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이를 낳게 되겠지. 코가 크고 귓불이 두터운 사내아이. 그를 닮아 눈썹이 진하고 고수머리일 거야. 아니 곱슬거리는 건 싫어. 얇고 가느다란 머리칼이 좋아. 다리가 길고 손가락도 긴 딸아이라면 더 좋겠어. 여자아이는 무엇보다 등이 곧고 목선이 고와야겠지.
아이를 가지려면 먼저 종합검사를 받아야 해. 내 몸에 결핵균이 있는 건 아닌지 자궁에 나쁜 균은 없는지……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체크무늬 멜빵바지를 입혀 햇살 가득한 공원을 매일매일 산책해야지. 태양 속에 풍부한 비타민D는 아이를 튼튼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단백질, 단백질이 중요해. 특히 생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단백질이 좋겠지. 생선을 주식으로 하는 북극 사람들은 곱사등이가 없다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호숫가 마을에 예쁜 전원주택을 사게 될 거야. 창이란 창은 모두 숲으로 향하는 그런 집을 갖고 싶어. 부엌에는 온갖 향신료와 그릇들을 넣는 찬장을 꾸밀 거야. 엄마가 마련해 주신 포도무늬 식기 세트를 찬장에 숨겨 두는 일은 없어야지. 엄마는 낡은 식기와 짝이 제멋대로인 수저를 쓰며 살다가 어쩌다 손님이 들 때나 한번씩 새 그릇을 사용하지만, 나는 안이 환히 보이는 유리찬장에 포도무늬 접시들을 올려놓고 수시로 꺼내 쓰겠어. 그리고 재봉틀을 하나 사서 여름이면 아사나 불망으로 겨울이면 비로드나 광목으로 철마다 커튼을 바꾸어 달고, 자디잔 꽃무늬 식탁보와 푸른색 잠옷을 만들어야지. 내가 만든 옷을 입은 우리 가족은 싱싱한 과일과 음식들을 등나무 바구니에 넣어 봄나들이를 가게 될 거야. 딸아이는 개나리색 원피스를 팔랑이며 나비처럼 춤을 추겠지.
「그렇게 화장을 하고 차려 입으니 너무 예쁘구나.」
엄마가 거울 앞에 선 내게 다가오며 말한다. 엄마의 품에 안겨 거울 속 나를 바라본다. 평면만을 보여 주는 거울의 기만성. 사람들도 종이인형처럼 앞모습만 있고 뒷모습은 백지일 수는 없을까.
「네가 정말 결혼을 하긴 하나 보다…….」
엄마 목소리가 촉촉하다.
「엄만, 이제 인사드리러 가는 건데. 벌써 딸 뺏긴 거 같으세요?」
「뺏기기는. 결혼할 때가 되면 예뻐진다는 게 사실이구나 싶어서 그런다. 어쩜 이렇게 네게 딱 어울리는 옷을 골라 주었다니.」
초록색 코사지가 달린 하얀 원피스. 그는 점원에게 「내일 이 옷 입고 저희 집에 인사드리러 갑니다, 내 색시 예쁘죠?」했다. 그리고 흰색 원피스에 어울릴 만한 구두와 작은 가방을 사 주었다. 작은 큐빅이 박힌 구두는 지금 침대 위에 올려져 있다.
엄마가 몸을 떼고 조금 멀찍이 서서 나를 바라본다. 엄마의 입매가 살짝 올라간다. 저러다 또 눈물을 흘리고 말지. 나는 두 손을 허리에 대고 발끝을 살짝 들어 빙그르 돌아 보인다. 엄마가 웃는다. 엄마가 나를 한 번 더 안으며 등을 쓰다듬는다. 스물아홉 해 동안 내 등에 안타까이 머물러 왔던 엄마의 손은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있다. 엄마가 방을 나가고 나는 치마가 구겨지지 않도록 침대에 조심조심 걸터앉아 구두를 쓰다듬어 본다. 조금 있으면 그가 이리 온다. 우리는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탈 것이다. 제주에는 한라봉을 재배하는 그의 아버지와 남동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우린 부부가 된다.
왼쪽으로 조금 기운 코사지를 바로잡고 머리를 빗는다. 등을 가리기 위해 고집스럽게 기른 머리가 지금은 허리까지 닿는다. 그는 윤기 흐르는 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쓰다듬곤 한다. 나는 그를 위해 나날이 예뻐질 것이다. 몸을 돌리다가 둥그렇게 솟은 어깨와 등의 굴곡을 보고 만다. 등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내 등은 수수께끼다. 사막의 비밀을 간직한 낙타의 등. 등 안에 우는 사막의 바람. 나는 갑자기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진다. 가혹한 모래바람이 불어닥치고 꼬리를 치켜든 전갈과 바싹 말라죽은 곤충들이 날아다니며 얼굴을 후려치는 사막 그 중심에.
그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곱사등이 며느리를 맞으리라 생각 못한 그의 아버지는 너무 당혹스러워 방으로 숨어 버리겠지. 나는 현관 앞에 서서 그와 그의 아버지가 실랑이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렬해지다 결국 방문을 요란하게 닫고 나오면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서게 되리라. 우리는 바닷가에 앉아 깊은 숨을 내쉬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밤바다의 검은빛에 스며들겠지.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내 존재가 곤란해졌는지 읽어 내야 할 것이다.
아니다. 그는 이미 아버지에게 내 사진을 보여 주었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이처럼 나를 좋아하게 되리라. 손수 장만한 저녁상을 보이며 멋쩍게 웃겠지. 그럼 그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보며 음식솜씨를 칭찬해 주어야지. 다음날 나는 그들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해야 할 거야.
이제 그가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고 구두까지 신고 마루로 나간다. 엄마와 이모네 식구들이 둘러앉아 찐 떡을 먹고 있다. 다들 내가 시댁으로 인사 가는 걸 축하하며 아침부터 몰려와 그를 기다리는 중이다. 함께 식사도 못하고 나서야 하는데 식구들은 전을 붙이고 잡채를 볶았다. 상상만으로도 나는 배가 부르고 소화가 된다.
「우리 인경이 정말 예쁘네.」
「언니, 우리 딸 예쁘지? 딸 덕분에 비행기 탄다더니, 그게 헛말이 아니지?」
「이모 이모, 그 아저씨랑 뽀뽀했어? 결혼할라믄 뽀뽀도 해야지, 맞지 이모. 난 소연이랑 뽀뽀했는데.」
「한과 세트니? 그거 갖고 좀 모자라지 않을까?」
「고 서방이 과일바구니 사온다 했지?」
「벌써 고 서방이라 불러? 그건 그렇고 남자가 먼저 여자 집에 인사 와야 하는 거 아냐?」
「겸사겸사 오고가는 거지 뭐. 인경이한테 얘기 하도 들어서 난 벌써 본 거 같은데.」
저마다 한마디씩 거드느라 정신이 없다. 그 어수선함이 싫지는 않다. 나는 말없이 시계만 바라본다. 그가 올 시간이 조금 지났다. 토요일 오후, 차가 막히는가…… 회사 마치고 백화점에서 과일바구니 찾아오려면 조금 늦을 수도 있겠지. 비행기 시간까지는 두 시간 넘게 남았으니 아직까지는 괜찮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다섯 달 전 1호선 동대문 지하철역에서였다. 나는 이불과 쿠션 등을 사 어깨에 둘러매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커다란 비닐 봉투를 맨 내 모습은 짐을 잔뜩 짊어진 노새나 나귀 같았을 것이다. 행인들의 측은한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어느 순간 거추장스럽고 무겁기만 하던 짐이 가볍게 들렸다. 무작정 짐을 빼앗은 그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 짐을 내려놓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나는 쉽게 사랑에 빠진다. 열정적인 연애도 두어 번 해보았다. 혓바닥을 잡아뽑듯 억세게 밀어붙이는 입술과, 무턱대고 가슴을 풀어헤치는 손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늘 뒷걸음쳤다. 남자가 손을 돌려 내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등을 건드리는 순간 뜨겁게 달아올랐던 내 몸과 마음은 급속히 식어갔다. 그 손은 곱사등을 탐색하는 호기심 가득한 타인의 손일뿐이었다.
