중 하나다. 염소는 소금을 먹지 않으면 병에 걸리기 쉽다.
그런데 소독 방제를 한 그 해 가을은 새끼 낳는 염소가 급격히 줄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따져봤더니 소독약 두어 번 친 것밖에 없었다. 봄이 되자 새끼 수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듬 해 여름부터 방제 소독기를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염소가 스트레스를 받는데 어떻게 소독을 해 주나. 자연에 적응해 살면 불편한 것도 없는 법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몸이 허약해지면 병이 들지만 몸이 건강하면 병은 침투를 못한다. 염소 새끼도 비실비실 하는 녀석은 털 속에 쉬파리가 알을 낳지만 털빛이 반들거리는 새끼들 털 속에는 쉬파리 알이 없다. 그 사람 덕분에 염소 키울 때 생각을 하게 되어 즐겁다. 염소 대장이었던 그 때만 해도 젊었는데.
어쨌거나 물건은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 한다. 물건은 열심히 잘 써주는 사람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창고에서 무용지물이 되어 썩다가 고물로 버림 받는 것보다 그 사람이 잘 활용해서 오래 사용해 주면 좋겠다. 새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런지 물건을 살펴보고 들고 가는 그 사람의 표정도 밝다. 녹 하나 쓸지 않게 보관한 남편이 대단해서 나도 기분 좋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게 소용없으면 퇴물이다. 어떤 물건이든 내게는 필요 없지만 누군가 그것을 필요로 하면 흔쾌히 주는 것도 보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