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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윤리에 관한 연구
(Paul L. Lehmann을 중심으로)
조직신학전공 조 기 주 1 9 9 2 년
목 차
Ⅰ. 서 론////////////////////////////////////////////////// 1
A.문제의 제기///////////////////////////////////////////// 1
B.연구의 범위와 목적////////////////////////////////////// 6
Ⅱ.코이노니아 윤리의 형성배경//////////////////////////////// 10
A.코이노니아 개념의 형성배경////////////////////////////// 10
B.현대의 시대적 정황////////////////////////////////////// 13
C.코이노니아 개념의 성서적 근거/////////////////////////// 20
D.코이노니아 개념의 역사적 근거/////////////////////////// 25
Ⅲ.레만의 기독교 윤리관////////////////////////////////////// 31
A.레만의 생애 및 신학사상///////////////////////////////// 31
1.레만의 생애/////////////////////////////////////////// 31
2.레만의 신학사상/////////////////////////////////////// 33
B.레만의 윤리관/////////////////////////////////////////// 35
1.윤리적 사고의 정황으로서의 교회/////////////////////// 37
2.하나님의 활동에 있어서의 정치적 성격////////////////// 41
3.기독교 윤리의 맥락적 특징///////////////////////////// 48
4.양심의 윤리적 실재//////////////////////////////////// 54
5.인간의 성숙성과 새로운 인간성///////////////////////// 60
Ⅳ.코이노니아 윤리와 현대 기독교 윤리//////////////////////// 63
A.코이노니아 윤리와 성인된 사회/////////////////////////// 63
B.코이노니아 윤리와 타자를 위한 존재////////////////////// 67
C.코이노니아 윤리와 교회 공동체/////////////////////////// 69
D.코이노니아 윤리와 인간의 책임/////////////////////////// 72
Ⅴ.결론////////////////////////////////////////////////////// 78
A.요약//////////////////////////////////////////////////// 78
B.평가 및 제언//////////////////////////////////////////// 81
참고문헌///////////////////////////////////////////////////// 83
Ⅰ.서 론
A.문제의 제기
기독교 윤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윤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는 명백하게 다른 본질적인 요소를 지닌다.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추출한 원칙을 기독교적 행동과 그 행동의 표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윤리란 무엇을 해야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독교적 판단을 내려야 할 요점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반 윤리와는 다른 본질적인 요소로 인해 기독교 윤리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마땅히 기독교적 원칙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일반 윤리학은 도덕의 본질과 근거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고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윤리학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어떤 도덕적 판단, 표준, 규칙이라도 지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가 마련될 수 있는지, 마련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무엇이 선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아야 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영혼이 그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윤리 이론을 리챠드 크로너는 ‘새로운 내재성’의 윤리 이론이라고 규정한다.
‘무엇이 선인가’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관심사였다. 선이란 모든 것이 목표삼는 것이며 이러한 선은 최고선(最高善)으로서 궁극적(窮極的)인 상적인 것이다.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는 칸트(I. Kant)의 주요관심사였다. 그는 도덕적으로 옳게 사는 것이 최고로 옳게 사는 것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무조건적 가치’를 인지하는 선의지라고생각했다. 선의지가 없다면 어떤 구체적인 행위가 옳은지, 도덕적 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옳은 행위”와 “도덕적 의무”라는 용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관점과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 관점과 더불어 벤담(J. Bentham)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는 유용성의 개념, 즉 만약 한 행위가 유용하다면 그 행위는 옳다는 기본 개념에 기초한다. 즉 본래적 가치를 아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용한 것은 행위의 옳음을 의미한다. 벤담은 심정적 동기보다는 공리라는 경험적 결과에 의해서 행위를 평가하려고 했다. ꄙ리주의에서의 도덕적, 정치적 목적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이렇듯 ‘어떤 것이 선한가’, ‘어떤 것이 옳은가’, 그리고 ‘어떤 것이 유용한가’의 관심이 일반 윤리에 있다면, 기독교 윤리는 이 모든 문제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향해 있다. 다시말해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제문제들을 묻는다면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가’,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서 유용한가’라는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기독교 윤리에서는 성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 선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선한 것이며, 그 하나님이 옳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옳은 것이며, 그 하나님이 유용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의 통일성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 근거를 둔다.
니이버는 기독교 윤리학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할 때의 두가지 유형으로 말한다. 즉 ‘선함’의 문제를 다루는 열망의 윤리학과 ‘의로움’의 문제를 다루는 의무의 윤리학이다. 그리고 그는 다른 한 유형으로 양극의 정반대 의견 사이의 긴장이 가져다 주는 결과로 나타나는 변증법적 유형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 지향적인 것”과 “인간 지향적인 것” 사이의 긴장과 “그리스도 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편과 “세상 또는 문화”를 강조하는 편 사이의 긴장 속에서 더 유용한 것을 취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를 구분하는 또 다른 경향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부터 시작된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행동들에서 경쟁적으로 제기되는 요청과 가능성들로 인해 인간의 삶의 구조가 과거의 어느때보다도 더욱 복잡하게 된 현실 앞에서 ‘삶의 단순화’는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의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따라서 윤리적 성찰은 어떤 행동이 자기 자신과 이웃을 위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고 사고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개인으로서 어떻게 바르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는 동시에 인간이 이웃과 더불어 어떻게 잘 어울려 살 것이야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공동체적인 삶이기 때문에 순전히 개인적인 행동이란 있을 수 없고 어떤 이유에서라도 개인은 이웃과 관계되고 공동체와 직결되어 있다.
기독교 윤리에서 개인과 이웃이란 두 가지 차원은 항상 연결되어 논의되어져 왔다. 예수께서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다. 루터에게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개인(Coram Deo)’과 ‘이웃 앞에 서 있는 우리(Coram hominibus)’는 기독교 윤리의 두 개의 중요한 기초이다. 리챠드 니이버에게 있어서는 좀 더 윤리적인 면에서 ‘하나님’, ‘나’, ‘이웃’ 사이의 삼중적 관계로 이해된다. 이 삼중적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절대적이고 중심적인 가치에 대한 충성으로 나타나고 이웃과 나에 대한 관계는 신뢰로 나타나는데, 그 절대적 가치에 대해 자기 자신을 위임하는 개인들의 횡적인 관계로 형성되는 공동체가 바로 보편적인 공동체인 것이다.