그는 성급하게 치맛자락을 올리지도 가슴을 풀어헤치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등뒤에서 조심스럽게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가 머리카락에 얼굴을 깊이 묻고 우리 결혼하자, 나지막이 말했다. 내 등에 와닿은 그의 가슴은 넓고 포근했다.
그가 오기로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모가 그에게 전화라도 해보라고 성화다.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 오자 엄마의 얼굴에는 불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그는 받지 않는다. 나는 아무 음성도 남기지 않는다. 아침에 서둘러 나오느라 전화기를 집에 두고 나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화곡동으로 오는 남부순환도로는 정체가 심하다. 택시 안에서 내게 전화하려고 했을 때에야 전화기를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리라. 빈 방에서 줄기차게 울리고 있을 공허한 벨소리.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고도를 낮추며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소리. 늘 듣던 소리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린다. 혹시 그가 마음을 바꾼 건 아닐까? 막상 가족에게 소개하려니 내가 부끄러워진 걸까? 아니면 머리카락이 길면서 등이 곧은 여자를 새로 만나기라도 했을까? 아니다. 그는 반드시 온다. 나는 그의 귀가가 늦어지거나 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발견된다고 해서 오해를 하거나 그릇된 상상으로 피로에 지친 남편을 닦달하는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너그럽고 사려 깊은 아내가 될 것이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막 지나고 있다. 그와 함께 타기로 했던 비행기는 지금 활주로에서 이륙해 바퀴를 집어넣고 있을 것이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 엔진 소리. 어쩌면 지금 저 비행기가 제주로 가는 그 비행기인지 모르겠다.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제주행 비행기 시간을 알아본다. 마지막 비행기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지만 좌석은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와 내 이름을 대기자 명단에 올린다. 운이 좋으면 좌석이 생겨 제주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점점 멀어지는 서울의 야경이 아름답겠지. 우리는 창에 얼굴을 바싹 붙이고 하늘을 내려다볼 것이다. 그의 몸이 닿을 때마다 내 볼은 붉게 물들겠지. 그러면 그는 볼그레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귀엣말을 하겠지. 귓불에 닿는 그의 훈기를 느끼며 나는 한 번 더 붉어질 거야. 제주에 도착하면 그는 오늘 하루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가족들 앞에서 무용담을 펼치리라. 그때 나는 조금 샐쭉한 표정으로 그의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려야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린다. 이모네 식구들은 오전 내내 준비한 음식들을 남겨 두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혹시 그가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 택시에서 너무 서둘러 내리다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오토바이에 치었을지도 모른다. 지갑이 사고현장에서 너무 멀리 퉁겨져 나가 이름이나 연락처도 알리지 못한 채 들것에 실려 가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머리를 심하게 부딪쳐 기억상실증에 걸려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의 신분을 확인해 주어야 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그의 눈썹은 검고 숱이 많았지요, 손등에 자그마한 사마귀가 있지요, 그는 목울대가 유난히 튀어나왔어요, 커다란 복숭아씨만한 목울대요. 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몸의 특징들을 기억해 내야 할 것이다.
그가 떠난 거라면? 혹시 새 옷을 사입히고 빨래와 밑반찬을 해놓은 뒤 밤도망을 치는 엄마들처럼 그도 내게서 떠날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온다.
더 이상 비행기 소리도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곧이라도 그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 스르르 방문이 열린다. 밝은 형광등 불빛을 등지고 엄마가 서 있다.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 또한 아무 변명도 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가 사준 흰 원피스를 입고 있다. 자정이 지나고 서늘한 아침 공기가 어둠을 밀어내며 방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나는 초침 소리만 가득한 어둠 속에 앉아 그를 기다린다. 하루가 너무나 더디게 지나갔다. 그는 오지 않는다. 그의 결별은 나를 벽 속으로 밀어 넣으리라. 천천히 시멘트가 채워지고 암흑뿐일 벽에 그대로 서 있게 되리라. 내 감정의 모든 가닥들은 그가 마무리한 시멘트 벽 안에 고스란히 박제되고, 육신만이 그 벽을 뚫고 나오리라. 나는 영혼을 빼앗긴 좀비처럼 숨만 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는 죽었다. 과일바구니에서 색색의 과일이 뭉개지고 그 위로 그의 붉은 피가 흘러내렸으리라. 갑자기 내가 입고 있는 하얀 옷이 결혼을 앞둔 여자의 드레스가 아니라 소복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태양보다 먼저 피어오르는 새들의 속삭임. 새들이 내게 그의 죽음을 전한다.
날이 밝고서야 그가 사준 흰 원피스를 벗는다. 그리고 아주 편안한 잠에 빠져든다. 서쪽 창에 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까지. 다시 어둠 속에서 일어난 나는 갑자기 그의 흔적을 찾는 데 열중한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 그리고 내가 입던 옷이나 다른 어느 곳에 있을지 모를 그의 흔적들.
그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
고석기(기술정보 대표이사) 별세. 광석(사업) 광희(소망 침례교회 담임목사) 부친상=11일 오전 11시 30분 서울중앙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
그가 사라진 지 124일 만에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는 아니다. 124일 동안 매일 다섯 개 신문의 부음란과 사회면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그라고 여겨질 만한 기사는 없었다. 담요에 쌓여 새카맣게 타버린 여자의 시체가 야산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사만 있었을 뿐.
살아 있다면…… 아마도 그는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생활을 하는 중일 것이다. 외진 낚시터나 산사 주변을 떠돌며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고 있겠지. 형사들은 그가 나타날 만한 곳을 서성이고 나 역시 그들의 감시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은신처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그가 걸어올 암호 같은 전화에 당황하지 말고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공금횡령이나 뇌물수수죄로 수배중이라는 기사 또한 보지 못했다. 죽은 것도 도피중도 아니라면, 나를 떠나고 만 것이라면, 그것은 순전히 내 등 때문이다.
내가 곱사등이인 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운명이었다. 아버지의 정자가 엄마의 자궁 안으로 들어와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곱사등이였다. 아버지는 결핵보균자였다. 아버지 몸속에 들어 있던 결핵균은 정자에 숨었다가 내 척추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내게 결핵균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혼자 떠나는 것이 영 서운해서 등뒤에 남을 생각을 했던 걸까. 옛사람들은 습한 사기(邪氣)가 몸에 침범하여 등을 굽게 만든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이 다만 습하고 간사한 기운이었을까? 나는 등뒤에 숨은 아버지의 온기를 느낀다. 아버지는 내 등을 다독이기도 하고 어깨동무를 해주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진실은 때때로 비애를 가져다준다. 진실이 나를 절망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면 나는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비참한 미래는 상상도 하지 않겠다. 아버지와 나 사이를 침범하는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가 죽어 주는 편이 간단할 일이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겠다.
신문을 접고 냉장고에서 활명수 한 병을 꺼낸다. 상고 졸업 후 매번 면접에서 떨어질 때마다 먹기 시작한 활명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등을 뚫고 올라치면 활명수를 먹었다. 두통이 올 때에도 배를 쥐어뜯는 생리통에 시달릴 때도 활명수 하나면 된다. 모든 병은 소화되지 않는 세상에서 온다. 병뚜껑을 잡고 한 번에 돌려 딴다. 경쾌한 소리. 뚜껑을 돌리면 파도에 쓸려 다니며 저희들끼리 몸을 부딪는 조개껍데기 소리가 들린다. 병목에 혀끝을 대는 순간 입 안에서는 싸한 파도가 일렁인다. 쌉쌀하면서도 달큰한 액체가 목젖을 타고 가슴속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대한문을 통과해 궁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미술관 큐레이터가, 근정전 공사를 맡은 인부들이, 표 받는 정 언니가, 관리인 김 아저씨가…… 나는 그들보다 먼저 출근해 청소를 하고 에어컨을 틀어 놓는다. 내 시계는 사무실 시계보다 한 시간 빠르게 맞춰져 있다.
