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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10,17-30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시느라고 많이 쓰셨습니다.
늘 하는 얘기지만 거룩한 땅은 본인이 오고 싶어서 오는 건 아니죠.
겉으로 보면 본인이 신청하고 날짜 잡아 거의 주도권이 본인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큰 착각이 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떠나기 전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거나, 아침에도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그래서 못 오는 수가 있습니다.
아직 그분은 여기 올 때가 안 됐다 그 뜻이겠죠.
그래서 하느님이 불러주셔야만 오는 곳이라는, 다시 말해 부르심에 대한 어떤 깊은 신뢰가 없으면 그냥 소풍 왔다 가는 겁니다. 야외 미사 하다가 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겠죠.
부모님이 신자이기 때문에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신자가 된 사람도 있고,
시집오는데 시댁이 천주교라 신자가 된 사람도 있고, 친구 따라 성당 온 사람도 있죠.
이렇게 다 동기는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이 세상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주님이 나를 천주교 신자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온 자모이신 성교회의 신자로
나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신비감을 절절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절대 쉽게 냉담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냉담의 유혹이 오더라도 주님이 나를 오늘 이 자리에 이끌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 끝에 나를 이 자리에 불러주셨는데,
내 이런 문제 때문에, 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신부님 때문에, 수녀가 한 말에 상처받아서,
대모님 때문에, 돈 떼먹고 안 주는 대녀 때문에 절대 냉담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해야죠.
오늘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은총을 받고 돌아가려면,
첫 번째 단추는 ‘주님이 나를 오늘 선택해서 이 자리에 불러주셨다’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그냥 왔다 가는 걸 겁니다.
그래서 저기 주차장에서 계단을 내려오면 빨간 벽돌이 있죠. 레드카펫입니다.
그 의미로 정말 한 거예요. 우리 무슨 영화제 하면 레드카펫 쫙 깔잖아요.
또 오른쪽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기억하세요?
알폰소 성인의 글인데, 세 줄. 아시는 분 크게 말해보세요.
내가 배티 있을 때도 똑같은 것 세워놨었어요.
첫 번째 줄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라.’
두 번째 줄 ‘홀로 머물러라.’
그래서 보면 의자들도 얼굴을 바라보게 두지 않았죠.
혼자 머물면서 둘이 앉아도 앞을 바라보며 대화는 자연을 통해서 교감해라.
지금 여러분은 보조 의자에 많이 앉아계시지만, 성수 뿌리고 축성된 의자는 나무 의자예요.
12개의 십이사도 의자죠.
맨 앞에 베드로부터 안드레아까지 12개의 나무 의자가 있죠.
그 나무 의자 밑의 한쪽은 돌이 받쳐져 있고 한쪽은 나무가 받쳐져 있어요.
바위는 십이사도의 굳은 믿음을 나타내고 나무는 유연성을 의미하며 열린 교회를 나타내요.
이렇게 여기 있는 이 12개의 나무는 하느님을 바라보라고 만들어 놓은 의자예요.
또 느티나무 밑에 보면 돌의자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연못을 바라보라는 의자.
이렇게 의자가 놓인 위치마다 다 메시지가 있죠.
그래서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와라.’
‘온전한 마음’이라는 것은 분심 없이 주님이 나를 이곳에 불러주셨다.
감히 이곳에 발을 디딜 자격도 없는 나를 오늘 주님이 불러주셨다는 것을 신뢰하는 마음이죠.
그리고 이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눈치채려면 시끄러우면 안 돼요.
이 안에서 다른 사람 뒷담화하면 그것은 마귀 장난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와서 홀로 머물다 보면 축복을 받고, 나갈 때는?
세 번째 글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라.’ Exite Alii(엑시테 알리)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찾아온 게 아니라 여기까지 불러주신 거예요.
그러면 완전히 생각이 바뀌죠. 고생했던 것이 축복이었구나.
주님이 나를 이렇게 어려운 길을 통해서 불러줘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구나.
오늘 참 유명한 얘기가 나오죠.
