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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거들랑 내 시신을 평안도 고향으로 가지 말고 서울 공동묘지 유상규 군의 옆에 묻어주오”
도산이 죽어서도 함께 싶었던 태허 유상규는 과연 누구일까? 경성의전 학생이었던 유상규는 3.1독립운동을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학업을 포기하고 상해로 건너갔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안창호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얼마나 도산을 존경했으면 안창호의 필명 山翁(산옹)의 옹자를 넣어 아들의 이름을 지었을 정도. 아들 이름은 유옹섭 유상규는 고국으로 돌아가 인재를 양성하고 역량을 키우라는 안창호의 말을 듣고 경성의대에 복학하게 된다. 경성의대 동기로는 백병원과 인제의대 설립자. 백인제씨라고 한다.도산의 사촌여동생과 백인제는 결혼한다. 훗날 함께 병원을 설립하지고 약속했는데~~아마 태허가 오래 살았다면 백병원이 아니라 백&유 병원이 되지 않았을까? 유상규는 도산의 제자답게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치료에 열중했다. 밤낮으로 왕진을 다니다가 그만 단독에 감염되어 40세의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장례는 대전에서 출옥한 도산 안창호가 주관했을 정도로 아들 같은 유상규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2년 후 안창호가 타계하자 고인의 뜻을 받들어 제자이자 비서이며 자식 같은 유상규 선생 위쪽에 모시게 된다. 부자보다 더 진한 정을 이어나간 그 사연이 눈물겹다. 이 애틋한 정을 떼어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박정희 대통령. 1973년 강남에 도산공원을 조성하면서 달랑 안창호의 시신만 옮겼던 것이다. 과연 도산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그걸 받아들였을까? 아마 몸은 강남에 있지만 그의 넋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아차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올라와 자식같은 유상규군을 만났을 것이다. 텅 빈~~~도산의 무덤 터를 가꾼 사람들은 다름아닌 유상규씨의 자식들. 이곳에 벌초하러 오면서 도산의 무덤터까지 가꾸었다고 하니 그 사랑의 연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텅 빈 무덤터를 안타깝게 여긴 이가 또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인 김영식 작가. 망우리 묘지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근대 선구자들을 찾아 집대성한 분이시다. 무역업을 따로 하면서 어찌 이리 귀한 일을 하셨는지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 도산과 유상규의 헤어짐을 안타깝게 생각한 김작가는 우연히 도산공원을 찾았다가 지하에서 옛 비석을 발견한 것이다. 도산공원으로 이장하면서 이 비석을 사용했다가 2005년 부인과 합장하면서 한글 비문을 새로 만들었기에 옛 비석은 방치상태였다. 더구나 옛 비석은 친일에 가담한 이광수가 비문을 지었기에 이곳에 세우기가 영 마땅치 않는 모양이다. 그 비석을 망우리의 도산 무덤 터에 다시 세우게 된 것은 순전히 김작가의 노력.
2016년 2월 25일 옛 비석을 이곳으로 옮겼고 2016년 3월 1일에 기념식을 거행했다고 하니 43년 만에 스승과 제자의 연이 다시 이어진 셈이다. 한편 유상규는 보훈처로부터 애국지사로 추서되어 2007년 현충원 이장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국가가 묘지 관리해주면 후손은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해 실행에 옮기려고 했지만 아들 유옹섭씨를 설득한 분은 역시 김영식 작가. “현충원으로 이장하면 아버님은 영원히 도산선생님을 못 만나게 되는 겁니다. 도산선생님의 뼛가루가 남아있는 이곳에 계셔야 그것이 아버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길입니다. ” 1주일 후 유옹섭씨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한다. 이장을 포기하겠다고~~~ 이렇게 도산과 태허는 다시 만나게 된다. . 김영식작가는 영혼을 맺어주는 영매가 아닐까, 망우리 답사를 마치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 속살같은 망우리 공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보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은 분이신데 내가 도와줄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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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알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장님은 큰일을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