덕수궁 매표구에 앉아 돈을 받고 표를 건네주는 일을 하게 된 지 한 달이 지났다. 더 이상 냄새 나는 지하 사무실이나 월급도 제대로 안 나오는 공장에서 경리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서 가을을 맞고 겨울을 보내리라. 가을이 되면 색이 고운 벚나무 길을 오래도록 걸어야지.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아 풀벌레 소리를 들어야지. 흰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어느 날 나는 제일 먼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 근정전 앞에 앉아 있으리라. 지금은 패스트푸드점이나 분식점에서 점심을 먹지만 내일부터는 도시락을 싸와야지. 그리고 백화점 네일아트샵에 가서 부드럽고 말끔한 손을 만들어야지. 사람들은 덕수궁 앞을 지날 때마다 표 파는 여자의 고운 손을 기억하겠지. 어쩌면 내 손에 반해서 청혼을 하는 남자가 생길지도 모른다.
김 아저씨가 들어오면서 관리실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수선하게 인사를 주고받고 커피 잔이 오고가고 사무실은 금세 활기로 가득 찬다. 나는 어제 헤아려 놓은 동전을 꺼내고 입장권을 챙겨 매표구 앞에 앉는다. 입장권 다발을 손에 쥔다. 손님이 없을 때마다 모서리 끝을 만지작거려 모서리가 조금 보풀어져 있다. 작은 입구를 막고 있던 나무판자가 치워지고 세 뼘, 다섯 뼘의 아크릴 창을 통해 시청 앞 분수가 보인다. 로터리에는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둘째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낀 손이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민다. 오늘도 늙은 사진기사가 첫 입장객이다. 어제도 제일 먼저 표를 끊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얼마나 다른 사진이 나올까 싶지만 그는 벌써 일주일째 덕수궁 출입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 늙은 사진사가 내 사진을 찍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도 긴장하지 말고 평상시대로 행동해야겠지.
드문드문 입장객이 든다. 오전에는 입장객이 그리 많지 않다. 웨딩촬영을 하는 몇몇 사람들과 노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점심시간이 되어야 몰린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네 차례 궁궐 안내 때나 세 시 즈음의 수문장 교대식 때가 가장 붐비는 시간이다.
오늘도 웨딩촬영이 있는 모양이다. 신부는 어깨가 훤히 드러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다. 아침 일찍부터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하느라 조금은 지친 모습이다. 화장이 땀에 번지지 않도록 연신 부채질을 한다. 여름이라 사진 찍는 사람이 드물기는 하지만 가을이 되면 덕수궁에는 더 많은 예비 신랑신부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를 훔쳐보며 경쟁하듯 행복한 표정을 짓겠지.
나는 덕수궁에서 전통혼례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활옷에 그려진 모란꽃이 화려하겠지. 치마 속에는 부피감을 살리기 위해 무지기치마와 스란치마를 입어야지. 나는 머리가 기니까 가발을 쓰지 않아도 될 거야. 전통혼례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내가 합환주를 마시고 절을 할 때마다 탄성을 지르곤 하겠지.
어른 다섯이요. 삼천오백 원. 나는 표를 한 장씩 소리 내어 떼어 내 한 번 더 센 후 거스름돈과 함께 매표구로 내민다. 작은 사마귀가 있는 손이 표와 거스름돈을 가져간다. 남자의 손이 낯설지가 않다. 남자가 창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다. 여기 옷 갈아입는 데가 있나요? 눈썹이 진하고 숱이 많은, 코가 크고 반듯한 이마를 가진 남자. 나는 남자의 얼굴에 단단히 붙들리고 만다. 그가 내 앞에, 그것도 말끔한 턱시도를 입고, 버젓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표를 챙겨 매표구에서 사라진다. 유령이라도 본 걸까. 그는 아니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 그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손등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사마귀는, 그리고 명쾌한 그 음성은. 냉장고에서 활명수 한 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신다. 머릿속에서 벌 떼가 날아다닌다.
하나 둘 입장객이 줄을 서고 나는 기계적으로 표를 뜯고 거스름돈을 내민다. 번번이 계산이 틀리고 입장권이 찢어지기도 한다. 내 손이 무엇을 하는지 내 눈이 무엇을 보는지 감각이 없다. 입장권을 가져가던 작은 사마귀가 선명한 그 남자의 손등만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때마침 점심을 먹고 들어온 김 아저씨가 의아한 듯 의자에 앉는다. 매점을 지나 호숫가로 향한다. 호숫가에는 젊은 여자 몇이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중화전은 공사중이어서 사진을 찍지 못할 테고 그렇다면 지금쯤 석조전 앞에 있을 것이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등뒤에서 바람 소리가 난다. 석조전 앞에 다다른다. 드레스 자락을 길게 드리운 신부와 흰색 예복을 입은 그가 부케를 마주 들고 서 있다. 신부는 키가 크다. 머리를 높게 올려 목선이 곱다.
자 신부님 그대로 활짝, 아주 환하게 웃습니다. 그렇지. 오, 케이. 이제 그만 한복 촬영합시다. 옷 갈아입고 오세요. 정지된 몸을 푼 신부와 그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기사 일행이 석조전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자 그는 한복상자를 들고 신부와 함께 호수 옆 탈의실로 향한다. 탈의실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눠 들어갈 때까지 그들은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는 정말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걸까. 우연히 사고현장에 있던 여자와 성급한 결혼식을 올리는 건 아닐까. 내가 나타나면 모든 기억을 되살리게 되리라. 내 고운 머릿결과 제주의 가족들과, 그가 잠시 잊고 있던 기억들이 봇물처럼 터지겠지.
그가 들어간 탈의실로 들어간다. 임시 건물로 세워진 천막 안은 몹시 덥다. 그는 등을 돌린 채 턱시도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복바지를 입고 있는 참이다. 그 단단한 등. 내 짐을 둘러매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던 바로 그 등.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간다. 그가 한복의 허리춤을 여미고 뒤로 돌아선다.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의 눈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목을 조르면 기억이 되살아날까?
그가 주춤주춤 다가온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그의 턱시도를 들고 내달리기 시작한다. 어렴풋이 그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대한문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넌다. 쨍쨍한 태양이 너무 눈부시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숨자.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다.
*
덕수궁으로 향하는 계단. 길을 물었던 그 아이들을 따라 수문장 교대의식을 구경하러 올라갈 걸 그랬을까?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길을 묻던 사내아이. 깊게 눌러쓴 푸른색 모자가 눈부셨던, 수문장 교대의식이 뭐냐고 반문했을 때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아이들. 경주를 하듯 힘차게 계단을 밟던 아이들을 따라 나도 모른 척 계단을 오를 걸 그랬나?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자연광과 형광등 불빛이 교차하는 계단참에 서서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후회한다. 수개월 동안 시청역사 한가운데를 서성였으면서도 여태 저 계단을 올라 보지 못했다. 범접할 수 없는 천상의 공간으로 여겼던 걸까. 용기를 내 손잡이를 짚어가며 계단을 오른다. 반쯤 드러난 하늘이 조금씩 넓어진다.