‘부자가 천국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게 더 쉽다.’
내가 피정과 강론에 여러 번 얘기했어요.
제 묵상 끝에 분명히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게 하는 방법이 있으니 예수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그러면 낙타를 바늘귀로 빠져나가게 하는 방법만 찾으면 우리들이 천국 가는 그 방향 길이 열릴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이었었죠?
첫 번째는 낙타를 죽여야 해요.
살아있는 낙타를 집어넣을 재간이 없죠.
‘안 됐지만 낙타야 나 천국 가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해.’
여러분 마음 안에 펄쩍펄쩍 뛰는 낙타들이 있어요.
그 들고 날뛰는 낙타는 ‘상처’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있는 낙타도 있고, ‘욕심’이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있는 낙타도 있어요.
일단 내 안에서 들고 날뛰는 그놈을 죽여야 해요.
죽이고 난 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불에 태워야 하죠.
불에 한참 태우고 나면 살과 털이랑 가죽은 다 날아가고 뭐만 남을까요? 뼈.
뼈도 약한 뼈는 다 없어지고 뼈만 남아요.
그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 그 뼈를 절구에 넣고 빻아야죠.
그래서 뭘 만들어요? 가루를 만들어야 해요.
아주 곱디고운 가루로 만들어야 해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바늘귀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깔때기를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 깔때기 끝을 바늘귀에다 대고 곱디고운 낙타의 뼛가루를 위에서 솔솔 흘러내리면, 바늘귀로 뼈가 빠져나가죠.
이렇게 해서 낙타를 집어넣는 거예요.
첫 번째 죽인다, 두 번째는 태운다, 세 번째는 빻는다, 그리고 네 번째는 깔때기에 넣는다.
깔때기는 교회를 나타내요.
교회 밖을 벗어나서는 우리 천국을 못 가요.
교회라고 하는 그 울타리 안에서 미끄럼 타고 쭉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돼 있어.
구멍을 빠져나갈 때까지만 힘들죠.
내가 나 자신을 죽이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또 나를 태우는 게 얼마나 뜨겁고 힘들어요.
또 누가 절구를 가지고 나를 찧는다고 생각해 봐. 정말 힘들죠.
하지만 그 구멍을 통해서 빠져나가면 그 구멍 밖에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지금 얘기한 것이 어찌 보면 우스갯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내용을 깊이 묵상하면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죽인 다음에 태우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 느티나무도 살기 위해서 어떡한다 그랬어요?
속을 계속 비워서 구멍을 만든다.
강풍이 불어도 구멍을 통해 바람이 돌아서 빠져나가면서 직접적으로 나무를 치지 않아요.
뿌리에 영향을 안 줘. 그리고 양분을 빨아올리더라도 힘이 버겁지 않아요.
저게 지혜란 말이에요. 비우는 것, 태우는 것, 죽이는 작업.
개신교에서는 이런 것을 무소유의 삶이라고 하죠.
그러나 우리 천주교 영성에서는 ‘텅 빈 충만’이라고 불러요.
텅 비어 있는데 가득 차 있어, 기쁨으로, 신덕, 망덕, 애덕으로 가득 차 있어.
얼마나 기쁠까?
내년부터는 당분간 제가 피정을 안 나갑니다.
지난번 구파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앞으로 남은 피정은 20일 우이성당,
그리고 11월 인천교구 부천 고강동 성당에서 하는 피정을 끝으로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르지만, 이젠 나 자신도 능동의 삶에서 수동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죠.
예수님은 3년 동안 능동의 삶을 사셨죠.
수많은 사람 만나고 치유하고 대화하고 고쳐주고 그러다가 딱 잡혔어.
잡혀서 죽기까지 16시간 동안은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때리면 맞아야 하고, 침 뱉으면 침 받아야 하고, 채찍질하면 그 채찍질 다 맞아야 하고, 몸에 못 박으면 가만히 있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수동의 시간.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3년 동안 능동의 시간보다도 죽기까지 그 열몇 시간 동안에 더 하느님이랑 가까워졌다는 말이죠.