레만은 코이노니아 윤리의 특성과 그 의미는 신앙과 삶의 공동체로부터 도출되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코이노니아에 의해 하나님의 활동과 목적이 구체적으로 정황(context)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개인을 생각할 수 없고 공동체를 떠나 개인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과 개인, 개인과 개인, 하나님과 공동체, 개인과 공동체 간의 관계성을 우리는 코이노니아에서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코이노니아 개념을 기독교 윤리를 정립하는 원리로 삼는 것은 가능한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코이노니아 개념을 기독교 윤리를 정립하는 원리로 삼을 수 있다면 레만이 말하는 코이노니아 윤리로서의 기독교 윤리가 가능해 질 것이며, 또한 무신성이 확대되어가는 현대 기독교 윤리의 과제들을 이 코이노니아 개념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B.연구의 범위와 목적
코이노니아 윤리의 기초가 될 코이노니아 개념에 대한 연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으나 이 개념을 기독교 윤리를 정의하는 기초개념으로 도입한 것은 레만의 중요한 공헌이라 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제Ⅱ장에서 코이노니아 개념의 형성 배경을 기독교 윤리의 발전을 개괄해 본 다음 현대의 시대적 정황을 살펴 봄으로써 코이노니아 윤리에 대한 시대적, 상황적 요청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특히 현대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몇가지 경향들은 다양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해에서 많은 부분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데 기초하여 연구될 것이다. 그리고 코이노니아 개념의 성서적 근거와 역사적인 발전을 고찰해 볼 것이다.
제Ⅲ장에서는 레만의 주(主)저인 ⌈기독교 사회 윤리학 원론⌋Ethics In A Christian Context에 나타난 그의 코이노니아 윤리관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 먼저 윤리적 사고의 정황으로써의 교회를, 그리고 코이노니아가 하나님의 정치적 활동에 유용함을, 이어서 기독교 윤리의 맥락적 특징으로서의 상황에 대해 정리한 다음 양심의 윤리적 실재를 살펴 봄으로써 기독교 윤리로서 코이노니아 윤리를 정립한 레만의 윤리관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 장의 연구는 코이노니아의 개념이 기독교 윤리를 규정하는 원리로 확정되어지는 과정을 분명히 보여 줄 것이며, 동시에 Ⅳ장에서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중요한 문제들을 코이노니아의 개념으로 새롭게 이해하는 기초를 마련해 줄 것이다.
제Ⅳ장에서는 Ⅲ장에서의 연구를 기초로 현대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논쟁점이 되고 있는 몇 가지의 과제들을 코이노니아 개념과 연관지어 살펴 봄으로서 본 논문의 논지를 확정지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고 한다. 특히 코이노니아 윤리의 현장이 되는 사회의 세속성을 성인된 세계의 개념으로 살펴보고, 코이노니아 윤리의 근원이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한 존재의 개념으로 살필 것이며, 코이노니아 윤리의 실체로서의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 개념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이노니아 윤리의 주체자된 인간의 책임 문제를 결단의 개념과 관계지어 살필 것이다. 이상의 네가지 개념에서 코이노니아와의 결합 가능성을 발견케 될 것이며, 따라서 코이노니아 개념이 기독교 윤리를 정립하는 원리로서 가능한가에 관심하여 살필 것이다. 이상의 네가지 개념은 주로 본회퍼의 사상을 기초하여 제기된 문제들이다.
제Ⅴ장은 결론으로서 기독교 윤리는 곧 코이노니아 윤리임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장에서는 앞으로 계속 코이노니아 윤리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할 것이다. 결국 코이노니아 윤리를 기독교 사회 윤리의 가장 기본적인 틀로 수용하는 것이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윤리학적 이해를 얻고자 하는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다. 결론은 이런 면에서 내려질 것이다.
본 연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에 기인한 ‘인간의 성숙성’과 ‘ 새로운 인간성’의 구체적인 윤리적 실재를 밝히는데 주된 관심을 갖는다. 이 성숙성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 오는 은총일 뿐 아니라 능력이다. 즉 이 성숙성은 코이노니아의 실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이며, 옳음이며, 유용성이다.
본 연구는 기독교 윤리를 규정하는 레만의 다음과 같은 이해를 출발점으로 하여 코이노니아를 기독교 윤리를 성찰하는 개념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기독교 윤리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고 그의 교회의 한 성원으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과 그 대답에 대한 학문적인 성찰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코이노니아의 개념을 기독교 윤리를 해석하는 원리로 받아들여, 궁극적으로는 기독교 윤리를 코이노니아 윤리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즉 코이노니아 윤리의 관점에서 사회와 그리스도와 교회와 인간의 문제를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Ⅱ.코이노니아 倫理의 形成背景
A.코이노니아 개념의 형성배경
기독교 윤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고 그의 교회의 한 성원으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과 그 대답에 대한 학문적인 성찰로서 정의할 때,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은 결코 모호하거나 중립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윤리적 사고의 출발점이 인류의 공통된 도덕적 지각이나 세련된 인간들의 윤리적인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교회의 사실(事實)과 본질(本質)에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기독교 윤리는 도덕적 선이나 도덕적 옮음, 아니면 도적적 유용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고 그의 교회의 성원으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 윤리는 도덕성에로 향한 것이 아니라, 계시에로 향한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이 도덕성이 아닌 계시에로 향한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기독교 윤리를 정의함에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은 ‘계시에로 향한 것’에 대한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그리고 코이노니아 개념을 통해 기독교 윤리를 성찰하고자 할 때에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은 계시가 가지는 코이노니아적 요소와 코이노니아의 계시성을 동시에 발견하는 것이다. 계시가 가지는 코이노니아적 요소에 대한 연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관계적’ 입장에서 하도록 요구하며, 코이노니아의 계시성에 대한 연구는 교회에 대한 관계적 입장에서의 성찰을 하도록 요구한다. 아울러 기독교 윤리의 정황으로서의 사회와 기독교 윤리의 실행자로서의 인간의 윤리적 책임이 코이노니아 윤리를 형성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 네 경계, 즉 예수 그리스도, 교회, 사회, 그리고 인간의 책임이 하나로 통합되는 ‘공동체'가 기독교 윤리의 현장이며 정황인 것이다. 때문에 코이노니아는 항상 신앙 공통체 안에 있으며, 거기서는 계시에 대한 예언자-사도의 증언(證言)과 성령 안에서의 교제의 응답(應答)이 일치한다. 기독교 윤리의 내적 일관성은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본성과 그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응답을 함께 받아들이는 그 어떤 신앙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표현될 때, 기독교 윤리학의 통일성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은 “기독교 신앙생활이란 곧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에 대한 복종적인 사랑의 응답으로 꽉 채워져 있다”고 하는 한가지 사실을 여러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롱(Edward LeRoy Long)은 신학적 언어의 사용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기독교 전통 속에 서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의 이 공동체는 교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는 하나의 공동체적 경험이 있는데 이 공동체적 경험은 그것이 충성의 대상이 되며, 동일시의 수단이 되는 사람들에 의해서 까지도 분석과 연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리챠드 니버(Richard Niebuhr)는 공동체적인 것과 비판적인 것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파악하고 있다.