네 번째 계단을 밟았을 때 누군가 계단 꼭대기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팔락이는 머리카락과 휘청이는 몸이 위험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자가 균형을 잃고 계단을 구른다. 내게 와 부딪치는 여자를 나는 엉겁결에 밀치고 만다. 밀치면서 나도 여자의 몸 위로 넘어진다. 여자는 물을 콸콸 쏟아내는 둥근 항아리처럼 새카만 머리칼을 흘리며 누워 있다. 심한 충격을 받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둥근 몸통에 휘감긴 머리카락들을 한쪽으로 치운다.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에 숨겨져 있던 도드라진 등과 어깨의 굴곡. 나도 모르게 여자의 등에 손을 갖다 댄다. 꼼짝도 안 하던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은 크고 검다. 곧 흘러내릴 듯 꽉 차오른 눈 밑의 물기. 황급히 손을 치우자마자 기어이 여자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은 더 흐르지 않았다. 눈물은 흐르는 즉시 말라 버리는 휘발성 강한 물질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여자가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키더니 내 종아리를 붙들고 일어선다. 그녀의 손이 종아리에 닿는 순간 이상한 안도감이 전류처럼 온몸을 관통해 왔다. 다만 손을 짚고 일어선 것뿐인데 모든 감각이 여자의 손에 집중된다. 여자의 손에서 하얀 옷이 스르르 떨어진다. 몸을 구부려 옷을 주워 든다. 넓은 깃에 금빛 장식이 수놓아진 남자 예복이다. 여자는 왜 대낮에 남자 예복을 들고 그토록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왔을까. 나는 그 옷이 어떤 소중한 전갈이라도 되는 듯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고개를 들었을 때 여자는 내 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 결혼예복을 남겨 둔 채 홀연히 사라진 여자. 계단을 오르고 여자가 굴러오고 함께 나자빠진 일이 꿈만 같다. 나는 흰 옷을 감싸 안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시청역 지하 다섯 갈래 길. 그 중앙에 자리잡은 관광안내소 주변이 내가 매일 열한 시면 출근하는 일터다. 나와 함께 나온 임 여사는 이마에 여드름 가득한 여자를 붙들고 작업이 한참이다. 여자가 엉덩이를 뒤로 안 빼고 여드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 보면 거의 성사된 듯하다. 그녀는 오늘 여드름 전용 기초화장품부터 마사지 관리까지 실적을 올릴 것이다.
아이들을 출구로 데려다 주기 전 나는 세 시간째 아무 실적 없이 시청역 주변을 서성이고 있던 참이었다. 바로 전에 내가 놓친 여자는, 눈꼬리가 약간 쳐지고 도무지 거절 못하게 생긴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신의 얼굴에 수십만 원을 쓸 여자는 아니었다. 기초화장도 제대로 안 한 얼굴에 구입한 지 일 년이 넘었을 투웨이케이크로 대충 문지른 다음 거칠게 그린 눈썹 라인을 뻔히 보면서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입술을 위로 치켜세우며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제 갈 길을 갔다. 뷰티플래너라는 일은 처음부터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여자들의 피부를 상담해 주고 아름다움을 북돋는 직업이라니. 사십대 초반의 임 여사에 견줘 봐도 열아홉 살의 내 실적은 언제나 형편없다. 실적으로 주는 월급이 아니라면 나는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실내는 점점 더 후텁지근해진다. 샘플과 전단지가 든 가방을 관광안내소에 세워 놓고 시원한 바람이 새어 나오는 천장의 에어컨 통로만 쫓아다닌다. 피부가 민감하시군요, 이런 피부는 노화가 빨리 돼서 아무 화장품이나 쓰면 안 되죠, 이나미가 모델 하는 화장품 아시죠? 본사에서 직접 관리하는 피부관리소에서 나왔어요, 피부 테스트만 하셔도 사은품을 드리거든요…… 나는 입 안에서만 웅얼대며 지하도를 서성인다.
새서울 지하상가로 가는 마지막 계단에는 거지여자가 그 끝자락을 베고 누워 있다. 옷을 겹겹이 껴입은 데다 머리카락도 제멋대로 부풀어 있어 그녀는 진창에 나자빠진 비대한 들소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계단을 오르내린다. 맥없이 흘러내린 손과 반쯤 벗겨진 신발이 비참한 죽음을 잡아 낸 한 컷의 사진 같다. 아주 잠깐, 그녀 주위에 배회하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향해 조롱의 손가락질이라도 하듯 가운데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인다.
거지여자가 먹다 놓아둔 즉석라면 용기를 피해 계단을 내려간다. 새서울 지하상가의 벽면에는 지방도시의 축제나 특산물 광고판이 즐비하다. 나는 매일 광고판 속 도시로 여행을 떠난다.
제일 먼저 상주해수욕장의 푸른 바다에 퉁퉁 부은 발을 담가 붓기가 빠지기를 기다린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파도가 들었다가 빠져나간다. 시끄러운 바다 위를 조용히 떠다니는 작은 거품들. 고개를 돌려 때묻지 않은 곳, 초록빛 낭만과 짜릿한 모험관광의 천국, 인제로 간다. 내린천의 거친 물살에서 숨이 멎는 쾌감을 맛본 후 관광휴양의 고장 횡성으로 가 삼림욕으로 피로를 푼다. 청풍명월의 본고장, 그 이름만큼이나 낭만이 가득하다는 제천을 들러 춘향고을 사랑의 남원으로 가 구성진 판소리 소리도 듣는다. 해오름의 고장 양양. 의상대의 일출은 붉고 아름답다. 영광의 일몰은 더욱 붉다. 일그러진 태양에 손을 대본다. 아크릴 느낌만 차갑게 느껴진다.
광고판 교체작업을 하고 있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 경관―남해의 광고판이 있던 자리이다. 나는 또 다른 도시의 출현을 고대하며 걸음을 멈춘다. 인부들이 공구를 챙겨 떠나고 남해가 있던 자리에 인천항 광고가 붙는다. 광고판 한가운데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청해진호가 정박해 있다. 광고판에 바싹 붙어 서서 대형선박을 본다. 언제 저 배를 탈 수 있을까? 선박 하단에서 부서지는 포말과 석양을 바라보며 제주에 갈 수 있을까? 어차피 나는 이제 돌아갈 곳도 없는데…….
눅눅하기는 하지만 이웃한 집도 없고 작은 개수대도 있던 지하창고방. 나는 그 방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3층 주인 노인의 집으로 짐을 옮겨서는 안 되었다. 거리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햇살 가득한 그 방에 왜 욕심을 내었을까. 방에 붙어 있던 사진들을 보지 않았더라면, 노인에게서 냄새가 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사람들을 끌어 모았더라면, 애초에 내가 청도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끊임없이 물고 물리는 잘못된 과거들. 이 영원한 엉클어짐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걸까?
노인이 방을 내어 주는 대신 내게 요구한 것은 그저 딸처럼 따르면서 가끔 저녁이나 같이하자는 거였다. 성미 고약한 노인네에서 갑자기 친절한 노신사로 돌변한 집주인의 태도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노인은 분명 지하와 1, 2층을 원룸으로 고쳐 임대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1, 2층의 여섯 가구도 이미 이사를 갔거나 조만간 갈 예정이었다. 노인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방으로 찾아와 독촉을 해댔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노인이 사는 3층집 방 하나를 내어 주었다.
이유 없이 선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기에 그 즈음의 나는 너무 막막하고 무력했다. 통장에 든 돈과 그 달 월급까지 다 합쳐도 서울 시내에서는 작은 방 하나 구할 수 없었다. 청도를 떠나와 처음 묵었던 장기투숙 여관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시큼한 냄새가 머리를 짓누르고 화장실 타일은 다 깨어지고 벽 여기저기 곰팡이가 진을 치는 여관방. 방문을 열어 놓고 속옷바람으로 화투를 치는 남자들과, 더러운 복도를 지나 플라스틱 덩굴을 들치고 나가면 마주치는 시선들.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노인의 몸에서 풍겨 오던 냄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엔 독한 향수 냄새가 났다. 잠시 후 향수 냄새가 사라지고 몸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노인네 냄새가 뚫고 나왔다. 소똥 냄새와 흡사한 매캐하고 씁쓰름한 냄새, 잘 말리지 못해 후끈한 열기를 뿜으며 발효되기 시작한 풀 냄새.
발목이 시큰거리고 엉덩이가 뻐근하다. 입에서 자꾸 거위침이 고이고 생목이 올라온다. 나는 다시 시청역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크릴 판에 갇힌 도시들을 지나 관광안내소로 간다. 임 여사는 보이지 않는다. 여드름 여자를 데리고 사무실로 갔을 것이다. 샌들 한쪽을 벗고 관광안내소에 기대선다. 발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해 본다. 통증과 함께 시원한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알선 종아리를 거쳐 무릎뼈까지 당겨진다. 다리는 여전히 퉁퉁 부어 있다. 다리의 붓기가 허벅지를 타고 머리꼭대기까지 기어올라오는 듯 정신이 먹먹하다.