사제들도 한평생 활동하다가 은퇴 시기가 있죠.
또 일반 사람들도 직장 다니다가 은퇴 시기가 있어요.
하루도 보면 능동의 시간이 있고 수동의 시간이 있어요.
밤에 잠이 들면서 아니면 이제 모든 일 끝내고 난 다음 기도 시간.
그냥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수동의 모습이지만,
하루 종일 일하고 봉사 다니고 한 것보다 훨씬 더 하느님과 가깝게 할 수 있는 수동의 시간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수동의 시간을 자기 나름대로 가져야 해요.
자기만의 시간, 자기만이 하느님 만날 수 있는 어떤 골방이 있어야 한다 그 얘기죠.
그래서 내년에는 저도 이제 그런 수동의 시간을 좀 깊이 가져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42년 동안을 피정 지도를 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목한테도 미안해, 하도 떠들어서.
그리고 몇 년 전 코로나 앓고 난 다음에 후유증으로 성대를 많이 버렸어요.
노래도 예전처럼 나오지 않고, 그래서 이제 얘들 좀 쉬게 해야겠다.
아무튼 이런 모든 것이 사실은 죽이고 태우는 과정이죠.
가루를 만드는 과정이에요.
텅 빈 충만의 상태를 만드는 과정이에요.
사실 부자도 천국에 가는 부자가 있고 가난하게 살아도 지옥에 가는 가난뱅이가 있겠죠.
물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 적게 갖고 있느냐, 그런 양의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부자는 정말 착한 부자들 많아요, 다른 사람 도와주고.
그런데 어떤 가난한 사람은 한평생을 세상 원망만 하다 끝나요.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만 하다가 가요.
가난뱅이라고 다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다 지옥 가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간에 주님이 얘기하시는 것은 물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을 얘기하고 계시죠
태워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내 안에 들어와 욕심을 태우고, 교만을 태우고, 허영심을 태우고, 사치스러움을 태우고.
이런 작업으로부터 천국의 길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가루가 돼야 한다고 그랬죠.
태우고 가루를 만드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얘기지만
제자들을 알아들어요?
놀라죠. ‘그러면 세상에 천국 갈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이야?’
그 아둔한 열두 제자는 무슨 말귀인지 못 알아들어요.
솔직히 열두 제자가 예수님 3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알아들은 말은 몇 개 안 돼요.
그러니까 맨날 궁금하고.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제자들이 못 알아들은 것을 신부님들의 해설로 다 알아듣고 있잖아요.
얼마나 여러분들은 열두 제자보다 특권을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알아듣기만 하면 뭐해? 사는 것이 똑같은데.
오늘 2 독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쌍날칼 같아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고 그랬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정하고 난 다음에 오늘 신부님 말씀 좋았어, 그러면 그다음 날 실행에 옮겨야 해요.
그러면 그 전날 피정에서 배운 것이 내 속에 꽉 들어차요. 돌에 새겨져요.
하느님의 말씀이 관절과 골수를 쪼개서 그 숨은 생각을 드러낸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좋은 소리 듣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냥 귓구멍만 고급이 되는 거예요.
말씀의 불감증이 되는 거예요.
가분수처럼 머리만 커지고 또 들은 것이 겸손의 재료가 되지 않고 교만의 재료가 돼.
그래서 누구를 항상 판단해요, 뭐 들은 게 있다고.
다 태워야죠.
벌써 예전에 돌아가셨지만 내가 그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 몇 분이 있다.
첫 번째는 우리 부친이에요. 신앙이고 뭐고 나는 우리 아버지의 10분의 1도 못 쫓아가요.
학문에 대한 열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난 어릴 때부터 우리 아버지가 롤모델이었기에 신학교 들어가서 예수님을 뵈어도 ‘우리 아버지가 이러셨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두 번째로 존경하는 분은 소록도에 있었던 스테파노 아저씨.