역사 안에 있다는 것은 어느 특별한 사회 안에 있다는 것다. 이와 같은 사회 안에 있어서 개인의 유한한 입장에서 보편적인 것을 보는 견해는 같은 방향과 입장에서 보는 동료들의 경험으로 비교, 시험되어야 하며, 또한 같은 공동체에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탈피해 버린 그런 원칙 및 개념들과의 일관성의 시험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 역사 안에서의 교회의 사상과 행동을 이해하며 비판하는 제한된 일을 수행하는 신학은 또한 그것의 비판적인 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시험을 위해서도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회적 역사 안에 있으므로 신학은 개인적인 또는 사적인 학문이 될 수 없으며, 또는 정치 역사나 문화 역사의 어떤 비교회적 분야에서 살 수도 없다. 그것의 집은 교회이며, 그 언어는 교회의 언어이다. 그리고 교회와 더불어 그것은 보편적인 것으로 지향하고 있으며, 교회는 그의 존재를 이 보편적인 것에서 끌어낸 것을 알며, 또한 모든 교회의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그 보편성을 지적한다.
니이버는 이 글에서 공동체의 코이노니아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공동체의 코이노니아적 특성을 유기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는 니이버는 비치와 함께 공동 저술한 ⌈기독교 윤리⌋ Christian Ethics: Sources of the Living Tradition에서 이러한 공동체의 코이노니아적 특성을 삼중적 관계로 ꄙ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 이론의 여러 변화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삼중적 관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 나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와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 그리고 하나님이 개입해 계시는 ‘중심적 위치’가 계시는 관계이다.
이제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의 유기적(有機的) 관계를 삼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글에서 코이노니아 윤리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B.현대의 시대적 정황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의 실재를 재인식하는 것이다.
1966년 초여름 독일의 브레멘 시에 있는 “게르하르트 롤프 김나지움”의 교지(校誌)에 “주 하나님, 오랜 병고 끝에 마침내 사망하다.” 는내용의 조사(弔辭)가 나타나고 그것이 다시 “슈피겔”(Der Spiegel)지에 개재된 이후, 하나님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소위 ‘사신신학’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구체적으로 모색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는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도덕학적, 정치학적, 자연과학적 연구의 가설로서의 신은 폐기되었고 극복되었다. 철학적, 종교적 연구의 가설로서의 신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더이상 인간에 대해서 염려해 주는 초월적 실재란 없으며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 관심하는 것은 인간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거기에는 하나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종교와 신학이 하나님 혹은 신들이라고 부르는 본질은 인간 자신이 갖고 있는 특성의 반영이며, 따라서 신학의 진정한 연구 대상은 인간 자신이다.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스승인 헤겔의 관념론을 역전시키고 모든 존재의 기반으로서 정신 대신에 자연을, 절대자 대신에 인간에게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두가지 측면에서 그는 19세기와 20세기의 무신론적 사상의 전체적인 모습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무신론자들의 비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유신론적 신념’과 ‘인간의 탐구에 열려있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사이를 날카롭게 구분함으로써 그 답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골비쳐(Helmut Gollwitzer)는 “인간의 본성의 기초 위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접근될 수 있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인간, 즉 인간 이성의 산물인 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니체가 죽음을 선언한 하나님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일 뿐이요, 전에 살아 있지 않던 하나의 “개념적 우상”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비판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버코프(Hendrikus Berkhof)는 무신론에 의해서 거부된 신성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 밖에 있는 “저 위에”(up there)있는 하나님이며, 우리가 논란을 통해서 그 실존을 규명해야 하는 형이상학적인 실체이며, 자연신학의 신상이며, 스콜라 주의에서 말하는 지고의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 즉 자기 자신을 알리고 구체적인 역사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말하자면 그의 행위와 말씀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무신론적 비판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중심 안에서 그 피안에” 있다. 즉 그는 삶의 한계가 아니라 그 중심에서 만날 수 있는 실재의 깊이이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낱말은 우리의 존재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차안과 피안,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판단으로는 현대인에게 가능한 유일한 하나님 관념은 만남의 가능성으로서 “제약적인 것 속에서 무제약적인 것, 차안에서 피안, 현재적인 것에서 초월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자신의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 The Shaking of the Foundation에 실린 설교 ‘실존의 깊이’에서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방법이 높이의 표현에서 깊이의 표현으로 바뀌어질 때에 어떠한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신은 그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우리가 애써야 하는 따위의 ‘저 밖에’ 있는 어떠한 투영이나 하늘 저쪽에 있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의 기반(基盤ground)’이라고 한다. 틸리히가 의미하는 신은 ‘임기응변의 신’ 따위나, 세상을 등지고 그에게로 향할 수도 있으며 밖으로부터 개입시킬 수도 있는 따위의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다. 신은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Ⅲ. 레만의 기독교 윤리관
A.레만의 생애 및 신학 사상
1.레만의 생애
芙