관광안내소에서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온다. 유리창에 붙은 서울시 관광 안내도와 지하철 노선표 틈새로 안을 훔쳐본다. 여자는 오늘도 등받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영어로 쓰여진 책을 본다. 여자는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다. 발끝에서 초록색 슬리퍼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여자는 떨어진 슬리퍼에는 개의치 않고 여전히 음악에 맞춰 맨발을 움직인다. 안내원 여자는 그윽한 음악이 맴도는 평온한 세계에 있다.
노인 집 3층 방도 안내소만큼 평온한 공간이었다. 장판과 벽지가 하늘색이고 아침이면 벽면에 붙은 바다 사진들에 햇살이 내비치는 방. 어쩌면 노인의 의도를 의심하면서도 짐을 풀었던 것은 그 깨끗한 벽에 붙은 바다 사진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붉은 해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이제 막 잠에서 깬 색색의 바다 생물들이 붉은 산호 주변을 느긋하게 오가는 바닷속 풍경. 수면 위와 아래를 한 컷에 담아낸 보기 드문 사진이었다. 청색 불가사리와 색이 고운 물고기들이 노는 산호초 군락은 너르게 펼쳐진 야생화 군락 같았다. 바다의 화원. 사진의 하단에는 셀레베스 해의 산호초 군락이라 적혀 있었다.
벽면에는 산호초 사진 말고도 푸른빛 인쇄물들이 더 있었다. 흡입판은 연한 핑크빛이고 촉수 끝으로 갈수록 진한 보라색을 띄는 말미잘들. 그 속에 얼굴을 내민 주황색 물고기 흰동가리. 아름답게 촉수를 뻗고 있는 말미잘 무리들에서 향긋한 꿀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스킨스쿠버를 했던 아들이 붙여 놓았다고, 중국지사로 발령받아 떠난 지 3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다며 사진들을 떼어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투명 테이프로 더욱 단단히 붙여 놓았다. 말미잘이 흰동가리를 보호해 주는 거야, 다른 큰 물고기들은 말미잘에 쏘이면 죽거든, 노인이 말했다.
내가 붉은 소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제 <2001 청도 소싸움 축제>를 알리는 광고판을 보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좀더 버틸 수 있었을까. 나는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끊임없이 반추하며 지하도를 걷는다.
어제 나는 붉은 소를 보았다. 단단히 오른 근육질과 윤기 흐르는 붉은 털을 가진 황소가 뿔을 걸어 누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 옆에 검붉은 얼굴의 두 사내가 싸움을 북돋우는 청도의 광고판. 건초 냄새가 났다. 건초 냄새를 따라 여물 냄새, 소털 냄새, 외양간 냄새도 따라 불어왔다. 광고판이 들썩이더니 서로 뿔을 겨누고 있던 두 마리 소가 방향을 바꾸어 내게로 향했다. 내가 한 발 물러설 때마다 소도 한 발씩 내딛었다.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고 다시 네 갈래 길, 수많은 상가들과 알 수 없는 소음들, 붉은 황토가 얼굴에 튀었다. 발을 헛디뎌 계단을 구르고 골목을 돌아돌아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허공의 어느 틈에 끼어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되새김질하는 소의 입다심 소리가 들렸다. 코에서 뿜어져 나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소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꿈속에서 청도의 외양간으로 돌아가 건초 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태풍이가 큰 혓바닥으로 내 어깨를 핥아 주었다. 나는 목덜미에 와닿는 혀의 매끈한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나지막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초를 들치고 누군가 내 옆에 누웠다. 익숙한 냄새. 소털 냄새가 났다. 또 다른 혓바닥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 아무 걱정할 것 없어, 이젠 너와 나 둘뿐이다. 나 청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너를 청도로 돌려보내지 않으마. 두 마리 소가 내 얼굴과 가슴을 미친 듯이 핥아댔다. 그리고 어둠의 소가 내 몸을 뚫고 들어왔다. 나는 선선히 다리를 벌렸다. 눈을 뜨자 내 몸에 올라탔던 검은 소는 작고 작아져 쥐새끼처럼 날렵하게 달아났다. 이불에서 독한 향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다음날 머리맡에는 십만 원 권 다섯 장이 든 흰 봉투가 발견되었다.
퇴근시간이 되면서 시청역은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세 번이나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온 임 여사는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오거리 한복판에 그대로 남아 정물처럼 서 있는다. 굽이 높은 샌들로 갈아 신은 안내원 여자가 관광안내소에 자물쇠를 채우고 총총히 사라진다. 흰 예복을 바닥에 깔고 안내소에 기대앉는다. 석간신문 덩어리가 날라지고 꽃다발과 케이크를 든 남자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지도를 든 외국인이, 지독한 퍼머약 냄새를 풍기는 늙은 여자가 지나간다. 나는 조금씩 시청역의 일부가 되어간다. 문 닫은 복권판매소나 고장난 공중전화처럼, 구석에 비치된 비상용 모래함처럼.
현금지급기에서 통장의 돈을 모두 뺀다. 이십삼만 원. 노인이 두고 간 돈까지 합치면 칠십만 원이 조금 넘는다. 여관에 간다면 얼마나 버틸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노인의 집으로 돌아갈까. 노인의 말대로 노인을 파파라 부르면서 말미잘과 흰동가리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시청역을 배회하며 여자들의 지갑 속을 가늠하지 않고, 차비를 구걸하는 앵벌이나 도를 내세운 사기꾼 취급도 받지 않으면서. 노인의 말상대가 되어 주고 가끔 머리맡에 올려진 빳빳한 돈을 세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안 될까. 어이없게도 나는 며칠간의 화려한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그리워하며 한없이 망설이고 있다.
한 무리의 사내들이 시끌벅적하게 계단을 내려온다. 매표소 주변이 한가해지면서 술 취한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적막한 통로에 사내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하상가의 거지여자도 두 병째 소주를 땄다. 나는 흰옷을 들고 관광안내소에 붙어 서 있다. 이 옷을 남기고 사라진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내가 지금 노인의 집으로 가지 못하는 것은 혹시 올지 모르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까.
발밑으로 지하철 바퀴의 진동이 느껴진다. 낮에는 실내 소음 때문에 들을 수 없었던 둔중한 느낌이 머리끝까지 전해져 온다. 밤이 되어서야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가진 거대한 동물의 뱃속에 서 있는 기분이다. 이 맥박 소리도 자정이 지나면 완전히 멈추어 정적만이 남겠지.
거지여자가 주변에 널린 담배와 육각성냥 라면용기들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일어선다. 한 손에는 여전히 술병이 들려 있다. 여자가 계단을 올라 역사로 들어서자마자 지하상가 셔터가 내려진다. 시계를 보거나 요일을 셈하지 않아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공기의 혼탁함으로 시간을 파악하는 걸까. 여자는 지도판매소를 지나 화장문화운동본부와 현금지급기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걸어 들어간다. 여자를 따라 조금씩 걸음을 옮긴다.
화장문화운동본부의 진열장에는 신주로 만든 유골함이 전시되어 있다. 검은 휘장과 영정사진에 갑자기 한기가 든다. 여기저기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스럽게 들소여자 옆에 앉는다. 여자는 내가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엉덩이를 들어 자리를 조금 내어 준다. 여자의 옷에서 무 썩은 냄새가 난다. 여자가 병에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고 트림을 길게 한다. 저녁으로 즉석라면을 먹었는지 술 냄새와 함께 라면 국물 냄새가 난다. 아버지에게서도 언제나 술 냄새가 났었다.
아버지는 싸움 소 훈련꾼이었다. 감 밭을 팔아 산 태풍이와 사람들이 맡긴 네 마리의 소가 아버지의 훈련소였다. 2년이나 우승 경력이 있는 돌쇠란 놈도 그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소들을 데리고 자갈길을 달리고 산길을 올랐다. 서너 시간 진창길을 뛰고 나면 소들은 강한 콧바람을 내뿜으며 배를 들썩이곤 했다. 나는 중학교도 마치기 전에 아버지와 소들을 따라다니며 약초를 모으고 쇠죽을 끓였다.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아버지의 눈은 태풍보다 더 강렬해졌고 손끝은 돌쇠의 각뿔보다 더 날카로워졌다.