세 번째로 존경하는 분이 명동성당 앞에 계셨던 배 베드로 할아버지.
아주 심한 뇌성마비였는데, 명동성당 앞에 통 하나 갖다 놓으면 사람들이 미사 후 돈을 줘요.
그러면 그 양반은 쪽방 하룻밤 자는 비용 2천 원, 먹는 것 2천 원을 빼고 전부 심장병 어린이 재단으로 보내요.
쪽방이 그리고 자는 비용 2천 원 그리고 먹는 거 2천 원 빼고는 전부 다 어디로 보내느냐 심장병 어린이 재단으로 다 보내요.
신부님들도 지나가다 그분한테 기도를 부탁했죠.
김수환 추기경님도 부탁하셨죠.
나중에는 명동성당에서 뒤쪽 조그마한 공간에 집을 조그맣게 지어주어 거기서 계셨어.
그러다가 꽃동네 오 신부님이 모시고 간 거야.
그래서 최귀동 할아버지와 둘이 꽃동네 행사하면 맨 앞에 계셨죠.
이렇게 우리보다 훨씬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도 남을 열심히 도와주는 사람이 참 많아요.
오늘 복음 속에 나오는 청년은 부자죠.
십계명도 다 지키고 그래서 예수님 제자 되고 싶어 따라나섰는데,
예수님이 약점을 팍 찌른 거야.
‘네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준 다음에 나 따라라’
그랬더니 제자는 쓸쓸히 돌아섰죠.
돈을 포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에 유일하게 돈 때문에 예수님 제자가 못 된 제1번이 오늘 나오는 이 부자 청년이에요.
복음 속의 부자 청년은 온갖 계명을 충실히 다 지켜왔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재산까지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눠주라고 하셨죠.
아까 얘기한 대로 무소유의 삶, 텅 빈 충만의 삶, 비우고 난 다음에 나를 따라라.
여러분들, 루카 복음 19장 1절에서 10절에 유명한 자캐오 이야기가 나오죠.
자캐오는 세리 중에서도 제일 대빵, 세리 장이었었죠.
돈이 너무너무 많았어.
온몸을 비단으로 휘감고 매일 파티를 벌였어요.
그렇지만 그 많은 사람은 돈 때문에 내 옆에 있는 거예요.
그들이 떠나고 난 다음 가슴속은 구멍이 뻥 뚫어져서 찬바람만 휙휙 들어와.
너무 외롭고 힘들어. 길거리에 나가면 다 손가락질하잖아.
‘저 나쁜 놈, 매국노, 더러운 놈, 우리 피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놈.’
돈이 많으면 뭐 해요, 친구도 없고 너무 슬프게 살아.
그러던 어느 날 바람을 타고 자캐오의 귀에까지 어떤 얘기가 들려요?
자기네 동네에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는 선생님이 하나 온다는 거야.
그래서 자캐오는 비단옷을 입고 길거리로 나갔더니. 사람들이 인산인해.
그 한가운데 그분이 계시는데 뚫고 들어갈 재간이 없었죠.
또 자캐오는 덩치도 작았어요.
뚫고 들어가려니 팔꿈치로 치고 뒷발로 차고, 가다가 밟혀 죽겠는 거예요.
그래서 자캐오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지나가실 만한 길을 앞서가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요.
무화과나무 올라갈 때 비단옷을 입고 절대 못 올라가요. 왜? 미끄러워서.
비단옷을 훌훌 벗었죠.
그때부터 내려놓는 작업이 시작되었죠.
자기 몸을 감쌌던 부자의 상징을 훌훌 벗고, 그야말로 거의 속옷 차림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 끝에까지 매달려 있어요.
두 다리를 꽉 나무에 끼고, 양팔도 꽉 끼고.
예수님이 사람들한테 밀려서 지나오시다가 봤겠죠?
예수님이 뭐라 그러세요?
자캐오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어요, 예수님도 자캐오를 처음 보는 거야.
그런데 ‘내려와’ 이것이 아니었죠.
이름을 불러줘요.
