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
沼亭 류기학
어릴 적에 우리 집 마당 옆에는 아주 큰 대추나무가 있었다. 어느 해에 보니까 봄이 다가도록 잎이 나지 않는다. 봄이면 삼라만상이 새싹을 틔우며 봄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데도 대추나무에서는 봄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
무슨 겨울잠을 그리 오래 자는 걸까? 혹시 지난겨울 추위로 얼어 죽은 것은 아닐까? 하며 궁금한 심정을 지울 수가 없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엄마 이 나무 죽었나봐? 잎이 않나”하니까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제 며칠 안 있으면 날거다.”하시며, “대추는 다른 나무보다 잎이 늦게 나오는 나무다.”라고 일러주신다.
지금도 대추나무는 입을 꾹 다물고 천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꿈적하지 않는다. 대기만성이라더니 귀히 대접받는 과일이라 행차시기도 더 늦는가 보다.
옛 부터 대추는 아주 귀한 용도로 쓰이는 과일이다. 대추는 씨가 하나라 나라에 하나뿐인 임금을 뜻한다고 하여 제사상에 서열 일번으로 오른다. 또 열매가 많이 열려서 다산을 상징한다 하여 시부모가 폐백을 받을 때 며느리 치마폭에 던져주는 으뜸과일로 쓰이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벽조목(霹棗木)이라 하여 돌처럼 단단해서 한번 새겨놓은 글자는 쉽사리 마모(磨耗)되지 않고 오래 사용할 수 있어 도장재료로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대추나무 같이 세태변화에 아주 무딘 나무는 없는 것 같다. 봄이 다 지나도록 죽은 듯이 있다가 입하(立夏)가 다 되어서야 아주 조금씩 잎이 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오뉴월에 연한 녹색의 꽃을 피우고 구시월이면 암갈색의 대추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는 사람들의 손길을 유혹하고 있다.
가을 날 초가지붕위에 널어놓은 빨간 대추를 보면 참으로 마음이 흐뭇해진다. ‘저 대추 먹으면 달콤하고 참 맛있겠다’ 는 생각을 하며 얼른 사다리를 놓고 지붕위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변화의 바람에 늦게 반응하는 대추나무를 보고 있으면 나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생활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는데도 제 때 동승하지 않고 남 들 보다 한 열 발 정도는 뒤처진 생활을 한 것 같다.
집집마다 흙백TV를 들여놔도, 라디오만 듣고 있다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서 다른 집 컬러TV로 바꿀 때서야 들여놨다. 그리고 이웃집이 세탁기로 빨래를 할 즈음 마누라 손 다 절단난다고 야단을 떨 때서야 탈수기를 샀다.
마이카시대가 왔다고 모두들 승용차를 타고 다닐 때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다가 안사람 투정에 견디지 못해 중고차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핸드폰이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에 걸고 다닐 때도 한 동안 꾹 참으며 지냈지만 편리한 맛을 보고나니 시대조류를 거역할 수 없었다. 생활환경이 편리하게 변화하는데 혼자서만 뒤처져 살기란 참으로 어렵고 힘이 든다.
봄날에 싹을 틔우지 않는 대추나무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듯이 시대에 뒤쳐져 사는 나를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드릴 수 있던 것이 용기일까, 무딘 감각 탓일까. 아니 못쓸 고집 일게다. 어느덧 인생의 석양 앞에서서 지인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있으니 한없이 서글퍼지고 지난날 편협한 고집으로 인하여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한 심정이 든다.
언젠가는 앞서간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운명이지만 진정 이것만은 앞서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리라. 순서와 생리에 따라 살다가는 세상에 빨리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을까. 대추나무처럼 굼뜨지만 귀하게 대접받는 열매 주렁주렁 매달아놓는 여생을 살고 싶다. (2009. 5. 6)
첫댓글 " 대추나무 같이 굼뜨지만 귀하게 대접받는 열매 주렁주렁 매달아놓는 여생을 살고 싶다. "
길가에 서 있는 빨갛게 열린 대추나무는 나도 모르게 손이 가던 어린시절이 떠오르네요. 대추 보고 안 먹으면 늙는다 하더군요. 벽조목으로 만든 도장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함부로 했는데 잘 두어야 하겠네요.항상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이미 그런 삶을 잘 살아오심이 느껴지는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대추를 먹은 딸은 대추씨를 마당한켠에 심더군요. 혹여 싹이 난다면 선생님의 느낌.. 같이 공감해보고 싶네요.
한평생 한마음으로 변함없이 사실것 같은 선생님 아니신가요. 변화를 빠르게 수용하진 않지만 자존심 강하게 버티어 서신 모습이 그려집니다.좋은글에 머물다 갑니다. 건필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