나는 소들이 엉덩이에 달라붙는 파리 떼를 몰아내려고 꼬리를 탁탁 치는 소리를 들으며 외양간에서 지냈다. 쇠죽을 먹고 난 소들은 판자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를 응시하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소들이 짚과 감 이파리로 만들어진 잠자리에 들면 나는 태풍이의 허리에 머리를 기대앉곤 했다. 태풍이는 슬픔에 민감해서 내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거나 혼이 난 날이면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며 어깨를 핥아 주었다. 태풍이의 혓바닥에서는 이상하게도 소 여물 냄새가 아니라 빗줄기에 상처 입은 여린 토끼풀 냄새가 났다.
문제는 돌쇠였다. 풍각 면장이 맡긴 돌쇠는 틈만 나면 다른 소들을 머리로 받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예선전을 치르기 전날에도 돌쇠는 위로 솟구진 뿔로 태풍이를 툭툭 건드렸다. 태풍이는 겨우 고개만 돌릴 뿐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태풍이의 옆구리에 작은 상처가 났다. 나는 기둥에 세워진 둥어리막대를 꺼내 돌쇠 옆구리를 내리쳤다. 돌쇠가 몸을 비틀면 비틀수록 나는 더 세게 막대를 휘둘렀다. 가만 좀 두란 말야, 네가 죽어, 죽어, 죽어. 나는 침을 뱉듯 거침없이 내뱉었다. 돌쇠의 목덜미에 생채기가 나고 피가 조금 흘러내렸다. 돌쇠가 무릎을 접고 앉을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막대를 내리쳤다.
구두 굽 소리,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 가까스로 눈을 뜬다. 여기저기 셔터 올리는 소리가 들리고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이 보인다. 내 옆에 있던 들소여자는 사라지고 없다. 내 몸에서 들소여자의 무 썩은 내가 난다. 입고 있던 옷은 심하게 구겨져 있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 허리가 심하게 결려 온다. 자꾸 한기가 드는 것 같다. 덮고 있던 흰옷을 목까지 끌어당기고 눈을 감는다. 누군가 내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다가선다. 다시 눈을 뜬다. 큐빅이 조르르 박힌 자그마한 신발이 보인다. 고개를 든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그녀는 흰 원피스를 입었다. 한 손에 단지를 들고 있다. 화장문화운동본부에서 봤던 유골함이다. 그녀가 머리를 숙이자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좌르르 쏟아진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내가 덮은 옷을 집는다. 나는 옷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손톱을 세워 부여잡는다. 그녀와 나는 한참을 그렇게 옷을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옷을 부여잡은 채 그녀를 올려다본다. 긴 침묵 끝에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뗀다.
「내 남편이 될 뻔한 사람의 옷이야. 그의 아버지는 제주에서 한라봉을 재배하지. 그는 죽었어. 오늘 그의 장례를 치를 거야. 그이의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이 옷이 그를 대신해 줄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꿈을 꾸듯 몽연하다. 그녀가 입을 다문다. 붉은 유골함이 그녀의 팔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마치 그 안에서 죽은 자를 건져 올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는 유골함만 묵묵히 바라본다. 여자가 다시 허리를 굽혀 옷을 집는 순간 나는 여자의 종아리를 붙든다.
「제주로 가는 배가 있어요. 청해진호. 매일 저녁 일곱 시에 떠나요.」
나는 그녀의 신발부리만 보며 겨우겨우 말한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옷을 든 그녀가 손아귀에서 다리를 잡아 뺀다.
「제주바다에서 장례식 하면 되잖아요. 나도 같이 가게 해줘요!」
그녀의 종아리를 딛고 몸을 일으키며 소리친다. 어제 그녀가 내 종아리를 붙들고 일어섰던 것처럼. 그녀가 종아리를 붙들고 있는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녀가 등을 돌려 느릿느릿 걸어간다. 그녀의 긴 머리 속에 살짝살짝 드러나는 굽은 등이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그녀는 덕수궁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그녀가 구르듯 내려왔던, 긴 머리를 흘리며 내 발 밑에 누워 있던, 한 번도 올라 보지 못했던 계단. 나는 그녀를 따라 지상으로 올라간다.
아침 햇살이 찬란하다. 로터리 한가운데 자리잡은 분수에서 햇살이 부서진다. 그녀가 덕수궁 문 앞에 선 경비복장의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거대한 문 앞에 서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는다. 마침내 나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돌담 높은 궁과 고풍스런 시청 건물과 햇살을 조각내며 솟아오르는 분수가 있는 지상으로.
시청 앞 분수의 물길이 열두 번 높게 치솟은 후에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쇼핑백을 들고 있다. 시청역으로 내려와 인천행 전철을 탄다. 그녀는 유골함과 흰옷이 든 쇼핑백을 가슴에 안고 묵묵히 창밖만 바라본다. 그녀 옆에 꼭 붙어 앉아 문이 열릴 때마다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그녀의 눈은 눈썹이 길고 쌍꺼풀이 깊다. 혓바닥으로 나를 핥아 줄 때의 태풍이 눈처럼 슬픔과 원망을 깊숙한 곳에 묻은 깊디깊은 눈. 태풍이의 허리에 머리를 기대듯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그녀는 어깨를 빼지 않는다.
그녀와 나는 배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인천 선착장공원에 앉아 있다. 그녀가 쇼핑백에서 흰옷과 라이터를 꺼내 소맷자락에 갖다 대고 불을 붙인다. 흰옷은 금세 검은 연기를 내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내가 청도를 떠난 날 외양간도 그렇게 불길을 뿜었다.
대전의 날, 돌쇠는 이렇다 할 공격도 못하고 꽁무니를 뺐다. 상대는 이제 막 싸움소가 된 풋내기였다. 2년씩이나 우승을 한 돌쇠가 그렇게 어이없이 내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태풍이가 견디기 소인데 반해 돌쇠는 찌르기도 잘하고 덮치기도 잘하는 공격적인 소로 유명했다. 돌쇠의 흔들리는 꼬리 밑에서 푸륵푸륵 똥덩이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받아라, 찍어라, 하며 돌쇠를 북돋우려 애썼다. 그러나 그것이 신호라도 되듯 돌쇠의 입에서 허연 거품이 뿜어져 나오더니 기어이 엉덩이를 보이고야 말았다. 아버지는 돌쇠를 비롯해 다른 네 마리의 소를 모두 돌려주어야 했다. 2년이나 우승한 돌쇠가 그리 되었으니 이제 청도에서 아버지에게 훈련을 맡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태풍이와 나를 외양간에 가두고 사라졌다. 한밤중에 만취해 돌아온 아버지는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태풍이와 내게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태풍이와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아버지가 제 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묵묵히 채찍질을 견뎌내었다. 번개가 자던 건초 더미에 엎어진 아버지는 종종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잠이 들었다. 나는 태풍이를 끌고 조용히 외양간을 빠져나왔다. 태풍이의 고삐를 풀었다. 태풍이가 내 몸에 머리를 부볐다. 아버지가 휘두르던 채찍을 들고 태풍이를 후려쳤다. 멈칫거리던 태풍이 가르막길을 달려나갔다. 일년 내내 혀를 빼어 물고 내달리던 그 길을.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외양간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향긋한 새벽 풀 냄새가 피어오를 때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집을 나섰다. 문을 나서기 전 나는 외양간 마른풀 더미에 성냥불을 그었다. 청도를 떠나는 내 등뒤로 삼나무처럼 높은 화염이 솟아올랐다.
피어올랐던 불꽃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 나는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지기 전에 건초의 기억을 모두 집어넣는다. 아버지와 주인 노인과 돌쇠를 불에 던진다. 푸른 불꽃이 화르르 일었다가 사그라든다. 이제 나는 청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불꽃이 사라지고 검고 작은 덩어리만 남는다. 여자가 재를 모아 유골함에 집어넣는다. 청도도 따라 그곳으로 들어간다.