‘세상에, 저분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자캐오야 내려와.’ 그랬어요.
‘여보게 내려오시게’가 아니에요.
그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에 수만 볼트 전기에 감전된 듯, 짜르르.
‘세상에 저 어른이 내 이름을 알아!’
그리고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겠다 그러시죠.
그래서 자캐오는 내려와 예수님을 집에다 모십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죠.
‘아유, 어떤 놈 집인지도 모르고 저 양반이 들어갔네, 매국노 집인데.’
예수님은 들어가시자마자 바로 이 집에 오늘 구원이 있으리라는 선포하지 않아요.
가만히 기다려요. 뭘? 자캐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자캐오는 예수님이 원하던 말을 해주죠.
‘주님, 제가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살면서 남을 속여 먹은 일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주겠습니다.’
거의 자기 재산 다 포기하는 거죠.
한마디로 청빈 서약, 포기 선언이었어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자캐오 네가 구원을 받았다’라는 게 아니라 ‘이 집 전체가 구원받았다.’
아무리 험악하고 살벌한 집안이라 해도 이 자캐오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 집안에 하나만 있어도,
하느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고 그 집안 전체를 구원해 주신다는 겁니다.
식구들이 많다 보면 또 다른 식구들이 들어와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죠.
겉으로 보면 4대째 구교 집안인데 다 냉담자예요.
옛날에는 사제도 나오고 수녀도 나온 집안인데 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집안도 있어요.
그중에 한 사람이 정말 자캐오처럼 하느님 앞에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회개하면,
예수님은 ‘너만 구원시켜 주겠다’가 아니라 ‘오늘 너를 통해서 이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우리는 나누고 또 나누어서 가루가 돼야만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 바늘귀를 빠져나갈 때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서질 때 아프고 불에 탈 때 뜨겁고 죽을 때 너무너무 힘들어도,
우리는 능히 참을 수 있다는 얘기죠.
이제 그러면 아주 애매한 우리 문제를 좀 짚고 넘어갑시다.
그러면 도대체 부자의 기준은 누구냐?
빌 게이츠 정도?
서울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있으면 당연히 부자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할 때 그 부자의 기준은 뭐예요?
평상시에 내가 쓰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정도?
오늘은 차 한 대사고, 내일은 비행기, 모래는 호화여객선 하나 사볼까?
그 정도야 부자인가요?
굉장히 주관적인 얘기죠.
누가 과연 부자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누구나 본인은 아니라고 대답해요.
누구도 자신이 부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어요.
재벌 그룹의 회장도 자신은 부자가 아니래요.
옛날에 정주영 씨 살아계실 때 차를 같이 마신 적이 있었어요.
그 양반 살던 집은 정말 수십 년 된 집인데, 타일이 깨져도 수리를 안 해요.
워낙 검소하게, 대개 재벌 창업주들은 밑바닥부터 올라와서 그렇게 살아요.
3세대쯤 되는 애들이나 흥청망청 살죠.
그러면 누가 부자일까?
내가 한번 기준을 잡아봤어요.
예를 들어 내가 중고차 몰고 다닐 때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보다 부자죠.
또 내가 중고 오토바이를 몰 때 녹슨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보다는 부자죠.
내가 녹슨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그것마저 없어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보다 부자죠.
내가 걸어 다니고 있을 때 선천적으로든지 사고든지 휠체어를 타서 턱 하나도 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내가 부자예요.
두 발로 걸을 때 한평생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엄청나게 큰 부자예요.
우리보다 자꾸 높은 걸 바라다보면 손에 물처럼 다 빠져나가죠.
짠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이 나요.
그래서 결론은, 우리는 모두 다 부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정말 힘들게 사는 사람 너무너무 많아요.
예수님이 어부를 부른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어부들은 자기 것이 없어요.
농부들은 자기 땅이 있지만 갈릴리 호수는 자기 것이 아니잖아요.
낡아 빠진 그물과 삐그덕거리는 배와 건강한 자기 몸뚱어리가 전 재산이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하느님 따르는 데 힘들어요.