레만은 복음주의 개혁교회의 목사이며 엘름허스트대학의 학장인 아버지의 쌍둥이 아들 중 장남으로 1906년에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 신학자이며, 목회자이자 행동적 사상가이다. 그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1932년 부터 1년 동안 본 대학과 쮸리히 대학에서 브룬너(E. Brunner)와 바르트(K. Barth) 문하에서 신학 훈련을 쌓으면서 이 무렵에 본회퍼(D. Bonhoeffer)와 교우관계를 맺었다. 귀국하여 1933년부터 엘름허스트 대학에서 종교와 철학 담당 조교수로 대학 교단에 서기 시작했다. 1936년 ⌈리츨과 바르트 신학의 의인 교리에 관한 비평적 비교연구⌋ A Critical Comparision of Doctrine of Justification in the Theologies of Albert Ritschl and Karl Barth라는 논문으로 유니온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서 이든 신학교와 웰레스레이 대학에서 부교수로 봉직하였고, 40세를 맞는 1946년 이 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 하바드 신학교, 유니온 신학교 등에서 응용신학, 성서적 역사, 조직신학, 윤리학등을 강의하였다. 독일의 로렌스 대학의 신학박사, 엘름허스트 대학의 법학박사, 튀빙엔 대학의 명예박사 등은 그의 명성을 잘 알려 주는 것이다. 1969부터 2년간 미국신학협회의 의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웨스트민스트 출판사의 협동 편집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또한 비상시민자유위원회의 중요 멤버로서 미국 시민의 정치적 권리뿐 만 아니라, 세계 시민의 자유와 자유로운 신학 공동체를 위해서 정치적 , 이념적 투쟁을 하였다. 개혁교회 세계연맹 협의회의 요청으로 브라질의 쌍 파울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체코의 프라하의 전기독교 평화위원회 등에서 자신의 신념과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레만은 세계적 격동과 신학적 혁명의 와중에서도 목회자적 경건성과 실천성을 잃지 않았다. 언제나 학생들에게는 시와 고전과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정치적 문학과 미국 주연방 보고서를 비롯하여 마르크스와 에브나 딘과 W.H. 오덴의 글을 읽도록 권면했다. 생애의 마지막 부분은 정치적 현실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위한 훈련과 실천에 바쳤다. 그의 신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성서에서 취한 것으로, 특히 정치 속에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지키는 어떤 것을 찿으려고 하였다. 그의 심각한 신학적 긴장은 바르트와 본회퍼의 사이에서 우러나온 것과 같은 전통과 혁명, 개인과 공동체, 정치와 성서 사이의 긴장이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고민했던 레만은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양쪽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 브로드웨이 장로교회의 보수주의는 그를 너무 세속적으로 보는 반면, 리버사이드 교회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너무 지나치게 기독교적이라고 보았다. 뿐 만 아니라 프린스턴 시절의 장로교회에서는 레만을 위험한 과격파로 여겼는가 하면, 하바드에 있을 때에는 그를 지독한 칼빈주의자로 몰아 세웠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도 그가 지킨 목회적 방법론은 “코이노니아의 자료들을 어디에서 찾아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의 목회적 경건과 자유를 위한 실천, 그리고 신학사상의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코이노니아이다.
2.레만의 신학사상.
레만의 신학 사상은 성서신학, 역사신학, 윤리학, 정치신학, 사회과학, 인간학등의 분야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논의될 수 있다. 그가 줄기차게 추구해 왔던 상황화나 인간화, 신의 정치론등은 그의 윤리학과 그리스도론과 인간학에 포함되어 있다. 그의 신학의 주된 관심사항과 주제는 인간화, 신의 정치론, 코이노니아, 상황화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화의 문제는 “인간생활의 보다 더 인간 다워지는것”에 대한 탐구이다. 그는 이 문제를 그리스도론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논의하고 있기에 “신학적 인간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화의 증거로 ①창세기 2장과 3장의 새로운 이해로 강조하는 제2아담의 인간성, ②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휴머니즘, ③본회퍼가 사회신학적 통찰로서 시도한 거룩한 공동체 등이다.
신의 정치론은 레만의 신학적, 기독교 사회윤리학적 주제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정치는 “신학적 반성을 위한 상황으로서의 정치”를 뜻한다. 이는 신의 정치가 인간생활에 연장될 때 인간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 사랑과 정의와 자유로 나타난다는 논지이다. 이 주제는 골비쳐(Helmut Gollwitzer)나 몰트만(Jürgen Moltmann)에 있어서 해방과 자유의 주제가 “신학적 의미”에서 현대적 혁명 운동으로 표출되는 것과 유사하다.
코이노니아의 개념은 레만의 신학사상과 기독교 윤리론의 핵심을 이해하는 첩경이다. 코이노니아는 레만 신학의 “가장 큰 컨텍스트”이며, 그의 인간학과 기독교윤리학의 주제이다. 레만의 코이노니아 개념은 정치적 책임성과 결단, 제의적 엄격성과 성실, 신학적 개방성과 성찰, 그리스도의 삶과 언약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는 본회퍼가 과격하게 사회적 복종을 강조하면서도 언제나 찬송과 예배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것과, 칼 바르트가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생활의 절정이 바로 화해라고 역설했던 것과, 칼빈이 제의적 용어로 교회론과 코이노니아를 강조했던 것과 서로 상통한다.
상황화는 언제나 코이노니아와 상관관계를 가진다. 그의 신학의 “가장 큰 상황이 코이노니아”이다. 그는 상황이나 코이노니아는 언제나 상대적이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신학은 항상, 그리고 반드시 성별된 영역과 일상적 세속 속에서 반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윤리적 질문을 형성함에 있어서 사회신학적 지식에 의존하기도 하며, 문화와의 대화 안에서 탁월한 증언을 찾아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74년 유니온 신학교에서 은퇴할 때까지 서평 60종, 논문 106편의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이 중에서 Oxford University Press의 1955년 판 ⌈성 어그스틴 연구에 대한 지침⌋ A Companion to the Study of St Augustine에 기고한 “Anti-Pelagian Writings”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단행본으로는 ⌈용서:개신교 사상에 있어서의 결정적 논쟁⌋ Forgiveness:Decisive Issus in Protestant Thought (1940). ⌈독일을 재교육하며⌋ Re-educating Germany (1945). ⌈기독교 사회윤리 원론⌋ Ethics in a Christian Context (1963). ⌈리츨과 바르트 신학의 의인 교리에 관한 비평적 비교연구⌋ A Critical Comparis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in the Theologies of Albrecht Ritschl and Karl Barth (1968). ⌈예수 그리스도와 계시의 문제⌋ Jesus Christ and the Question of Revolution (1975) 등의 여섯권이 있다.
B.레만의 윤리관
레만의 윤리관을 살펴 봄에 있어서 우리는 그의 윤리적 사고 형성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제 Ⅳ장에서 레만의 코이노니아 윤리를 공동체와 정황 속에서의 관계론적(關係論的) 윤리의 중요한 한 부류로 규정하겠지만, 우리는 그의 윤리적 사고 형성의 기초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공동체와 상황 속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에서부터 우리의 연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독교 윤리의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법’(the Divine Impertive)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기초해 있는 윤리는 ‘하나님의 명령법’ 보다는 ‘하나님의 서술법’(the Divine Indicative)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주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는가?’이다.