*
새. 그 애가 난간에 손을 얹은 채 말한다. 새 좀 봐요! 라고 외친 것도 아니고 나지막이 속삭인 것도 아닌 툭 튀어나온 한 음절, 새. 말을 마치자마자 비행기 한 대가 인천공항 쪽으로 향한다. 마치 그 애와 내가 함께 바라보는 비행기의 또 다른 이름이기라도 하듯 그 애는 그렇게 내뱉었다. 그 애가 새라고 내뱉었던 게 저거였을까. 출발할 때부터 배 꽁무니를 따라오던 한 마리 갈매기가 아닌, 일그러진 태양과 붉게 물든 구름 사이를 뚫고 서서히 내려가고 있는 거대한 인공의 새.
언젠가 나도 비행기 안에서 석양을 내려다보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지. 석양보다 붉게 물들 내 볼과 그 볼을 간질이는 누군가의 숨결을, 그의 가족들과 함께 할 저녁식사와 나란히 앉아 바라보는 제주바다를, 그리고 그와 함께 꾸밀 햇살 가득한 집을. 나는 지금 비행기가 아니라 배 갑판에서 석양을 올려 보고 있다.
시속 20노트의 배에 부딪친 바람은 그보다 더 광폭한 속도로 내 머리카락을 치고 달아난다. 바람 소리에 머리가 산란하다. 나보다 두 뼘이나 키가 큰 그 애는 그만큼 더 심하게 흔들리고 있을까.
그녀라 부르기에 미약한, 그늘진 피부 밑에 숨은 솜털을 내게 들켜 버린 애. 저토록 강하면서 동시에 절망적인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볕에 그을린 사내아이의 매끈한 맨 어깨처럼 검은빛을 내는 얼굴과 조금 불안해 보이기까지 하는 뾰족한 턱. 그 속에 숨은 망설임과 자책들. 나는 내 안에 숨은 다른 얼굴을 엿본 듯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오늘 아침 그의 옷을 덮고 자던 그 애는 그저 스쳐 지나면 풍경의 일부라 생각될 정도로 투명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절대로 반대하는 법도 없는 여자아이. 그러나 내 종아리를 부여잡고 소리쳤을 때, 나는 폐어(肺魚)가 건기를 견뎌 내기 위해 모래펄로 숨어드는 간절한 몸부림을 보았다. 그 애는 누구라도 따라나서 그곳을 벗어나야 했으리라.
엔진 소리와 뒤로 나자빠지는 물결이 아니라면 배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겨질 정도로 배는 느리고 느리다. 석양을 등지고 선 크고 작은 섬들조차 숲을 실은 바지선인 듯 느릿느릿 따라오고 있다. 멀리 인천공항의 전조등이 점점 선명해진다.
「그걸 언제 뿌릴 거죠? 제주에 도착하면요?」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애가 느닷없이 얼굴을 들이대고 묻는다.
「아니, 아직 안 정했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요. 멀미가 나는 것 같아.」
그 애는 난간을 꼭 붙들고 비틀거리며 걷는다. 그 애를 따라 선실로 들어간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 애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는다. 방은 꽤 넓다. 네모난 창으로 흐릿하게 바다가 보인다. 작은 욕실과 두 개의 침대, 소파와 작은 탁자, 구형 텔레비전까지 갖춘 방이다. 내가 나서기도 전에 그 애는 이등실 가격의 두 배나 되는 일등실 표를 끊어 왔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닌 걸요. 표를 건네주며 그렇게 말했다. 집에서 돈을 훔쳐 달아나기라도 한 걸까? 어제 계단에서 부딪쳤을 때만 해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옅은 화장품 냄새도 났었는데, 하루아침에 더러운 몰골로 시청역 바닥에 누워 있던 건 왜일까.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베개에 머리를 눕힌다. 침대 맡에 놓인 스탠드 하나만 남기고 실내의 전등을 모두 끈다. 바람을 너무 쐬어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다. 욕실로 들어간다. 타일 벽에서 오래된 물비린내가 난다. 수도꼭지를 돌린다.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배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다. 나는 다리를 벌리고 서서 뜨거운 물에 세수를 한다. 물에서 녹내가 난다. 녹내와 함께 기름 냄새도 풍긴다. 물기를 닦고 머리를 빗는다.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엉겨 붙어 있다. 흰 원피스에는 어디서 묻었는지 붉은 얼룩이 생겼다. 녹물 같다. 물을 묻혀 얼룩을 지우려다 그만둔다. 어차피 그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니까.
창밖은 이제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가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다. 소파에 기대앉아 어둠뿐인 바다를 바라본다. 지나친 냉방 때문에 팔뚝에 자꾸 소름이 돋는다. 벽에 머리를 기댄다. 엔진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운다. 낮고 굵은 울림이 꼭 이글거리는 화염 소리 같다. 관을 태우는 화장장의 불길 소리가 이럴까.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눈을 감으니 온통 불길이다. 나는 강력한 불길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몸을 비튼다. 대신 그를 집어넣는다. 순식간에 그의 머리카락이 사라지고 얼굴이 일그러진다. 손가락과 단단한 가슴과 코가 하나씩 사라진다.
어쩌면 배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그의 유골함을 안고 바다로 뛰어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탑승자 명단에 이름을 제대로 쓰지 않은 것도 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긴 항해에 지쳐 모두들 잠든 한밤중에 바다로 뛰어든다면 어느 누구도 내 죽음을 알지 못하리라. 피를 흩뿌리며 팔목을 긋거나 혀를 빼물고 목을 매지 않고도 죽을 수 있는 방법. 누구에게도 시신을 들키지 않는 완벽한 자살을 나는 꿈꾸었을 것이다.
침대에 누운 그 애를 본다. 몸을 잔뜩 구부리고 이불을 뒤집어쓴 그 애는 너무 작고 왜소해 보인다.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산을 닮은 단단한 사내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겠지. 숲으로 둘러싸인 집은 아니지만 서울 외각도시의 아파트에서 조금씩 평수를 넓혀가며 행복을 찾겠지. 어쩌면 그 애가 내 들러리가 되어 줄지도 몰라. 그이를 형부라 부르며 나와 그이를 평생토록 따르겠지.
「만약에,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불면요, 이 배가, 난파될까요? 갑자기 태풍이나 돌풍 같은 게 올 수도 있잖아요?」
자는 줄 알았던 그 애가 침대에 누운 채 웅얼거린다. 나는 한 번도 비극적인 상황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 애는 지금 당장 배가 두 조각나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한다. 가방에서 활명수 한 병을 꺼내 그 애에게 건네준다. 그 애가 계속 몸을 떨며 활명수 병에 입술을 댄다.
「이렇게 큰 배가 아무렴.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구명보트가 있잖아. 배 옆구리에 달린 보트 봤지? 거기에 타기만 하면 우린 금방 구조될 걸.」
침대에 걸터앉아 그 애의 어깨를 토닥여 준다.
「보트를 못 타면요?」
「그렇더라도 우리는 가까운 해안에 도착하게 될 거야. 서해의 어떤 섬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더 멀리 중국의 낯선 해안일 수도 있겠지. 일주일이나 한 달 동안 바다를 떠돌게 되더라도 우리는 극적으로 해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육지에 도착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독히 운 좋은 두 여자를 보기 위해 몰려들겠지. 우린 바다에서 버텼던 며칠에 대해 느긋하게 설명해 주기만 하면 돼.」
「중국 어디요?」
「글쎄. 여기서 가까운 곳에 청도라는 항구가 있어. 아마 그쯤 되지 않을까?」
「중국에도 청도가 있어요? 만약 그곳에 못 가면요? 아니 그곳에 가기 싫다면요!」
그 애가 갑자기 침대에서 몸을 곧추세우더니 중국에 청도가 있느냐고 재우쳐 묻는다. 그 애의 부릅뜬 눈은 지금이라도 당장 이 배에서 뛰어내릴 듯 이글거리고 있다. 무엇이 그 애를 이토록 노엽게 만들었을까. 그저 조용히 누워 있기만 하던 애를.
