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롭다하심을 받은 세리
누가복음 18 : 9 - 14
우리가 가져야 가장 중요한 관심이 무엇입니까? 지식이나 명예입니까? 재산이나 건강입니까? 지식도, 명예도, 재산도,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임종을 맞을 때, 죽는 시각에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삶을 마감하는 날, 죽음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가 최고의 관심입니다. 다시 말해 의(義)가 최고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의 의’입니다. 내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는 ‘상대적인 의’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의롭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의롭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쁘고 자신은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남의 잘못은 정죄하고 자신의 잘못을 숨기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에 따라서 인정하시는 ‘의’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두 유형의 예배자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이 두 유형에 속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양을 제물로 바치며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 지내는 사람이 양의 머리에 안수를 했습니다. 자신이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것을 양에게 안수해서 양이 대신해서 죽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므로 양이 자신의 죄를 대신 죽었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제사 제도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양을 제물로 바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자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예배를 드릴 때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배자들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와 예배드리는 사람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9)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14)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인정해 주시 않습니다. 나는 나를 인정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신앙적 교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의 비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오늘 우리들에도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두 사람은 성전에 올라와 예배를 드립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둘 다 의에 관심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를 돌아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스스로 살핍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면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며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 의를 스스로 부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지도 못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예배되지 못합니다. 예배가 의식적이고 형식에 지나지 않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예배가 자기 중심이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습니다.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한 것입니다. 자신을 특별히 구별하여 따로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이여’ 한마디 불러 놓고서는 ‘나는 ... 나는 ... ’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습니다. ‘나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시종일관 자기를 내세웁니다. 자기중심적 사람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배를 통해 오히려 죄를 짓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비교하며 자신을 의롭다고 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옆 사람을 의식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옆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였습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의롭다는 것입니다. 내가 더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좀더 돋보이게 하여 자신이 더 의롭게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노골적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신을 의롭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회개의 고백이 하나도 없고 시종 일관 자신의 자랑거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성전에 올라온 세리와 비교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리와도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세리를 정죄하였습니다. 세리는 토색, 불의를 하는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남기는 사람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자신은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세리와 비교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스스로 강조할 뿐 아니라 세리는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로 취급을 하였습니다.
이제 바리새인은 율법에 충실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2)라고 했습니다. 금식을 일주일에 이틀이 아니고 두 끼를 금식한 것을 마치 율법에 충실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은 율법의 요구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만든 전통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을 내세웁니다.
40일 금식기도 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 앞에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40일 금식기도 했다면서 기회만 있으면 자랑하고 설교를 할 때마다 그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40일 금식기를 두 번 했다고 명함에 새기고 자랑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대단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십일조 하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십일조 하는 성도를 믿음 좋다고 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오해입니다. 십일조는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성도로서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말3:8). 국민으로서 세금을 내는 것이 의무이듯이 십일조는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하는 것을 믿음 좋다고 자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없는 예배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는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우리의 예배가 바리새인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의롭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옆 사람을 봅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늦게 오지도 않았고, 졸지도 않았고, 찬송을 열심히 부르고, 그래서 ‘나는 의롭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랑이 많습니다. 자랑이 많은 사람은 말을 많이 합니다. 자기 자랑을 내세워서 ‘자기가 옳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속이 비었다는 것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집회에서 통성기도를 할 때 소위 방언기도를 한답시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시끄럽게 소리치며 기도하는 것은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방언기도는 듣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은 말은 많았지만 내용이 없었습니다.
세리의 예배는 어떠했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13)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멀리 섰다’는 말은 옆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니 감히 눈을 들 수도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라는 말뿐 이였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있다면 고개를 들 수도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말고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빌게 될 것입니다.
세리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옆에 누가 있는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 큰 소리로 ‘나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예배자의 올바른 자세는 남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이켜 보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밖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진실로 죄인임을 통탄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누구에 대한 원망도 없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먹고 살기가 바빠서 그랬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도 없습니다. ‘내가 잘못 했습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자입니다.
세리는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이룹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자랑도 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란 말은 용서를 빈다는 뜻입니다. 복을 달라는 뜻도 아닙니다. 의를 달라고 하는 뜻도 아닙니다. 벌을 면하고 저주를 피해 달라는 간구의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내세울 것도 없고 변명할 말도 아닌, 다만 선하신 처분만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지난 날에 잘못했지만 앞으로 잘할 것이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는 말도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니 처분대로 맡기겠다는 긍휼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은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를 좀 인정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허물밖에 없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죽어가던 강도에게 베푸셨던 그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소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예배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한마디면 족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다’란 말은 법정 용어입니다. 죄가 없어서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죄는 있지만 재판장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세리는 용서를 많이 받고 바리새인을 적게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오로지 세리만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인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예배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예배를 드렸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비록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정죄받는 세리라 할지라도 예배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부실하더라도 예배만큼은 신령과 진리로 드림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불행한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리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