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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약 250㎞, 평균높이 600m 정도로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도계를 따라 서천군과 보령시의 경계까지 이르며, 경기도,·강원도,·충청북도의 도계가 만나는 부근에서는 남한강에 의해 절단되어 있다. 차령산맥에 솟은 주요산으로는 평창군의 계방산, 횡성군의 태기산, 영월군의 백운산, 원주시의 치악산, 안성시의 칠현산, 진천 서운산, 아산시의 광덕산, 청양군의 칠갑산, 보령시의 성주산 까지 맥은 이어진다. 오대산에서 갈라진 맥으로서 차령산맥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과 공주시 정안면을 잇는 고개 이름에 기인한다. 높이 190m.의 고개는 옛날부터 남부지방과 중부지방의 경계였던 관계로
높은 고개의 의미를 갖은 수리고개라 추측이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리는 수레로 바뀌고 한문으로 표기하여 차령(車嶺)으로 바뀌었을 가능성 높다. 다른 말로는 차현(車峴)이라 부르기도 한다.
태백산맥 오대산에서 갈라져 나온 맥은 계방산, 태기산으로 이어지고 치악산으로 연결되면서 안성과 진천의 경계를 타고 남하를 계속하다 천안으로 기울면서 내포지방을 품고 보령 성주산 까지 이어지는 산맥이다. 남한강 섬강에서 강물 밑으로 스며들어 다시 강건너부터 일어 서서 맥을 살려 이어지는 산맥이다. 설악산과 더불어 오대산과 계방산, 태백이니 소백산 등은 자주 찾아가곤 하였지만 차령산백 상에 놓여 있는 치악산은 가장 늦게 알게되어 찾아 간 산이었다. 어느날 한국산악회 원로 어르신을 통하여 치악산 존재에 대하여 귀동냥을 하게 된다. 학교 산악부에서 가입한 곳이 한국산악회인 관계로 파고다 공원 옆에 사무실이 있을 때 자주 찾았었다. 국내 명산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국립공원화 되면서 국립공원에서 야영을 하려면 추천서를 받아야 함으로 자주 찾게 되었고 임원이시며 원로셨던 분들 중에 은사님도 계셔서 찾아갔고 또한 각종 등반대회 신청및 추천과 관련하여도 찾으면서 어느날 이리오게 하시며 치악산 존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것이다.
청진동에 있던 중앙지도를 방문하여 증명서를 제출하고 1/50000 를 구매한 후 도상에서 면밀하게 확인해 나가면서 계획을 세워었다. 금대리 철교밑으로 들어 가 영원사에서 부터 시작하는 코스, 신림으로 가 상원사에서 시작하는 코스, 황골의 입석대 코스, 그리고 구룡사 코스를 관찰하다 결정은 국형사 보문사를 잇는 곧은재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유는 접근 교통편 때문이었다. 반곡역에서 가장 가까운 이유에서다.