「그럼, 다른 곳에, 그래, 다른 곳에 가면 되지.」
「어디요?」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애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러나 내 상상력은 유골함에 갇힌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서해 한가운데 전설 속의 푸른 섬이 하나 있어.」
그 애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내 말을 기다린다. 나는 천천히 말을 잇는다.
「그 푸른 섬은 바다 깊숙한 곳에 있대. 바다 생물들과 육지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지. 그곳에는 피부가 빙설 같고 해초를 뜯어먹고 사는 신인이 살아. 그녀가 정신을 집중하면 만물이 소생하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지워 준대. 그러니 걱정 말아. 어느 곳에 도착하든 우린 안전할 거야.」
「고통스런 기억을 지워 줘요?」
「그래, 그곳엔 가위눌리는 병을 고쳐 주는 흰 꽃도 있대. 어떤 책에서 봤어.」
「그럼 거기로 가요. 배가 난파되면요.」
그 애가 남은 활명수를 한 번에 마시고 빈 병을 건네준다. 이불을 바싹 끌어당겨 몸을 말고 눕는다. 이 배는 난파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분홍 투피스를 입은 아나운서가 주말까지 맑고 쾌청한 날씨가 되겠다고 예보한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아까 올려다본 하늘에 태풍이나 폭풍의 전조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제주에 무사히 도착해 말들이 뛰노는 너른 목장과 바다로 직접 떨어진다는 폭포를 보게 될 것이다.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발밑에 펼쳐질 구름밭과 산세를 바라보겠지.
앞으로 열두 시간 후면 제주에 도착한다. 제주에 도착하기 전에,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그의 유골을 뿌려야지. 비록 그의 뼈와 살은 아니지만 나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입으려 했던 흰옷이 그를 대신해 줄 것이다. 그는 시커먼 바닷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겠지. 수천 년 동안 수장되거나 뿌려진 영혼들과 뒤섞여 바다의 푸른빛을 이룰 거야. 그는 파도가 일렁이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바다를 떠돌다가 가끔 외딴 섬 자갈 틈새에서 숨을 돌리기도 하겠지.
유골함을 가져온다.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완전히 연소하지 않은 검은 덩어리가 유골함 속에 웅크리고 있다.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의 형상 같다. 등이 굽은 여자의 형상. 모골이 송연해진다. 유골함을 집어던진다. 바닥에 구른 유골함에서 검은 덩어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그 검은 덩어리가 무엇인지 잘 안다. 유골함에서 흘러나온 것은 나를 배반한 남자의 유골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속인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다.
갑자기 배가 심하게 기우는 것만 같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의 이름이 정말 고석기였을까? 그의 아버지가 제주에서 한라봉을 재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그날 그가 내게 오기로 한 것이 맞는가? 그가 나를 잊은 것이 아니라, 아예 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애초부터 나와 결혼하기로 한 남자는 없었다. 나는 그를 단 한 번 만났을 뿐이다. 어제 내가 그의 옷을 들고 등을 보이고 달아났을 때에야 그는 나를 기억해 냈을 것이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짐을 들어 주었던, 그래서 자판기 앞에 서서 캔 커피를 얻어 마셨던 곱사등이 여자를 떠올렸겠지.
고개를 세차게 휘젓는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곧 제주에 도착해 옥빛 바다를 보리라,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고…… 나는 상상할 수 없다. 현실은 내게 복종을 원한다. 상상력마저 폭군과 같은 현실에 무릎을 꿇고 만다.
가까스로 그 애가 누운 침대로 기어오른다. 등이 아파온다. 등뒤에서 바람 소리가 난다. 이불을 들치고 그 애 옆에 몸을 누인다. 등뒤에 닿은 그 애의 가슴이 따스하다. 후끈한 숨결이 속삭이듯 귓불을 간질인다. 나는 그 애의 숨결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어렴풋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이윽고 조용히 등을 어루만지는 그 애의 손길이 느껴진다.
사그락 사그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 누군가 갑판 이쪽과 저쪽을 휙휙 뛰어다니는 것 같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지만 갑판 위에는 아무도 없다. 간혹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풍향계의 금속성 파열음만이 어둠 속에 끼어든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배 하단 부위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를 본다. 누군가 뒤에서 등을 떠다밀 것 같아 난간에 기대지 않고 갑판 한가운데 서 있기는 어렵다.
바다와 하늘이 온통 검은빛이다. 바다는 쉽게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어둠에 익숙하다. 어둠 속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밤 언덕에 서서 들판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막막한 어둠, 들과 하늘의 흐릿한 경계. 청도의 들판. 어둠 속에서는 실체보다 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내 발 밑 어딘가 있을 엔진 소리, 탑 위에서 펄럭이는 깃발 소리, 환기 시스템 소리, 배의 항적(航跡)을 끝끝내 쫓아오는 물거품 소리. 어디선가 가냘픈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그 어렴풋한 소리에 집중하며 눈을 감는다. 어쩌면 이 소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바다에 뿌려진 유골의 주인들과 검푸른 물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의 넋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고깃배의 주인들이 서로의 몸을 쓰다듬으며 흐느끼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 뺨을 어루만진 그 손의 부름이었을까. 나는 뭐에 끌린 듯 불현듯 잠에서 깨어 갑판 위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지금 내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내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을 때 그녀가 조금 훌쩍였던가. 가녀리게 흔들리는 어깨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등은 침착하고 강인해 보였다. 굽은 뼈와 살 속에는 차마 내뱉어서는 안 되거나 표현되어질 수 없는 비밀과 전설이 숨어 있는 듯했다. 그녀의 등에 머리를 기대자 나는 한없이 편안해졌다.
누군가의 손길을 느끼며 밤의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철 난간에는 차가운 습기가 방울져 있다. 이 배는 농밀한 어둠을 가르며 어디쯤 지나고 있는 걸까. 왼편 어느 즈음에 내가 떠나온 청도가, 그리고 오른편으로 또 다른 청도가 있겠지. 나는 지금 청도와 청도 사이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향한다. 배가 제주에 도착하면 청도의 기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녀가 말한 바닷속 푸른 섬. 고통스런 기억과 과거를 지우는, 그런 곳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 그곳은 시간의 궤도를 벗어난 진공의 공간이겠지.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만의 공간.
그녀가 유골함을 들고 계단을 올라온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그녀가 내 옆에 선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밴 바다 냄새를 맡으며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는다. 그녀도 묵묵히 바다만 바라본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물거품 위로 붉은 유골함이 흘러가고 있다.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조금씩 사라지는 붉은 점을 좇는다. 그녀는 유골함을 보지 않는다. 그녀는 허공 어느 즈음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숨겨진 진실을 꿰뚫어 버린 후의 허망한, 방향감각을 잃고 한없이 떠도는 듯한 공허한 눈빛이다. 그녀의 남자와 청도의 기억을 품은 유골함은 어디에 가 닿을까. 바닷속 푸른 섬에 도착할까? 청어 떼가 춤을 추고 가오리가 너른 지느러미를 펄럭이는 푸른 섬. 그녀의 머리칼처럼 길고 가느다란 촉수를 흩날리며 춤을 추는 말미잘과 그 속에 숨은 흰동가리들도 있겠지.
검었던 바다가 갑자기 환해진다. 집어등을 밝힌 배 한 척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잠든 물고기들을 깨우는 환한 불빛들. 눈을 찌를 것처럼 강력하게 뿜어져 나오는 불빛 뒤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뱃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불빛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녀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다. 머리칼을 하늘거리며 조금씩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가 멀리서 손을 내민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자 시간이 멈춘 듯 사방이 고요해진다. 파도 소리도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집어등 불빛만이 환하게 빛난다. 발끝이 살짝 들린다. 나는 한없이 가벼워진다. 그녀와 나는 손을 마주 쥐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불빛을 돌며 춤을 춘다. ●
첫댓글 소설 잘봤습니다. 감사^^
꽃섬 봤어요? 이걸 읽는 내내 꽃섬이 생각 나네요..^^