레만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고 계신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레만의 입장에 따른다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행하셨고, 또 행하시고 있는 바의 빛에서 보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ꄙ질문에 대하여 항상 훈련받는 자일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사고 형성의 기초에서 레만은 기독교 윤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고 그의 교회의 한 성원으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과 그 대답에 대한 학문적인 성찰”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1.윤리적 사고의 정황으로서의 교회
레만은 교회가 기독교적인 윤리적 사고의 출발점이며 그 정황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들이나 회중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여겼는가 하는 점에 대한 신약성서의 기록에 가장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교회는 역사적 산물(歷史的 産物)로서, 예수가 이 세상에서 살 동안 하나님이 그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행하신 것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應答)이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적 행위(啓示的 行爲)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의의와 운명에 대한 숭고하고 절박한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같은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의 자의식(自意識)은 메시야의 중심적 위치, 하나님의 왕국과 참 이스라엘 공동체 사이의 형성적(形成的)인 관계성(關聯性)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은 이 코이노니아 속에서만 가능하며,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히 의도한 행위의 구체적인 결과 또한 코이노니아의 실재를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는 곧 코이노니아 윤리인 것이다.
이미 코이노니아의 성서적인 근거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기독교 윤리의 코이노니아적 특성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신약성서 곳곳에서 발견되어 진다. 특히 레만은 에베소서의 여러 말씀들 중에서 몇 가지의 중요한 코이노니아 윤리의 근거를 발견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제, 즉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는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이 나타나는 “교제를 창출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으로 인해,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려주는 도구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의 구조 안에다 그 닻을 내린, 하나님의 목적의 충만함 그 자체인 것이다.
둘째는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나타내는 교제를 창출하는 이러한 실재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 즉 증언(證言)과 응답(應答)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항상 신앙 공동체 안에 있으며, 거기서는 계시에 대한 예언자-사도의 증언과 성령 안에서의 교제의 응답이 일치 한다.
세째는 그리스도의 몸은 다양한 은사를 지닌 교제라는 것이다. 코이노니아 안에서는 획일성(劃一性)이나 독단(獨斷)이 아닌 다양한 은사가 그리스도이신 머리의 일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에 근거해 있다. 결국 그리스도가 코이노니아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레만은 우리가 “교회는 육체이고 그리스도는 영”이라는 말을 수용할 수 있고, “매우 위대한 생명과 불멸성”을 부여하는 성령의 역동성에 주목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안에 현존해 계시며 동시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서의 은사의 다양성에 대한 진실한 응답은 코이노니아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코이노니아가 있다는 그의 말은 정당한 것이다.
네째는 기독교인의 삶, 곧 코이노니아 안에서의 삶의 목표 및 정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는 “성숙한 사람”이 있는 데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숙성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발달된 정도를 말하는 것으로, 레만은 우리가 “신앙의 일치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서 성숙한 사람이 된다고 보았다. 교회의 윤리적 실재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사랑 안에서 역사하듯이 사랑 안에서 자신을 형성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윤리적인 실재가 코이노니아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윤리적 이해를 광범위하게 수정하도록 하는 코이노니아 - 윤리에 관한 기독교적 사고의 출발점으로서 - 의 강력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즉 도덕성에 대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계시에 대한 것으로서의 기독교 윤리는 도덕성(道德性)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성(成熟性:maturity)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이 강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숙한 삶은 기독교인의 신앙의 열매이며, 도덕성은 성숙성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레만은 에베소서 저자가 코이노니아의 구조가 지닌 유기적인 활력을 예증하기 위해서 온전함을 이루려고 하는 신체적 구조의 유기적 활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성숙성에 대한 설명을 착안한다. 성숙성을 향한 신체적인 성장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상호 관련성 안에서’ 그리고 ‘상호 관련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완전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된 여러 다양한 은사를 지닌 구성원들과의 상호 관련성이 이 세상에서 완전한 한 유형으로 구성되는데, 그것은 상호 관련성 안에서 그리고 상호 관련성을 통해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에 참여하는 것은 개별적인 여러지체들과 몸체의 완전성 또는 성숙성을 이루게 하는 유기적 활력(有機的 活力)의 징표이며 수단이다. 따라서 성숙성은 상호 관련성 안에서, 상호 관련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완전함이다. 여기서의 상호 관련성은 유기적 전체에 속해 있는 각각의 개별적인 지체로 하여금 전체 속에서 자신이 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숙성이다.
레만은 상호 관련성은 곧 코이노니아 안에서의 삶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레만은 “모든 사람은 그의 이웃의 사제이다”는 것을 사실화할 수 있었으며, 이를 다시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그리스도이다”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인의 삶을 코이노니아 안에서의 삶이며, 동시에 코이노니아의 삶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레만은 교회에 대한 신약성서의 이중적 의미로서의 윤리적 실재와 경험적 실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행동을 통하여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교회를 인간의 성숙성을 이루게 하는 컨텍스트 및 그 수호자가 되도록 한다. 여기서 교회의 실재는 윤리적 실재가 되고, 기독교인의 삶에 관한 실재적인 것은 항상 코이노니아 안에 숨겨져 있게 된다.
2.하나님의 활동에 있어서의 정치적 성격
레만은 사실상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의 역동성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와 교훈적인 이해 모두를 배제시킨다고 보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보편화 될 수 없고, 기독교인의 행위 또한 보편화 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행동의 역동성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행동의 역동성은 모든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있어서 의로운 것이 될 수 있고 또한 우리가 그것을 세심하게 지킬 수 있는 정황을 규정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행위가 나타나는 상황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 질문하는 것은 인간의 윤리적 상황이 가지고 있는 역설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역설은 “우리는 우리가 행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은 알지 못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레만은 이러한 역설이 내포하고 있는 중추적인 윤리적인 의미는 오직 코이노니아와 더불어, 그리고 코이노니아에서부터 시작하는 윤리에 관한 기독교적 사고 안에서만 유일하게 인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제 윤리적 관심의 초점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역설적인 실재와 그 생동성에 집중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에 윤리적 의미와 내용을 부여해 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 윤리의 코이노니아적 정황과 특성인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라는 질문은 코이노니아의 밖에서 시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대한 철저한 대답은 코이노니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는 말은 코이노니아 안에서 볼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이노니아 안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명백하고 구체적인 정치(政治)의 문제로 제기된다. 하나님의 활동에 적용해서 채택한 “정치”라는 말은 정치적 행위의 실용적이고 잠정적인 표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다. 엄밀하고 기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만일 다른 어떤 표현보다 더 의미있는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정치가”라는 것이다. 이 말은 오히려 정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해석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생동성과 의미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다.