청량리에서 중앙선을 탄 후 반곡역서 하차를 하면 걸어서 접근하기 가 장 편한 이유가 선택한 동기다. 대원은 모두 7명 동급생 2명, 아래 기수 1명 그 아래 기수가 4명으로 조직된 대원들은 무거운 동계용 장비들을 기슬링이라 부르는 배낭에 바리바리 집어 넣고 청량리에서 만난 후 겨울방학이었던 1월10일에 반곡역에서 내렸다. 엄동설한에 초행 산길을 무척 힘이 들었다. 4시경에 내렸던 반곡역 역장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고 황토흙집 초가가 줄줄이 서 있는 마을을 벗어나 꽁꽁얼은 논을 지나 국형사에 도착하였다. 국형사에서 1박을 하고 싶어 스님에게 부탁을 드리자 행사관계 어렵다하시며 한 두 시간 올라가면 보문암이란 암자에 노 스님 혼자 기거하시니 그리로 올라 가라고 하였다. 전원 헤드렌탄을 켜고 자일을 꺼내 서로를 연결한 후 8시경 보문암에 도착하여 왕암스님을 뵙게 되었다. 인자하신 스님의 안내로 요사채 한 구석에 짐을 내려 놓고 암자 퇴마루에서 저녁을 해결한 후 예불을 드리는데 예의상 참석한 후 깊은 숙면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스님과 함께 들고 떠나려는데 스님께서 가마솥에 나물을 삶고 무쳐 한 코펠 가득 주셔서 산행내내 산채비빔밥을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스님과 인연은 수년까지 이어졌었다. 곧은재를 오른 후 치악평전을 거쳐 입석대 삼거리를 지나 시루봉(현지인들은 정상 모습이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지도상 표기는 비로봉이었다. ) 을 올라 하산은 사다리병창 암석지대를 이용하여 내려와 구룡사 아래 학교 운동장에 막영을 한 후 서울로 돌아 왔다. 이 후 치악산에 매료되어 금대리, 신림, 입석, 구룡사 방향으로 종주 등반을 하며 치악산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산이 깊어 물이 많고 희귀 새들과 야생화가 많고 정상에 서면 주변 산세들이 호쾌하게 펼쳐저 산의 파노라마가 너무 아름다운 곳이다.
이후에는 영동고속도로가 열리고 서울에서 원주 왔다 가는 정기 고속버스편이 생겨 자주 찾게 되어 춘하추동 등반을 즐겼던 곳이 바로 치악산이었다
코로바 바이러스 관계로 제한적인 새로운 사회관습에 나도 모르게 위축된 일상이 힘들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자연으로의 회귀였다. 가급적 접촉자가 전무한 방법으로의 자연으로의 회귀방법이 제일 중요시 하였다. 오고 가는 방법에서 그리고 식사와 휴식 등에 있어서도 옛적 방법은 전부 고려하지 않고 비접촉이란 기준에서 모든것을 처리하는 방편을 찾는 것을 제일 중요 시 여겼다.
10시에 서울을 출발하였다. 제 2 영동고속도를 이용하여 새말에서 빠져 나온 후 곧장 치악산 구룡사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간단하게 점심을 매식한 후 가볍게 행장을 꾸려 예정하고 온 걸음 여행을 시작하였다.
매표소에서 신분증으로 매표여부를 확인 한 후 계곡쪽으로 나무 판자로 설치한 인도를 따라 걸어 올랐다. 바닥에 좌에서 우측으로 붙여 놓은 2m 거리 유지 안내 스티커, 참 낮설다. 아무래도 약아빠진 코로나 바이러스 출몰로 삶의 일상이 신인류의 발상적 삶으로 바뀌는 것같다. 하긴 역사를 되새겨 보면 어느 한 순간 큰 변화의 물결을 타고 총체적으로 바뀐 역사가 많아었다. 문예혁명이나 종교혁명, 산업혁명 등등이 새로운 사회와 국가, 새로운 이념들을 만들어 지금까지 인류를 이끌고 온 것이 아닌가. 청년시기에 읽었던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란 책을 탐독하며 과연 이렇게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을 삼었지만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거의 그렇게 변해 온 것이다.앨빈 토플러(1928년 10월 3일 ~ 2016년 6월 27일)는 뉴욕 시티에서 출생한 미국의 작가이자 미래학자 겸 저술가로, 디지털 혁명, 통신 혁명, 사회 혁명, 기업 혁명과 기술적 특이성 등에 대한 저작으로 유명한 학자인 사람이다.
이 길을 걸으며 구룡사 경내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우회도로가 생각이났다. 그곳은 매우 한적은 곳으로서 치악산에 오면 분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여러날 책을 읽고 사색하고 지내다 지루하면 산에 오르고 다시 내려와 책을 보던 추억이 많이 간직된 곳이다.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 방향으로 가려고 행선을 틀었다.