아마 농부들을 부르며 ‘나 따라오라’ 하면 ‘아이고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주님, 내가 지금 한 100마지기 농사짓고 있는데,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잘 안 팔려요.
이거 팔고 난 다음 쫓아갈 테니까, 휴대폰 번호 하나 좀 찍어주시면 연락하겠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포기하는데 핑계가 많아.
그런데 어부들은 ‘따라와’ 하니 두 형제가 따라나섰죠.
그리고 따라갈 때 포기하는 내용이 또 달랐죠.
처음에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시죠.
그냥 그물만 버리고 따라나섰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두 번째 형제는 야고보와 요한. 그 두 사람은 버리는 게 조금 달라요.
삯꾼을 버리고, 아버지 제베대오 버리고 따라요.
사람마다 포기해야 하는 내용이 다르다 이거예요.
천편일률적인 게 아니죠.
아무튼 어부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이 가진 자일수록 분명 포기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유엔에서 나온 걸 보니까 지금 말하는 이 순간에도 1초에 5천 명씩이 굶어 죽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굶어 죽는 게 아니죠.
내놓지 않기 때문에 굶어 죽어요.
가진 자가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웃을 향하는 기도는 반드시 물질적인 자선 행위가 따라야만 됩니다.
내어줄 때 자세는 뭐라고요?
‘하느님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려 드린다’라는 마음이 들 때는 아까운 마음이 안 들죠.
‘애초 내 것은 없었어. 주님이 건강한 몸 주시고 좋은 머리 주셔서 이렇게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돈 많이 벌었어.
오늘 저녁에도 내 심장 멈추게 하면 나는 가야 해.’
모든 것이 주님 것으로 생각하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것이 바로 봉헌의 정의에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을 때는 마음속에서는 성령의 소리가 들려요.
‘저 사람 도와줘.’ 그런데 또 한쪽으로는 마귀가 속삭여요.
‘아이고 그거 버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걸 왜 도와줘?’
어떤 교부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굉장히 가슴 아프기도 하면서 무서운 말씀이죠.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네가 필요 이상 갖고 있다면, 너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 것을 훔친 것이다.’
내가 볼펜이 두 개인데, 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난 하나만 있으면 돼.
그러면 너는 바로 하나도 없는 그 사람 것을 훔친 것이다.
굉장히 진보적인 신학이죠.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적극적으로 쓰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아멘
그래야 천국의 꿈을 우리는 이룰 수 있습니다.
아멘
부자도 태워서 가루가 되면 천국에 갈 수 있죠.
가난한 사람도 교만해서 태워지기를 거부한다면 지옥에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하고 부자는 흑백 논리가 아니다.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얼마나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보화를 쌓아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
지난주에 경남 방장하던 자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한평생 꽃집 하며 매괴 장미도 자기네 옥상에서 화분에다 10년 이상 길렀다 보내주었죠.
연못에 있는 수련도 그 자매가 보낸 거죠.
준비된 죽음이 아니었어도 워낙 이쁘고 바른 사람이라 내려가서 미사 드려 주고 왔죠.
갑작스러운 죽음을 볼 때마다 ‘오늘은 너지만 내일은 내가 될 수도 있다’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은 우리를 비우게 만들죠.
그런데 그 약발도 한 달이 안 가.
그때는 슬프고 그래서 ‘좀 착하게 살아야지, 맞아 내 몫은 내 것도 아니야.’ 하죠.
그런데 한 달 지나 봐. 그다음부터는 기억도 안 나요.
그래서 우리는 자꾸 말씀을 거듭해서 들어야 하는 거죠.
나는 나 자신이 게을러지려고 할 때마다 내 강론을 굉장히 열심히 들어요.
들으면서 내가 은혜를 받거든요. 내가 회개하거든요.
오늘 우리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십계명은 다 지켰지만 가진 거 내놓으라는 말 한마디에
예수님과 등을 졌던 그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도록, 늘 텅 빈 충만의 삶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