레만은 이 하나님의 정치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定意)와 성서적인 기술(記述)과 연결짓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활동이며 활동에 관한 성찰’로 보았다. 이는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 유지시켜 주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레만은 이에 대한 해답을 성서적인 기술에서 찾는데, 성서적인 기술에 의하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 유지시켜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 곧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며,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며... 결국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정치와 코이노니아 사이의 관계를 살펴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코이노니아는 인간들 사이에서의 기본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일이나 행위나 삶 또는 사람들의 집단에 “참여하는 것” 또는 “동참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는 인간관계의 중점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것은 물론 인간관계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말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 사상에서의 코이노니아 라는 단어는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의 교제,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사람들 상호간의 교제나 관계성을 나타내는 말로 거의 제한되게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앞 장의 교회의 자기 이해 부분에서 보았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성서적인 기술 둘 다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유지시켜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데 있어서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코이노니아의 현상학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본 논의는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고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하나님, 곧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인 관점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에 레만은 성서 속에 기록되어진 비유의 이야기를 주목하고 있다. 그는 비유적인 이미지는 결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정확하게 하나님의 방식들과 인간의 방식들을 “서로 혼동하거나 구분함이 없이” 병렬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즉 조형적인 성서의 이미지들을 하나님의 활동을 참되게 반영하고 기술해 주는 자원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실재”와 신앙적인 지식에 의해서 나타나는 인간의 응답을 가르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키고 기술하는 조형적인 성서적 이미지들은 모두 정치적 이미지들이다.
이제 우리는 성서의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정치의 근본적인 의미와 의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성서 이야기에서 찾아야 한다. 성서의 이야기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으며 세상에서의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인간들의 뜻 사이의 갈등에 중점을 두고 전개된다.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소유된 백성”과 ꄙ제를 나누며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백성은 “계약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과 그 백성들의 운명을 위해서 세상을 만드시고, 유지시키고, 다스리신다. ꄙ러므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의 질서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그의 동료인간과 관계를 맺음으로서 자기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을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실현을 이루려는 의지에 따라 이러한 삶의 질서는 파괴되어 버리고 그의 동료인간을 포함한 환경을 정복하려는 권력에의 의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인간의 권력에의 의지는 공동체를 파괴했고, 결국은 메시야적 공동체의 도래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하나님은 파괴된 공동체 속에서 이제 새로운 삶의 질서를 형성하는 정치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완전히 가망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파괴된 공동체 속에서 구원과 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가능성이 시작되는 이같은 사실이 바로 메시야적 징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야적 행위이며, 동시에 정치적 의미와 특성을 지닌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파괴된 세상 안에 새로운 삶의 공동체로서 운영하시는 이 메시야적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성숙성은 가능성으로서 뿐 만 아니라, 현실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 메시야적 공동체 안에서는 성숙성의 비밀과 경험이 “하나님의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만유가 되실” 때 대비해서 표현되고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레만은 성숙성을 “해방과 성취가 혼합된 충격적인 경험”으로서의 구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성이 하나님의 행위의 정치적 역동성에 의해서 연단될 때 이러한 충격적 경험의 심층에서부터 구원에 대한 질문이 제기됨을 성서의 이야기에서 발견한다. 곧 옛 계약의 형태에서의 구원에 대한 질문인 “주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는 ꄙ나님의 행위의 정치적인 역동성에 의해 새로운 계약의 형태에서의 구원에 대한 질문인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로 바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레만은 메시야적 공동체의 대표적인 형태로서 성만찬을 이해하고 있는데, 이 성만찬 공동체를 성숙성을 키우는 실험실로 확신하고있다. 성만찬 공동체 안에서, 그의 백성들 한가운데서 그들 각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메시야-구원자의 활동적(실재적)인 현존과 능력에 의해서 권력에의 의지가 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는 바를 행하려고하는 능력이 되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려고 하는 힘은 인간이 창조될 때의 하나님이 원하신대로 존재하려는 힘으로서 완전함이나 성숙성을 얻는 힘이다.
기독교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께서 항상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유지시켜 왔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그렇게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표이며 징표이다. 이것이 “태초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끝없는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뜻이다.
3.기독교 윤리의 맥락적 특징
레만이 윤리에 대한 기독교적 사고가 기독교인의 코이노니아와 더불어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코이노니아 안에서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코이노니아 안에서 우리가 그 일에 참여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은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조건들을 설정하고 그것들을 실행함으로서 인간의 성숙성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시작되고 완성된 새로운 인간성 안에서 각각의 인간들이 완전하게 되고 결국은 모든 인간들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코이노니아 윤리는 원리 및 계율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및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즉 절대윤리(絶對倫理)가 아닌 맥락윤리(脈絡倫理)에 속한다.
절대윤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이 “절대적인 것”에 의해서 제시된다. 윤리학적으로 보는 “절대적인 것”이란 어떤 상황하에서도 똑 같은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고 적용해야 하는 행동의 기준이다. 그 기준은 어떤 이상적인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가치 혹은 법이 될 수도 있지만 그 기준의 윤리적 실재와 의미는 그것의 절대적 특징 안에 있다. ꄙ만은 그렇기 때문에 절대윤리는 모든 윤리적 정황에 본질적으로 내제되어 있는 윤리적 요구와 윤리행위 사이의 실재적인 불일치를 피할 수도 없으며 다룰 수도 없다고 말한다.
Ⅳ.코이노니아 윤리와 현대 기독교 윤리
이 장에서는 전술한 코이노니아 윤리의 입장에서 현대 윤리학의 몇 가지 중심과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현대 윤리학에서 문제되고 있는 몇 가지의 논의들을 코이노니아적 입장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은 코이노니아 개념이 현대 윤리의 제 문제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원리로서 적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성을 고찰하는 작업이다. 이에 도입되는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주제는 코이노니아 윤리의 원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코이노니아 윤리적 실체로서의 교회 공동체, 코이노니아 윤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책임(責任)의 문제들이다. 이 주제들은 대부분 본회퍼의 윤리적 관심들에서 시작되는 것들이다.
A.코이노니아 윤리와 성인된 사회
본회퍼는 “우리는 완전히 무종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인간은 이미 단순히 종교적으로는 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철저하게 무종교적이 되는 때를 가정(假定)하고 있다. 일체의 신이 없이도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세상에 대한 그의 이해는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 끊임없이 그 활동 범위를 억제(抑制) 당하고 있으며 그 존재의 기반(存在의 基盤)을 잃고 있는 하나님을 인식한다.
칸트 이후로 하나님은 다만 경험의 세계의 피안(彼岸)에 그 장소를 유지함으로써 언제나 인간의 인식(認識)과 생의 영역(領域)에서 밀려 났으며, 이러한 성인된 세계(die mündig gewordene Welt)에서 그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른바 궁극적(窮極的)인 제 문제를 성결하는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으로서 인생 문제에 대한 답으로서, 인생의 곤궁, 모순을 해결해 줄 뿐인 신으로 전락(轉落)해 버리고 말았다.