가는 길에 초여름에 피는 마가렛 꽃도 만나고 길과 관련된 모든 것이 바뀐 것을 보니 참 생소하게 느껴졌다. 다만 지세와 지형은 별 차이가 없었다. 한 두개의 비탈을 거슬러 도착한 옛터전은 많이 변해 있었다. 옛기억을 떠올리며 작은 계곡을 건너 옛길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잡목과 촘촘하게 짜여진 숲의 밀도가 정글 칼이 필요하게 변모되어 있었다. 다시 등을 돌려 원래의 길로 돌아 왔다.
거북이 샘을 지나 구룡사 전설을 증명하고 있는 거북이 돌 유리창을 밟고 계곡 옆으로 열린 산책 길로 접근하였다. 치악산에는 옛부터 궁궐에 사용할만한 소나무 용재들이 넘쳐난 곳이다. 남벌을 막기 위하여 국가에서 직접 관리한 소나무밭에 있는 바위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글씨를 각자해 놓아 벌채를 경계하도록 한 곳이 많은 곳이다.
이 지점에선 우측으로 가면 일주문을 통해 구룡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이고 황장목 숲으로 가면 계곡을 끼고
갈 수 있는 고즈넉한 숲길이 이어진다.
피톤치드가 솔솔 흘러다니며 넘쳐 났다. 요즈음 내린 비 덕분이다. 물소리도 호쾌하게 들린다. 물소리는 시종일관 벗이 되어 주는 곳이 바로 치악산의 매력이다. 치악산(雉岳山)의 유래는 처음 찾아 하루를 묵으며 잠을 청했던 보문암 왕암스님으로부터 듣게 된다.
치악산 기슭에 수행이 깊은 스님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산길에서 큰 구렁이가 새끼를 품고 있는 꿩을 감아 죽이려는 것을 보고 지팡이로 구렁이를 쳐서 꿩을 구하였다. 그날 저녁 스님은 폐사가 되다시피한 구룡사에 도착해서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스님은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떳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자신의 몸을 감고 노려보며 "네가 나의 먹이를 먹지 못하게 했드니 대신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나 날이 새기 전에 이 산중에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너를 살려주겠다" 고 했다. 상원사에 가야만 종이 있는데 시간상 도저히 불가능하여 포기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종이 세 번 울려왔다.구렁이는 기뻐하면서 "이것은 부처님의 뜻이므로 다시는 원한을 품지 않겠다" 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스님이 상원사로 올라가보니 종루 밑에는 꿩과 새끼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이와 같이 꿩이 죽음으로 보은하였다고 해서 이 산을 치악산이라 불렀다고 하는 보은설화(寶恩說話)가 내려 오고 있다.
인적이 끈어진 것은 아닌데 무척 드물다.
이 길은 옛적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면 건너갈 수 없는 길이었다. 현재 현수교가 놓여진 철다리를 이용해야지 비로봉에 접근 할 수 있었다. 치악산은 골은 깊고 산은 높아 이외로 조난사고가 많이 발생했던 곳이다.
나무 사이로 빛에 명암이 엇갈린 모습이 보기 좋다. 틈 사이로 보이는 밝은 빛이 맑은 수정같은 물 한모금을 마시는 기분을 들게 한다. 나뭇잎에 정제된 빛이 참 곱다.
다시 얕으막한 언덕을 넘어서면 다시 길이 아름답게 마중한다. 자신이 선택한 길은 끝까지 걸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내가 사랑하며 함께 가려는 길은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기가 도래하면 그 길은 나의 마음에서 소멸되어 간다. 시작과 끝은 명료하지만 과정은 참 복잡하고 어수선하고 희비가 교차한다. 삶의 가치가 그 과정에서 생산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혜와 용기와 수없는 결단과 정의로움이 필요한 곳도 바로 과정이다.
