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야 놀자
아들이 한동안 입원을 해야 하기에 기르던 개를 당분간 내가 맡기로 하였다. 면역력이 약한 환자는 애완동물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있기에 수술 전날 며느리가 개를 데리고 왔다. 짐이 두 보따리다. 조막만 한 개 한 마리 기르는데 필요한 용품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지붕 있는 번듯한 집과 낮잠용 평상, 옷이 6벌, 손톱만 한 신발이 두 켤레다. 빗, 샴푸, 눈물 지우기, 귀 세정제, 모기 진드기 쫓는 홈키파 등등 별의별 장 난감이 다 있었다. 개밥도 그냥 개밥이 아니다. ○○백서, 개보양식 오리홍삼육포, 연어 파우더, 소 간파우더, 색깔도 모양도 예쁜 간식거리가 가방에 그득했다. 개가 시부모보다 서열이 앞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아들은 전 주인이 이민 가면서 버리고 간 유기견을 데려왔다. 수많은 유기견 중에 유독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녀석이 맘에 들었다 한다. 종자는 말티즈, 이름은 ‘보리’다. 말티즈는 앙증맞은 외모에 귀여운 행동, 비단 같은 흰털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애완견이다. 보리菩提는 불교에서 수행결과 얻어지는 깨달음의 지혜 또는 그 지혜를 얻기 위한 수도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전 주인이 정말 그런 뜻으로 이름을 지었는지는 몰라도 ‘보리’란 이름이 맘에 든다. 부처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가르쳤다. 보리도 오랜 세월 지혜를 얻으면 성불할 수 있을까.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볼 때마다 ‘보리야 이생에 깨달음을 얻어 내생엔 인간으로 태어나라’ 이야기한다.
보리가 내 집에 온 후로는 할 일은 늘었으나, 이야기 상대가 생겨 심심 하지가 않다. 작은 몸집에 눈, 코가 까만 순백의 털이 복스러운 보리는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다. 환경이 바뀌어선지 배변을 가리지 못할 때도 있지만, 혼이 날 때는 한쪽 구석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쭈그리고 있는 것이 꼭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며칠에 한 번 산책 시키는 날은, 좋아서 길길이 뛰어오른다. 집안에만 갇혀있던 녀석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풀 밭으로 내달린다. 살아있는 짐승은 찬밥 한 덩이 먹고도 맘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자유를 갈망한다. 5살 보리는 힘이 어찌나 좋은지 목줄을 잡은 나를 끌고 갈 기세다. 아파트 단지나 놀이터 주변은 개를 끌고 나오는 사람이 많아, 저만치서 개가 마주 오면 미리 피하게 된다. 그리는 것들끼리 닿고자 하는 저 간절한 몸짓을 그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발정기에 들어선 녀석이 저들끼리 만나면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종종 애를 먹는다.
산책길에 잠깐 물건을 사는 순간 녀석은 목줄을 빼고 짝을 찾아 달아 났다. 동네를 몇 바퀴를 돌고 돌아도 찾을 길이 없었다. 아직 몸이 완쾌 되지 않은 아들이 달려와 밤중까지 찾아다녔으나 헛수고였다. 개를 잃어도 이리 애가 타는데 자식 잃은 부모는 얼마나 피가 마를까 생각했다. 바로 그날 뉴스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가 자기가 기르던 말티즈 두 마리를 고층에서 내던진 사건이 방영되었다. 혹여 못된 놈들이 보리를 데려다 나쁜 짓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 튿날 아들은 사진을 넣은 전단지를 곳곳에 붙였다. 저녁 늦게서야 애견 센타에서 연락이 왔다. 이틀간 거리를 헤맨 녀석은 배가 고팠는지 밥 냄 새나는 음식점으로 들어갔고, 정 많은 김밥집 주인은 보리를 애견센타로 데려다주었다. 연락을 받고 단숨에 달려갔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하지 않던가. 3일 만에 만난 녀석은 꾀죄죄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반가워 달려올 줄 알았는데, 아직 바람기가 가시지 않아선지 나는 본채도 않고 개 우리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아들은 주인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으니 불안하지 않게 잘 해주라고 부탁을 한다. 직장과 여러 일을 병행하는 나는 늘 밖으로 나다녀야 하기에 보리를 혼자 두고 나갈 적이 많아 늘 미안하다. 육포 한쪽을 입에 물려주고는 ‘보리야 미안해 얼른 다녀올게’ 하며 안아준다. 아이를 두고 간 것 처럼 마음이 쓰여 퇴근 후 발걸음이 빨라진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달려와 연신 제치기를 해대며 반기는 모습은 빈집에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날 기다렸는지 알 수가 있다. 외로움을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친구처럼, 개는 말하지 않아도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까지 전해준다.