본회퍼는 이러한 세계 안에서 인간들이 세상과 인간 존재의 공공성(公共性)에서부터 배제 당한 하나님을 ‘개인적인 것’, ‘내면적인 것’, ‘사적인 것’의 영역에서 확보하려고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내밀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 ‘내면성’, 즉 인간의 비밀의 장소가 하나님이 가져야 할 영토라는데서 비롯 되었다. 인간의 종교성(宗敎性)은 인간이 곤궁에 빠졌을 때 이 세상에 있어서의 신의 능력에 호소하도록 인간을 가르친다. 결국 이 인간의 종교성이 기계장치의 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의 말대로 도덕학적, 정치학적, 자연과학적, 철학적, 종교적 연구의 가설로서의 신은 과학의 발달로 성립된 현대 사회 속에서는 폐기되었고 극복되었다.
본회퍼는 작업가설로서의 신(Arbeitshypothese)이 폐기된 성인된 세계 속에서 인간은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etsi deus non daretur) 이 세상 속에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성실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바로 이 인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인식은 인간의 성인됨을 강요하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며,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의 상태를 바로 인식케 한다고 보았다.
우리들과 함께 있는 신은 우리를 버리는 신이다.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들을 이 세계 속에 살게 하는 신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 있는 신이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신은 자기를 이 세상으로부터 십자가로 추방한다. 신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무력하고 약하다. 그리고 신은 바로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함으로서만 우리들과 함께 있고 우리를 도와준다.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약함과 고난에 의해서 우리를 도와 주신다는 것은 마8:17에 아주 분명하다.
본회퍼는 하나님에 대하여 “세속적으로”(weltlich) 말함으로써 불트만과 같이 신과 기적을 다 “비종교적으로”(nicht-religiös) 해석하고 고지(告知)하고자 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상실한 세계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고 이 세계의 무신성(無神性)을 무슨 방법을 동원하여 종교적으로 음폐하거나 신성화(神聖化)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세속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고,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에게는 세속적으로 살 것이 허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본회퍼가 성인된 세계의 개념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하나님에 관한 비종교적 해석을 통해 세계의 무신성을 가리우기보다 폭로하여 이 무신성의 세계에 놀라운 빛을 비추도록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이 성인된 세계에서의 인간들을 종교에로가 아닌 신앙에로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종교적 행위’는 반드시 무언가 부분적인 반면에 ‘신앙’은 무언가 전체적인 것이요, 생활행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예수께서는 새로운 종교에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에로 부른다고 말한다.
뮐러(Muller)는 이러한 신앙에 대해 “참된 신앙은 이 세상, 이 세상성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신앙은 멸시를 받고 무력한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서 ‘인내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곧 신앙자는 고난에 동참함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무신론적 세계관에 대해서 해방된 자로서 이 무신론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본회퍼가 말하는 ‘성인된 세계’를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는 신 없이 산다”는 명제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면, 여기에는 윤리의 코이노니아적 요소와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위의 명제의 후자인 ‘신 없이’ 살아야 하는 신은 기계장치의 신이며, 작업가설의 신이며, 인간 존재 저편에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불려지고 문제를 해결하고는 다시 인간존재 저편으로 물러가는 형이상학적 초월적인 신이라면, 우리가 ‘그 앞에서, 그와 함께’ 해야 할 신은 우리 가운데 임재(臨在)하사교회 안에서, 우리의 실존의 기반(實存의 基盤)으로, 우리와 함께 교제하시는 하나님, 그 분이기 때문이다.
B.코이노니아 윤리와 타자를 위한 존재.
본회퍼는 옥중에서 “어떤 저서의 초안”을 기획하는데 그것은 ‘타자를 위한 존재’(Dasein für andere)의 초고였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것은 인간의 전 존재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경험이요,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하여 존재한다’(Für-andere-da-Sein)는 경험이다. 예수가 ‘타인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초월경험이다. 자기 자신에서부터의 자유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에서, 비로소 전지, 전능, 편재가 유래한다. 신앙이란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 관여하는 일이다(성육신, 십자가, 부활). 신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생각할 수 있는 사고상의 최고, 지대, 최선의 존재 - 이것은 결코 진정한 초월이 아니다 - 에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라,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타인을 위한 존재’에 있어서의, 곧 예수의 존재에의 관계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이다.
초월적인 것은 무한히 도달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이웃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하나님은 동방의 제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기괴한 것, 혼돈적인 것, 멀리 있는 것, 무서운 야수의 형태를 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희랍적인 자율적 인간의 신인의 모습을 취하지도 않고 오직 ‘타인을 위한 인간’,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인간, 초월적인 것에 근거를 둔 인간이다.”
에른스트 페일(Ernst Feil)은 본회퍼가 확실히 하나님 안에서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믿음을 폐지하려고 의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초월성을 접근으로 해석하려고 의도했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더 이상 종교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어떤, 참 세상의 주님으로 보여주기를 원했다.
로빈슨(J.A.T. Robinson)은 본회퍼가 말하는 예수는 ‘타자를 위한 인간’,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 ‘자기 존재의 기반과 완전히 통하며, 하나가 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서 생겨지는 남을 위한 삶 자체가 곧 초월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남을 위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우리들 중의 하나’로써ꄙ우리 존재 전체의 깊이와 기반으로서의 사랑을 베푸시는 그 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신의 삶,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뭉치는 궁극적 ‘사랑의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남을 위한 인간의 삶에서 구체화 된다.
여기에서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코이노니아적 접근은 가능하게 된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존재 기반으로서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교제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는 신약성경 말씀과 최종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C.코이노니아 윤리와 공동체
현대 기독교 윤리학에서 공동체 개념에 대한 논의는 매우 광범위하며 매우 무게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 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공동체 개념은 코이노니아 개념과 상관된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사회 윤리학적 입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본구조에 대한 것이다.