쉼 없이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는 사행천 곳곳에 박혀 있는 돌 영향으로 물 흐르는 소리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물소리는 조합되어 멋진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산중교향곡이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잠시 열린 계곡으로 내려가 옛추억에 잠겼다. 이곳에 서서 계곡 상부를 바라보면 설경 설경대로 녹음과 단풍은 단풍대로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곳이다. 단풍은 조금 더 오르면 숯가마와 임간학교 같은 교육장소가 있는 안부 계곡이 무척 아름답다.
양팔을 벌려 심호흡으로 정신을 더욱 더 맑게하고 자리를 옮겼다.
자연생태 교육현장이 있는 곳을 지나며 옛 이곳에 살던 화전민들의 모습이 스크린 되었다. 화전민들은 예외 없이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굽고 살았었다. 치악산 어디를 가나 숯가마들이 흔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곳을 찾을 무렵에는 도시화 물결이 강하게 다가와 숯가마를 버리고 도시로 떠난 화전민들이 많아 산 곳곳에 산재해 있던 화전민 가옥은 대부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약 2.5km 더 걸어 세렴폭포 와 비로봉 가는 갈림길 까지 도착한 후 이곳에서 적당한 휴식을 취하며 옛추억을 떠올렸다.
잠시 쉬고 있는 사이 하늘이 열리면서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숲 정수리를 타고 피어올랐다. 파란하늘을 보는 것 만으로도
상쾌한 마음이 깃들어 왔다. 잠시 물소리를 들으며 한가로운 마음으로 하산길을 잡아 보았다. 옛 야영장 터, 현수교, 용소, 구룡사 일주문으로 방향을 잡았다. 늘 걸음 여행은 반복된 길을 오고 가지는 않는다. 오르는 길과 내리는 길을 달리하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다.
청사초롱과 같은 등이 걸린 현수교를 지나며 다리 아래에 있는 용소를 보면서 힘있게 흐르는 물을 보며 승천하기 위하여 몸을 트는 용트림을 보는 것 같은 기운을 느꼈다. 용소를 응시하며 구룡사 창사의 전설을 떠올려 보았다.
구룡사는 조계종 제 4교구 본사 월정사 말사이다. 668년(문무왕 8) 의상(義湘)이 창건하였으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원래 지금의 절터 일대는 깊은 소(沼)로서, 거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해서 뇌성벽력과 함께 비를 내려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의상이 부적(符籍)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 물이 말라버리고, 그 중 용 한 마리는 눈이 멀었으며, 나머지 여덟 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여덟 조각으로 갈라놓고 도망쳤다. 의상은 절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로 불러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한다. 구룡사 초입에 있는 다리를 건너다 보면 유리면으로 되어 있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 보면 거북이 등에 혈을 끊었던 모습과 다시 혈을 이어 놓은 거북이를 볼 수 있다.
용소를 본 후 내려와 성물과 방문객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팔고 있는 팔각정에 앉아 잠시 쉬며 옛 구룡사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옛적에는 대웅전과 산신각을 비롯한 전각이 몇 되지 않았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이후에 중창된 건물들이다. 가을에 수백년된 은행나무에서 발하는 황금빛은 가을의 압권이다. 그리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세죽 밭은 늘 푸르름으로 청청한 도량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눈 길이 늘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 옆에 고색창연한 부도탑들은 고승들의 흔적인 듯하여 경애의 마음으로 들러 보게 된다. 스마트 폰을 열어 오늘 걸음 여행의 기록을 살펴 보았다. 모두 13,800 걸음을 걸었다. 알맞는 걸음이었다. 초여름으로 이어지는 5월 하순, 치악산 숲길을 걸으며 지금에 처한 일상에 대하여 생각하며 많은 사려의 의중 안에서 과연 신인류로서 살아야 할 덕목에 대하여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어 보았다. 차에 오른 후 1시간 30분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좋은 아름다운 걸음 여행의 뒤 끝은 늘 행복하다. 벌써 또 궁리하는 중이다. 또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