개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신, 사람은 개에게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틈틈이 산책과 목욕을 시키고, 가끔은 털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 순백의 부드러운 털이 아름답지만 매일 빗겨주지 않으면 엉키거나 끝이 갈라진다. 아파트 바로 앞에 개 미용실이지만 선뜻 가지지 않는 것은, 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반려동물에 지나칠 정도의 돈을 들이거나 애정표현을 하는 것은 눈살이 찌푸려지기 때문이다. 30도를 웃도는 복중에 ‘개도 더울거다’며 아들·며느리가 이발기를 가지고 와서 털을 싹싹 밀었다. 우아하던 모습은 간곳없고 뼈만 앙상한 맨몸이 드러났다.
영리한 개는 서너 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다. 2년 가까이 보리를 기르면서 개도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개는 자기 몸의 털을 깎으면 옷을 홀랑 벗긴 것 같은 수치심을 느낀다고 한다. 여느 때 같으면 저를 길러준 아들·며느리가 갈 적에 따라가려고 했을 텐데,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아무리 다독이고 좋아하는 걸 줘도 먹지 않고 벽만 바라보고 있다. 개에게 수치심 있다니, 그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잃은 절망이 느껴졌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생활의 지장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동물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튿날 꼼짝 않는 보리를 두고 출근을 했다가 돌아와서 깜짝 놀랐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보리는 제 엘레지를 물어뜯어 거실에 피가 뚝뚝 떨어져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자해를 한 보리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며 한참을 다독였다.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3일이 지나서야 슬픈 눈빛이 사라지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 나는 보리를 개처럼 막 대할 수가 없었다.
지난 일을 다 잊은 보리는 활달해졌다. 낯선 사람을 보고 짖기는커녕 꼬리를 흔들며 반갑다고 기어오른다. 아는 동생이 우리 집에 왔다가 녀석의 재롱을 보고는 ‘연휴 동안 출장을 보내라’한다. 남편과 아이들 네 식구가 대화가 없어 집안이 적막강산이라 하였다. 아무나 잘 따르는 녀석이기에 그러라고 하였다. 보리의 활약은 대단했다. 대학생 형과 누나에게 맛있는 걸 얻어먹고 놀아주었는데, 대화거리 없던 가족에게 이야깃 거리와 웃음을 찾아주었고 집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며칠 만에 임무를 마치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온 보리는 내 품으로 달려온다.
충성과 신뢰의 동물인 개는 보살핌을 받은 반려인에게 즐거움을 선사 한다. 개와 함께 찻집을 가고, 여행도 하고, 달리기대회에도 참가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 눈이 되고, 마약과 범인을 찾아내며,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하고, 주인을 살려낸 충성스런 개 이야기는 세상을 훈훈 하게 한다. 우리 보리는 이처럼 훌륭한 개는 아니어도 귀엽고 영리하다. 건망증이 심해 불 위에 뭔가 올려놓고 깜빡하여 음식이 타거나 끓어 넘칠 때, 까치발을 하고 올려다보며 위급성을 알려 불을 끈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개도 혼자인 것은 싫어한다. 내가 잠자리에 들면 동그란 제 방석을 물고 와서 그 위에 눕는다. 침대 곁에 기대어 자다가 가위에 눌려 힘 들어할 때 발로 긁고 짖어서 잠을 깨워주는 녀석은 가족처럼 든든하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현대인에게 개는 감정을 나누는 친구이자 가족이다. 개와 인간은 생물학적 종이 다르고 피로 맺어진 가족도 아니지만, 피보다 더 진한 마음을 나누는 동반자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인구는 너덧 집 건너 한 가구, 이미 천만 명을 넘어섰다. 아파트 단지 공원이나 놀이 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은 비단 노인만이 아니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생명 하나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의지가 되고 사람을 즐겁게 하는지 개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일거수일투족, 오로지 나만 바라보는 개는 완전한 내 편이다. 개와 함께 즐거운 산책을 하고 심심하면 장난치며 놀다가 평화롭게 잠이 드는 우리는 행복하다. 접속만 있고 접촉을 꺼리는 지금 이 시대, 나는 오늘도 반려견과 동행하며 따뜻한 온기로 가슴을 채운다.
(제11회 원종린수필문학상 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