본회퍼는 경험적인 공동체 형식의 토대가 되는 교회의 사회학적 기본구조에 대하여 “인격”, “원상태”, “죄”, “계시”, “대리행위”, “공동체”등의 그리스도교적 기본개념들, 즉 교의학적인 기본개념들의 ‘특수한 사회적인 영역’이 같은 방법으로 분명해질 때 비로소 명백히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교회의 본질은 자신의 고유한 형식으로서의 경험적인 교회의 형식과 기본적인 관계들이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거기에 존재한다. “교회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실재의 영역 안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 말하자면 교회의 개념은 연역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교회의 실재는 계시의 실재이며 신앙되든지 아니면 부인되든지 하는 성질의 것이다.” ꄙ때문에 교회의 본질은 오직 교회 자체의 내부에서 부터 만이 바르고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계시의 실재는 교회의 역사적 현상으로는 바르게 파악될 수 없다고 보았다. 계시의 실재는 역사적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현실과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 안에 근거할 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교회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다른 한 편에서 교회를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하는 것은 종교적인 오해라고 말한다. 교회는 역사적이나 종교적으로, 종말론적으로 관찰하고자 한다면 교회의 현실을 바로 인식할 수가 없게 된다. 교회는 역사적인 공동체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인간의 활동이나 인간의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전달에 의해 설립되었다. 때문에 교회는 세상과 더불어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후버(Wolfgang Huber)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유일한 관점을 중심에 놓는 하나의 개념을 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후버는 이를 교회는 오로지 그리스도와 또 그에 의해서 열려진 하나님의 신실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서, 동시에 몸으로서의 삶, 피조물 전체는 그리스도의 주권 안으로 포함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모든 생활 방식과 질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영에 관계함으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인간은 이 자유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의 고난에 조건없이 개입하게 되며, 실로 다양한 행동의 가능성들 가운데서 ‘남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ꄙ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됨으로써 가능해 지는 자유는 ‘상호교류적 자유’, ꄙ 코이노니아인 것이다. 상호교류적 자유로부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은사들이 서로 복종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각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함께 속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실로 조건없는 상호 인정과 연관성 속에서 인지된다.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제 일차적 응답은 신앙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참 신앙은 사랑으로 움직이는 신앙이다. 살아서 활동하는 신앙은 그리스도를 위한 증언(marturia : μαρτυρια)과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diakonia :■διακονια)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koinonia : κοινωνια)이며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다. 증언과 봉사와 더불어 코이노니아는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D.코이노니아 윤리와 인간의 책임.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인간은 부정(否定)과 긍정(肯定)의 긴장 관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본다. 본회퍼가 말하는 부정과 긍정 사이의 긴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나는 생명이다”는 말씀 가운데서 우리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부정과 우리 자신에게 죽음이 주어짐으로써 이 부정이 하나의 새로운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신비로운 긍정으로 되는 것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긍정과 부정이 모순되는 통일성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게 되는데, 이러한 긍정과 부정이 모순되는 통일성은 자신의 밖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만남이 성립된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인간과 하나님이 가지는 관계의 기초가 된다.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데서 긍정과 부정이 모순으로 가득찬 통일성, 무아의 자기주장, 하나님과 인간들에게 자기를 포기하는데서 자기 주장이 일치될 때 인간은 산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함으로써 산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으로서 우리와 만나는 삶은 이 긍정과 부정을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삶의 응답을 요구한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긍정과 부정으로서 응답하는 삶의 면모를 ‘책임(責任)’이라고 한다. 이 책임의 개념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에 대한 응답의 포괄적인 전체성과 통일성이 포함되어 있다.
본회퍼는 또한 성서적 의미에서의 책임성이란 그리스도의 사건과 관련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자기의 생명을 걸고 말로써 응답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는 책임은 동시에 그리스도 앞에서 인간들을 위한 책임이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인간들에 대한, 인간을 위한 책임이 존재하며, 그것은 항상 그리스도를 위한 책임이며, 오직 그 점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한 책임이다. 말과 생활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곳에서만 책임이 존재한다.
본회퍼는 책임적 인간은 구체적인 가능성 가운데서 구체적인 이웃과의 상호 관련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책임적 행위는 원칙적인 것에 의해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성립되어진다. 따라서 책임적 행위는 인간의 책임적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 책임적 결단은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의하여 그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적인 행동의 한계는 하나님의 은총과 심판에 의하여 인간의 행위가 끝나는 곳에서 발견되고, 또 이웃에 대한 책임성 안에서 발견함으로써 동시에 바로 이 한계가 행동을 비로소 책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리챠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책임이라는 개념에는 인간은 응답자(應答者)라는 이미지가 암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란 대화에 끼어든 존재로서 자기에게 가해진 행위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런 이해 속에서 니버는 책임의 개념을 “‘책임적’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또 어떤 사실에 관하여 답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고 분석한다.
에벨링(Gerhard Ebeling)은 인간이 책임적인 결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가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종(種)에 속하는 존재인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의식과 인격에 의해서 종에 속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 되어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주변의 세계를 가지는 동시에 그 세계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으며,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기획하고 이에 상응해서 스스로가 자신의 주변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처럼 가능성이 발휘될 수 있는 활동여지로부터 인간에게는 삶을 그냥 그대로 살기 보다는 삶을 자신이 직접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실현할 필요가 생긴다. 이때문에 인간은 선택할 수 있으며, 인간은 결단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가가 결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려고 하는 윤리적 결단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동하시는 것과 구체적인 인간상황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환경, 동기 목적 및 상호관계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행동적인 것이다. 그와 같은 결단들은 어떤 단일한 상황이나 심지어 다양한 상황에 까지 단일한 원리를 적용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
실로 기독교 윤리의 독창성은 순종함으로써 어떤 결단을 내리기를 기대하고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여러가지 고려사항을 제시해 주면서도 모호성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기를 거부하는데 있다. 이러한 고려사항들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컨텍스트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한 콘텍스트는 신앙적인 순종을 의미있는 모험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결단은 인간의 조건 자체가 하나님의 정치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써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역동적인 상황 안에서는 어떤 하나의 올바른 행동이란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항상 행해야 할 행동들이 있다. 그러한 행동이 옳은 것이려면 그 속에 순종의 모험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수단들이 될 수 있다.
구체적인 윤리적 관계들은 윤리적 요구들이 나타날 뿐 만 아니라 그러한 요구들을 형성시켜주는 컨텍스트를 구성한다. 때문에 기독교 윤리가 다루어야 할 결정적인 질문은 “나는 무엇을 당위적으로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로서 그리고 그의 교회의 한 성원으로서 나는 무엇을 존재적으로 할 수 있는가?”로 제시 되었다. 이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대답에 대한 당연한 결론은 “나는 존재함으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적으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은 모든 상황에서 나를 현재의 나로 존재하도록 지금까지 나에게 주어진 것에 따라서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나의 현 존재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존재적 결단에 의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선택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가능한 것이다.
Ⅴ.결론
A.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